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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1-8 2012.4.1(일)십자가의 사랑

12:1-8 2012.4.1()

 

십자가의 사랑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고난주일입니다. 이 주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군병들에게 붙잡혀 심문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매주 목요일 저녁, 교인들과 함께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주제가 마침 십자가여서 물었습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교회올 때마다 십자가를 봅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가 늘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만큼 많이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삽니다”. “가끔 십자가 목거리하는 다닌 사람들은 보면 믿음이 대단하다 여기면서도 십자가가 한낱 장식품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염력스러울 때도 있어요”. 그중에서 가장 좋은 대답이 나왔습니다. “십자가요? 희생이죠. 십자가만큼 고난의 형틀이 어디 있겠어요? 나를 위한 주님의 희생이죠”.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십자가가 희생이라고 한 대답에는 모두 가 동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삶의 원리는 희생의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원리도 희생의 원리때문입니다. 봄을 위해 수많은 나무가, 식물이 추운 겨울에 희생했습니다. 그 희생의 대가로 봄의 언덕에 아지랑이가 핀 것입니다. 이 나라, 이 조국이 있는 것도 누군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도 기도와 봉사, 전도와 선교로 희생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어떤가요? 어머니,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방에 있을 때 한 의사 집사가 저에게 이야기한 말이 기억납니다. 종합병원 정형외과 의사였던 이 집사에게 어느날 모녀인듯한 두 환자가 찾아왔답니다. 그런데 어머니인 듯한 할머니가 딸의 손을 꼭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답니다.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애는 제 딸이에요. 애가 초등학교때 외가집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 왼손 가락이 잘렸어요. 다행히도 네 손가락은 접합수술을 받아 회복했지만 넷째 손가락은 그렇게 못했어요. 이제 다음 달에 시집가는 데 사위는 괜찮다고 하는 데 그래도 어찌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 해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반지낄 손가락은 해 주고 싶은 데 혹시 이 늙은이 손가락으로도 접합수술이 가능한가요?” 그러면서 할머니는 늙고 쭈글쭈글한 손가락을 펴 보였습니다. 순간, 집사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답니다.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가 생각나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고 말했답니다. “그럼요, 할머니. 제가 예쁘게 수술해 드릴께요”. 그 뒤 딸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접붙이고 어머니는 의수도 만든 손가락을 끼워드렸답니다. 어머니의 희생,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살고 가정이 살았습니다.

 

믿음은 내 모습이대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도 그럴까요? 오늘 말씀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엿새 전, 베다니에 들어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가까와 예수님이 자주 가시던 마을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사랑하신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막 도착하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갑자기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들어오더니 갑자기 예수님 발앞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것도 조금 부은 것이 아니라 많이 부었습니다. 3절입니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러분,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중 막내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세 남매에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형제들이 있었지만 넉넉하게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나마 오빠 나사로는 최근에 죽었다 살아 났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도움 받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금쪽같은 향유를 한 순간에 허비하고 만 것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다른 처녀들처럼 향유를 모아 결혼지참금으로 사용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26장에 보면 그 값이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됩니다.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에 1데나리온 벌었으니 마리아는 300일 노동한 것을 한 순간에 낭비한 것입니다. 누구도 마리아의 결혼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고 자기가 아껴 시집가야 하는 아가씨가 그동안 모은 모든 향유를 일시에 예수님 발에 부었으니 잘한 일입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이아는 예수님의 발을 그 머리털로 닦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간에 머리를 소중히 여깁니다. 평소에 남자들은 머리에 키파라는 빵 모자같은 것을 쓰고 다니고 여자는 수건같은 스카프를 씁니다. “내 머리위에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발사를 도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발사는 남의 머리를 싹둑 싹뚝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머리를 잘 베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지 않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여자가 다른 남자앞에서 머리를 풀기만 해도 이혼사유가 됩니다. 여자는 오로지 자기 남편앞에서만 머리를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앞에 머리를 풉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 마리아가 바친 최고의 헌신입니다. 만일 그 일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그 일로 결국 시집을 못가도 마리아는 상관없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마리아는 울면서 그렇게 합니다.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7:38, 마리아가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밪추고 향유를 부으니”.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기 전에, 머리로 그 발을 씻기 전에 예수님 뒤에 서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죄없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자격없는 자가 예수님앞에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소유자에 따라 생긴 가치가 아니라 대상에 따라 생긴 가치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치 있어 내 믿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님 때문에 내 믿음이 가치있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로우신 예수님을 소유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 내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조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모습 이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레서 찬송가 4943절입니다. “빈손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빈손 들고 나가고 의가 없어도 나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많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자 옆에 있던 가롯 유다가 이렇게 불평합니다. 5절입니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상당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의 말대로 가난한 처녀가 어렵게 모은 향유를 예수님 발에 한번에 부은 것은 분명 낭비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 말씀이 중요합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7-8절입니다. 12:7-8,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먼저는 가롯 유다의 말에 진심이 없었고 또 하나는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의 관점은 물질적 관점입니다. 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향유는 분명 아까운 낭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람이 죽으면 몸에 향유를 바르고 헝겊으로 쌉니다.

