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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엘리사벳의 노래! (눅1:39~45)

엘리사벳의 노래! (눅1:39~45)

 

누가복음 1장과 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노래가 모두 다섯 편 나옵니다. 첫째, 엘리사벳의 노래(눅1:42~45), 둘째, 마리아의 노래(눅1:46~55), 셋째, 사가랴의 노래(눅1:68~79), 넷째, 천사들의 노래(눅2:14), 다섯째, 시므온의 노래(눅2:29~32)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이번 주일부터는 성탄과 관련된 노래들을 한 편씩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첫 번째인 엘리사벳의 노래를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두 사람은 친척지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인 갈릴리에 살았습니다. 반면에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의 남쪽 지방인 유대에 살았습니다.

눅1:36 말씀처럼, 엘리사벳은 늙었습니다. 더군다나 엘리사벳은 처음부터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여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엘리사벳은 석녀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은 아들을 배었는데,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젊었습니다. 눅1:34 말씀처럼,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처녀요, 동정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의 태중에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을 배었습니다.

이와 같이 두 여자 모두 아이를 밸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자의 태중에 아들을 배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자연적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두 여자는 함께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엘리사벳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는 마리아(39~40절).


눅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이르렀습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놀라운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눅1:35 말씀과 같이,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실 것입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거룩한 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입니다.

물론 천사의 말이 마리아에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천사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의 징표를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이 아들을 배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엘리사벳은 늙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은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이 아들을 배었습니다. 그것도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사벳에게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천사가 말한 징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마리아는 빨리 산골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동네를 만들 때, 흔히들 산 위에 만듭니다. 예컨대 예루살렘도 산 위에 있습니다. 나사렛도 산 위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찾아간 동네도 유대의 산골에 있었습니다.

그 산골은 유대에 속했으니까, 아마도 그 산골 동네는 예루살렘 근교에 위치해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직선 거리만 해도 100km가 훨씬 넘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사나흘 정도 걸리는 먼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그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만큼 마리아는 얼른 그의 친족 엘리사벳을 만나서, 천사가 말한 징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사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눅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오늘 본문에 문안이라는 단어가 모두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40절과 41절과 44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세 번 모두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습니다. 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에게 문안하지 않고,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습니까?

우리말의 문안은 웃어른께 안부를 여쭙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문안은 그저 관례적으로 인사 치레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문안은 서로 간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예컨대 출18:7~8을 보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문안했습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모세는 그에게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이드로에게 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문안의 방식입니다.

분명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마리아도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절하며, 그에게 입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함께 집에 들어가, 마리아는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엘리사벳에게 고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난 후에, 엘리사벳도 자기에게 있었던 일들을 마리아에게 다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엘리사벳은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어서 불룩해진 그의 배를 마리아에게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안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때 사가랴는 어떠한 상태에 있었습니까? 눅1:20 말씀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눅1:62 말씀과 같이, 그는 귀머거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가랴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가랴를 일시적이긴 하지만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문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면서,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천사의 말이 엘리사벳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한 말은 마리아 자신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뛰노는 아이(41절 상반부).


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할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도 똑같은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습니다.

보통은 임신한지 5개월경부터, 아이가 모태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태동(胎動)이라고 합니다. 지금 엘리사벳은 임신한지 여섯 달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복중에서 태동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 태동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본문 44절을 보면, 이 때 아이는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때 아이가 복중에서 뛰논 것은 단순히 그의 몸을 뒤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엘리사벳의 복중에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며,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눅1:15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했습니다. 왜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선지자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는 복중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기 때문에, 전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요3:29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그가 신랑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랑의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늘 충만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기쁨, 곧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세례 요한에게는 모태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으로, 복중에서조차도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으로 뛰놀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늘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생기는 충만한 기쁨으로 뛰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마리아는 먼저 엘리사벳의 증언을 통해서 천사의 말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기쁨으로 뛰노는 것을 통해서도, 천사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노래하는 엘리사벳(41절하~45절).


눅1:41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이 그 사람을 온전히 주관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예언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눅1:67을 보면,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언했습니다. 또한 벧후1:21에 의하면,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예언이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엘리사벳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는 또다시 천사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눅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의 목소리를 높여서 크게 외쳤습니다. 엘리사벳의 마음이 그만큼 감격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전해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외침은 하나의 노래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한 마디로 축복송입니다. 그의 노래에 나타나는 축복의 대상은 모두 넷입니다. 첫째, 마리아, 둘째, 마리아의 태중의 아이, 셋째, 엘리사벳 자신,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노래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이는 히브리 어법으로 최상급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여자들 중에서 마리아가 가장 복이 있는 여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여자의 복은 그의 자녀들을 보고서 판가름을 합니다. 눅11:27에서 한 여자가 마리아를 가리켜서 했던 말과 같이, 마리아가 가장 복이 있는 이유는 그가 가장 위대한 아이를 배었고, 또한 그가 가장 위대한 아이에게 젖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그의 태중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리아가 여자들 중에서 가장 복이 있는 여자라고 큰 소리로 노래했던 것입니다.

물론 눅1:15 말씀과 같이, 세례 요한도 주 앞에서 큰 자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을 밴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밴 마리아와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세례 요한은 피조물인 인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엘리사벳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자기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이 세상 모든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크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여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 이어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도 복이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물론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 것입니다.

마리아가 여자 중에서 복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그만큼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엘리사벳의 말을 들으면서,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또다시 확인했을 것입니다.


눅1: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엘리사벳은 자기 주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자기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워서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엘리사벳에게 지극히 큰 영광이며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이번에는 그 자신이 받은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서,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주라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이는 그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는 “주”라는 단어가 3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뜻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여기서 밝힌 것입니다.

물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나의 주”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내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히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을 낳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 한번도 마리아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낳았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인성을 낳았을 뿐, 예수님의 신성을 낳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나의 주”라고 부르거나,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마리아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구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신성화시키는 것은 명백한 우상 숭배의 죄에 해당합니다.


눅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4절 말씀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태중에 있으며 또한 자기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습니다.

이 때 엘리사벳도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그의 복중에서 아이가 태동하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아이가 기쁨으로 뛰노는 것임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5절을 보면, 마지막 네 번째 축복의 대상이 등장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그 여자”는 일차적으로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사가랴는 믿지 못해서, 한 동안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믿었기에, 그에게는 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엘리사벳은 44절 말씀과는 달리, 2인칭을 사용해서 “믿은 너에게”라고 말하자 않았습니다. “믿은 그 여자에게”라고 하면서, 3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믿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의 노래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떠난 후, 마리아는 즉시 그의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천사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세 가지로 천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엘리사벳을 통해서였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엘리사벳은 아들을 배고 있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을 통해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며,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벳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큰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바로 이 때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첫 번째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서, 천사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그의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모둔 의문들을 깨끗하게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믿음은 확고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엘리사벳처럼, 큰 소리로 믿음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의 노래를 늘 즐겁게 부르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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