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동원목사

이동원 목사 설교문

이동원 목사 설교 모음(ALL) (1)~(22)

 

 


 

저는 지구촌교인은 아닙니다만 감히 이 시대의 보배라고 여겨지는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들을 정중히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저를 한동안 이 목사님의 설교에 푹 빠쳐서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을 얻게 하셨습니다. PC에 저장된 복음의 핵심이되는 말씀을, 시리즈로 묶어서 올립니다. 그동안 올려드린 글들이 중복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은 주님 오시기전까지 이 세상 죄에 속하여, 무지하고 弱한 백성들에게 택하신 종들을 통해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 하시고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 아닐까요? (“百讀이 不如一言”이라. 본 원고를 가지고 자기 목소리로 녹음을 한번 해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성령께서 놀라운 능력을 선사하십니다. 말씀을 전할때도, 기도를 할때도 많은 도움을 얻게  하셨습니다.


주    제: 기  도 / 모  범 (1)

제    목: 다니엘의 기도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9장 1-23절

논    지: 다니엘은 삶의 전체를 기도에 의지하여 승리했다.

설교요약:

1.다니엘의 기도는 성경연구에서 출발했다.

2.약속의 말씀 붙들고 기도했다.

3.승리와 응답의 방편으로 기도했다.

4.위기도 기도에 매달렸다.

5.회개부터 기도를 시작 했다.

6.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다.

7.즉각적 응답을 받았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니엘서를 추적해 오면서 이미 기도의 사람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살펴보았습니다.“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단 2:17,18).다니엘은 위급했던 한 때를 기도로 극복했습니다.“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자기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기도하고 감사하며 그 상황을 하나님 앞에 의뢰하고 있는 기도의 사람 다니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다니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상황과 그가 기도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다니엘은 어떤  태도와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엇을 기도했으며, 기도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그의 기도관을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실로 이 기도야말로 다니엘의 삶의  열쇠요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다니엘에게 역사에 대한  그토록 놀라운 비밀을 계시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만합니다. 먼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몸이면서도 영

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을 그의 기도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에서 배울 점들


첫째로, 다니엘의 기도는 언제나 성경 연구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말씀과 상관없이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종종 그 기도는 인위적이고 주술적(呪術的=초자연적·신비적인 힘을 빌려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켜 길흉을 점치고 화복을 가져오려는 술법.)이고 샤머니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장 고결한 기도,  그리고 가장 고상한 기도일 수  있었습니다.“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1절).그 당시에 다니엘이 가지고 있던 구약성경 몇 권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삶의 중요한 근거였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노예로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였기에 자연히 자기와 자기 백성의 고난이 언제쯤 끝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포로 생활이 언제 끝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놀랍게도 그 백성들의 고난이 끝나는 시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렘 25:11,12).

포로 생활이 칠십 년 만에 끝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깨달은 다니엘은 “그렇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기 시작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포로가 된 것은 주전  605년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다니엘이 계시를 받고 기도하게 된 이 때는 주전 538년입니다. 이 기간을 계산해 보았을 때 분명한 사실은 유대 민족의 포로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고난의 세월이 불과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니엘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기뻐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특별히 당신에게 부딪쳐 오는 말씀이 있었습니까?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은 자신에게 부딪쳐 오는 말씀을 언제나 기도로 발전시켰습니다.“이제 우리 민족의 고난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가 중요한 때로구나. 지금이야말로 기도를 해야만 하는 때로구나”건강한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성자(聖者)라고 일컬어지는 영국의 죠지 뮬러는 기도의 비밀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하십시오”(Pray  according  to  His promise). 그 약속이어디있습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대하여 이 말씀에 얼마나 놀라운 약속들이 많이 담겨 있는지 아십니까?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하지 마시고 말씀을 따라서 기도하십시오. 저의 집 아들이 저에게 무엇을 요청할 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는 꼼짝 못 합니다.“아빠 약속했잖아요?”약속이라는 말만 나오면 꼼짝을 못 합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옛날 약속, 신약성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약속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3절).다니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기도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다니엘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기도했습니다. 기도 자체도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해야 합니다.“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主)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4절). 여기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부르는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십시오.“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6절). 다니엘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지 않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하고자 했습니다.“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10절). 좀더 구체적으로 죄목을 말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고 우리의 문제였고 우리의 잘못이 었음을 자복했습니다.“온 이스라엘이 주(主)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11,12절).“이같이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난도, 우리가 경험하는 이 어려움도 모두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자복합니다”이것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했던 죄를 먼저 처리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참으로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승리의 방편으로서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다니엘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 민족의 고난이 70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셨으면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계획과 예정은 그분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 중의 하나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세월은 자꾸 흘러 갔지만 메시야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우리에게 메시야를 주십시오”라고 끝까지 기도했고 마침내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때 제일 기뻐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아마  기도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실제로 메시야 강림에 대한 약속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기다렸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시므온과  안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팔에 안고 너무도 감격에 겨워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눅 2:20)라고 소리쳤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고 기도한 사람들을 통해서 메시야는 오실 수 있었습니다. 감히 시므온과 안나는 그 시대에 이렇게 말해도 괜찮았을 사람들입니다.“내가 기도했더니 주님이 오셨다”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요엘서에는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神)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이 약속을 믿고 정말 성령 주시기를 기도한 사람은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성도들이었습니다(행 2장). 약속대로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얼마나 흥분하고 감격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계획하시고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은 일방적으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책임 있는 응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도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마다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시는지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24:14)라는 말씀이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전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책임 있는 응답을 통해서 이 지구상에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자마자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약속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는 기도가 승리의 방편인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다니엘은 심각한 위기를 심각한 기도로 대응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어떤 기도도 장난 삼아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기도는 다 심각해야 합니다.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쓰는 그대여 기도할 때 거기에 생사가 달린 것처럼 기도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심각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 정말 심각했던 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그들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때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종종 잊혀져 가고 있는 전통 중의 하나입니다만 사실 중요한 것입니다.“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3절). 이러한 기도는 결코 평범한 기도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서 있음을 깨닫고 기도와 간구를 결심했고 이 결심은 금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금식하되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했던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금식을 통해 이제부터 내 삶의 우선 순위는 지금 기도하고 있는 바로 이 문제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이 문제는 내가 해야 할 여러 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순간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한 기도를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삼습니다


둘째, 금식은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기도할 만큼 기도하는 그 문제에 모든 신경과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여 매달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나의 우선 순위가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이 문제에, 그리고 기도 그 자체에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 여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쏟고자 합니다. 심지어 밥 먹는 시간을 아껴가며 나는 기도합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심각한 위기를 심각한 기도로 대응하는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여러 번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만날 때마다 거의 비슷한 모습의 기도로 위기를 뚫고 나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능력을 상실하고 힘없이 맥없이 살고 있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심각한 의미의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니엘에게서 우리는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다니엘은 응답받는 기도의 핵심이 회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은 유대 민족이 고난에서 해방될 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그의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의 기도는 죄에 대한 자복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민족에 대해서 기도하면서 그 민족의 범죄를 먼저 자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기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민족의 범죄 가운데 자기 자신의 범죄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예외로 삼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웃들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와 상관없는 대상인 것처럼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민족의 고난을 바로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했습니다. 다니엘은 회개 기도를 할 때마다 특별히 “우리”라는 복수 인칭 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그 많은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의 삶을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데에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기도의 궁극적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처럼 기도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17절).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이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18,19절).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약 4:3)“하나님이여 내 자식이 잘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남 부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이러한 기도는 별로 응답될 가망성이 없는 기도입니다. 자기 정욕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 내 자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면서 주의 복음의 빛을 내는 아들로 당당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하는 기도는 똑같이 아들을 위한 기도이지만 그 기도의 초점은 부모의 소원이나 이기심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즉시로 응답된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는지가 20-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온 모범적인 기도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응답된 기도가 바로 이 부분의 다니엘의 기도일 것입니다.“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더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일을 생각하고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20-23절).


다니엘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 쯤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성경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는 그 문제에 관하여 응답을 주시기 위하여 천사를 동원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적으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즉각적으로 천사들을 동원하는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를 일단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얼마나 흥분된 기대를 가지게 됩니까? 기도할  때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늘의 보좌 위에서 내 기도를 주께서 받고 계십니다. 천사를 거느리고 응답을 시작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을 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백했던 모습들을 회개하며 기도의 위대한 부흥이 우리 속에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있던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민족의 역사에 관한 것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 아니 전인류 역사에 이루어질 가장 중요한 어떤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사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주    제: 기  도 / 열  심 (2)

제    목: 기도의 영적인 싸움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10장

논   지: 사탄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나 열심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우리를 도와 주시고 빠르게 응답 해주신다.

설교요약:

1.다니엘은 기도의 사람 이었다.

2.다니엘은 조국을 위해 열심히 기도 하였다.

3.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즉각 응답 해주신다.

4.마귀가 우리 기도 응답을 방해 한다.

5.천사는 우리에게 힘을 주고 돕는다.

6.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다니엘을 이야기할 때마다 다니엘의 탁월한 지혜와 놀라운 결단력과 대담함 그리고 탁월한 지도력에 대해서 언급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것보다 다니엘에게 더욱 중요한 삶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니엘서를 강해하고 연구하면서 다니엘서의 상당 부분이 놀랍게도 그의 기도 생활에 할애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우리는 다니엘의 기도야말로 그의 삶의 열쇠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지혜와 그 놀라운 결단력, 그 담대함, 탁월한 지도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다니엘의 놀라운 예언을 가능케 했던, 그의 배후에 있었던 가장 놀라운 삶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본문은 다니엘의 말년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말년에도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맞이했습니다. 그의 황혼은 저물어 가는 해처럼 낙조의 쓸쓸함을 안겨다 준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 때문에 오히려 찬란했습니다. 다니엘은 특별히 인생의 말년에 기도를 하나의 사역처럼 감당했던 것입니다. 기도는 다니엘의 인생에서 일정한 사역이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민족을 위해서 중보 기도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바사 왕 고레스 삼 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깨달으니라”(1절).


고레스 왕 삼 년이면 주전 535년이나 534년 경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는 고레스의 등장과 함께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들의 고향인 유대 땅으로 돌아간 때입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의 부푼 꿈을 안고 폐허와 잿더미로 변했던 옛 고향으로 돌아가 그 즉시로 매일매일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를 다시 시작했으며 성전의 기초가 되는 터전 쌓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그가 포로로 있는 이방 땅에서 생애를 마치도록 기도 가운데 인도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스스로가 자신이 너무 늙어서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는 약 85세였습니다.


조국을 위해 기도하다 주님을 만난 다니엘


그러나 다니엘은 이방 땅에 있을망정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조국을 위한 기도가 하나의 사역이었습니다. 중보 사역으로 기도의 짐을 계속 졌던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내 조국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그저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3절에는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이 나옵니다.“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이것은 강렬한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국으로 돌아간 후 3년간은 열심히 조국 재건에 힘썼습니다. 터를 닦고 성전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중단되더니 그 후로 약 15년간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성전의 터전은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습니다. 학개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깨워 일으키기까지 성전 재건의 꿈은 막상 현실의 난관에 부딪치자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얼핏 전해 들은 다니엘은 답답했을 것입니다. 비록 이방  땅에 있을망정 사랑하는 조국 땅이 재건되기를 바라던 다니엘은 조국에 대한 기도의 부담감을 무시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사랑하는 조국 땅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조국 땅에는 다행히 에스라, 느헤미야처럼 몸으로 뛰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뛰면서 일하는 사람 못지않게 조국을 위한 중보 기도의 횃불을 끄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유대인에게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보화였겠습니까?


몸으로 뛰는 것만이 일인 것은 아닙니다. 기도도 일입니다. 기도도 사역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생애가 끝났다고 판단하지 않고 그러한 상태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즉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중보 기도의 제단을 쌓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을 얼마든지 교회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도 고령의 나이에 개의치 않고 조국을 위한 기도의 사역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 가운데에서 다니엘은 마침내 환상을 보게 됩니다. 자기 민족의 장래를 보여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예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이 받은 계시나 기이한 일을 해석하는 일만 했지만 점차 자기 민족과 세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게 되었으며 본문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더  위대한 하나의 환상을 접하게 됩니다. 즉, 그는 주님을 뵌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 민족이 이렇게 될 것이다. 세계 역사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보다도 다니엘에게는 더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가슴 벅찬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평소 찬양하며 신뢰했던 그 주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뵙게 되다니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비전이었겠습니까?“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 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개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5,6절).“한 사람”을 일부 성경학자들은 천사로 보지만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의 그리스도, 소위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께서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었을 환상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묘사와 비슷한 묘사를 어디에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장면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보았던 비전과 거의 일치합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천당과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문제는 저마다 설명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환상을 그렇게까지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주님이 없는 천국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 때문에 천국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아무 것도 그리스도의 환상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내 찬양의 주님, 내 사모의 주님, 나에게서 모든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그 주님을 만약 나도 한번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가 있다면... ”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이상(異象)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7절). 주님의 영광스러운 환상이 나타날 때 너무 영광스러워서 사람들은 벌벌 떨었지만 친히 그 환상을 목격한 것은 다니엘 혼자였습니다. 이방 나라에 끌려온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사모하고 바라보았던 다니엘은 기도 속에서 그 주님의 빛나는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으로부터 다니엘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기도 응답에 대한 내용은 11장,12장에 나옵니다. 그 전에 먼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환상으로 응답하셨다는 사실 속에서 몇 가지 교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즉각적으로 들으십니다.“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10-12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 아니라 천사입니다. 아마도 가브리엘 천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파견하시는 천사 가운데 가장 많은 심부름을 담당하는 천사가 가브리엘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까를 알기 위해서, 금식하고 기도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 소원대로 응답을 다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귀 기울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실까” 하는 기도에 대한 회의와 물음이 당신을 괴롭힐 때마다, 기도를 들으시고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이 장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이미 들으셨습니다.


둘째로, 악령들이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기도를 들으셔도 많은 경우 악령들이 기도가 응답되는 과정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그런데 <바사국 군> 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異象)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13,14절).


이것은 언뜻 정치적인 설명 같아 보입니다만 더 자세히 살펴보시면 “바사국 군”이 나옵니다. “바사국 군”은 바사의 군대가 아니라 “바사의  왕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사 왕자는 페르시아를 지키면서 이 나라를 담당하고 있는 천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이 “Angel prince of the kingdom of Persia”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 사도는 악령(귀신)들에 관해서 묘사할 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12절)이라고 했습니다. 악령들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다스리는 자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서 가브리엘 천사가 활동할 때 바사를 지키고 다스리던 악한 영의 역사가 이십일 일 동안 가브리엘을 막았던 것입니다.


천사론을 공부해 보면 개인을 지키는 천사도 있고, 어린아이들을 지키는 천사도 있고, 한 나라를 담당하는 천사도 있습니다. 타락한 천사의 왕이 마귀(사단)입니다. 예수님에게 마귀는 절을 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고 했습니다(마 4:8). 그렇게 할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마귀는 그의 졸개들인 타락한 천사들에게 각 나라를 주고 정치가의 배후에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나라의 정치에 관여하고 간섭하면서 역사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영적 전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십일 일 동안 가브리엘 천사와, 바사에 역사했던 악한 영 사이의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타락하지 않은 미가엘 천사가 와서 도와주었습니다. 미가엘은 선한 천사들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천사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12장7절에도 나옵니다. 마귀와 대적할 때마다 하나님이 부리시는 좋은 천사 가운데 하나가 미가엘입니다. 이 미가엘이 다니엘서 10장에서 사단과의 전투에 간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셋째로, 기도는 고된 영적 싸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기도는 영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가 끝났을 때의 모습을 보면 기도가 얼마나 무서운 싸움인가를 실감합니다.“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主)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17절). 다니엘은 힘이 다 빠졌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힘든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악령과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기도하실 때 바로 악령들과 싸우신 것입니다. 주님은 큰 사역이 있을 때마다 좀더 심각하고 좀더 처절하고 좀더 철저한 기도를 하셨습니다.“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이렇게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과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 기도의 욕구가 없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얼굴의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주님!그런데 이렇게 주님이 기도할 수 있도록 누가 돕고 있습니까?“사자(使者)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4:44). 마치 다니엘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천사들이 역사했던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그 고된 전투에도 천사들의 도움이 함께했던 것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고된 영적인 싸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기도의 싸움을 싸울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인생의 심각한 결정 앞에서 주님이 감당하셨던 기도의 자세로 우리의 삶의 과제를 감당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이렇게 해 보고 저렇게 해 보다가“기도나 해 볼까?”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자세에서 도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승리의 기도는 새 힘을 얻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힘든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합니다. 기도를 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기도는 우리를 영적인 에너지가 다 소모되어 쓰러진 상태에 그대로 놓아 두지 않고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힘을 얻게 합니다.“또 사람의 모양 같은 것 하나가 나를 만지며 나로 강건케 하여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18,19절). 기도를 마친 다니엘이 쓰러졌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새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는 참으로 힘든 작업이지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도우심이 함께했을 때에 우리는 새 힘을 가지고 일어서게 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우뚝 솟게 되는 이 기도의 영광과 기쁨과 기도의 엄청난 저력을 경험하셨습니까?


모든 승리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힘을 얻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저에게 인상적인 것은 이 마지막 부분입니다.“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君) 미가엘뿐이니라”(21절). 당신을 돕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천사 미가엘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너희 군(천사)”이라 했습니다. 악령도 <prince> 라는 단어로 설명되지만 하나님이 부리시는 놀라운 천사도 <prince> 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너희 천사”가, 곧 “영적인 왕자”가 우리를  돕습니다.


