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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목장교회

목장주일(엡2:12-22) 2011.5.29(일) 목장, 하나님의 가족

목장주일(2:12-22) 2011.5.29()
목장, 하나님의 가족

오늘 교회에서 만나 반갑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생활은 행복합니까? 오랫동안 의좋게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가 결혼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 기자가 찾아가 노부부를 인터뷰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50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50년이나 의좋게 살아오셨는지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간단하지. , 우린 결혼하자마자 한 가지를 약속했어요”. “무슨 약속인데요?” “중요한 일들은 내가 결정하고 사소한 일들은 아내가 결정하기로”. “, 그래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정하셨는데요?” ”뭐 그러니까 아내는 이런 것을 결정했어요. 우리가 어디서 살아야 할지, 애는 몇 명을 낳아야 할지. 직장은 언제 그만 두어야 할지, 집은 언제 이사갈지. 아이들은 어떤 배우자와 결혼할지. 여생은 어떻게 살지“. ”, 그러면 할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지요?“ ”? 나는 좀더 큰 것을 생각했지. 지진해일, 지구온난화 방지대책, 아프리카 기아문제, 중동 평화문제, 남북 대화문제, 주로 이런 것을 생각했지”. 결국 할머니가 다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은 큰 데서 온다는 생각입니다. 언제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작은 것입니다. 큰 것이 큰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큰 행복을 가져옵니다. 행복도 불행도 작은 데서 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이순신 장군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입니다”. "간디입니다”. “테레사입니다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우선은 부모입니다. 학교 단짝 친구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주기철 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영향력을 준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늘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입니다. 내가 속한 목장의 목자입니다. 항상 만나는 목원입니다. 담임목사님은 아닙니다. 담임목사는 교인에게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영향력은 가까운 사람들이 줍니다. 선교회 회원입니다. 목장식구들입니다. 항상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말 교회 생활 행복하게 하려면 가까운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합니다. 교회 생활 잘 하려면 교회안에 가까운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목장주일을 맞아 우리가 교회안에서 정말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는 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좋은 데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 분위기는 좋은 데 외롭다는 분도 있습니다. 이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통하여 교회 생활이 훨씬 더 즐겁고 행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을 위하여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한 것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두 종류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다음은 사람과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믿고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가까워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사람도 가까워진 것입니다. 가까워졌다면 한때는 멀리 지냈다는 말입니다. 누구와 왜 멀리 지낸 것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은 의도하지 않았는 데 나도 모르게 지은 실수입니다. 죄는 의도적인 반역입니다. 허물은 실수입니다. 죄는 악의입니다. 허물은 사람앞에 지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앞에 지은 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막혔습니다. 하나님과도 막히고 사람과도 막혔습니다. 막혀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밖으로 나오고 이스라엘 밖으로 나오고 약속으로부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하나님 구속을 안 받은 것 같고 내 마음대로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습니다.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면 좋을 것 같아도 힘들 듯이 하나님 떠나면 외롭고 처량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이 찬송대로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야 하겠는 데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때 도와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그가 와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다시 13절입니다.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를 자신의 피로 씻어주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하나님과 가깝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열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가 사라져 하나님과 통하게 되고 예수님 피로 담이 사라져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을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어느 목회자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부임했는 데 그가 부임하자 인사차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가정을 갔더니 부인이 없어서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참 있다 집에 돌아온 부인이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새로운 목사님이 무엇이라고 묻던가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여기 사시냐고 묻더군”.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질문은 없었어요? ”“, 별 다른 질문은 없었어. 예수께서 여기 사시냐는 질문이 전부야.” “아니지요.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나가냐고 물었겠죠”.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런 질문은 안하셨어. 예수께서 여기 사시냐고만 물었어”. “당신이 잘못 들었겠죠. 매일 성경 읽으며 기도도 열심히 하냐고 물었겠죠”. “아니, 그런 것도 안 물어보셨어”. “정말 답답하네요. 당신의 직분이 무엇이냐 주일은 꼬박꼬박 예배나가느냐 물었겠죠”. “아니라니까. 그런 질문은 안했다니까. 딱 한 마디만 물었다니까. 예수께서 여기 사시냐고”.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늘 예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내 안에 사시게 해야 합니다.

