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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목장교회

행18:1-11 2012.1.8(일)목장교회, 무엇이 다른가?

 

18:1-11 2012.1.8()

목장교회, 무엇이 다른가?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교회로 돌아가는 비전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역사상 가장 먼저 생긴 교회이고 가장 이상적이며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행하면서 어떤 가이드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그는 두 시간정도 자유시간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자유시간입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만날텐데 혹시 길을 잃으면 이렇게 하십시오. 먼저 그 자리에 멈춰서십시오. 더 가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던 길의 반대편으로 곧장 걸어 오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처음 헤어진 곳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때는 벌로 들었는 데 생각할수록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방황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아우성입니다. 길이 문제가 아니라 길을 잘못 가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자리에 멈춰서야 합니다. 더 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아 우리가 떠났던 처음 교회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 처음 교회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교회가 우리가 처음 떠난 교회입니다.

 

이태리 피렌체에 가면 우피치 미술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등 세계적인 명화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미술관장이 보았더니 그림 하나가 칠이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작품이 칠이 벗겨지면 안되기 때문에 관장은 화가를 시켜 빨리 보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화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품을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벗겨지고 있는 칠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까 속에 또 하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까 그 속에 있는 그림이 진짜입니다. 벗겨진 칠은 누군가가 그 위에 덮어쒸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다 벗겨진 것이 아니라 마땅히 벗겨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화가는 조심스럽게 칠을 벗겨냈습니다. 드디어 화려한 원작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그런 질문을 합니까? 교회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처음 사도행전교회와 같은가? 우리 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85년입니다. 언더우드, 아펜셀러 두 명의 미국 선교사에 의해 들어왔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가져온 전통, 가치, 신조, 관습등은 127년전 미국에서 온 두 분 선교사의 영향에 힘입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기독교가 2천년전 사도행전 교회와 같은가? 저는 본질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당 부분 달라졌습니다. 원작위에 칠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벗겨내야 합니다.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교회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가정에서 모이고 거기 모인 사람은 서로 가족이 되었습니다. 2:46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5장에 또 나옵니다.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성전은 지금의 교회건물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예배를 위해 모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교회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 성도들은 주로 모인 곳은 집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8:2절 후반부터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당시 바울은 그리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막 도착했습니다. 문제는 고린도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연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초청으로 바울은 그들의 집에 들어갔고 그 집에 살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과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들이 천막을 만들면서 오손 도손 살아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주야로 같이 살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말씀을 공부하며 함께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처럼 길고 딱딱한 예배는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묵도, 찬송, 기도, 설교, 성가대 찬양, 축도와 같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간증으로 말씀을 나눴고 성경을 읽고 각자 받은 은혜를 나눴을 것입니다. 간증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대부분 간증예배입니다. 2장에서 베드로가 성령받고 간증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결과 3천명이 모였습니다. 7장에서 순교를 앞둔 스테반이 간증으로 설교합니다. 그 설교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9장에서 바울이 예수님만난 후 가는 곳마다 간증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곳곳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간증이 중요합니다. 주일마다 다른 사람의 간증을 잘 듣고 내 간증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교회는 가정교회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들이 사용했던 용어는 대부분 가족용어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살전2:11절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바울은 자신을 목회자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의 제자 디모데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대했다고 말합니다.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때로는 자신을 어머니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네시모의 경우입니다. 10,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육적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낳은 것입니다. 바울은 때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됩니다. 디모데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오네시모에게는 어머니가 됩니다. 자신을 목회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목회자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시나요? 가끔 목회자로서 가슴아플 때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목회자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면 따를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존경할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멀리 갈 때 인사하고 갈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문제가 있을 때 상의할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어떤 경우에도 순종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를 사모합니까? 목회자는 아버지가 되고 성도들은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자녀처럼 사랑하고 성도는 목회자를 아버지처럼 따라야 합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가정이요 영적 아버지가 있어야 사도행전 교회입니다. 목회자가 아버지라면 성도는 누구입니까? 형제입니다. 바울서신에는 형제란 말이 114번이나 나옵니다. 15:14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로마의 성도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2:25에서 에바브로디도를 이렇게 부릅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에바브로디도는 나이로 보나 신앙연조로 볼 때 바울의 아들뻘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를 형제라 부릅니다. 4:1,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4:7에서 두기고에게 말합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안에서 함께 종된 자니라”. 두기고는 바울의 비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바울은 형제라고 부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서로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장로님”, “집사님”, 호칭을 부릅니까? 사도행전 교회는 형제”,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누구든 한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부르지 않겠습니까?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했답니다. 교회안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님”, 적으면 아우님이랍니다. 어느날은 옆에 아버지가 있는 것을 모르고 형님하고 불렀답니다.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을 한번 불러 볼까요? “형님, 아우님”, 나이를 잘 살펴야 합니다.

