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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4:23-31 2012.3.25(일)성령님이 다스리는 물질생활

4:23-31 2012.3.25()

 

성령님이 다스리는 물질생활

 

여러분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붙잡는 애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질에 대한 애착입니다. 오래전에 신문에 난 사건이 기억납니다. 한 젊은 여성이 어느날 수퍼마켓에서 4,500원 짜리 계란 한 판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새벽 기도를 막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는 믿음도 좋고 가정도 잘 살아 절대 물건 훔칠 여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이 물었습니다. "왜 계란을 훔쳤습니까?“. 그랬더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새벽 기도끝나고 나가다 가게에서 계란을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배가 고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긴 했지만 그 사건은 저에게 사람이 얼마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끊기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그런 애착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가끔 물질의 욕심이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어느 시골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외나무 다리에 거의 닿았습니다. 마을에 사는 집사 한 사람이 급히 다리를 건너는 데 잘못하면 다리가 끊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가기만 하면 100만원 헌금하겠습니다”. 다리를 중간쯤 건너자 기도를 바꿨습니다. “하나님, 50만원만 바치겠습니다”. 다리를 거의 다 왔습니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다리를 건넙니다. 그때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래도 50만원은 많은 것 같습니다. 10만원 드리겠습니다”. 이때 다리가 우지직하고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집사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아이구,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 100만원 다 드리겠습니다”. 사람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는 물질에 대한 욕심, 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우리는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되 욕심을 갖지 않고는 일할 수 없을까요?

 

사도행전은 이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모델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고친 일로 감옥에 갇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위협과 협박을 받고 간신히 풀려 났습니다. 사도들이 풀려나자 예루살렘 교인들을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24, 2:24,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혀 이르되 대주재여”. 그때 신자의 수는 이미 남자만 5천을 넘어 섰습니다. 그러니 여자, 어린아이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소리를 높혀 기도하니 예루살렘에는 아마도 큰 소요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사도행전 성도들에게 두 가지 능력을 주셨습니다. 30, 3: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첫째 병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병은 하나님이 주신 저주도 아니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운명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기도로 치료해야 할 고통의 근원입니다. 반드시 발본색원해야 할 치료의 대상입니다. 누구나 기도하면 병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기도하면 병고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 고칩니다. 기도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하나의 능력이 임합니다. 29절 뒷 부분, 4:29,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은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하는 데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전도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달라진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물질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34절을 보실까요? 4:34,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가난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놀라운 변화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이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하루 아침에 오지도 않지만 하루 아침에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가난은 뿌리깊은 가난이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학정 때문에 생긴 가난입니다. 과도한 세금때문에 생긴 가난입니다. 헤롯의 폭정 때문에 가난해졌습니다. 해마다 발생하는 가뭄과 기근과 흉년때문에 가난해졌습니다. 가난의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뿌리깊은 초대교회의 가난이 어느 한 순간 사라졌습니다. 다시 34절을 보십시오. 4:34,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우리는 기도하면 성령받는 것을 압니다. 성령받으면 우리가 방언하고 은사받는 것도 압니다. 성령받으면 병고침받고 성령받으면 전도하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가난이 사라졌다? 그것은 생소한 일입니다. 성령을 영적인 일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성령이 임하자 가난이 사라졌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영적인 일뿐 아니라 육적인 일도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 우리 영혼이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 생활에도 복을 받습니다. 소위 전인적 축복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요한23절의 말씀을 믿읍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성령이 임하면 영혼이 잘되고 몸도 건강해지지만 모든 범사도 잘 됩니다. 물질생활, 직장생활, 물질, , 필요생활이 잘 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됩니까?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의 물질생활이 잘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성령이 임하면 일터가 복을 받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일하는 일터가 복을 받습니다. 그 결과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됩니다. 왜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삶에 가난이 사라질까요? 삶의 환경이 달라지기 전에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달라질까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전도서 10:19절에서도 말했습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여기에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라는 말을 다른 성경으로 보면 돈은 만사를 해결하느니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Money is the answer for everything", ”돈은 모든 것의 해답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모든 것의 해답입니다. 살아가면서 이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일하고 하나님이 주셔서 일합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일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합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그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나에게 주신 일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브살렐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실 때 그렇게 했습니다. 31: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과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하나님이 브살렐에게 일을 시킬 때 먼저 불렀습니다. 다음은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부르고 성령을 부으시고, 이것이 우리 일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 내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에 대한 소명감이 필요합니다. 소명이란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일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말했습니다. “소명이란 일을 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나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 일을 한다“.