 

최근에 저는 책 한 권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레너드 스위트가 쓴 예수선언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쓰인 한 구절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좋아하지만 교회는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는 교회만 좋아할 뿐 예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을 예리하게 지적한 말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좋아하는 데 교회는 예수님은 좋아하지 않는다”. 힌두교인인 인도의 간디도 예수님을 인류의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대화의 철학자 유대인 마틴 부버도 예수님을 Big Brother, 대형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웬만한 세상 사람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님보다 교회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 통하여 사람과 가까워 지고 예수님 위하여 서로 사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가족은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가족은 누구입니까? 가족은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19절을 보시겠습니까?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권속은 가족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피를 나눈 사람들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온 자녀들입니다.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아버지가 같으면 우리는 형제입니다. 아버지는 형제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원합니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가족중에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능력있는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능력있는 가족이 능력없는 가족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자는 약한 자입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존 웨슬리의 어머니는 19남매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19남매는 너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로서 어떤 자식을 가장 사랑합니까?” 웨슬리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 하느냐고요? 아픈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사랑하고 집 나간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이 돌아올 때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명절때마다 가족들이 모입니다. 어느 가정에도 가족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너무 차이가 납니다. 남편은 건축하는 사람인데 요즘 일이 없어서 놀고 있습니다. 요즘은 술까지 마십니다. 언제나 입에 술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아내는 일류 대학 출신인데 은행 지점장입니다. 스마트합니다. 이 부부는 나란히 앉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성공했다고 가정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셋인데 큰 아들은 서울법대를 다닙니다. 둘째는 야간대를 졸업하고 회사다닙니다. 셋째는 대학에 몇 번 떨어지고 지금은 놉니다. 그렇다고 누구도 셋째 아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족들의 마음에 늘 걸린 것은 셋째 아들입니다. 만일 부모가 돈이 있어 도와준다면 셋째 아들입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가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능력없는 자가 소중히 여김을 받고 아픈 사람이 더 사랑받습니다. 그래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족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가족이란 내가 돌아가면 언제든지 받아주는 곳이다”.

 

