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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9:9-14 2011.6.19(일)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

왕상19:9-14 2011.6.19()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

한주간 예수님과 동행하셨습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 우리 귀로 듣든지 아니면 마음으로 듣든지, 내가 직접 듣든지 다른 사람을 통해 듣든지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삽니다.

 

언젠가 T.V에서 코끼리를 훈련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 남자는 찰리 프랭크라는 남자인데 그는 니타라는 코끼리를 서커스 곡예를 위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면서 코끼리를 동물원에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습니다. 15년 후에 방송국에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했는 데 방송국은 코끼리가 옛날 주인을 알아보는지 어떤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프랑크를 약 100미터쯤 떨어진 곳 세워놓고 코끼리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코끼리는 즉각 옛날 주인의 음성을 알아 듣고 프랭크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옛날 몸동작을 재현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말못하는 코끼리가 15년 전 주인의 음성을 알아보다니. 그는 얼굴을 보기도 전에 목소리만 듣고도 주인을 알아 보았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코끼리도 옛날 주인의 음성을 알아보는 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나 알아 보는가? 말못하는 코끼리도 옛날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믿음이 좋거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듣는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그것은 모세나 사무엘이나 듣는 것이지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은 못들어“.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나 듣지 우리같이 기도 안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나?“ 이것이 첫 번째 오해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음성을 들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괜히 성경에 없는 음성을 들으려다가 잘못된다는 것입니다. 들을만한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에 이미 다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해는 하나님의 음성이 왜 그렇게 필요하냐는 오해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은혜로 살면 됐지. 무슨 하나님의 음성이 또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안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사는 것이지 매일 매일 로버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왜 들으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렇게 했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면 눈을 감고 성경을 쫙 폅니다. 그러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었습니다. 한번은 사업이 안돼서 힘드는 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보자 하고 눈을 딱 감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마27:5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메어 죽으니라”. 깜짝 놀라서 아니, 하나님, 저보고 죽으라는 말입니까?” 하고 한번 더 보겠습니다하고 또 폈는 데 눅10:37이 나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삼시세판이니 한번 더 해보자 하고 또 성경을 폈는 데 왕상18:21이 나왔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에서 머뭇 무뭇 하려느냐”. 그래서 이 사람이 돌아갔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찾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렇게 비인격적으로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들려옵니다. 망하기 위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들려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까? 이를 위해 먼저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들을 모두 기손강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상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발로 밟고 위대한 승리를 했습니다. 1:750의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의 일생에 고통의 시작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이세벨에게 쫓기기 시작하는 데 그는 이세벨의 추격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갔고 광야 깊숙한 동굴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고난은 끝났고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엘리야를 전화위복시킨 것입니다.

 

엘리야 뿐이겠습니까? 성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방법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만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날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역사입니다. 노아는 앞으로 닥칠 홍수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란으로 갔고, 기근 때문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시내산위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을 예배할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나 가깝게 들었는지 출33:11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와도 말씀하셨고 기드온에게, 삼손의 부모에게, 이사야에게, 느헤미아에게, 다니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으로 올까요? 하나님은 요셉의 꿈속에 나타나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빌립에게 남쪽으로 향하여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명하여 전도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바울에게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인 데 그는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유대인의 핍박을 받을 때, 풍랑만난 배타고 로마로 향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27:23-24,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하나님의 음성은 그대로 실현되었고 바울은 수많은 환란가운데 살아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창조의 첫날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아서 우리가 못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들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제가 내린 결론이 이것입니다. “닫혀 있는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굳어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 막혀 있는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그때부터 신앙은 내리막 길이다”.

 

