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6:13-20 2011.6.5(일)
교회, 천국의 열쇠
오늘은 제25회 전국목회자 세미나가 열리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34년전 서울에서 한신교회가 처음 탄생한 날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교회는 필요하고 교회가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까?
작년 9월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흉기를 들고 남의 돈을 뺏으려다 자신의 딱한 사정을 들어준 것에 감동을 받아 자수한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밤에 여자 원장 한 사람만 있는 울산의 한 영어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흉기를 들이댔습니다. 원장은 코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기절한 척 쓰러졌는 데 이 남자가 너무 당황하는 것입니다. 누어 있던 원장이 순간적으로 “아,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일어나 강도를 의자에 앉히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원장은 모 교회 집사로 믿음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경책을 펴고 “아무 말도 좋으니까 나 한테 말해보라. 내가 당신을 돕는 데 까지 돕겠다“. 했더니 자신도 한때 교회에 다녔는 데 작년에 이혼하고 직장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원장은 그를 안아주고 찬송가가 담긴 MP3를 주고 기도하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20분도 되지 않아 학원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원장이 신고하지 않으려 하자 남자는 스스로 112에 전화하여 자수했습니다. 경찰은 이렇게 드라마 같은 일은 처음이라며 그가 나쁜 죄를 저질렀지만 잘못을 시인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기 때문에 불구속 기소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했습니다. ”마치 장발쟝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오늘처럼 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주고 희망을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세상을 아무리 둘러 봐도 세상의 희망은 역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안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완벽한 것도 아닙니다. 뭔가 교회를 의지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교회에 대하여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란 저는 한때 교회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왜 떠났는가하고 생각해 보니까 교회의 위선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교회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목회자나 장로, 권사같은 사람들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듭니다. 하나같이 위선자같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네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먼저 교회의 문제는 교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둘째 인생을 살아보니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낫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고 더 살아 보니까 문제는 교인들이 아니라 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본질에서 나온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갖는 제도, 분위기 이런 것에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문제가 있다면 그러면 교회는 문제없는 사람만 다녀야 하는가?” 아닙니다. 교회 문제는 제도가 된 교회에서 나온 인간적인 문제지 하나님이 본래 세우신 본질 교회에서 나온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가 정당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문제가 교회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제도에서 나오기 때문에 당연하고 안됐고 그래서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누가 저에게 교회 문제를 지적하면 이렇게 반응합니다. 먼저 수궁합니다. “맞아요. 교회 문제가 많아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니는 사람이 문제가 있지. 그러니까 교회다니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필요하지” . 그리고 또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나는 교회를 사랑해”. 어떻습니까? 인간이 모인 현실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그러니까 교회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더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사모하고 바라볼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로 그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만드시려고 했던 바로 그 교회만이 우리가 사모하는 영원한 교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장소는 이스라엘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멀리 헬몬산의 하얀 눈이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에레미아,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주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주님이 기뻐하면서 말했습니다. 18절입니다. 마16:18,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19절,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주님께서 지상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신 장면입니다. 이 말씀속에 ”천국 열쇠“라는 말이 나옵니다. 열쇠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 열쇠는 천국을 여는 열쇠입니다. 열쇠가 없이는 문을 열지 못합니다. 요즘 문여는 방법이 다양해 졌지만 어떤 경우에도 키가 없이는 문을 열지 못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면서 천국 열쇠를 교회에 맡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천국 열쇠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 열쇠를 교회에게 맡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교회를 세우면서 주신 천국 열쇠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여는 열쇠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먼저 하나님아는 믿음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기관으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가는 문입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 만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우리를 알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압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교회를 세울 때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에레미아,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질문을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말하고 너희는 어떻게 말하느냐? 유대인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말합니다. 간디는 예수님을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예수님은 인류의 큰 형님이라고 말합니다. 교과서에서는 예수님을 4대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의사들은 사랑의 치료자, 역사가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유대인 죄수, 종교학자들은 기독교의 창설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교회 올 때마다 물어야 질문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18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말씀했습니다. 마16:18,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다같이 ”내 교회“,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아닙니다. ”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이시고 예수님이 예배와 경배를 받으시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이것을 잊어 버리면 교회는 다만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건물이 좋아서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베트남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소명을 주셔서 선교사로 나갔는 데, 5년 동안 너무 힘들고 열매도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선교가 잘 안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트남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5년 동안 너무 힘들어 베트남 백성을 다시 사랑할 마음도 힘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전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선교를 그만 두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감동하시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베트남에 간 것은 네가 그들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선교사님은 한참동안 말을 잃었답니다. 