 

어떻습니까? 가롯 유다의 말이 다 틀립니까? 맞는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모은 향유인데 순식간에 없애 버립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달라집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것이 우리에게 옳으냐 그르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에 옳으냐 그르냐입니다. 판단의 근거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유익이면 다 좋습니다. 하나님께 유익하지 않으면 다 나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려는 그 일에 부합하면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틀립니다. 믿음은 죄인인 내가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신앙적 가치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왔습니까?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향유를 부은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었지만 성경은 마리아 이야기를 하려고 향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기록한 것을 보면 압니다. 1절입니다.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왜 하필 유월절 엿새 전입니까?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셨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 돌아가시기 직전의 사건입니다. 왜 하필 예수님 죽으신 절기에 향유를 부었습니까? 마리아의 향유가 초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이 사건의 진심이 나타납니다.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진정으로 향유를 부은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마리아는 물질로 만든 향유를 부었지만 예수님은 몸이신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으로 부을 향유를 예고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을 온전히 쏟으신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이란 사람이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을 때 땀속에 피같이 흐르는 진한 액체입니다. 모양도 피처럼 붉고 실제 피의 성분도 있습니다. 22:44절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이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얼마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쏟으셨으면 땀이 피같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올라갔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예수님은 머리에 쓰신 가시관 때문에 머리에서 피를 흘리시고 손과 발에 박힌 못 때문에 손과 발에서 피흘리시고 심장에 박힌 창 때문에 심장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에 의하면 군병이 창을 찌르자 예수님 심장에서 쏟아지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칩니다(영상). 성경도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리고 오후 3, 예수님이 죽음이 임박하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남김없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향유처럼 쏟으신 예수님, 십자가는 예수님이 온 몸으로 향유를 쏟은 장소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끔 결혼주례를 해보면 부모들이 우는 것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기쁜 날입니다. 양가의 축제입니다. 아들, 딸 낳고 길러 장가, 시집보내는 즐거운 날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부모들이 웁니다. 얼마전에 결혼식장에서 우는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 즐거운 날에 왜 웁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생각해보니 준 것이 없어서요”. 깜짝 놀랐습니다. 준 것이 없다니요? 열달 동안 품어 힘들게 낳은 것은 그만 두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다 보내주고 그 많은 학원, 등록금, 용돈 다 대주고 재워주고 먹어주고 입혀주고 장가 시집보냈는 데 무엇을 더 주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아니, 집사님 지금까지 다 주셨잖아요?” “그래도요”. 뭐가 그래도요 입니까?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고 또 줘도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고 미안해 하는 마음입니다.

캐논 반스톤이란 사람이 <사랑의 수고, 사랑의 희생>이란 책을 썻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거짓 사랑과 참 사랑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먼저 거짓 사랑입니다. 첫째. 제한. 이것 저것 못하게 하고 억제하는 것,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 지배. 사람을 조종하는 것,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손아귀에 두고 나를 떠나지 못하고 내 뜻만 따르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신병적 애착입니다. 셋째. 분리. 혼자 있게 하는 것, 내 사랑만 받게 하는 것, 보호라는 이름으로 나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게 하는 것, 그것은 거짓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사랑은 무엇입니까? 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이 모두 주는 것입니다. 다음은 상대방을 제약하거나 조종하기를 포기하고 불확실과 실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것”, 셋째. “나의 사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끝까지 기다리며 함께 가는 것”.

