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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도 소그룹 활성화 방안에 대한 연구

전도 소그룹 활성화 방안에 대한 연구
-도동교회의 전도 소그룹활동을 중심으로-






BY
고 창 덕
FULLER UNIVERSITY OF THEOLOGICAL SEMINARY
목 차
서 론
제 1 절. 문제의 제기와 연구동기
제 2 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제 1 부. 신학적 기초
제 1 장. 교회론에 대한 재조명
제 1 절. 종교개혁의 역사
제 2 절. 조직신학적 교회론
제 3 절. 선교신학적 교회론
제 4 절.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제 5 절. 교회의 존재와 의의
제 6 절. 효과적 사역을 위한 신학작업
제 7 절. 사도성을 지닌 교회
제 2 장. 소그룹 복음전도를 위한 신학
제 1 절. 소그룹의 신학
제 2 절. 소그룹의 권능
제 3 절. 복음전도 신학과 소그룹
제 2 부. 상황적 기초
제 3 장. 중소도시 진주의 현황
제 1 절. 중소도시의 특성
제 2 절. 진주의 현황
제 3 절. 진주 지역 교회의 일반적 현황
제 4 장. 도동교회의 현황
제 1 절. 도동교회 역사
제 2 절. 도동교회 현황
제 3 절. 도동교회 소그룹 활성화 목회의 과거와 현재
제 3 부. 도동교회의 전도소그룹 활성화 목회전략
제 5 장. 전도 소그룹 활성화를 위한 목회구조
제 1 절. 기본구조 분석
제 2 절. 전도활성화를 위한 목회구조
제 6 장 전도 소그룹 구성을 위한 전략
제 1 절. 실천신학적 전략
제 2 절. 목회적 전략
제 7 장. 전도소그룹을 위한 평신도 훈련계획
제 1 절. 전도소그룹활성화를 위한 세미나
제 2 절. 세미나후의 결과들
제 8 장. 전도소그룹을 통한 이웃전도 방법
제 1 절. 전도소그룹의 시작단계
제 2 절. 전도소그룹의 활성화 단계
제 9 장. 결론
서 론
제1절. 문제의 제기와 연구동기

교회는 날마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도전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정체되도록 공격하는 사탄의 세력과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우리의 죄성(罪性) 때문에 맞이하게 되는 현상들이다. 새로운 물결과 사조가 우리들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타협하고 혼합되게 하려는 시대이다. 21세기가 다가오면서 절망도 있고 희망도 있다는 엇갈린 소리가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가지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우리가 마지막 세기의 마지막 주자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사명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개혁된 교회의 새로운 개혁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한다.'는 말씀을 새겨 보아야 한다.
「목회신학은 신학 중의 신학」이라는 말이나 「목회신학 외에 진정한 신학은 없다」는 말은 교회와 실천에 연관된 신학의 우위성과, 현실과 유리된 신학의 공소함을 아울러 강조한 말이다. 우리는 목회사역을 통하여 이러한 도전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목회사역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는 하나 그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먼저 이루어 가시는 그의 사역이다. 모든 사역의 우선권이 하나님께 있고, 목회사역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 경륜에 수종드는 사역에 속한다.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는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믿음을 얻게 하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목회 없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고 칼빈(Calvin)은 부연해서 말한다.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하고 점점 증가시킬 뿐 아니라 점점 발전하여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도움을 하나님은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품안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모아 교회의 거룩한 직임에 의하여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시며 또한 그들이 성숙한 신자가 되어 신앙의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모성애와 같은 배려로 인도하게 하셨다. 그러한 맥락 가운데서 교회에게 주신 다양한 성장의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은 목회의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세월을 두고 교회가 간과한 중요한 목회적 도구가 있는데 그것이 "소그룹 사역"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어느 시대이고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세 가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첫째는 과거 집착형 교회이다. 이 교회는 어떤 교파와 교단에 속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과거 선배들의 신앙이 마치 오늘 자신의 신앙인양 착각하며 교만해진 교회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교회라기보다는 특정한 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교인들의 모임에 불과하다. 교리와 전통의 가르침이 왕성해도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 있는 활동은 부진하다.
둘째는, 현재안주형 교회이다. 과거에는 전도와 선교로 영혼 구원에 열심이었으나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변화에는 현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기존 신자들을 더 이상 전투적인 증인으로 훈련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위에 도전 받을까 염려해서 은근히 우민화 정책 속에 빠져들고 교역자의 보호와 관리만 받도록 강요된다. 이런 교회는 숫자상으로는 현상유지가 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대단한 퇴보인 것이다.
셋째는 미래 대책형으로 현대인의 변화에 민감한 교회이다. 사역자의 초점이 교회 안의 관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교회 밖의 영혼들에게 맞추어져 있다. 교회의 제반 능력을 교회 밖의 영혼들에게 대부분 투자한다. 이곳에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있다.
이러한 현실안주형 교회가 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미래에 대응하며 선교적인 책임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도동교회의 목회현장에 소그룹 특히 전도를 지향하는 소그룹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해보고자 한다.
본 연구자는 진주도동교회의 담임 목사로서의 사역 기간이 5년여를 넘어섰다.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없이 사역해 왔지만 현재의 본인의 심각한 고민은 사역 초기에 비해 교회 성장이 비교적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세월 동안 본 교회 교인 중 재생산하는 신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년 동안 관심을 가진 것이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을 어떻게 하면 능력 있게 재생산하는 사람들로 양육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다수 대중들을 상대로 설교 한 것은 대부분 공감하고 끝나버린다. 일대일로 붙들고 가르치는 것도 깊이 깨닫고 인간적인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다. 더 중요한 점은 재생산하는 기회를 스스로 잡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앞에 두 가지도 중요하고 필수적이지만 소그룹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소그룹은 단순 친교를 위한 소그룹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르침을 받은 평신도들이 재생산 할 수 있는 기회와 현장을 항상 제공해 주는 소그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기존 소그룹들이 옛날 도제 제도처럼 스스로 재생산하며 훈련하는 현장으로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교회는 다시 성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연구자는 현장경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로 하고 "전도 소그룹의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본 연구자에게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동안 이론적 토대 없이 경험중심으로 해왔던 교회사역을 체계화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사료된다.
제 2 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소그룹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다. 따라서 당연히 소그룹은 복음 전도의 가장 이상적인 기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가 문화의 매개체를 통하여 바깥으로 복음을 위한 밭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전도는 그 밭에 부지런히 복음을 뿌리는 것인데 본인은 그 최고의 방법이 소그룹 활성화를 통한 복음 전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전도를 위한 소그룹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먼저 교회의 발생 배경으로부터 근거를 찾기 위해 성경적 신학적인 토대를 찾을 것이다.
와그너(Wagner) 교수를 중심으로한 풀러(Fuller)학파의 교회성장 이론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세포그룹을 통한 제자화 및 양육과 연관된 힘의 복음전도와 예배의 기쁨 상황에서 회중의 활기로 인해 교회성장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마 28:18-20의 대위임령의 성취라는 점에서 왕국성장이 된다고 하겠다.
본 연구자는 소그룹과 셀러브레이션 다이나믹스(celebration dynamics)가 교회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구체적 시도로서 소그룹을 통한 복음전도를 교회의 실제적인 복음 전도전략으로 채택하여 실천해 보았다. 이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신학적 기초 부분이고, 둘째는 상황적 기초로서 도동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며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지역교회에 있어서 소그룹 복음 전도에 대한 연구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서는 구원사역으로서 목회를 살피기 위해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교회 형성의 기초를 다시 살펴보겠고, 또 성령의 사역을 앤더슨(Anderson)교수의 오순절 프락시스로 설명해 보았다. 또 제 2 장에서는 소그룹 복음전도를 위한 신학적 고찰을 해볼 것이다.
제 3 장에서는 교회공동체에서 은혜와 진리를 깊이 구현하는 목회방법으로 소그룹의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기에 필요한 지역의 상황을 나열하고 제4장에서는 도동교회의 현황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중소도시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하는 교회들 중에서 소그룹 전도소그룹으로 성공한 교회들을 살펴보고 제6장에서 그동안 사역해온 도동교회의 소그룹전도현황을 토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볼 것이다.
제 1 부. 신학적 기초
제 1 절. 교회론에 대한 재조명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사명을 한국 교회는 그런 대로 충실히 감당하여 오늘날 세계 교회사에서도 보기 드문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부정적인 요소들이 없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좀 더 성경적인 교회 성장방법 모색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교회 중심으로 신앙을 키워 온 본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좀 더 성경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의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바로 그것이 제자 훈련의 철학 안에서 평신도 주축으로 하는 세포 분열 운동 즉 소그룹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소그룹은 전도를 목표로 하는 소그룹 즉, 전도적 성경 공부 그룹이다.
교회가 이들 전도 소그룹을 선교 본부인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직장, 아파트 단지 학교 등에 퍼뜨려 나간다면 엄청난 전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교회의 기초를 다시 점검 해 보면서 신학적인 기초를 놓고자 한다.
제 1 절. 종교개혁의 역사
중세시대는 말씀보다는 성례를 중시하는 성례제도주의와 단순한 말씀의 선포보다는 철학적인 연설을 중시하던 스콜라 신학에 의하여 오래 동안 설교다운 설교가 들려지지 않았다.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또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무지와 미신 가운데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말씀 증거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씀의 부흥운동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결국 개혁파교회를 새로이 형성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중산층 계층의 사람으로 맨스펠드에서 주물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도를 따라 법학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많은 갈등 가운데 하나님, 믿음,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을 얻은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그릇된 신앙에 대항하다가 교황의 파문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 루터란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루터의 개혁 운동은 그의 설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그의 주장이 로마 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설교하였다. 루터는 구원이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게하고 죄인을 구하는 것은 설교이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설교를 자연스럽게 예배의 중심 부분에 놓았다. 루터는 설교자가 비록 역사적인 신앙을 선포하지만 그것이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 구원에 이르는 신앙으로 바꾼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루터는 "오직 믿음" 사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루터는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다. 성경은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교훈한다. 마치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은 타락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므로 율법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루터의 "오직 은혜"사상은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므로 사제와 같은 중보자를 통한 구원을 부인한다. 이러한 오직 은혜의 사상의 영향으로 개혁파교회의 태동이 일어난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소수의 종교개혁가들이 전통카톨릭적 교회에 반대하여 자신들만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는 하였으나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체계화되고 드디어 개혁파교회의 기초가 이루어 지게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를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척도로 보기 시작하였다. 마틴 부쳐(Martin Bucer)는 교회의 3대 표지로 권징의 바른 실행, 聖禮의 바른 시행, 말씀의 바른 선포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에게 참 교회는 설교 중심의 교회였고, 거짓 교회는 의식 중심의 교회였다. 이러한 루터의 영향을 입은 요한 칼빈은 주장하기를 설교는 그리스도 교회의 홀로서, 그것에 의하여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나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에게 바른 교회 운동은 설교자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설교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고, 영국의 청교도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임마뉴엘 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2.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개혁교회
칼빈은 과격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폭력 사용을 정당화한 것을 배척하고 루터와 쯔빙글리를 따라 설교만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검은 문자적인 검이 아니라 영적인 검, 곧 말씀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설교라는 방편을 가지고 제네바를 개혁키 위해서 자유교회를 세웠다.김홍기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칼빈에 관하여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네바시 목회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가로서, 교육가로서, 저자로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 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 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강요 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칼빈이 신학자 혹은 복음 변증가로서의 삶에서 목회자로의 삶으로 바뀐 곳은 스위스의 수도 제네바였다. 그는 기독교강요로 인하여 핍박을 받다가 파리를 떠나 제네바를 통과하여 스트라스버그에 가려고 하였다. 도중에 그는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려고 여장을 잠시 풀었다. 그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화렐이 아침 일찍 칼빈을 찾아온 것이다. 화렐은 바젤, 모우, 스트라스브르크, 베른 등지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다가 제네바에 돌아와 있었는데 종교개혁에 있어서는 선배인 그가 기독교 강요의 저자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칼빈을 만난 화렐은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칼빈은 학구적인 성격과 앞으로의 연구계획, 그리고 자신의 내성적인 면 등을 들어 사양하였다. 여러 번 간청해도 칼빈이 고사하자 화렐은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선언한다. 당신은 자기공부를 구실로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노하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있다"고 벼락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이일을 두고 후일에 칼빈은 회고하기를 "그때 마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게 손을 펴시고 나를 사로잡는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화렐의 간청을 따라 그곳에서 그 위대한 개혁자요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로마가톨릭교의 사교도시였던 제네바는 화렐의 생명을 건 활동으로 로마 가톨릭 미사가 폐지되고 시민들은 복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까지 받아놓은 교회개혁의 성공지였다. 이때가 칼빈의 나이 27세 때였고 1536년 7월 하순경이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칼빈을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성구의 말처럼 제네바는 날개 없는 새가 날개를 가진 셈이 되었다.
당시 제네바의 사회상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하였다. 너무 많은 공창,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특별한 복장을 입혀야 했고, 심지어 교직자 중에도 첩을 몇씩 두어서 사생아가 많았고 민간재산을 강요해 음란한 생활에 소비해 버리는 일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도하에 극히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개혁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운동이 반대파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놓였을 때 화렐은 칼빈에게 성경강해를 부탁했다. 말씀교육을 통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1536년 8월말 산 파엘교회에서 바울서신 강해를 시작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회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틈이 나는 대로 복음의 토론을 하였고 이로 인해 로잔과 그 주변의 주민들은 신교신앙을 택하게 되었다.
로잔의 토론회와 베른의 루터파 대표자들과의 회의에서 명성을 얻은 칼빈은 설교자로 임명받아서 제네바교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칼빈은 세 가지의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는데 첫째는 자녀들의 종교 교육이었다. 즉, 모든 어린이들에게 복음적 신앙의 요점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다음 세대까지 종교개혁이 이어지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둘째는 도덕적 훈련을 시켰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모범적인 인물들을 뽑아 장로회를 조직하고 시민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교회의 도덕 규율에 따르지 않는 자를 수찬 정지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런 교회 형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신교 신앙 고백과 새 교회 건설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시민 하나 하나에게 결단케 하여 거부하면 제네바시에서 추방하고 시인하는 자만으로 제네바시를 구성하자는 '신앙고백'을 제정했다.
화렐의 간곡한 권유 때문에 1541년 9월 제네바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칼빈의 제 2차 제네바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1564년 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개혁운동은 결국 유럽의 각국들이 개혁교회를 세우는 도화선이 되게 된다.

3. 프랑스의 개혁교회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루이 11세(1461-83)는 후에 마키아벨리적인(Machiavellian) 것으로 생각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충고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통치했다.) 루이 11세(Louis 11)는 1480년에는 완전히 봉건 세력을 억압하고 중앙 집권을 달성하였다. 그는 절대주의 왕권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 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는 서구 최초로 강력한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하에 있어야 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근세 초기 프랑스인의 민족감정에 매우 일치하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 (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레오 10세에 대항하여(토스카나의 패권을 둘러싸고) 이탈리아 전쟁을 수행한 후, 승리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 조약은 절대왕정에 유리하였고 교회에는 불리하였다. 레오 10세는 1521년 루터를 파문했던 교황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혼란 중에 사망하였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the pleasure of the king)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the new learning of the Renaissance)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프랑소아 1세는 왕권 강화에 열중하였지만, 또한 문예의 보호에도 힘을 기울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 이 그룹을 모 그룹이라 한 것은 플아스 파리 동쪽에 위치한 도시인 모(Meaux)의 주교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1470-1534)가 이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Luther's doctrine of justification)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여동생인 나바라(Navarra) 왕비 마르가레뜨는 모 그룹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칼빈이 바젤로 망명한 것도 프랑소아 1세 때의 일이었다(1534년).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결국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 (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 혹은 휴그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4.종교개혁과 교회론의 재발견
루터는 중세의 교회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의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개혁교회는 태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완성된 것은 칼빈에 의해서이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을 좀더 체계화해서 결국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시작은 칼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칼빈 이전에도 중세의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길을 가는 교회들이 간혹 있었지만 성경을 중심으로 날마다 개혁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탄생한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칼빈이다.
종교개혁은 결론적으로 볼 때에 교회론에 대한 개혁이었으며 잃어버린 복음에 대한 개혁이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감추어졌던 교회의 권능이 회복된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기초를 새롭게 다진 사람이다.
이때부터 1564년 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개혁운동은 결국 유럽의 각국들이 개혁교회를 세우는 도화선이 되게 된다.
제 2 절. 조직신학적 교회론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기독교인들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는 "교회(敎會)"이다. 이 단어는 통속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종교적인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거나 사용하는 건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건물이 교회는 아니다 글자가 보여주듯이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붙여진 이름이다. 즉 "모임"이 그 기본 의미이다.
그러나 선교초기부터 우리가 사용해온 이 단어 "교회"로는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회(會)"자는 다른 어느 언어에서 보다 "모임"이란 의미를 잘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지만 "교(敎)"자는 다른 어느 문화권에서도 볼 수 없는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를 안고 있다. 교회를 단지 기독교나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는 가르치고 배우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을 주로 하는 지적 공동체는 아니다. "교회"란 단어가 내포한 가장 큰 위험성은 -한국교회에서 종종 발견되듯이 - 교회의 본질로 작용하는 "예수님을 믿음"이란 요소 없이도,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믿음을 얻으려는 동기와 목적으로 배우기 위해 모이기만 하면 그 모든 사람들을 교회내지 교회구성원으로 인정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로 번역된 신약성경의 는 그 어원적 의미가 밖으로 부르다의 수동형에서 파생된 형용사의 명사적 용법으로 "밖으로 불리워진 사람들"혹은 그렇게 특수하게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헬라어 단어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등 그 성격이나 목적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모임" 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은 "시민" "시민들의 모임" 이라는 일반적의미로 이 단어를 채용하지는 않는다.
의 의미는 헬라배경에서 보다 구약적 배경에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이 더 신약적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칠십인경에서 히브리어콰할과 에다의 번역어로 112번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구약적 배경과 전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 그 모임을 말하는 종교적색채를 가진 전문용어로 전용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가 이 구약적 의미를 계승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다른 여러 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단어의 사용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신약의 교회가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고전 1:2; 10:32; 11:16,22; 15:9; 고후 1:1; 갈 1:13; 살전 2:14; 살후 1:4등) 그들은 자신들을 구약적 전통을 잇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음이 틀림없다. 교회는 세상에서 혹은 어두움에서 특별히 구별해낸 "하나님의 백성"(히 4:9; 벧전 2:9-10)을 의미한다. 신약의 "교회"는 신약 특유의 색채인 기독론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롬 16:16)로 이해한 것이다. 살전 2:14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은 유대에 살고있는 기독교인들 그 모임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이 말로 데살로니가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위로하며 유대지역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동일시했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관련을 가진다는 이외에도 한편으로는 혈통적 유대인이 거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구약의 교회와는 다르다. 예수님의 출현과 사역이후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관계없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면 누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가? 누가 하나님에 의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에서 나와 따로 있도록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눈에 보이는 교회가 되는가 원리상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이 교회의 출발점으로 제시된다 하더라도 이 점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특징으로 돌아와야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신약적인 동기를 통해서 교회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음" 이 그러한 신약적 동기이다. 기독론이 신약성경의 핵심이라면 사람들을 이 예수님께 얽매이게 하는 "기독론적 믿음"이 신약성경의 다른 하나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교회는 지역 사회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얽매이도록하는 역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③ 신약교회의 시작
지나온 기독교회사 속에서 살펴보건데 교회는 꼭 필요한 성경적인 자명한 실체이며 여기에 따르는 기독교의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교회는 누가 세웠는가?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예수께서직접 교회를 세우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란 말은 두번 복음서에 나온다. 마태 16:18과 18:17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세우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로 인하여 퍽 오랫동안 여러 학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선언의 신빙성을 부인 당해 왔었다. 곽윤관은 이들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었다.
a.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외형적 조직을 가진 모임으로서의 교회 는 예수님께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가 인간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수십년 동안이며 예수님은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b. 종말론적 복음해석자들은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조속한 도래를 선언했는데(마 24:34; 눅 21:32) 시간이 지나도 성취되지 않은데서 파생된 결과가 교회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실제로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는 것이다.
c. 본문 비평학자들은 베드로와 교회에 관한 구절이 마태의 원문 에는 없었고 다만 2세기 후반 이후에야 비로소 삽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d. 세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오다가 우발적으로 교회가 생겼는데 이 기간은 막간의 기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견해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에클레시아다 선언을 부인하려는 경향이 여러 가지로 시도되었다. 이것은 역사적 교회를 성경적 기원에서가 아니라 인간적 기원에서 찾으려는 그릇된 시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즉 본문 비평학자들의 비판을 반박할만한 헬라어 사본들과 구역들이 나타났으며 복음서 안에서 이 문단이 셈족어의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다는 언어학적 근거 등이 삽입설을 파기시킨 것이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F. Kattenbushe 는 마태복음 16장의 에클레시아 선언의 신빙성 문제를 강력히 변호하며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교회개념의 기원을 다니엘서 7장에서 말하는 '인자'로서의 예수님의 자기 인식에 근거하여 찾고 있다.
예수님의 에클레시아 선언이후 일반사람들이 신약적 의미로 "교회"라 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러면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그런 교회는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하는 두 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첫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을 통하여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교회가 오래 전에부터 존재했음을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는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알고 있었다.(살전 2:14의 복수형에 주의하라) 그는 또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자신의 과거를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고전 15:9; 갈 1:13) 그가 의미하는 교회란 우리가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르는 바로 그 교회와 그 이후에 등장한 - 자세한 소식이 남아있지 않은 - 교회들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최초의 교회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교회의 출발점을 우리는 당연히 교회를 시작케 하신 예수님에게서 찾아야한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교회조직의 시작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랜 역사의 결과 탄생했기 때문에 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순종의 결과이다. 그러나 교회란 명칭은 주도권을 쥐고 계신 예수님에게 보다는 그 몸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엡 1:24에서 바울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함으로써, 첫째, 예수님과 교회의 계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둘째, 교회를 독립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이나 사역의 시작 혹은 죽음이나 부활 자체가 교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탄생과 사역이 중요성을 띠고 있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교회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이런 저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예루살렘교회가 최초의 교회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탄생한 지역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예루살렘 교회는 때로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운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전에, 성전의 부속 건물인 솔로몬 행각에 모이기도 했다. 특이한 장소는 없었어도 예루살렘 교회는 존재하는 실재였던 것이다. 특별한 조직이나 기구, 상회나 총회 같은 조직되어 있지는 않았다. 단순하고 명료한 모습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를 정의하는 것은 의외로 쉬운 과제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격과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는 상태가 교회의 본질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모여도 교회가 아니다. 믿는 교회의 내용이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형식인 것이다.
몇 명이 처음에 시작했을까? 물론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행 1:5에 따르면 120여명이 함께 모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않고 성령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오순절 날이 이르렀고 약속대로 성령은 마가의 다락방에 내려졌고 교회는 탄생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마음이 담대해진 사도들의 설교를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에 변화가 왔다. 그날 삼천 명이 복음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였으며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를 누가는 "삼 천명이 더해졌다"(prosete, ghsanyucai. wsei. trisci, liai )고 표현했다. 어디에 더해졌다는 것일까? 사도행전의 문장은 미완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글 성경처럼 "제자들의 수" 혹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수가 그렇게 늘어났음을 어렵지 않게 않게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약 120 명이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삼 천 일 백 이 십 명으로 증가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림잡은 최소한의 수치이다.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사이에 정확하게 몇 명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있었는지는 사도행전의 기록상 확인하기 어렵다. 120명이란 수는 사 십일 사이의 어느 날 - 사도의 선출이 있었던 날 -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수를 의미한다.
그러면 이 폭발적 교회성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설명을 덧붙인다.
a. 이 사람들은 이날 처음으로 복음에 접촉했던 사람들이 아니었 다. 그들은 오순절에 방언을 말하여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들이 다름 아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갈릴리 사람들" 입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있거나 예수님에 대하여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b.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항하고 죽인 - 특수한 - 죄와(행 2:37-38) 일반적인 부패를(40절)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사도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41절).
c. 42절의 기록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는 후기는 그러니까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의 준비 상황이 아니라 믿음 이후의 상황을 보여 준다.
d. 44-46절에서 누가는 이 삼 천명이 더해진 예루살렘 교회의 일 반적인 생활상을 묘사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라고 기록했다. "믿는 사람들"이라는 성격 규명은 처음의 120명과 후의 삼천명을 일과 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e. 이들은 이전에는 어느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이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f. 믿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는 기록은 이 새 기독교인들이 원 래 교회구성원 - 즉 예수님의 제자들 - 과 똑같이 취급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독교인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모자란 점이 없다.
g. 이러한 교회성장 배후에는 성령님의 강림이 있었다. 성령님 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용기와 능력을 불어넣었다. 방언은 그 증거 중의 하나이다.
h. 많은 사본에 의하면 누가는 47절에서 이 집단을 라고 부른다. "주님께서 구원 얻는 자들을 교회에 매일 더하셨다."를 NA26은 "교회"란 단어 대신 "epi, to. auvto,"를 가지고 있는데는 A, B, C, 095, 81, 1175 등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위의 47절에는 새로운 개념이 첨가되어 있다. 교회의 성장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의 결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사도들, 교인들이 그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모임을 통해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져나갔다.
제 3 절. 선교신학적 교회론
1. 교회의 관심 갱신
와그너 교수는 Your Church can Grow 11장에서 "미국에 있어서 건강하고 성장 하는 교회의 일곱 번 째-마지막-표적은 무엇을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바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여 우선 순위 결정을 제일 마지막 표적으로 보았지만 사실 교회 성장에서 우선 순위 결정이 제일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을 때 즉 교회가 복음적 관심 (evangelical concern, evangelical mandate)과 사회적 관심 (social concern, cultural mandate)의 우선 순위를 잘못 결정하여 사회적 관심을 우선 순위에 놓고 난 후 다른 어떤 것이 잘된다 하더라도 교회 성장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교회를 쇠퇴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와그너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에게는 많은 요구사항이 있다. 음식, 일자리, 주택, 오락을 요구한다. 또 경제적 안정, 건강 행복한 결혼 생활, 우정과 하나님을 요구한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인간의 모든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요구사항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요구 사항은 사회기관을 통하거나 정부를 통하여 또는 개인적으로 충족이 되고 보충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오직 교회만이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인간적 요구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으로써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장소다" 교회가 사회적인 어떤 활동이나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또 하여야 하지만 이와 같은 사회적인 활동을 교회생할의 최우선적인 것 (the top priority in their chunch life)으로 용납한다면 교회는 그 성장의 잠재력이 쇠퇴하게 된다.
교회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교회가 탄생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회란 단어의 적용 가능성을 살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얼마 되지 않은 자료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탄생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의 부족을 염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그 성장 원리를 얻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교회의 본질을 찾는 탐험은 대개 성경에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그 실제적, 상징적 칭호에서 시작하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경우 교회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서 진단 효과보다는 정체성을 확인 해주고 그사명을 고취시키는 실제적 효과가 더 크게 그리고 더 일찍 부각된다. 무엇이 교회인가 보다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치중하는 것이다. 즉 교회는 교회의 양태상 가시적 교회와 불 가시적 교회로, 교회의 속성은 사도성과 거룩성, 우주(보편)성, 그리고 연합성으로 설명될수 있겠고 교회의 사명은 예배와 교육, 선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신약의 단어가 에클레시아( )일 것이다.
2. 교회의 성장과 확장
교회의 성장과 확장을 성경속에서 추적해 보면 중요한 복음적 사건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의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20세기의 후반인 지금 이 시점에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한다면 최우선적으로 어디로 찾아갈까하는 질문을 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만약 바울 사도가 이 시대의 복음사역자라면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들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도시는 보다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바울 사도가 방문했던 지역의 대부분은 그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고 또 많은 여행객들이 지나다니던 대도시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 순교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복음 전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웠다. 이로 인해 교회성장은 모든 신자들을 통하여 모든 지역에서 수행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모두가 한 곳에 모일 수 없는 곳으로 복음이 퍼져나가며 교회의 성장은 자연히 지역교회의 설립으로 나타났다. 스데반 순교로 인해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다.(8:4)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서 점점 증가했다.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다. 이디오피아의 내시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빌립의 아소도의 여러 섬에서 복음을 전했다. 다메섹에도 신자들이 있었다. 사울이 예수를 만나고 믿는사람 바울이 되어 복음전도에 뛰어 들었다. 누가는 그가 간략하게 보고한 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행 9;21) 누가는 이 구절 앞부분 어디에서도 교회의 설립이란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관점에 의하면 교회는이미 온 유대와 갈릴리 지역, 그리고 사마리아 땅에 세워졌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는 신자들이 진행했던 복음 전파와 믿는 자들의 출현을 교회의 설립으로 본 것이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우리의 정의가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욥바에도 복음이 들어갔다. 고넬료가 회심한 것이다.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복음이 전해지고 신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교회설립 혹은 전체 교회의 성장과 같은 의미임을 우리는 11장 26절에서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어느 지역으로 전파되는 가에 초점을 맞추어 놓았다. 이후로는 주로 바울 사도의 전도 사역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소아시아, 헬라,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소개한다. 신약 신학에 있어서도 안디옥 교회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교회는 헬라파 유대교회였는데 이들이 이방도시의 선교를 위해서 유대파 목사인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성장의 주요 동인은 뛰어다니는 신자들과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의 손이었다.(행 11:21)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의 증거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결론들을 얻을 수 있다.
a. 최초의 교회는 사도들의 말씀선포 사역의 결과로 탄생했다.
b. 그러나 이후 교회설립에 있어 꼭 사도들의 역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즉 믿는 신자들이 흩어져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c. 승천하신 주님은 신자들이 퍼져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신실한 종들과 성령으로 자신의 교회를 확장하셨다. 사도행전은 바울사도의 로마 도착으로 잠시 그곳에서의 복음 증거로 끝나지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복음이 증거 될 때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생기면 어느 곳이나 교회는 세워졌다.
d. 그러므로 교회성장은 복음을 전하여 신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 즉 복음전파의 결과이다. 복음전파와 교회성장은 원인과 결과로 붙어 다닌다.
e.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이 수용성이 높은 곳을 중심으로 또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이 용이한 곳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성장과 확장은 주의 손이 함께 하는 놀라운 사역이며 복음전파와 교회성장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수용성이 높은 곳과 확장성이 용이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상으로는 바울과 함께 했던 조직처럼 전도적 목적을 분명하게 가진 소그룹형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제 4 절.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와 하나님 나라
1.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 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선포요 사역의 핵심이며 아울러 모든 그리스들의 사명이요 또한 기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가르치신 기도에서 이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시면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메시지, 그리고 그분의 삶 전체는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즉 교회의 지상에서의 선교적 사명은 하나님나라 실현이란 말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그리고 교회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위에 태어나고 부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살아야하고 또한 이를 위해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말씀선포
이 최고의 목적 즉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교회를 탄생시켜 그 나라의 초석을 놓으셨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성숙을 위해 세우신 역사적 교회에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일어서고 부흥한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앞서 살펴 본대로 한국교회의 성장 원인에는 교회 내 적인 요인보다도 교회 외적 환경적 요인들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한국을 이러한 상황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천국비유 중 "천국은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가는 것과 같은 것" 인데 모든 교회성장에는 복음의 씨앗뿌리는 일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좋은 토양이 되도록 하는 일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씨를 뿌리기에 앞서 자신이 속해있는 지역의 특성을 먼저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란 일정한 지역이라는 토양 위에 세워지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젠킨스( D.T.jenkins) 의말대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그 속에서부터 이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삶의 상황에서 종교적 도덕적 및 지적배경의 전체를 이해하도록 해야한다.
더욱이 하비콕스( H.Cox )는 '이 세상이 거대한 도시( vast city )가 될때에 이 세상의 종말을 보게 될 것' 이라고 지적했는데, 이렇게 종말을 향한 도시화가 깊어갈수록 기독교 선교의 긴급성을 더욱 요청되는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와 성취로 될 것이다.
1)하나님나라의 이해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님께 보여주신 외침과 삶이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그것을 "천국"이라고 했고(The kingdom of Heaven)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다.(The kingdom of God)예수께서 일관되게 가르쳤던 내용이 마태의 "천국"이던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 이든 간에 그것이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면 제자들이 주장하던 "그 나라는 무엇인가?
첫째, 이 나라는 이미 구약에 예언된 나라였다.
다니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한 나라가 설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 2:44)그것은 인자의 한 나라이다(단 7:13, 14). 성도가 장차 얻게될 나라이며 (단 7:18, 22), 종말론적인 전쟁을 수행할 것이며 (단 7:23-25), 궁극적으로 승리가 보장된 나라이다(단 7:26-28). 이 나라는 이미 다윗에게 계시되었고 솔로몬에게 확증된 것이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나단에게 말했을 때 (삼상 7:13) 우리가 흔히"나단의 신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에 계시된 말씀이었다(왕상 5:5).
그것은 다윗에게서 나올 자식이 세우게 될 나라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라고 했다. 솔로몬은 그것이 자신을 두고 한 말씀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후에 둘로 분열되었고 얼마 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또 성전이 무너졌으니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이 깨어진 것이다. 그래서 포로시절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혼돈에 빠졌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연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묵시문학의 기초이다. 다니엘서를 통하여 새로운 메시야 왕국사상에 정립되는데, 다윗의 후손은 솔로몬이 아니라 말세에 나타날 새로운 한 사람, 즉 '인자같은 이'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단 7:13, 14).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나단의 신탁과 다니엘의 계시를 염두에 두고 선포하신 것이었다.
둘째, 예수께서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제일먼저 외치셨던 말씀은 "천국이 가까왔다(마 3:2 ;4:7 ;10:7)" 이었고 "천국이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였다. 또 예수님은 죽기 전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으며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는 말씀으로 하나님나라의 능력적 속성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내용이다. 이상의 예수님의 말씀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표7) 신국, 귀국, 인국의 상관관계
셋째, 그러면 하나님나라는 어떤 성격이 있는가?
칼빈 신학교 교수 리차드 리더는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오늘날 인간의 삶 가운데 현존하는 하나님의 주재권, 하나님의 목적과 현존이라는 설명을 하면서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그 나라의 현재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보았다.
블라우나 박광철의 이론을 종합해 볼 때 다섯 가지로 요약된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정리할 수 있다.
①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다.
② 이 나라의 구성원은 복합적이다(엡 2:13-14, 16-18).
③ 하나님 나라는 씨와 같이 퍼져 나간다(마 13:31-32).
④ 전도와 사회봉사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마 22:37-40, 마 9:35).
⑤ 미래성과 현재성이 병행한다.
이 다섯 번 째 부분,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제가 이중적이라는 것 때문에 성경신학자들의 고민이 많다. 하나님의 나라는 "임 임하였고 (마 12:28)", "너희 안에 있으며(눅 17:20)",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했으면서도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측면이 동시에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 나라의 도래를 말하고 있지만, 한편 그의 재림으로 미래에 완성될 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를 이해하려면 요하네스 블라우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제에 관하여 말하면서 구약에서는 "아직"의 상태이며 신약에 와서는 "이미"의 상태이지만, 종말론적으로 볼 때 그 나라는 "아직"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며 "아직(not yet) - 이미(already) - 아직(not yet)"이라는 도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이 땅위에 씨를 뿌리듯이 좋은 밭을 중심으로 씨를 심어 천국의 기초를 놓아 그것이 씨앗처럼 퍼져나가게 하는 일을 시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2. 하나님 나라와 지역교회의 상관 관계
G. E. Ladd는 "하나님 나라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이다." 고 했다. 이 관계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추론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의 주장이 있을 수 있다.
① 첫째 동일시하여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인데 초대 교부들 이래로 중세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 그것이다. 그들은 교권 강화와 세속권력을 지배하는데 까지 이 교리를 적용했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유형교회, 성전관과 동일 시 했다.
②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Schleler macher, Harnack 등의 자유주의자들, Weless, Schweitzer 등의 철저 종말론 자들과 세대주의자들, 무교회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관련이 없다는 관점에 서있다.
③ 포괄적인 개념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가 내용상 교회보다 훨씬 포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갖는데 비해 교회는 개념상 현재성 밖에 갖지 못한다. 이 때문에 교회는 한 시성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표3) 교회의 한시성
예수님의 재림
D-day V-day
(마4:17, 행1:6) (계19:6)
이 세상에서 우리는 교회의 현재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범위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교회는 그 안에 하나님 나라(통치)가 더욱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부단히 노력 해야할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표4) 하나님 나라와 지역교회의 관계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복음을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이러한 당위성을 우리에게 가장 심도 있게 이해시켜 준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에 동시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 "교회( )" 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줄기 안에서 말씀하셨지만, 구약성경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의 무리"를 대표하는 예수님의 "인자"로서의 자기 인식, 구약성경의 중심적 개념인 "하나님의 백성"의 연속적 개념, "양 무리의 비유 (요 10장, 21장)" 등으로 볼 때, 교회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설교에서 "꽃 봉우리" 에 해당 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제자들의 모임으로 태동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인해 힘차게 탄생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서 사탄에 대하여 힘차게 공격하고 또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중점적으로 전파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라는 유대적 개념에다가 현재적 성취의 의미를 종합한 것이다. 이것은 곧 현재에도 받고, 미래에도 받을 하나님의 통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아울러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 사역으로 인해 이미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완성은 이 시대의 종말,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두 국면 중에서 현재적 상태에만 그 범위가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내용상 교회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비록 무형교회라 하더라도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시 할 수 없다. 교회가 예수의 몸이면서도 교회는 종말론적 하나님이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완전하게 깨끗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다만 온전해 지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고 순종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론을 정확히 정의함에 있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 하나님의 나라 외에 사탄의 나라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탄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저항세력으로 나타난다. 사탄(마귀)을 왕으로 하고 귀신들을 부하로 하여 구성된 사탄나라의 세력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성도들을 타락시키려는 목적 하에 폭 넓은 범위에 걸쳐 강력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교회도 사탄나라의 영향권 내에 있다. 그라나 사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한 원수에 지나지 않으며 심판 날에 무저갱에 영원히 갇히게 돨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마귀를 대적하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곧 교회가 사탄의 나라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된다.
복음서에는 이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고 되어 있다. 곧 사탄은 '이 세상 임금'이 되었다(요 12:31, 14:30, 16:11). 세상 나라는 사탄 나라의 현재적 실재로서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당분간 허용된 권세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 )고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회의 목표들을 결론으로 제시할 수 있다.
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로 아직도 사탄 나라의 강
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② 사탄 나라의 현재적 실재인 세상 나라의 끊임없는 유혹과 영
향을 받고 있다.
③ 교회는 이 같은 역동적인 세력들 간의 긴장상태 및 전투상태
의 중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때 말씀과 기도는 교회의 공
격무기이다.
④ 그러나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공동체' 로서 의 교제를 공고히 하여야 한다.
⑤ 그리고 세상 나라에 대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나님 나
라는 교회를 통하여 확장되는 것이다.
(표 10) 하나님 나라와 사탄 나라와 세상 나라와 교회의 관계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세워진 목표도 제자들에게 주신 목표와 다르지 않다.
① 너희가 세상에 있으나 (요 17:11)
②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요 17:14)
③ 복음전파를 위해 세상에 보내어진 존재였다. (요 17:18)
제자들과 교회들이 이 사명에 순종했을 때 교회는 탄생하고 성장하고 온 세상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역사적 교회의 시작과 발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자들은 이러한 가견적 교회, 지역 교회의 이중적인 사명을 촉구하고 가르쳤다.
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공동체적인 교제를 공고히 하고
② 밖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퍼뜨려야 하는 것이었
다.
3. 지역 교희의 사명은 말씀선포와 교회성장이다.
결론적으로 열두 제자들에게는 분명한 명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 하신 명령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눅 9:1-2 에서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아직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며 앓는 자를 고쳤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임함을 드러내시려고 행하셨던 기적들이 제자들의 사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승천 직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 그리고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제 이 땅에 새롭게 시작된다는 선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의 증인으로서 그를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으며, 회개하여 그의 제자가 된자는 이제 그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를 증거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포기여야 한다. 예수의 모범을 따라 말(=복음선포)과 비폭력적 방법으로 해야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①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나라가 될
새로운 씨앗이요, 발아이다.
② 교회는 성전의 의미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 사 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관문이 된다.
③ 예수께서 이 교회의 의의와 목적을 위하여 제자들을 선택하고
세우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지역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 키는 방법을 계승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④ 교회의 목표는 사탄 나라의 현재적 모습인 세상 나라에 대해 전투적이며 방어적인 입장에서 복음선포와 양육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하는데, 도시는 이러한 교회의 사역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좋은 지역이다.
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숙은 현재적 모습으로는 지역 교회의 성장과 복음전도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의 사명은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이다.
⑥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작은 소그룹 단위로서 씨앗 처럼 세상에 퍼져 침투해 들어갈 때 목표에 쉽게 다 달을 수 있다. 왜냐면 교회의 터전이 세상이기 때문에 교회는 보다 용이하게 세상 속에 침투해 들어가야 할 구조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⑦ 이러한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훈련된 평신도 지도자들을 많이 키워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키우셨던 것처럼 말이다.

