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어둠에서 빛으로! (요한복음 9:1~7)

어둠에서 빛으로! (요한복음 9:1~7) 
     
요 9:1-7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미 오래 전에 일입니다. 불란서 파리에서 선교 대회가 열렸습니다. 순서에 따라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헌금 바구니를 돌리던 한 헌금위원이 갑자기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전연 앞을 보지 못하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소경 성도가 뜻밖에 큰 금액의 헌금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헌금위원은 집회가 끝나고 난 뒤에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그 소경을 찾아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나 많은 헌금을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소경 성도가 오히려 의아스러운 듯이 되물었습니다.
"왜요? 저라고 해서 헌금을 많이 내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소경 성도는 머뭇거리는 헌금위원을 향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제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밤에 등잔불을 밝히는데 드는 기름 값이 얼마나 되나?' 제 친구가 얼마쯤 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름 값을 절약한다는 심정으로 푼푼이 돈을 모아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기 때문에 밤이 되어도 등잔불을 밝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기름 값으로 모은 것을 육신의 어두움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을 당하는 영적인 소경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데 사용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소경은 비록 육신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눈은 밝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인 불구를 거룩하게 승화시켰습니다. 그리해서 영적으로는 밝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처럼 육신의 눈은 뜨였다고 하지만 영혼의 눈은 감겨져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영적인 소경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빛되신 예수님께서 이 아침 우리 각자에게 찾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주시고, 모든 질병을 물리치시고 건강을 주시며,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 주시는 은혜로운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길가에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만일 그 때 소경이 제자들의 그 질문을 들었더라면 기분이 대단히 언짢았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소경으로 태어난 것만 해도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와 자기 부모를 죄인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분이 결코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들은 소경의 고난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고난을 긍정적인 것으로 소망적인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소경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눈을 보게 해야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물론 소경이 예수님에게 자신의 눈을 뜨이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이 소경의 눈을 뜨이게 해주셔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낮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오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일, 곧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셔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실로암 못까지 가서 자기의 눈을 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께 자기의 밝아진 눈을 보여 드리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편의상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소경의 고난을 긍정적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경의 고난을 죄 값 때문이라고 전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기에ㆍㆍㆍㆍㆍㆍ  "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과거 지향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미래 지향적으로 보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시각입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습니다. 그러면 고침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또 그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십시다. 예수님처럼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일이다." 이와 같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우리 인생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밝은 아침이 오기 마련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십니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이 세차게 불고 있습니까? 그것만 바라보면서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배후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처럼 내가 당하는 고난을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중에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엄청난 고난입니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명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이켜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조용한 가운데 네 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위대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눈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고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빌립보서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빌1:12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임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컨대 우리에게 병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몸이 고통스럽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돈도 듭니다. 해야될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 하나 득이 되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이켜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병이 들면 먼저 겸손해 집니다. 진실해 집니다. 모든 잘못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들어 보아야지 병든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병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득이 되는 것이 많습니까? 따라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병든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사업에는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마십시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생을 당하고 있나?" 이렇게 과거 지향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긍정적으로 미래적으로 소망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실제적이면서도 사명적인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덧붙여 4∼5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아직은 낮입니다. 밤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의 일,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밤낮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쉴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그 순간까지 구속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에게도 어두운 밤, 쉴 때가 옵니다. 그 때는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낮 기간 동안에는 아버지의 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 이후 세계 최대의 물리학자로 불리는 영국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 1. 8 ∼)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빅뱅(Big Bang)이론, 이른바 "대폭발 이론"과 "블랙홀의 대한 연구"로서 전세계 학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캠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1학년 때 아주 희귀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몸의 근육이 자꾸만 수축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그를 진단해 보고서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뭇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꿈많은 젊은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나의 삶이 시한부의 인생이면 어떠냐? 어차피 모든 인생은 시한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 비록 내게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자. 그 기간만큼이라도 최대한 값있게 활용하자! 어쩌면 내게 남아있는 3년의 기간은 내게 필요한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 뒤 그는 연구에만 매진했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근육이 수축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됩니다. 그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휠체어에 있는 키보드를 움직여 자기의 의사를 표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전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새 천년을 맞이해서 그는 어느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의 이 땅에 주인공이 될 젊은이들에게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그 때 호킹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내게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 아니라, 3개월, 아니 3일이 남았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누구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까? 수많은 천사들 가운데 하나를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천사장을 보내주셨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지시고 죽게까지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대충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반 토막의 헌신으로 만족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도 최선을 다해서 예배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게 주신 건강, 시간, 물질, 심지어는 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다 바쳐서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어떻게 고쳐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소경의 눈이라고 해서 눈이 아닙니까? 여러분, 눈에 작은 티끌이 들어가도 얼마나 쓰라리고 아픕니까? 그런데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진흙에 돌멩이라도 들어있어서 그것이 눈에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은 말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였습니다. 한 평생 한맺힌 흑암의 고통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해방시켜 주신다는데 그까짓 침을 바른들 어떻습니까? 진흙을 바른들 어떻습니까? 그 이상인들 왜 못바르겠습니까? 소경은 그런 심정으로 다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체면, 체통, 자존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우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예수님이 침으로 이긴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셨다고 해서 즉시 그의 눈이 뜨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전연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입니다. 한두 발자국 띄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실로암 못까지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실로암 못에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한 사람도 내려가기 어려운 계단입니다. 그런데 33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7절 하반부에 보니까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갔습니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씻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실로암인들 못가며, 요단강인들 못가겠습니까? 33개의 계단이 아니라, 3,300개의 계단이면 왜 못내려가겠습니까? 그런 심정으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니까 가기 힘들어도 갔습니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씻기 힘들어도 씻었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하루종일 쉬지 않고 동서남북을 미친 듯이 다녀보세요.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소경이 실로암 못으로 가다가 힘들어서 가기를 중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 실로암 못까지 갔더라도, 가파른 33개의 계단을 내려가다가 힘들어서 그 물에 씻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진흙을 떼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소경이 모든 것을 참고 끝까지 순종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7절 끝부분에 보니까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눈이 뜨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되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은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거들랑 되돌아오너라."
예수님은 되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되돌아온 것은 전적으로 소경의 결단이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이 소경도 자기의 밝은 눈을 예수님에게 보여드리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되돌아왔을 것입니다.
더러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수시로 교회에 들락날락하면서 울고불고 매달립니다. 그러다가도 문제가 해결이 되면 발걸음이 뜸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작도 예수, 끝도 예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패할 때도 예수지만, 성공할 때도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경이 고침을 받은 기사를 살펴 보았습니다. 소경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스스로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의 어둠을 물리쳐 주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주실 분이십니다. 우리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줄 분이십니다.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줄 분이십니다.
이 시간 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어두운 그늘을 다 물리쳐 주시고 주님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그리고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뀌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