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4:1-22 2012.3.11(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떤 잡지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2차 대전 후 B29에 여러 나라 사람들을 태우고 가다 비행기가 고장났습니다. 기장이 급히 말했습니다. “지금 비행기가 고장났습니다. 낙하산타고 급하게 뛰어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겁을 먹고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독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입니다. 뛰어내리십시요”. 그랬더니 독일사람들이 “하이, 히틀러”하고 뛰어 내렸습니다. 일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천황폐하의 명령입니다. 뛰어내리십시오”. 했더니 일본사람들이 ”하이. 소데스카“하며 뛰어내렸습니다. 미국사람에게 말합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모두 뛰어내렸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했더니 ”오, 예“하며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 한국 사람이 남았습니다. 한국사람은 어떻게 해야 뛰어내릴까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뛰어내리는 것, 공짜입니다. 빨리 뛰어내리십시요“. 했더니 한국사람이 두 말도 하지 않고 뛰어 내렸답니다. 이 중에 누가 제일 용감했는지 아십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는 데 한국사람은 공짜라고 하니까 너무 좋아서 낙하산도 안 메고 뛰어내렸답니다. 그래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한국사람이었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에 과연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은 매일 우리에게 작고 큰 용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용기”하면 큰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용기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힘들게 출근해야 하는 각박한 직장의 현실속에서 좋은 직장인 되기 위해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되지요.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요. 스트레스받는 일도 해야 하지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춘기 자녀를 참고 인내하기 위해, 가정의 어려운 물질문제를 풀기 위해, 교회 안 나오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찬 바람을 쐬며 새벽기도 나올 때, 토요일 늦게 까지 일하고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업이 제대로 안돼 포기하고 싶을 때, 대학진학에 실패하여 재수할 때,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화해의 말을 붙일 때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용기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용기를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용기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용기로 인생을 승리하며 살 수 있을까? 말씀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삶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습니다.
용기를 위해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용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고난도 늘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앉은뱅이었던 사람이 들 것에 실려 성전에 구걸하러 나왔습니다. 그때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외치자 그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현장으로 모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16절입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자기를 주목한 사람들에게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의 능력이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칩니다. 믿음보다는 은혜로 고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백성들에게 기적이었던 이 사건이 지도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행4: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왜 제사장, 성전맡은 자, 사두개인은 이 일을 싫어한 것입니까? 백성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하는 데 왜 지도자들은 싫어한 것입니까? 누가 고쳤든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던 사람이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지도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싫어했습니다. 2절 다시 보십시오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왜 싫어했을까요? “싫어했다”는 이 말은 매우 감정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기분 나쁘다”는 말입니다. “불쾌하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잘못 했길레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옵니까? 9절을 보십시오 . 행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여기에 “착한 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말 착한 일을 했습니다.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갈 사람을 일으켜 세웠으니 얼마나 착한 일을 한 것입니까? 지도자들도 그것이 착한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싫어했습니다. 왜 착한 일을 했는 데 싫어합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제사장,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의 공통된 신앙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실까요? 행4: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크게 두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일반 백성들로 이루어져 부활도 믿고 기적도 믿고 천사, 천국, 지옥, 내세도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이같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기적도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세의 지배에 대해서는 수동적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로마에 철저히 타협하면서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켰습니다.