4. 성전과 교회의 상관 관계
하나님 나라의 개념 이해와 교회의 사명, 교회의 성장을 이해하려면 성전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유대교에 있어 '우주'라는 추상명사는 없다. 단지 하늘과 땅이라는 하나님 창조의 전체인 양극을 사용해서 설명한다. 창조의 두 부분은 하늘과 땅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고 땅은 사람의 거처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늘과 땅, 즉 우주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기능, 다시 말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성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이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복사(COPY)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거처의 모조품이 지상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표현을 제일 많이 사용하신 것이다. 들어간다 라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장소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대문 (마 7:13, 눅 13:24)"
"문 (눅 13:24)" "열쇠 (마 16:19, 23:13, 눅 11:52)" 등의 그림언어들을 쓴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집'으로 상장하는 것과 연관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흔히 쓴 '잔치'의 그림언어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적어도 일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이 "대문"의 '문'을 열고 그의 '집'의 '방 (요 14:2)'으로 '들어 가'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 죄목 (막 14:58)과 메시야 - 곧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그 성전을 구체적으로 자신이 세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보았다. 예수는 실제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이다.(마16:) 13-19에 있는 예수의 교회 건설에 대한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대로라면 성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인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집은 이제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안에서 또는 예수를 통해서 실재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역사속으로 들여온 분이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곧 바로 예수의 성전 되심을 완성 시키는 것으로서 예수의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면 부활은 이러한 예수의 제사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지만 제자들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의 구원의 사업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대권자로 높임을 받는 '주'라는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발생한 것이다. 예수 안에 이렇게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온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곧 "복음( )"이다. 이 복음의 말씀이 강단에서 넘쳐날 때만이 진정한 교회성장과 부흥이 뒤따르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 볼 때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곧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더 많이 보여 주는 것이 되며 아울러 교회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산간 오지에도 세워져야 하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기 위하여 대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에 더욱 깊이 뿌리 내리고 세워져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 4 절.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회란 무엇인가? 최근에 이 질문은 교회 내부에서 더 자주 제기된다. 외부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의 모습은 비교적 단순하다. 교회(敎會)란 이들의 눈에는 "종교신앙이 같은 사람들의 조직체"이거나 "주로 기독교에서 종교 신앙의 가르침을 선포하며 예배 의식이나, 종교적 회합을 하기 위하여서 상설한 건물"을 가리킨다. 이런 교회 개념은 우리가 말하려는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하다. "종교"란 단어를 "기독교"란 의미로 바꾸어 받아들인다 해도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교회란 무엇인가? 혹은 교회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을 때 그들은 이미 "교회"란 건물 안에 들어와 있고 또 그들은 대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사람들이 왜 계속해서 "교회"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곤 하는가? 그들이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첫 번 째 질문에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분석함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태어난 시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 소위 그들이 처한 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둘째 질문과 관련된 답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인다.
첫째,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한 모형"을 선택하여 그것과 현실을 비교하며, 그 때 발견되는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고 긍정적인 면을 닮아 가려고 한다. 2. 한 모형을 선택하기보다는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교회의 "원형" 혹은 원리를 재구성하고 현재의 교회를 이것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예루살렘교회가 - 자주 예루살렘공동체로 불리운다 - 이 모형으로써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 오늘날의 교회가 예루살렘공동체를 닮아가는데는 따라서 한계가 있다. 두 교회는 "모형과 닮음"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 특수한 형태를 벗겨낼 때 찾아지는 교회의 "원리"가 오늘의 교회의 척도라는 관계에서 비교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원리"는 그러나 예루살렘공동체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교회 다음으로 빈번히 언급되는 것은 열 두 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관련하여 "교회"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교회이므로 열 두 제자들을 교회의 모형으로 지목하는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순절 사건 이전에도 이들이 교회란 집합명사로 불리웠다고 가정하거나, 이 때 그들은 그러한 집단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혹은 이들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 열 두 제자들을 후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과 그 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아주 중대한 차이점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교회론을 십자가와 부활 사건, 혹은 오순절 사건과 관계해서 말하려고 할 때도 우리는 교회의 원리를 추출하는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서 (혹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되는 원리나 예루살렘교회에서 (혹은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원리는 동일하다. 또 동일하여야 한다.
기존교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며 교회론을 통해 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이러한 교회 개혁을 위해 교회의 이상형을 "교회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찾고자 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그 시발점으로 돌아가 교회가 형성되는 발자국을 더듬어 보고 여기서부터 영구히 적용될 수 있는 "교회의 원리"를 뽑아내는 것이다. 교회사의 진행과 더불어 나타나는 여러 요소들은 - 이런 요소는 물론 시초에도 있었다 - 부수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의 현재를 그 자체로나 그들이 자라온 교회의 전통으로 저울질하지 않고 곧 바로 교회의 시작으로 끌어가서 비교, 비판, 재확립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염두에 두고 시작해 보려는 것이다.
비슷한 연구를 우리는 최근에 예를 들면 A. Nolan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에서도 접할 수 있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하나의 운동으로 그리고 교회를 이 운동의 불가피한 제도화로 분석하고 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폭팔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J. Ellul의 "뒤틀려진 기독교"도 비슷한 관점으로 기독교를 분석 비판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라는 말 자체를 회피하며 - 이 단어가 이미 원래의 것을 왜곡한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와 사역,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존재, 그리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의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을 표현하기 위해 당분간 X"라는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와 교회(기독교)의 관계를 일단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을 신약성경의 교회론이 다루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인용되는 A. Loisy의 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온 것은 ... 교회였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런 학자들과는 달리 이 논문은 현 교회에서 발견되는 부정적 요소나, 초기 교회와의 차이점 등에 핀트를 맞추지는 않았다.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중세 돌아가 Roman Cathoric 교회를 닮아 가는 듯한 인상을 점점 강하게 풍긴다. 한 교회나 한 교역자가 특정한 교단에 소속되는 것이 중시되거나, 한 신자(信者)가 어떤 특정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조짐이라 할 수 있다. 성경위주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특수한 신학사상 중심의 신앙생활로 변모한다. 장소로서의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고 있다. 직무중심의 교역자상이 퇴조하고 한 인간이 신성시되고 그의 권한이 거룩한 위력을 발휘하는 듯이 행동하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고유의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공동체, 그 구조, 조직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다. 특히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스스로 군림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세력과 자주 야합하기도 하며 어마어마한 힘을 마구 이곳 저곳에 뿌리고 돌아다닌다. 이 구조는 또 스스로 굴러가며 개인의 특성과 자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통제, 억압하기도 한다. 정치력이, 금력과 권력이 어느 틈에 교회에 밀려와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이 교회에 팽배해 있다. 역사의 흐름은 어차피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또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을 찌라도, 억지로 시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용기만 있다면 물길을 잡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의 과제와 병행하여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신학적 연구의 출발점은 항상 언어, 문법적 고찰임은 자명하다. 우리에게 이것은 신약성경에 사용된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찾고 그것이 사용된 문맥과 그 배경을 따져 에크레시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칠십인경(LXX)에서 이 단어가 주로 ㄹ하카이나 ㅎ더 의 번역어 임을 확인하고 이 두 단어의 문맥과 배경을 살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정으로 말해진다. 교회론은 또 통상적으로 신. 구약성경 모두를 통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 단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요소를 내포할 수도 있다. '에클레시아가 비록 LXX에서 ㄹ하카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에크레시아와 ㄹ하카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본 연구는 따라서 에클레시아란 단어나 그 용례에 치중하지 않고 이 단어가 실제로 적용되었던 집단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집단을 설명하기 위하여 채용되고 도입되는 여러 개념을 살피려는 것은 이 논문의 의도가 아니다. 이러한 설명, 예를 들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개념은 일단 교회의 존재를 예상하고 그것이 과연 어떤 성질을 가졌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준다. 본 논문의 목적은 교회란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그 응집력으로 작용하는 것, 즉 교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찾아서 이것과 오늘의 교회를 비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3. 최초의 "교회"
신약성경의 각 문서들이 기록된 연대순을 따를 때 "교회"란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그는 약 50년경에 아마 고린도에서 한 편지를 쓰면서 이 편지를("데살로니가人들의 교회에, 살전 1,1; 살후 1,1) 보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편지 이곳 저곳에 이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 만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교회들"(고후 8,1), "갈라디아의 교회들"(고전 16,19)이 존재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살후 1,4은 데살로니가서를 쓰는 당시에 아가야 지방에도 여러 교회가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해본다면, 적어도 50년경에는 에클레시어란 단어가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무리 없이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62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도행전에 자주 "교회"란 단어가 사용되고, 또 여러 교회가 등장한다고 해서, 사도행전은 그 내용이 보여주는 실제시대보다 훨씬 후기의 (아마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18세기 이후 신학자들이 자주 제시해 온 이 시간적 간격은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울서신을 고려할 때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예루살렘공동체를 "교회"로 부르는 시기와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예루살렘공동체의 탄생시기 사이의 간격은 가장 멀리 잡아도 17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50년경에 "교회"란 단어가 바울이 전도하는 전지역에서 어려움 없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예루살렘공동체가 바울사도에 의해 "교회"로 불리우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교회로 불리우는 것 사이에는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교회란 명칭에 관해서도 사도행전은 비교적 정확한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예루살렘공동체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교회로 불리우는지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누가는 예수와 열 한 사도를 무대에 올린다(cf. 1,2).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있었던 일과 예수의 마지막 당부가 간략하게 소개되고 예수의 승천 사건이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사도들"이란 명칭이 2절에 한 번 사용된 것 외에는 아무 다른 명칭도 사용되지 않았다. 갑자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라고 부른다(11절, cf. 2,7). 왜 그들을 이렇게 불렀을까? 그들의 출신지역을 의미한다고 실제적으로 해석하든지 그 집단에 대한 통속적인 별명이라고 하든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직후부터 사도들은 주님이 부탁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떤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도 같이 했다 (14절). 며칠이 안되어(15절) 이 무리는 120여명으로 늘어난다. 열 한 사도들이 자연히 모임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특히 베드로가 그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지도아래 이 예수의 생애의 목격자들은 결원이 생긴 사도 직에 맛디아를 제비뽑아 보충한다. 누가는 이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가 하면(15절), 베드로도 그들을 "형제들"(16절)이라고 부른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 단계에 이르는 동안 누가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가 있었다는 인상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흩어졌던 예수의 제자들이 자연스럽게 다시 모여들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제 5 절. 교회의 존재 의의와 목회
교회는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교회의 존재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단지 그것이 오순절 이후에야 구성원에 변화가 온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서 그들이 모여 있던 집을 울렸고, 불꽃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머물렀으며,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사건이 터지자,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놀라 모여든다. 이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가 즉석설교를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큰 감명을 받아 즉시 세례를 받았는데 그 결과로 (원래 있었던 120여명의 영혼에) "약 3000명의 영혼이 더해졌다(41절).
오순절에 있었던 변화를 우리는 다음의 두 갈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원래 예수를 믿고 따르던, 그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충만이 있었다. 그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사도들의 특수한 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2,14.42). 2. 이 공동체에 들어 있지 않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찔림을 느끼고,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그리고 다른 말들을, cf. 40절) 받아 들여 세례를 받았다(41절).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베드로의 권고대로 회개했다는 것일까? 삼 천명 가량의 영혼이 증가했다는 기록은 이 새 구성원들이 원래 구성원과 똑 같이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가가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회개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삼 천명의 증가는 신자의 증가가 아니라 (현대적 의미로) 교인의 증가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제한할 근거가 사도행전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죄 용서"와 성령의 선물은 여기서는 명령된 것이 아니라 약속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긍정적으로 명령에 순응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에 관해 더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들도 이제 다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삶에 끼어 들었다는 점이다(2,42-47).
이 공동체의 삶을 누가는 단적으로 "믿는 사람들 모두가 한 곳에 있었고 모든 것을 함께 사용했으며 ..."(44-45절)라고 묘사하고 있다. "함께 있었다", "함께 사용했다", 소유를 팔아서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명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즉 이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준다. 반면에 "믿는 자들"이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정체를 알려주는 말이다. 즉, "믿는다"는 개념이 이 공동체의 구성조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삼 천 여명의 새 구성원들이 회개를 했다고 결론을 내렸었는데, 여기서는 그들도 "믿는 자들"이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삼천 명이 첨가되어 삼천 백 이십 여명으로 불어난 이 집단은 믿는 자들의 집단이었다. 혹은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표현에서 이 믿음이 예수와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된다. 47절에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이 믿는 자들의 집단에 매일 "구원 얻는 자들을" 더해 주셨다는 새로운 개념이 첨가된다. "믿는 자들" 혹은 "구원 얻는 자들"이 전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베드로사도가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이 동기가 되어, 그는 또 한 번의 설교를 하게 된다. 이 설교에서 그는 예수에 관하여 주로 말했지만, 그의 명령 (회개하라, 3,19)과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믿었다, 4,4)은 앞의 사건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 천 여명의 새로운 "믿는 자들"이 생겼다. 이들이 별도로 있었는지 아니면 먼저 번처럼 즉시 공동체에 흡수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아무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들도 곧 공동생활에 가담했다고 보는 것이, 즉 4,23의 표현되는 사도들에 의해 이끌리는 집단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사건 진행 기록상 자연스럽다. 모두가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한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령 충만과 그 결과 담대한 증거생활이 있었다는 누가의 보도는(31절) 분명히 이 점도 강조한다. 이들은 "믿는 사람들의 무리"(32절)라고 불리우며, 삼 천 명이 갑자기 늘었을 때처럼 긴급한 필요에 의해 소유를 나누는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진정한 읨에서의 교회의 의의를 보여준다 하겠다.
1.목회의 고찰
(1)목회의 연원적 고찰
목회란 성서적인 연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신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한 것과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자증(自證) 하신 것에서 비로소 설명되는 용어이다. 곧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목회는 목양(牧羊)이다.
특히 요한복음 제10장은 퀘일 (Bishop William Quayle)이 말한 대로 신약에 있는 목자 시편의 대헌장이며 목회의 연원적 뿌리인 것인데 토리 (R.A.Torrey)는 이상의 10장을 7가지씩 그 사역을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먼저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알고 그 양의 이름을 부르고 밖으로 인도하며 놓아주고 양들보다 앞서가며 양들을 위해 생명을 버림으로 양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목자를 따르고 타인의 음성에는 따르지 않고 그 음성도 모르며 그를 피하며 목자를 알고 따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다윗의 시에서 언급한대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므로 목양은 목자의 도움과 돌봄과 인도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계성에서 설명된다.
아담스(J.E. Adams)도 이상의 연원적 기초를 시편 23편에서 9가지 지침으로 나눈바 있다. 곧 목회란 "개개의 양에 대한 관심이요, 양에게 쉼을 주는 것이며, 매일의 필요를 공급함이요, 피곤하고 지치고 낙심될 때 회복과 격려, 인내와 인도를 베풀며, 교훈과 교육과 훈계를 할뿐 아니라, 앙들에게 목표와 동기를 부여하며, 양들의 안전과 보호에 힘쓰며, 양들과 개인적인 교제와 다정한 우정속에 함께 살아가는 것" 을 연원적 기초로 지적한 바 있다. 나아가 성서를 보면 하나님 자신이 목자와 같이 자기 백성을 돌보실 뿐 아니라 많은 지도자를 세우실 때도 목자 (Shepherrd)라고 하신 일과 그 사역을 강조하신 부분이 많이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쓰이고 있는 목회 (Pastoral)의 의미는 헬라어에서 연원(淵源)된 것으로 "양떼를 먹이고 돌보아 준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목회란 교역자가 복음의 진리를 신자의 생활에 실제로 적용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 이를 크게는 "목양의 관점 (Perspectives)에서 교회가 하는 모든 역할"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목회란 목자가 양을 치는것 같이 목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진리로 가르치는것 인데 곧 한 지교회를 담임한 목사가 수행하는 설교, 성례, 상담, 심방, 교회정치, 교회관리 및 운영, 평신도 지도훈련 및 교육을 총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목회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목회를 계속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목회는 교회의 목회를 위한 표준이며 목사의 목회를 위한 표준이며 동시에 목회는 인간의 용어로 설명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목회의 성서적 연원은 목양이며 이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일꾼이 그의 양에게 그의 말씀을 먹임으로 양들의 삶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목양은 그리스도의 목회이어야 하고, 양들에게 장래의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2) 목회의 성서적 고찰
목회의 기원을 성서적 입장에서 추구하려고 할 때에 대체로 구약시대, 예수시대 그리고 사도시대로 나누게 되는데 본 절에서도 역시 같은 범례를 따라 논구하고자 한다.
가) 구약시대
구약시대의 목회는 먼저 각 시기마다 백성의 목백 (牧伯)이 목회의 현장에 서 있었음을 보게 된다.
홍수시대에는 노아가 그러했고, 족장시대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이 그러했는데 여기서 멜기세덱의 사견이 그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목양적인 지평에서 일찌기 소개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출애굽기시대에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제각기 목양의 일을 하지만 이때부터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인들의 제사장 역할 목회가 속죄의 제사적 차원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사제 (The Priest)에게 가서 "우림과 둠빔"으로 상담하고 있는 폭 넓은 목회의 역할도 보게 된다. 사사시대 특히 사무엘 시대에는 백성들이 조언을 받기 위해 선지자 (TheProphet)또는 선견자 (The seer)를 찾아 갔었고 (삼상9:9) 이때에 제사장들은 백성의 건강상의 문제확인까지 다루고 있었다.
또 이때는 선지학교를 세워 경험 많고 권위 있는 선지자가 선지학교생도를 지도하고 훈련시켰는데 그 중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개인교습은 받은 학생이었다.
후에 선지자들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전체적으로 곧 국가의 존망의 문제까지 다루게 되었고 어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왕들을 위한 특별한 목회를 했다. 나단이 다윗을,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돌본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목회의 주된 임무는 백성들의 영혼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또한 포로시대를 전후해서도 선지자들이 예언으로써 전체와 개인의 삶과 신앙을 지도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겔34장에 나타난 나쁜 목자와 좋은 목자의 비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귀감이 되고 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방황하는 자기 양을 기억하시고 선한 목자의 "보내심"을 언약하는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슥13:17)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온전한 구원의 목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를 예시하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나) 예수시대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목회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가 모든 목회의 원형이고 온전한 모델로서 구현된다. 이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선한 목자 곧 참 목자라고 자증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오실 메시야였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됨으로서의 현존일 뿐 아니라, 당시의 거짓목자들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대비되는 호칭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회는 목회적 요구를 전혀 모르는 살인자 (요10:10), 삯꾼 (요 10:12-13), 절도요 강도 (요 10:1,8 눅 10:21-23), 소경 (요9:39)으로서의 목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목회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며, 섬기는 자 (Minister)로 이 땅에서 왕 적인, 제사장 적인 그리고 선지자적인 그리스도의 삼 중직을 수행하시는 목회인 것이다.8) 또한 도시와 마을로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약한것도 고치시는 목회의 3대 역할을 수행하셨고 이를 목회의 본 (example)으로 세우시고 많은 목자들에게 그 발자취 (steps )를 따라오도록 하셨다.10) 이는 오라 (요1:39, 마 11:28-30)고 불러 택하시고 (call out), 자기 안에 거하며 믿게 하시고 능력 주신후 (요 10:26, 15:1-16, 마10:, 눅10:, call up),세상으로 파송하여 목양의 사명을 맡기시는 (마28:19-20, 먁16:16-18, 눅 24:47-49, 요 21:15-17, 행 1:8, call in)세가지 도식 곧 "Call out, Call up, Call in"의 흐름에서 목회의 기초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목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목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목회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일으키는 목회여야 한다.
다) 사도시대
초대교회 시대에서 사도들의 목회가 구현되고 있는 것은 일찌기 목회를 위임했기 때문이며 목회의 본까지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탄생한 처음교회가 얼마 되지 않아 교인이 증가되고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목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맡기신 양을 위임받아 치고 먹이는 (Feeding vs Shepherding) 목회에서 시작하였고, 종내 "예수사랑"과 "영혼구원"으로서의 목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두 서신과 그의 목회적 삶 속에서 나타난 목회상은 보혈목회, 말씀목회, 기도목회 등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고 오로지 목회는 그리스도목회의 본을 잘 따라가는 그 자체임을 역시 보게 된다.
바울은 교회를 조직하고 관리했으며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그리고 자기의 피로 사신 양을 사랑하는 것에 목회의 기조를 두고 있다.
(4) Paul 목회주제(롬1:16-17)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그는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고 데살로니가에서는 추방당하고 아덴에서는 조롱을 받았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로 모든 간계로 괴로움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고상한 지식으로 일단 수용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를 어디서나 언제나 전했고 복음을 수용한 양들을 목양했다.
그가 양들을 목양한 목회의 주제를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가) 구원
역사상 구원을 가장 절실하게 추구하던 시대에 헬라의 철학은 사변철학 혹은 자연철학이었다. 이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 백년이 지나면서 헬라철학의 경향이 변화되어 사변철학이 실제적인 도덕철학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의구원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ㄱ.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이다.(마9:21,눅8:36)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하듯이 육신도 모든 질병으로부터 구원 받아야한다.
ㄴ.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이다.(마8:25, 14:30)
하나님은 온갖 위험이 전혀 없는 생명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 라 어떤 위험 속에서도 능력으로 역사하여 구원하신다.
ㄷ. 죄로부터의 구원이다(마1:27)
죄의 올무를 끊고 자유케 하며 죄의 폭군으로부터의 해방하는 구 원이다.
ㄹ. 생의 약 영향으로부터의 구원이다.(행 2:40)
어그러지고 비뚫어진 사악한 세대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세상의 악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구원이다.
ㅁ.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롬 5:9)
저주받은 상태에서의 새로운 구원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 스도가 주는 구원이다.
ㅂ. 잃어버린 자의 구원이다 (마18:11,눅 19:10)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잃은 자들의 구원을 말한다.
ㅅ. 종말론적 구원이다.(롬13:11, 고전 5:5, 딤후4:18, 벧전1:5)
예수그리스도의 최종적 승리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의미한다.
나) 믿음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믿음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ㄱ. 단순한 의미로서의 충성과 성실이다.
바둘은 데살로니가에 편지할 때 (살후1:4) 그들의 믿음을 알고 싶어 했는데 그들의 충성심이 어떻게 어려운 시험을 견디는가를 알고져 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암 군인의표인 인내하는 충성과 성실을 의미했다.
ㄴ. 확신을 의미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고전 15:17) 만일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사시지 않았으면 그들의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기독교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이라고 긍정하여 신뢰하는 것이다.
ㄷ. 전적인 수락과 절대적인 수납이다.
신앙은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된다. 신앙은 사람이 진리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 시작된다. 사람들은 듣고나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동의한다. 이러한 수용이 마지막 단계에는 완전한 항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목회의 성서적, 신학적 기초가 약한 힐트너의 목회방법론을 보완하는 양으로 클라인벨(H.Clienbell)의 전인적 목회(Spiritual Center)와 홀롬즈(Urban T.HoLMS), 훅 (Gale HUCK)등이 시도하려는 "영성목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덴(T.C.O den)이 역사적 방법론의 통합목회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분명히 정리할 큰 두 갈래의 흐름은 투르나이젠과 힐트너의 문제이다. 투르나이젠이 설교 중심적인 연역론에 빠져 있어서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적 융통성을 발휘하지 모사고 있다면, 힐트너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나타난 성속의 모델을 무너뜨려 상담을 중심으로 하는 형용사적 모델의 관점론(목양적, 대화적, 조직적 Perspectives)에 빠져 있다.
따라서 이는 결국 인간의 경험에다 기초를 둔 귀납법 적인 방법론에 빠져 있으므로 인간의 현실문제 해결에만 급급하는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제반 목회신학은 항상 예수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박고 그의 역사성과 그의 구속의 실재성에서 그 맥락을 두려고 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로 각각 나누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나아가 최근에 들어와서는 목회의 폭이 넓어졌다. 니버(H.R Nievuhr)의 "목회관리자(Pastoral Director)"로서의 목회에서부터 목회를 개인 영혼의 성장, 발전, 유지, 치유, 구원에 대한 제반 배려까지 다루는 하나의 자연과학과 행동 과학으로 까지 다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일단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목회의 기능을 신학화 했던 것이 목회신학자들의 공헌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심층 심리한, 정신치료의학, 인류학 등이 속속 도입되면서 목회가 전이치료의 한 분야로 전락하고 있는 경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에 있어서 보조학문을 동원할 필요성은 있을지 모르나 보조학문들의 비 성서적 입장을 직시한 후에 적용해야할 것이며, 항상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목회의 본연의 입장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6절. 효과적인 사역을 위한 신학작업
1. 칼빈의 목회론
(1) 말씀 선포로서의 목회
목회는 구원사역이며 구원사역의 중심은 말씀선포이다. 말씀 선포로서의 목회를 주장한 신학자는 칼빈이다. 칼빈의 신학은 말씀중심의 신학이며 그 말씀이 역사함으로 구원사역을 이룬다는 견해를 갖는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적 태도는 그의 교회관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말씀선포에 의해서가 아니면 세워질 수도 없고 또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말씀을 배우고 또한 자라며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교회의 질서를 지킨다고 하는 이외 어떠한 굴레에 의해서도 결합되는 일이 있 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어떤 원리나 체계에 의한 교회를 말하지 않고 ;성서적 사고 즉 하나님의 말씀들을 모아 신학적 체계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목회는 말씀선포에 우선 순위를 두고 그 말씀으로 성도들을 뭉치게 한다는 인상을 칼빈은 강하게 주고 있다.
특히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시려고 하실때 친히 강림하시거나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매개체로 하여 우리가 보면서 직접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견적 방법으로 선포되는 말씀은 사람을 선택하여 부르고 부름에 응답한 자들로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하시고 친히 은혜로 충만케 하신다. 이렇게 선포되는 말씀은 선택된 직분 자들에 의하여 우리의 육신적인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선포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매개체로서 이미 선포된 말씀을 가시적 방법으로 선포함으로 구원의 사역이 이뤄지며 사람들의 영혼이 죄 사함받는 길이 된다.
이미 선포된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구약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미 말씀이 아닌 것이다.
칼빈은 성경 이외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옳게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려는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말씀선포가 이루어질 때 살아있는 말씀은 청종하는 자들에게 은혜가 된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크리스챤은 말씀을 열심히 읽고 말씀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했다.
양무리를 말씀으로 인도하고 끊임없이 위하여 기도해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충성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는 소명의 표징이 있다.
가)직무이다
교인들을 먹일 목사로 선택받아 인수를 받았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목회자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소명을 받은 자는 목회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목회에 자격도 구비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항상 망설이는 태도를 취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자기 대신에 보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피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되며 진지하게 연구하고 노력하여 충실한 목회임무를 수행해야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능은 필요한 것이며 가장 결정적인 표징은 목회자 자신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앙이야말로 목회를 사명으로 밀고 가는 원천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
나)소명이다
소명을 받았다는 말은 단순히 말씀으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이끌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먼저 말씀의 인도를 받고 말씀 안에 서서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는 것이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디)목회자를 위한 목회이다.
목회자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목회 대화를 통하여 사죄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먼저 경험해야 한다.
목회는 목회대화 속에 자신을 노출시켜 진정으로 목회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 자로 상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다. 목회를 수행해 나가다 보면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퇴보하는 경우도 있다. 거기서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깨달아 스스로 위로와 권면을 받게 될 때 새로 힘을 얻고 목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목회자요지로 현대적 개발이 급속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미래를 위한 복음 선포로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본 교회가 있는 지역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견인적 구원으로 말미암아 희망의 언덕, 복음의 요람이 될 것이다.
사회적 변수와 생활의 변수의 폭이 크고 급속한 지역은 타락과 범죄와 약탈행위가 심한 지역이므로 칼빈이 말한 전적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구원을 위한 기도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 2 장. 절 소그룹 복음전도를 위한 목회신학
1. 소그룹의 신학
인간은 서로 깊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가 하면 자기를 먼저 알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사람들이 서로 친밀하고 싶어하면서도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는 긴장관계를 창세기의 기록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기록(창 1:26~2:1)은 소그룹의 반향 (reflection for small group)이라고 아이스노글(Icenogle) 교수는 말한다.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라고 하는 독특한 상호 교제(intra-communication)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의 형상인 사람도 상호 교제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들었다. 그러므로 창조 질서의 회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서로 대화하는 것과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접근과 피함」이라는 심리학적 언어로 인간의 접근하려는 욕망과 함께 접근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사람은 친밀함에서 도망하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접근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다.」
아이스노글(Icenogle)은 그의 논문에서 공동체의 삼위일체 신학(A Trinitarian Theology of community)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를 창조사신 분으로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영으로서,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완성시키는 분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신다. 하나님은 공동체 속에 존재하시며, 공동체를 창조하시며, 공동체 속에 관계를 맺으시며, 공동체의 이상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헤스테네스(Hesten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성경적 근거들(Biblical Foundations for Christian Community)에서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하나님은 각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의 구속을 위한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공의와 자비의 사역을 감당하는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예수 부활의 증인인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새로운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나타난다. 공동체 속에 계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역사 하시고, 당신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분이시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성경의 하나님은 공동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공동체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소그룹 신학의 기반이다.
1. 소그룹의 이론적 기초
1) 소그룹의 인간학적, 사회학적 평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심리학과 사회과학의 현저한 발달로 인해, 개인의 행동과 아울러 그룹과 그룹 행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누구나 인간 행동을 이해하고자 하거나 개선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룹의 본질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소그룹 형식이 생산성에 큰 효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실험실 그룹이라는 연구팀을 장려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인격에도 변화를 일으켜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보다 깊은 곳에 있다. 라이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깊은 허기증에서 오는 것이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깊은 인간관계에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급변하고 비대해 가는 세상에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는 관계를 필요로 하고 있다. 소그룹은 수백 수천의 군중 속에서는 얻기가 불가능한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인간의 깊은 욕구를 채워 줄 수가 있다.
고독을 이기지 못한 현대인들은 어디서든지 안정된 소속감을 얻어 보려고 한 노력들이 곧 그들로 하여금 소그룹 모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한 동기였다고 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현대를 사는 교회가 자연히 이런 추세에 다소라도 영향을 받았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소그룹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은 전적으로 외부에서 온 환경 적인 자극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더 직접적인 원인은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다.
비대한 조직체로 굳어져만 가는 교회 현실을 앞에 놓고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히 성경 안에 있는 소그룹 정신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소그룹의 형식을 빼놓고는 우리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만큼 신속하게 교회가 지닌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그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환경을 만들어 주는 성경적인 왕도이다.
현대 생활의 무미건조함 속에서 정말 순수한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기독교적 소그룹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간의 관계 개선과 연합된 증거생활과 봉사생활로 인도하는 간접적인 길이다.
2) 소그룹의 성경적 근거
(1) 구약성경
사실상 소그룹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곧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종종 그의 목적을 성취시키고자 가족이라는 그룹과 형태의 소그룹을 통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그의 염원이 곧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임을 보이시기 위해서 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노아의 가족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던 것도 이 가족 그룹을 통해서였던 것이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출애굽기 18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 명, 오십 명, 백 명, 그리고 천 명의 그룹으로 나누셨는지를 알 수 있다. (출18:17-23, 신 3:14-15). 모세가 분담제도를 시행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한 '분담제도의 원리'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 거느릴 수 있도록 분담 조직한 '조직의 원리'는 현대교회 소그룹 운동의 선구적 원리인 것이다.
(2)신약성경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인 소그룹의 원리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소그룹에 관한 성경적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막 3:14-15, 눅 6:12-16). 예수그리스도는 사천 명이나 오 천 명의 큰 그룹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권유와 접촉이 가능한 소그룹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역하셨다. 이것은 개인 접촉의 중요성을 친히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열 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구별하여 대하실 때도 있었다.(마17:1, 26:37-38).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이루어진 밀접한 대화를 통하여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소그룹 운동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개인 접촉을 통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그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던 것이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복음사역에서 소그룹의 의미를 살펴보면, 초대 교회의 복음사역에서 소그룹의 의미를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 나타난 가정교회의 모습을 제일 먼저 들 수 있다. 오순절 다락방을 근거로 해서 태어난 예루살렘교회는 예배와 친교, 성경고부와 구제, 봉사를 목적으로 적은 수가 가정에서부터 모이기 시작한 교회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전도하여 처음 설립한 빌립보교회는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고(행 16:11-40), 소아시아의 에베소교회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서 시작되었다.(고전16:19). 뿐만 아니라 가이오 집의 고린도교회(롬16:23), 빌레몬 집의 골로새교회(골 1:1-2), 눔바집의 라오디게아교회(골4:15)의 경우도 모두 가정에서 시작된 가정교회들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초대 교회들은 적은 수의 무리들이 가정을 중심으로 모여서 기도하며 교제하고 복음을 듣고 배우면서 시작한 소그룹을 통하여 이루어진 가정교회의 형태이다. 소그룹의 전형인 가정을 통한 복음 전도는 초대 교회의 역동적인 힘이었다.
3) 교회사를 통한 소그룹의 활동 개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소그룹 활동을 살펴본다면 소그룹은 기원 후 2세기까지 교회 생활의 기본 단위였다. 즉 초대 교회의 가정교회, 지하무덤교회 등이 일종의 소그룹 운동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중세에는 수도원이 이러한 소그룹 형태로 이루어졌다. 베네딕트와 아씨시의 프란시스가 소그룹으로 그들의 추종자들을 모았었다. 그 후,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인 영국 키드민스터의 리차드 박스터가 가정을 중심으로 한 소그룹 형태의 목회를 했다. 그는 충실한 몇 년 동안의 설교 사역 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가정 모임에로 방향을 돌렸다. 그래서 일주일에 열 다서, 혹은 열 여섯 가족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문하였다. 그렇게 해서 일 년에 800가정 모임을 사역했는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한 모든 것보다 그 모임이 더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유명한 소그룹 형태는 요한 웨슬레의 속회 체제이다. 웨슬레는 소그룹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회심자들을 위해 '속회'라는 소그룹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장소에서 설교하라. 할 수 있는 한 많은 속회를 시작하라. 새로운 속회를 시작하지 않고 결코 말씀을 전하지 말라.
또한 기독교 운동 중의 하나인 YMCA는 1844년 영국의 런던에서 죠지 윌리암스의 방에서 12명의 청년들이 모인 소그룹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21년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프랭크 부흐만에 의해 시작된 옥스퍼드 그룹운동, 즉 MRA도 소그룹 운동의 결실인 것이다. 이 운동은 오늘날의 수많은 소그룹 활동(가정집회, 형제공동체, 청년연합회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통적 사회에서는 대가족제도, 혹은 공동체 사회의 대단위 형태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과학자들은 어떤 일들이 대그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강조된 소그룹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쿠르트 레윈이 그룹역학연구센터를 통해 그룹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교회에서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르러 소그룹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교회에서 생겨나게 된 소그룹의 형태는 기도에 주로 관심 했으나, 점점 성경공부, 혹은 은혜의 나눔 형태로 발전되었고, 후에는 소그룹의 교육적인 기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에는 소그룹의 형태가 교회에서 유익한 기구로 정착되었다. 이제 소그룹의 형태는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 학원, 직장, 특수 사회, 지역에서 복음전도를 향하여 발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현대 사회는 베이비 붐시대 이후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미분화되면서 대단위의 단체로부터 영향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소그룹에 익숙한 것이다. 결국 이 소그룹 운동은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의 기술 문명사회에서도 성경의 주된 가르침과 명령을 충실히 이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데 있어서 가장 적당한 기초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그룹운동은 현대교회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목회신학의 관점이 되는 것이다.
2. 소그룹 리더쉽의 개발
1) 소그룹의 리더쉽
소그룹 지도를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지도력은 전문적 지도력과 공동 지도력이다. 전문적 지도력이란 훈련된 지도력을 말한다. 이는 그룹 구성원이 자신의 경험을 통찰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지도자가 지도해 나가는 형태이다. 이런 접근 방법은 구성원들이 전문적인 지식을 얻고 싶을 때 합리적인 방법이다. 공동지도력이란 일련의 기능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능적 접근의 연구로서 지도력 자체의 역할에 따른 것이다. 이는 개인적 지도력의 기술은 한계가 있고 지도력의 발휘에도 제한점이 많다는 데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구성원을 동력화 하여 한 개인에게 지도력을 이양시키지 않고 전 구성원에게 지도력을 분배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전문적 지도력의 개념과 공동 지도력의 개념만으로 소그룹을 원만하게 지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더쉽의 일반적 형태에서 각 학자마다 그 이론을 달리하고 있듯이 그룹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리더쉽의 형태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리더쉽의 스타일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룹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고 일의 종류와 목적을 사전에 결정하여야 한다.
2) 소그룹 리더의 자질
