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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마2:13-18 2011.12.18(일) 위로하기 위해 오셨다

2:13-18 2011.12.18()

 

위로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선물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선물을 좋아합니까?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취업 포털 잡 코리아가 성탄절을 앞두고 남녀 직장인 77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남녀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받고 싶은 선물은 옷, 신발, 그리고 장갑이었습니다. 이것외에 받고 싶은 선물은 남자는 MP3, 닌텐도, 핸드폰같은 소형 전자제품, 여자는 목걸이, 반지 등과 같은 액세서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녀 모두가 받기 싫어한 선물도 있었습니다. 책입니다. 책은 남녀 모두가 다 싫어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선물받기를 원하십니까?

 

성탄절에 좋은 선물은 뭐니 뭐니해도 카드입니다. 올 해도 많은 사람들이 카드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고마워요. 한 해동안 은혜로운 말씀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목사님, 저희 목회자들에게 힘주시니 감사합니다. 새 해에도 건강하세요”. 한 장 한 장이 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골교회 목사님이 보낸 카드도 있었습니다. “목사님, 지난 한 해동안 후원해주시고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목사님은 저희 교회가 매달 후원하는 목사님입니다. 손수 쓰신 카드와 함께 그 지방 특산품인 곶감을 한 박스 보냈습니다. 두고 온 고향교회 생각이 나서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카드 한 장 한 장이 저에게 큰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목사님이 받은 선물중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이냐물으신다면 그것은 예수님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은 선물중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모든 선물이 그 안에 있습니다. 5:12절입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 예수님안에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위로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살아오시면서 정말 위로가 필요하거나 참된 위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위로가 있다는 것은 슬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상처받고 산다는 뜻입니다. 올 한 해동안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고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진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누구나 아픔속에 삽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아픔속에 삽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롯이었습니다. 헤롯은 주전 37년부터 주전 4년까지 33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데 그는 본래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브엘쉐바 지방에서 유랑하며 살던 에돔족속의 후예였습니다. 아버지는 에돔사람, 어머니는 아쉬켈론사람,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닌 사람이 이스라엘 왕이 되자 헤롯은 자신의 출생적 컴푸렉스를 만회하고자 많은 대형 공사를 시작합니다. 유다 광야에 마사다라는 왕궁을 지었습니다. 가이사랴 바닷가에 로마식 신항구를 건설했습니다. 에루살렘 성전을 증축해서 이전보다 두 배나 큰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공사를 한 것은 백성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고 백성의 흐트러진 마음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속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백성을 속이려 해도 유대인이 이방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재임기간중 백성들은 한번도 헤롯 왕에 마음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죽인 사람이 처조부 힐카누스였습니다. 힐카누스는 당시 대제사장으로 헤롯의 처 미리암의 할아버지였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대제사장의 손녀딸과 정략결혼을 했으나 일단 뜻을 이루자 이들이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인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자 처조부인 힐카누스를 살해한 것입니다. 그 다음 자기 처남 아리스토불러스를 죽였습니다. 아리스토불러스는 정권을 넘보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여리고 수영장에서 사람들이 모르게 익사시켰습니다. 그 다음이 아내 미리암이었습니다. 자기 아내 마리암은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죽였습니다. 그 다음은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러스를 죽였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사마리아에서 자신이 보는 데서 목매달아 죽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아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은 아마 헤롯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난 여름, 제가 베들레헴에 있는 헤롯의 무덤을 찾았습니다(그림1). 헤롯이 좋아서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무덤에서 새로운 것이 발굴되었다고 해서 찾아 갔습니다. 헤롯의 무덤에는 최근 화려한 벽화와 2층 규모의 왕실 지하 무덤과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세운 약 25미터 높이의 기념비도 발견되었습니다. 수영장과 목욕탕, 관개 시설이 갖춰진 정원과 수도 시설, 그리고 650석 규모의 극장도 발굴되었습니다. 이것을 만든 시기는 앞에 말한 사람들을 모두 죽인 뒤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기 얼마 전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헤롯의 잔인성과 포악성에 치를 떨었습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무고하게 죽이고 그 척박한 유대 광야에 자기를 위해 100미터 이상의 인공 무덤을 만들고 그렇게 호화로운 시설들을 만들었다니 정말 헤롯은 무서운 인물이었습니다.

 

그 헤롯이 오늘 베들레헴 아이들을 죽입니다. 16절입니다.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미 아내와 두 아들, 처남과 할아버지를 죽였으니 베들레헴 아들 아이들 몇 명쯤이야 헤롯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무고하게 죽은 자식들 때문에 어머니들이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애곡했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본래 이 말씀은 렘31:15절에서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1:15,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말씀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속에는 세 시대가 나옵니다. 첫 번째 시대는 라헬의 시대입니다. 라헬의 시대는 주전 2천년, 족장시대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언니인 레아는 싫어하고 동생인 라헬은 사랑했습니다. 그 라헬에 두 아들을 낳았는 데 하나는 요셉이요 다른 하나는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라헬이 죽습니다. 그때 헤브론까지는 길이 멀고 바빳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할 수 없이 라헬을 베들레헴 길가에 묻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 입구에는 라헬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은 아내는 오래 살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일찍 죽고. 참 야곱의 인생이 기구합니다. 자식을 낳다 죽은 아내를 경황중에 길가에 묻고 바삐 길을 떠나야 했던 야곱의 심정을 헤아려 보셨나요 ? 남편의 사랑을 받아 아들을 낳고 이제 조금 살만하니 죽어 남편과 헤어져야 하는 아내의 심정도 생각해 보셨나요?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묻히고 헤어졌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상처입니다.