또 하나는 이들의 자존심때문입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난 것은 성전 구내였습니다. 성전은 제사장, 사두개인, 성전맡은 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며 제사를 집례하며 백성의 지도자로 살아갔습니다. 그 중 최고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문제는 대제사장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쳤다는 점입니다. 만일 대제사장이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백성의 지도자인 대제사장은 아무 것도 못하고 베드로가 그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대제사장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베드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속마음이 나타납니다. 행4:7,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제사장에게 중요한 것은 체면이었습니다. 앉은뱅이 고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자존심을 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즘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저는 이 감옥에 자주 갔습니다(영상, 지하감옥). “칼리칸투”라고 부르는 베드로 통곡교회 지하에 가면 그 시대 죄수들을 가둔 감옥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좋은 감옥이 아닙니다. 사방이 돌로 되었고 바닥도 딱딱한 돌입니다. 차겁습니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캄캄합니다. 그 감옥에 베드로와 요한이 갇힌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일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은 그래도 다행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착한 일을 했는 데도 고난을 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우리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를 시기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들은 매일 잘못하면서도 예수믿는 사람이 어쩌다 잘못하면 가만히 놔주지를 않습니다. 앤티가 판을 칩니다. 인터넷을 온통 도배질하며 싫어합니다. 우리를 매도하고 나쁘게 말하고 심하면 고소, 고발까지 해서 법정에 세웁니다. 정말 discourage, 우리의 용기를 꺽습니다. 좀 잘해보려고 하면 이런 일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잘 살아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종종 그런 상황에 살지 않습니까? 좀 더 잘해보려고 하면 엉뚱한 고난을 받지 않습니까? 어제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런 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나 혼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정말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칩니다. 평생에 모든 꿈 사라지고 세상의 친구 다 떠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용기는 언제나 편한 상황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과 실수와 오해와 실패의 일상속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때 먼저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히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했습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시험을 만납니다. 글자 그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납니다. “만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페리페세테”입니다. 이 말은 “페리”. “한 가운데로”. “페세테”.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시험은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로 떨어집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떨어집니다”. 그나마 아무 대비가 없을 때 불쑥 불쑥 떨어집니다.
그러면 용기란 무엇입니까?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시험과 두려움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시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 하나님만이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시험 자체가 아니라 시험으로 오는 두려움입니다. 용기는 시험은 그대로 두고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용기는 두려움과 맞장뜨는 능력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시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험으로부터 온 두려움과 싸워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기생 라합을 보십시요. 그는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말이 기생이지 기생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매춘부”라는 뜻입니다. 그랬어도 그는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 살룸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보아스입니다. 그리고 그 보아스에게서 다윗왕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보아스는 알지만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인 것을 잘 모릅니다. 라합에게 인생의 시험이 없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시험에서 온 두려움을 이겨낸 용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다윗은 용기 때문에 승리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한 큰 실수가 밧세바를 범한 것입니다. 그나마 그는 그의 남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아무도 몰랐으나 하나님은 알았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책망할 때 다윗은 무릎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시51편을 참회시로 썻습니다. 시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를 고백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장 큰 용기는 남을 고발하는 용기가 아니라 나를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가장 큰 용기는 자기 죄를 고백하는 용기요 그 다음은 자기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기요, 남을 용서하는 용기는 세 번째입니다. 다윗의 가장 큰 용기는 골리앗을 이긴 용기가 아니라 자신을 이긴 용기였습니다. 성경의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고난과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더 큰 용기도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일곱 귀신들리고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입니다. 삭개오, 여리고의 탐관오리, 남의 세금을 착복해 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입니다. 수가성에 사는 여인,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만나 다시 시작했습니다. 용기입니다. 고난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용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는 언제나 좋은 상황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 시험, 역경, 오해, 갈등, 실패가 오더라도 우리 다짐합시다. “올테면 와라. 나는 용기로 이기리라”. 아멘.
