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의 노래! (눅2:25~35)
누가1복음 1장과 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노래들이 다섯 편 나옵니다. 엘리사벳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사가랴의 노래, 천사들의 노래, 그리고 시므온의 노래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다섯 번째인 시므온의 노래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흔히들 마리아의 노래를 가리켜 “마그니피캍”이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 된 노랫말에서 맨 처음 나오는 단어를 딴 것인데, 그 뜻은 “찬양하며”입니다. 또한 같은 식으로 사가랴의 노래를 가리켜 “베베딕투스”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찬송하리로다”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므온의 노래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고 불립니다. 라틴어로 눈크는 “이제,” 그리고 “디미티스”는 “주” 곧 “주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29절에 있는 대로, “주재여 이제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선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부터 잠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눅2:21 말씀처럼, 아기 예수님은 난지 팔 일이 되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눅1:31에서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후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40일이 되었을 때입니다. 눅2:22 말씀이 밝히고 있듯이, 그 때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산모 마리아의 정결예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2장을 읽어보면, 산모가 아들을 낳으면 40일간을, 또한 딸을 낳으면 80일간을 부정했습니다. 그 기한이 차면, 산모는 성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드리면서, 정결예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또 하나는 눅2:23 말씀과 같이, 첫아들로 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기에,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 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민3:47 말씀처럼, 요셉과 마리아는 속전으로 다섯 세겔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아무튼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시므온을 만났습니다. 그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므온의 노래입니다.
첫째로, 시므온에 대한 설명입니다(25~27절).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창29:33 말씀처럼,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가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는 것은 행위를 바르게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롬3:20 말씀처럼,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 곧 칭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떨 때 의롭다고 여기십니까? 내가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해야 합니다. 또한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줄 알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모든 죄 값을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시므온은 또한 경건했습니다. 이것은 성화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칭의 후에는 경건 곧 성화가 절로 따라옵니다.
둘째,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대교는 형식과 외식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다윗의 언약도, 아브라함의 언약도, 새 언약도 다 성취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는 위로가 넘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이 시므온 위에 계셨습니다.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도 성령님이 시므온 위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성령님이 시므온 위에 계시기 때문에, 시므온에게 나타났던 특별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므온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고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시므온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눅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물론 시므온은 그리스도, 곧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던 시므온이 성령 하나님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전에 메시야가 오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은 그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게 될 정확한 날짜와 정확한 시간은 지시해주지를 아니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때부터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고자 갈망하면서, 하루하루 큰 기대와 설렘에 싸여서 살았을 것입니다.
눅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미 살펴본 대로 시므온은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시므온은 성령님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울러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시므온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때마침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그 곳으로 왔습니다. 율법의 관례대로 마리아의 정결예식을 행하며, 또한 첫아들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위한 속전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요셉과 마리아도 시므온을 전연 몰랐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해진 때와 정해진 장소에서, 그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므온은 랍비도 아니었고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기관도 아니었고 바리새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노인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증인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으면서, 날마다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을 존귀케 하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시므온의 노래입니다(28~32절).
눅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성령님의 감동으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얼른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와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메시야를 만나러 이 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이 아기에 대하여 내게 말씀해주십시오.”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말,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의 증언, 그리고 베들레헴 목자들의 전하여준 소식 등등을 시므온에게 일러주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서, 큰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재여 이제는.” 라틴어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시므온의 노래를 가리켜 “눈크 디미티스”라고 부릅니다. “말씀하신 대로.” 성령 하나님은 시므온에게 그가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므온은 그의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품에 안는 영광까지도 누렸습니다. 물론 그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장차 그가 메시야의 품에 안기게 될 사실일 것입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한 마디로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은 오직 이 순간을 바라보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메시야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도 좋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시므온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아기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자기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결코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므온은 그의 노래를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노래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다른 노래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여기서 “만민”이라는 단어와 “이방”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으로 이스라엘을 타락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아울러 남방 유다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원수처럼 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야가 오시면, 메시야가 자기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놀랍게도 메시야의 구원은 이방도 포함되는 만민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시므온을 통하여 처음으로 계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여러 번 밝혔습니다. 예컨대 사9:2 말씀을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이방을 가리킵니다. 장차 이방은 큰 빛, 곧 메시야가 비추는 구원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야를 가리켜서 종종 “이방의 빛” 또는 “만민의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컨대 사42:6, 49:6, 51:4 등입니다.
물론 메시야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시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영광은 앞에 나오는 “이방의 빛”에 사용된 “빛”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영광은 쉐키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광의 빛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시는 구원의 빛이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 이스라엘도 구원하시는 영광의 빛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주의 구원이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밝혔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요셉과 마리아의 반응입니다(33~35절).
눅2: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 동안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서, 그리고 베들레헴의 목자들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는 말이었습니다. 모두 다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므온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실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놀람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눅2: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눅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축복했습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메시야가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받았음을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시므온은 마리아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이 때 시므온이 요셉에게는 말하지 않은 이유는 요셉이 일찍 죽을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모습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요셉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살면서, 예수님이 당하실 모든 고초를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마리아가 앞으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경험하게 될 일들을 네 가지로 말해주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패하여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흥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 패함을 입게 될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서 패함을 받게 될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방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며, 예수님을 미워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이 모든 것을 다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비방을 받으신다면, 마리아는 그래도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작 바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비방을 받게 되실 것이라는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마리아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마리아가 앞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 고생을 많이 해야만 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첫 표적을 행하신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동생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으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마리아를 멀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이와 같은 개인적인 일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같은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하게 박해하는 것을 보기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리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문자 그대로 칼이 그의 마음을 찌르듯 했을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겉은 깨끗해 보였지만, 그들의 속은 더럽고 탐욕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속을 밝히 드러내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십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온전하신 의를 주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는 것을 싫어하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죄를 그대로 안고 죽어야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한 해가 저물었듯이, 우리의 인생도 저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도 “주재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고백하면서, 우리의 눈이 예수님의 구원을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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