 

여러분, 이 사랑이 누구의 사랑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이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15:13을 아십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사랑으로 최고의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의 최고봉이 무엇입니까? 친구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친구만 제대로 사랑해도 괜찮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5:10,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친구가 아니라 원수입니다. 원수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친구도 힘든데 원수가 쉽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원수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이 모두 다 주셨습니다. 둘째 믿을 수 없고 실패할 수 있는 위험한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는 데도 끝까지 기다리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참 사랑입니다. 3:25이 중요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 구절에대해 그랜필드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로 작정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진노를 아들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붓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를 용서하기로 작정한 은혜,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진노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게 쏟아붓기로 한 은혜, 그래서 우리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향유처럼 쏟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향유를 부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여기서 이 일을 기념하라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기억은 어떻게 합니까?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기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두 가지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20절과 갈5:24절입니다. 먼저 갈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아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첫 번째 죽음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결과 우리에게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3:3절이 중요합니다.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춰졌음이라”. , 지금 저는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으려고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함께 연합되었습니다. 은혜의 연합입니다. 여기 촛불이 둘이 있습니다. 이 둘을 붙이면 불이 하나가 됩니다. 불이 두 개가 합쳐졌다고 불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떼면 불이 두 개가 됩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연합된 순간, 우리는 예수님안에 죽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된 순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그때 우리에게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그 생명은 마치 마리아의 향유와 같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향유는 우리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습니다. 3:3,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춰졌음이라”. 그 생명의 향유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잠재력, 가능성, 자존감, 가치감, 다 있습니다. 영감, 영성, 하나님의 형상, 다 있습니다. 성공할 가능성, 위대하게 될 능력의 씨앗, 다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순간,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정말 믿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여러분에게 이 생명이 이미 있는 것을 믿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툭 터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춰져 있는 것이 밖으로 홍수처럼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껍질이 터져야 합니다. 그래야 알맹이가 나옵니다. 질그릇이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보화가 나옵니다. 옥합이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향유가 나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싹이 나옵니다. 그것이 갈5: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리기만 하면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를 통해 흘러갑니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안에 있는 향유가 우리 밖으로 마음껏 흘러가는 것입니다.

 

토저가 쓴 <철저한 십자가>라는 책에 보면 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궁금합니까?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인이 두 손을 벌리고 나무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세 가지라네. 첫째는 한 방향밖에는 바라볼 수 없네. 둘째는 뒤돌아볼 수 없네. 셋째. 제 인생을 제 마음대로 살 수 없네. 이것이 십자가에 못막히는 것이네”. 어떻습니까? 우리가 갈2:2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한 방향밖에는 바라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 방향만 바라봅니까? 그 방향이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둘째. 뒤돌아볼 수 없습니다. 인생에 목숨걸고 믿어야 할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그리고 후회하지 말라“. 여러분도 후회하지 않습니까? 뒤돌아보지 않습니까? 셋째. 제 인생을 제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우리에게 흘러온 향유가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만 바라보고 우리가 뒤돌아보지 않고 우리가 우리 인생을 오직 하나님께 맡김으로 우리밖으로 흘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사람 바라보고 일희일비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우리 운명을 주관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칭찬을 받는다고 더 거룩해지거나 당신이 비난을 받는다고 더 악해지지 않는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일 뿐 하나님은 당신을 가장 잘 아신다. 다른 피조물의 평가와 위안을 받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아는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이 시간 힘을 다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이 향유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일생 일대의 꿈은 여러분안에 있는 그 풍성한 향유가 계속 여러분밖으로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은 여러분을 너무 아끼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인생을 조심 조심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안에 죽고 살았는 데 겨우 병이나 없이 오래 살기나 바라지 않습니까? 다윗 시대에 충성스러운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 중에 목말라 심히 고통스러워 할 때 그들은 물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적진에 뛰어 들었습니다. 삼하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그래서 구해온 물을 다윗은 차마 마실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윗의 용사들이 가졌던 무모함입니다. 다윗을 위해 목숨바칠 거룩한 용기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용사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을 남기고 감나무는 자기에게 돌을 던진 사람에게 감을 떨어뜨려 주는 데 우리도 뭔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남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님, 권사님,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 몸을 사라자고 장로되고 권사되었습니까? 한생을 한번 일하는 데 언제 기회가 또 온다고 그렇게 몸을 사립니까? 마음껏 일해보라고 하나님이 기회를 준 것 아닙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뻔 했다고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강재구는 육사교정에서, 이현수는 일본지하철에서, 한주호는 차거운 연평도 바닷속에서 자기를 희생했는 데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돈이건 시간이건 몸이건 너무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향유처럼 자기를 쏟아야 합니다. 어머니가 가정의 소모품이 되듯 목회자가 교회의 소모품이 되듯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모품이 되어야 합니다. 밀은 곡식으로 거두는 것이 끝이 아니라 익어 깨뜨려지고 불에 익혀 빵이 되어야 밀입니다. 포도는 열매가 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사람의 발에 밟혀 진한 물을 내 사람들이 마시는 포도주가 되어야 끝입니다열매처럼 모양새만 좋게 있지 마세요. 깨뜨려져 향유가 흘러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세상에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