그룹의 승패는 그룹을 인도하는 지도자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 점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그룹 리더의 자질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출4:10-17)은 리더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해 진 게츠는 영적 자질 목록을 스무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소그룹의 지도자는 성경이 말하는 자질을 갖추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한 인간으로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성경에 언급된 자질 외에,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엥스롬(Engstorm)은 열의 , 신용, 훈련, 자신감, 결단력, 용기, 유모어, 성실, 이해심을 말하며, 오스왈드 샌더스는 훈련, 비전, 지혜, 결정, 용기, 겸손, 순전함, 성실함 등을 든다. 이러한 지도자의 자질 중 공통적인 것은 영적, 지적, 인격적인 면에서 조화 있는 자질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소그룹 리더에게는 상술한 영적 자질도 필요하지만,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자질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니콜라스는 주장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성장하기 위한 헌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는 헌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헌신이다.
제 2 절. 소그룹의 권능
소그룹이 기능을 발휘하는 유일한 열쇠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8-20의 말씀은 교회신학의 초석이다. 이름은 본성(nature)과 인격(chracter), 개성(personality)을 의미하므로 예수의 이름은 예수의 본질을 나타낸다.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이며 셋인가? 둘이나 셋은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관계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소그룹 속에 임재 해 계실 때 둘 이상의 관계 속에서 용서와 화해가 실천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대표로 해서 모이는 소그룹에는 반드시 용서가 있고 치유가 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 병 환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5절에 「예수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는데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믿음뿐만 아니라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소그룹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이다. 관계 속에서 치유와 용서가 이루어지고 치유와 용서를 통해서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 이것이 소그룹의 믿음이며 소그룹 안에서 역사 하시는 예수의 권능이다. 예수의 임재와 부활은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권능 있게 이끌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 교회이며 사도행전은 성령은 권능으로 소그룹이 대그룹이 된 역사의 기록이다.
마가 다락방의 120문도는 작은 가정 교회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그 가정 교회는 교회의 핵심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다. 성경공부, 기도, 교제, 떡을 떼는 것 등 소그룹의 요소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선교의 역사에 뛰어들도록 작용하였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적용되고 변화되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에서 보았다. 디트리히 본 훼퍼가 교회는 성도들이 삶을 나누는 곳이라고 한 것은 소그룹의 본질이 곧 교회의 본질임을 잘 드러낸 말이다. 그러므로 소그룹이야말로 어려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천국의 그림자인 것이다.
1. 소그룹의 현상들
소그룹에서는 자기 표출이 다른 모임에서보다 쉽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소그룹은 정체된 유기체가 아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탄생으로부터 사망으로 이어지는 주기를 갖고 있다. 주기의 형태, 즉 발전 단계를 알고 있으면 소그룹이 어떤 단계(상태)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 있는 그룹의 형편을 받아들이게 되며, 그룹의 성장과 목표 성취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그룹 구성원들은 성격이 각각 다르고 욕구가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당 기간 긴장과 갈등이 있게 되며, 자기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적당히 꾸미는 언어적 도금 현상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점차 그룹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되고,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수용하면서 자신을 털어놓게 된다. 이런 변화에는 몇 가지 발전 단계가 있는데, 이에 대한 여러 견해는 아래와 같다.
(1)틸렌(Tillen)과 디커먼(Dikermen)의 견해
틸렌과 티커먼은 그룹발달 단계를 4단계로 나누었다.
a. 개인중심의 경쟁적 단계
이 단계에서 구성원들은 지도 계급 체재, 또는 계층(Peck order, 조직)의 확립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기네들 대신 책임을 져 줄 만한 강력한 리더를 요구한다.
b. 욕구불만과 갈등의 단계
그룹의 지도자가 멤버들을 대표해서 책임을 인수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구성원들은 그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지도자를 무능하고 쓸모 없는 존재로 본다. 그리고 자신들의 욕구불만과 실패의 원인을 그에게 돌린다. 이 단계에서 구성원들은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개인적 책임을 인수하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경향을 보인다.
c. 그룹조화의 단계
이 단계에서 그룹의 응집도가 높아지기는 하나 그것은 개인적 취향과 얕음을 수반한 것이다. 구성원들은 지지 적이지만, 한편 갈등을 회피하거나 속이는 경향이 있어서 그다지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특히 부정적 반응을 억제하고 집단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d. 그룹중심의 생산적 단계
구성원들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조화를 성취하기 위하여 갈등을 회피하거나 속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갈등에 직면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기행동에 대한 책임을 수용하고, 그들의 집단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참여하고 생산적인 작업 관계를 발달시킨다. 그들은 타인의 가치와 행동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일을 증진시킨다.
(2) 오스본(Susan M. Osborn)과 해리스(Gloria H. Harris)의 견해
이들은 그룹발전 단계를 다섯 단계로 본다.
a. 구성원들의 패쇄성이 중심적 특징인 초기 단계
b. 갈등의 단계
c. 진실한 그룹 감정이 발달하고, 감정의 정직한 교환이 가능하며, 그룹 경험에 대한 중요성의 상호 인식이 증가하는 단계
d. 구성원들의 응집력이 아주 높아지고 서로 구별된 개체로서 서로를 받아들이며 그룹을 독특한 경험 제공의 장(field)으로 보는 단계
e. 분리의 단계
(3)스티브 바커(Steve Barker)의 견해
a. 탐색기 b. 변화기 c. 행동기 d. 종료기
(4)클라이드 리이드(Clyde Reid)의 견해
그는 소그룹의 가장 매력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성숙해져 가는 경향성이라고 말한다. 이 성숙해져 가는 싸이클은 하나의 신비로운 그룹작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다섯 단계를 제시한다.
a. 의존 단계
공동 목적을 중심으로 모이며, 지정된 지도자가 일을 추진할 것을 기대하는 단계로서 마치 유아와 부모의 관계에서 어린아이는 부모의 지도력과 보호에 의존하는 것과 같이 구성원들이 지도자를 본능적으로 기다리는 단계이다.
b. 자유에의 저항 단계
이 단계는 그룹이 처음 자유를 가질 때나 지도자가 억지로 자유를 떠맡길 때, 흔히 저항이나 적개심 가운데 한 가지가 먼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c. 십대의 반항단계
이 단계는 그룹이 자체의 생활을 결정하기 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들이 지도자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그 자체의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d. 기쁨과 독립의 단계
이 단계는 그룹이 적의감을 표현하는 바로 그때, 지도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기뻐하며, 경솔한 행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계이다.
e. 상호의존 단계
이 단계에서 그룹은 지도자가 참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적으로 보기보다는 그의 특수한 지식과 통찰의 이점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리더쉽의 공유"가 나타나게 된다. 대체로 그룹 방법을 감지하는 초기 과정에서는 구성원들 간에 긴장, 불안, 초조, 분노, 욕구불만 등의 감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지만, 그룹 방법의 진행정도가 깊어짐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싹트게 되기도 하고 구성원들의 분위기도 성숙해진다.
틸렌(Tillen)과 디커먼(Dikerman)은 이들의 단계가 항상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위에 상술한 단계들은 보통의 소그룹 활동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객관적인 서술이지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규범적인 진술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단계들이라는 것이 소그룹 활동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지, 소그룹 활동이란 받드시 그런 과정을 거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해 놓은 발전단계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이러한 흐름을 숙지하고 있음으로써 운영에 도움이 될 따름이다. 아울러 인도자는 그 단계들을 모두 거치도록 유도해서는 안되며, 단계 중의 여러 부정적 현상에 대해서도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루기 위한 화해의 사역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 가운데서 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소그룹 다이나믹스와 성령의 역할
교회는 성령의 폭발력 대신에 정교한 조직과 계획을 대치해서 성령의 부재현상을 메우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교회 안에서 부단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은 교회에서 끊임없이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미국의 기독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 정통주의, 신 자유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많은 배려를 하면서도, 성령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일 아닐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떠한 현실이 초래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패커(J. Packer)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지명하여 세운 대리인의 사역을 무시하는 일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리자로서 우리에게 보내사 당신의 자리를 지키게 하시고 우리를 주님 편에서 돌보게 하신 분을 모르며 명예스럽게 하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사기행각이 아닌가?
그러면서 패거(J. Packer)는 성령 사역의 중요성을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성령이 아니고서는 복음과 신약성경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음과 거듭남도 없을 것이다.
제 3 절. 복음전도 신학과 소그룹
복음전도란 어느 곳에서든지 복음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선교란 교회의 복음을 전달하는 활동, 곧 교회를 통해 행해지는 본질상 그리스도 자신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선교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복음 전도에 관한 하나님 중심적인 연구가 전도신학이다. 선택이 영원 전부터라는 진리는 구원이 시간 속의 한 과정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과정 속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도이다.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복음에 의해서만 구원받도록 하셨기 때문에, 선택은 복음전도를 요구하며 복음전도의 결과를 보증하는 것이다.
성경은 복음전도야 말로 조직된 교회의 임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모든 전도 노력은 조직체인 교회의 직접적이고 완전한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교회는 제사장 같은 왕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벧전2:9). 구세주의 우월성을 선포하는 것이 모든 제사장과 왕의 의무이며 또한 선지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오순절은 성도의 보편적 예언성을 드러내면서 교회의 모든 신자를 전도자로 삼으신 사건이다.(욜2:28~29, 행2:3-4). 유기체인 교회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전도행위자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전도의 당사자이며 개인의 전도 행위는 교회의 전체 전도 행위 속에서 부분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지상 명령의 요지는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교회는 단순히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잇는 교통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구원받는 영혼들을 신자들의 교제 속에 연결시키는 임무까지 수행해야한다. 스나이더는 로잔대회에 제출한 논문에서 복음전도와 지역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복음전파만을 위한 수단이다. 더욱이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라는 사실을 떠나서는 복음전도의 의의를 찾을 수 없다. 복음전도의 소명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핵심과 주권적인 머리로 간직한 신자들의 사회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맡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자기의 인생을 교회에 맡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극대화되는 각종 소그룹이 지역 교회 안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주님 만나는 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신자 상호간에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 가운데 서로 연합하려는 가장 깊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그룹이 있는 환경(setting)안에서 신상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구속의 본질로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난가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의 본질은 죄에서의 회복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성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그룹이라는 분위기 안에서 가장 잘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속의 본질이 소그룹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소그룹을 형성하는 것은 분파나 엘리트주의가 아니고 망상조직(network)을 통해서 관계를 맺는 일이므로, 대중운동(mass movement)에는 소그룹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관계적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서의 회복이요, 완전한 성장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소그룹에는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난다는 소그룹 신학과 하나님 중심의 전도신학이 소그룹 복음전도를 위한 목회 신학에서 만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소그룹 복음전도에 대한 필자의 목회신학적 관점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전도의 유일한 수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그룹이며 둘째, 이 소그룹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목표는 언제나 복음전도라는 것 셋째, 소그룹 복음전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확신이다.
1.전도신학과 소그룹의 관계
1) 전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
(1) 용어정리
복음이란 헬라어 αγγ λιον(evangelism)에서 온 말로 "기쁜 소식"을 뜻한다.
고전적 헬라어에서 이 말은 종종 적군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의 소식'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기록자들은 이 단어를 헬라 사상적 배경에서보다 구약의 배경에서 사용했다. αγγ λιον 에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besorah)이다. 구약에서 모두 6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삼하18:20, 25, 27, 왕하7:9),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삼하4:10, 18:22) 등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종교적 의미가 첨가되어 시편과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이 단어가 ( basar)라는 동사형으로 장차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시40:10, 96:2, 사41:27, 52, 61:1). 여기서 복음의 일반적인 의미는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기독교의 전역사가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를 위해서 복음전도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1. 유앙겔리죠(ε αγγελ ζω)
이 동사는 신약성경 가운데 52번이나 등장하는데 '복음을 전하다'(to gospelize)는 뜻으로서 좋은 소식을 전하거나 선포하거나 가져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구약의 70인경(LXX)에서는 이것이 가끔 승리의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에 대해서 쓰여지거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구원을 선포하는 의미(시40:10, 96:2)로도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여러 가지 다양한 문맥 속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엄격하게 번역하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는 것 이상의 뜻을 가질 수 없지만, 성경 본문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에 대한 명백한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실로 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님의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전파와 입증, 설교의 행동, 말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만들어준다(막1:14-15, 눅4:18-21, 7:19-2 눅8장, 행8:6-2,12, 행10:36-38).
성경에서 '복음을 전한다'함은 결코 말뿐인 전파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행동 속에 설정된 행동이었다. 표적과 기사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보여준 사랑과 돌보아줌과 애정이 나타나는 많은 실례들 속의 행동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15:18 이하에서 자신의 복음전도 사역을 설명하기를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했다. 따라서 복음전도는 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과 모양으로 나타내야 하며, 이러한 "복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면, 말씀은 결국 공허하고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2) 케루소(κηρ σσω)
이 낱말은 예수님과 요한 그리고 초대 복음전도자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만큼이나 자주 나와서 신약 가운데 61번이나 쓰여지고 있는데, 기본적인 개념은 '왕으로부터 주어진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포'이다. "선포하다(to preach)는 말이 본래 가진 뜻은 선포자에 의하여 마을에서 선포되며, 대낮에 나팔을 울리면서 최신의 정보로서 모든 이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왕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선포자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은 절대적인 충성심이다. 그는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 25절에서 "나의 복음( αγγ λιον)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κ ρυγμα)"이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는 복음과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하나이고 동일한 메시지로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복음전도자와 선포자들의 궁극적인 임무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복음전도자는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에 충성하여야 할뿐 아니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성령께 의탁하여야만 한다.
3. 디다스코(διδ σκω)
이 낱말은 예수님의 복음전도를 설명하는데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마9:35). 가르침이란 진리를 선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대화형식으로 위대한 영적 진리들을 명료하게 하고 설명하셨다. 진리를 알릴 뿐 아니라 그것을 확증하고 또 예증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구원의 계획에 반응하면, 그 가르침은 곧 전도가 된다. 기독교대학에서 예배시에 전도자가 설교를 하고, 강의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들은 중요한 전도활동이요, 가장 훌륭한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임이 분명하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는 명을 받은 사도들은 진리로써 지성을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실천하였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노력하면서 유대인과 더불어 성경을 가지고 자주 변론하였다. 예를 들면 때로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등에 대하여 논쟁하면서 '변론하곤'(행17:2, 18:4,19, 19:8-9. 24"25)했었다. 그리고 사도들은 또한 '굴복시키기도 하고'(행9:22), '증명하기도 하고'(행17:3), '유력하게 말을 이기기도'(행18:28) 하였었다.
비록 사도들은 그들의 전도여행에 있어서 성읍에서 성읍으로 옮기며 전전했었으나 그들은 가능한 최고의 시간을 복음 전파와 가르치는 일과 변론과 원유하는 일로 소비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논쟁하였다"(행17:3). 고린도에서 "우리들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였으며 ... 그는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18:4,11).
아마도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에베소에서의 일인데 그는 거기서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으며", 게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했었다"(행19:8-10). 그 결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이 로마에 있어 체포된 상태이었으나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에게로 나아오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행28:23, 30-31).
4. 마데튜사오(μαθητευσ ω)와 소그룹운동
이 말은 '제자를 삼다'는 뜻으로 '가르치다'라는 낱말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임무를 주셨다. 그리고 그 방법은 소그룹 적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이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것은 주님의 전도 메시지 중의 하나였다. 그가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그의 선교활동을 계속할 그의 사람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소그룹적이었다.
"예수께서 필요한 것은 그의 말이 그대로 인쇄된 산 교본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제자들이었다." 열 두 명의 소그룹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자기와 함께 동거하면서 자기를 배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다(막3:14). 예수님은 3년 동안 이 적은 공동체를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양육하셨고, 승천하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선언하시는 가장 권위있는 파송을 단행하셨다. 그리고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자기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대 사명을 당부하셨다(마28:18-20).
'제자를 삼으라'고 한 말씀은 제자라는 이름을 12사도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여 적용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요한은 12명의 사도들이 아닌 상당수의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다(요6:66). 특히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저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행2:41, 6:2,7).
제자란 그의 스승을 닮고, 그의 사역을 계승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노예로서 섬기는 자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라고 하지 않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것은 그가 다스리시기를 원하신 새 왕국의 백성은 예외 없이 자기를 닮고, 그의 사역을 계승하기를 소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하신 깊은 뜻 가운데는 단순한 복음 전파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까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말투스(μ ρτυS)와 소그룹
이 말의 뜻은 '증인'(witness)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증인은 곧 증명, 증언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교가 참되다는 것을 나타내는 내 증명이다. 너희는 살아 있는 나의 신임장이다'는 의미로 이 말을 적용하셨다.
제자와 증거가 얼마나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려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보내다'(apostello, pempo)라는 동사가 '제자'라는 말과 같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보내다'라는 말이 무려 215번이나 나오고 있다. 거의 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증인으로 파송 하는 내용과 관계된 말이다.
누가는 증인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그것을 전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사도들의 증거를 듣고 믿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고백하거나 전하는 경우이다.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선언하셨다(눅24:28).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다(행1:8).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바로 그가 예언한 그 증인들이 탄생하여 이루어진 거룩한 무리들이었던 것이다(행1:22, 2:32, 3:15, 5:31, 10:41).
그러나 증거의 사역은 항상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을 때 그 자리에는 12사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다른 제자들이 동석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눅24:33). 주님의 명령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제자들이 다 증인이었다. 스데반도 예수님의 증인이었다(행22:20). 스데반은 사도들과 같은 첫 번 목격자가 아니었으나 증인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순교자였다.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자라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증거로써 자기 생명을 내어놓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순교가 그를 증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증거가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성경 상에 나타난 복음전도의 개념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복음전도란 인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복음을 공적 사적으로 선포하며, 많은 시간을 들여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까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썼다. 여기서 '너희'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7절)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불신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자들을 양육하여 제자와 증인으로 삼는 것까지를 생각하게 된다.
앞서 복음전도의 개념을 규정한데 이어서 복음전도의 성경신학적 기초를 고찰하고자 한다. 복음전도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뜻이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과 하나님의 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복음전도이다.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를 개관하시면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친히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이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4-48).
위 말씀에서 우리는 복음전도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며, 복음전도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님께서 전도의 수행능력이 되시며,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전도의 수행자임을 알게 된다.
(2) 구약에서의 전도
복음전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28:18-20)에서 부터인가? 사도행전에서 비롯되었는가? 오순절 이후인가? 물론 초대 교회가 급 성장하게 된 것은 당시의 열심있는 전도자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서 설계하셨고 준비하셨던 계획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빙크(J. H. Bavinck)는 "창세기 1장 1절은 분명히 마태복음 28장 19절부터 20절까지의 지상명령이 있게 된 기본적인 초석(초석)이다" 라고 흥미 있는 고찰을 보여준다. 이 세상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서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1에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고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계획
온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식물과 동물로 세상을 채우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심으로 창조 작업을 마치셨다. 전 창조 과정 가운데 이 마지막 부분에 심오하고도 중대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자 함이었다(창1:26-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을 한 분 하나님 안에서의 복수의 格位, 즉 "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란 三位一體 하나님의 내적 교통을 보여주는데 사람을 창조함에 있어 聖三位께서 모두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영원히 구별되는 세 분의 인격으로 형성된 한 하나님으로서 사회적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고 그들이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이 가족 공동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고 명하셨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창조하시고, 이를 공동체를 통해서 자기의 왕권이 땅 끝까지 충만하게 행사되기를 원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경륜이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주의 뜻을 어겼다. 그를 불순종하므로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즉시 인간이 하나님의 자신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도록 救贖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인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이 뱀(사단)을 이길 것이라는 구속에 관한 최초의 약속을 이미 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순종은 더욱 증가하여 마침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창6:5,11).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 홍수로 피조물들과 땅을 멸하셨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아담에게 주셨던 계명을 노아의 가족 8명에게 다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덟 명의 '소그룹'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을 인간들은 공공연히 다시 어기고 말았다. 이 사실은 바벨탑 사건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세상 끝까지 充滿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名聲을 얻기를 더 바랐고 중앙 집권적 정부를 만들어 온 땅에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인생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게 되자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셨다. 창세기 11장 5-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셨고 말씀하셨으며,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으며,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이와 같이 최초로 인간이 분산된 것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도록 하신 것이다.
(2) 한 개인을 부르심
인간구원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개인으로부터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사역 방법은 자신에게 순종하고자 하며 자신의 명령을 행하고자 원하는 한 개인 아브라함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었다.
창세기 12장 1-4절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성경의 나머지 전 부분을 이해하고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이 간단한 말씀 속에서 그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들어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어느 특정한 장소를 지명하여 아브람을 부르시지는 않았다. "아브람은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한 인격에게 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가 처한 지리적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행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첫 마디는 "...가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복음전도격 소명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유의할 또 한가지 성격은 그의 관심이 범 세계적이라는 점이다. 지상의 모든 族屬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들은 후대에 태어나서 성경 말씀을 통한 지식과 역사를 통한 지식을 갖고 있으므로 이 말씀 속에 언급된 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救世主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라는 약속이 있는 것이다. 지상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 받게 되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모든 면을 다 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한 개인으로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는 온 세계를 포괄한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이 점은 창세기 18:18, 22:17-18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창세기 26:2-6에 이삭에 주신 약속, 그리고 창세기 28:12-14에 야곱에게 약속하심으로 거듭 강조되었다. 마침내 야곱에게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가 되는 열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들이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조상이 되며,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이 열 두 명의 이름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계21:12). 하나님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기 위해 한 개인을 공동체로 부르시고, 또 소그룹을 통해서 당신을 뜻을 성취하려 하심을 알게 된다.
(3) 소그룹으로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과 그 가족을 통해 시작하신 자신의 역사를 한 민족을 통해서 계속하신다. 하지만 그 시작은 소그룹적이었다. 이는 약속하신 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대로 였다. 이 민족은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救贖史의 완성을 위해 선택된 집단인 셈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된 것은 다른 민족보다 우수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媒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의 뜻은 저들을 통해서 온 만방에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고자 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한 후 이스라엘의 모세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출18장).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문제들을 홀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모세가 아직도 이집트의 구조에 익숙하여 바로와 같은 방식으로 통치한 것이다. 그 결과 모세에게는 고역이었고, 백성들에게는 고통이었다.
모세의 장인이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는 신실한 일꾼들을 선발하여 업무를 분담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조직을 1000, 100, 50, 10명 단위로 나누어, 그 위에 각 1명씩 부장을 세웠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이집트의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10명 단위의 소그룹으로 가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온 세상을 구원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부응하는 제사장의 나라를 세웠다는 요점이다.
(3) 신약에서의 전도와 소그룹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복음이 되셨을 뿐 아니라 복음전도의 모형이 되셨다. 즉 제자들을 택하여 전도하게 했으며 친히 본을 보이시고 또한 그들에게 전도사역을 위임하셨다.
ㄱ.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도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눅6:13-17). 예수님이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 둘을 사도로 지명하신 이유는 그 숫자가 하나님의 메시야적 왕국과 어떤 영적 관계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쉘(Eldwin A. Schell)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열 둘은 이스라엘 영적 숫자이다. 열 두 족장, 열 두 지파, 하늘의 예루살렘의 열 두 문과 열 두 기초 등, 열 둘이라는 숫자는 어디에나 인간 권속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남은 餘生의 대부분을 이 소수의 제자들에게 바치셨다. 그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전 사역을 이 소수의 무리들에게 걸으셨다.
예수께서 제자를 택하신 일차적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막3:14)라는 이유에서였다.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을 부르신 후 계속적으로 그들과 함께 지내셨다. 예수님이 이 소수의 제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다. "실제로 그는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셨다". 그는 그들과 잡수셨고, 주무셨고, 그의 모든 사역의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본을 보이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치시되 그들이 부딪히는 모든 상황 속에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방심할 수 없는 훈련이었다. 제자들은 무수한 군중을 시중하면서 인기와 반대, 성공과 실패,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의 부단한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했다. 그러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을 서서히 제자로 만드셨다.
ㄴ. 소그룹속에서 전도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거하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내사 전도하게'(막3:14)하는데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신 후, 자신이 지상에서 시작하신 사역을 예수님 대신 제자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복음전도의 본을 친히 보이시고 그들을 훈련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를 키우심에 있어서 거의가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시면서 그 가운데서 행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제자들을 상대로 동일하게 사역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 목적을 깨닫게 하는데 있었다.
때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데 있어서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개별적으로 가르치셨다(요21:15-23에서 베드로). 때로는 특별히 훈련하시기 위해 소집단을 택하시기도 했다(눅8:49-56, 9:28-36: 막14:32-36에서 베들로, 야고보, 요한). 또 어떤 때는 그룹을 대상으로 가르치셨다(마13:10). 또한 군중들과 더불어 가르치시기도 하셨다(마5-7장 산상수훈).
예수님께서는 또한 몸소 본을 보이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수 방법과 설교와 치료하는 것을 관찰하게 했다. 제자들에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위임해 주시면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도록 허락하셨다. 五餠二漁의 이적 때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앉게 하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게 하였다(요6:1-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고 돌아와서 경험했던 것을 토의하게 하셨다(눅9:1-10, 10:1-20). 제자들이 사역에 실패해서 그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예수님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하시기도 하였다. 한 예를 들면 간질병 앓는 아이를 제자들은 고칠 수가 없었다(마17:14-21).
주님께서 개인이나 손수 택하신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주위에 몰려든 이름 없는 군중들을 깊이 의식하셨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으로서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무수한 대중들도, 사랑해주어야 할 자로 여기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보면 제자들을 향한, 또한 더불어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이들을 위한 생애의 모범이 되신 것을 알게 된다.
누가는 예수님의 복음전도에 관한 말씀과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4:43-44). 예수님은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전도하시고자 사역의 범위를 넓혀 나가셨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하셨다.
ㄷ. 소그룹에 복음전도를 위임하신 그리스도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특별히 열 두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궁극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항상 그의 사역에서 제자들이 그의 일을 인계 받아서 구속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 때를 위하여 조금씩 준비하셨다. 이 계획은 그들이 동행하면서 점진적으로 명확하게 되었다. 인내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전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께서 세 번째의 갈릴리 여행을 시작하셨을 때(막6:6, 마9:35), 그는 그의 제자들이 더 직접적으로 그와 함께 사역할 때가 왔음을 아셨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아 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둘씩 보내셨다. (마10:5,막6:7, 눅9:12)
어미 독수리가 그의 새끼를 둥우리 밖으로 밀어내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바깥 세상으로 던져서 그들의 날개를 시험하게 하셨다. 물론 그들을 보내기에 앞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전도사역에 대한 지시사항들을 전해주셨다.(마10:5-42)
이 모든 지시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가 자신의 전도와 똑같다는 확신을 주심으로 끝을 맺으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 요13:20)
이 동일성을 생각해 보라! 제자들이 나아가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다면, 그 자비의 행위는 반드시 보상될 것이다(마10:42).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9:6, 막6:12). 이 적은 무리의 제자들은 마침내 스스로 그리스도의 활동적인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다.
전도사역의 임무를 제자들에게 지시하는 이 원리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 후 하늘로 되돌아가기 직전에도 결론적으로 설명되었다. 적어도 네 번 그가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그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20:21, 21:15-17, 마 28:18-20, 눅24:48)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시 모든 것을 되풀이하면서, 그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모든 것을 성취하셨는가를 보여주셨다(눅24:44,45).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의 부활 등 모두 다 계획에 따라 된 것이었다(눅24:26).
3. 소그룹 성경공부의 중요성
교회 속에 속할 수 있는 소그룹의 형태는 다양하다. 전도를 위한 그룹, 기도그룹, 봉사그룹, 독서그룹, 성경연구그룹 등 구성원들의 요구와 교회의 성취 과제에 따라서 다양한 소그룹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성경공부 중신의 소그룹은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들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소그룹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을 배웠고(행2:42), 예수님 자신도 말씀과 삶의 모범을 통하여 12명의 제자들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요17:21). 그러므로 소그룹 성경공부는 교회 안에서 핵심적 위치를 점해야 한다. 성경말씀은 우리가 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근원이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우리의 믿음과 삶은 발전되며, 성숙되어 간다. 우리가 소그룹으로서 함께 생활하는 이 공동체적인 삶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는 것이다.
성경공부가 소그룹의 중심에 놓여져야 하는 데에는 몇 가지 고려되어야 할 요소가 있다.
a. 성경메시지의 재 이해는 교회사에 있어서 일깨움, 개혁, 갱신을 계속해서 일으켜 왔다. 성경을 통한 회원들 간의 자각이 그룹 내 교제의 기초가 되므로 참된 인간관계의 회복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b. 성경공부가 그룹의 깊은 교재에 결정적인 요소를 제공해 준다. 이렇게 되면 소그룹이 인간중심의 모임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줄어든다.
c. 많은 교인을 가진 대 교회는 교제의 결핍이 많은 문제를 수반하는데, 소그룹 운동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요소가 신중히 검토되어 소그룹 운동으로 전개될 때 우리의 중심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옮기어지며, 양적 성장의 부정적 시각을 극복하고 양과 질을 동시에 지향하는 교회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1) 소그룹 성경공부의 내용
교회 내에서 시행되는 소그룹을 통한 성경공부는 좁게는 개인의 욕구에 부합되는 측면이 있어야 하는 반면에, 넓게는 교회 전체의 목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교회의 전반적인 목표와 연관지어 교육 계획을 세워야 한다.
소그룹 성경공부의 내용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계속적 창조와 인도, 하나님의 도구로써 교회에 대한 이해 등이 있다. 이를 통해 구성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하나님께 들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성경공부가 성경에 대한 지식의 전달과 습득이라는 도식적 관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순간 순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며 성숙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회심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개인에게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신자의 성숙을 의미하는 첫 출발점인 것이다. 성숙의 목표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공부를 중신한 소그룹 활동의 목적은 성경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도록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성도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2) 소그룹 성경공부의 방법
소그룹 성경공부 내용에서 제시된 것들은 근본적으로 각 구성원 개인의 실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소그룹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이 방법은 성경의 진리를 우리 생활 속에 구현하도록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생활 속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소그룹을 인도하는 지도자는 평신도이므로, 신학적 훈련과 사고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려운 교재를 택하는 것보다는 교리의 핵심 내용과 성경 자체를 소그룹의 구성원들이 읽으며,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3단계 소그룹 성경공부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소그룹 성경공부 제 1 단계는 주제별(교리 중심) 성경 공부가 좋다. 이 단계에서는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출판한 10단계 주제별 성서연구를 교재로 사용한다. 1단계를 마치는 데에는 약 1년간의 기간이 소요된다. 1단계에서 이 교재를 택하는 이유는 이것이 조직신학적 분류에 의한 주제에 대한 접근이기 때문에 소그룹에 처음 참여하는 초신자라도 지루함 없이 쉽게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용어에 친숙해질 수 있다는 것과 매주 모여서 성경연구를 할 때마다 새로운 주제를 접하므로 신선함을 준다는 것이다.
소그룹 성경공부 제 2 단계에서는 직접 성경과 부딪치면서 공부하는 단계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권별 성경공부교재(귀납법적 성경공부교재)를 사용한다. 그리고 매일 성경 읽기와 Q.T.를 의무적으로 시행하며,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여기서 목적하는 바는 성경공부에 참여한 개개인이 스스로 성경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자기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제 2 단계에서는 2년의 과정이 소요된다.
소그룹 성경공부 제 3 단계에서는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성경 이외의 참고서적 사용과 함께, 토론의 비중이 커지는 단계이다. 즉, 주제에 맞추어 읽어야 될 성경의 내용과 도움이 될 참고 서적을 선택해 읽고, 리더에 의해 제시되는 문제들을 토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단계이다. 여기서는 신앙의 행함이 강조되어 소그룹 전체가 지역사회나 교회의 특정한 사업을 맡아서 봉사하는 현장 실습(field work)을 반드시 수행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이 단계에 가서야 교회의 목표에 맞추어 움직이는 소그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연수의 제한을 두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가 새로운 자료와 함께, 수행할 현장 실습임무를 계속 제시해 주면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소그룹을 인도해 가는 리더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의 지도자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매주 정기적으로 모여 소그룹에서 처리해야 될 과제를 미리 공부하면서 기도로 준비한다.
3) 소그룹의 인도 원리
소그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이 질문에 구체적이고 완전한 방법을 만들어, 만인을 따르게 할 권위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리더 자로서의 자질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개발되어 가는 것임을 직시하며, 본 논문에서는 규칙적으로 계속 실행해야 할 원리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의 소그룹 모임을 인도하는 데 있어 유의해야 할 다섯 가지 원리를 말한다.
a. 급조하려는 유혹을 피하라.
b. 생명의 변화를 기대하라.
c. 코치와 같은 지도자가 되라.
d. 말씀과 경험을 공유하라.
e. 질문을 적절히 활용하라.
니콜라스는 아홉 가지의 구체적인 기술을 들고 있다.
a. 들으라.
b. 질문하라.
c. 성경공부를 할 때 모든 조원을 참여시켜라.
d. 관심과 온정,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라.
e. 모임 시간에는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어 놓아라.
f. 모임을 해 나가면서 조원들의 도움을 청하라.
g. 문제를 함께 풀어가라.
h. 모임에 대하여 준비하라.k
I. 당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을 훈련시켜라.
라이드(Clyde Reid) 역시 리더가 소그룹에서 훌륭한 리더쉽을 유지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항상 유의해야 할 기본적인 원리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 원리는 특히 리더의 권위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소그룹의 자유를 허용하는 스타일의 리더쉽을 필요로 하는 그룹에서는 매우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a. 소그룹 리더는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듯 사랑과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b. 애정이 많은 부모는 또한 자녀들에게 분명한 선을 그어 줄줄 안다.
c. 리더는 자기의 언행으로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을 개인적으로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d. 좋은 부모처럼 리더는 그룹회원들이 책임감과 리더쉽을 자기와 함께 나눌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e. 리더의 역할 속에는 그룹에서 솔직하고 진지한 교제를 회원들과 함께 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4) 실습을 통한 리더쉽 개발
그룹 인도는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과 이론이 겸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룹 인도는 그 방법이 항상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는 인도자의 다양한 융통성이 발휘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데, 그 경험을 개발할 수 있는 길은 여러 모양의 그룹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거나 한 그룹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배울 수 있다. 교회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길은 교회에 한 성경공부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에 훈련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참석시킨다. 그리고 그 그룹 인도자를 매번 바꾸어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리더쉽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 한사람의 방법만 배우는 것보다는, 몇 사람의 인도하는 방법을 보고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더 좋다.
허쉬와 브랑챠드(Hersey and blanchard)는 소그룹 리더의 양성은 소그룹 안에서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양성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일반적인 양성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a. 원래 리더를 관찰하는 단계(Watch leader)
b. 원래 리더와 함께 업무를 수행하는 단계(try to leader)
c. 원래 리더와 업무를 분담하여 수행하는 단계(lead with support)
d. 직접 인도하며 훈련받는 단계 (lead and train)
e. 이상 네 단계로 진행되는 소그룹 리더의 양성과정에 소요되는 기간은 각 단계에 짧게는 3개월씩, 길게는 1년씩 걸린다.
f. 원래 리더는 각 단계를 지나면서 지배자, 관리자, 조정자(king, manager, controller)의 역할에서 차츰 지도자, 봉사하게 하는 자, 감독자(coach, equipper, trainer)의 역할로 전환하다가 마지막에 그 그룹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리더에게 권한을 위임한다.