천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구원받을 성도를 섬기는 것입니다.(히  1:14). 이 천사들이야말로 우리를 돕기 위하여 파송된 응원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천사들은 우리가 지칠 때 새 힘을 얻게 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일어나야 해, 힘내야 해”라고 해 줍니다. 기도의 마무리 부분에서 다시 새 힘을 얻고 일어서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승리의 기도는 새 힘을 얻게 합니다.


다섯째로, 기도의 싸움은 말씀의 도우심을 동반하여야 합니다.“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 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미가엘뿐이니라”(21절).“진리의 글”은 성경을 말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붙들고 기도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사단과의 싸우는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의 삶을 지키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두 가지 영적인 무기가 바로 기도와 말씀입니다. 이 두 무기 중 어느 한 무기가 녹슬어 버리면 우리의 삶은 흔들리게 됩니다.


당신의 기도 생활은 살아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두 개의 놀라운 무기를 가지고 악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과 섭리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목: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3)    

주    제: 영  접

성    경: 요한복음 1장 1-14절

분    류: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논    지: 이 세상의 어두움은 그리스도의 빛으로만이 몰아낼 수 있다.

설교요약:

1.이 세상에는 빛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2.이 세상에는 빛을 거절한 사람들이 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을 영접한 사람들이다.


개역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설교가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어린이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어둠을 이길 수 있을까요? 빗자루로 막 쓸어 버리면 어둠이 도망갈까요? 총으로 꽝꽝 쏘면 어둠이 없어지나요? 아니예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빛만 들어오면, 어둠은 쏜살같이 도망가요”짧지만 얼마나 훌륭한 메시지입니까? 오늘날 이 세상은 어둠으로 꽉 차 있습니다. 가정에도, 학교에도 어둠은 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또 이 어둠은 폭력과 살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어둠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인 방법으로, 어떤 사람은 윤리적인 방법으로 이 어둠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어둠의 본질이 철저하게 영적인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어둠은 바로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 죄 안에서, 이 죄 때문에 사람들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살인과 폭력을 일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어둠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기자는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빛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8장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몰락해 가는 이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랑하는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 주셨다고 성경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본문인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9절).여기서“참빛”이라는 말의 “참”은 거짓의 반대 개념이라기 보다는 불완전의 반대 개념으로서, 완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자연의 빛도, 도덕의 빛도, 양심의 빛도, 사회를 갱신하려는 사람들의 빛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다 불완전한 빛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완전한 빛입니다. 인간의 변화, 역사의 변화는 이 참빛이신 그리스도 앞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반응 여하에 따라서 우리 평생의 삶이 달라집니다. 본문에는 이 참빛이신 그리스도 앞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응에 대해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에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빛이라고 합니다. 그는 빛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믿지 않는 우리 주변 사람들을 보고 때때로“어떻게 신앙이 없이 저렇게 살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교회에 출석한 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오히려 믿는 것이 기적에 속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소경에게는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소경이 만일 볼 수가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주님은, 영적으로 소경 된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육(肉)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며, 계속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빛이 있으나 빛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극을 보십시오.


빛을 거절한 사람들


우선 5절을 보십시오.“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저는 이 비췸이 일반적인 비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함으로 빛 되신 주님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대로 방관하실까요? 아닙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자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본문에도 그런 사람 하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침례(세례) 요한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보내어 빛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빛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역사 속에 보내시면서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8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8,9절). 저는“각 사람에게 비취는”이라고 할 때의 비췬다는 말이 5절의 비췬다는 말보다 그 의미가 좀더 발전 되었다고 봅니다. 즉, 5절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비췸이지만 9절은 좀더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의미의 비췸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고 믿을 수 있는 감동을 주십시다. 하나님께서 죽어 있는 그들의 영적 감각을 살리셔서 볼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9절 이하를 보십시오.“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9,10절). 10절에서 “알지 못했다”는 말은 몰라서 알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성경 번역 학자는 이 “알지 못했다”는 의미를 좀더 풀어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그를 인정하기를 거절했다”이 말은, 하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인정하기를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빛을 거절한 사람들의 비극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빛을 거절할까요? 주님은 그 대답을 요한복음 3장 19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이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19,20절).


첫째로, 사람들은 빛보다도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빛을 거절합니다. 저는 한국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가수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달 동안  개인적으로 애를 쓴 일이 있습니다. 이 친구가 결국 자기는 믿을 수 없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더군요.“지금은 인생을 즐기고 싶습니다”이 말은 다시 말해서 죄를 즐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에 대한 감미로운 유혹을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에 빛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 이 비극적인 모습을 보십시오.


둘째로,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봐서 빛을 거절합니다. 빛 앞에는 모든 것이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 노출된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를 고치든가 아니면 그 빛 앞에서 도망치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유감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폭로가 싫은 것입니다. 불결하고 지저분하고 너절한 내 모습이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 노출되는 그 순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부패한 자기 모습을 끌어안고“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외치며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갖고 도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시는 빛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에 혹은 죄를 즐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빛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반열에 서서 지금도 어두움 속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빛을 영접한 사람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니”대부분의 유대인이 그랬습니다. 대부분의 인류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11절은 그 다음 12절로 연결됩니다. 11절과 12절을 연결하는 고리는 “그러나”라는 대단히 강한 의미의 접속사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영어 성경 참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절했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참빛 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 소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빛의 자녀가 됩니다.


2,000년 전 종려주일에도 똑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주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대중들이 메시야를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달라지게 될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군중 심리의 열기가 다 사그라져 버리고 사람들이 제각기 흩어진 저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아니면 그 다음날 저녁일 텐데,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몇 사람이 조용히 나사렛 예수의 숙소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런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메시야로, 영광의 구주로 알려졌습니다. 주께서는 지금도 이런 소수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빛을 체험한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참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아씨시의 성자인 프란시스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전기(傳記) 작가 한 사람은 프란시스의 생애를 이렇게 결론짓습니다.“달이 태양의 거울이듯, 그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꼈다. 그의 심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었고, 그의 언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였다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주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빛을 발하고 계십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보면, 이 빛을 바라면서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저 영원한 날에 하늘의 별처럼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참된 빛이시지만, 참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도 세상의 빛이어야 한다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너희도 세상의 빛이다”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마다 그들이 자리한 곳에서 참으로 빛으로 빛나야 합니다. 가정에서,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은 별처럼 빛나야 합니다. 우리를 별처럼 쓰시다가 어느  날 저 영원 속에서 영원토록 비추이게 하실 하나님의 찬란하고 놀라운 사역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남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선교사의 묘비에는 그 지역 원주민들에 의해서 새겨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합니다.“당신이 왔을 때,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장(場)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둠 속에 거하다가 빛을 깨닫지 못한 채 저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삶이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빛 앞에 노출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위선자처럼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강렬한 빛 앞에 노출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나 빛을  소유하고 빛을 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쓰십니다. 성경은 그들을“남은 자들”혹은 그루터기”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 세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느 편에 속합니까?


2,000년 전, 당신과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서 걸어가시던 그 주님, 참으로 빛이신 바로 그분, 어떤 이는 그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이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분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빛 되신 그리스도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빛 되신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이 주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들을 살아가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 주님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찢기운 내 몸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흘린 나의 피의 언약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 그리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 주시면서 피를 흘려 주셨던 그 주님, 그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새 생명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된 이 새로운 삶의 감격을 아는 우리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새롭게 기억하고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아멘!



주    제: 믿  음 / 핍  박 (4)

제    목: 양과 염소에 대한 비전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8장

논    지: 성전을 훼파하고 믿는자를 핍박하며 우상경배를 강요할 때 더욱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하여야 하며 악한자는 반드시 멸망한다.

설교요약:              

1.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2.교만한 자나 교만한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

3.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개역 단 8:1 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 후 벨사살왕 삼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 2 내가 이상을 보았는데 내가 그것을 볼 때에 내 몸은 엘람도 수산 성에 있었고 내가 이상을 보기는 을래 강변에서니라 3 내가 눈을 들어 본즉 강 가에 두 뿔 가진 수양이 섰는데 그 두 뿔이 다 길어도 한 뿔은 다른 뿔보다도 길었고 그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더라 4 내가 본즉 그 수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 5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수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6 그것이 두 뿔 가진 수양 곧 내가 본바 강 가에 섰던 양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에게로 달려가더니 7 내가 본즉 그것이 수양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수양을 쳐서 그 두 뿔을 꺾으나 수양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힘이 없으므로 그것이 수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수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었더라 8 수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9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10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짓밟고 11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12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13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14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15 나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사람 모양 같은 것이 내 앞에 섰고 16 내가 들은즉 을래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 17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18 그가 내게 말할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 만져서 일으켜 세우며 19 가로되 진노하시는 때가 마친 후에 될 일을 내가 네게 알게 하리니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일임이니라 20 네가 본바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21 털이 많은 수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 22 이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네 뿔이 났은즉 그 나라 가운데서 네 나라가 일어나되 그 권세만 못하리라 23 이 네 나라 마지막 때에 패역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리니 그 얼굴은 엄장하며 궤휼에 능하며 24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장차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 25 그가 꾀를 베풀어 제 손으로 궤휼을 이루고 마음에 스스로 큰체하며 또 평화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 26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인간에게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신격화하고 싶어하는 본능일 것입니다.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만 이 본능의 출처는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4)고 했기 때문입니다. 천사장 루시퍼는 그가 사단이 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뿌리입니다. 교만이란 단순히 자기를 높인다는 것보다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려는 유혹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은혜를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한 자, 교만한 단체, 교만한 국가는 반드시 망합니다. 우리는 이에 관한 고전적인 교훈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양과 염소에 대한 비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두번째 환상입니다. 네 개의 짐승이 등장한 첫 환상을 본 후 두 해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때는 주전  551년경, 다니엘의 나이 70세경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본문의 사건은 7장의 사건과 유사하게 보입니다. 7장에서, 느부갓네살 이후의 세계 역사에 대하여 이미 보여 주었는데 왜 8장이 필요했을까요? 그러나 이 두 장 사이에는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니엘서 전체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다니엘서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구약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부분이 바로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1장1절부터 2장3절까지는 히브리어로, 2장4절부터 7장28절까지는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람어는 그 당시 이방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언어였습니다. 마치 현재 영어가 세계적인 공용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중동(中東)을 중심으로 한 가장 보편적인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람어를 사용하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8장1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또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왜 이런 전환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메시지를 전할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2장4절부터 7장28절까지에는 세계 역사의 전개를 보여 주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 교훈을 이방인들에게까지 계시하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은 그 당시 이방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아람어를 사용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8장부터 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주시고자 하는 중요한 계시가 이 부분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8장은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세계 역사의 장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8장에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특별히 어느 사건과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본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양과 염소 그리고 작은 뿔에 관한 이상


“내가 눈을 들어 본즉 강가에 두 뿔 가진 수양이 섰는데 그 두 뿔이 다 길어도 한 뿔은 다른 뿔보다도 길었고 그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더라 내가 본즉 그 수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 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3,4절). 뿔이라는 것은 언제나 통치의 상징입니다. 두 개의 뿔을 가진 수양으로 상징된 어떤 세력이 서쪽으로 북쪽으로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가는데, 도전자가 아무도 없습니다.“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수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그것이 두 뿔 가진 수양 곧 내가 본 바 강가에 섰던 양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에게로 달려가더니 내가 본즉 그것이 수양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수양을 쳐서 그 두 뿔을 꺾으나 수양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힘이 없으므로 그것이 수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수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었더라”(5-7절). 수염소가 수양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수염소의 세력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못합니다.“수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8절). 양과 수염소의 이상은 각각 무엇을 가리킵니까?“내가 본 바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수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20,21절). 두 뿔 가진 수양은 메대 바사를 상징합니다. 메대 바사 제국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메대와 바사가 합해서 된 제국입니다. 두 개의 뿔 중에서 나중 뿔이 더 길다고 했는데(3절), 이것은 메대가 먼저 일어났지만 더 강력한 바사에 의해 통합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수염소로 상징된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의 영도 하에 메대 바사를 넘어뜨리지만 이 제국도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수염소의 뿔이 꺾이고 그 자리에 네 개의 뿔이 돋아났듯이 알렉산더의 사후 즉시 그의 제국이 네 토막이 났습니다. 이미 지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이것은 예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본문에는 양과 염소의 이상만이 다루어진 것은 아닙니다.“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켜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짓밟고”(9,10절). 네 뿔 이후에 다시 작은 뿔 하나가 돋습니다. 이 작은 뿔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낯선 이미지가 아닙니다. 7장에서 작은 뿔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로마 제국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8장 9절에 나오는 작은 뿔은 얼핏 보면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작은 뿔과는 <또 다른> 작은 뿔입니다.


지금까지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이 네 개의 제국이 무너지고 세워지고  했습니다. 그런데 8장에는 메대 바사와 헬라만이 등장하고 로마의 이미지는 아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다른> 작은 뿔은 로마가 아닌 헬라와 관련된 작은 뿔인 것입니다. 네 개로 분할된 헬라 제국 가운데 하나인 셀루키드 왕조에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여덟번째 왕이있었습니다. 그는“영화로운 땅을 향하여”(9절)라는 말씀과도 같이 주전 168년12월에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왔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타인을 친 데에는 그 땅을 점령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아가서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헬라 문화권 속으로 이스라엘을 편입시키고저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아폴로니우스라는 장군의 영도로 이만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설치했습니다. 그런 후에 유대인이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여 상종도 하지 않던 돼지를 제우스 앞에 바쳤습니다. 또 할례를 금지시키고 성경을 읽지도 소유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 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리라(11-14절). 성소가 이천 삼백 주야 동안 더럽힘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천 삼백 주야에 대해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천 삼백 날이라고 보는 견해와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제사드리는 것을 고려하여 이천 삼백 일을 둘로 나누어서 천 백 오십 일, 즉 삼 년하고도 약 오십오 일이라고 보는 견해로 나뉘는데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3년 반 사상> 이나옵니다. 7장의 한 때와 두 때와 반을 합해도 문자 그대로 삼 년 반이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한 것은 주전 167년입니다. 그때부터 성전이 더럽힘 당하기 시작해서 주전 164년12월14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편에서는 그들의 성전을 빼앗기고 거기에 우상이 들어와 더러운 제물이 바쳐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유다 마카비 가문이 그것을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죽어 버렸습니다. 주전 164년에 특별한 병명도 없이 갑자기 앓다가 그냥 죽은 것입니다.“이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네 뿔이 났은즉 그 나라 가운데서 네 나라가 일어나되 그 권세만 못하리라 이 네 나라 마지막 때에  패역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리니 그 얼굴은 엄장하며 궤휼에 능하며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장차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 그가 꾀를 풀어서 제 손으로 궤휼을 이루고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평화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22-25절). 이렇게 이스라엘을 무참하게 짓밟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까닭없이 죽자 유다 마키비가 폈던 게릴라 운동은 자연히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성전을 되찾게 됩니다. 그때가 주전 164년 12월 14일경입니다. 제우스 신당을 헐고 다시 성전을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이것을 축하하는 절기가 “하누카”, 즉 수전절(守殿節)입니다.


크리스마스 경이 되면 유대인들은 집집마다 촛불을 켜 놓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되찾던 날, 성전 안에 촛불을 밝혔던 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즉, 성전 안에 하나님의 빛이 가득 차게 된 그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하누카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유대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또 한번 핍박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그러자 그는『그러면 우리들의 달력에는 축제일이 하나 더 생길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바로가 유대인을 핍박해서 유월절이 생겼습니다. 하만이 이스라엘을 핍박해서 부림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죽고 나니까 수전절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세력은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서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계속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세 가지 교훈


첫째로, 교만한 자나 교만한 국가는 반드시 망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파파네스는 스스로를 높이고 자의로 행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26절). 성경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후에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묵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되어질 역사의 마지막을 기록할 때 다니엘서의 이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환란을 경험하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합니다. 그것이 문자적으로 3년 반일지 아니면 그보다 더 긴 기간일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임할 무시무시한 혼란의 때가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 에파파네스가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사단의 도구 역할을 했던 것처럼 주님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입니다. 과거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듯이 앞으로의 예언도 이루어질 것이 확실합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27절). 다니엘은 이 예언을 받고 까무라쳤습니다. 그리고 수일을 앓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짓밟히고,거룩한 곳에 가증한 물건이 놓여지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건입니까? 다니엘은 이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두려운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어떻게 편안한 심정으로 이 말씀을 받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혼절하여  수일을 앓기까지 했습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다니엘의 태도를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살고 있던 역사의 황혼기에 빛으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의 환란과 어려움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가 역사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당신과 저를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던지는 엄숙한 경고요 도전인 것입니다.


제   목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5)

주   제 : 진  리

성   경 : 요한복음 18장 33-40절

분   류 : 지구촌 교회

설교자  : 이동원 목사

논  지  : 진리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설교요약

1.진리와 사실은 다르다.

2.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다.

3.진리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 있으면 진리를 피하게 된다.