왜 우리는 듣지 못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요? 잔다르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잔다르크가 늘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소문을 왕이 들었습니다. 왕이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는다고? 왜 하나님은 왕인 나를 제쳐놓고 너같은 소녀에게 말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 잔다르크가 대답했습니다. “왕이여, 하나님이 왕에게도 말씀하시지만 왕이 듣지 못할 뿐입니다. 왕께서도 마음으로 기도하시면 소녀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데 우리는 듣지 못할까?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말씀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만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 엘리야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합니다. 엘리야는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일까? 첫 번째 쉬운 이유는 그가 너무 육체적으로 피곤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얼마나 기진맥진해 있습니까? 3일동안 광야를 걸어 로뎀나무에 도착했습니다. 광야는 섭씨 40도가 오르내리는 곳입니다. 어떤 때는 5O도에 육박할 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살인적 더위입니다. 19:5절을 보세요. “로뎀나무 아래 누어 자더니”. 요즘 말로 엘리야가 뻗은 것입니다. 온 몸의 기력이 상실되어 말할 힘도, 움직일 힘도 사라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탈진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두 번 나타나 일어나서 먹으라권면했습니다. 만일 천사가 나타나 떡과 물을 주지 않았다면 엘리아는 이미 죽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몸이 피곤하고 육체가 소진하면 영도 활동을 멈춥니다. 우리는 육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육체가 힘들면 영도 힘듭니다. 몸이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아무리 재질이 좋아도 부숴진 악기로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선 몸이 피곤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힘들면 기도도 못 합니다. 우선 우리의 육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내려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광야로 쫓겨 나왔을 때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감정적 상처가 있었겠습니까? 아마 첫번째가 분노의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세벨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 왜 하나님은 이세벨의 엄청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를 없애지 못하는가? 왜 나는 저 이세벨 따위에게 쫓겨 이곳까지 왔는가? 왜 세상에는 저런 이세벨같은 악한 사람이 있는가? 미움과 증오, 그리고 분노가 그의 마음에 들끓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의 감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세벨에게 잡히면 죽으리라는 두려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과 불안이 겹치자 외로워졌습니다. 10, 14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합니다. “하나님, 이제 다 떠나고 나만 남았습니다”. 두려움은 열등감으로 발전했습니다. 4절 뒷 부분, “하나님,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감정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데 엘리야의 마음은 너무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사실 엘리야가 더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들었던 곳은 그릿 시냇가였습니다. 그릿 시냇가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끔 까마귀가 날라와 물과 떡을 주는 것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욕심이 없는 곳, 마음에 부담이나 걱정이나 분노가 없는 곳, 그곳에서 엘리야는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갈멜산에서 승리한 뒤 엘리야의 마음은 높아졌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던 촌 사람 엘리야가 어느날 갈멜산에서 7501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 우쭐해 졌습니다. 사람이 우쭐해지면 하나님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고독하게 살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가 잘 나가면 하나님과 멀어 집니다. 그래서 섯거든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와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몸은 교회왔는데 마음은 세상으로 쩔어 있습니다. 교회나올 때 몸만 나오지 말고 마음이 나와야 합니다. 한 주간동안 나를 지배했던 모든 우상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나를 붙들고 있는 모든 종류의 멍에와 속박을 끊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내 주되신 주앞에 나가”, 헌금도 그렇습니다. 헌금은 기부가 아닙니다. 한 주간동안 나를 얽어맺던 모든 종류의 물신주의, 황금만능사상, 물질의 노예, 탐욕의 우상으로부터 나를 해방해 주인이신 하나님에 나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순간 우리 속에 있는 탐욕이 해독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 찬양합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한 주간동안 나를 얽매었던 모든 종류들을 우상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주를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살전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마음의 우상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음성이 안들리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점삼지 않고 수단삼으면 들려오지 않습니다. 기도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로서의 기도와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문제해결의 수단으로만 여기면 기도하고도 하나님 못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좋아서 기도해야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에 기도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선물은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나는 고장난 데나 고치는 수리공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장 수리공이 아니라 공장 주인이시다. 나는 하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인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부리는 하인이 아니라 우리를 부리는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하나님과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도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요구만 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했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경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고 기도도 많이 하는 데도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동요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남긴 책이 있습니다. 그의 개인 편지들을 엮어 출판한 책입니다. 제목은 나의 빛이 되어라”(Come be My Light)입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테레사가 수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테레사는 매일 기도하고 평생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몇 년씩이나 하나님이 없는 캄캄한 영적 암흑의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영적인 사람이 하나님없는 것같은 세월을 몇 년씩이나 보냈다니. 믿어집니까?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응답도 없고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는 때가 있습니까? 이것을 신앙의 선배들은 영적 가뭄 혹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테레사가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실망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마지막 들려준 최근의 음성을 순종하려고 애썻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지 않는다면 가장 최근에 말씀한 것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지 않는다면 최근에 하신 그 말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말씀을 사모하지만 하나님은 최근에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여전히 지켜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테레사가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도 나는 그 분을 사랑하리라. 그분이 나에게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것처럼 나는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리라”. 아멘.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까요?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까요? 엘리야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동굴에 들어가서 앉자 마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다음은 지진이 났습니다. 다음엔 불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듣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자기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갈멜산에서 승리한 것을 다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벗거벗고 연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세벨을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 약함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저를 갈멜산의 영웅으로 보지만 저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제 상처, 제 교만, 제 분노, 제 두려움을 다 주께 내 놓습니다. 주여, 이제 말씀하옵소서. 주의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그는 마치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는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모하는 자에게 들려오고 기다리는 자에게 들려 옵니다. 62:5절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130:5절입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8:34절에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음성은 매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 들려옵니다. “내가 매일 십자가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면 하나님의 음성이 한 가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자 보십시오. 동굴에서 엘리야는 네 종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강한 바람소리였습니다. 다음은 지진같은 굉음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불이 타는 것같은 소리였습니다. 마지막에 작고 부드러운 소리였습니다. 엘리야가 들었던 이 소리들은 하나님이 들려주는 음성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다양하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기이한 현상속에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면서 쪼갠 고기사이로 불이 지나가면서 말씀합니다. 아나니아나 바울은 환상과 꿈을 통해 말씀합 니다. 베드로에게는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면서 비몽사몽가운데 말씀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무엘이나 바울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크게 내가 직접 듣는 소리로 말씀하기도 하고 내 마음에 깨달아지는 마음의 소리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하기도 하고 때로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기도 합니다.