제 3 장. 중소도시 진주의 현황
제 1 절. 중소도시의 특성
1. 조사계획
한국교회의 취약점이 많지만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진단 없이 목회계획이 수립된다는 점이다.
의사는 진단 없이 처방하지 않고 장군은 정보 없이 전략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는 진단 없이 목회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은 말씀했으나 그것을 수행하느냐는 것은 말씀하지 안 했으므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 목적을 선언했지만 조직과 계획을 마련하는 일은 우리의 일로 남겨 두었다.
목사의 역할 중에서 왕 같은 직능은 교회조직 구조와 과정에 대한 교역이다. 목사는 예언적 혹은 사제적 목회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만큼 이 왕 같은 목회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진실로 교인들의 수많은 개인적 목표, 요구, 그리고 관심들을 조직된 프로그램과 집단활동을 통해서만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목사가 사람들을 목회할 수 있는 한 방도는 교회의 조직적 국면들에 대하여 유효하게 목회하게 될 것이다.
도시 교회 교인들의 삶의 형태, 신앙적 경향, 실태, 선호경향 등 을 조사하여 이들의 need를 발견하고 이를 적절해 활용해야할 것 이다.
(2) 생각( Thingking)은 있어도 연구 (Study)가 없다는 것이다.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고 타교회의 프로그램을 통째로 사용하다가 곤욕을 치루는 사례가 많다.
타교회의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을 재해석해서 자기 교회에 맞도록 작품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3) 학습 (Learning)은 있어도 훈련이 없다.
가르치고 배우는 자는 많이 있어도 이를 실천하며 모범을 보여주는 자는 적다. 그것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진단이 없거나, 연구가 없거나 훈련이 없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언제, 누가 할 것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need가 무엇인가
현재의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현재의 need와 프로그램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정황 해결에 대한 동기유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해결이 가능성이 제일 높은가
미래에 대한 현재성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
무슨 행동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행동에 대한 변화변수는 얼마나 되는가
무엇부터 실천해야 하는가 손차가 정해졌는가
누가 시행할 것인가
언제 시행할 것인가
시행방법은 무엇인가
조직은 완벽한가
목표는 세워졌으며 명확한가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이 변화 되었는가
이후로 어떻게 할 것인가
제안점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은 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고 계획을 입안할 수도 있고 목표설정 및 프로그램 작성도 손쉽게 할 수 있다.
2) 목회계획 실시
계획 목회는 교회전체를 동원해서 교회의 본질과 선교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하는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는데 있어서 주어진 모든 물적, 인 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조직적이고 포괄적인 조사 방법으 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을 말한다.
계획 목회에는 몇 가지 의 원리가 있다
(1) 교회로 하여금 그 본연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이다. 현상유 지가 목회가 아니고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2) 교회로 하여금 그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 전체 교인을 참여시 킨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목회는 교역자 혼자서 모든 일을 하 는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목회개념은 전체 교인들과 함께 하는 목회이다.
(3) 목회활동의 모든 면을 포괄적으로 조정해서 교회가 그 맡은바 선교적 사명을 다하도록 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 다.
(4) 회중의 need를 분명히 파악하기 위한 조사목회라는 점이다.
계획목회에는 대체적으로 5단계의 과정이 있다.
(1) 해야할 일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정말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취약점은 무엇이며 교회의 강점은 무엇인가를 알아 적절히 구사해야 한다.
즉 선명한 교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깨닫는 일이다. 또한 일의 순차(Priority)도 명확히 정해져야 하며, 인식화로 과정에서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서 많이 참여하게 해야 한다.
(2) 계획하는 일이다.
인식이 되어져 있는 목표를 중심으로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일이다. 모든 계획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하며 그 사실 은 정확해야 하며 또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계획은 현재에서 미지의 세계로 우리의 생각을 투신하는 과정이 므로 가능한 모든 제안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
(3) 조직하는 일이다.
조사를 통하여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한 후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조직하는 일이다. 이 조직은 교회의 기본적인 목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4)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교역자의 중요한 역할은 수립한 계획을 조직된 사람들이 실천에 옮기도록 추진하는 일이다. 목사는 항상 어디에서 무슨 일이 되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5) 평가하는 일이다.
목회개발의 마지막 절차는 평가하는 일이다. 평가기준은 어디까지나 그 사업이 교회의 목적과 선교적 사명의 완수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느냐 하는데 두어야 한다.
2. 중소도시의 특성
1) 도시의 개념
근대적 도시의 발생은 1850년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면서 급속한 도시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기계 공업의 발전은 도시의 물리적 면모를 변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시사회의 체질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도시의 발생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인간이 일정지역에 정착하여 생활을 하게 된 B.C. 5,500년경 석기시대를 도시발생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부터 도시는 역사적 창조의 중심영역이 되었고 한나라의 발전적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노동분화와 경제잉여가 가능해졌고 따라서 여가교욱과 학문의 향상 그리고 기술 과학의 발전이 초래되었고 도시는 인간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중심영역이 되었다.
현대의 도시는 발전의 중심지가 되면서 변화의 중심지역도 되었는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측면등 거의 모든 분야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죤 실자마키(J. Sirjamarki)는 도시는 지역내에 조밀하게 정착해 있는 인간과 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건축물의 집결체이며 이질적인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며, 어떤 공동사회 의식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진보된 인간의 결합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도시를 인간과 건축물의 집결된 물리적 현상으로 보았고 이들 집단은 공동체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양식, 문화, 질서 제도등을 필요로 하는 사회집단으로 분석하였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의 시조 R.E. 파크는 도시의 개념을 "문명인의 자연적 생활 영역이며 철학과 과학 그리고 합리적이며 세련된 인간을 만드는 창조적 영역이며 인간이 자기를 개조해 가는 사회적 실험실"이라고 정의했다.
D. 포포노는 도시를 "타 지역에 비해 도시화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 지역사회"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지역사회는 공동의 문화가 작동하는 지리적 동일지역이며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의 광범위한 욕구에 부응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하였고 "이러한 사회조직은 사회적 경계지역, 정치적 경계지역 및 물리적 경계지역등으로 구별한다"고 말한다.6)
한편 오늘날 도시에 대한 개념은 "시대성" "변화성" "이질성"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볼때 도시는 인간의 정착생활에 그 기원을 두고 이질적 인간들의 물리적, 사회적 집단의 일정 영역이며, 창조적 합리적 결합형태를 표현하면서 다양성, 변화성, 복잡성을 내포한 발전적 중심지역으로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1980년 태국 파타이야에서 열린 선교대회 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에 100만 이상의 도시가 135개(구 소련과 중공 제외)나 되며 전세계 인구의 85%가 도시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도시인구는 계속 증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브리스 (G. Breese)는 "개발도상국의 도시는 곧 국가"라고 까지 정의하고 있고 도시는 사회의 혼 (Soul)이며 또한 세계에 추돌하는 열쇠자체이다라고 클라엘바우트 (D. Claerbaut)는 말했다.
따라서 이제 도시생활은 현대인의 일반적 경험이 되고 말았다. 특해 대도시는 더욱 그렇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도시화는 산업화와 더불어 지역마다 시차는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서구 사회는 이미 고도의 도시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며 2차 대전 후 현재까지 이는바 개발도상국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기회를 찾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자신이 살던 농촌 공동체를 떠나 도시로 몰려들고 있으며 도시지역 자체도 날로 확장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도시는 항상 사람들이 붐빈다.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고용 기회의 부족, 주택설비와 도시하부구조의 미비, 교통문제 등 많은 도시문제를 야기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화 율이 50%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이며 전통적인 농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다. 이러한 도시를 사회적인 근거를 따라 고찰하고자 할 때에 제일의 관점은 사람 즉 인구이다. 따라서 도시는 일단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다. 1887년 국제통계회의에서는 도시의 인구표준을 2,000명 이상으로 할 것이 결의되었으며 미국의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1만 이상의 중심지 및 그 주변의 인구밀도 1평방 마일당 2,000명의 구역을 도시화된 구역이라고 하였다. 한편 도시에 대한 정의는 유엔의 기록에 의하면 "인구 2만 이상의 사람이 지역적으로 접근하며 한 단위로 형성한 지역 공동체"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행정 구역 당 인구 5만 명 이상의 한 단위 지역을 도시라 한다.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관점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먼저 피레네 (H. Pirenne)는 델리와 동경 같은 정치, 학문의 중심지와 봄페이, 홍콩 같은 경제의 중심지로 대별한다. 호셀리츠 (V.F. Hoselitz) 는 생산도시와 기생도시로 나누는데 생산도시란 경제성장에 우익을 주는 도시이고 기생도시란 그 반대이다. 또한 레디필드와 싱거 (R. Redifield & M. Singer) 는 "정통 발생의 도시와 이질발생의 도시"로 나누었는데 정통발생의 도시란 옛 문화의 체계적이고 반사적인 차원을 지켜가는 도시요, 이질 발생의 도시는 옛 문화와 옛 문명을 초월하거나 상충하는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도시를 말하는데 그들은 이를 윤리질서와 기술질서의 도시로 다시 나누어 설명함이 특이하다. 또한 죠베르그 (G. Sjoberg)는 산업이전의 도시와 산업도시로 대별하기도 한다.
(2) 도시의 형태
도시의 형태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첫째, 고대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신을 위한 도시"를 생각할 수 있으며 둘째, 왕권의 전적인 수행을 위한 "왕국도시"가 있고 셋째, 봉건주의 시대의 "영주를 위한 도시" 넷째, 상인과 시민을 위한 "민주적 도시" 끝으로, "전문적 기술 도시"등이 있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도시는 급속한 기계공업의 발전과 인구 증가로 그 면모와 양상을 달리하고 있으며 합리적 도시계획에 의한 분학적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형태는 다양하며 따라서 도시화의 경향 역시 수다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몇가지 형태를 살펴보면
첫째, 광역도시
도시의 지역규모는 지형, 역사, 인구 등 그 도시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는 없다. 급속한 인구 증가는 지역적 확대가 불가피해졌고 특히 교통, 통신의 발달은 도시의 급속한 팽창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인구집중과 지역확대의 현상으로 나타난 도시를 광역도시 또는 거대도시 (Metropolitan)로 불리우게 되었다.
(2) 농촌과 상대적으로 비유되는 지역도시
역사적으로 인류가 정착하여 살아온 형태는 여러 가지 있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농촌은 일반적으로 보수성, 정체성, 후진성을 내재한 전통사회 혹은 원시사회로 이해되고 있으며 경작지를 근거로 한 가족 중심의 집단 사회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며, 인적구성은 동질적이다.
이에 비하여 도시는 경제적 분화가 형성되고 제도적 조식이 확립되어 있으며, 인구 분포는 다원화 전문화되었고, 도시의 사회질서는 가족이나 씨족 집단을 초월하여 유기적인 조직과 제도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도시는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며 성장과 변화를 통한 발전을 부단히 하는 지역사회이다.
(3)제도적 조직의 유기적 공간
도시는 거대한 인구의 집결지이며 그 성격은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이러한 이질적 도시인들은 상호 협동을 통하여 생활방식을 조성해야하며 이를 위한 적절한 제도와 조직을 요청하게 된다. 그리하여
제도와 조직으로 사회 규범을 만들고 어느 정도의 가치관을 조정함으로서 운영되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적 사회집단이다.
(4) 인간활동의 기능적 중심영역
도시의 기능은 그 지역의 자연적인 조건인 지형, 자원, 역사 그리고 인위적 개발에 의해 정해진다. 도시는 경제집중 그리고 교통의 요충지역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력, 자본의 중심지가 되며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인구는 집중되고 제 방면에 제 활동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도시의 기능적 형셩은 어느 한 두가지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기능을 수행함으로
다원화 도시 또는 복합도시로 변모하였고 도시의 공간 유형도 거대도시 형태로 형성되고 있다.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관점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먼저 피레네 (H. Pirenne)는 델리와 동경 같은 정치, 학문의 중심지와 봄페이, 홍콩같은 경제의 중심지로 대별한다. 호셀리츠(B.F.Hoselitz)는 생산도시와 기생도시로 나누는데 생산도시란 경제 성장에 유익을 주는 도시이고 기생도시란 그 반대이다. 또한 레디필드와 싱거(R.Redifield & M. Singer)는 "정통 발생의 도시와 이질 발생의 도시"로 나누었는데 정통발생의 도시란 옛 문화의 체계적이고 반사적인 차원을 지켜가는 도시요, 이질발생의 도시는 옛 문화와 옛 문명을 초월하거나 상충하는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도시를 말하는데 그들은 이를 윤리질서와 기술질서의 도시로 다시 나누어 설명함이 특이하다. 또한 죠베르그 (G.Sjoberg)는 산업이전의 도시와 산업도시로 대별하기도 한다.
제 2 절. 진주의 현황
1. 진주시 안내
1) 지역 안내
진주시는 서부경남의 중심도시로서 산청, 의령, 함안, 마산, 고성, 사천, 하동과 맞대고 있다.
면 적 : 712.9 km2
인 구 : 334,067명(96,028세대 1996.1.1 현재)
행정 구역 : 1읍 15면 26동 (311리 607통 3,395반)
공무 원수 : 1,741명
학 교 수 : 초등학교 59, 특수학교 1, 중학교 20, 고등학교 20, 전문대학 3, 대학교 3
주요특산물: 실크(비단), 단감, 배, 밤
2) 연 혁
삼한시대 : 변한에 속함.
가야시대 : 고령가야.
삼국시대 : 백제의 거열성
신라시대 : 문무왕 3년(663) 거열주, 신문왕 5년(685) 청주, 경덕왕 16년(825) 강주
고려시대 : 태조 23년(940) 강주를 진주로 개명, 성종 2년(983) 진주목, 현종 9년(1018) 진양.
1402년 진양을 진주라 고침.
1895년 5월26일 진주목을 진주군으로 고침.
1896년 8월4일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됨.
1931년 4월1알 진주면이 진주읍 으로 승격.
1939년 10월1일 진주부로 개편 승격.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개칭.
1949년 8월15일 진주부는 진주시로 개편.
1995년 1월1일 진주시 및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로 개편.
시 목 : 대추나무 - 으뜸과일 으뜸시민, 도.농의 조화를 상징.
시 조 : 백로 - 학문과 교육의 도시, 맑고 깨끗한 시민정신.
시 화 : 석류꽃 - 시민의 위국 충정, 시민의 단결력.
제 3 절. 진주 지역 교회의 일반적 현황
제 4 장. 도동교회의 현황
제 1 절. 도동교회 역사
제 2 절. 도동교회 현황
제 3 절. 도동교회 소그룹 활성화 목회의 과거와 현재
제 3 부. 전도소그룹 활성화를 위한 목회전략