 

시골에서 목회할 때 나이 많은 노총각 한 분이 결혼했습니다. 목장식구들이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신부는 중국여자였습니다. 처음에는 문화의 차이, 언어의 문제로 결혼이 힘들었습니다. 막상 결혼이 결정되자 또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문제입니다. 집값이 너무 비싸 전세집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목장식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월세를 끼고 간신히 전세로 들어갔습니다. 얼마후 신혼여행을 떠나는 데 목장식구들이 교회 봉고차로 모두 김포공항까지 배웅했습니다. 비행기가 떠나자 너도 나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습니다. 목자는 하도 많이 울어 눈이 벌겋습니다. 왜 운 것일까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왜 운 것입니까? 믿음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동생이 나이 40에 장가도 못가고 있다면 누나로서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친신만고 끝에 장가를 갔다면 누나가 얼마나 눈물이 나겠습니까? 그것이 가족입니다.

 

가끔 병원 심방을 가보면 목자가 먼저 와 있습니다. “목사님, 오셨어요?” 인사합니다. 조금 미안합니다. 예배드리고 떠날 때가 되면 또 따라 나오면서 목사님, 먼저 가세요합니다. “아니, 안 갑니까?”하면 , 조금 더 있다가 갈께요”.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교회에서 이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이것입니다. 맹인 가수이면서 작사가인 켄 미드머가 부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착하고 덕스런 모습으로 당신의 기억에 남기 위해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언제나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또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곳이 바로 목장입니다. 그곳이 바로 사도행전 교회입니다.

 

서로 돌보았습니다.

사도행전 교회가 지금의 교회와 다른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서로 서로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16개월을 머문 후 또 선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았습니다. 이번 행선지는 터키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에배소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브리스 길라, 아굴라, 잘 있어요. 그동안 감사했어요하는 데 두 사람이 부시럭 부시럭 따라 나섭니다. “아니, 어디 가요?” 했더니 선생님과 함께 가려고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예 바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려고 길을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에배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에배소에 아볼로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학한 장래가 촉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 지식은 많은 데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어떻게 했습니까? 18:26절 중간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니라”.

 

여러분, 아볼로를 바울이 돌보지 않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돌보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냥 돌본 것도 아닙니다. 데려다가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대일 양육을 한 것입니다. 평신도를 평신도가 양육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바울은 바울대로 바빳을 것입니다. 바울은 목회자로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 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선교지 에배소에 와서 효과적인 선교전략도 짜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평신도 훈련시켜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누가 양육했습니까? 평신도가 평신도를 양육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교회가 한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일날 교회와서 목사님 설교만 듣고 가면 끝난다고 생각합니까? 모든 일은 목회자가 하기 때문에 우리는 궂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목회자가 격무에 시달립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가 하루 16시간, 20시간씩 일합니다. 한 주간에 하는 설교만도 10번이 넘습니다. 가르치는 일은 더 많습니다. 거기다 각종 회의, 행정, 예산, 재정, 건축, 다 신경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누가 새가족은 돌보고 누가 전도는 합니까? 신자인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심방은 누가 해야 합니까? 목자가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누가 돌봅니까? 장로, 안수집사님이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의 집의 큰 아들들입니다. 큰 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의무도 있습니다. 동생들을 돌봐야 합니다. 동생들 돌보라고 큰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면 큰 아들이 더 애기입니다. 막 태어난 어린동생을 업고 있는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며 엄마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엄마는 날 미워한다고, 우리 아빠는 나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다닙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신도가 평신도를 돌보았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은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목장교회 시스템입니다. 목장교회 목자는 마치 개척교회 목회자와 같습니다. 작지만 교회입니다. 세포가 작다고 세포가 아닌 것이 아닌 것처럼 신자가 적다고 교회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 모시고 예배하고 교육하고 친교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면 교회입니다. 그 일을 평신도들이 모여서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 일의 중심에 있습니다. 목자는 목회자에게 배우면서 영혼의 코치로서 목장을 돌봅니다. 10:24절을 보시겠습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돌아보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2:44-45을 보시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믿는 사람이 나눴습니다.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 사도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직접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았습니다. 목회자가 직접 새신자를 데려다가 일대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평신도가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했습니다.

 

여러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양육한 아볼로가 훗날 어떤 인물이 된지 아십니까? 제가 고린도를 1999, 2002, 두 번 갔습니다. 옛 고린도는 무너지고 그 뿌리에서 자란 새 고린도가 아름답게 서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고린도 교회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서자 입구에 특이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슨 이름인가 하고 보았더니 역대 고린도 교회 목회자 이름입니다. 1대는 사도 바울, 2대 아볼로, 3대 실라, 4대 소스데네, 이런 순서로 나가 지금은 88대입니다. 그중에서 2대 아볼로의 이름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아볼로가 바울을 이어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사람을 키웠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그 목회자 명단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목회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목회자를 키웠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양육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아볼로가 바울에 이어 고린도 교회 영적 지도자가 되었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것이 평신도 교회의 영광입니다.