4.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개역 요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수년 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유명한 소련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강연은 미국 언론사상 최대의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 지식인을 따뜻하게  영접한 미국은, 이 사람에게서 미국에 대한 칭찬과 자부심을 확인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자유를 억압한 소련이 나의 고향일 수가 없었듯, 자유의 남용으로 정의가 왜곡되고 부도덕이 만연한 이 미국 사회도 나의 고향은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분노에 찬 비평에도 불구하고, 한 언론인은 그를 가리켜 “진리의 증언자요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평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되기 직전, 그는 재판석상에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반드시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공산주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오”재판관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진리가 무엇이오?』그러나 소련의 재판관이 이 질문을 솔제니친에게 던지기 훨씬 전에, 빌라도라는 사람이 예수를 재판하는 자리에서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오늘날처럼 거짓된 가치관과 거짓된 우상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 질문은 다시금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진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진리에 대한 우리들의 접근은 어떠해야 합니까? 일반적으로 진리는 거짓의 반대 개념인 “참”으로 이해되어집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이 진리라는 말은 단순한 사실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혼자들의 절반 가량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할때, 우리는 그 말을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진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혹은 우리를 정의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참된 사실입니다.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이 진리를 “최고의 선”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주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그 어떤 것을 진리라고 선포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6절의 유명한 선언을 주목해 보십시오.“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그 무엇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오신 구주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인 요한복음 18장에서 다루어진 이 진리라는 명제는 특별하고도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요 왕이라는 사실에 진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일종의 논쟁으로 시작됩니다. 33절을 보십시오.“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官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본문을 계속 읽어 보면, 주님은 빌라도의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그분이 왕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정치적으로 유대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특정 시간이나 지역의 개념을 초월한 인류의 왕이요 영원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36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실존적인 문제가 있다면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 무엇이 나를 다스리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이 질문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당신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거짓이 다스리는 곳에는 거짓된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 그분이 왕이 되어 내 인격과 내 사고와 내 의식과 내 삶을 통치하실 때, 그곳에는 용서와 구원과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중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이 고백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즉, 그 당시는 황제 숭배가 강요되고 있어서“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 자들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제가 얼마 전에 터키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지역을 여행했는데, 제 마음 가운데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가 위치했던 지역에 가 보면, 희랍이나 로마의 신을 숭배하던 신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규모는 아덴(아테네)이나 희랍의 기타 지역들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큽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초대 교회의 흔적은, 희랍이나 로마의 거대한 신전 근처에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방문해 보면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버가모와 같은 지역에 가 보면, 산꼭대기 한가운데에 제우스의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신전의 규모는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그 도시 전체를 압도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보낸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 이런 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계 2:13).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황제를 숭배하고 또 이러한 신들을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들의 밑에 자리잡고 있는 보잘것없고 작은 교회의 터전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시이저가 신이십니다. 제우스가 신이십니다”라는 강요된 고백에 승복하지 않고, 대신 “예수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간접적으로 시이저나 제우스가 주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 고백 때문에 생명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서 경험한 용서와 자유와 풍성한 생명과 하늘나라에 대한 찬란한 비전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도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은 이 하나의 고백 속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생명이라는 사실, 예수만이 내 삶의 유일한 초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재판장을 향해서 이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진리가 무엇이냐?”『내가 왕이다.』빌라도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번 장에서는 진리에 접근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진리에 대한 유대인 무리들의 접근 태도


법정의 주변에 있었던 유대인의 무리들, 그들에게 진리란 다수를 의미했습니다. 또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내 삶을 좀더 편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였습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날, 바로 이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하며 그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을까요? 그들은 인간 예수에게서 정치적 메시야 상(像)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좀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예수는 죄인으로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됩니다. 법정에 서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그 순간, 무리들은 예수를 아마 별 볼일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배신당한 것과 같은 심정으로 강도 바라바를 놓으소서. 그리고 예수를 못박으소서라고 외쳐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진리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진리의 대상이 자신들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돌연히 진리의 핍박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당신은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던 유대인의 무리들만이 진리의 이용자라고 생각합니까? 당신 자신은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의 교회 출석 동기는 무엇입니까? 주일 아침에 한 번쯤 나와서 좋은 이야기 듣고 가는 것, 그것이 내게 해롭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사람들을 사귀면서 따뜻한 인간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동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출석의 유일한 동기가 된다면, 당신은 조만간 이 진리 앞에서 떠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높이 외치던 유대인의 무리들과 같은 진리에 대한 접근 태도가 바로 당신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진리를 이용하고자 하는 동기로만 그것에 접근 한다면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빌라도의 접근 태도


빌라도는 우리 앞에 진리에서의 도피자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리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아무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고 있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19장 4절에도 똑같은 고백이 나옵니다.“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예수의 무죄를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빌라도가 그분을 채찍질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물로 자기의 손을 씻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마 27:24).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왜 그는 이 사건에서 도피하려 했을까요? 사실 빌라도는 어느 정도 자기의 양심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을 변호하고 그분을 석방시킬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동기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민중들로부터 자기의 위치를 인정받음으로써 자기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변화된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진리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면, 나 역시 빌라도처럼 어느날엔가는 진리의 도피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당신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나는 길이요 진리요”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분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가치를 두고 추구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를 기억합니까? 다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이요 영광이요 소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으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진리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지요? 만일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긴 하지만 물질이나 생활의 안정이나 삶의 편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신 역시 빌라도처럼 대야에 피 묻은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의 사건과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는 진리에서의 도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진리에 대한 제자들의 접근 태도


19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 찾아나오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장 26절 이하에 보면, 사도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6절). 대부분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십자가 밑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하는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의 기자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여기 십자가 밑에까지 찾아나와서  주님의 유언을 받들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19장 38절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자는 아닙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에 끼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은 그 누구에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그분을 버릴 수 없었던 이 제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隱諱)하더니... ”공개적으로 나타나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체포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마침내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앞에 등장합니다. 그 잘난 제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이 무명의 제자가 등장해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청합니다. 자기가 가진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안장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메시지를 보면, 이번에는 니고데모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39절입니다.“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성경이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그 앞에 붙인 표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왜 하필이면 밤에 찾아왔을까요? 유대인의 관리, 산헤드린의 관원이라는 자기의 신분과 위치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있어도 백주에 등장하기가 꺼려졌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꺼려져서 혼자 슬쩍 기도를 처리해 버리는 어떤 사람처럼 혹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소심한 접근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장에서 그는 마침내 변신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이 제자들,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그분과 자기의 삶을 동일시할 때 겪어야 할 그 많은 어려움이나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자기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로 여기게 된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들은 진리를 사랑했던 그리고 진리의 증언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진리는 전파되었고, 그 결과로 세상은 지금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씨시(Assisi=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이탈리아 중부)의 성자 프란시스의 위대한 회심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청년 시절에 위대한 기사(騎士)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 나라의 가장 유명하고도 유망한 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시스, 그는 유달리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쾌락을 즐겼던 패기에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신기하고도 이상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너는 주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종을 따르겠느냐?”이 낯선 목소리 앞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누가 주인입니까?』 잠시 후에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됩니다.『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고?』


지금까지 자기의 꿈과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 왔던 프란시스는 홀연히 던져진 그 질문 때문에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날 이후로 프란시스는 지금까지 즐겨 왔던 그 모든 쾌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친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 프란시스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생각으로, 그를 위해 큰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그 파티 순서에 일종의 연극 놀이가 있었는데, 친구들은 그 연극의 어릿광대 역을 프란시스에게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어느 정도 어울리고 싶은 생각 때문에, 어릿광대의 역할을 하면서 그 연극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친구들과 함께 연극 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같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프란시스가 갑자기 멈춰섰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이 바로 연극과 같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역겨운 분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참을 가다가 프란시스가 없는 것을 발견한 친구들은 그를 찾아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모습이었습니다.“주님,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그는 소리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일으켜 세우면서 놀려대기 시작합니다.『아무래도 이 친구,  애인이 생긴 모양이야. 프란시스, 너 요즘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 생긴 것 아니니? 애인과의 관계에서 말이야... .』옷을 털면서 일어난 프란시스는 친구들 앞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맞았어. 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내 신부를 만났어. 나의 사랑, 나의 진리이신 주님을 만났단 말이야 그 순간부터 프란시스는 자기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앞에 드려, 진리의 전파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오류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연극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아직도 이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오, 하나님.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우리 이웃들의 삶의 場을 보십시오. 본능대로 쾌락대로 움직이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프란시스가 발견한 것처럼 헛되고 헛된 연극일지 모릅니다. 마음에 없는 웃음을 웃고, 마음에 없는 맞장구를 치면서 살아가는 연극 말입니다. 자기를 만나러 찾아오신 그리스도 앞에 자기의 삶을 던져 버리고, 이제는 당신만이 나의 사랑이요 나의 진리라고 소리치던 프란시스. 오늘 당신은 그의 기도 앞에 당신의 말로 응답해야 합니다. 인생은 연극처럼 살아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단 한번의 삶입니다. 당신은 여생을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거짓 속에 안주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인생이 한바탕의 연극이었다고 후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진리,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이십니다”주님 앞에 당신 자신의 사랑의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아멘-



제   목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6)

주   제 : 희  망

성   경 : 고린도후서 1장 3-11절

분   류 : 지구촌 교회

설교자 : 이동원 목사

논  지 : 절망의 순간에는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 해야한다.

설교요약

1.절망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2.위로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3.위로의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


개역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도 아주 절망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주 신앙심이 깊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도 어떤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고 심지어 자기의 생명을 던져 버리고 싶어하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세기의 위대한 성자라고 일컬어지던 존 조웨트라는 사람의 자전적 전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여러분은 나의 삶에 기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내가 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며 또 영적으로 계속 성숙해 가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때때로 나는 매사에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마음 깊히 더럽혀져 있는 자신을 보고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 버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라고 일컬어지던 스펄전이 한번은 설교 중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나는 때때로 너무나 깊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제발 여러분만은 나와 같은 이런 극한 상태에 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사실은, 본문에서 저 유명한 바울 사도가 거의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여기에서 바울이 사용한“환난”이라는 단어는, 가슴에 압박이 가해져서 아주 짖눌려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당시 아시아의 유력한 수도였던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다가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던 은장색(銀匠色)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의 고발을 받게 됩니다. 바울의 복음이 전해지니까 제일 안 되는 것이 우상 장사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고발로 바울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30절 이하에 보면 바울에게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얼마 전 에베소에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연극장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장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에베소의 극장은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원형극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에베소의 원형극장 안에는 맹수들을 가두던 굴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보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의 연극장은 맹수들이 죄수들을 처참하게 죽이는 광경을 군중들이 지켜보며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바울이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전도하다가 마침내 자기의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극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때를 연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보면,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내가 범인(凡人)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이 말씀을 볼 때, 우리는 바울이 전도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이 고백한 대로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 때문에 자기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바울이 절망 중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여러분, 내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이제는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들의 절망보다도 더 비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절망적 상태에 도달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의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이토록 말할 수 없는 극한 고난을 주십니까?”그러나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절망적 상태에 빠지긴 하지만 삶을 포기해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책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결국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붙잡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절망을 극복한 위대한 승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 극한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갖게 했을까요? 우리의 삶이 절망의 계곡을 지날 때 우리로 하여금 이 절망을 넘어서게 하는 희망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본문은 이 위대한 비밀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위로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


내 삶이 절망의 골짜기를 헤맬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이것이 바울이 그의 극한 고난의 상태에서 발견했던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짤막한 본문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에 하나는 환난, 고난, 고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압도하는 더 중요한 단어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바로 “위로”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 이 위로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위로하사”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위로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위로와”구원을 위함이요 혹“위로받는”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4-7절).


바울 사도는 극한 고난 중에서도 위로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역설입니다. 바울은 그 고난 때문에 절망하긴 했지만,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그의 삶에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마침내 바울은 이 고난의 폭풍우 한복판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외칩니다.“나를 능히 위로하시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살 소망이 다 끊어진 상태에까지 이르는 고난을 받았는데도, 그가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고난운데에서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바울의 이 놀라운 모습을 보십시오.


대영제국의 미술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 가운데에 G.F. 왓트라는 사람이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한 소녀가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를 들고 지구 위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들고 있는 악기는 줄이 다 끊어지고 꼭 한 줄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늘은 캄캄합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하늘에 오직 하나의 이 빛나고 있습니다. 왓트는 이 그림의 밑에다 이렇게 제목을 썼습니다.“희망”꼭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의 현, 캄캄하기만 한 하늘, 그러나 소녀는 그어둠 속에서도 하늘에 떠 있는 단 하나의 별 때문에 남은 줄 하나로도 희망을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별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한 성도는 바울 사도와 비슷한 심한 고난을 체험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주님, 나를 둘러싼 모든 형편은 정말 사면초가(四面楚歌)입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 열려 있는 하늘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사면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이 성도는 일어나 이렇게 감사를 합니다.“아직도 열려 있는 하늘, 아직도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아직도 신뢰할 수있는 하나님, 내가 쳐다볼 수 있는 별이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계심을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왜 고난의 상황을 나에게 면제시켜 주시지 않는지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살 소망조차 끊어지는 이 고난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위로하심으로 우리로 이 고난에서 다시 일어나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이 하나님을 발견하십시오.


2.위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본문 9절에서 우리는 고난에 대한 바울 사도 자신의 해석을 읽게 됩니다.“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사람이 생명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 때는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는 아직도 자기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 가능성이 아예 없어질 때, 그때 인간은 어쩌면 가장 진솔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살 소망이 끊어지는 절망이 인간에게 때때로 필요한가 봅니다. 그런 지경에 처해 봐야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고 연약한 자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구약의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호세아의 아내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남편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처럼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건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남자에게 완전한 절망을 안겨 주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은 회색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삶에서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막다른 절망의 자리에 서게 된 호세아,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네 연인이 되어 주마”이 말씀을 듣고 호세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가정의 말할 수 없는 불행과 역경을 딛고 일어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거듭 나 여호와를 배신하고 돌아선 이 민족을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도 네 아내를 향해서 그런 자리에 서기를 원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네가 이 민족에 대한 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해 주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다”호세아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배신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는지 그리고 그런 불성실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서 그분의 큰 사랑에 위로를 얻고 그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것같이 바울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체험을 소유하고 있는 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험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한번 체험해  본 사람은 나중에 시험이 닥칠 경우에도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사망의 골짜기에 던져졌을 때 거기에서 자기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당신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분이 지금 당신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신 분이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면, 그분이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당신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과거에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그분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훗날에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역경과 고난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회인 것을 깨달으십시오.

 

3.위로의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발견한 “고난의 적극적인 목적”을 고백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로 고난을 겪게 하시고 또 그 고난 중에서 위로를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 그것은 내 주변에 나의 경우와 비슷한 유형의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을 경험해 본 사람, 역경을 겪은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유명한 시인 괴테가“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않겠다”라고 한 것처럼, 고난의 의미를 체험한 사람들만이 같은 고난 속에 처하고 있는 이웃들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저는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무렵 저는 인생의 극한적인 어둠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몸도 약했고, 집안도 파산했고, 전혀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불교를 비방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당시 제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을 때 부처님의 평화스러운 그 얼굴이 제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평화스러우니까 내 고난과는 상관이 없는 분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따금 보게 되는 십자가상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본 적도 없는 저였지만, 십자가상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수님은 어쩐지 저의 아픔을 이해해 주실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강아지를 파는 어떤 상점에 톰이라는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물론 강아지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은 색깔이 예쁘고 털도 고운 귀여운 강아지들을 여러 마리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톰이라는 소년은 주인이 골라 주는 강아지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쪽 다리를 다친 강아지를 가리켰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그 강아지는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 다리를 절기 때문에 너와 같이 뛰어다니면서 놀 수도 없는데... ”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그렇지만 이 강아지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지 몰라요.』전혀 소년답지 않은 이 말에 주인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강아지를 소년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돈을 지불한 후 절름발이 강아지를 안고 떠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에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톰이라는 이 소년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이 강아지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지 몰라요”소년은 자신이 그 눈물과 그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웃의 고통 앞에 무관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최악의 고난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위로 하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위로자와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당신은 내 삶의 고난과 눈물을 이해하시며 나에게 다가오시는, 나의 위로자와 구원자가 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주간을 수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수난의 계절이 지나면, 우리 앞에 부활의 찬란한 아침이 열릴 것입니다. 수난의 어둠은 곧 지나갈 것입니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위로를 체험하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희망의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이웃들을 진실로 위로하며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당신에게 절망과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입술에서 절망을 이기는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리스도가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신다는 구원의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당신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보십니까?“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소서.”저는 당신만이 겪어야 하는 그 고난과 그 슬픔의 이유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서 분명히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위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 친구, 내 이웃,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차갑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고난을 받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호 2:15).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말씀하신 이 희망의 메시지를 붙들고 일어난다면, 당신은 이제 주님의 위로를 전하는 사람으로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주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오, 하나님. 오늘 내게 다가오는 이 어둠과 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주를 바라보고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소서”이 기도가 당신과 저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    목: 죽음이 있는 곳에 영생을. (7)

주    제: 영  생

성    경: 고린도후서 5장 1-10절

분    류: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논    지: 우리는 죽음 너머에 주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삶이 있다.

설교요약:

1.우리에게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

2.우리는 내세를 사모해야 한다.