 

또 하나의 상처가 있습니다. 주전 6세기, 바벨론 침략으로 인해 받은 이스라엘의 상처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587,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망합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수많은 포로들이 잡혀갔습니다. 그 포로중에는 유다 왕 여호아긴도 있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있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에레미아도 있고 기도의 용사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가던 곳이 라마였습니다.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일직선상으로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나 바벨론으로 향할 때 반드시 통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라마에 살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끌려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통곡하며 탄식했겠습니까? 머리를 쥐어 뜯으며 하나님, 왜 이 나라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울 부짖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으니입니다.

 

그러니까 8절 말씀은 이스라엘이 역사속에서 경험한 여러 종류의 상처를 한 구절로 모은 것입니다. 아들 낳다가 길가에 묻힌 야곱의 아내 라헬의 상처, 바벨론에 짓밟혀 포로로 끌려가는 지도자들을 지켜보아야 했던 이스라엘 벡성들의 상처,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이유없이 죽여 통곡하며 울어야 했던 예수님 시대 어머니들의 상처, 그 상처들이 이 한 귀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상처와 탄식이 없는 시대가 있을까요? 우리는 과거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았던 과거는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이 석양의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대기속에 낀 먼지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워 보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먼지 투성이입니다. 그 슬픔은 라헬처럼 개인적인 슬픔도 있고 바벨론처럼 민족적인 슬픔도 있습니다. 그리고 헤롯처럼 폭력적인 집단에 의해 강요된 슬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어느 시대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90:10절과 같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당할 때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아서 애시라는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60-70년대 세계 테니스계를 주름잡던 선수로 그랜드 슬램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잘못 수혈을 받아 에이즈에 걸립니다. 그 병중에 그가 하나님 만나서 독실하게 신앙생활하다 1993, 그의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납니다만, 그의 불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수많은 팬들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같은 사람에게 하필 그 나쁜 병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당신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서 애시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5,000만 명의 사람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그중 500만 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중 50만 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중 5만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중 5,000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하고 그중 50명이 윔블던대회에 참가합니다. 그중 네 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중 두 명만이 결승전에 올라 갑니다. 제가 그 윔블던에 올라가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하나님, 왜 납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좋은 일에서 왜 납니까?“하고 묻지 않았다면 내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왜 납니까?“하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나쁜 것만 주지 않았고 좋은 것도 주셨습니다. 나는 오히려 지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이룬 것에 감사하고 병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만난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습니다.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아픔이 아픔을 치료합니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하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픔이 아픔을 치료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을 예수님의 전체 사역과 관련하여 볼까요? 오늘 말씀의 내용은 포악한 헤롯이 예수님 대신 2살 미만의 베들레헴 아기들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부모들에게 슬픔과 눈물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예수님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성탄절에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다면 당연히 슬픔도 아픔도 상처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에 사람이 죽었다. 그나마 죄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었다어떻습니까? 잘된 내용입니까?

 