제 5 장. 전도 소그룹 활성화를 위한 목회구조

제 1 절. 기본구조 분석
교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담임목사의 열성과 리더쉽이다. 전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해가 없거나 전도전략이 부재할 때 전도가 지속적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안의 교인들을 목회하기 위해 70-80%의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사실은 70-80%의 힘을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의 목회에 투자해야 한다.
이에 대해 윈터(Winter) 박사는 하나님께서 지난 2천년 동안 복음 전파하는데 2가지 구조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의 하나는 교구구조(Modality)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구조(Sodality)이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구조를 선교구조화 해야한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직접 전도현장에 뛰어들지 못한다면 적어도 전도에 대해 연구하고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발굴하여 전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전도를 성도들끼리 나가게 해서 자기들끼리 마치고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전도를 하고 돌아와도, 보고를 받고 격려하거나 새로운 전략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전도는 단회적 행사에 그치고 만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많은 교회들이 전도에 대한 전문사역자로 하여금 관리 운영케 하고 있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담임목사 자신이 전도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전도에 대한 묵시적 명령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도에 대하여 현존전도 실존전도 설득전도의 개념의 이해가 현장전도 함께 깊이 이해되고 실천되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특히 담임 목사의 전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도 양은 양이 전도하니까 목사는 전도 안 해도 된다는 원리이다. 이것을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담임 목사는 전도 특공대를 운영할 때도 전도대장이 되어서 현장에 나가서 앞장서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 연구자가 현장에서 깨달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항상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앞장서는 자세를 가질 때 지속적인 전도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눅19:10). 또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이 구원 사역을 지속적으로 온 세상에 행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첫째 사명은 복음전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전도를 할 수 있는 제자로서보다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으로서 머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과감한 구조 개혁이 필요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피 선교국의 하나였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3세계뿐 아니라 한때 기독교의 중심국가였던 곳에까지 장단기 선교사를 보내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고, 또 한국교회가 구미 선진 기독교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복음이 착실히 전해져 전 국민의 20%가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라는 통계가 나와있다. 이에 한국교회를 배우자는 운동이 선진교계에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는 매 10년마다 100%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에 들어서는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성장이 밑바닥을 그리다가 1995년 전후해서 다시금 완만하게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의 경제규모나 GNP(1인당)가 상승하는 중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서 서구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기독교의 쇠퇴현상이 한국교회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우려마저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제적인 성장은 세상이 점점 세속화되고 다원화된다는 얘기가 되고, 진리나 종교도 절대적인 것이 되기 보다 상대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는 결국 교회까지 파고 들어와 지금의 교회성장과 부흥을 전처럼 만들어 놓을 우려까지 주고 있다. 때문에 총력전도 운동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전 성도로 하여금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자로 키울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목회의 총력을 복음전도에 두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첫째로 복음전도는 전교회 전성도의 총력적인 것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교회는 아니다. 전도가 교회의 모든 것이라는 사상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도의 총력이 복음전도에 있어야 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이다.
둘째로, 가장 성공하였던 초대교회의 전도전략을 적용해야 한다. 즉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환경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방법에 있어서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타당한 소그룹을 통한 전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제 이러한 전도를 위한 소그룹의 활성화를 위해 교회에서 목회 전략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목회구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전도소그룹 목회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기초
먼저 신학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목회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중요하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보면서(행2:42이하) 말씀의 선포(kerygma)와 말씀의 교육(didache), 친교(koinoia), 봉사(didakonia)의 구조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교회를 유지시키는 네 가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네 가지 축이 조화가운데 잘 시행될 때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도행전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오늘날 침체일로에 있는 우리 도동교회의 성장과 전도효과에 적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사도행전1:8말씀과, 사도행전2:42이하의 말씀들을 통해 볼 때, 교회의 주체인 평신도들은 말씀으로 바로 세우고 또 그들을 사역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 놓을 때 비로소 모이는 교회나 함께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선교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총력전도사역이 한국교회와 목회현장에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하려면 전도된 신자가 이미 현장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성경을 어느 정도 배워서 와야 한다. 한국처럼 교회에 와서 처음 설교를 들음으로 성경을 접하게 되는 목회적 구조로는 매우 힘이든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훈련된 평신도들이 소그룹을 만들어 그들의 현장에서 전도를 하고 그리고 성경을 가르쳐서 교회에 데리고 오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를 전도소그룸을 통한 총력전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일어나는 연쇄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이내 복음에 빚진 자라는 자각 속에 사도들이나 평신도의 구분 없이 그 복음에 대하여 반응하고 또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하여 적절히 대처하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신도시를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도 프로그램을 모색해야 하는데 본 연구자는 이를 사랑방전도운동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3)사랑방전도의 기본구조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거의 모든 전도프로그램은 교회의 적용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임받은 자로써 사명을 감당하고 맡겨주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선교사로 키우는 일에 실패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처럼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성도들이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교회가 온 세상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교회의 주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과연 교회의 숫적 성장만이 아닌, 이 세계를 살릴 수 있는 증인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것은 목회자의 가장 큰 고민이며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그래서 시무하는 진주 도동교회에서 여러 가지 전도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보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성경공부는 교인들이 교회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지는 못하였다. 여러 가지 전도 훈련들은 프로그램으로 그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전도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며 그것은 교회의 모든 노력과 힘이 집결되어야 하는 총력전도여야 하는데 프로그램으로 정착시키려면 교회의 목회구조상 항상 실패를 반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할 길을 본 연구자는 고민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이다. 부르신 뒤에는 친히 함께 다니시며 훈련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사역을 위임하시고 승천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영혼구원 즉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대그룹이 아니라 소그룹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사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초대교회도 성도들이 성전에서나 집에서 항상 소그룹적으로 만나고 떡을 떼며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하므로서 세계를 복음화 할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모든 총력은 전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새신자의 등록에서 부터 제자로서 전도현장에 나가서 제자를 양육할 수 있기까지 모든 관심과 노력이 기울여 질 때 제자는 만들어지고 세계는 복음화되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 "사랑방전도운동"이다.
본 연구자는 이 사랑방전도전략을 통하여 지금까지 목회현장에서 전도전략에 실패한 것을 분석하고 전도중심의 모델교회를 만들어 전도중심의 교회가 성장하고 승리하는 것을 논증하고 싶다.
2. 사랑반전도운동의 핵심
본 연구자는 그 동안 전도중심의 교회로 여러 전도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사랑방전도운동을 시작하고 부터이다.
사랑방전도운동을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사랑방이란 말은 소그룹에 대한 한국적 이름이다. 원래 사랑방은 서양의 응접실에 해당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공간으로서, 이웃과의 창구 역할을 하는 문화공간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이 사랑방에서 이웃과 나눈다는 뜻이 있다.
②사랑방은 전도소그룹의 소그룹적 성격을 잘 대변해 준다. 원래 사랑방전도란 말은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잘 캠퍼스 전도를 위한 전략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목회 적용을 시도한 이가 김재헌 목사이다.
③진주도동교회는 이러한 사랑방전도전략을 도동교회에 맞도록 새롭게 재편성해서 목회구조 속에 도입하였다.
④사랑방전도운동을 통하여 전 교인이 자연스럽게 전도에 협력하게 하고 특히 성도들이 자신들의 가정을 이웃을 위해 개방하여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와 가까워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면(面)이 넓어지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한다.
⑤이러한 전도소그룹의 활동이 특정한 기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년중 계속해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목회구조적으로 이를 적극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도동교회가 만약 전도중심의 목표를 바꾸지 않고 복음전파의 일심으로 교회성장을 지향한다면 다가오는 2000년대는 분명 진주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크게 일조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제 2 절. 전도활성화를 위한 목회구조
도동교회는 그 동안 많은 전도방법을 동원하여 전도를 하였다 최근에는 이웃에서 다락방 전도를 통하여 많은 교인을 빼앗아 가버리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해 오던 도동교회의 전도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전통적인 전도목회에 대한 반성
1) 축호 노방전도를 통한 전도
교회가 창립되고 아파트가 입주되면서 목사부부를 비롯한 창립 멤버들이 매일 나와서 전도지를 들고다니며 가가호호 방문하고 인사하며 전도하였다. 그 결과 전도 첫해에는 60-70여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100명을 넘어서면서 이 전도를 포기하였다. 노방전도는 한국교회 전통적인 전도방법의 하나이었고 이 전도방법은 선교 초기의 강력한 전도운동이었다.
모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함께 모여 기도하고 어깨띠를 두루고 피켓을 들고 대, 소로에 나서서 전도지를 나누며 전도하는 것이다. 이 전도방법은 일종의 교회정보를 제공하는 정도이다. 이주하여 이웃간에 서먹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면에서 좋았다. 주일예배 후에 1년에 몇 차례 실시하였다. 축호전도는 입주시기에 맞추어 매일 희망자를 나오게 하여 2명씩 짝지어 아파트 전체를 가가호호 방문하였다. 처음 이사하는 입주기간은 문이 잘 열리지만 입주가 완료된 후에는 문이 잘 열려지지 않았으며 특별히 축호전도하는 전도자가 훈련을 받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였다.

2) 제자 훈련을 통한 전도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성령충만 기도 운동과 전도 운동보다 성경공부가 붐을 이루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훈련을 열심히 하였다.
①베델 성경공부: 구역예배를 네비게이트 성경연구와 대학생 선교회의 C.C.C 교재를 가지고 훈련하며 특별히 교회에서 베델 성경공부를 실시하여 제자 훈련을 하였다. 80년대에는 베델 성경공부가 교회마다 굉장한 붐을 일으켰다 본 교회도 약 7회에 걸쳐 100여명의 수료생을 냈다. 그러나 이들이 현장 전도를 하거나 전도훈련을 시키는 단계에까지 연결시키지 못하고 수료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②다락방 성경공부: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가 실시하는 "평신도를 깨운다"는 세미나에 도전을 받고 다락방 성경공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목회자 자신의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보증 사역을 겸한 목사로서 이 제자훈련이 힘든 어려운 것일 뿐만 아니라 수 십명과 함께 이 제자훈련 공부를 시도했으나 현장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양육하는 일군이 되리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③교회성장 성경공부: 이런 제자훈련의 맹점인 현장전도의 의미를 살리고자 전도성경공부가 교회성장 연구원에 의하여 기초부터 중직자반까지 만들어지고 교회운영과 섬기기 그리고 제자 훈련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80년대 후반부터 교회성장 연구원의 정사무엘 박사에 의해 한국교회에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성장을 위해 성경공부도 다른 어느 제자훈련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현장에서 전도와 양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까지 인도하지 못했다.
3) 전도특공대를 통한 전도
예수님께서는 전도자를 뽑으실 때 수많은 무리 중에서 12명의 제자와 70인 제자를 뽑으셨다. 그리고 3년 동안 침식을 같이 하시며 훈련을 시키셨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훈련은 가장 중요한 것이 선택이라는 점을 놓쳐버리고 매주 수요일에 희망자로 하여금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현장으로 나가서 전도하게 하였다. 일주일에 수요일은 전도일로 정하고 아침 10시부터 14시간 동안 예배와 기도회 후 맡겨진 지역으로 가게된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전도한 후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이 전도특공대는 년 중 무휴 해야 함에도 12-2월과 7-8월은 추위와 더위를 피해 쉬기로 했다. 한 번 쉬기 시작한 전도대가 다시 모인다는 것은 무척 힘이 드는 일이 된 것이다.
지속적으로 교육이 없고 보고를 목사가 받지 못하고 담당 부교역자가 전문적으로 육성관리 하지 못하는 등의 작은 실수나 조직운영의 실패가 지속적인 전도활동을 막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전도한 이후에 올바른 양육을 할 수 있는 전도자가 되지 못함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4) 총동원 전도
80년대에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친 총동원 전도는 원래 수원 의 모(某)교회가 교회를 크게 건축했으나 큰 교회당에 비게 되자 손충식 부목사가 교회를 한번 채워 보아야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처음 시작하여 교회당이 총동원 전도를 통하여 가득차게 되어지고 그후에 그 교회가 계속 부흥하며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총동원 전도 주일이 교회마다 시행되었으나 부정적인 반응과 긍정적 반응으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사전에 준비가 잘 된 교회는 굉장한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으나 준비가 바로 되지 못하면 노력과 경비에 비하여 나타나지 않는 결과에 오히려 교회가 힘을 잃는 경우도 많다고 본다. 도동교회는 92년도에 총동원 전도를 실시하였다. 3000명을 목표로 하였으나 실제로 동원된 인원은 2300여명으로 집계되었고 교회는 300여명의 출석 성도가 400명으로까지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400여명의 결신자가 30 명도 양육되지 못하는 결과가 왔고 결국 한번 잔치로 끝나 버렸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전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5) 다락방 전도운동
도동교회는 교회건축을 앞두고 교회당이 비좁을 정도로 교회가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운동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때 교회는 다락방 전도에 대해 소개를 받고 전 교인을 제자화 시켜야 한다는 기도를 하면서 다락방 전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락방 전도는 교회당보다 한사람의 제자가 더 귀하다는 전도하는 제자에 관심을 두고 있다.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하게 되면 이것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도 이 두 단어에 다 압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①다락방 전도의 시작: 전 성도들이 기초 합숙 훈련을 받고 불신자나 기존 신자에게 성경공부를 한다. 이 공부하는 현장을 다락방이라고 부른다. 1994년에 시작하여 1997년 말까지 교회안에 130-140개의 다락방이 생겨졌다. 물론 중도에 없어지는 다락방도 많았다.
②부산 합숙 훈련: 다락방을 운영하며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기초 합숙훈련이 있다. 여기에 93명이 1주간 부산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
③팀사역훈련: 다락방을 운영하면서 합숙훈련을 받은 지 6개월이 지나면 팀사역 합숙훈련이 있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팀을 이루어 타 지역까지 전도한데서 기인한다.
④신학원: 전도만 전문으로 하겠다는 사명자들이 일주일에 2일간씩 공부하는 곳이다. 2년간 4학기를 공부하는데 전국에서 5000여명이 공부하고 있다. 평신도집사가 이 과정을 공부하고 현장교회 간판까지 달고 개척선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전도자로 양육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30여명의 교회 중요한 제직들이 참가하였다.
⑤전도학교: 지역별로 다락방 전도를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전도자로 재무장하며 전도를 체질화시키는 전도학교이며 지역교회 중 먼저 신청하는 교회에서 하며 강사는 류광수 목사가 직접 임명한다.
⑥월화 집회와 각종 훈련: 월, 화 집회는 대개 류광수 목사가 국내에 있을 때 하며 집회가 끝나면 3회에 1시간 정도씩 강의하며 회비를 1인당 5만원씩 받으며 어떤 집회에서는 1000여명이 넘게 수강하기도 한다고 한다. 월 화집회는 예전에는 지 교회에서 했으나 이제는 장소 관계로 지역단위로 체육관을 빌려서 한다. 100여명의 성도가 합숙훈련을 받고 100여개가 넘는 현장 다락방이 생기면서 교회가 힘을 얻고 부흥하였으나 그러나 다락방 전도는 도동교회 전도운동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반전도 반성장 운동이 되고 말았다.
⑦다락방 전도 운동의 실패: 다락방 전도 운동이 총회에서 사이비 신앙으로 규정이 되고 참가 금지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도동교회는 지금까지 교회 의 전력을 기울여온 전도 운동이 사이비화 된 운동이라는 총회 결의에 순응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심각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갈등은 쉽게 끝이 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락방 전도 운동에 심취한 일부 교인들의 열매가 성경적인 것과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락방 전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를 알면 거의 완벽한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사도의 수준까지 신앙이 성숙하리라 믿고 참여하였었는데 당 회원들의 눈에는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기름과 물처럼 나눠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락방 전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단순히 전도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락방 전도에 심취한 일부 교인들이 세계 복음화와 전도만 강조한 나머지 교회의 다른 부분은 전혀 무시하는 교만으로 치달아 오직 전도만 하면되고 전도 설교만 들으면 다 된다는 너무나 오만하고 편협된 교인으로 비정상화되어 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당회는 다락방 전도의 좋은 전도전략은 수용하나 다락방 전도 교단과는 관계를 끊는다는 선언을 하므로서 다락방 전도에 깊이 관여한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오히려 교회성장에 치명적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이에 세은교회의 정봉기 목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뼈아프게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본 필자의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전도 중심의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다락방전도 전략을 차용하였으나 득보다는 많은 문제를 더 가져왔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행착오로 인하여 교회에 득보다는 실이 많았지만 한가지 깨달은 것은 담임목사 자신의 연구에 의하여 우리교회에 맞는 우리만의 전도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도동교회 전도의 문제 분석과 새로운 구조 도입
성경적 증거들을 종합하여 볼 때, 교회는 생명체인 동시에 조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생명체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체이다. 생명력이 있는 열심이 충만한 교회는 물론 기도, 성령, 말씀 운동이 일어나고 자연히 전도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전도는 교회 부흥의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도로서 부흥된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서 사람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전도에 관심이 없거나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니다. 도동교회는 전도중심의 교회로 전도사역을 중심으로 했으나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를 담임목사의 연구와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은 전략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목회구조 때문이었다.
제 6 장. 전도 소그룹 구성을 위한 전략