3.우리가 내세를 사모하는 이유는 거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개역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언젠가 타임지에 “죽을 수 있는 권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낸시 쿠르덴이라는 32세의 여인이 7년 전에 교통 사고로 의식을 잃었는데, 그 후로 계속 초현대적인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식물 인간(植物人間)으로서 생명을 유지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어머니였던 조이스 쿠르덴이 얼마 전에 “내 딸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게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딸에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면서 미국의 대법원에 정식으로 제소(提訴)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는 식물 인간이 되어 누워 있는 자들이 약 일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기사에서는 “이런 초현대적인 의료 기구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기계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죽음을 연장시키는 기계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성도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마다 자신을 향해서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곤 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다가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 제가 설교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죽기 전에 유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참 다양합니다. 여기 아주 흥미로운 유언들이 몇 가지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어떤 영화 감독은 죽으면서 “내가 이제 죽는다. 레디 고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코메디언은 “내가 웃기려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다”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농담 중에 장의사가 죽으면서 “우리 집 매상은 이제 내가 올릴 차례다”라는 말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음, 그것의 위협은 사실 생명의 마지막 단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죽음의 사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인생을 가리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이 죽음을 느끼면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은 죽음의 위기들이 있었는지요? 그는 항해 중에 여러 차례 파선의 경험을 하면서 죽음을 대면했습니다. 옥중에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으면서, 여행 중에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겪으면서, 그가 고백한 대로 난치의 질병을 끌어안고 살면서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본문인 고린도후서 5장에 들어가기 전에, 4장 12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내가 사망에 처하는 이 고난을 받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생명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첫부분의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라는 고백은, 바울 사도가 생의 골짜기를 통해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4장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바울은 살아가면서 시시각각으로 사망의 위협을 받았지만 낙심치 아니한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인들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요소 중의 하나는 “죽음에 대면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가 드린 기도를 한 구절씩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기도문을 내용으로 한 찬양이 있는데, 끝 부분에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가사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誤譯)입니다. 이 가사를 그대로 부르게 되면, 마치 자기를 던지는 희생적인 삶이 영생의 조건인 것처럼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문에 보면 이 구절은 “우리가 죽음으로써 영원한 세계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길 수 있고 또 마땅히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 마지막 과에서는 죽음을 대면해서 승리의 고백을 했던 바울 사도의 예로 돌아가서 그 승리의 비결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짐


본문 1절을 보십시오.“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이 구절에서 “장막집”은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의 육체가 무너질 때 하늘에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바울 사도가 이 세상에 있었을 때 가졌던 직업은 천막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도 이 천막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천막은 보잘것 없었을 것입니다. 천막집, 즉 장막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깁고 깁고 또 깁지만, 낡아지고 낡아지다가 마침내는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천막이었습니다.


성지(聖地)를 방문해 보면, 1세기의 유대인들처럼 지금도 텐트를 짊어지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거주지를 옮기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낡아빠진 천막집,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집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꿈이 있다면, 이제 이 유랑의 삶을 끝내고 견고한 돌집에서 살아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바울의 말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개역 한글성경에는 장막집이나 영원한 집이나 똑같이 집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장막집은 문자 그대로 “텐트(tent)”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집에서의 집이라는 단어는 “빌딩(building)”이라는 의미입니다. 텐트와 빌딩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낡은 장막집 같은 우리의 육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보약도 먹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장막집이 낡아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장막집은 무너집니다. 또 무너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빨리 인지할  때, 우리는 거기에 맞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무너지게 될 장막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세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의 고백도 이 내세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질 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나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나는 안다”여기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확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확신을 표현할 때 “믿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고백한다고 해 봅시다.“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줄로 확실히 믿는다오”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라고 말한다면, 앞의 경우보다 목소리의 톤은 낮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강한 확신을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나는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이 땅에서 나의 삶이 다할 때, 구원받은 내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주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약속하신 그대로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확신, 그 확신 때문에  비록 내 육체가 무너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달려가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2.내세를 사모함


본문 2절을 보십시오.“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개역 한글성경에는 “오는”이라는 단어가 작은 글씨로 씌어 있습니다. 그 단어만 특별히 작은 것은, 그것이 성경 사본에 확실하게 기록된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저는 사본에 “오는”이라는 단어보다는 “하늘로부터 예비된”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C.S.루이스의 『악마의 편지』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사단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과 그 내세를 믿고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참으로 사모한다면, 그 내세를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바로 내세를 사모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하늘에 나를 위해 예비된 영원한 집이 있으니까 이 땅의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지”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과 고뇌는,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혹은 천국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으로 살아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갔던 그들의 삶의 승리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한번 신앙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 이후에 다시 옛 삶을 향해서 돌이키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욕심꾸러기들이 많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가진 신앙의 내면에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으로 내세를 믿고 내세를 사모한다면, 그들의 삶은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조금 큰 집에서 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집이 예비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검검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세가 이 세상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우리의 사랑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우리는 주님을 영접했을 때,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혹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적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6절 말씀도 그 의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2,000년 전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며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던 그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그런 열망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그렇다. 아직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6절 말씀에 이어 8절에서는 어떻게 고백하는지 보십시오.“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거기에 가면 그분과 함께 거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떤 부인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게 아주 인상깊었습니다.“목사님, 제 남편이 세상을 떠나간 후 천국이 가깝게 느껴져요. 천국이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미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사랑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천국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요”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내  찬송의 주제요 내 소원이요 내 믿음이요 내 사랑이신 주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사모하는 열정, 그곳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열망,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심판 날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함


본문 10절을 보십시오.“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여기에서 심판대라는 단어는 정죄나 형벌의 개념이 별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의미로는 “심판관 앞에”라는 말이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 희랍 사람들은 이 심판대라는 단어를 “베마”라고 불렀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한 종목의 경기가 끝난 후에 선수들은 심판관 앞에 섭니다. 그때 선수들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치른 경기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잘 달렸든 못 달렸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정도, 혹은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날의 평가도 다양할 것입니다. 삶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는 날,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인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면, 주님 앞에 서는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 큰아들 황이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아빠, 이번 학기는 전과목 다 <수>인 것 같아요”그러니까 옆에서 둘째가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아빠,  나는 <미>가 하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후 성적표를 받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자, 제 두 아들의  태도가 판이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표를 가져오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큰아들은 얼굴에서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둘째 아들은 안절부절  못합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그 때를 준비한 사람, 그에게 죽음이란 안식이고 위대한 결산이며 놀라운 승리의 절정입니다.


“주님, 최선을 다했습니다”이 말을 할 수 있는 인생은 얼마나 귀한 인생인지요?

우리는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기도의 메시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기(傳記) 작가가 프란시스의 최후에 대해 적은 내용을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프란시스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그의 친구였던 의사 조바니가 그를 방문합니다. 프란시스는 이 친구 의사를 벤데나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친구 벤데나떼여,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소?”벤데나떼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이렇게 대답합니다.『형제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병은 곧 물러갈 것입니다.』이에 프란시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내게 진실을 말해 주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쩍새가 아니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나의 소원이라오. 나는 성령의 은혜로, 살든지 죽든지 어느 것에나 만족할 만큼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오”『형제여, 그렇다면 내가 말하리이다. 의학상으로 볼 때에 형제의 병은 불치의 병이오. 금년 초가을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소.』몇 달 안 남은 것입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가련한 프란시스는 하나님을 향하듯 두 손을 치켜들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쁜 표정으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라. 오, 나의 잠의 죽음이여, 나의 잠의 죽음이여> 그는 육체의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 당신은 찬송을 받으소서. 이 땅에서 한번 삶을 누린 자라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이로다.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 그는 행복한 자가 아닌가?>”


죽음의 날이 드디어 그를 찾아왔습니다. 태양은 서산 마루에 마지막 석양을 물들였습니다. 주위는 적막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조용히 시편 142편에 자신의 곡조를 붙여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프란시스는 완전히 실명(失明)한 상태입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마지막 한번 더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의 영혼은 단 한 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조용히 움직이면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내 주여, 나의 전부여, 내 주여, 나의 사랑이여> 프란시스는 회개한 지 20년이 되던 해인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찬송하면서 죽어 갔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당신은 주님을 향해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하루 당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날을 준비하는 삶입니까?“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결산하는 준비를 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날 수많은 후회와 부끄럼 속에서 떠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이 기도가 당신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    목 : 나는 새벽별 이라. (8)

주    제 : 예수님

성    경 : 계22:16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기까지 인도하시고 상급을 주신다.

설교요약

1,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을 비치시는 빛이시다.

2, 그리스도인들의 복은 성화이다.

3,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를 성찰해 나가야 한다.

4, 우리는 천국 통치에 동참하게 된다.


개역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나 예수는 교회들에 관한 이런 일을 너희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었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또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니라.(kkjv)

I Jesus have sent mine angel to testify unto you these things in the churches. I am the root and the offspring of David, [and] the bright and morning star.


예수님은 성경에서 여러번 자기를 계시(啓示)하셨습니다.본문은 예수께서 친히「나는~이다」(I Am)라고 밝히신 마지막 말씀입니다.요한계시록 22장 16절을 보겠습니다.“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하시더라”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는“나는…광명한 새벽 별이라”(I Am…the bright and morning  star)는 선언입니다.“새벽 별”은 어둠을 추방하는 희망의 상징입니다.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둠은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박해와 고난의 어둠 : 주께서는 요한과 박해 받고 있는 초대 교회를 향해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이 말씀은 어둠 속에 있었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둘째/역사의 어둠 :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 세상과 역사 속의 종말론적인 상황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점점 깊어가는 죄악의  밤! 그 역사 속의 죄악의 밤과 그 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크로즈업(close-up)되어, 한 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이런 모습들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 요한계시록입니다.계시록은 역사의 어두운 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또 이 밤을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도 보여주고 있습니다.우리는 末世之末을 앞둔 이 마지막 고비를 외줄을 타듯 걸어가고 있습니다.오늘날 세계는 상당한 화해의 분위기에 젖어 있고, 역사에 서광이 비췰 듯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물론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역사는 낙관적인 상태로만 펼쳐지지는 않을 것입니다.평화와 화해에 대한 우리의 큰 기대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더욱 어두워질 것입니다.그러나 이 어두워져 가는 역사 속에서도 희망의 새벽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그 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주께서는 성경 최후의 계시를 닫으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새벽 별>이라는 표현은 성경 계시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는 말입니다.이 표현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8).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에서도 가장 죄악이 많았던 도시가 이두아디라라는 도시였습니다.깊은 죄악에 빠진 어두운 도성 두아디라! 2장 24절을 보십시오.“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두아디라 도시는 사단의 깊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던 곳입니다.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회의 어둠, 문화의 어둠, 역사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 세대의 어둠을 이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주께서 주셨던 약속 중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그들에게 있어서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그리스도가 승리의 원천이십니다.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주님 자신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이렇게 시작되었던 요한계시록의 계시는“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 마지막 장(章)을 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새벽 별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먼저 나오는 것은 <다윗의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예언된 그대로 다윗의 뿌리로 오셨습니다.아마도 이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더욱 강조한 표현으로 보여집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로 오셔서 구세주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광명한 새벽 별이셨던 것입니다.그분은 역사 최후의 어두움과 그에 대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이제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질 희망의 새로운 날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첫번째 오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받는 놀라운 희망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 희망은 완성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저녁 별이 하루의 끝이라면,새벽 별은 새 날의 시작일 것입니다.이 희망의 계시, 희망의 메시지로 계시록은 닫혀집니다.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역사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증언합니다.그러나 성경은 결코 절망의 책이 아닙니다.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단순히 심판의 날만이 아닙니다.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소망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희망의 새 날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광명한 새벽 별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희망입니까? 이것은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우리의 구원이 완성됨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희망인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장8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그런데 22장 13절에 또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나옵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14절의 말씀이 나옵니다.“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화(聖化)가 완성되는 날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열망이 있다면, 우리의  인격과 품성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그런데 언제 그렇게 완성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우리가 완전히 성화되는 날입니다.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을 수 있는 이 성화 완성의 사건은「영화」(榮化)라고도 합니다.주님을 닮아감으로써 거룩해지는 과정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이 1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마지막 복, 즉 주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우리의 거룩함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거룩한 자가 되어 생명나무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고, 그뿐 아니라 문들을 통해서 영원한 성(城)인 우리들의 본향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천국은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그러나 거룩하게 되어지는 성화(聖化)는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갖게 한다는 말씀입니다.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이 나옵니다.


첫번째 복은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두번째 복은 14장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自今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세 번째 복은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네번째 복은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다섯번째 복은 20장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여섯번째 복은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일곱번째 복은 22장 14절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은 무서운 재앙의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담긴 책입니다.계시록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마지막도 복으로 마무리됩니다.그리고 마지막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요한계시록에 복이 전반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숫자는“일곱”입니다.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복을 상징합니다.22장 14절의 마지막 복은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관한 상징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는 순간에 죄사함을 받습니다.그것이 성화의 시작입니다.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단순한 경건의 노력이나 도덕적인 결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그리고 최선의 노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어떤 도덕적인 결단도 우리를 구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우리가 거듭날 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씻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구원의 사건은 우리에게 성화의 시작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 메시지 안에서는, 우리의 죄 사함의 사건과 그 이후에 거룩해져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장 5절을 보십시오.“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이것이 구원의 경험이고 성화의 시작입니다.그 다음에 19장 8절을  보십시오.19장은 이제 심판의 날이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는 온전히 새로운 옷을 입습니다.이 새로움의 시작은 구원받은 순간입니다.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된 삶을 시작했습니다.이렇게 우리가 해방된 삶을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주님의 의(義)가 온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그때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의 새로운 옷을 입게 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루마기 빠는 일을 계속해 해야 합니다.여기에서 “두루마기를 빤다”고 하는 것은 한 번만 빤다는 말이 아닙니다.계속해서 빠는 것을 의미합니다.“두루마기를(계속해서)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계 22:14).성경에 “너희가 옛 사람을 벗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이것도 계속해서 벗으라는 말입니다.“새 사람을 입으라”도 계속해서 입으라는 말입니다.성화의 과정은 단회적(單回的) 사건이 아닙니다.구원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우리가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말씀을 통해서 그분과 계속 교제할 때 가능합니다.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계속하여 빠는 것입니다.이런 성화의 과정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됩니다 그때 우리는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얻습니다.그러면 이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성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천성(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그러면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번제단을 거쳐서)로 말미암아 해결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계속적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거룩함을 완성할 것입니다.그리고 죄가 용납되지 아니하고 죄가 허용되지 아니하는 천성에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날에는 내가 온전히 변화되어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이제 다시는 죄악과의 갈등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하고 완성된, 생명수로 씻기움을 받은 後에 세마포를 입고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그러기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그날이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2.우리가 상급을 받게 됨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심판과 최후의 전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러나 그날이  우리의 희망인 것은 우리가 상급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간혹 상에 대해서 열정을 잃어버린 분들을 보게 되는데, 아마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당신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또 자녀들을 보십시오.상 받았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빠, 아빠! 나 상 받았어요.미술 대회에서 <최고상>을  탔어요!” 하면서 자랑스런 마음으로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순수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상급을 약속하시며 우리의 거룩한 삶을 격려하십니다.요한계시록 22장 12절을 보십시오“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가장 작은 수고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내 수고를 알아 주지 않아서 슬피 우는 외로움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주께서는 다 갚아 주십니다.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린 사람들은 그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당신을 아십니다.당신의 수고를 기억하십니다.이름 모를 소자(小子)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잔의 친절을 베푼  것까지 잊지 않고 그 보상을 약속하신 주님! 재림의 그 날은 그리스도인이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체상이 아닙니다.개인 각자에게 주는 상입니다.당신의 행위대로  주실 것입니다.구원은 행위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오직 믿음으로만 받습니다.그러나 상급은 행위대로 받습니다.그날에는 상급이 없어서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생각나십니까? 그날에 주님이 우리가 어떤 상급을 받을만한가를 시험해 볼 것이라는 고린도전서 3장 말씀 말입니다.3장 10절을 보십시오.“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그리스도인의 삶은 집을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11절을 보십시오“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건축의 터는 예수님이십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12절).예수님을 기초로,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 구원을 받습니다.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같지 않습니다.구원을 받아 놓고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이것을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집짓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다 집을 짓습니다.어떤 사람은 금으로 은으로 보석으로 짓고,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습니다.


계속해서 13절 말씀을 보십시오.“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13절).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그 결과를 밝히시겠다는 말씀입니다.그러면 무엇으로 밝혀내십니까? 역시 13절입니다.“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功力)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우리 인생의 집에다 불을 질러 보십시오.어느 집이 제일 먼저 타겠습니까? 나무, 풀, 짚 등을 재료로 하여 지은 집은 얼마나 잘 타겠습니까? 그러나 금, 은, 보석으로 지어진 집들은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계속 14절 이하를 보십시오.“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4,15절).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 “해”(害)가 어떤 해인지는 정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하여간 해를 받는 것만은 분명합니다.성경이 거기까지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이것에 대해서 상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이것을 지나치게 끌고 나가면  카톨릭의 「연옥(煉獄)의 교리」까지 비약될 수도 있습니다.그것은 위험한 해석입니다.솔직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그 말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구원은 우리의 공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왜 그렇습니까? 지푸라기 같은 혹은 거지 같은 신앙 생활을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공력은 다 불에 타도 그 터만은 남습니다.그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은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없으면 부끄러울 것입니다.해(害)가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 공력이 불에 타지 않고 드러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상을 약속하십니다.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을 위해서 일했던 우리들에게 주의 상급이 주어지는 그 순간이 꼭 오고야 맙니다.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내가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나를 위해서 했던 그 모든 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드린 그 모든 수고를 내가 안다!”이 상급을 받는 날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두려워진다면 그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받을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참으로 큰일입니다.주께서 상급을 주실 그날에 당신은 어떤 상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급은 면류관입니다.옛날 왕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최대 영광의 상징은 면류관이었습니다.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충성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면류관! 성경에는 다섯 가지의 면류관이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9장 25절 이하에 나오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과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 20절에 나오는“기쁨의 면류관”과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나오는“생명의 면류관”과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오는“의의  면류관”,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2절 이하에 나오는 “영광의 면류관”이 그것입니다.예전에는 부흥 목사님들이 설교하면서, 예수를 시원찮게 믿으면 나중에 “개털 모자”를 쓰게 될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만, 성경에 개털 모자는 없습니다.하여간 이 다섯 가지 면류관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각기 다른 수고에 대한 상급의 약속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썩지 아니할 면류관 : 절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주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잘 관리하며 철저히  절제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2)기쁨의 면류관 : 영혼을 구원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주님 앞에 서는 날, 너희가 전도했던 사람들이 너희에게 기쁨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이 아니겠느냐?”우리는 전도한 사람들을 천국에서 다 만납니다.우리는 기쁨의 면류관이라는 것을 직접 머리에 쓰게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해도 좋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그날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주님! 저 사람이 제가 전도한 사람입니다”상상만 해도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그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어떤 영혼이 구원받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려니와, 그 영혼을 천국에서 만나는 기쁨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사실 지금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전도를 받아 구원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사건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그러나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엔 전도 받았던 그들이 “형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영원토록 절을 할지도 모릅니다.이 기쁨의 면류관을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면 누구나 맛보게 됩니다.