 

이런 마음으로 일하면 어떻게 일하겠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돈만 벌기 위해 일해서는 안됩니다. 정직하게 일해야 합니다. 성경은 속이는 저울추와 부정한 저울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합니다.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아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0:23,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아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곳이니라”. 부정한 저울추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일터에서 나도 모르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부정직과 거짓과 부당취득에 대한 성경적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 유명한 인사 열두 명에게 문자를 보냈답니다. “모든 것이 발각되었으니 즉시 도망치시오”. 그랬더니 하루도 못되어 열두 명이 모두 해외로 도피했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정직하게 일할 뿐 아니라 섬김으로 일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그 일이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내 일도 아닌 데 생색낼 수는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종으로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4:22, “종들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 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라”. 우리는 종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인 하나님이 주신 일을 우리가 은혜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3, 4: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왜 주께 해야 합니까? 주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본 오사카에 가면 MK택시라는 한국 택시회사가 있습니다. 유태식 장로님 형제가 하는 택시 회사인데 이 회사는 섬김과 친절로 유명한 택시 회사입니다. 손님이 차에 타면 반드시 네 가지 인사를 합니다. “MK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리고 자기 이름을 대고 오늘 누구 누구가 손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으신 물건은 없습니까?”. 얼마나 이들이 친절하게 했으면 그 택시에 자살하려는 사람이 탓다가 감동받고 자살할 마음을 거두었겠습니까? 이 회사의 사장인 유태식 장로님의 경영 철학이 이것입니다. “나는 사원을 섬기고 사원은 승객을 섬긴다. 사원들에게 이익을 주면 회사가 이롭다”. 그래서 사원들에게 무료로 아파트를 지어 주었습니다. 돈은 들었으나 사원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바람에 회사가 더 부흥했습니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일하시는 여러분, 혹시 우리 직장은 영적인 곳이 아니기 때문에 대충 일해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열심히 하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성경학자의 연구를 보니까 예수님이 대중들 앞에 132번 나타나셨습니다. 그 중에 10번을 제외한 122번은 예수님이 일상의 일하는 사람들속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상의 현장에서, 일터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 52개 가운데 45개가 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씨뿌리는 비유,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어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농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0년동안 목수로 일하셨고 3년동안 하늘 나라 일꾼으로 일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일터와 직장의 위대한 모델이십니다.

 

다시 34절로 가 봅시다. 4:34,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 축복을 받기 원합니까? 여러분의 생활에 윤택하고 언제나 형통하기를 바랍니까? 일하지 않고 그렇게 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소명으로 일하십시오. 정직하게 일하십시오. 섬김으로 일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가난이 사라집니다. 반드시 형통합니다. 여러분의 일터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면 물욕을 사라지게 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 물질생활이 잘 될 수 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면 물욕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말씀은 성령이 임할 때 왜 우리에게서 가난이 사라지는가를 말해줍니다. 32절 마지막,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령이 임해서 달라진 중요한 현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모든 불행의 시작은 욕심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1:15,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많다는 것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욕심을 갖지 않고도 얼마든지 일도 잘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많으면 오히려 돈도 잘 벌 수 없다는 것도 아십니까? 성령님은 우리가 진정한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에 욕심을 없애줍니다.

 

재작년인가 건국대학교의 한 의사 부부가 200억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쳔으로 평생 번 재산을 아들 딸에게 남기지 않고 몽땅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다만 그 돈이 심장병환자, 소외된 노인,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쓰여지기를 바랬습니다. 국민일보 기자가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내 놓으셨습니까?” 그 부부가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죽은 자가 뭐 자기 재산이 따로 있나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그동안 우리가 주인인 줄 알았던 생각이 바뀌며 하나님이 주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일과 직장, 일터, 그리고 생명의 주인인 것을 알면 그때부터 욕심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내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많아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져서 부자가 됩니다. 유명한 시23:1을 보십시오. “여호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시를 다윗이 썻습니다.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부족함이 없었습니까? 이 시편을 쓰는 순간에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원수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까? 부족한 것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것, 그대로 있었습니다. 죄없이 사울에게 좇겨 어두운 동굴에서 빵 한조각에 물 한 모금 마시는 것,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아가 나의 목자시니”. 아멘.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아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많고 환경에 좋아져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호아 나의 목자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여호아가 나의 목자시니부족함이 없습니다. 옛날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한 사람이 밭을 샀습니다. 밭을 사고 보니까 밭에서 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옛날 주인에게 갔습니다. “내가 밭을 사고 보니 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나는 금덩어리가 있는 줄 모르고 샀으니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당신 것입니다”. 옛날 주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이미 팔았는 데 거기서 금이 나왔다고 해서 내 것입니까? 당신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이 붙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재판입니다. 서로가 금덩어리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재판이 아니라 서로가 주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재판입니다. 재판관이 고민하다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이런 재판이 없습니다. 재판이 성립되지 않으니 당신네 랍비에게 가서 재판하세요”. 그래서 랍비에게 갔습니다. 랍비가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아들이 있습니까?” “.”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딸이 있습니까?” “.” 그러자 랍비가 선고했습니다. “두 사람은 마땅히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으나 오히려 상대방의 것이라고 주장하니 참으로 아름답도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이제 두 사람은 아들과 딸을 결혼시켜 한 가정을 이루게 하고 그들에게 이 밭을 상속하게 하라. 재판 끝”.