선교사로서 내가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선교는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었답니다. 그리고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그 분이 제가 작년에 베트남에 가서 만난 선교사님입니다. 그 분의 말을 듣고 제가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다. 목회도 선교도, 하나님의 일도 나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는구나“.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봉사하고 수고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를 100% 사랑하고 언제나 성도를 사랑해서 봉사하고 수고합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고 하나님도 알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봉사를 그만 두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사랑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봉사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교사 여러분, 목자 여러분, 여러분이 섬기는 학생, 교인이 늘 사랑스럽습니까? 자기 자식도, 형제도 아닌데 어떻게 늘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 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교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 할 때 이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우리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교회 생활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교회 대심방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구역장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제가 준비하려고요”.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다 먹지요. 못 먹는 것 빼고 다 먹지요”. 그런데 제가 심방을 하면서 보니까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주로 나옵니다. 이상합니다. 분명히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상합니다. 그래서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대심방때마다 같은 음식이 자꾸 나옵니까?” 이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좋아하는 음식을 말씀하지 않아서 사모님께 물어봐도 말씀하지 않고 그래서 생각했죠. 목사님이 식사할 때 젓가락을 보자. 그러면 좋아하시는 음식쪽으로 젓가락이 자주 갈 것이다. 그러면 그 음식을 준비하자”. 그래서 제 젓가락을 유심히 보았더니 좋아하는 음식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목사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기 위해 그가 가는 젓가락을 주목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그의 젓가락을 주목합니까? 교회에서 늘 주목할 것이 이것입니다.
스위스 영성가 프란시스 쉐퍼가 한번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교회 여기 저기를 가보고 발견한 것은 교인들이 모두 자기 행복, 자기 만족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교회 불행이 여기에 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소비자 교회, 소비자 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치킨집에 치킨 샌드위치를 먹듯이 교회를 자기 취향에 맞는 소매점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마치 신자들을 위한 상품점이고 신자들은 교회와서 자기 필요한 것만 먹고 간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의 예배자가 아니라 교회의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에스에이 투데이>에서 조사한 통계가 참 중요합니다. 현재 미국 전 국민의 56퍼센트가 교회나갑니다. 그런데 “왜 교회 나가느냐” 물었더니 45%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26%가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 때문”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교회와서 만족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의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의 행복과 만족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존재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안정과 기쁨은 오히려 이단교회가 더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무신론자로 있다가 중년에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영국의 C.S 루이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포트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참으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한다면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 (C.S 루이스). 교회의 더 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통해 나를 아는 것,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뜻에 나를 맞추는 것, 그것을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그것이 인생의 최고 행복이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열쇠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에 맡긴 천국 열쇠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열쇠일 뿐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신분사회였습니다. 로마의 귀족과 평민은 서로 결혼도 못하고 왕래도 없었습니다. 자유인과 노예,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노예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어떤 로마시인이 말했습니다. “노예는 노새와 같다. 다만 노예는 말하는 노새일 뿐이다”. 노예와 노새가 같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노새는 말못하고 노예는 말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민권은 어떤 경우에도 이유없이 재판받거나 구금, 체포, 십자가형에 처형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신분사회였습니다. 제사장과 백성, 높은 성전 담장만큼이나 신분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서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탄생하자 이런 모든 차별과 신분적 차이가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요한은 어부였습니다. 마태, 삭개오, 세리였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누가는 노예출신이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귀신들린 여자였습니다. 병자들, 어린이들, 여자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당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했던 사람들, 100%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 물론 헤롯의 젖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가가 예수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디아, 장사하는 여성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천막만드는 노동자였습니다. 오네시모, 주인에게 죄지은 노예였습니다. 신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에서 신분이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의 원로원, 귀족들만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당, 할례받은 유대인만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누구나 갔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왕후장상, 사농공상, 누구나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엡2:16-17,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든 신분, 차별, 소외를 철폐하시고 하나님안에서 하나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멀리까지 갈 것 없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압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함께 간 교회였습니다. 의사 알렌이 고종황제의 시의였습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황제와 접촉되었습니다. 많은 대신들, 귀족들, 우국지사들이 예수믿고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민, 서민, 천민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당시 백정은 상놈중의 상놈이었습니다. 선교사 마펫이 학교를 세우고 상놈 출신도 받아들였는 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박씨의 아들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자 마펫이 당시 고종황제의 시의였던 자기 친구 애비슨에게 급히 연락해서 그를 고쳐주었습니다. 양반과 상놈의 차이가 분명한 시대에 왕을 치료하는 의사가 백정의 아들을 치료한 것은 한국역사상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 백정 박씨가 예수믿고 교회 나왔습니다. 그때가 1895년,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지 10년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왕실가족과 백정이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조선시대 신분의 역사가 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로 살아난 백정의 아들이 나중에 세브란스 의전을 들어갑니다. 그가 졸업합니다. 그가 1907년에 최초로 이 나라 의사가 된 박동열이었습니다.