3)생명의 면류관 :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여 승리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4)의의 면류관 :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8).우리는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그러나 의의 면류관은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위한 몫입니다.


5)영광의 면류관 :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 무리를 섬긴 사역자들에게 주어집니다.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과 눈물을 흘리며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 마지막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왜 기다립니까? 상급의 날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날에 받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사람은 그날이 기다려지겠습니까? 부끄럽고 죄송하고 어쩔 줄 몰라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모습 그대로 이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그 상급의 날, 소망의 날을 위하여!


3.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저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주님의 공생애 첫번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주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왕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  왕의 통치 능력을 경험합니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그러나 이 땅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왕국이  싸우고 있습니다.이 싸움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날에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그때 사단의 왕국은 완전히 깨지고 부숴지고 멸망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할 때 누구나 상투적으로 가장 많이 들먹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하나는“정의”입니다.“정의 사회 구현”등은 빠지지  않는 공약입니다.그리고 또 하나는“평화”입니다.“평화를 위해 머슴이 되어  기여하겠다”는 것입니다.정의와 평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표현 중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두 단어는 무엇입니까? 역시 “정의와 평화”입니다.하나님 나라는 정의의 나라요, 평화의 나라입니다.즉,“정의가 온전히 실현된 평화로운 나라”입니다.지금 왜 정치가들마다 정의와 평화를 그렇게 부르짖습니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것이 미끼요 문제입니다.“내가  정의 사회를 건설하겠소! 내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겠소”하고 목청껏 외쳐대지만 공수표입니다.왜냐하면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이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그러므로 누구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나라가 임하옵시며!”이것은 아직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맛보지 못한 인류의 숙원이요, 몸부림입니다.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찬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요한계시록의  계시 절정에서 약속된 이 메시지를 보십시오.11장 15절입니다.“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때 천사가 선언합니다.드디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온전히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에서는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는 모습들이 예언됩니다. 또 22장에서는 그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조명합니다.5절을  보십시오.“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곳, 우리도 왕 노릇 하며 맘껏 누리는 다시는 밤이 없는 그 나라! 이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보면, 정의와 평화라는 단어가  이 나라의 특성을 얼마나 잘 말해주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이사야서 9장  6절입니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평화의  왕자!>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입니다.


계속되는 7절을 보십시오.“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이 <평화의 임금> 이 <공평과 정의> 로 그 나라를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평화와 정의, 이 두 가지는 그분과 그 나라의 특성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이사야서 11장 4절 이하를 보면, 이새라는 사람의 가계(家系)를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어떤 사역을 이룰 것인가를 말씀합니다.“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4,5절).공의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얼마나 잘 상징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계속되는 이사야서 11장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6절).당신 집의 꼬마들이 사자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이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분의 통치를 상징하는 가장 주요한 두 단어는 바로 <공의(정의)와  평화> 입니다.


이사야서 65장 17절을 보십시오.“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17절).그분이 창조하실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19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19,20절).죽음이 없는 나라! 저주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사야서 65장 21절 이하를 보십시오.“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21,22절).정의의 나라입니다.내가 땀흘려 수고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남이 가로채서 먹는다면 그곳은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한 곳입니다.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불공평 때문일 것입니다.역사도 증명하듯이 사람들은 이 불의에 울면서 정의를 구합니다.한 지도자가 일어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 우리는 그에게 희망을 겁니다.그가 평화를 약속할 때마다 우리는 이 평화의 꿈에 젖습니다.정의와 평화는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평화와 정의의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그러나 너무 낙관하지는 마십시오.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 땅에 완전한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나라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이 땅에 난무하는 불의와 불공평을 바라보면서, 평화가 짓밟히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성경의 마지막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그날에야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에게 희망의 사건인 것입니다.


4.우리가 천국 통치에 동참케 됨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우리가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국회의원이 되려고 지나치게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물론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인 정치 지도자가 많이 필요합니다.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제시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을 필요로 합니다.그러나 이 놀라운 사실에 주목하십시오.주께서 다시 오셔서  주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그 나라를 함께  통치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요한계시록 22장 5절을 보십시오.“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서 “저희”는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그 속에 저와 당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9장 27,28절을  보십시오.27절은 28절의 배경입니다.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이런 말입니다.“선생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른 줄 아십니까? 주일에 낚시도 못하고, 저녁 예배까지 참석해야 하고, 전도하는 데 내 시간을 바치고, 봉사에 힘썼습니다”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 세상이 새롭게 되는 그 때가 옵니다.그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은 아주 흥미로운 장입니다.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고발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1절부터 보십시오.“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성도들끼리 판단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지, 그 문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서 서로 헐뜯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그러면서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장차 우리 주님이 최후의 심판관으로 오셔서 역사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 주님을 수종들면서 우리도 함께 세상을 판단할 것입니다.우리는 이 역사와 이 세상과 온 인류를 심판할 자리에 당당히  앉을 사람들입니다.그런데 그리스도인끼리 사소한 문제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의 법정에 호소해서야 되겠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주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왕 노릇 할 귀한 존재들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9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11절).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으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당장에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초림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지는 않으셨습니다.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지상을 통치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므나의 비유입니다.누가복음 19장12절 이하를 보십시오.“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12,13절).여기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내가 다시 와서 나의 왕국을 이룰 때까지 너희는 내가 맡긴 것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라”므나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유사합니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왕이 돌아왔습니다.16,17절을  보겠습니다.“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이 상급이 재미있습니다.한 도시의 시장이 아니라, 열 개 도시의  시장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다.계속되는 말씀입니다.“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18-21절).우리가 이 비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주시는 상급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냥 면류관만 씌워주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이 비유는 그 나라에 이루어질 놀라운 사실에 관한 예시적이며 암시적인 사건입니다.우리는 면류관을 받아 멋있게 쓰고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의 위치에  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천국에 가면 심심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금부터 걱정합니다.그러나 천국은 심심한 나라가 아닙니다.천국에도 정치가  있습니다.그러나 천국에는 세상에서와 같이 권모술수가 판치는 불의한 정치는 없습니다.왜냐하면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당신은 그 나라에서 참으로 멋진 정치가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그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이 놀라운 꿈, 주님과 함께 시장도 하고 도지사도 하는 삶! 그렇다고 너무 세속적인 욕망으로 변질시키지는 마십시오.우리가 아직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천국은 거룩한 정치가 있는 나라임이 분명합니다.공법(公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 위대한 나라! 불의가 전혀 없는 나라! 탐욕이 조금도 없는 나라! 뇌물이 조금도 없는 정의로운 샬롬의 나라! 이 천국의 비전에 눈을 뜬 사람마다 사도 요한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희망의 사건입니까?


첫째는,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상급을 받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징조가 보입니다.그분의 재림 징조는 새로운 세상, 즉 영원한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발걸음 소리입니다.새벽 별이신 주님이!  (아멘 감사해요)



제    목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9)

주    제 : 예수님

성    경 : 계1:8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시작과 마침이시며 지금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 하신다.

설교요약 

1, 예수님이 역사의 시작이요 마침이시다.

2, 그 분은 개개인의 삶의 주인이시다.

3, 역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4, 종국에는 우리를 승리케 하신다.


개역 계 1:8“주(主)하나님이 가라사대「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어떤 일이든지 그 처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처음에 일을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그 일의 태도와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처럼, 종종 우리는 일의 처음은 좋았으나 마지막이 흐지부지한 경우들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마치시겠다는 선언은 그분이 처음과 마지막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라”(Iam Alpha and Omega).“알파”(A)는 헬라어의 첫 글자이고,<오메가>(Ψ)는 마지막 글자입니다.우리는“하나님은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우리의 기도 가운데에서도“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이시여”라고 주님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 기자는 이 말씀을 어떤 맥락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의 그 구체적인 의미를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역사의 주(主)가 되시는 그리스도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선언입니다.우리는 이 날을 <역사 완성의 날> 이라고 부릅니다.성경의 기자들은 이 날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 이라고 말합니다.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날> (Victory day) 이기도 합니다.우리가 D-day 혹은 V-day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원래 제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말입니다.즉,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던 노르만디 상륙 작전의 개시일을 가리켜서 D-day라고 하고,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승 확정일을 가리켜서 V-day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초림(初臨)이 D-day였다면, 그분의 재림(再臨)은 그리스도인의 V-day라고 할 수 있습니다.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 하심으로써 속죄의 길을 여셨는데, 이 구원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승리와 사단의 결정적인 패망을 약속한 것입니다.그분은 다시 오셔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실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가리켜서 역사의 극점(極點)이라고 말합니다.역사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역사가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오심도 재림의 희망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그러나 이 두 사건은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분수령입니다.하나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재림은 바로 그 완성의 날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그 재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재림의 날이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지막 역사의 파노라마(panorama)를 전개하는 요한계시록의 첫번째 장(章)에서 선포됩니다.“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7절).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章)인 22장 12절 이하를 보십시오“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12,13절).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 성경 최후의 장을 닫으면서 다시  한번 알파와 오메가이신 바로 그분의 오심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역사의 마지막 오메가! 최후의 완성을 위해서 그분께서 오십니다 그날은 성도들에게 상급이  내려지는 날입니다.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이 결산되는 날입니다.한 번 더 그 사실이 선언되면서 하나님 말씀의 마지막 장이 닫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묵시록을 기록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저 유명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였습니다.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고 노골적으로 황제 숭배가 강요된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던 민족들은 모두 다 이도미티아누스 상(像)을 향하여 “시이저(Caesar/황제)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강요 받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그들은 황제 숭배 뿐만아니라, 이 고백도 할 수 없었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예수님만이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그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있습니까? “시이저는 주님이 아닙니다”라는 의미입니다.시이저가 주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이 고백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회에서 추방되고, 순교를 당하고, 말할 수 없는 위협을 당하며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그때에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 묵시록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묵시록의 첫 장이 열리면서 선포된 말씀을 주목하십시오.“주(主)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이 선언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십시오.이 말씀은 단순히 <그분이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시다> 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분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역사는 바로 그분의 이야기입니다.<역사> 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History」는 「His  Story」, 즉  <그분의 이야기>입니다.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본문 8절을 다시 보십시오.“주(主)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여기에서는 단순히 <주님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그분이 창조자요 마지막 완성자가 될 것이다>라는 사실만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이 고백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강조점은  처음을 처음 되게 하시고 마지막을 마지막 되게 하실 그분이 지금도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그분은 이천 년 전에만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를 통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울 사도의 입술을 빌려서 고백된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이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여기에서 중요한 구절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라는 것입니다.만물은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탱되고 있습니다.그분은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섭리자요, 진행자요, 주관자이십니다.그 다음에 강조된 것은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입니다.만물은 결국  주님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주님에게서 끝날 것입니다.로마서 11장을 공부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이 11장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그들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시고 특별하게 섭리하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불순종했습니다.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버림을  받고 만 것은 아닙니다.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5절).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만큼 전파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처음 역사를 시작하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의 역사(役事)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그러나 언젠가는 그들 가운데 영적인 회복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그것은 역사의 완성이 매우 가깝다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예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근래에 유대인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것을  굉장히 주목합니다.아직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복음이 유대인 가운데 확산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그러나 이스라엘이 거절하자, 이방 나라들인 전 세계로 그리스도가 전파 되었습니다.서서히 역사의 시침(時針)은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그리하여 역사는 마침내 종결될 것입니다.이스라엘을 중심으로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던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아니 왜 선민(選民)인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 믿지? 왜 그리스도를 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복음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만 꽃피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버림을 받았단 말인가?”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드디어 하나님의 역사 경륜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바울과 한가지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主)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역사를 경륜하시는 주님! 역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 아래 있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 역사 속에 과연 주님이 일하실까? 주님이 주관 하신다면 이런 환난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주여! 당신은 어디에 계시나이까?”라는 하소연이 리스도인들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고 있었을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들어 이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라.처음과 나중이라.시작과 끝이라!”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2.개개인의 삶의 주(主)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 개개인의 삶의 주가  되십니다.요한계시록 1장의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는 말씀이, 단순히 재림의 선언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아님을 주목하십시오.17절입니다.“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이 말씀은 주께서 묵시록의 기자였던 사도 요한에게 주신 말씀입니다.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졌습니다.그 엄위하시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분의 영광과 거룩함 앞에  사람들은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그때 주께서 사도 요한에게 손을 얹고 말씀하십니다.“두려워 말라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니”당시 사도 요한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곳이 어디입니까? 밧모 섬입니다.요한은 밧모라는 섬에 유배(流配)당했던 것입니다.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밧모 섬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사도 요한! 이 고도(孤雁)에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단절된 그의 아픔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도  요한에게도 이런 마음이 들었을지 모릅니다.“내 인생이 이게 전부인가? 이 외딴 섬에서 이대로 끝나고 마는것은 아닌가?”그때 자신을 보이시며 나타나신 주님! 그분이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이것은 만물에 대한 그분의 선포일 뿐만 아니라 요한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요한의 인생 속에서도 그분은 처음과 나중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네 인생의 시작이 나였느니라.네 인생의 마지막도 나이니라.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나는 처음과 나중이다”하나님께서는 역사(歷史)속에서 한 개인을 섭리하시면서 동시에 이 개인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 포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역사는 나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역사에 대한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순환론적 역사관 : 이 역사관은 “역사는 특별한 시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돌고도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즉, 역사는 마치 원처럼 순환한다는 주장으로, 인도교나 불교처럼 윤회설(輪廻說)을 주장하는 종교나 이런 문화권의 배경 속에서 주로 주장되는 이론입니다.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만약 우리가 역사를 순환론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돌고돌아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따라서 지금 안 되면 먼 훗날 후생(後生)에 다시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급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그래서 이런 역사관을 받아들인 민족이나 나라들은 대개 그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퇴행(退行)하는 것입니다.이것은 역사관 자체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삶 속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실존적 역사관 :“우리는 역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역사관을 실존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역사관은 하나의 점으로 나타낼수 있습니다.즉, 역사는 점과 같이 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물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과거를 묻지 말라는 식입니다.단지 살고 있을 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이렇듯 우리가 역사를 실존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되겠습니까? 아마 쾌락주의적 인생관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인 역사관 속에서 사람들은 다만 찰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즐길까?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내손에 움켜쥘 수 있을까? 이것만이 문제일 따름입니다.이 역사관도 우리에게 건강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목적론적 역사관(종말론적 역사관,기독교적  역사관) :“역사는 어떤 시작점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라는 역사관입니다.순환론적 역사관을 원(圓)으로,실존적 역사관을 점(點)으로 표시한다면, 목적론적 역사관은 선(線)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선에는 반드시 시작하는 점과 끝나는 점이 있습니다.어디인가에서 시작하여 분명한 끝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시간은 분명한 시작이 있습니다.그리고 그 시간은 분명히 끝날 것입니다.하지만 성경의 기독교적 역사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그냥 흘러만 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흘러가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이것을 종말론적인 역사관이라고도 합니다.이것은 역사에만 국한(局限)되지 않습니다.이 역사 속에 태어난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분명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이 말은 오늘이라는 순간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인생은 다시 연습할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것입니다.우리 인생은 장난처럼 살아버리기에는 너무나 엄숙하고 소중합니다.우리는 한 번 밖에는 오지 않는 시간을 걸어가고 있습니다.그런데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고 이 역사 속에 태어나게 하셔서,한 순간의 삶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역사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을 향한 삶 속에도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목적론적 역사관은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합니다.인생에는 목적이 있습니다.삶에는 의미가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속에도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사도 요한은 지금 고독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인간 관계에서 철저히 단절되어 있고 전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감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그때 주께서 요한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두려워 말라 내가 처음과 나중이다!”이것이 사도 요한에게 어떤 감회와 어떤 각성을 불러일으켰겠습니까? 아마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아, 이 밧모 섬의 주인도 주님이시구나! 이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그분은  여전히 내 삶의 주님이시구나!” 개인의 삶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이 오늘 당신의 삶 속에도 주인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고통스럽고 짜증나는 오늘의 삶도 목적과 의미가 있어서 허용하시는 줄을 믿으십니까? 환난 중에 도우시는 그리스도!