제 1 절. 실천신학적 전략

1. 전도전략의 부재
나무만 보면 실패한다. 숲을 볼 줄 알아야 하다. 전도는 그때마다 단순히 남들이 해서 교인이 많이 모이니까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위한 기초에서 메세지와 기도가 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 선포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새신자 잉태가 되어지도록 전도 집회를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잉태하도록 교회초청 일자가 밝혀져야 하며, 그 동안에 특별한 기도가 이어져야 한다. 결신 되거나 등록된 사람들은 지정된 양육자가 매주 1회 이상 방문 양육 해야한다. 그리고 전도특공대를 붙여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이 서로 연관성을 갖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갈 때 이를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도를 위해 지속적으로 훈련하거나 기도해야 한다. 무조건 닥치는 대로 전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의 전 과정으로 전도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전도프로그램 중 어느 것이 우리교회에 맞는 것인지 분석되어지고 그것이 어떤 과정과 방향으로 진행되어져야 하는 지 정확한 전략이 먼저 수립되지 못한 것이다.
1)전도 운동의 실천신학적 전략
전도는 목사가 직접 현장에서 모범을 보이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모범을 보이는 전략들이 교계에 알려진 것도 많이 있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 예수 전도단의 "외침전도", 이슬비 전도학교 대학생 선교회 어린이 전도협회 등이 있는데 이들 단체에 위탁시켜 훈련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얼마나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활동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대부분 전도훈련이나 전도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지못한 것은 도동교회 전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라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이를 실천신학적으로 다시 한번 분석하면서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전도를 전문 사역으로 하는 부교역자를 두지 못한 것과 지속적 훈련과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일시적 운동으로 그치게 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전도특공대는 수시로 생겼지만 더위와 추위가 오면 방학을 하고 그 다음에는 잊어버리고 몇 년씩 지나가 버린 것이다. 전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쳐버린 것이다.
무분별한 전도 프로그램의 도입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했다. 교회전도 프로그램은 목회자 자신의 스타일이나 선호도, 은사 훈련받은 것 효과 등을 종합하고 성경적이고 교회적으로 이상이 없는 가도 점검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도동교회는 전도 프로그램의 도입에 신중성을 가지지 못했다.
①총동원 전도 운동의 문제: 많은 교인들이 전도에 동참하고 열심히 기도한 것은 좋았으나 하나의 행사에 너무 전력을 쏟으므로 오히려 총동원 전도주일 이후에 교회 흐름이 깨어지고 허탈감이 늘면서 무력증에 빠지는 현상이 왔고 집단이나 단체를 동원 선물을 받아가게 하고 너무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것, 결신자와 참여자와의 유대관계가 지속되지 못한 점 교회가 상업적으로 보인 점 등은 총동원 전도운동이 가져온 큰 부정적인 문제이다.
목회자의 목회철학이나 교회에 맞는 전도운동으로 수정 보완하여 지속화 시켜야 한다는 점에 유의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의 결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신중하게 적응하지 못한 점이 많은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긍정적 측면은 전 성도가 전도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고 실제로 양적인 성장을 어느 정도 가져왔나 그리고 지역사회에 교회가 알려졌으며 전도 중심으로 계속되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은 더 많다고도 볼 수 있다. 경쟁적 과시적으로 추진하는 행사가 되므로 지역사회에 거룩성과 진실성의 교회의 이미지보다 상업적이고 시끄러운 이미지를 보여준 면도 있다. 목표를 무리하게 설정하였다. 한번만 교회에 와도 주님이 기억해서 끝내 부르시고 구원하신다는 생각이 과연 한번 나와서 복잡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오히려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막아버리는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당일 다른 교회에서 기념품을 받기 위해 많이 왔다. 친한 이웃교인만 빼앗아 간다는 시비마저 일어날 소지가 많다. 전도하는 것을 막고 반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오히려 반전도 현상이 계속 일어난다면 성경적인 전도 운동으로 신중하게 적응하며 발전시켜가야 한다.
②다락방 전도운동: 단지 다락방 전도는 전 교인을 현장전도자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참여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전도만을 주장하는 류광수 씨의 메시지는 이렇게 믿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가져본 사람일수록 류광수의 다락방에 쉽게 빠지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민을 알고 전하리라는 결단을 갖고 이 운동에 참여하지만 깊이 들어가 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 전도운동에 심취하면 교회생활 보다는 여러 집회에 끌려 다니는 인상을 받게된다. 이때부터 여러 과정의 훈련을 받는다. 이런 훈련 과정을 겪으면서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탄생되리라는 기대가 너무나 놀랄 만큼 무너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고 상당부분 이단성이 있었다고 판명이 났으므로 본 논문에는 도동교회 전도에 나타난 현상만을 다루기로 한다.
a. 편협성: 그리스도와 전도를 알면 거의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락방 전도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성도는 모든 것을 다락방에서 배운 다락방 식으로 판단하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교회의 온전함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에서 깊은 신앙인이 되면 다른 일반 교인들과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르다고 느낄 만큼 편협한 사람들이 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므로 다락방 전도운동은 개 교회를 섬기는 전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분파주의로 흐르게 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b. 분리성: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와 하나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도 운동에 깊이 들어가면 일반 성도들과는 기름과 물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한 몸이 되고 하나가 되라는 말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전에 한국의 대학생선교단체가 이러한 신앙의 엘리트의식으로 한국교회에 물의를 일으킨바가 있는데 이는 하나를 얻기 위하여 둘을 버리는 무지한 짓인 것이다. 이것은 신앙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c. 획일성:다락방 전도 운동에 참여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류광수씨에게 매료되어 모든 것이 류광수 메시지로 획일화 된다. 즉 그의 메시지를 조금이라도 연구하여 보완하거나 다르게 고치면 다락방 메시지가 아니라고 반발하고, 그리스도란 단어나 기본 메시지나 현장 전도의 간증이 나오지 않으면 덜 깨달았다고 반발하게 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오직 류광수 메시지 식으로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해야만 제일 귀하게 여기는 획일성이 나타난다. 결국 개교회의 부흥은 사라지고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듯 그리스도의 사람보다 류광수라는 한 사람을 추종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 버리고 마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는 처음 사람들과 교회들을 자신들에게 끌어들이기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와 전도만을 말한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스도와 전도가 남아야 하는데 교인들은 류광수식이 아니면 다 아닌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버리므로 어떤 의미에서 교인들도 자신은 굉장히 잘 믿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면서 성숙함은 사라지고 성경적이 아닌 류광수식 교인이 되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기성교회의 무기력과 부족을 험 잡으며 기성교회를 유대교처럼 그리고 다락방전도는 초대교회처럼 최면화 시켜 적대 감정을 유발시키고 만다 오직 그리스도 전도가 좋아서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기성교회를 공격적으로 대하게 되고 깊이 들어가면 절대로 공존 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의 자리에 않게 되고 그 운동에 빠진 사람도 그렇게 만드는 최면현상이 나타나 결국 획일성의 큰 문제로 나타난다.
d. 무질서성 : 오직 전도만 배워 세계 복음화 요원이 되어야 하므로 전도만 제일 잘 가르치면 언제나 자신의 교회나 주님이 만남을 준 교역자를 버리고 떠나도록 교묘히 가르치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몇몇 교회는 성장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교회론이 없는 무질서성으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하게된다. 다른 교회로 옮겨간 사람이 훈련 받고 나면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알고 있는 신자에게 접근하여 자신들의 교회로 오도록 인도한다. 소위 기존 신자를 먼저 살리라는 법칙아래 자행되는 교인 뺏기 전법인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의미에 회심전도 운동이 아니다. 그러나 다락방의 결국은 이런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니 결국 오직 다락방 전도 않는 목사와 교회에 속하면 안된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빨리 나와서 열심히 다락방 운동하는 교회로 가야 나도살고 너도 살린다고 믿고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 할 때만 해도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전도를 알고 하면 가장 온전한 교인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성도들이 은혜 받으면 지금까지 신앙으로 살지 못한 것 회개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하면서 더욱 겸손해져서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고 전도할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런 현상이 성령이 역사하고 인도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다락방 전도에 열심을 하다보면 류광수 식으로 오직 그리스도와 전도가 없는 메시지를 하면 뛰쳐나가고 싶거나 강단에 올라가서 밀쳐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어 영적으로 큰 교만에 병든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락방전도 운동은 신학적 문제나 변질의 문제를 차지하더라도 상당부분 우리가 인정해야 할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락방전도운동의 뿌리가 다름 아닌 성경이기 때문에 류광수씨의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천신학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류광수의 다락방은 소그룹을 교구 지향적(Sodality)이 아니라 선교지향적(Modality)으로 짜져 있기 때문에 불신세계와 접하고 있는 면(面)이 넓다. 이는 그 만큼 불신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된다는 뜻이 된다. 이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도 타당하다. 바울의 선교팀이나, 중세의 수도사들의 이교도선교 활동에서도 그 효과가 분명히 드러난다.
②류광수의 다락방은 현장에서 제자를 훈련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교실안에서 강의를 통하여 가르칠 수 없는 중요한 실습들을 직접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따라할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제자훈련의 방법이 결국 도제(徒弟)식수업이라고 한다면 다락방 전도는 결국 이러한 도제식 수업이 가능한 실천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③간결한 메시지와 전수 가능한 전도제시가 있다. 대개의 전도훈련이 안고 있는 문제는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복음을 제시 힐 만한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류광수의 다락방이 김기동의 영향을 받은 관계로 변질되어진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평신도들이 전수 가능한 복음제시 있다는 것은 울에게 실천신학적 힌트를 준다.
④그리고 류광수의 다락방은 교회 전체적인 구조를 선교기지화 한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긴장관계를 잃어버린 교회는 위험하다. 이미 성장하여 쇠퇴기에 들어 있는 교회는 교조적이 되고 결국 이권다툼이나 자리 다툼으로 자체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그런데 다락방에서의 교회구조는 전체적으로 선교 기지화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성도가 전도라는 대의 명분 앞에 항상 긴장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사랑방전도 운동에서도 필요하다.
2.사랑방전도소그룹운동의 목회적 타당성
1)전도방법의 신학적 분류
회심성장을 목표로 교회가 전도활동을 펼쳐 나갈 때 구체적으로 프로그램화시키고 평신도 제자훈련을 시켜서 전도하러 나갈 때 대략 그 방법적 특성에 따라 선포전도, 설득전도, 현존전도, 네트워크전도 등으로 나눈다. 이는 물론 모두 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으로서 실천적인 방법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이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선포전도 (P 1)
선포전도(Prolamation evengelism)란 한마디로 말해 외치는 전도를 말한다. 축호전도, 노방전도, 찬양전도와 같이 시위성전도법을 말하는데 결국 이 전도법은 교회에 적용하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전도지 나누어주기, 교회홍보하기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피전도자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설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전도법으로서 흔히들 전도라고 하면 이러한 선포전도의 크게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포전도의 단점은 많은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사람을 접촉함에도 불구하고 준비된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또 이에 대한 기술을 별 중요 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가 적다.
이로 인해 참여자들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리고 체계적인 전도활동이 연결되지 못한다. 전도의 목적은 선포라고 생각한 사람의 대표자는 영국의 패커(J.I Packer)이다 패커는 전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한다는 것(men shall come)는 것보다 믿도록(men may come)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믿도록 한다는 설득전도를 배격하고 전도는 선포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포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전도하여 제자를 삼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선포가 전도의 목적이라는 위험성의 하나는 씨 뿌리는 자체가 목적이 되고 열매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와그너 박사(C.Peter Wagner)는 패커가 선포를 전도로 주장하는 이유를 이렇게 소개한다 "많은 선교사들이 모슬렘을 전도하였다. 그러나 한 명도 개종하지 않았다 그러면 전도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와그너 박사는 설득전도는 전도의 노력은 했으나 성공은 못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패커가 전파의 결과는 인간이 소원이나 의도에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고 한것도 제자를 만들라는 대 사명이 있는 한 그것만이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포가 전도라는 것도 사실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포가 결신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더욱 확실한 전도라고 생각 할 수 있다.
(2) 현존전도 (P 2)
현존전도(presence evangelism)란 한마디로 말해 생활전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집을 찾아다니거나 외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모범 된 생활을 보여 줌으로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방법인 것이다. 래리 길버트에 따르면 생활전도는 대략 교인의 90%가 참여 할수 있다고 한다. 전도의 은사를 인정하고 그 은사가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전도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그러나 생활로서 모범으 보이는 것이 전도에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므로 생활전도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생활전도, 곧 현존전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믿는 사람들이 wn도적으로 관계를 이끌어 나가도록 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전도방법으로서 많은 공감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이 방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생활전도가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영접시키기 위해 혹은 '구원시키기'위해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난한다. 또 현존전도에서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발전시키지 못한 관계로, 즉 말로 표현하지 못한 관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점은 현존전도는 교회중심의 전도가 아니어도 된다는데 그 문제성이 있다.
현존전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전도가 제자 삼는 사역까지라 하는 것은 논의조차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자신을 알아 비인간화와 맹렬히 투쟁하며 마귀의 세력과 대항하며 소외 된자를 찿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도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존재를 통한 사회의 참여인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교회가 하는 어떠한 선행도 전도이다 하비콕스는 사회행동과 전도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고 콜린 윌리암스는 개인전도와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전도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한 것이다 존재의 전도는 선행과 자선을 주로하는 말없는 신자의 존재가 곧 전도라는 것이다. 현존전도는 지금까지 선행전도란 개념보다 그리스도의 현존으로서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개념으로 본다면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나 성도 하나 하나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모든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그 것이야 말로 참된 전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된 성도가 그리스도를 선포하거나 설득할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통계로 보아도 관계 속에서 현존을 통한 전도로 개종하거나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3) 복음제시(설득)전도 (P 3)
복음제시(설득)전도란 단순히 전도자가 가서 외치고만 마는 그런 단계에서 머물지 않고 대화법을 통해 피 전도자에게 복음의 중요한 핵심을 논리적으로 제시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결심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도법이다. 사영리, 브릿지, 전도폭발 전도법 등이 이러한 복음제시(설득)전도방법에 들어간다. 복음제시(설득)전도법의 장점은 그것이 교회중심으로 훈련되어지고 시행되어 진다는 것이다. 선포나 현존 전도는 굳이 우리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점을 중요 시 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를 홍보하긴 해도 그렇다고 해서 꼭 우리교회에 나와야 할 이유를 제시하여도 못한다. 그러나 복음제시(설득)전도는 피 전도자가 설득을 당하여 복음으로 거듭 났다면 계속적인 신앙성장의 필요를 듣게 될 것이고 또한 기왕이면 자신을 전도해준 사람으로부터 양육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제시(설득)전도의 또 다른 장점을 훈련방법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프로그램화되고 훈련 방법이 정립되면 계속해서 함께 사역할 제자들을 스스로 찾고 신앙으로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제시(설득)전도방법에도 단점은 있다. 이 훈련은 모든 사람이 다 훈련받아 능숙한 전도자가 될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되기 어렵다. 적은 수의 전도은사가 있는 자들만이 이 훈련을 무사히 다 마칠 수가 있고 또 그들 중에 몇%만이 실제 사역에서 결신을 시킬 수가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이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강요하게 된다. 복음제시(설득)전도는 거짓 결신자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즉 교회 안에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은 계속 교회에 남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경향이 적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교회 밖에서 이루어진 결신자 4106명 가운데 125명만 새 신자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다른 단점은 사람들이 훈련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도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람들이 훈련을 잘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들은 사람들을 훈련에 참석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효과적인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훈련에 참여하는 사람이 매우 적은 이유는 그것이 소수의 교인들에게만 맞는 훈련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은 훈련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제시(설득) 형태의 전도프로그램은 전도훈련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다른 전도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기 어렵게 만든다.
(4) 네트웤 전도(Net-wok Evangelism)
네트웤 전도란 흔히 관계중심전도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소그룹전도를 하면 필연적으로 네트웤전도가 된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인간관계속에 얽히고 설키어 살아간다. 태어나면서 부모 형제라는 관계에서 시작하여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직장과 사회생활을 통한 많은 인간관계들이 마치 그물처럼 서로 얽혀 있다. 네트웤 전도란 이와 같은 많은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전도 대상자를 물색해서 전도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성들은 친구나 이웃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남성들은 학연이나 직장 동료들을 중심으로 그 그물을 엮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네트웤 전도의 단점은 선포전도처럼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닌 이미 알고 있고 인간관계의 그물 망 속에 서로 연결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도 크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네트웤 전도도 단점이 있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교회에 생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 이론 중에 "동질집단의 원리"가 있는데, 이 원리대로 자칫 잘못하면 파당이 교회에 생긴다는 단점이 있는데 네트웤 전도가 있다. 또 자칫 기성교회간에 보다 열심 있는 쪽으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교인들이 옮겨다닐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선포전도, 생활(현존)전도, 복음제시(설득)전도 네트윜 전도 등을 방법에 따라 분류해 보았다. 여기에서 사랑방전도는 구조상으로는 네트웤전도의 형태에 가깝지만 방법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네 가지 전도방법을 다 담고 있는 전도법이라고 할 수 있다.
2)사랑방전도법의 적용
(1) 사영리에 의한 전도 이론
이 전도 법은 비록 번역본이라 할지라도 한국최초로 복음의 핵심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해서 소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동안의 업적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사영리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운동으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2차 대전 후 허무외 퇴폐현상이 휩쓸던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U,C,L.A.에서 1951년 빌브라이트 박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40년 가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와 제자와 운동을 땅 끝까지 수행하라는 명령을 순종하는 동안 지금은 150여 국가에서 이 운동을 계속 확산시켜 나가고 있으며 한국은 김준곤 박사에 의해 1958년에 시작되어 지금은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매년 수십만에게 복음을 저하며 제자를 키워 이 사회와 세계로 보내고 있다.
복음을 소책자로 만들어서 휴대하고 다니면서 짧은 시간에 소개해 예수를 영접하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장점으로 보인다. 하나님과 인간을 수직적인 관계에서 설명하는 그림과 죄로 말미암아 두 사이가 멀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제1원리에서 제4원리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일관성이 있어 좋아 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모든 논리 전개를 주도해 나갈 수 있을 만큼 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지가 의심스럽다. 복음을 소개한 후에 쉽게 영접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전도자가 피 전도인에게 예수를 아주 쉽게 영접으로 유도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① 4영리의 내용 : 이 전도방법이 한국의 상황에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앞으로 좀더 깊이 논의되어져야 한다. 첫 번째, "네 가지 영적윈리"라는 사영리란 말 자체가 긴 설명을 요하는 어려운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아주 분명하게「Four Spiritual Laws」라고 해서 명확한 개념하고 단번에 쉽게 머리에 들어 올 수 있는 단어이지만 "영"이라는 말과 "리"라는 말이 합해진 우리말로 번역된 이 단어는 한국의 미전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쉽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분명한 영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신론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과 그 부의 사랑, 그리고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주제이다. 신과 인간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로 피 전도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제1원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만 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쉽다. 이것이 사영리의 장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왜 활용되있지 않은지 자연히 마음속으로 묻게 된다(핵심성경 인용 - 요 3:16, 10:10).
두 번째, 원리는 인간론을 이야기한다.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죄 문제는 거짓말, 도적질, 살인 등의 죄보다는 하나님 편에서 보는 인가의 상태, 즉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에 대한 무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를 더 강조한다. 이 죄는 원죄로서 하나님 없는 인간이 인생심사와 지정의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며 소극적이며 무관심하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불순종하여 사랑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그 끊어진 것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손을 뻗쳐 해결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핵심성경인용 - 롬 3:23, 6:23).
세 번째, 원리는 기독론을 이야기한다.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를 설명한다. 사람은 죄 때문에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지은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핵심성경 인용 - 롬 5:8, 고전 15:3-6, 요 14:6)
네 번째, 원리는 구원을 이야기한다. 믿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사실을 지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으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으로 믿음과 의지행위를 통해 영접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3원리까지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제4원리는 영원한 운명의 기로에서 의지의 행위로 자기의 갈 길을 결정해야 할 긴장된 순간인 것이다(핵심성경 이용 - 요 1:12, 엡 2:8,9, 계 3:20).
다섯 번째는 구원을 확신시키는 방법을 이야기한다(사영리 pp. 11-13).그리스도께서 우리 중심에 계시는 것을 확증한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 주신 것을 확신시키고, 감정에 의지하지 않도록 성경의 약속을 가르쳐 준다(핵심성경 인용 - 요일 5:11, 히 13:5, 골 1:14,27, 요 5:24)
여섯 번째는 신앙의 성장원리와 교회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사영리 pp. 14-15). 기도와 성경 읽기, 순종과 전도, 맡김과 성령의지에 관한 여섯 가지 성장원리를 알려준다(핵심성경 인용 - 갈 3:11, 히 10:25).
② '사영리'를 사용하는 방법: .첫째,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그대로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이다. 둘째, 누구에게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셋째, 만일 상대방이 내용에서 빗나간 질문을 할 때에는 '사영리'를 계속 읽어 가는 동안에 해답을 얻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라. 또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영리'를 읽은 뒤에 그 질문에 대하여 이야기 해봅시 다"라고 말한다. 진실성의 여부를 분별하여 간단한 질문은 대답해 주고, 계속해서 '사영리'를 진행하라. 넷째, 상대방이 볼 수 있도록 책자를 손에 들고 읽으라.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읽는 곳을 연필로 가리키면서 말하라. 다섯째, 만일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말을 중단하고 '이해되십니까?'라고 물어보라.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여섯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확신시키는 분은 성령이심을 기억하라. 일곱째, 모임에서는 각 사람에게 '사영리'를 한권씩 나눠 주라. 모인 무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기도하라. 만일 한두 명일 때에는 그와 따로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여덟째,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도록 격려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에 들어오실 것을 믿지 않고 '사영리'에 있는 기도를 하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홉째, 각 사람이 자기 스스로 기도하기 원하는지, '사영리'에 있는 대로 기도하길 원하는지에 민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묵도로 하기 원할 것이다. 열번 째, 이미 '사영리'를 두 번 이상 나누는데 애해 두려워하지 말라. 열 한 번째,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한다면 다시 시간을 내어 이야기하고 그이 질문에 의논하기 위해 만날 약속을 하라. 열 두 번째, 상대방이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만나기를 강요하지는 말라.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새로운 질문이 있는지도는 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가끔 물어보라. 열 세 번째, 처음 '사영리'를 전했을 때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해서 실망하지 말라 등등이다.
③ '사영리'의 장점 및 실제적인 권면: 첫째, " '사영리'에 대하여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간단한 말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긍정적인 말로 시작할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법이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고, 영접할 수 있는 기도가 실려있다. 넷째, 구원의 확신과 성장을 위한 권면을 통해 직접적인 육성도구가 된다. 다섯째, 무엇을 말할 것인지 당신에게 확신을 준다. 즉 주제에서 빗나가지 않게 도와준다. 여섯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영을 간결하게 전하는 방법을 배움으로, 짧은 시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도와준다. 일곱째, 항상 가지고 다니기 쉽고, 전도자를 준비시켜 준다. 여덟째, 긍정적인 태도와 사랑으로 대하라. 미소를 지으라. 친구처럼 대하라. 긴장하지 말라. 확신 있는 선의의 시선을 가지라. 재치 있고 공격적이어야 한다. 말할 때는 입에서 구취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절대로 논쟁하지 말라. 남자는 남자에게, 여자는 여자에게 전하라. 아홉째, '사영리'에 표현된 복음은 설득력이나 판매기술이나 훈련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가라", "전하라"는 명령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가장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전도 폭발 프로그램
이 전도법이 1984년에 한국 목회자들에게 소개되었을 때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전도법은 1973년 케네디(James Kennedy) 이 전도법으로 크게 성장했다. 대학생 선교 단체들에서 사용하는 전도법보다는 뭔가 더 나은 것을 찾고 있던 한국교회에 선교 단체가 아닌 교회가 사용한 방법이었기에 그 관심도가 대단했다. 미국장로 교회의 전도를 통한 큰 성장사례가 한국 목회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뭔가 새로운 전도법을 고대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전도폭발」이란 책자 속에서 가르치던 복음제시를 더 간단하게 만들어서「좋은소식」「당신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까?」라는 소책자를 만들어서 더 간단하게 복음을 제시하려는 것은 진일보한 노력으로 보인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전도법은 천국으로 도전을 하면서도 천국이 무엇인지 소개하는 부분이 없는 단점이 있다. 복음을 은혜, 인간,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믿음이라는 다섯 가지로 설명하면서 결신으로 이끄는데에 그 매력이 있다. 나머지 방법은 사영리와 같다. 4단계: 결신한 사람에게 성장을 위한 5가지 단계를 소개한다. 기타 : 질문지 전도방법도 있고 여러 상황에서 복음을 전도하는 방법도 있다. 대상에 따라 여러 전도지를 사용한다.
① 훈련방법: 지도자 임상훈련 - 1주간 실시한다. 훈련생 모집 - 지도자 과정을 마친 분이 2명의 훈련생을 모집하여 16주간 훈련시켜 복음을 능숙하게 전하게 한다. 16주간 훈련받은 사람은 또 2명의 훈련생을 선발하여 훈련시켜 나간다. 처음 4주 동안은 전도훈련생의 모습만 관찰하고 5주부터 조금씩 훈련자의 도움 속에서 전도하여 후반부터에서는 완전하게 전도자의 자질을 갖추게 된다. 매주 3시간 정도가 쇼요되며 숙제점검, 간단한 강의, 현장실습, 방문보고 이루어지다.
② 전도폭발의 장점 및 특징: 철저하게 현장실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점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개발한 전도 프로그램이다. 양육자가 모범을 보이고 피 양육자는 그것을 그대로 배우고 또 가르친다. 반드시 양육자는 또 다른 사람을 양육하게 된다. 누구든지 쉽게 배우게 가르칠수 있다. 1명이 시작해서 2년 정도면 250명의 전도 훈련자가 나오게 된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인간적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게 하는 점과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사영리'와 비슷하지만 복음을 전하기 전의 거부감을 모두 제거한 후에 하기 때문에 옥토 같은 마음 밭이 되어서 결실을 많이 맺게 된다. 훈련기간이 길지 않아서 조금만 인내하면 모는 교회가 성공할 수 있다.
③ 평가 및 제안: 30여분 정도와 소요되어야 복음을 완전히 설명하게 되어 바쁜 사람, 급한 사람, 노방전도의 사역으로는 좀 무리가 있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방법이다. 전체교인과 목회자가 새신자들을 위한 분위기가 되어 있어야 성공할 수가 있다. 영적인 갓난아이가 사상아가 되지 않도록 교회가 노력할 때 성과가 있다. 목회자가 증인의 삶을 살아야 전도효과가 있다. 평가하려는 것보다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양들은 목자를 닮는다. 먼저 전도하는 삶을 보여 주라 교회는 바뀌어진다. 훈련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규모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때 자칫하면 양적 팽창이 질적 저하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므로 중간 지도자를 세워서 점검토록 해야 한다.
(3) 브릿지 예화
이 전도법은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이 정리하여 자신의 성경공부반 회원들에게 가르치던 복음 전달이 6요소를 도슨과 그 이후 세대가 발전시켜 확립시킨 것이다. 도슨 트로트맨의 복음전달의 6요소는 다음에 포함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많이 보급된 네비게이토 선교회 암송 시리즈 60구절 가운데 2번째 단락인 "그리스도를 전파함"의 12구절과 그에 따른 소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①브리지 전도의 내용: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롬 2:23, 사 53:6). 죄의 형벌(롬 6:23, 히 9:27).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음(롬 5:8, 벧전 3:18).선행으로는 구원받지 못한(엡 2:8,9, 딛 3:5).그리스도를 모셔야 함(요 1:12, 계 3:20).구원의 확신(요일 5:13, 요 5:24).바로 이것에 포함된 복음전도의 6요소는 선교의 금자탑을 세웠던 허드슨 테일러가 창립한 오늘 OMF의 전신의 중국내지선교회의 복음적 도안을 사용하여 확립된 것이다. 이 도안은 앞을 전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수많은 군증이 서로에게 밀리어 예상치 못했던 절벽으로 향하는데 어쩔 수 없이 떨어져 내리는 인간의 절망과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비참함과 아비규환의 고통을 그려내고 있으며 또 한 무리의 사람이 옆으로 뉘어진 십자가 형태의 다리를 통해 절벽을 안전하게 건너고 있다는 그림이었다. 이 동안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뉘어졌던 십자가는 바로 세워지고 절벽 아래 불꽃은 지워졌다. 그 대신 왼쪽 절벽에는 죄의 결국인 죄인, 심판, 형벌과 어리석은 인간의 노력을, 오른쪽 절벽에는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음과 요한복음 5장 24장인 영생을 얻고 심판과 상관없는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내용을 3가지로 요약하여 적용시키고 절벽 가운데는 세워진 십자가 다리를 들고 말씀을 통해 건너가고 있는 방법으로 제시했다. 다리 전도법은 그후 많은 첨삭과 변화와 발전이 있었으나 언제나 골격은 유지되었다. 그후 헤아릴 수 없는 다리의 예화를 들어 사용한 전도법들이 소책자 형태로 나왔는데 그 모두가 다리 전도법의 또 다른 적용이요, 변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② 단계적 설명과 구조 이해: 1단계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롬 3:23, 사 53:6). 2단계 - 죄의 형벌은 사망과 심판이다(롬 6:23, 히 9:27). 3단계 - 그리스도가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롬 5:8, 벧전 3:18). 4단계 -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엡 2:8,9, 딤전 3:5). 5단계 - 그리스도를 모셔야 구원을 얻는다(요 1:12, 계 3:21). 6단계 -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요일 5:13, 요 5:20)
③ 다리전도 훈련방법: 이것은 훈련이 특별히 없다. 기본 성구와 골격을 이해시키면 된다. 종이를 접어서 글을 적어가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하면 된다. 일주일정도 집중적으로 개 교회에서 훈련을 통해서 전도 할 수 있게 한다.
④ 장점 및 특징: 그림으로 보여주는 시청각이기에 훨씬 효과가 좋다는 점이다. 종이를 접어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다. 전도자에게 전도자가 화술에 관계없이 집중시킬 수 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논리적 전개와 복음을 일관성 있게 설명한다. 지적이 사람에게 효과적이다. 질문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유도하게 된다. 절대로 핵심에서 벗어 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
(4) 외침전도법
이 협회의 대표인 이유빈권사는 전도이론보다 전도자의 자세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주님이 해 오셨던 방법은 합당한 사람을 찾는 것인데 현대의 전도이론은 방법론만 찾고 있기에 많은 부작용이 있어 왔고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고통도 감수해야 했고 불신자들에게까지도 실망감을 안겨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도내용의 핵심은 일단 전도는 쉽다는 사고를 갖게 한다. 전도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마귀에 속고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는 사고의 대 개혁이다. 이것이 그들의 전도훈련 내용의 주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늘 교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전도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만 전도가 된다는 것이다. 항상 전도하려고 준비하라. 그러면 주님은 사람을 보내 주신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져야 한다. 열매 얻기를 기대하라 "열심히 뿌렸으니 거두어 주시겠지요" 이와 같은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반드시 열매를 맺기를 구하라 주님은 추수할 일꾼을 위해서 구하라고 하셨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한다. 성결 된 삶이 전도의 능력이다. 끈질긴 기도가 있어야 한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들 때까지는 나가지 말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반드시 준비된 영혼이 있음을 믿으라 우리가 준비된 만큼 주님은 준비된 영혼을 얻게 하신다라는 것이 그들의 사고이다. 교인을 얻기 위한 전도를 하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마 23:15). 교회를 늘리기 위한 전도가 아니라 영혼을 건지는 전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눅 19:10)는 것이다.
훈련기간은 보통 3,4일 정도로 한다. 지역별로 한 교회에서 교역자와 평신도를 나누어서 집중적으로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다. 저녁에는 부흥회를 겸하기도 한다. 오전에 1-2신간 정도 기도와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1-2시간 정도 나가서 실제로 전도한다. 다녀와서는 전도보고를 통해서 간증을 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고 기도한다. 두 사람이 1조가 되어서 1명을 전도하는 동안 한 사람은 옆에서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철저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한다. 이들은 또한 쉬운 전도의 조건은 항상 전도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 열매가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전하는 사람, 끈질긴 기도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훈련을 시킨다.
장점 및 특징은 전도는 어렵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고 있는 점이다. 반드시 열매를 얻기를 기도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추수할 일꾼을 원하셨다. 씨만 뿌리는 사람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매 얻기를 간절히 구하라. 그러면 반드시 예비 된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도우심을 구하라. 기도해서 성령의 임재가 분명하지 않으면 전도해도 소용이 없다. 어떤 때는 6시간까지도 기도한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가 잘되어 있으면 예수님께만 붙어 있으면 그래서 성결한 삶만 산다면 전도는 저절로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전도방법에도 문제점은 있다. 우선 전도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소개하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한다. 잘못하면 영적 사생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통계자료도 결과도 이들은 남겨 놓은 것이 없다.
이상이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적용되고 있는 전도법이다. 그러면 사랑방전운동은 이러한 전도법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장에서 목회적 차원에서의 사랑방전도법의 타당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제 2 절. 목회적 전략
교회성장은 목회자가 평신도를 얼마나 잘 동원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평신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역조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로건박사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구역교회」(thecell-group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구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이상의 것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소그룹, 혹은 자석집단(magneticgroup)을 의미한다. 새 시대의 새 교회는 감옥과 같이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두어두는 교회가 되지 말고 중앙집권에서 탈피하여 현장목회로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구역은 인간적 조직 이상의 영적 생명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성경적 근거
1)전도는 소그룹으로 일어나야 한다
구역(Cell)교회는 바로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사도행전 2장42절에서 47절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건강한 구역의 7 대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방전도 운동에 대한 목회적 전략의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① 교육---가르침을 배우고 적용했다(42절)
② 교제---다 함께 떡을 떼며 나누었다(42,46절)
③ 예배---성찬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렸다(42,47절)
④ 기도---기도하기에 힘썼다(42절)
⑤ 능력---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절)
⑥ 봉사---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45절)
⑦ 전도---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47절)
효과적인 구역(Cell) 혹은 소그룹을 가지려면 소그룹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소그룹은 「교회 속의 교회」이다. 소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소그룹만 잘 활용하면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소그룹은 또한 자석집단으로서 다양성과 수용성을 살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끌어들일 수 있고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학력 경제 경험 직업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독특한 자아정체를 가진 소그룹을 확장시켜 나 갈 수 있다.
살아있는 소그룹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포분열과 신진대사가 원할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2)다중리더십 필수
소그룹 혹은 구역(Cell)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중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전체를 관장하는 구역장(leader)외에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목양자(shepherd)가 있어야 하고, 비신자들을 끌어 오는 은사를 가진 전도자(evangelist)가 있어야 하며, 장소 와 음식을 제공하는 초청자(host)가 필요하고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인도자(teacher)가 함께 있어 일종의 팀 사역이 가능해야 건강한 구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맡게되면 항상 탈진하고 지쳐서 할 수 없이 일하는 형식적 리더십밖에 남지 않게 된다.
구역(Cell) 활성화의 열쇠는 올바른 지도자의 선발과 훈련에 있다. 구역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이른바 도제식 양육(apprenticeship) 이 성서적이다. 목회자가 생활과 사역가운데에서 함께 거하고 부딪치며 가르치는 교육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구역(Cell) 지도자를 선발할 때에는 세 가지 자격, 곧 성품 경험 기술을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영적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경험과 소질도 중요하지만 우 선하는 것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 경험과 소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좋은 성품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역(Cell)은 말 그대로 세포단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복제되고 재생산되어야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도수 1 백명당 6개 이상의 소그룹이 형성되고 가급적 모든 성도가 다 참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체성도 의 25-30% 정도만이 구역(Cell) 혹은 소그룹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수치를 70-8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구역을 성도들의 동질성, 예를 들어 직업이나 나 혹은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3)소그룹 모임 많게
평신도 지도자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끊임없이 찾고 훈련해야 한다. 평신도들 전체를 총동원하여 교회를 「사역공동체」(ministr ycommunity)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목사의 비전을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나누는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이다. 혼자 일하지 않고 팀으로 일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목사를 닮은 평신도가 많은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이다. 작은교회(소그룹)를 많이 만들고 작은 목사(평신도 사역자)를 많이 키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건물 안에 갇혀있는 교회가 아니라 건물 밖에 흩어져서 끊임없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교회가 21세기를 책임질 것이다.

