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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13-25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고대 헬라 나라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거리낌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예컨대 그는 환한 대낮에도 등불을 켜서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진실된 사람,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자기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집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도 온갖 기화요초로 깨끗하게 잘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꾸며 졌습니다. 부자는 보란듯이 온갖 거드름을 피우면서 디오게네스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했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초대를 한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자기의 가래침을 "퉤!"하고 부자의 얼굴에 뱉어버렸습니다. 명성있는 철학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부자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얼떨떨해 있는 부자에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의 집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군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가래침을 뱉을 만한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찬 당신의 더러운 얼굴이 내게는 쓰레기통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가래침을 당신의 얼굴에 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말입니까? 그래서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교만과 위선, 오늘 우리가 읽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정말 그 얼굴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당연히 축하하고 감사해 주어야 될 놀라운 사건입니다. 뒤에 소경은 32절 말씀에 보니까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라고 스스로 간증을 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많은 기적이 베풀어 졌습니다. 그러나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예는 단 한 번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 일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적으로 예언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자리에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축하와 찬양과 영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이게 한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사람은 쉬지 않고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먹여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에는 직장에 나가 일하지 않고 이렇게 편히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경은 일평생 동안 흑암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한 맺힌 고통에서 예수님은 그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안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규례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했습니다. 죄인으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또 거기다 나음입은 소경도 자기들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출교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짜증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소경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라고 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디오게네스의 침이라도 한 번 뱉어주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바리새적인 요소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저에게도 있습니다. 교만과 위선, 외식, 탐욕 등은 모두 바리새적인 요소입니다. 남이 잘 되면 칭찬해 주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바리새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리잡게 되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그저 불평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바쁜데 무슨 마음 속에 기쁨과 감사가 생기겠습니까? 소경처럼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 그 한 가지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쓰임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바리새적인 요소를 다 떨쳐버리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매일 매 순간 마다 뜨거운 감격 속에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의 모습을 살펴보고, 둘째로 고침받은 소경을 살펴보고, 셋째로 예수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식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잡다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즐겁게 안식일을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고 해서 하루종일 낮잠만 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되 이왕이면 생산적으로 지켜야 할 줄 압니다. 예컨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에 못 읽었던 책도 읽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도 듣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위적으로 여러 가지 잡다한 규례들을 600가지가 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불을 피우면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기 전에 미리 등잔불을 붙여 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안식일에 등잔불을 피우는 것은 일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에 거울도 보지 못합니다. 괜히 거울을 보았다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흰머리를 발견하면 그것을 뽑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것을 뽑았다가는 일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병세를 호전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치료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병세를 호전시키면 그것은 치료행위로 일하는 것이 되어서 안식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 규례에 어긋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인위적으로 잡다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 배후에는 교만과 위선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안다. 너희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나는 지킨다. 나는 이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다. 나는 거룩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 그러니 얼마나 도도합니까? 교만함이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남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 마구잡이로 무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사람이야? 개, 돼지보다도 못한 짐승이지." 그러니 또한 얼마나 위선적인 모습입니까? 그들은 마구잡이로 남을 비평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데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마음에 무슨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바리새적인 요소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하면 신앙은 오히려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뜨겁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감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짜증과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평온한 가운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에게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베다니 마리아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우리에게는 활짝 열린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통, 관습이라는 굴레에 우리 자신을 얽어매고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려고 하는 바리새적인 모습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신앙 생활의 감격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금연 학교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이것도 하지 말아라! 저것도 하지 말아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앙 잡지 가운데 풀핕(Pulpi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 체험을 토대로 해서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에 대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립니다.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 스피노스 조디아티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의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을 알기 어려워 애를 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에 바쁘다. 죽어가는 교회는 움직이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바리새적인 요소들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좋은 일을 당할 때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감격이 우리 속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고침 받은 소경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과 소경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복잡했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았습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무엇을 지키는데 열심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반면 소경은 단순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에 천국의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해 나음 받은 소경을 앞에 두고 신문합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이다. 그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경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소경의 신앙은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소경이었다가 지금 보는 것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이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가 있다." 그의 신앙은 단순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아기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의사는 그 말을 듣고서 부인을 자세히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딱 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기는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아기는커녕 부인은 두 달을 살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아기를 원해서 병원에 찾아갔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 부인은 공포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두 달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부인의 몸은 비쩍비쩍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다시금 예전의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제 부인이 두 달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럴 테지요. 이제 곧 부인은 아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인이 아기를 못 가지는 것은 부인의 몸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을 빼야지 아기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충격요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엄포를 놓은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비만한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만 하게 됩니다. 교만의 살을 빼버려야 됩니다. 위선의 살을 빼버려야 됩니다. 탐욕의 살도 빼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해야 합니다. 소경의 신앙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소경은 이것 한 가지만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소경에게는 그러한 감격이 있었기에 출교 당하는 고통도 인내하면서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에게도 그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다윗에게도 감격이 있었기에, 그는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에게도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삭개오에게도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십시다. 소경의 소박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서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큰 감격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주권적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주권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소경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소경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주권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나중에 소경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출교는 대단히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돌로 그를 때려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출교를 당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출교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소경의 부모가 출교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소경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너무나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3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소경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모양으로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유럽에 있는 오스트리아에는 하나의 유명한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가 유명한 이유는 그곳에 각기 다른 모습을 하신 예수님의 동상이 열 두 개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적합한 예수님의 동상을 보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예컨대 농부들은 씨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한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부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아래서 은혜를 받습니다. 목동들은 선한 목자의 상을 하신 예수님의 동상 밑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또 병든 사람들이나 의사 또는 간호사는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방법과 필요한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 주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힘이 되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시고,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을 도우셔서 점차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첫째로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처음 소경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둘째로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소경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셋째로 3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그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셨습니다. 35절 끝 부분에 보니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를 유도해 나가십니다. 마침내 38절에 보니까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소경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순간 그는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말하자면 소경은 육신적으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도우셔서 영적으로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소경이 눈을 뜨지 못했다면 그는 일평생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눈을 뜨게 되니까, 그는 시비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비난받았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필요한 때에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냥 왔다갔다하면서 아무런 의미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면 시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비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합니다. 그러나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은 법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다보면 이런저런 시비에 휩쓸릴 때가 있습니다. 비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핍박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필요한 때, 필요한 방법, 필요한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세워 주시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이것저것 바리새인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내가 택함 받고 내가 주를 위해서 쓰임받는다는 이 감격 한 가지만 해도 충분합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매 순간 마다 큰 감격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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