본문 9절을 보십시오.“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자라」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밧모섬의 사건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이었음을 사도 요한은 고백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고난이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언제까지 이 귀양살이를 계속해야 하나?  나에게도 내일이 있는가? 어느 한 순간에 여기서 내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많은 두려움이 사도 요한의 마음과 영혼을 붙잡고 있었을 것입니다.그때 누군가가 다가옵니다.눈을 들어보니 너무나 놀라운 모습입니다.정신을 잃고 엎드러져 까무러칠 정도가 되었습니다.너무나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는 더욱 두려워하며 꼬꾸라지고 만 것입니다이 장면은 이사야가 여호와를 뵙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그 순간 주님 손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며 자애로운 사랑의 음성이 들립니다.“두려워 말라!”주님이십니다.아, 나의 주님! 벅찬 가슴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모든 두려움과 회한이 사라지고 가슴 뭉클한 가운데 복받치는 기쁨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환난 중에 도우시는 주님!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것은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배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몇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이사야서 48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12,13절).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그분은 어떤 분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분은 창조자이십니다.“나는 처음이요”라는 말씀은 언제나 그분이 창조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이사야서 44장 6절을 보십시오.“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여기에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계1:1,8).예수님이 창조자이십니다.그뿐 아니라 그분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십니다.그 백성이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지 못했을 때 대가(代價)를 지불하고 그들을 사서, 다시 제 자리에 있게 하신 구속자이신 하나님! 이  하나님께 사용된 독특한 표현들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됩니다.사도 요한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오신 그분이 창조자요, 구속자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주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을 때 제가 기도하며 “두려워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될 것입니다.이렇듯 사람들의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창조자요 구속자요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제 요한계시록 1장 17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7,18절).그분이 창조자이고  구속자이고 왕이라 해도 현재 그분이 돌아가셨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여기고 살아갈 때도 있지않습니까? 절망과 공포와 낙심과 두려움 속에 있던 요한에게 다가오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나는 살아 있는 자니라! 나는 지금도 역사(役事)할 수가 있느니라”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선포이겠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합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주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주님은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신명기 32장 4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모세를 통해 마지막으로 계시하신 유언 같은 메시지입니다.“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하나님은 얼마 동안 살아계십니까? 영원입니다.우리말 개역 성경에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문법대로 하면 “영원한 삶을 두고” 맹세한다 입니다.그런데 피조물인 인간들이 너무 자주  이 사실을 망각하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선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나의  영원한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도 맹세하십니다.사람들은 맹세할 때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를 걸고 맹세합니다.“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너희가 나는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늘은 진실하니까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히브리서 6장 13절 이하에는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13,14절).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습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은  맹세하실때 자신을 걸고 맹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그래서 “나의 영원한 삶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신 것입니다.환란과 고통 속에서 도우시는 그리스도! 이  살아계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정말 나를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3.궁극적으로 승리케 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 승리자가 되십니다.요한계시록 1장 18절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분이 “열쇠”를 가졌다고 했습니다.“…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졌노니」” 음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그러나 제일 단순하고도 중요한 평면적인 뜻은 죽은 사람이  거하는 곳입니다.인생의 마지막은 무덤입니다.죽음입니다.무덤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마다 고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것이 종말인가? 정말 그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인가?” 죽음은 우리를 한없는 고독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자기를 덮쳐 오고 있는 것을  밧모 섬에서 느꼈을지 모릅니다.“이렇게 끝나야 하는가? 무덤이 내 인생의 결산인가?”그때에 요한에게 나타나서 하신 주님의 말씀!“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도 내가 쥐고 있느니라” 죽음의 영역,  아니 그 다음의 영역까지도 지배하시는 분! 무덤 이편에서만 살아 있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덤 저 건너 편에서까지도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 고백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은 복음 성가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를 자주 부를 것입니다.그 후렴구처럼 그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는 기쁨으로 나의 미래를 직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사랑의 주 날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저는 바울 사도의 메시지를 평생토록 제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로마서 8장  31절부터 보십시오.“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訟事)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1-33절).하늘과 땅의 심판자요, 창조자요, 주인이신 바로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니라”(34절).그렇습니다.주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이 창조자, 구속자(救贖者), 왕이신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主)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절).이 얼마나 확고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보장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마지막 승리자가 되십니다.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잠깐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말입니다.“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참으로 아멘입니다!)



제    목 : 나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다. (10)

주    제 : 예수님

성    경 : 막14:60-65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설교요약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 하셨다.

2,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해방자의 길을 가지 않으셨다.

3, 빌라도는 시류에 영합했다.

4, 제사장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예수님을 처형했다.


개역 막 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는~이다」(I Am)라고 일곱 가지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셨습니다.그런데 성경에는 이 일곱 가지의 자기 계시 선언 이외에도,예수님이 간접적으로 자신을 밝히신 부분이 있습니다.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사흘 동안에 자신에 대해 밝히신 세 부분이 있는데,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가야바의 반응이 각각 포함되어 있습니다.본문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지금까지 우리가 본 예수님의 「나는~이다」라는 말씀의 핵심은“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라는 선언이었습니다.이 권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이 땅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이 응답의 문제는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즉,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실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가야바는, 예수께서 하나님 되심의 권위를 주장하셨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우리는 이들의 반응 속에서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제 이 세 경우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유다의 반응


요한복음 18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1절).이 구절에서 <동산> 은 겟세마네 동산을 가리킵니다.“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2-5절).이 말씀을  얼른 읽으면,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 잡아갔다는 정도로만  넘어가기 쉽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을 좀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때는 밤이어서, 등(燈)과 홰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이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누구를 찾느냐?”『나사렛 예수를 찾소.』 이때 예수께서 권위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내로라”(I AM).이  “내로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나 다”라고 하는 말처럼 대단히 평범하게 들릴지 모릅니다.그러나 이것은 매우 당당한 대답입니다.뿐만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예수께서 자기의 정체를 나타내신 이 말씀 앞에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이것은 보통의 반응이 아닙니다.땅에 사정없이 엎드러질 정도로  기절초풍하는 장면입니다.도대체 그 말씀이 그리도 대단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내로라”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서 “에고 에이미”(������Δβ´ψ  δ������θλθ)라는 두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영어로는 “I am” 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만 쓰여지던 단어 입니다.모세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나는 스스로 <있어서> 있는 자다”(「I AM」 THAT I AM)라고 대답하셨습니다.이때 쓰인 “I AM”의 표현을 지금 예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지금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나사렛 예수가 어디 있소?”이때 예수님이 그냥 “내가 여기 있다” 정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인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그러니까 이들이 깜짝  놀라 몸둘 바를 모르고 땅에 엎드러진 것입니다.“나는 야훼다.여호와 하나님이다”이것은 어마어마한 선언입니다.


유다의  배신


지금 유다는 왜 이 동산까지 올라왔습니까?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입니다.물론  돈에 대한 욕심도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더 중요한 동기는 아마  자기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본래 가룟 유다는 셀롯인 출신으로 열심당원이었습니다.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족주의자입니다.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그 민족을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가룟 유다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8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기대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가룟 유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우선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여기에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이분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다니!”그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사람들은 전부터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등의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 왔고, 그분이 메시야일 것이라는 기대도 했었습니다.그러나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모든 열망을 결정적으로 부풀어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0절부터 보십시오.“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절).살아난 나사로를 죽일려고 모의했습니다.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절)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12절부터는 장면이  바뀝니다.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入城)사건입니다.“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12절).무리들이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이것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 다음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그냥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죽은 사람을 살리신 자로서 예루살렘에 오시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그 배경을 오늘의 현실로 옮겨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쇼가 아니라,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리신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신다면 교회가 미어 터지도록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왔습니다.“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절).“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16,17절).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할 때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했습니다.이 말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압제하에 있었습니다.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생활을 했듯이 말입니다.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열심당원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분께 당연히 정치적인 회복을 기대할 수있지 않았겠습니까? 피끓는 열심당원이었던 유다의 마음 속에도 정치적인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그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세주로서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그들이 요구하는 메시야는 구세주가 아니라 혁명가였습니다.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자기 민족을 그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인 메시야, 정치적인 혁명가를 원했던 것입니다.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습니다.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마음만 먹으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였습니다.군중들은 애국심에 불타 있었고 정치적인 메시야가 불만 당기면, 금새 사방으로 쏟아져나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 그런 판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기회를 무너뜨리셨습니다.민족의 영웅이 될 정치적 메시야의 길을 가시지 않습니다.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부각시키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분은 민중 봉기에 의한 혁명가의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세주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예수님은 선동된 사람들의 응집된 힘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시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그러더니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힘없이 내어 놓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매우 실망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제자들입니다.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열심당원 출신의 사람들이 더 낙심했을 것입니다.시므온도 그랬겠지만, 가룟 유다는 더욱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대부분의 제자들이 정치적 메시야像에 계속 연연해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모두들 다시 모여들었습니다.사도행전 1장 6절에 무명(無名)의 한 제자가 주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우리는 이 말에서 “그때는 안 하셨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찬스가 왔어, 부활하신 그분이 이제는 정말 뭔가를 하시겠지”라는 정치적 메시야像에 대해 끈끈하고도 집요한 기대가 제자들에게 여전히 팽배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그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하여간 가룟 유다는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당신이 여호와라면 이 민족을 이 수치와 굴욕에서  해방하셔야 합니다”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그게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을 이용한  민족 해방의 꿈은 멀어져만 갔습니다.치밀어오르는 배신감을 억제키 어려웠으나,  아직은 실낱 같은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는지 모릅니다.“예수를 팔자.막바지의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혹시 비장의 카드를 던질지도 모르지 않는가!”이런 생각으로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 정치가들과 흥정했습니다.그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군병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왔을 것입니다.군병들이 묻습니다.“나사렛 예수가  누구요?”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입니까? 예수께서 한 번 더 분명하게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계시하셨습니다.가룟 유다가 생각한 대로,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 같습니다.잠시 긴장하며 기대 가운데 숨을 죽입니다.이제야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순순히 잡혀가셨습니다.혁명이 아닌 죽음의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대하는 그 방법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특권이 없습니다.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지만, 반드시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그 능력을 행사하시지는 않습니다.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도 역시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입니다.십자가를 부수고  로마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모습만이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놀랍게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감동시키며 세계를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예수님은 가장 弱한 자로 오신 가장 강한 하나님이십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십자군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힘으로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게 아닙니다.외적인 힘은 절대의 부패를 낳습니다.예수님은 오히려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기 원하셨습니다.자신을 못박음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 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혈기 왕성한 민족주의자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운동권 출신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입니다.유다는 이 사건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그가 주님의 손등에 입맞추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떠나갑니다.하지만 주님은 이 제자를 붙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아마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아픔으로, 사랑했던 제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주님이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했지만 이 마지막 기회 앞에서도 회개하기를 거절했던 유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멸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 유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 앞으로 달려오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그분이 자신의 깨어진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그러나 신앙 생활의 여정 중에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돌연히 신(神)의 무의미를 선포하고 내팽개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들이 바로 유다의 후손입니다.당신은 주님께 어떤 기대를 걸고 계십니까? 혹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유다와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빌라도의 반응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된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들어보겠습니다.빌라도는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이었습니다.“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官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33,34절).예수님의 질문이 아주 흥미롭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5,36절).


“네가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대답은“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였습니다.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정치 왕국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만일 예수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기 원하셨다면, 그분은 이 로마 병정들과 빌라도의 군대들을 능히 물리치셨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내가 왕이니라」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37절).


“내가 왕이니라”(I am a king)는 예수님의 대답에는 “I Am”이라는 선언이 한 번 더 나옵니다.그러나 이미 주님이 전제하신 것처럼, 이 왕은 이 땅의 정치가들이 자리를 탐하는 세속 왕국(kingdom)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왕국, 즉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사랑의 원리와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고 확장되어 가고 있는 보이지않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는 “내가 그 나라의 왕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이에 빌라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38-40절).빌라도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러나 빌라도는 적어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마침내 십자가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데는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도의 인기 영합


빌라도는 시류(時流)에 편승하고 인기에 영합하여 인생을 살던 사람입니다.즉, 확고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철학을 빌려서 사는 사람입니다.그는 군중들의 박수 갈채에 도취하고, 무엇이 옳든 간에  그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 정치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래서 군중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그리스도 자신이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서였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거절합니다.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놀랍게도 빌라도와 똑같은 이유로 주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내가 예수를 믿으면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할지 몰라.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질지 몰라”그들은 빌라도의 후예입니다.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가야바의 반응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7절).나사로가 부활한 후의 사건입니다.여기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단순한 종교인들이 아닙니다.특별히 대제사장들은 막강한  정치적 힘을 행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정치가들은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가야  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라를 혼란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 정치가인 경우가 많습니다.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몇 사람이 모여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답니다.먼저 의사가 말했습니다.“가장 오래된 직업은 의사다” 다른 친구들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으실 그때부터 수술이 있지 않았는가?”그러자 옆에 있던 건축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합니다.“아닐세,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세계를 설계하실 때부터 건축업은 이미 있었네”깊은 사색(思索)에 잠겨 있던 철학자가 무겁게 입을 열며 말합니다.“자네도 모르는 말일세.성경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땅이 혼돈했었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혼돈(chaos)이라는  철학적인 관념이 존재했네”그때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치가가 한바탕  웃으며 말합니다.“아니, 이 사람들 여태 그걸 모르는가? 그 혼돈을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우리 아닌가? 흐흐흐…”


대제사장들은 당시에 일종의 정치가들이었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절).나사로가 살아난 후 주님의 인기는  그만큼 높았습니다.그것 때문에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던 사람이 바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가야바가 등장하여 유명한 말을  합니다.“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절).이 말은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는 저 예수를 죽음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52절 이하를 보십시오.“또 그 민족만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2,53절).그러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도 나사로의  부활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이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인 마가복음 14장으로 돌아갑니다.“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60절).이 대제사장이 바로 가야바입니다.예수님을 심문하는 그 마당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 야바가 “왜 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1절).예수님의 무거운 침묵입니다.그는 자신을 구태여 변호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왜냐하면 자신이 십자가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은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변명해야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사실상 이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치밀하게 각본을 짜 놓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단서는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그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맹점(盲點)이었습니다.증거가 없으면 재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그래서 대제사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이렇게 되묻습니다.이것이 유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입니다.“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물음입니다.찬송받을 자,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가야바는 제발 이 말에 대답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며 묻는 것입니다.그래서  만약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면, 영락없이 신성 모독죄로 몰아부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참람하도다”라는 무서운 선언이 그들에게서 내려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그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62절).여기에 다시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선언을 다시 한번 하시고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63절).인간으로서 범할 수 있는 최대의 범죄가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일 것입니다.그것은 최대의 범죄입니다.이것은 가장 끔찍한 죄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는 자기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이런 결과가 올 줄을 뻔히 알고 계셨을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를 분명히 보시면서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시고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64,65절)


예수님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그런데 지금 그분이 저주를 받고 계십니다.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이 이제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모욕과 무시와 거절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어서 그들 앞에서  치욕을 받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습을 지켜보십시오.가야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야바의 기득권 수호


가룟 유다는 주님에게서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배신감에 사로잡혔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선언과 그 권위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빌라도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지 못했습니다.그는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가야바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밝히는 이 엄청난 선언의 순간에도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신성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잘 알았으면서도, 가야바는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바치기를 거절했습니다.왜 그랬을까요? 요한복음 11장과 관련시켜서 왜 가야바가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로 그분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습니다.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인기가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이것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에도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어쩌면 권력  유지가 불가능 해지리라는 두려움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이렇게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자,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앞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분을 죽이기로 음모했던 것입니다.당신에게는 가야바와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가야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예수 믿으면 손해본다고 생각합니다.또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모든  것에서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이 기득권의 이해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가야바의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적  용


“나 다!”“I AM!”“에고 에이미!”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하나님 되심과,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가룟 유다, 빌라도, 가야바의 반응은 과거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오늘날에도 우리는 복음 가운데 선포되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세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위치가 흔들릴까봐 또는 손해를 입을까봐 그분을 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더 슬픈 것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빌라도처럼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의 올무에 매여 죄악의 탁류 속을 헤매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아니 가룟  유다처럼 자기의 꿈을 성취하려 했다가, 자기 생각대로 안 되자 배신감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판 유다의 후예들은, 오늘 우리의 거리에서도 별로 낯선 얼굴들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예수께서는 지금도 당신 앞에 다가오시며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십니다.그분이 하나님 이시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 이라고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심판자이신 그 하나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이시라면 그리고 당신이 그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 안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이 순간 그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나! 나는 그분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그러나 누구든지 그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분은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놀라운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이제 그분의 거룩과 권위 앞에서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그분이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십니다.우리는 너무나 자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갑니다.그러나 우리가 모시고 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신비, 이 놀라움, 이 경이!“예 수! 하나님!”


예수님이 단순한 우리의 친구라면, 우리는 그분의 의견을 묵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존경받을 만한 단순한 스승 정도라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분이 하나님 이시라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그런데도 인간적인 욕망과 이기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살았던 일 세기의 죄인들이 있습니다.아니 지금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행여 당신 자신의 모습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환한 미소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항상 품어주기 원하십니다.지금 주님의 품에 안겨, 주님 안에 늘 거하면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오, 주님! 제게 남아 있는 날 동안에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항상 인정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주 예수께서 진정 저의 하나님이 되시고, 제 삶의 주장자가 되시길 원합니다.주께 순복하고 예배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제    목 : 다니엘의 사람됨. (11)

주    제 : 종말론

성    경 : 다니엘1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 교

논   지 : 다니엘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우상 생활을 강요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책은 요한계시록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문자나 개념, 혹은 사상 등이 상당 부분 다니엘서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1,2절은 다니엘서의 서론입니다. 유다 왕국의 최후를 보여 주는 대단히 비극적인 서론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다니엘서의 역사 철학이 드러나 있습니다.“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位)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유다 왕국의 멸망과 최후는 다분히 유다 백성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囚人)들도 일을 합니다. 아마 봄철이 되어서 씨를 뿌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간수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어느 수인에게 “무엇을 뿌리고 있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죄수가 대답했습니다.『뿌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는 것입니다.』아마 자기의 행위대로 거두고 있다는, 즉 죄의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확실히 1절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닙니다. 2절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주께서”라는 단어입니다.“<주(主)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神)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寶庫)에 두었더라”하나님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성전은 다 불에 타고 성전에 놓여져 있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의해서 바벨론 땅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아마도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섬기는 신(神)의 우월성을 자기 백성들에게 선전할 목적으로 전 기구들을 바벨론 땅까지 실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유다 민족의 대단히 슬픈 종말이요 비극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단순히 비극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글리슨 아처라는 유명한 신학자도 다니엘서의 중심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니엘서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이 이 역사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슬프고 슬픈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 본문의 사건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인생을 안이한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불신자들과 역사 앞에 조롱거리로 삼으시기도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세속 사가(史家)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의 역사는 끝났다고 단정지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징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징벌이 반드시 그들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다만 새로운 내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 징계라는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비록 유다 백성은 그들의 나라를 상실하여 포로요 노예요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국 유다 백성들이 경험했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셨던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다니엘서의 주제는 실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불신앙을 선택하느냐 하는, 신앙과 불신앙간의 전쟁터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다니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과 함께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


첫째 시험/신앙고백에 대한 시험 : 유다 백성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시험은 그들의 이름을 개명(改名)하라는 압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벨론 땅에 끌려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입니다. 또 그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의 본명이 아닙니다. 1장6절을 보십시오.“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니”(6,7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로 끌려간 후에 개명된 이름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입니다.『』이라는 말은 언제나“하나님”을 가리키며 『』은 “심판”을,『니』는 소유격 “나의”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합치면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가 됩니다. 그의 이런 이름 속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부모의 신앙적인 기대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도 이름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지만 유대 민족도 이에 못지 않아,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이름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는 개명을 해서라도 삶과 이름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다니엘”이것은 다니엘 가문의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나의 판단자가 되신다”


그런데 그 이름을 벨드사살로 바꾸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벨”이라는 말은 이방신(異邦神)의 명칭이며 이 신은“느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대의 보호자 벨. 그대의 보호자 느보”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우상신이 그대의 보호자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기분 나쁜 이름을 다니엘에게 준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벨의 왕자”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벨드사살은 이방신과 관련된 명칭입니다.『하나냐』란 이름의 뜻은“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혹은“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이름을“태양신에게 배운다”는 뜻의 “사드락”(<락>은 우상신이었던 태양신의 이름)으로 개명하게 했습니다. 결국 “이제부터 이방신에게 배우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미사엘』“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메삭으로 바꿉니다.“삭크”는 정욕과 욕심의 신의 이름입니다.“욕망의 신과 같은 자가 누구랴”마지막으로,“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의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꾸었습니다. 『느고』는 바벨론의 또다른 우상신인 달의 신의 이름이며 『아벳트』라는 말은 “종”을 뜻합니다.“너는 느고의 종이다”


이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들을 바벨론의 우상신과 관련된 이름들로 바꾼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과거 일본이 우리의 국민성을 말살하기 위해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를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각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유망한 청년들은 개명부터 강요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 5:9)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귀신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름이 군대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 줍니다.