2.소그룹의 종류들
1)업무를 위한 그룹/ 각종위원회(장학위원회, 선교위원회, 교육위원회, 차량관리 위원회...), 프로젝트 팀, 군대의 분대, 기동 타격대 등.
2)같은 관심에의한 그룹/ 동호인 그룹(컴퓨터 동호회, 산악 동호회, 낚시 동호회, 문학 동호회, 음악 동호회 ), 상담그룹(그룹상담 그룹), 학술회(학문연구를 목적으로하는) 등.
3)교육을 위한 그룹/ 학교의 학급, 수련회의 각 조, 교회 학교의 분반, 성경연구를 위한 소그룹 등.
4)관계중심의 그룹/ 가족, 종교적인 공동체 등.
3.소그룹과 성경공부
1) 소그룹의 조건
그룹은 개인의 집합(a collection of individuals)과는 다르다.
그룹이 되려면:
(1)2명이상의 확실한 회원이 있어야하고
(2)그룹의식 즉 "우리의식"(we-feeling)이 있어야하고
(3)공동의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
(4)그룹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또한 그룹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상호협조, 상호 의존해야하고
(5)그룹회원간에 상호소통, 상호영향 및 상호반응을 일으켜야 그룹이라 한다.
(6)그룹이 된다는 의미는 또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통일된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 해야 한다. 일주일의 기쁨을 나누게 한다
2)대중 모임과 소그룹의 역동성
(1)대중 모임의 문제점
대중모임에서는 개인들이 필요로 하는 받아들여짐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는 점이다. 대중모임은 교제를 삼켜버린다. 사람이 공동체 안에 깊숙이 받아들여지고 사랑을 느끼게 될 때 거기에서 배움이 일어나고 또한 주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런 교제가 없는 곳에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아 가지고 돌아갈 뿐이지 책임은 회피한다.
대중모임은 믿음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주거나 그것에 참여해서 실천할 수있는 기회를 신자들에게 줄 수가 없다. 큰 교회나 대중모임만으로는 성도들 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기가 매우 어렵다. 교육이란 참여하고 서로 교통(communication)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 교통을 통한 배움은 믿음을 나누는 것이고 삶의 방법을 서로 교환하는 방법이어서 서로서로를 고무하고 격려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주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불러 일으켜서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2)소그룹 학습의 가치//텔렌(J.A.Thelen)
심리적으로 아늑하며, 의사표현 뿐만 아니라 감정의 표현도 자유롭다. 참가의 기회가 많으며 따라서 사회적 평가를 받는 일도 많게 되어 학습의 동기도 고조된다.
①개인이 중시되어 개인의 책임감이 증대된다.
②자발적 자기 결정적 지도 행위가 양성된다.
③집단을 지도해 나가는데 용이하다.
④소그룹 성서학습은 회원들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며 그의 가장 높은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특히 성도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교회의 참된 본질의 하나인 Koinonia를 회복하는데 지대한 가치가 있다.
⑤이 소그룹 성서학습에서 가질 수 있는 가치는 장년들이 어떤 지식의 축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의 성장과 당면한 문제들을 숙달된 가치에 의하여 판단할 수 있는 능력배양을 요구한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지닌 이 세상에서, 하나의 활력있고 성장하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선용하며, 확장되고 있는 상호 관계속에서 자기 자신과 위치를 발견해야만 한다.

3.리더쉽에 관하여
1)소그룹의 지도자의 모습
그룹 성경 연구에서 지도자가 필요한가? 성경연구에서는 언제나 책임있는 지도자가 있어야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성경연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이다. 소그룹 성서연구에서 지도자는 가르치는 자(teacher)로서가 아니라 가능케 하는 자로서 봉사하게 된다. 가능케 하는자는 안내자,협조자,촉진자로 봉사한다. 法은 만든사람들이 안지킨다. 한번만 침을 더 삼키라
2)그룹지도자의 자세와 역할:
(1)지도자가 부모가 자녀에게 하듯이 일반 회원들에게 사랑과 수용의 자세를 가지고 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지도자는 격려를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룹도 개인처럼 칭찬과 격려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는 부모가 자기 아이를 위하여 엄격한 제재를 가하듯이 지도자는 "아니오"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룹 지도자는 언제든지 필요시에는 "아니오"를 해야 한다.
(3)지도자는 말과 행동으로 개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은 그룹에 흥미를 잃었던 개인에게도 새로운 관심을 넣어주어서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높일 수 있다.
(4)좋은 부모와 같이 그룹 지도자는 회원들로 하여금 책임과 지도력을 분담해서 지도토록 해야 한다. 그룹 성장과 함께 회원들의 독립심을 길러 주어야 한다.
(5)지도자는 정직하고 다른 친교가 일어나도록 하며 친교를 발전시킬 책임을 져야한다.
(6)지도자는 회원들이 서로서로 섬기면서 기쁨을 얻도록 분위기를 잘 조성해야 한다.
(7)지도자는 지식을 전달하거나 경험을 통하여 그룹을 인도하는 그 이상이다. 즉 그룹 회원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8)지도자는 토론과 대화로서 그룹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지도자의 참여를 통하여 참된 배움의 형태인 그룹 중심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9)지도자 토의 과정에서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막아 주어야 한다.
(10)때때로 지도자는 토의 속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회원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11)무엇보다 지도자는, 성령께서 그룹 안에서와 동시에 개인들 속에서 역사하심을 믿고 관심을 가지되 과제보다는 늘 사람에게 두어야 한다.
(12)지도자는 기지와 유모어 감각이 있어야 한다.
2)성경 공부 시 어려운 문제점들:
(1)입이 무거운 회원들이 많을 때:
대화에 조력할 수 있는 사람 한 두 분에게 미리 대화에 적극 동참토록 부탁하면 좋다. 동역자 C0-leader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시사성 있는 화제로 돌렸다가 대화의 분위기를 이룬 다음 공부에 들어가도 좋다.(복음을 향하여) 질문을 바꾸어 그 사람에게 적절히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질문을 낮추어 가야 한다. 애매한 것을 수준을 낮추어 해야 한다. 또한, 성경 몇 구절을 읽도록 부탁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 처음 온 분은 분위기를 탐지하고 있는 중이므로, 갑자기 질문을 던지지 말고 적당한 기회에 말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질문에 즉시 대답이 안나오더라도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인도자가 신경질이 나더라도 화내지 말고 인내하며 잘 인도하면 좋아질 수 있다. 왜 말이 없는 지 잘 분석해 보고 대책을 다른 동역자와 상의해 봄이 좋다. 말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깊이 듣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말이 많은 회원이 있을 때:
모임을 완전히 독점하고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갈 때 인도자가 구경하고 있으면 안 된다. 얼마만큼 듣고 있다가 "참 재미있는 의견이군요, 다음기회에 한 번 들어보기로 합시다. 은혜 자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하고 적당한 곳에서 말을 끊고 전체회원이 공감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3)곁 가지를 치는 사람이 많을 때,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
너무 묵살하면 인도자의 차가움을 싫어할 것이므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면 대답해주고, 중요한 문제이면 기록하면서, "다음에 연구해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성의를 보임이 중요하다.
(4)언쟁이 생겼을 때:
양쪽 의견을 듣게 한 후 성경말씀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면 정확한 대답을 내리고, 해답이 어려운 것은 다음 기회로 일단 미루는 것이 현명하다.
2.소그룹 지도 방법
1)건전한 그룹
(1)그룹회원 전체가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참여한다.
(2)최후 결정은 전체 회원이 충분히 토의하여 합의 후에 결정한다.
(3)회원들이 피차 상대방의 의견이나 제안을 존중하고 고려하게 된다.
(4)회원들이 객관적으로(사사로운 감정없이)그룹의 목적과 과제에 대한 흥미에 중점을 둔다.
(5)회원전체가 서로 보상도 해 주고 비판도 한다.
(6)타회원들을 신뢰하고 가치를 인정하면서 의견을 내놓거나 책임을 다하는데 선도성(先導性)을 잡는다.
(7)그룹의 회원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개방된 마음과 의욕을 갖는다.
(8)회원의 가치는 그 사람의 그룹에 대한 공로에 의해 평가된다.
(9)중요한 안건에 대해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10)회원들의 행동이 항상 다른 회원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취해진다.
2)불 건전한 그룹
(1)몇몇 제한된 회원들만이 토의에 참여한다.
(2)대부분의 회원들은 무던히 동의를 한다.
(3)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며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 중심적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나간다.
(4)회원들이 그룹의 목적과 과제를 주관적으로 이해한다.
(5)회원들은 모든 일을 돕는 이에게만 의존하고 돕는이가 없으면 토의가 진전이 안된다.
(6)그룹 이외의 다른 자원에도 의존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7)좋은 생각을 제공한 사람의 의견을 순수하게 잘 받아 드리지 않는 경향이 농후하다.
(8)지엽적인 문제 대수롭지 않은 절차문제에 대해 오히려 많은 시간을 쓴다.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나 체면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3)그룹 유지를 돕는 기능들
(1)격려-다른 회원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 준다거나 좋은 의견이 나왔을 때 적극 동의하며 공헌을 끼친 회원에게는 칭찬을 해주는 기능이다.
(2)그룹 감정표현-그룹 안에서의 느낌이나 분위기 그리고 관계에 대하여 다른 회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3)중재-회원간의 의견의 차이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기능이다.
(4)타협-어느 한 회원의 의견이나 상대가 논쟁 가운데 있게 될 때 자신의 입장을 타협시키려거나 잘 받아들이며 그룹의 친교를 유지하려는 행동이다(예//잘 못된 것은 금방 시인하고 넘어간다)
(5)문지기 기능-조용히 있는 회원에게 이야기를 시키거나 그룹의 진행이 정지되었을 때에 좋은 제안을 하면서 그룹의 토의를 살리는 기능이다.(예//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전문가''-문제에 대해 생각')
(6)기준설정-기준을 제시하는 기능이다.
(7)청종-잘 들어 주는 기능이다.(눈, 고개로 응답해 준다)
(8)긴장완화-그룹 안에서 딱딱한 분위기나 불쾌한 감정이 생길 때 유우머를 써가면서 분위기를 조성하여 긴장을 없애는 역할을 하는 기능이다.(예//음담패설, 지역감정, 인종차별,성경을 가지고 하는 농담은 영적분위기를 손상시킨다.)
4)비 기능적 역할들
(1)봉쇄-화제에서 탈선된 이야기나 자기의 경험등을 많이 하는 경우나, 또는 무조건 남의 의견을 반대하면서 다른 회원의 참여를 가로 막는 역할을 봉쇄하고 한다
(2)공격-그룹안에서 심하게 비판하거나 비난하므로 적의를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수도 있다.
(3)인정요구-남의 주의를 자기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자랑하거나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언동을 한다.
(4)후퇴-그룹토의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딴전 피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피동적으로 행동을 한다.(책 덮어놓고 있는 행동이 여기에 속한다.)
(5)지배-그룹을 자기가 조정하고 지배하려는 행동을 한다. 명령도 하고 사람의 발언을 무시하면서 권위를 부리려 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정리 해보면, 성경 연구의 목적은 성경의 지식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데 있다. 건전한 방향설정(-ism)을 하라. 모든 종교는 Buddism. Shamanism Moonism이지만 기독교는 Christism이 아니라, Christanity이다.
내용이나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인도자와 참여자가 어떤 영적 상태, 성경연구에 체질화가 문제이다. What, How 보다 Who가 문제이다.
그룹의 영적인 분위기는 성경연구의 능력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그룹의 습관적인 모임이 되지 않도록 늘 신선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매시간 참신한 장식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자리배열, 장미 한 송이, Coffee한잔 준비)
자신을 솔직히 고백하고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분위기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지도자와 참여자는 그룹역학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 지도자나 참여자의 의견이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말씀으로 의견을 수정해 가야한다.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배우는 말씀에 의해 수정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제 7 장. 전도소그룹을 위한 평신도 훈련계획
1884년 알랜과 언더우드가 한국에 개신교의 문을 연 이래 한국의 개신교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부흥을 거듭하여 왔다. 1900년에 18,081명이었는데, 100년만에 1,000만을 돌파했다.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그들이 연구할 모델로 주목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수적인 성장의 모델이 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교회로서의 모델이 될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1,000만을 넘는다고 자부들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빛이 사회를 비추지 못하고, 기독교의 소금이 사회의 부패를 치료하기는커녕 방지하는데도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교회가 성장하는 데만 주력하여 수적인 동원은 이룩했지만, 이들을 관리하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교회 안에는 세상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가견적인 교회인 99%의 평신도가 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생활현장에서 자기의 삶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어야 교회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을텐데 방치되어 있다. 또한 교회는 이들이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유기체로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교회의 지체들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림으로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교회가 갱신되려면 교회의 지체들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효과적이면서도 교회의 본질에 적합하게 교인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가? 소그룹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을 수용할 수 있는 기초구조로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소그룹은 교회로 하여금 가장 신속하게 교회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는데 최선의 구조이며,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소그룹이 기본단위로서 교회의 모든 사역의 근간이 될 때, 교회의 본래적 기능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면 그 동안 소그룹이 교회에 없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구역, 남 여전도회, 위원회 등의 소그룹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조직체계는 있다. 하지만, 단지 기능적으로 대그룹을 축소해 놓은 정도에서 머물고 말았고, 소그룹으로 발휘될 수 있는 자유성이나, 역동성, 개체간의 활발한 상호관계가 억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형태만이 아닌 기능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소그룹의 특성이 충분히 채용되는 소그룹 운동이 필요하다. 아울러 선교지향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앞장에서 말했듯이 모달리티(Modality)적인 소그룹이 많아야 한다. 즉 전됴ㅗ 소그룹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될 때, 소그룹은 교회를 갱신시키는 도구이면서, 갱신된 모습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이장에서는 본 연구자가 진주도동교회에 접목하고자 하는 전도소그룹 "사랑방전도운동"을 교회내의 평신도들에게 접목시켜나가는 방법을 열거해 보고자 한다.
제 1 절. 전도소그룹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
교회 갱신운동은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열의를 가지고 시작되었고, 기독교 운동의 진수를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갱신운동자들이 취했던 형태는 소그룹으로부터 시작된 기도와 교제와 훈련이었다. 이에 맞추어 본 연구자는 진주 도동교회에 전도소그룹 운동을 접목시키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실행에 옮겼다.
1. 세미나 준비를 위한 사전조사 및 진행
본 연구자는 본 세미나와 연구 조사를 도와 줄 그룹을 5인 선정하여, 진주 도동교회의 새로운 '사랍방전도 운동'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3차에 걸쳐 모임을 가졌는데 그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99.7.1. PM:7시 목회관리그룹 5인 위원 선정. 담임목사의 설명. 신앙의식 조사
1999.7.8. PM:7시 교인들의 신앙의식 조사를 위한 설문지 작성 (문항수 30가지. 150명에 대한 조사계획 수립)
1999.7.15. PM:1시 설문지 배부 및 수거
곧바로 목회관리그룹들과 결과 분석
1999.7.21. PM:7시 세미나 실시 (소그룹전도운동과 도동교회의 비젼)
1999.2.1. PM:9시 세미나 후 설문조사