그래서 가족은 늘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특징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항구에서 배가 떠납니다. 그런데 그 배가 떠나기 전에 한 할머니가 급히 내리더니 한 소년에게 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내가 배타고 멀리 가는 데 배가 떠날 때 내가 손을 흔들어 줄 수 있겠니? 내가 10파운드 줄게”. 소년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할머니”. 배가 붕하고 떠나자 할머니가 배위에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소년도 손을 흔들었습니다. 할머니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외로운 할머니, 가족이 없는 할머니에게 손흔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도 세상 살아가면서 외롭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온 것도 사실은 외롭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줍니다. 그러나 말씀만 가지고 안됩니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 멀리 떠날 때 눈물 흘리며 손흔들어 줄 사람, 아플 때 찾아와주는 사람,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그것도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람마다 외로워 교회왔는 데 교회는 왔는 데도 공동체에는 가입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 출석자의 평균 20%가 등록하지 않고 교회 다닙니다. 그리고 등록 교인의 20%가 목장, 구역에 소속되지 않습니다. 목장에 소속되었어도 목장모임에 참석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사람은 또 적습니다. 대략 등록교인의 절반 정도가 목장에 나와 사랑을 나누고 절반 정도는 주일날만 나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편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깁니다. 우선 소속감이 없습니다. 어느 때나 문제가 생기면 떠납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사랑할 기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위기를 맞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혼자 힘들어 하고 고민하다 스스로 발길을 끊습니다. 친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친구가 필요해서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주일예배만 가지고 안 됩니다. 목사님 설교만 가지고 안됩니다.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T.V에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습니다. 우연히 보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윤복희가 불렀던 노래를 어떤 가수가 불렀는 데 그야말로 심금을 울렸습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오오.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이상하게 그 노래는 제게 찬송가처럼 들렸고 그 목소리는 예수님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까지 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어디서 눈물 흘리겠습니까? 교회까지 와서 외로움을 해결하지 않으면 어디서 해결하겠습니까? 밖에서 해결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허전하고 쓸쓸할 때 세상의 누가 벗이 되겠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 제가 썻습니다. 우리 교회 경다현 권사님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 경다현 권사님이 어느날 병원에 갔는 데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이었습니다. 평소에 건강하고 운동도 많이 하신 분이라 우리의 충격이 컸는 데 권사님 자신은 얼마나 충격이 컷겠습니까? 울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께 원망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울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6개월에 걸친 긴 항암치료를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6개월이 얼마나 길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본인 말대로 6개월은 6년같고 60년 같았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권사님은 온갖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구토와 탈모, 몸이 붓고 건조해지는 것과 통증, 이어 힘겨운 방사선 치료도 이어졌습니다. 그 긴 9개월,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웠는 데 본인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치료가 끝나 회복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가 있습니다. 목장모임입니다. 권사님은 몸이 아프지만 빠짐없이 목장모임을 인도했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는 나올 수 있는 데까지 나와 목장모임을 인도하고 목원들을 대접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그렇게 했습니다. 그 결과 처음 12명으로 시작한 목장이 21명이 되었습니다. 암환자가 매주 목장을 돌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권사님은 목자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목원들의 위로와 기도와 사랑이라는 축복입니다. 그가 목장을 위해 수고했지만 그는 은혜를 끼친 것만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플 때 늘 목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목원들의 기도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허전하고 쓸쓸할 때이것이 목장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예수님이 죽어 낳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사는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목장에서 사랑을 나누십시오.

행복한 신앙생활은 설교만 가지고 안됩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은 주일예배만 가지고 안됩니다. 목장모임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목장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합니다. 목장은 우선 말을 듣는 곳입니다. 말하기 전에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자는 말을 잘 듣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을 잘 들으면 말을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장은 말하는 곳이고 말듣는 곳입니다. 한 주간동안 너무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목장에 와서 마음을 엽니다. 자기의 속마음을 터놓습니다. 이것이 되면 목장은 됩니다.

 

다음은 기꺼이 도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도 혼자 사는 사람이 없고 혼자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아는 것이 다르고 관심사와 전문성이 다릅니다. 따라서 서로 아는 것을 내 놓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판교같이 처음 이사온 경우는 서로 모릅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목장은 서로 돕는 곳입니다. 갓태어난 아기를 돌봐줄 수 있습니다. 자녀를 차에 태워 학교에 등교시킬 수 있습니다. 손님이 와 바쁠 때 음식을 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 전공분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큰 것만 돕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 돋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음 짐을 같이 져주는 것입니다. 6:2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 짐이 무겁기 때문에 나누는 것입니다. 무겁지 않은 일은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 바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같이 일합니다. 마음이 아파 혼자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열고 짐을 져줍니다. 몸이 아파 입원합니다. 그때 병원을 방문합니다. 기쁠 때 같이 기뻐하면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면 슬픔이 반으로 줍니다. 이 그림을 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음 죄에 빠진 사람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심해서 할 일이지만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칭찬은 공개적으로 하고 지적은 개인적으로 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준엄한 훈계만큼 사실 자비로운 것은 없습니다. 이 경우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가 됩니다. 한 목장에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목자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없어 두끼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를 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술의 여러 가지 폐해를 말하고 자기도 옛날에 술 때문에 실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자 눈물이 나왔습니다. 목장식구가 그 말을 듣고 술을 끊었습니다. 사랑의 훈계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목장이 영적인 목장이 되려면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으려니와, 너희가 누구의 죄든 풀어 주지 않으면 매인 대로 있으리라.”. 죄는 속성상 숨어 있기를 좋아 합니다. 죄는 본질상 드러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마귀는 죄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하여 죄를 숨어 있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죄에 배후에 자신을 숨기고 있던 마귀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깁니다 죄의 뿌리는 또한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면 높아진 자기가 낮아집니다. 그래서 마귀가 패합니다. 죄의 고백은 최고의 겸손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교만하여 죄를 고백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죄를 고백하면 마귀를 이깁니다.