이름을 바꾸라는 유혹과 시험에 대해 다니엘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우선 중요한 사실은, 비록 자신의 이름이 정복자의 입장에서 바뀌어지기는 했지만 다니엘이 그것을 받아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을 틀림없이 벨드사살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다니엘로 자처했습니다. 그 증거가 다니엘서 8장1절에 나옵니다.“<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異象) 후 벨사살 왕 삼 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그는 자기 자신을“나 다니엘”로 호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다니엘이었던 것입니다. 8장15절을 보십시오.“<나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마귀는, 어두운 역사는, 다니엘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다니엘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적인 영향으로, 혹은 그간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이루어진 자기의 존재됨에 대한 확신으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판단자라는 신앙고백 앞에 여전히 성실했던 것입니다. 9장2절을 보십시오.“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다니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다니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나 다니엘”이라고 강조한 데에서 자기에게 가해진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진정한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니엘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시대, 곧 신약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저와 당신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이름, 그리스도인. 당신은 혹시 이 이름을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 되기를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를 나타내는 삶 앞에 충성스럽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신앙고백에 대한 시험에서 훌륭하게 승리하는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둘째 시험/신앙정절에 대한 시험 :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을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다니엘이 이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단순히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태도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바벨론의 문화적인 혹은 종교적인 습관에 따라 왕의 상에 오르는 음식은 먼저 바벨론의 우상신에게 바쳐진 후에 진상(進上)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의 진미를 먹으라는 요구에는 그저 “포도주를 마실 테냐 안 마실 테냐”“고기를 먹을 것이냐 안 먹을 것이냐”라는 표면적인 질문 이상의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포도주를 마시고 진미를 취함으로써 이제는 바벨론의 우상신에게 나도 마음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다니엘은 도저히 그 요구를 수락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어울릴 때, 특히 남자들이 불신자들로부터 “한잔 하자”는 유혹을 받았을 때, 함께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그러한 제안에는 저의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잔을 받아들일 때 불신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그렇지 별수 없지. 네가 무슨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순히 마시느냐 안마시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확신 혹은 신앙의 정절에 관한 시험이 그 배후에 숨어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제안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른 데에서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저의를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사건을 중심으로 시험을 받으면서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징계와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새로운 역사의 불씨를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등장시키셨습니다.


다니엘의 사람됨


첫째로, 다니엘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8절).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즉, 마음에 확고한 목적을 정했다는 말입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아십니까? 불과 16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니엘의 출생 연도는 B.C. 621년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 첫번째 시기가  B.C. 605년입니다. 다니엘도 이때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나이를 계산해 보면 16살이 됩니다. 아니, 16세 된 소년이 이런 확고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가정에서부터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청소년부에서 수양회가 있었는데 우리 학생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강사가 한 말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은 죄다. 부모의 유산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그때 학생들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유산을 받을 것을 진지하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자녀를 교육하고 있습니까? 그 어린 나이의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의연함을 보였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에 비춰 볼 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둘째로, 다니엘은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 우리는 다니엘의 삶 속에서 이미 그가 오래 전부터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진미와 포도주를 다니엘에게 건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이었습니다. 눈 딱 감고 한 잔 받아 마시기만 하면 출세의 가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세보다도, 명예보다도, 황금보다도, 권력보다도 소년 다니엘에게는 자신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자신의 삶에서 거룩함을 얼마나 열망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저와 당신에게 만일 출세의 가도가 열리고 명예의 보좌가 눈 앞에 보이고 황금이 굴러 들어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모든 가능성 앞에서도 다니엘처럼 자기의 깨끗함을 견고하게 유지하기를 원할 이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셋째로, 다니엘은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 이것은 12절 이하에서 그가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에 결정한 바가 있으니까 당신네들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오. 물러가시오”라고 항의하지 않고 비록 자신이 견고한 확신 가운데 있다 해도 그 확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온유하고 겸허한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12절에서 그는“청하오니”라는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합니다. 원문에는 이 말이 최고의 존경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써 씌어져 있습니다.“<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12,13절). 제 3의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아주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확신에 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한 바를 펴나가는 자세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여 결국 선한 의도마저도 이해받지 못하는 비극을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이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몇 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마지막 증언 모습을 비디오로 보았습니다. 그의 발언에 항의하는 사람의 메시지와 내용이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그것을 겸손치 못한 자세로 피력했을 때 결국 그 메시지마저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의 결단력과 거룩함과 겸허, 이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삼위일체로 조화된 인격의 모습입니까? 미국 주일학교 노래 가운데에는“다니엘이 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다니엘이 되라 홀로 서라 굳게 목표를 정하라 그 목표를 알게 하라”소년 다니엘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당신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까?


세속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오늘 이 시대는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보다도 훨씬 더 세속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역사는 더욱더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시대 후로 바벨론 도성은 언제나 세속화된 도시의 한 전형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 이전에도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몇 차례 나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점차 물량주의적이 되고 쾌락과 죄악이 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면할 수가 없는 세속 도시의 상징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다니엘 시대 이후입니다.


저 유명한 교부 성(聖)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시』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두 개의 도시를 제시합니다. 땅의 도시를 상징하는 바벨론과 하늘의 도시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이 그것입니다.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점입니다. 이기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끊임없이 오염시킬 것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삶의 최고 명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비로소 새로운 예루살렘일 수 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화된 도성에서 절망하지 않고 이 시대를 힘차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도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시』라는 책에서 어거스틴이 내린 유일한 결론입니다. 어거스틴도 그 당시 자기 조국이 서서히 망해 가고 있는 징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조국의 멸망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궁극적인 소망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도자였던 느부갓네살은 세속 사회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의 한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4장28절 이하를 보십시오.“이 모든 일이 다 <나> 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28-30절). 이 짤막한 구절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나”입니다. 자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냥 왕이라고 말해도 좋을 터인데 꼭 “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우리도“내가”라고 하면서 자꾸 자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추해 보입니다. 끝없는 이기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 왕국을 자랑하는 그 순간에 몰락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도성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서 짓밟히는 연약한 민초들이었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그리고 지극히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도도하게 흐르는 세속화와 이기심의 물결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역사 속에 그분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고 떠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 그들을 역사의 심판의 틀 안에 두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이 지극히 적은 소수의 몇 사람들을 통해서 노예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드라마를 지켜 보십시오. 아니 이 짤막한 드라마를 통해서 세계 역사의 미래를 예언하는 다니엘의 위대한 비전을 만나 보십시오. 그 비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하나님, 바벨론 왕국 못지않게 자기를 높히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혈안이 된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그리고 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주어진 짤막한 이 한 평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 허우적거리다가 의미 없이 쓰러지는 인생을 살지 않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제    목 : 다니엘의 위기. (12)

주    제 : 종말론

성    경 : 다니엘 2:1-30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다니엘은 목숨이 위협 받는 위기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축복의 기회로 전환 시켰다.


개역 단 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2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4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방언으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5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6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7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8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9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줄을 내가 알리라 10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11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12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13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14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고하매 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22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24 이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이르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 25 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되 내가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 그가 그 해석을 왕께 아시게 하리이다 26 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얻은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27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29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위기”(危機)라는 낱말은 한문으로 “위험”이라는 단어와 “기회”라는 단어의 합성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순간을 단순히 위험한 순간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뜻밖에도 놀라운 선물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역경이나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라는 뜻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역경에 봉착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평소와는 다른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어 간섭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셔서 우리들의 삶 속에 중대한 전환과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십니다.


지나간 시대의 모든 영웅이나 위인들은 위기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범인(凡人=평범한 사람)은 위기 속에서 절망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더라도 낙담하거나 실의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역사를 만드는 창조적 소수인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런 위대한 면모를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다니엘에게 다가온 위험과 기회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에게 다가온 위험


다니엘서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니엘이 풍성한 복을 누리지만 2장에 와서는 다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축복 다음에 찾아온 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도, 내 삶 속에 축복이 찾아왔다고 방심하는 그 순간에 폭풍우가 찾아와 다시 허우적거렸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1장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포로로 끌려 온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뜻을 정하여, 왕궁에서 제공하는 포도주나 고기로 말미암아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믿음의 결단은 마침내 위기 상황을 극복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1장에서 다니엘은 어떠한 복들을 누렸습니까?


먼저 1장15절을 보면 다니엘은 금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건강해지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역경에 의연하게 대처했을 때 건강이라는 복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를 하나님에게 받게 됩니다. 1장17절을 보십시오.“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異象)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모든 이상과 꿈을 해석하고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1장20절을 보십시오.“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 아니라”건강과 지혜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니엘은 사회적 특권까지도 부여받게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그들에게는 왕을 모시는 특권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 다니엘에게 또다시 새로운 위기가 찾아들게 됩니다. 그것이 2장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2장의 사건은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느부갓네살의 꿈과 함께 다니엘의 생애에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1절을 보십시오.“느부갓네살이 위(位)에 있은 지 이 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고통스러운 꿈이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결코 잊을 수 없는  꿈이었을 것입니다. 3절에도 “번민”이라는 단어가 한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 하도다”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더 미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불길하기만 하고 괴롭기만 하고 잊어버리지 못하는 이상스러운 번민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야말로 다니엘서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라는 사실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주 굉장한 역사적 사건, 이를테면 오늘날 동유럽의 급격한 변화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主)이신 하나님의 섭리는 심지어 한 나라의 왕이 꾸는 꿈 속에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역사적인 변혁의 사건에만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난밤 내가 꾼 꿈도 간섭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또 매번 꿈 꿀 때마다 “이것은 무슨 꿈일까”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자기의 모든 꿈을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시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의 경우 느부갓네살 왕이 꾼 고통스러운 꿈은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 없다면 왜 왕은 쉽게 꿈을 잊어버리지 못한 것일까요?


느부갓네살은 꿈 때문에 번민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나라의 모든 박수와 술객들을 부릅니다. 박수와 술객들이라고 하니까 고상하게 들리는데 쉽게 말하면 이들은 점쟁이들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꿈의 해석 뿐 아니라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하는것까지 였습니다. 이것이 묘합니다. 꿈의 내용을 왕이 이야기하면 대충 해석만 둘러치면 되는데 꿈 내용까지도 알아내 달라고 하니까 박수와 술객들은 당연히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장5절 이하를 보십시오.“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 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 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 을 내게 보이라”(5,6절).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는 일상적인 꿈 이상의 의미, 즉 마침내 이 꿈을 통해서 다니엘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심하게 대답하는 바벨론의 박수나 술객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10절).“옛날 왕 가운데는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사람이 萬古 역사에 하나도 없었나이다”라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어떻게 신이 아니고서야 당신이 꾼 꿈의 내용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한마디로, 못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한 왕의 반응을 보십시오.“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12절). 평범한 꿈이었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진노하고 통분하여 모든 박사를 다 죽이라고까지 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이 느부갓네살의 꿈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일 사람의 명단에 다니엘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꿈을 해석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그리고 술객들은 이방 신의 힘을 빌어서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누구의 힘을 빌어서 꿈을 알아맞추던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나 통일교를 매한가지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다니엘의 목숨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이제 죽음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이것이 다니엘에게 찾아 든 위험입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느부갓네살이 자기 마음의 번민을 자기만의 문제로 묻어 두지 아니하고 그 번민으로 인하여 전국의 박사와 술객들까지 다 죽이려고 들었다는 점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자기 마음 속에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은 절대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마음 속에 평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내 안에 평안이 없으면 그런 상태의 여파는 제일 먼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에게로 전달됩니다. 화풀이할 사람이 없으면 강아지라도 걷어차게 됩니다. 자기 마음을 짓누르던 고통과 번민을 해소하지 못해 안달하던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의 꿈을 풀지 못한다는 구실로 그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 그리고 그 사회의 소위 지식인들을 일시에 다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 속에 다스리지 못한 분노나 미움, 응어리진 한이 얼마나 사회적 악영향을 끼치는가를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다니엘의 생애 가운데 급박한 위험이 찾아 들게 된 것입니다.


위험을 기회로 삼은 다니엘


자기가 곧 죽게 된 상황에서 만일 다니엘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장 “이젠 끝이로구나”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위험을 기회로 승화시켰습니다. 다니엘이 위험을 기회로 선용한 단계를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는“죽었구나”하고 날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침착하게 자기가 나설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다니엘의 모습이 제일 먼저 인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둘째로, 다니엘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느꼈을 때 아주 지혜롭게 그 기회에로 접근했습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 아리옥이 그일을 다니엘에게 고하매”(14,15절).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다니엘을 죽이러 온 아주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당황하지 않고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아리옥에게 접근합니다.“왕의 명령이 어찌 이리 급하지요? 왜 이렇게 왕이 서두르십니까?”만일 이때 “왜 날 죽이냐, 무슨 죄가 있어서 날 죽이느냐”라고 최후의 발악을 했다면 아리옥은“닥쳐, 빨리 죽여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성을 잃지 않는 냉철함을 보였습니다. 결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흥분은 절대로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흥분하는 사람은 이미 진 것입니다.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마구 흥분하여 열을 내는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비리를 폭로한다 해도 하나도 대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이리 급하뇨”이런 태도에 끌리어 아리옥은 “그러면 너에게 무슨 수가 있느냐?”라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 발휘된 침착함은 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연단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가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왕의 포도주와 진미를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못 먹겠어요”라고 펄펄 뛰면서 무조건 반항하지 않고 대단히 공손하고도 겸허한 언어로 말했습니다.“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다 먹은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단 1:12,13). 다니엘은 옳은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옳은 말을 지혜롭게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옳은 말을 하면서도 그 의견이 관철되지도 못할 뿐더러 인간 관계마저 파괴되고 마는 데에는 지혜롭지 못한 태도에 문제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다니엘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았을 뿐 아니라 다가온 기회에 지혜롭게 접근했습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상황과 직면했습니다. 본문 2장16절을 보십시오.“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기한만 주시면 왕이 꾼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만약 틀렸다가는 당장 죽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에서 이런 배짱이 나왔을까요? 이왕 죽을 목숨이니까 이판 사판 한번 해 본 소리일까요? 저는 다니엘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신뢰가 가능했겠습니까? 추측컨대 믿음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의 사건을 그가 기억했을지 모릅니다.“요셉으로 하여금 꿈을 풀어 해석하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셨던 그 하나님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다”아니,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우리는 다니엘이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아직 사용한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에게는 처음으로 자기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는 본격적인 무대가 주어진 상황이었을 것입니다.“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했지요? 이제 때가 왔군요. 저에게 주신 그 지혜를 통해서 왕이 꾼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나님의 약속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다니엘로 하여금 배짱을 부리게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니엘이 왕에게 꿈과 그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16절에서 자신 있게 말은 했어도 사실 그는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9절에 가서야 비로소 은밀한 것을 알게 됩니다.“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16절의 시점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히 11:1). 보여지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믿는 것입니다. 내 눈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어도 나타나게 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요청하고 있습니다.“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믿으라. 그리하면 보여 주리라”하나님의 공식과 사람의 공식은 이렇게 너무도 다릅니다.


넷째로, 다니엘은 위기 상황을 기도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기도로 위기를 맞이합니다. 17절 이하를 보십시오.“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17,18절). 다니엘은 집에 돌아와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기도하지 않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기도의 팀을 만들어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기도에도 응답하시지만, 성도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특별한 의미에서의 응답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도 동일합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고 주께서 역설하셨습니다. 제 아들 황이와 범이가 개별적으로 저에게 와서 요청을 해도 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하물며 둘이 같이 와서 단체로 데모를 하게 되면 어떻게 안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아바마마, 어마마마” 하면서 무엇인가를 요청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을 약속받습니다.