 

우리도 살면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을까요? 당연히 자기 것인데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라고 싸우는 눈물나게 아름다운 싸움을 볼 수 없을까요? 우리 회사가 잘된 것은 회장님 때문입니다. 회장님이 오직 회사를 위해 평생 수고하고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사원들이 말하자 회장님이 아니예요. 우리 회사가 잘 된 것은 직원 여러분이 불철주야 일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서로 아니라고 싸우는 회사를 볼 수 없을까요? 대통령이 매스컴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이 나라는 국민 여러분의 땀과 수고 때문에 잘되고 있다고 하자 국민들이 청와대로 몰려가 그것이 아니라 대통령 때문에 잘되고 있다고 데모하는 나라를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교회마다 교인들은 목사님 때문에 목회자는 교인 때문에, 장로님은 목사님 때문에, 목사님은 장로님 때문이라고 말하고 교회가 잘되고 있다고 말하고 혹시 교회 문제가 있다면 우리 교회의 문제는 나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피켓 붙이고 교회앞에서 시위하는 교회를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성령이 임하면 물욕이 사라집니다. 욕심이 사라지면 더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일합니다. 그러면 물질적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지배하는 직장, 성령님이 다스리는 직장, 일터,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물질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물질을 나누고 드리게 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 물질생활이 잘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령이 임하면 물질을 나누고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34-35절 다시 보십시오. 4:34-3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줌이러라”. 성령님은 우리를 물질의 욕심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그러면 물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내 것이 아니니까 남에게 줍니다. 남에게 줄 때 구제로 주느냐 나눔으로 주느냐가 다릅니다. 구제란 말은 우리가 보통 쓰는 말이지만 성경적인 말은 아닙니다. 구제는 내 것을 불쌍한 사람을 위해 내가 인심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구제는 없습니다. 내 것은 본래 없기 때문에 구제할 것도 없습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잠시 맡겨 놓은 것인데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함께 쓰는 것 뿐입니다.

 

선교는 그렇게 해서 가능합니다. 선교는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을 임자를 만나 주는 것 뿐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남긴 말씀중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번은 강원도 어느 교회가 태풍으로 무너져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목회자가 목사님께 와서 울면서 사정을 말합니다. 사정을 듣고 있던 목사님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래, 얼마면 교회 수리하겠소?” “5천만원이면 되겠습니다”. “그래?”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5천만원을 마련해서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감사하다며 절을 하고 교회 주소와 전화번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왜 주소를 씁니까?” “, 기록에 남기려고요”. 목시님이 말했습니다. “기록 필요없소. 임자가 가져가는 데 무슨 기록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겼다가 임자에게 준 것이니 걱정말고 돌아가 교회를 수리하시오”. 어떻습니까?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믿는다면 선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내 것도 없지만 우리 교회 것도 없지 않습니까?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긴 곳에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지난 주에도 어떤 분이 장학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 이것 얼마 안되지만 어려운 학생을 위해 써 주세요”. 경제가 어려워서 이번에 보니까 장학금 신청자가 많았습니다. 다 못쥐서 마음이 아팟습니다. “내가 네게 맡긴 것을 주라”. 성령님이 말씀합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아픈 환자가 있는 데 물질이 부족하다면 내놓을 분이 있습니까? 지금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가 있는 데 선교를 위해 내 놓을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물질 뿐 아니라 재능이 있으신 분, 내 놓으세요. 4월 첫주 토요일부터 주말교회 학교가 시작됩니다. 어려워서 평생 학원 한 번 가보지 못한 저소득학생 50여명을 토요일마다 초청하여 우리 교회에서 악기를 가르치려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재능을 내 놓겠습니까?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목장, 시니어 대학, 봉사를 위해 섬길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누가 시간을 내겠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남에게도 주지만 하나님께도 드립니다. 36-37절에 나오는 바나바가 그 사람입니다. 4:36-37, “구브로에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가 성령받고 한 것은 자기 밭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받고 방언할 수 있습니다. 성령받고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내 놓지 못하면 진짜 성령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래 전에 한 집사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십일조 해야 됩니까?” 그때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묻습니까? 십일조보다 더 하시려고요?”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신약 성경을 보았더니 십일조 하라는 말이 없던데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에 십일조 하지 말라는 말은 있습니까?” 그랬더니 집사님이 말합니다. “그 말도 없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구약성경을 따르면 되겠네요”. 구약에는 십일조 이야기가 76번이나 나옵니다. 사실 신약에도 5번 나옵니다. 성경에 믿으라는 단어가 272번 나옵니다. “사랑하라단어가 714번 나옵니다. 그러나 드리라라는 단어는 2,162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드리고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보니까 우리 교회 안수집사 이상의 83%가 십일조 하고 있고, 집사의 75%가 십일조 합니다. 아직도 25%의 집사님들이 십일조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십일조 아껴 부자된 사람 못보았고, 십일조하다 망한 사람 못 보았습니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다“. 이 믿음 하나면 십일조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세 가지 능력을 받습니다. 첫째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습니다. 둘째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받습니다. 그리고 셋째 물욕을 사라지게 하고 열심히 일하게 해서 물질축복의 능력을 받습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