여기에서 성경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단지 헤롯이 죄없는 어린아이들을 죽였다입니까? 헤롯이 어린 아이들을 살해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만 역사적 사건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성탄절날 헤롯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왜 죽었는가? 그로 인해 부모들이 탄식하고 통곡했다. 왜 사람은 탄식하며 고통당해야 하는가?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 고통이 성탄절에 일어났다면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과 사람이 당하는 고통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성경이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굉장히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해답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열다섯 살에 갑작스런 실명한 후 죽음 같은 고통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한 교수님을 통해 발견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이재서 교수라고 합니다. 그 분은 칠흙같은 고난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고난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지만, 그 고난에 대한 설명서는 언제나 천천히 배달된다”. 그에 의하면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담은 설명서는 반드시 뒤에 배달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실명의 고난을 겪은 이후 내가 왜 장님이 되어야 하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고 하나님께 묻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침묵하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먼 훗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나는 고난은 설명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우선 고난당하고 나중에 설명이 온다는 것과 또 하나는 고난은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난은 이메일로 오지만 설명서는 배를 타고 온다”. 또 있습니다. “오직 고난은 고난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극복된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성탄절에 오신 이유를 알기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한마디로 아픔으로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은 헤롯같은 악에 의해 상처를 받고 삽니다. 헤롯이란 악은 예수님이 있거나 없거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있습니다. 나만 당하는 고난도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악과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섭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의 동쪽을 떠난 이후, 전 인류를 괴롭혀온 존재론적인 고통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것이냐 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동안 인류는 이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 상처의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하나는 회피입니다. 악은 나쁜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으로 인한 고통은 빨리 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표하는 사상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정면승부하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 속세를 떠나고 마음으로 욕심을 떠나면 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떠날 수 있습니까? 설령 내가 떠난다고 해도 세상의 고통이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두 번째는 개량의 방법입니다. “분명 인간의 악과 고통은 어떤 문제로부터 올 것이다. 그 문제는 구조의 문제든지 인간의 본성에서 오든지 환경에서 올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거나 개량하면 된다“. 그래서 혁명적으로 문제를 제거하는 방식이 공산주의이고 온건하게 문제는 개량하는 방식이 교육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지난 20세기, 공산주의는 70년만에 무너졌습니다. 교육과 문화가 가장 발달한 20세기에 가장 많은 전쟁이 일어 났습니다. 1, 2차 전쟁,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아프간 전쟁, 히틀러, 김일성, 일본군국주의, 20세기 전쟁으로 죽은 사람만 5천만입니다. 마음과 몸에 상처입은 사람은 더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피나 혁명이나 개량만 가지고 안됩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고통으로 인해 아파하는 인류와 같이 아파하는 것입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로마의 강권통치로 인해, 헤롯의 가렴주구로 인해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난에 대하여 취하신 방식은 백성을 가난하게 한 로마 정부나 헤롯과 싸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열심당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해지는 것이었습니다.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야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머리둘 곳도 없이 사시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은 뒤에도 묻힐 땅 한 평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과 함께 아파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질병도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질병들은 성경에서 금기시한 질병이었습니다. 피부병, 혈루병, 곱사, 눈봉사, 앉은뱅이, 한센씨병, 이 병들은 모두 하나님앞에 지은 죄로 인해 벌을 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취했던 태도는 그들을 가능하면 멀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센씨병같은 것은 아예 성밖으로 내 쫓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병자들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병을고치신 이야기가 1/3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거의 반절이 병을 치료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성서학자가 말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둘 중의 하나다. 병을 고치러 가시든 중이거나 병을 고치고 오시는 중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병자와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1:41, “예수꼐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영어로 “compassion”, com, “같이, 함께”, passion, “고통, 상처, 아픔”, “함께 아파하신다. 함께 고통당하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아픔을 함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배고픈 군중들과 함께 사흘동안 굶주렸습니다. 그는 여리고에서 외로운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와 함께 하려고 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남자들 때문에 상처입고 살던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하고자 정오에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어떤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의식주의 고난, 비난받고 정죄받는 고난, 풍랑치는 바다를 건너는 고난,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왕따 당하는 고난,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죄수로 팔리는 고난, 마지막 십자가에 죽는 고난, 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몸소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른편 강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우리 아픔을 치유하시는 방법을 아십니까? 우리와 아픔을 함께 하신 방법입니다. 그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아프리카 민요에서 나온 굼바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여, 오소서라는 뜻입니다. (찬양) “주여, 오소서. 내 주여”(우는 자위해, 아픈 자 위해, 슬픈 자 위해, 상한 자위해“.

 

예수님이 위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로자입니다. 예수님의 위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말고 또 있습니다. 용서하시는 위로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위로는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용서없는 위로는 감상적인 위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종류의 상처의 원인인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율법의 못으로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을 용서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나무에 못박은 로마인들을 용서했습니다. 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는 상처를 주는 고통을 치유하는 자유의 능력입니다. 용서없는 위로는 값싼 위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사실 우리는 남을 용서를 할 것이 아니라 남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용서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비는 데서 옵니다. 나는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도 가해자라고 생각해야 진정한 용서가 나옵니다. 코리 텐 붐이라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나찌에게 붙잡혀 모진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석방된 후 독일 뮌헨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설교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한 낯익은 남자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하고 보았더니 과거에 수용소에서 그를 고문한 전 나찌 친위대 장교였습니다. 그를 보자 코리 텐 붐은 온 몸이 얼어붙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코리에게 수없는 고문을 가하고 그를 괴롭힌 악의 축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내밀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용서에 대한 설교는 잘 했는데 용서는 쉽지 않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코리는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잠시 기도했습니다. “주님, 내 힘으로는 이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때 잠깐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피묻은 손으로 코리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이 사람을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 그 사랑으로 너도 이 사람을 용서하라”. 그때 그가 불연듯 깨달았습니다. “,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구나”. 나찌가 생긴 것도 그리스도인이 잘못해서 생긴 것이고 그들이 잘못된 것도 그리스도들인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한 해를 마치면서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사죄합니다. 목회자는 신자들이 주는 영광을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라고 어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한 원로목사님이 길을 가다 텅빈 고목나무를 보고 말했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너는 목회자도 아닌데 무슨 상처가 그리 많아 속이 움퍽 패였느냐?” 목회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목회자 때문에 상처받은 교인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용서합시다. 한 해동안 저로 인해 알게 모르게 상처받은 교우들 있으면 저를 용서하세요. 혹시 교인간에 알게 모르게 주고 받은 상처있으면 서로 용서하세요. 예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용서하세요. 그리고 서로 위로 합시다. 예수님의 위로로 위로합시다.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다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에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성탄의 게절에 우리의 아픔을 위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위로와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