성령충만이 용기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이 들어갔습니다.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용기입니다. 그러면 용기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사도행전 베드로의 용기의 비결을 한 마디로 설명합니다. “성령충만”, 문제는 복잡한데 해답은 간단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베드로가 그에게 닥쳐온 고난을 이겨낸 이유에 대하여 사도행전은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성령충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용기의 근원이 베드로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용기의 근원이 사람에게 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에 대하여 자주 말씀합니다. 적어도 다섯 번이나 “성령충만”이란 말이 씌였습니다. 행2:4절에 처음 나옵니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히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입니다. 오늘 4:8절이 두 번째입니다. 4:31절이 세 번째입니다.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도하다가 임한 성령충만입니다. 6:3절이 네 번째입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초대교회 7집사에게 있었던 성령충만입니다. 마지막이 9:17절입니다. 행9:17,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을 뜨게 하면서 기도할 때 임한 성령충만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눈만 뜰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다섯 번의 상황은 우리 삶에서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임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충만이 우리 용기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가 용기있는 사람이 됩니까?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속에 생기고 그 믿음이 용기의 근원이 됩니다. 12절을 보실까요?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령충만에 대하여 우리가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신비한 영적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황홀한 체험에 들어가 변화산의 세 제자처럼 되리라는 오해입니다. 성령체험은 신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 되기 위해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체험주의, 신비주의, 계시, 환상, 이상한 영적 현상이 성령충만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의 목적은 예수님을 아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행2장에서 베드로가 성령충만 받았습니다. 2장 14절부터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3천명이 회개합니다. 행3장에서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3장 11절부터 그를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그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4장에서도 고난받는 베드로가 8절에서 성령충만했습니다. 9절부터 바로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그리고 12절, 결론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성령받은 베드로가 한번도 이상한 사람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받은 베드로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그의 말씀대로 살게 합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또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13절입니다. 행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고”.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고“. 이 말은 베드로를 감옥에 넣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볼 때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도 담대할까? 그 이유가 뭘까? 하고 묻다가 한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물었습니다. “왜 현대인은 초대교회 교인처럼 담대하지 못할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죄책감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너무 죄책감이 많습니다. 자기 죄와 실수에 대한 죄책감뿐 아니라 타고난 외모에 대한 열등감, 남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담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약한 존재지만 우리 죄는 하나님께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요일서3:21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담대합니다. 이 마음의 책망을 없애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예수님께 받은 용서를 확신하게 합니다. 이미 용서받은 자신이 내가 용납하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용서를 믿게 하고 용서받은 자로 당당히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합니다.
그래도 담대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속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영성은 다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고, 영성은 하나님을 우리 안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일회적이고 영적 삶을 사는 것은 지속적입니다. 영적 삶은 은혜로 시작하지만 받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은혜가 우리안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것은 은혜지만 그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속 계시게 하는 것이 영성이요 영적인 삶입니다. 익숙함과 친밀함은 다릅니다.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과 익숙해 질 수 있지만 예수님과 친밀해 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부부가 세월이 흐르면 서로에게 익숙해지지만 친밀해지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속적으로 계셔야 우리가 담대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결국 성령님이 우리 담대함의 근원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용기의 근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서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안에 계신 성령님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담대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행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했습니다. 여기서 “기탄없이 말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파르레시안”입니다. 똑같은 말이 29절에도 나옵니다. 행4:29,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 말은 “거침없다”는 것입니다. “주눅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눅들지 말아야 합니까? 19절 보십시오.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 우리 앞에 계신 분이 누군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저들은 사람앞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저들은 대제사장의 권위앞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앞에 있습니다. 우리앞에 누가 있습니까?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판단 기준도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19절에서 말합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 여기서 옳으냐 그르냐“는 세상적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선이냐 악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옳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옳은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옳으면 다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옳은 판단의 기준도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우리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인 데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두려워 합니까? 우리는 오로지 죄가 미워하고 하나님만 두려워 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세상의 무엇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 하면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늘 두려워 하며 사는 제자들이 한번은 성 어거스틴에게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세상에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믿음 때문이라네”. “어떤 믿음입니까?” “맡기는 믿음이지. 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고,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고,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그렇게 살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네”.
우리가 담대하게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산다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한 정원사가 농림부 장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들에 민들레를 없애는 데 좋다는 방법은 다 시험해 봤고, 또 당신네들의 모든 간행물에 나오는 대로도 다 해 봤소. 그런데 그것들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소.” 답장이 왔습니다. “귀하께, 만약 당신이 정말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봤는데도 여전히 민들레가 자라고 있다면,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밖에 업쇼습니다.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렇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면 사랑하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믿음이 미치는 한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포기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는 포기의 순간을 뛰어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의 사람들, 역사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 백성을 데리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느헤미아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바디매오는 기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목숨걸고 다윗 자손을 불러 끝내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베토벤은 어릴 때 엄청나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음악 선생도 그가 작곡가가 되기는 영 틀렸다고 말했디만 귀머거리의 고통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성악가 카루소의 선생은 그에게 음성이 전혀 틀렸다고 말하고 월트 디즈니는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다고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헨리 포드는 한때 아무런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았으나 포기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3월은 “마취”, 행진의 달입니다. 우리의 행진앞에 무엇이 막더라도 우리는 선한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막히고 환경이 막히고 우리 건강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을지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신의 성도들이여,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용기를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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