1) 도동교회 교우들의 신앙의식 조사 결과 분석
도동교회가 지난 수년간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으로 교육을 시켰지만, 성도들에 대한 신앙의식을 조사한 결과, 의외로 성도들의 신앙이 말씀의 확신 위에 서있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질문은 구원의 확신, 죄 사함의 확신, 기도의 확신, 인도의 확신, 말씀의 확신, 성령 내주의 확신, 교회생활의 중요성들을 묻는 질문인데, 이 열 가지 질문에 모두 긍정적으로 대답한 사람은 150명의 응답자중 47명에 불과했다(28.9%).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는 121명의 사람이 긍정적으로 대답했지만 밑으로 내려올 수록 그 숫자는 줄어들어 "성령님이 내 속에 내주하고 계시느냐" 는 질문에는 73명 (47%)만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또 20번까지의 질문은 교회에서와 세상에서의 봉사를 묻는 질문인데 이 부분 역시 30%이하의 응답률이 나왔다. 모름지기 성도의 삶에서 나을 돕고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삶이 되려면 무엇보다 기초신앙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초신앙의 확립과 봉사도 말씀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시다. 12번 십일조를 실천하고 계십니까?(24%) 16번 우리교회는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까?(18%) 18번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에서 실천되고 있습니까?(13%) 등등은 우리교회의 말씀교육상태를 진단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읽기, 암송 등등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미했으며 이에 대한 좀더 준비된 목회계획과 실행이 필요할 것 같다.
2) 신앙의식조사 결과 느낀 점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전반적으로 말씀에 의한 지식적 신앙보다는 마음에 의존하는 감정적인 신앙임을 발견하게 해준다. 본교회의 교우들 중 거의 70%가 타 지역에서 전입해 들어온 사람이라면 이들은 이미 두 세개의 교회이상에서 신앙을 배웠고 말씀을 배워 왔을 터인데 의외로 그들은 말씀으로 견고하지 못했다.
이들이 모두다 수년씩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굳건히 서있지 못한 이유는 우리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지성보다는 감정에 의존해 왔다는 뜻이 된다. 물론 감정적인 면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감정만을 고조시킨다면 카타르시스가 일어나지 않는 모든 교회의 행사들은 철저히 저들에게 외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복적으로 복음을 강조하며, 또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그리고 확인하는 구약적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이해시키고 확신시켜야 할 것이다.
3) 실행을 위한 행동계획
이렇게 발견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 교회는 다음과 같은 정기적인 사역을 시행하기로 했다.
정기적인 세미나를 통한 구원의 확신운동과 말씀의 확신운동
목회자와 함께 혹은 대신해서 구원의 확신을 시킬 수 있는 평신도 사역자 훈련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기본 방향을 잡고 도동교회는 사역을 해나갈 것이며 본 장에서는 본 교회에서 실행하였던 세미나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밝히도록 하겠다.
대개의 도시교회들이 다그러하겠지만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성도들의 이동이 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다들 오래했다고는 하지만 깊이 있고 체계 있게 성경을 배우고 익힌 적이 없는 것이다. 본인의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했다고 하면 별 의심 없이 다시 본교회의 집사로 임명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성도들에 대한 점검 없이 지나 가다보니 성도들의 기초신앙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이 세미나 후 간략하게 확인을 위해 돌린 설문지에서 밝히 소감은 대체로 세미나가 유익했다(97%). 세미나를 통해 새롭게 거듭났다(49%), 세미나를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84%).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읽고 듣고 암송하고 공부하겠다(67%)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고백하는 교우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도시교회는 이동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잘 점검해서 이들을 말씀으로 붙잡아 주며, 신앙을 성장시킬 때 교회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은 뻔한 일이다. 성숙되지 못한 신자는 교회나 세상에서 맛없는 소금이요. 거치는 돌이 되어 교회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도동교회의 전도 프로그램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 방법은 오늘날에도 실천해야 되는 과제이다. 초대교회와 한국의 초대교회도 상황은 달랐으나 전도의 방법과 효과는 비슷했다. 철저한 회개와 변화된 모습, 성령의 충만을 사모함과 그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세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본 장에서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주요 전도이론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이론들의 장단점과 보완점을 살펴보면서 도동교회의 바람직한 전도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네트웤 전도. (사랑방, 다락방 전도법)
이 훈련은 동삼제일교회 류광수목사와 김재헌 목사가 개발한 전도 프로그램으로 영향력 있고 충성된 자를 선별하여 훈련시켜서 그가 속한 직장이나 가정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 한 지역을 복음화 한다는 방법이다.
훈련의 개념: 네트웤 전도 즉, 훈련의 개념은 이런 것이다. 일꾼을 선별해서 교육을 시킨다. 대상과 장소에 시간을 일정하게 정한다. 일정한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훈련시킨다. 훈련 내용은 주로 새생명을 낳는 새생명 운동으로 불리워진다. 성경적인 근거를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를 제시하고 있다(시도행전 17,18장) 기존의 구역과 다른 점은 장소가 일정하다는 것과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훈련방법: 훈련방법은 일꾼을 선별한다. - 갈급한 자, 충성된 자, 영향격이 있는 자가가 선발된다(성패의 열쇠다). 교육을 받는다(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정해진다. 인원은 제한이 없다). 일정한 장소에 파송이 된다. 시간, 장소 인도자는 절대로 변경하지 않는다.
특징과 장점: 이 훈련의 특징과 장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전도가 용이하다. 복음이 초청하기 쉽다. 양육이 용이하다. 부드럽게 전도와 양육이 연결된다. 흩어져갈 때 공부반이 생겨지게 된다. 초대교회가 이 방법으로 성공했다. 전도인의 자세와 사명에 관해 아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전도훈련 교재로 좋다고 생각한다.
평가와 제안: 아직 구체적인 적용사레와 성공한 교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 구역과의 관계가 잘 정립될 필요가 있다. 기존 교회보다 새로 시작하는 교회들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사영리 전도처럼 훈련받은 이는 누구나 전도자가 될 수 있지만 이 훈련은 오랜 기간 모임을 가져도 지도자로 세우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까지 전도방법은 대학생 선교회의 사영리와 전도폭발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복음제시적 전도로는 전도가 지속화 될 수가 없다. 또 된다고 하여도 동기 부여를 강하게 받는 일부 교회나 목사에 의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사영리 방법은 도동교회에서 다락방의 새생명으로 복음제시를 하기 전에는 사용하던 방법이다. 도동교회는 전도폭발 전도방법을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도동교회는 이제 총력전도가 시행이 되어지도록 구조를 만들고 교회목회 카렌다를 전도가 되어지도록 제작 할려고 하는 것이다.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2차례에 걸쳐 교회가 이웃을 초청하는데 각기 육 개월을 기간으로 하여 2회에 걸친 총력전도 운동을 하는 것이다. 성도 한 명이 4명의 태신자를 2월과 9월에 정하고 기도하는 것이며 잔치당일까지 등록을 목표를 하는 것이다.
70인 전도특공대, 기도특공대, 양육지도자들이 확보되면서 교회가 총력을 다해 전도하도록 구조화시키고 체질화시키는 총력전도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방전도운동이다.
앞서 말하였듯이 오늘날 교회성장의 가장 큰 관건은 평신도 사역자의 개발과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신도 자원들을 어느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이냐의 문제는 목회자의 철학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회자의 철학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본 연구자와 도동교회는 전체적인 사역의 초점을 복음 전도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보거나 하나님나라의 신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교회가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에 최우선을 둔다는 것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전도를 위해 1년의 년 중 목회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자원을 훈련시키고 예배와 교육, 교제와 봉사 등도 이러한 복음전도를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거나 차선의 것으로 보는 것이 총력전도를 위한 사랑방전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사전 조사와 교육, 훈련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온 교회의 총력을 소그룹 복음전도에 맞춤으로써 교우들은 복음에 대해 더욱 민감해 질 것이고, 또한 복음전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나아가 그들의 개인적인 역량을 복음전도를 위해 사용하도록 헌신케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보다 핵심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선포할 것이다. 한마디로 총력전도 운동이란 전 교회의 전 자원을 복음전도라는 교회 본연의 목표에 맞추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훈련 방법
분명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좀 더 효과적인 전도의 결과를 위해서 전도 방법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물론 실제로는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더라도 전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과 훈련이 없으면 전도에 성공할 수 있는 비율이 희박해 지며 전도하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극복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동광교회에서는 세미나형태로 사람을 모아 그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훈련의 효과를 살펴보려고 한다.
1) 훈련내용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 안으로 인도해 오는 과정이 본 훈련의 주된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전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인도만 해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자의 책임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상대편을 교회로 인도해 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는 나와 가까워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듣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자고 하면 그 말만은 절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 아무리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게 하고 선한 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해도 결과는 퍽 신통치 않다. 따라서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체험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행 1:8).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로 상대방을 교회로 이끌어 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교회로 인도하더라도 상대방은 곧 다시 교회 오는 일을 그만 두고 말 것이다. 강력한 성령체험을 달라고 기도회를 병행해야 한다.
둘째,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 오고 나면 전도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가 전도의 시작임을 알도록 깨우친다.(마10:38) 우리가 전도에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우리교회가 성장치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훈련과정을 공부시키는 내용도 이것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새 교인이 조금 있다가 곧 교회를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의 수고는 헛되게 되고 교회도 성장치 못 하게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각별히 주의해서 새 신자들을 돌볼 수 있는 일군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본 훈련의 내용의 주안점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고 난 다음에는 그는 상대방의 영적인 부모이고 반대로 상대방은 당신의 영적인 자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은 교회의 목사님, 전도사님이 하는 일이 아니고 당싱 자신이 하는 일 임을 깨닫는 것이다. 상대편을 교회로 인도한 그 순간부터 신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적인 부모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영적인 부모는 우선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요 13:1).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사랑하신 것 같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편을 사랑한다고 할 때 제일 큰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구원을 경험하도록 가르치고 도와주는 일이다. 나의 영적인 자식에게 하여야 할 가장 큰 일이 바로 구원을 경험하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성서를 가르치는 일이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도리를 가르친 후에는 교회생활 전반에 걸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예배는 왜 꼭 참석해야 하는가? 기도는 왜 하여야 하는가? 성경을 홰 읽어야 하는가? 죄를 멀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령을 체험하는 일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서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내용이다.
상대방이 분명한 구원을 경험하고 그 밖의 모든 교회생활을 알게 된 후에는 마지막으로 같이 전도하는 일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신자도 성숙하면, 영적인 부모 노릇을 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체적으로 성숙한다는 뜻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교인이 우리의 보살핌과 교육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하여야 하고 그 후에는 영적인 부모를 떠나서 홀로 영적인 자식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사랑방이라는 틀안에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사랑방전도 세미나를 가지게 된 것이다.
2)훈련과정
(1) 준비를 위한 사전조사 및 진행
본 연구자는 도동교회의 새로운 '사랑방전도 운동'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여름휴가철을 이용하여 세미나를 가졌다.
훈련된 평신도들을 만드는 길만이 교회성장의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신도 훈련생들을 보다 많이 동원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서 도동교회는 훈련 세미나를 실시하였다.
여기에는 첫째, 평신도 제자훈련과 둘째, 평신도 제자훈련 중급과 세째, 선포전도 방법과 넷째, 설득전도 방법 그리고 다섯째 네트윜 전도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2) 사랑방전도 세미나
기본적인 신앙과정, 즉 구원의 확신 단계와 기초적인 신앙생활을 익힌 그리스도인은 빠른 시간 안에 복음의 깊은 단계로 나아가 신앙을 체험하고 변화된 삶을 체험해야 제자의 삶으로 발전하게 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이 변화된 것 같이 인격이 변화되고 삶의 태도로 바뀌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의 초급과정으로서 새 생활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제자훈련들이 따로 떨어져 진행되어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의 초급단계인 일반적인 훈련에서부터 전도훈련까지 겸하여 받게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사랑방전도 세미나이다.
훈련의 실제는 다음과 같다.
일시는 8월 9일부터 한 주간 동안 (오후 7시부터 밤 9:30분까지)로 하고, 강사는 담임목사가 맡았으며, 교재는 골방성경공부였다. 수료는 수료식 전에 간증 순서를 넣었다. 인원은 각 기별로(1년) 30명을 선발해서 교육했다.
골방성경공부교재목차는, 1과. 하나님의 자녀됨의 확인에서부터 12과 전도후의 조치들까지 총 12주에 걸친 교재이다.
그리고 겸하여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밤마다 기도회를 하여 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현대인들은 분주하고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에 기도훈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예수님은 분주한 하루의 일과 중에서도 꼭 새벽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몰입 하셨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 전쟁과 같은 경쟁심, 밀어닥치는 유혹, 선택할 때의 미혹 등으로 항상 위기의 연속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영적인 훈련을 쌓아야 하는데 리챠드 포스트는 경건의 훈련 중에서 말씀훈련과 기도훈련, 금식과 찬양과 침묵의 훈련은 너무나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원칙대로 하자면 평신도훈련 중급까지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평신도 제자훈련 고급 과정을 훈련받도록 해야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교회에서 바쁜 현대 교인들을 모아놓고 반복적인 훈련만 시킨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기에다 평신도 제자훈련 고급 과정은 말 그대로 훈련(Traning)과정으로서 목사의 사역(Ministay)의 잠을 일부 나누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작은 목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사역을 나누고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취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사랑방전도훈련과정의 제일 마지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는 필히 전도훈련과 실제훈련을 시켜야한다. 전도훈련이란 타인에게 접근하여 마음에 문을 열게한 다음 복음을 제시하여 예수를 영접하도록 만드는 일을 말하고, 양육훈련이란 전도되어 교회에 등록된 신자를 복음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서 최단 시간 안에 신앙을 고백하고 신앙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본 교회는 1년에 각각 1차례씩 전도훈련 세미나와, 새신자 양육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이때 참가자격은 제자훈련 중급까지 받은 사람으로 제한하고 기간은 1주일 정도로 해서 다른 제자훈련 프로그램과는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
특히 전도 세미나는 전문강사를 불러서 필요한 강의시간에 강의 하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또 다른 교회에서 전도를 열심히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간증 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중의 하나일 것이다. 필요한 예산은 참석자들의 참가비를 받고 일부는 교회에서 보조해 주는 방향으로 하면 된다.
3) 사랑방 전도 세미나의 진행
이 전도 세미나는 1주일간 실시한다. 첫째, 선포전도법에서부터 사랑방전도법 까지 체계적으로 세미나를 실시한다. 1998년 8월 9일부터(저녁 7시 - 9시 30분)에 했고 . 전도 세미나 시간표대로 본 교회 담임목사, 전도 전문인 간증강사 2인이 강사로 수고했다.
참석대상은 세례교인으로 전도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으로 참석인원 은 30명이내에서 했고, 교재로 사영리와 사랑방전도법에 대한 본 연구자의 강의 자료를 사용했다. 사랑방은 전도세미나 교재는 사람을 낚는 어부였다.
제 2 절. 세미나 후의 결과들
1.사랑방 전도의 교회접목
제 8 장. 전도소그룹을 통한 이웃전도방법
제 1 절. 전도 소그룹의 시작단계
교회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방전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랑방전도운동의 가장 핵심은 전도하는 일꾼을 길러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사역에 일대 큰 혁신을 가진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제자훈련이란 신자들을 그저 단계별로 성경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지식이 늘어난 신자는 많이 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마태복음 28:19-20의 말씀을 쫓아가서 전도하고 제자 삼는 평신도 사역자는 많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을까? 본 연구자가 도동교회의 사역과정 중에서 느끼게 된 것은 교회의 목표설정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이나 직분자들이 우선 순위를 엉뚱한 곳에 투자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교회의 절대적인 사명을 "전도"라고 못박고 이러한 진실을 성도들이 자각하고 각성하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설정에 부합되도록 될 수만 있다면 전도훈련(세미나)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미 전도훈련을 받은 평신도 제자들도 정기적인 세미나와 웤샾을 실시해서 더욱 전도에 대한 사명감과 기술을 연마하고 또 이들 중에서 필요한 강사를 세워서 다른 신자들에게 전도훈련을 시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두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철학도 없이, 또한 기초가 될만한 신학도 없이 무분별하게 전도프로그램을 도입했던 것도 반성해야한다. 복음전도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가지만 고집할 수 없다. 또 선교단체나 외국교회에서 성공했던 방법이라고 우리상황, 우리교회에 그대로 작용되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검증도 없이 충분한 연구나 이해 없이 교회에 급히 이식시키려다 실패하게 되는 경우를, 본 연구자는 주위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전도훈련을 실시하되 담임목사가 스스로 연구하고 임상실험을 하고 그리고 그 결과들을 분석하여 프로그램 화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서서히 접목시킬 때 자신의 은사에 맞는 전도훈련을 받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지속적인 전도훈련을 위해서는 항상 교회의 전체적인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이 되어야 한다. 도동교회의 "사랑방전도운동"은 도동교회 교우들의 심령이 항상 각성되어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다. 그들의 심령이 주께 헌신되어 있을 때 기꺼이 주의 십자가를 지는 심령으로 전도할 수 있고 함께 멍에를 메는 도동교회의 식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방전도운동"이란 도동교회의 "전도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1)기획단계
효과적 전도운동은 반드시 기획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방전도 세미나를 통하여 선발된 순장들을 대상으로 도동교회는 매년 1월과 7월은 기획과 조직의 기간으로 잡아 매년 두 차례의 전도활동을 전교회적으로 벌여나갈 셈이다. 오두막집은 설계가 필요 없다. 그러나 큰 빌딩은 반드시 설계가 필요하다. 독서, 간증, 세미나를 통해서 전도와 교회성장에 도전을 받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전도운동에 대해 강권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9년 제1차 사랑밥총동원 주일은 12월 중에 실시하기로 하고 당회에서 행사 가부를 결정하고 제직회의 동의를 얻는다. 이전에 전도위원회, 위원장(혹 전도부장) 이 내용을 설명하게 되면 더 좋을 것이다. 당회와 제직회의 결의가 끝나면 제일먼저 교역자들과 직원들이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1박2일정도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조직을 한 뒤에 당회 전도위원회 교회학교 각 부장 자치기관장이 모인 연석회의에서 조직을 한다. 이 조직뒤에 교회에 공표하는 것이 기획단계이다.
2)준비단계(2, 8월)
조직이 완료되고 일정이 정해지면 온 교회는 전도대회 준비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제일 먼저 선포식을 2월과 8월 첫 주일에 선포되며 주일 저녁 예배를 전도대회 선포식으로 감사예배로 전도대회 헌신예배로 드린다.
첫째, 전도대회선포식(감사헌신예배)은 담임목사의 전도대회 선포와 일정발표, 구호제창, 헌신고백, 결단의 기도가 있게된다.
둘째, 전도대회 명칭은 봄의 부활절은 "예수 전도 대잔치"로 하고 가을 역시 "예수 전도 대잔치"로 한다. 그리고 주제와 표어를 정하고 시간 나는 대로 외치게 한다.
셋째, 전도목표는 사랑방 당 4명으로하고 1명이상의 결실을 목표로 정한다. 그래서 각 사랑방마다 4명의 불신자 명단을 확보하게 한다. 매주 1회 이상 방문하여 매일 3회 이상 기도하게 한다. 이 전도 목표를 모두 선포식에 쓰게한다. 그리고 직분 구분 없이 4명씩 쓰게한다.
넷째, 조직구성에서 대회장은 담임목사가 지도위원은 교역자가 실행위원은 장로 권사안수로 한다. 분과 조직은 너무 방만하게 하는 것보다 실제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실행이 쉽도록 최대한 축소시킨다.
이후 전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세미나를 개최하고 결단의 시간을 통하여 70인전도 특공대원의 신청을 받아 전도를 지속화한다. 다섯째, 양육위원은 평소의 양육위원을 다시 재정비하여 실행단계부터 등록하는 새 신자를 양육할 수 있게 무장시킨다. 양육은 교회와 일대일 만남으로 진행하는데 교회에서 하는 새가족세미나에 일차 출석하게 하고 참석치 못하는 새가족은 양육위원과의 만남을 통하여 양육받게 한다.
3)실행단계(3, 9월)
사랑방전도대회를 한달 앞둔 3월과 9월은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이 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총력전도 새벽기도회로 정하고 기간은 교회 형편에 따라 정하나 40일이나 한 주간등 교회사정에 따라 정하도록 한다.
전도를 위해 전도지를 집중 배포하는 일도 이때에 해야 할 일이다. 3월부터 시작되는 전도는 11월- 4월. 5월 - 10월까지 계속하여 전도순위를 결정하여 시상식을 가진다. 이 때 시상에 든 사람은 전도여행을 2박3일 떠나게 된다. 이것은 전도훈련을 보다 강도 높게 시키는 결과 있게 된다. 경비는 본인이 30%만 부담하게 된다.
4)결신단계 (4월 10월)
사랑방전도대회는 4월 부활절과 12월 전후로 하는데 당일과 그 다음 주에까지 연속으로 2회 걸쳐서 해야한다. 그것은 단일에 끝날 수 없는 준비와 기도가 있었으며 다음 주일은 되지 못한 일과 인도 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전도대회 당일의 예배순서 진행과 안내 그리고 결신카드 받기 선물전달 등의 대단히 중요한 일과 집회장은 청결과 아름다움 냉난방 시설등이 완벽하게 준비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회 한두전에는 전성도가 초청장을 들고 직접 방문하는 것이다. 초청자들은 그냥 보내지 말고 개인 상담과 식사 등을 하면 더욱 좋을것이다. 그리고 전도대회는 초청과 결단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시간마다 이 시간을 통하여 많은 구원이 있도록 교역자와 구역자 양육 위원들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타교인 뺏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시행하는 교회측에서 매우 주의하여 선별해야 한다. 다음은 처음온 사람들 중 결신자를 구별하여 일단 이들 모두를 만나야 한다. 숫자가 적을 땐 교역자가 모두 할 수 있지만 보통은 많은 숫자로 거의 불가능하다. 사전에 양육된 교사가 있으면 최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구역장이나 평신도를 즉시 교육해서라도 일단 그물에 들어온 고기를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은 연령 및 기관별로 분류하여 소속 기관에서 접촉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어야 한다.
이들이 접촉한 다음 주일부터 그들을 본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등록을 시켜야 한다. 이 일은 꾸준히 그리고 철저히 실행되어 져야 하며 평신도가 감당하기 어려은 부분은 교역자가 나서서라도 구원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등록율이 낮고 결과가 몹시 서운할 정도로 저주하자 일부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망원제일교회와 봉천교회에서는 "알곡거두기 운동"으로 그들을 재차 접촉하는 것이 없고 충신교회는 "다시 마나는 날"을 시도하였다. 다시 만나는 날은 컴퓨터에 입력되었던 참석인들을 가능한 결신자들에게 모두 초청장을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인천순복음교회는 인기 연예인을 초청하여 결신자 환영의 밤을 개최하였다. 총동원 주일의 뒤에 양육의 프로그램은 이 행사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사랑방전도대회는 소그룹인 사랑방에서 이미 전도자 자신들이 만남의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백 번 만나기를 기도하며 시도하고 있으므로 관계성 전도의 만남의 카드 활용이 지속되도록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도시상 준비를 위한 통계와 결신자 구분을 구역별 개인별 신앙별로 분류해야 한다.
결신 이후에 꼭 필요한 것은 심방과 지속적 양육확인 그리고 새가족 촬영회를 인도자와 함께 초청 교회소개 간증 등을 통하여 결신이 확고하게 열매를 맺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제 2 절. 전도소그룹의 활성화 단계

전도를 하였으면 철저한 사후관리 프로그램이 실시 될 때 전도운동은 지속되며 성도들이 제자로서 지속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첫째로 등록신자의 심방과 새신자 교육이 정확하게 되어져야 하며 양육자와 자치기관의 양육부와의 관계가 이뤄지는지 점검할 때 필요하다. 둘째로 교회에 왔으나 결신 하지 않는 분들에게 지속적으로 교회가 홍보물을 보내고 다음 초청잔치에 초대하는 일이 중요하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전도대상과 만남의 카드 관리이다. 모든 성도는 만남의 카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하고 한 주에 일회이상 만남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데 교회의 상황판과 성도들의 카드에 기록하게 한다. 넷째로 전도대회의 결과를 정확히 통계 내어 보고하는 감사예배를 드린다. 다음 대회를 잘 하게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로 반드시 전도대회 결실이 있는 분들은 계속해서 전도를 실습하게 한다. 그리고 끝으로 등록된 새 신자가 양육되어지며 재 생산단계로 까지 철저한 사후관리가 필요하다.

1) 사랑방 전도운동의 확산
도동교회는 한국의 여타 교회와 같이 이러한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해오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 연구자는 두 가지로 보았다. 그 첫째는 훈련의 부족이고, 두 번 째는 평신도의 적극적인 할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안한 새로운 전도프로그램을 모색하였는데 이것이 사랑방전도 운동이다. 이 사랑방전도 운동은 전교회의 전 자원을 그리스도의 명령하신 바 복음전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현대 목회의 최종적인 목표는 결국 우리지역을 완전히 복음화 하는 것이요, 나아가 세계를 복음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회에서 전 신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만 만들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도 단계가 필요한데 이는 먼저 설교중심의 목회에서 교육중심의 목회로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신자들의 신앙적 성숙도와 달란트에 알맞는 전도훈련을 시키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매우 게을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즉 신앙의 초기부터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것을 연구하며 삶 속에 적용하며 실천하는 훈련을 하지 않고서는 전 교인을 제자 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성도들의 토양을 바꾸어야 한다. 듣기만 하는 신앙생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묵상하여 삶 속에서 적용해 보려는 노력이 선행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새로 믿게된 신자들은 유혹에도 약하고 진리에도 미숙하기 때문에 미혹하거나 실족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을 보다 더 강화해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기초과정이 끝난 사람은 연이어 생활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수를 믿어 영적으로 변화된 사람은 구원은 얻었지만 아직도 벗어지지 아니한 죄 된 옛 습성 때문에 새 신자들은 시험에 빠지고 신앙도 급작스럽게 내려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통독모임과 교리모임 반을 이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기독교인의 삶과 생활에 대해 훈련을 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단계도 제자훈련 고급 과정, 즉 사역에 대한 훈련을 시켜 목회자의 짐을 나누어지는 평신도 제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때는 제자로서 대가를 치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 뿐 아니라 고난의 짐도 질 수 있는 제자로 만들게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전도훈련 세마나 통하여 구체적으로 훈련 시켜야 한다.
이상과 같은 사랑방전도 훈련과정은 그 시행에서부터 현재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만큼 열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보다 많은 평신도 전도자들을 많이 거느리면 그만큼 목회자의 짐도 가벼울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품안에 돌아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케 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앞으로 더욱 평신도 제자 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것을 목회에 적용 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 세기의 목회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훈련되지 못한 평신도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2. 사랑방을 통한 새 교인 이탈방지 방안
사랑방에서 새 교인을 전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로는 자기가 전도대상자를 정하고 일단 전도를 시작하게 되면 사랑방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전 구성원들에게 전도성공을 위한 기도를 부탁해야 한다. 그래서 전 구성원이 모였을 때 같이 중보의 기도를 꼭 부탁하도록 해야한다.
둘째로는 자기의 전도대상자가 교회에 나오기로 한 첫 주일에는 미리 순장이나 구역장에게 연락해서 새 교인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새교인을 맞을 준비는 다음과 같다.
(1) 순장이나 구역장은 미리 구역원 가운데 새로 나올 교인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구역원(나이, 교육, 생활수준)을 골라서 그에게 연락해 두어야 한다.
(2) 예배가 끝난 후에는 인도자와 미리 연락받은 구역대표가 함께 교회 근처에 있는 음식점으로 가서 음식을 대접하며 서로 친교를 나누도록 한다.
(3) 새 교인이 인도자와 한 구역에 참여할 수 없을 때에는(거리사정상) 새 교인이 앞으로 참여해야 할 순장이나 구역장과 연락하여 이후로의 모든 일을 추진해야 한다.
(4) 순장이나 구역장은 새로 나올 교인이 앞으로 교회에 나오면 참석할 선교회 회장께 미리 연락하여 선교회원 한 명을 미리 준비시키도록 해야 한다.
새로 교인이 교회에 일단 나온 후 첫 모임 때, 우리 순원을 통하여 새 교인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꼭 서로 외우도록 해야한다. 그리고는 다음 주부터 그 새 교인이 나오면 전 구역원은 될 수 있으면 예배 후 찾아가서 꼭 친절한 사랑으로 인사를 나누도록 해야 한다. 이 인사의 책임은 구역장이 항상 기억하시고 구역원들을 독려하는 것이 좋다.
새 교인 이탈방지전략으로는 새 교인을 인도한 사람은 일단 새 교인이 교회에 처음 나온 후부터 매주 한번씩 그와의 만남을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순장이나 구역장은 매주 사랑방 모임 때마다 이 만남을 확인해야 하며 또한 저들의 만남을 위해서 전 구성원이 같이 기도하도록 해야한다.
새 교인 이탈방지전략은 또 새 교인이 교회에 계속 3주 나온 후에는 순장이나 구역장이 그 새 교인을 구역회로 정식 초청하여야 한다. 구역장은 주일 예배 후 그 새교인을 구역회의 이름으로 다음 구역회 모임 때 초청해야 한다. 우선 말로 초청하고 될 수 있으면 초청카드를 정중히 사용할 수도 있다. 초청한 후에는 구역회 모임 때 다음의 사항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1) 성경공부 후 간단한 환영 순서
(2) 간단한 선물
(3) 간단한 음식
(4) 구역원들의 자기 소개
(5) 기타
제 7 장. 결 론
성서의 기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사건을 구약시대에 야훼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 백성, 곧 독특한 임무와 주체성을 가진 새 공동체가 되었고, 예수도 추종자들은 "새 이스라엘"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의도적으로 열두 제자를 택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고, 모세의 언약과 율법을 토대로 새 계명을 주었다.
이러한 의도는 예수 부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낡은 율법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들은 새 시대에 적합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새 공동체가 곧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믿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이스라엘, 곧 새 이스라엘이다.
새 이스라엘은 외면적 유대인이 아닌 내면적 유대인으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가 된다.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 곧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계약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콘첼만은 초대교회와 관련하여 "교회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존재로 인식하는 동시에 세상안의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거룩한 자들, 선택된 자들,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워 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 바로 신앙에 의하여 결정되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때에 진정으로 새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 성전을 구별하여 거룩성을 부여하였다. 더구나 지성소는 제사장들도 철저하게 예전을 갖춰야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구별되어 거룩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가라졌고, 자신의 몸을 성전과 동일시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단번에 드려짐으로 더 이상 다른 희생 제물도 필요 없게 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 희생을 드릴 거룩한 장소도, 거룩한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성전은 신자들의 공동체로 그 의미를 건네 주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2장 21-22절에서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바로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지어졌던 것이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인들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은 더 이상 건물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성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 벌콥은 그 의미를 교회가 거룩하여 그 무엇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근거가 제공된다.
이러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로마 천주 교회는 거룩성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며, 현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넘겨준 신적 권위를 받아 지상에 완전한 신적 사회인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하는 성례전을 집행하므로 교회 자체가 거룩한 기관이 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부여받은 신자들은 성화되고 신화된다고 하여 교회가 거룩성을 위임받은 것으로 주장한다. 또한, 동방교회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사상에서 거룩성의 근거를 빌려온다.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며, 따라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완성되고, 예전을 통해서 신도가 신과 하나가 되어 신적 존재가 된다고 하여,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으로 연결시켜 교회의 권위를 절대시하려 한다.
하지만 교회의 거룩성이 과연 어떤 유형적 기구, 제도, 조직이나, 또는 교회가 신성하고 구성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요, 합리화이다. 성서는 교회가 성스러운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하지 않는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교회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 속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또한 신자가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교회는 결코 개개인의 신자가 아닌 구체화되어 있는 살아있는 전체공동체의 유기적인 통합이 거룩한 성전인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가 교회의 존재와 활동이 지향하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땅의 모든 족속과 만물을 지향한다. 본래 제자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형성할 생각은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쉬나고그'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로 부터 분부받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예수의 증인되라는 명령이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는 결국 확장되어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목적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수단으로서 쓰임받는 것이다. 교회의 내적 기능은 오직 교회에서 부여된 임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이 기능을 제자를 삼아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더 나아가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새로운 표현인 그리스도의 몸의 산 세포가 되어 재생산을 통해 교회를 공적이며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도록 하는 계속적인 순환을 지탱하는 것이다. 고로 교회의 내적 기능과 외적 기능은 불가분리의 관계이지만 교회의 지향점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입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개혁된 교회는 부단히 갱신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갱신이란 말의 어원은 '일신', '부활', '재생'의 뜻이었으며 일반적으로는 '다시 새로워 진다'는 변화가 그 의미이다. 이 말과 유사한 언어로는 개혁이란 용어가 있는데, '다시 모양을 갖춘다', 다시 새롭게 뜯어고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갱신이란 말이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구조와 제도를 그리고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리는 혁명과 혼돈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해둘 것은 교회 갱신은 이 모든 체제를 뒤집어엎는 혁명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새롭게 하여 본래적인 교회, 성서에서 보여주고 제시하는 교회다운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인 것이다.
갱신이란 말은 개인적으로는 중생을 생각하게 되고, 중생을 기초로 하는 영적인 힘의 회복을 상기시킨다. 즉, 한 개인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가르킨다. 한편으로 교회적 시각으로 보면 갱신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따라서 갱신된 사람에서부터 교회 갱신은 시작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사람을 갱신시킬 수 있는 체제와 구조를 도모하는 것이 갱신 운동의 구체화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본질에 기초한 갱신을 하자는 것이다. 교회 갱신의 기본 형태는 성서의 원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 신앙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화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교회로부터 물리치고 없애버려야 하며 성서에서 이탈한 것은 성경에 있는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라고 하였다. 교회 갱신 운동은 먼저 자기 시대의 교회가 성서에서 이탈되어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갱신의 욕구가 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교회의 상황을 성서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갱신되어야할 당위성을 밝혀야 한다.
앞에서 고찰했던 것처럼 첫째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새 이스라엘이다. 옛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다. 옛 이스라엘은 계약 백성으로서 계약에 충실치 못하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였는데 반해 새이스라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였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갱신되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지체들이 각기 성령을 통하여 받은 은사를 다양성있게 발휘하며 한편, 전체의 교회의 몸과 일체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교회가 극히 소수의 교역자나 몇몇 신자들만이 자기의 역할을 할 뿐, 대다수의 평신도가 교회의 객체가 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생명력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 모두는 머리되신 주님으로 부터 소명을 받고 있다.
이 소명을 위해 성령은 각자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어 몸의 지체로 기능을 다하게 하시지만 평신도들 대부분이 교회 조직상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통상적인 봉사 활동을 하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는 그들 혼자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원하다. 교회 갱신은 바로 이들을 깨워 그리스도의 참 지체로서 활동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그 안에 성령이 임재해 계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기서 성전의 개념은 건물이나 장소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로서 성전인 것이다. 이런 교회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현재의 교회는 날로 건물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모임과 건물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건물 자체에 거룩성을 부여할 수 없다. 건물 중심의 교회는 활동성이 없고 융통성이 없이 경직되어 있으며, 친교가 부족하고 또한 자만심과 계급의식에 가득차 있는 것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굳이 거룩성을 건물에 부여하려 하기보다는 기능적으로 이해함을 통해 생동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야할 것이다. 건물이란 수단이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지, 맹목적으로 숭배한다면 그 것은 건물 우상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보라 얼마나 많은 교회가 건물에 치중함으로 교회가 해야할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 이제 교회 건물도 교회의 사명을 저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건축되어야 할 것이며, 그 건물 구조도 기능적으로 설계를 함으로 교회의 본질을 세우며, 그 사명을 지지해 주는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 교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본질은 교제 공동체이다. 이 교제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로 하늘나라에서 맛볼 교제의 모형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이 친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단지 비인격적인 기구처럼 보일 뿐이다. 일주일에 몇번씩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리지만, 교제를 나누고 사랑의 입맞춤을 할 수 없는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앞을 향해 도열된 의자에 앉아 예배 참석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잘못을 바로 잡는 대안으로서 본 연구자는 9장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소그룹전도 운동의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소그룹모임이 교회의 모든 구조적인 잘못을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당부분 교회의 본질에 가깝게 만들어 주는 성경적 구조 인 것만은 확신한다. 많은 부분 부족하겠지만 본 연구로 말미암아 많은 다른 연구자들이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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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사편,
부록
사전조사를 위한 설문내용
할렐루야! 주안에서 평안하신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도동교회가 되었습니다. 2천 년대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가 새로운 도약을 하는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여러분의 신앙의식을 몇 가지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무기명으로 작성되는 것이오니 기탄 없이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아니오 글쎄요 무응답
1.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 ○ ○ ○
2.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습니까? ○ ○ ○ ○
3. 기도해서 응답 받은 경험이 많습니까? ○ ○ ○ ○
4.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확신합니까? ○ ○ ○ ○
5. 모든 죄가 용서받았습니까? ○ ○ ○ ○
6.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십니까? ○ ○ ○ ○
7. 방언을 하십니까? ○ ○ ○ ○
8.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까? ○ ○ ○ ○
9.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습니까? ○ ○ ○ ○
10. 교회를 떠나서도 구원이 있습니까? ○ ○ ○ ○
11. 전도는 꼭 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 ○ ○
12. 전도를 실천하고 계십니까? ○ ○ ○ ○
13.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 ○ ○
14. 교회와 성도의 첫째 사명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까? ○ ○ ○ ○
15. 우리교회는 전도가 잘 되고 있습니까? ○ ○ ○ ○
16. 우리교회 기관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까? ○ ○ ○ ○
17. 우리교회는 예배가 은혜롭습니까? ○ ○ ○ ○
18. 말씀이 생활에서 실천되고 있습니까? ○ ○ ○ ○
19. 전도하고 계십니까? ○ ○ ○ ○
20.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까? ○ ○ ○ ○
21. 자신의 마음 밭은 '옥토'라고 생각하십니까? ○ ○ ○ ○
22. 성경 읽기를 매일 실천하고 있습니까? ○ ○ ○ ○
23. 한주일 한 두절 정도 성경암송을 하고 있습
니까? ○ ○ ○ ○
24. 예배 중 찬송에 은혜를 받습니까? ○ ○ ○ ○
25. 이웃사람에게 전도 해 보신 적 있습니까? ○ ○ ○ ○
26. 우리교회는 지역봉사에 열심입니까? ○ ○ ○ ○
27. 우리교회의 비젼을 이해하십니까? ○ ○ ○ ○
28. 신년도에 새로운 부분에서 교회봉사하고
싶습니까? ○ ○ ○ ○
29. 교회성장을 위해 한 명이상 꼭 전도하겠습니까?
○ ○ ○ ○
30. 1년에 성경 1독을 하시겠습니까? ○ ○ ○ ○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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