 

오늘날의 목장혹은 구역은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리가 1738년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신앙운동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을 5~10명 정도의 작은 모임으로 조직했습니다. 이것을 밴드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두 개의 모임을 가졌는 데 매주 한번은 수요일 저녁에, 한달에 한번은 주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매주 모임은 죄의 고백을 위해 모이고 매달 모임은 애찬을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매주 수요일에 모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병자와 서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모든 참석자는 서로의 영적 상태를 숨김없이 털어 놓았습니다. 한 주간의 영적 삶을 돌아보며 지은 죄가 있으면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시험에 빠졌던 일, 영적 싸움에서 겪은 고통이나 승리, 시험에서 이기게 해주시는 은총의 경험등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나중에 감리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한 교회생활을 위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교회를 식당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좋은 것을 선택해서 먹고 먹을 것이 없으면 떠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등록하지 않고 다니면 책임은 없지만 동시에 신앙도 자라지 않습니다. 신앙은 책임가운데 자라고 책임가운데 성숙합니다. 교회는 설교듣는 곳이 아니라 사랑받고 사랑하는 곳입니다. 소속하지 않으면 사랑할 기회도 사랑받을 기회도 없습니다. 교회의 어떤 상황에 따라 반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반응하십시오. 필요해서 교회를 옮길 수 있으나 자주 옮겨심는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혹시 교회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 교회로 보내신 것입니다. 식물도 떨어진 곳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듯이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이 보낸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야 합니다. 혹시 상황에 따라 교회를 옮길 수 있으나 상처를 받고 떠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스스로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혹시 상처를 받았어도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상처 때문에 교회 떠나면 또 다른 상처가 기다립니다. 이혼한 커플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면 60%가 다시 이혼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파트너는 바뀌어도 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은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옮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은 체질로 나를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교회 모든 행복과 불행은 작은 일 때문에 생깁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고 돌아온 한 탐험가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번에 40일동안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셨는 데 가장 힘든 것은 무엇입니까? 날씨입니까? 물입니까? 체력입니까?" 탐험가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40일 동안 가장 힘든 것은 운동화속에 들어간 모래였습니다. 그 놈의 모래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신발 벗어서 모래를 털어내면 또 들어오고 털어내면 또 들어오고. 얼마나 따가운지 몰라요“. 40일 사하라 사막에서 가장 힘든 것은 찌는 듯한 날씨도, 물도, 지친 체력도 아니었습니다. 운동화속에 들어간 모래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과 만나면 그 사람들이 가끔 운동화에 들어간 모래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려면 모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막에 있는 모래를 없앨 수 없다면 모래를 털고 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래 때문에 신발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모래와 싸우지 말고 사막과 싸워야 합니다.

 

행복한 신앙생활, 이렇게 하십시오. 교회에 등록하십시오. 책임과 사랑을 갖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가십시오. 거기서 친구를 기다리지 말고 친구를 사귀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을 위하여 사랑하십시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목장은 사랑의 가족, 여러분의 교회 생활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목장주일(2:12-22) 2011.5.29()
목장, 하나님의 가족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가족은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여러분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오오.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목장에서 사랑을 나누십시오.

*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십시요.

* 기꺼이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6:2,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

* 죄에 빠진 사람을 훈계하십시오.

* 서로 죄를 고백하십시오.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으려니와, 너희가 누 구의 죄든 풀어 주지 않으면 매인 대로 있으리라.”.

*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