 

제 인생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제 인생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듣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제가 들을만큼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오랜 방황을 마치고 기도원에서 몸을 추수리고 있을 때 어느날 제 앞에 렘33:34절의 말씀이 펼쳐지고 하나님이 저를 부르고 계시다는 큰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때 어떤 음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렘33:3절이 제 심령에 울려 왔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하나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음성이 성경 말씀 자체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고 이듬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저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교를 마치고 이스라엘로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저는 제가 교수가 되는 것이 좋을까? 목회자가 되는 것이 좋을까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마음에 교수되는 쪽을 택했고 p.h 과정도 등록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제 마음속에 내가 너를 목회자로 불렀다. 내가 너를 사용하리라는 강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무 선명하고 분명해서 누가 나에게 말했나 하고 주변을 돌아볼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음성에 순종했더니 하나님이 목회의 길을 열어 주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2005, 이중표 목사님이 저에게 한신교회 목회하라고 하실 때에도 저는 자신이 없었으나 어느날 꿈을 꾸는 데 집집마다 제가 막대기로 치고 다니면 수많은 양새끼들이 나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한신교회 목회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가졌습니다. 때로는 우리 귀에 들리게, 떼로는 우리 마음에 깨달음과 확신으로, 때로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음성이 과연 하나님 자신의 음성인가 아닌가는 세 가지 판단 기준이 필요합니다. 첫째 성경적인가? 이 음성이 성경의 본래 메시지와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가? 둘째 성령의 증거를 받는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확신하는가? 셋째 주변의 환경이 그 음성대로 돌아가는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분들의 조언과도 일치하는가? 이런 검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깨우치고 인도해 갑니다.

 

지금도 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 듣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과 성령의 감동, 그리고 환경의 증거를 통해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고 며칠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깨닫게 하시든지, 설교를 듣다가 깨닫게 하시든지, 기도하다가 확신과 믿음으로 깨닫게 하시든지, 가끔은 실제 들리게도 말씀하시고, 때로는 주위의 가족, 목회자, 심지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방법으로 말씀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해도 바로 시행하지 않습니다. 며칠동안 더 기도해보고 그 감동이 계속되는지, 마음의 기쁨이 유지되는지,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 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면 ,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구나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대로 행합니다. 그러면 잘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하나님의 음성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가 더 중요하지. 말씀하시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음성이야”. 그리고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듣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엘리야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까?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앞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바랍니까? “주 음성외에는 더 기쁨없도다”. 맞습니까? 평생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과 함께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왕상19:9-14 2011.6.19()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메어 죽으니라”.

10:37,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왕상18:2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 머뭇 하려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33:11,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27:23-24,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왜 우리는 듣지 못할까요?

(1) 육체적 피곤으로

왕상19:5, “로뎀나무 아래 누어 자더니”.

(2) 내려놓지 못해서

살전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3) 하나님을 수단삼고 목적삼지 않아서

테레사 수녀, “나의 빛이 되어라”(Come be My Light)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까요?

(1)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해야 한다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130: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2) 하나님의 음성은 다양하게 들려온다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