 

목장교회는 이런 꿈을 가진 교회입니다.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사람을 세우는 꿈, 내가 양육한 그 사람이 나중에 아볼로같은 사람이 되어 교회와 역사를 빛내는 꿈, 목장교회는 그래서 평신도 교회입니다. 평신도의 자생력을 높혀 평신도가 주인이 된 교회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의 위기의 원인을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평신도가 저들이 받은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는 것과 또 하나는 목회자가 지나치게 교회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의 평신도는 단지 교회 출석하는 교인일 뿐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너무 분리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는 자요 평신도가 교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순교한 사람은 평신도 스테반집사였습니다. 유다, 사마리아 지역에 최초로 전도한 사람은 평신도 빌립집사였습니다. 바울과 함께 세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은 평신도 바나바였습니다.

 

목장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을 회복하여 평신도가 신바람난 교회를 만듭니다. 지난 목회자 세미나 때 일입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목사 한 사람이 세미나 도중 열심히 일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바닥부터 모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하도 열심히 일해서 아마 이 교회 관리집사인가보다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회는 장로님이 그렇게 일하느냐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장교회는 목회자보다 평신도가 더 많이 일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정말 평신도 여러분이 우리 교회의 스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로서 유명한 전도자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로 유명한 교수, 학자, 사장, 기업가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목장교회가 잘 되면 그렇게 됩니다.

 

선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교회가 우리와 달랐던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가 선교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 나가고 안정되면 안주하기 쉽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중의 하나는 편의주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교회 소비주의라 불렀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안밖에서 생산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 돌아다니며 뭐 좀 먹을 것이 없나 살핀다는 것입니다. 마치 인터넷 셔핑을 하듯이 백화점 쇼핑을 하듯이 이 교회에 저 교회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똑 따먹고 헌신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군데에 맛있는 것이 있으면 그리 몰렸다가 맛이 떨어지면 다른 집으로 옮기는 식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주하지 않고 모험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보세요. 이들은 본래 유대인입니다. 181-2절을 보겠습니다. “그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안정된 삶을 갈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터키 북쪽에 있는 본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이들은 직업을 따라 로마로 갔고 로마에서 유대인이라고 쫓겨나니까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을 만나고 인생의 참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6개월 후에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자 바울을 따라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18:18절을 보실까요?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여러분, 바울과 함께 떠나는 브리스길라 부부를 보십니까? 안정을 원했으면 떠났겠습니까? 선교는 모험의 길인 데 얼마나 고생하려고 바울을 따라 나서는 것입니까? 그 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이들은 바울과 함께 있다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갈 때 거기까지 따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런 말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16:3-4,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나를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은 사람”, 이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습니다.

 

목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목장교회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교제하지만 우리는 다만 교제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종종 경험한 것입니다만, 군대에 있으면 종종 배우, 가수들이 위문공연을 옵니다. 가끔 조영남, 인순이같은 같은 가수도 오고, 요즘으로 말하면 소녀시대, 원더걸스같은 아이돌도 옵니다. 군인들이 열광을 합니다. 우리 작은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용사인데 그가 월남에서 가장 위로받았던 시간은 이미자, 최희준, 나훈아, 남진같은 가수가 올 때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소녀시대 공연 보려고 군대간 것입니까? 나훈아 노래 들으러 월남간 것은 아니잖습니까? 우리에게 교제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교제를 위해서만 목장교회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 목장에 모이고 평신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이스라엘 있을 때 한 의사가 성지순례를 왔습니다. 들어보니 이 사람은 의사인데 자기 인생을 70년으로 보고 그것의 십일조인 7년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 마치고 이스라엘 들러 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때 물질의 십일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장 선교사로 나가가는 뜻이 아닌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어디 있든 선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내가 선교사가 가든지 그 선교사를 보내든지 내가 선교사로 지금 살든지. 내가 못 가면 보내야 합니다. 나가지 못해도 선교사로 살아야 합니다. 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선교사의 마음으로 하세요. 기업을 합니까? 선교하는 심정으로 기업하세요. 교사를 합니까? 학교로 파송받은 선교사입니다. 가정주부입니까? 주부 선교사입니다. 저는 우리 장로님들에게 이런 꿈을 꿉니다. 우리 교회 장로 임기는 7년입니다. 7년입니까? 하고 묻는 분이 많아요. 한신교회 장로 사역 7년하고 선교지로 떠나시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앞으로 우리 교회는 많은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그 약한 교회들을 섬기기 위해 떠나시라는 것입니다. 크고 안정된 교회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 교회는 후배 장로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개척교회로 선교지로, 시골교회, 학교교회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 첫 모델이 이완주 장로님입니다. 장로님은 인도로 떠났습니다. 이를 위해 평소에 단기 선교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올해는 베트남, 인도 해외 단기선교뿐 아니라 국내 단기선교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목장이 방학하는 7, 8월에 목장단위로 가족단위로 실시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교회를 꿈꿉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다릅니다. 형태에 있어서 목장교회입니다. 사명에 있어서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본질에 있어서 예수님 닮은 제자교회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목장교회입니다. 목장교회는 가정교회입니다. 가정에서 모이고 모여서 가족이 되었습니다. 목장교회는 평신도의 교회입니다. 서로 돌보고 가르치고 양육했습니다. 목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선교사로 살든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도행전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