여성의 인권은 얼마나 향상되었습니까? 이 나라는 오랫동안 남자는 하늘이라고 믿었던 나라였습니다. 여자는 마치 노예처럼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자 여자가 존중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기독교는 한국 남성들에게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도박과 음주 같은 잘못된 죄악들은 중단되었다. 싸움과 아내 구타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남편은 아내가 바느질을 잘할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고 창호지로 된 문에 유리창을 달아줘 편하게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해주며 대문 가까이 우물을 파 물을 쉽게 길을 수 있도록 해준다. 신앙을 가진 남편은 아내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며 아내를 진실한 사랑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을 위한 학교들이 세워지고 있다. 여성들도 공부하며 노래를 배운다. 교회는 여성에게 교회는 피난처와 같다. 안식일은 여성에게 모든 속박과 노동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은 후처의 딸이었고, 연대 총장 백낙준은 무당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안에서 차별받지 않는 곳, 그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최초의 목사 김창식도 머슴이었고 한국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한 이자헌도 머슴출신이었습니다.
지금도 보세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무나 모이는 곳, 정당에 있어서도 보수, 진보, 여당, 야당이 함께 모이는 곳, 지역에 있어서도 서울, 지방,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함께 모이는 곳, 초등학교부터 박사까지 함께 모이는 곳, 노동자에서 대통령까지 한 자리에서 예배하는 곳, 누구나 차별이 없는 곳,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랑의 열쇠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열쇠입니다.
교회에게 맡기신 열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운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대마다 교회는 희망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이 나라 초기, 교회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개화의 열쇠였습니다. 일제시대, 교회는 독립운동의 열쇠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도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교회 할머니들은 “탈환회”까지 조직했습니다. 가락지를 뽑아서 내는 모임입니다. 나라가 엄청나게 빚을 졌는데 가락지는 끼여서 무엇하냐 해서 가락지를 뽑아 나라 빚갚자는 모임입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세 가지 일을 하자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첫째, 나라 빚을 갚자. 둘째, 학교를 세워서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자. 셋째,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민족 기업을 키우자”. 이것이 일제시대 교회입니다. 해방 후 교회는 민족 재건에, 6.25때 교회는 반공운동에, 60대 교회는 가난을 넘어서는 일로, 70년대 교회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세상에 희망을 던졌습니다.
학교는 얼마나 많이 세웠고 병원은 얼마나 많습니까? 침례교 병원, 장로교 병원, 감리교 병원, 세브란스 병원, 성모 병원, 성 유다 병원, 성 누가 병원, 이름만 봐도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려는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시대,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밖으로 나온 교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과 선행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가듯이 말씀과 행동, 복음과 선행은 함께 간다. 둘째. 교회는 지역의 존립과 복지에 필수적이다. 지역을 섬기지 않는 교회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아예 존립할 수 없다.
셋째. 봉사와 섬김은 교회적 삶의 가장 본질적인 표현이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처럼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 넷째. 교회는 말로 전도하기 보다 삶으로 전도해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 말을 듣고 설득되기 보다 교회의 삶을 보고 설득된다. 다섯째 교회의 복은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이 늘어나는 것이다. 교회의 최대 사명은 예수님의 거룩한 영향력이 이 땅에 퍼지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마16:18,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리가 믿는 것은 이 말씀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 주인은 하나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세웠기 때문에 누구도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어쩌다 사람이 모인 조직, 제도로서의 교회가 실수하고 잘못해서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수 있어도 하나님이 세우신 본질 교회,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인 교회는 세상 누구도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열쇠, 막힌 세상, 닫힌 세상을 여는 사랑의 열쇠, 음부의 권세로 상처받고 고통하는 세상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 희망의 열쇠, 그 거룩한 교회는 주님오실 때까지 이 땅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있는 그곳에 우리도 있을 것입니다.
마16:13-20 2011.6.5(일)
교회, 천국의 열쇠
마16:18,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열쇠입니다.
마16:18,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나는 행복해지려고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포트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참으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한다면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C.S 루이스).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열쇠입니다
엡2:16-17,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열쇠입니다.
마16:18,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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