다섯째로, 다니엘은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저는 다니엘의 그 다음 행동을 주목하고 싶습니다.“왕의 꿈은 여차여차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차여차하다”이렇게 하나님께서 답을 딱 주셨다면 우리는 아마 왕에게 당장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았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응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도 안달하지만 막상 응답을 받고 나서는 은혜를 베푸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인격적인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데 무척 인색한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모습을 주목하여 보십시오.“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19-23절). 우리의 기도에 주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했다면 반드시 찬양과 감사가 뒤따라야 합니다.


여섯째로, 다니엘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사랑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이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이르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다니엘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그저 자기 목숨 건진 데 대해서만 만족하지 않고 다른 박사들의 살 길까지 열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기도가 결코 이기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의 기도는 이웃들을 포함할 만큼 폭이 넓었습니다. 여기에서 개인의 이기심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곱째로, 다니엘은 마침내 왕 앞에 섰습니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의 입술에서 나온 첫 몇 마디의 말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중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다니엘은 자기의 지혜로움이나 우수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사가 전혀 없었으며 다만 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높여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내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박사와 술객들보다 내 IQ가 높아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초점을 맞춘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높이는 것이 다니엘의 삶의 목표였던 것을 왕 앞에 선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당신의 삶 속에서 찾아오는 위험은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게 위험이 찾아왔다 혹은 안 왔다 하는 사실이 아니라 내게 찾아온 위험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반응 여하에 따라서 위험은 당신을 절망으로 인도할 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서의 삶을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자신에게 찾아온 위험을 통해 오히려 당신을 신뢰하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을 때 그를 쓰셔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도 제 삶 속에 다가올 수 있는 그리고 지금 내가 씨름하고 있는 위기를 단순한 위기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이것을 주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로 선용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



제    목 : 다시 오실 그리스도. (13)

주    제 : 종  말

성    경 : 계19:11-21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 교회

                   

개역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범죄한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하늘 문은 닫혔습니다.더 이상 인간은  마음대로 그 문을 드나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우리 주께서는 이 지상에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거나 고통에 직면할 때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종종 하늘  문을 열어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십니다.그런  례들이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깊은 고통과 절망과 낙심  속에 빠져 있던 에스겔 선지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하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제 삼십 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異象)을 내게 보이시니”(겔1:1).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을 본 에스겔 선지자는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겠습니까? 신약성경에도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가 서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그래서 그는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본문은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하늘 문 광경을 사도 요한이 목격하는 장면입니다.하늘 문이 열리면서 드디어 다시 오실 주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그리스도의 재림은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초림이 사실 이었듯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림을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그 시기와 그 방법에 관심을 집중합니다.그러나  본문에서 성경 기자는 재림하시는 그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시며 또한 누구신가, 그리고 그분은 왜 오시는가에 더 큰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다시 오실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승리자 : 주님은 역사의 마지막 승리자로서 이 땅에 다시오실 것입니다.11절에서 승리자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어떤 모습으로 상징되어 있습니까?“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로마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언제나 흰 말을 타고 돌아왔습니다.그래서 흰 말은 승리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재림은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사건입니다.우리 시대는  복음이 쇠퇴하는 시대일지도 모릅니다.참된 복음이 쇠퇴하고 신문이나 뉴스에서  종교 인구가 줄어든다는 보도를 대할 때 우리는 자연히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로 역사 속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둘째/왕 :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12절).면류관은 물론 승리자의 이미지가 될 수 있지만 왕의 이미지도 됩니다.왜냐하면 왕들이 면류관을 썼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본문에서는 면류관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이것은 주님이 한 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을 마침내 다스리고 통치하실 왕이심을 나타냅니다.그래서 16절에서 주님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그 옷과 그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세상에는 많은 주인들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주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으신 주인이시요 역사상 가장 유일하신 통치자, 만물의 궁극적인 지배자이십니다.


셋째/충신과 진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11절).이것은 같은 성격을 두 개의 다른 단어로 묘사한 것이라 생각됩니다.충신(faithful)과 진실(true)은 성경에 주로 언약과 관련되어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입니다.즉,“충신과 진실”이라는 이 표현은 예수님을 약속에 충실한 자로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특별히 여기서의 약속이란 재림의 약속을 말합니다.성경에 많은 약속들이 나오지만 가장 많이 나오는 약속은 재림에 대한 약속입니다.신약성경에만 무려 260장에 걸쳐서 318회나 나오니 말입니다.약 25구절마다 한 구절씩 재림에 대한 언급이 있는 셈입니다.주께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318회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신 분이든가 정신병자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주님은 스스로 약속한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부활에 대한 약속도 여러번 하셨습니다.그리고 그 약속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재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사건이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넷째/공의로우신 분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주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십니다.그래서 심판하십니다.재림 사건은 예수님의 의의 심판의 사건입니다.


다섯째/정복자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13절).성경에 피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무조건 보혈만 연상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정복자의 이미지입니다.주님의 옷에 원수들의 피가 묻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옛날 로마의 군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올 때 종종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돌아왔습니다.그것은 그들이 적들을 이기고 승리자로  돌아온다는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여섯째/하나님의 말씀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3절).다시 오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표현은 요한복음 1장1절에도 나옵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표현입니다.제 말이 제 생각과 뜻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씀이신 주님도 그 무엇인가를 나타낼 것입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나타내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다음 말씀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본래 하나님을 본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십시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1장1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이시라고 했습니다.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써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계시된 것입니다.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어떤 철학자의 이론 속에서도 하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저는 지금까지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그러나 시골에서 산다 해도 예수님을  믿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대화하고 사랑하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합니다.때때로 경험은 논리 이상의 것입니다.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체험은 없습니다.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다시 한번 역사의  종국에 하나님의 영광이 우주에 충만하게 나타날 것입니다.초림에서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아기의 모습, 곧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그러나 재림하실 때 그분은 더 이상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심판자, 정복자, 승리자로 영광스럽게 오십니다.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승리를 선언하는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약속을 성취하는 사건입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의를 통해서 심판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마지막 영광이  계시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는 왜 오시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구원을 완성시키려고 오십니다.신랑과 신부가 혼인식을  치르고 영원한 결합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오심으로써 그분과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주님을 닮은 존재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완성되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곧 구원의 완성입니다.그러나   이 불신앙의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심판을 하시러 다시 오십니다.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대상에 심판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마지막 전쟁 때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히게 될 것입니다.그런데 특별히 짐승은 정치적인 적그리스도를,  거짓 선지자는 종교적인 적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사단은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  세계에도 깊이 관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합니다.동구권의 변화를 보면서 갑자기 평화가 우리 시대에 성취될 것같이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어쩐지 불안하지 않습니까? 다음 순간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우리의 역사는  폭풍 직전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전쟁을 통해서 잘못된  정치, 잘못된 종교, 사단의 영향 아래에 있던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와 불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그리고 모든 불의의 세력을 추종하던 자들을 그러한 세력을  주도했던 자과 함께 불못에 던짐으로써 못다한 심판을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20절).하나님은 한 사람도 지옥에“보내지”않습니다.스스로가 적그리스도인적인 가치관을 선택하고 적그리스도적인 삶을 선택하면 그 종착역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인 것입니다.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님을 앞에 놓고 던졌던“내가 그리스도라는 저 예수를 어떻게 하랴”라는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은 결정되는 것입니다.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재림 사건은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예비하신 저 영원을 향해서 떠나는 사건에 불과합니다.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그날 주님을 구세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 만날 것입니다.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세주이든가 아니면 심판주이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가 되셨습니까? 그러면 당신에게 심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절했다면 당신은 심판주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한 지방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 길이 막연하게 되었습니다.한 사람이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서 외아들과 머슴을 불러 놓고“내가 아무래도 다른 데 가서 장사를 해 가지고 먹고 살 도리를 마련해 와야겠다.내가 내년 단풍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꼭 돌아오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아들보다 나이가 많은 그 머슴에게 집안을 잘 부탁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한달, 두달, 석달, 넉달이 지나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그러니까 이  머슴이 자기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집안에 남아 있던 양식들을 가로채고 오히려   주인의 아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서 단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어느 한순간 단풍드는 모습을 보자 이 머슴은 안절부절하고   초췌해지면서 말라 가기 시작했습니다.주인이 돌아올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던  것입니다.그러나 머슴에게 학대받던 그 집 아들은 똑같은 현상을 보면서 마냥 희망에 부풀어“아빠, 빨리 돌아와요”라며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주님의 오심 속에서 구원의 마지막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바라보면서 저 영원을 누리기 위하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기업을 상속받기 위하여 변해 가는 이 시대를 향해 이렇게 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진 이 시각에 오 주님 우리가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는 자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아버지 하나님,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 온 이 시각에 우리로 이 시대를  분별하며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아버지 하나님, 진실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삶을 준비하는 귀한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다시 오실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을 통해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역사의 마지막 승리자로 오실 주님을 찬양합니다.약속을 마침내 성취하고 돌아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공의로 죄악과 불신앙의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위하여 영원한 기업을 준비하신 주님, 하나님의 하나님되신 영광을 드러내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자신의 신부로 영원히 맞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 신앙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변화하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놀라고 두려워하기보다 사무치는 애정으로 사랑하는 주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    목 : 마지막 추수. (14)

주    제 : 종말론

성    경 : 계14:14-20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억하고 자신이 믿음에 바로 서있는가 확증해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4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8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유대 민족은 전통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기초로 살아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그 이유는 2차 대전을 계기로 2차 대전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나찌에게 학살되는 것을 보고“여호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무신론자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동일한 색깔의 질문이 다른 형태를 띠고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런 질문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거나 혹은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가고 있습니다.“왜 이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은 고통을 받고 부정직한 사람들은 더 큰소리를 치며 잘사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받고 불의한 사람들은 오히려 출세하고 권력을 잡는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축되어 가고 불신앙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氣를 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일까?”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에 대해 회의하며 혹은 기독교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때로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이러한 회의와 포기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리려면 하나의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이 전제가 없다면, 기독교에 대해 회의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이 정당화될수 없습니다.이 전제는 바로 “마지막 심판이 없다면”이라는 것입니다.과연 마지막 심판은 없는 것일까요?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심판은 그릇된 역사를 교정하는 하나님의 손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이것은 하나님께서 종종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불의를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우리 동양에서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모든 것은 결국 옳은 대로 귀착된다는 뜻입니다.동양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정당성은 인정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줍니다. 이런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들을 세워 주시는 일들이 있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불공평하게 보입니다.세상도 여전히 불공평하게 보입니다.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이 마지막 심판이야말로 인간 역사의 모든 오류를 청산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공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있어야만 하고 또 분명히 있습니다.그리고 그 심판은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마지막 심판이 마지막 추수라는 낱말로 묘사 됩니다.심판때를 추수때로 묘사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비유 장(章)인 마태복음 13장에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그 비유 중의 하나가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예수께서 뿌린 씨는 알곡이고 원수가 심은 것은 가라지인데,그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하고 묻습니다.이때 주인은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대답합니다.“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30절).본문에서 바로 그 추수 때가 온 것입니다.본문에 나타난 추수하는 주인은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이 추수하는 주인은 재림하실 예수님인데, 14절에 그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구름 타고 오실 주님이 심판을 위하여 이 땅 위에 다시 임하십니다.예수께서 처음에 세상에 오실 때는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그러나 그분이 재림하실 때는 추수하기 위해 오십니다.그분은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계셨는데, 금 면류관은 영광스러운 왕을 나타냅니다.옛날에는 왕이 재판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금 면류관은 재판장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재판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십니다.그분은 손에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계십니다.추수 때가 되었습니다.그분의 이 마지막 추수는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알곡 추수(14-16절)와 포도 송이 추수(17-20절)가 그것입니다.


알곡 추수


본문15절을 보십시오.“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첫번째 추수는 곡식이 다 익어서 그것을 거둬들이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추수입니다.이 곡식은 택한 백성들,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하나님께서 이들을 천국 창고에 거둬 들이십니다.예수께서 이 추수에 관해서 어떻게 예언하셨는지 종말 장인 마태복음 24장을 보십시오.30,31절입니다.“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재림하시는 주님이 마지막 추수를 위해서 천사들을 일꾼으로 부르십니다.천사들을 통해서 택한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다 모으십니다.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창고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들이기 위해서 주께서 천사들을 통해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시간, 이것은 좋은 추수의 때입니다.


여기서 모아지는 좋은 곡식은 택한 백성을 가리키는데, 택한 백성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마태복음3장의 내용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11절을 보십시오.“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성령 세례와 불 세례가 바로 다음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12절).곳간에 모아들이는 알곡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 믿고 주님 앞에 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그러므로 성령 세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반절에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움을 당하는 쭉정이는 불 세례(심판의 세례)와 관련이 있습니다.마태복음 3장의 내용을 읽어 보면, 이들 알곡과 쭉정이는 회개하고 주님 앞에 온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주님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알곡이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요한복음 3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니고데모가 나아왔을 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창고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靈)이니”(6절).성령의 사역 없이는 아무도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발견하고 그분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 그들만 참 생명을 가진 알곡입니다.그들만이 마지막 날에 천국 창고에 거두어들여질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상인 니고데모,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던 사람입니다.그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었으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까지 하던 랍비였습니다.그러나 그는 매우 종교적이긴 했으나 거듭나지는 못했습니다.오늘날에도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지만 참으로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은 마지막 날 알곡 추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추수를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정말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난 사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과 중국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 스파이가 한 사람 체포되었습니다.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은, 그 체포된 중국 스파이가 어찌나 미국 사람하고 똑같은지 도저히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얼굴 생김새 뿐만 아니라 제스추어도 미국 사람 같았습니다.또 영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구사하는지 도저히 중국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아마도 중국 정부에서 10억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 미국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 하나를 뽑아서 아주 철저하게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그래서 거의 완벽한 미국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게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미국 사람입니까? 아닙니다.그는 미국 사람 같지만 실제는 미국 사람이 아니고 중국 사람입니다.왜냐하면 미국 사람으로 태어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비슷하게 모방만 했을 뿐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오늘날은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열심히 모방만 합니다.몇 년정도 교회에 다니면 찬송가도 부를 줄 알고 기도도 할 줄 알고 또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할 줄도 알게 됩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인과 비슷합니다.그러나 겉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다시 태어남으로써 입니다.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主)로 믿는 순간, 성령이 내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이 중생의 사실이 없는 사람은 모방에 성공한 사람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이런 사람들에게는 매우 슬픈 날이 올 것입니다.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 마지막 날 추수 때에 천국 곳간에 거두어들일 알곡 중에 낄 수 없는 사람들, 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그 날, 마지막 때에 주께서는 알곡을 추수하실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속한 사람들을 영원한 나라로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그러나 주님은 재림에 또 다른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그것에 대해서는 본문 후반부인 요한계시록 14장 17절부터 나옵니다.


포도 송이 추수


본래 이 포도 송이의 상징은 구약 요엘서에서 온 것입니다.“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3:13)포도 송이는 죄인 혹은 악인의 상징입니다.요엘서 전체를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포도 송이란 단순히 죄인 혹은 악인이 아니라 회개를 거절한 사람들을 말합니다.사실 자신의 삶에 죄나 악의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죄와 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입니다.성경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이 사람들을 포도송이라고 부릅니다.하나님께서 그 포도 송이를 거두십니다.천국 창고에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려고 거두시는 것입니다.이 포도 송이를 거두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그것은 심판의 추수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18절 말씀을 보십시오.“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날카로운)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여기서 포도가 익었다는 말은 심판의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하나님 마음 내킬 때 아무 때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셨다가 하나님의 때에 심판을 행하십니다.하나님의 심판의 때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창세기 15장 16절을 보십시오.“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貫盈)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말씀은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을 심판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예언입니다.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관영”이란 단어가 조금 생소해서 그 뜻이 바로 들어오질 않을 텐데, 영어 성경을 보면 “full”이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그 구절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그들의 죄악이 찰 만큼 차게 되면 그때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한 사람의 개인이든 한 민족이든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을 심판하시기 전에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 여러 번 있었지만, 이제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악인들의 죄악을 심판할 마지막 심판의 때가 왔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은 “포도 송이를 거두라.그 포도가 익었느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심판하실 것인지 19절을 보십시오.“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다 익은 포도를 따서 포도 짜는 틀에 집어넣고 쫙 짜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 같은 붉은 포도 즙이 쫙 퍼질 것입니다.이것은 마지막 날에 악인들이 받을 처절한 심판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20절을  보십시오.“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문자 그대로 계산하면 1,600스다디온은 32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이것도 상징적인 표현입니다.1,600이란 숫자는 4×4×100을 해서 나온 것입니다.요한계시록에서 4라는 수는 항상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그러므로 이 1,600스다디온은 심판이 세상에 꽉 찼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즉,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 밖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성 밖이란 언제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나타냅니다.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생애 최대의 저주입니다.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 이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겠습니까? 그러나 이들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 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 데도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그것이 마지막 저주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마지막 알곡 추수와 포도 송이 추수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정리해 봅시다.41절부터 43절까지입니다.“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불법을 행하는 자들, 회개하지 않은 자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았던 자들은 마지막 때에 이를 갈며 슬피 울고 있습니다.그러나 의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이것이 마지막 추수의 결과입니다.본문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첫째로, 나는 알곡인가 포도 송이인가?

당신은 주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질문인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며칠 전에 어떤 분이 목사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분이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지 뭡니까? 우리 주위에 이런 불행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버리운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이미 버림받은 자들에게 마지막 추수 때는 하나님의 손에 불태워지는 시간에 불과합니다.당신은 알곡입니까? 아니면 포도 송이입니까?


둘째로, 우리 주변의 포도 송이 이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 추수 때가 오기 전에 포도 송이 같은 이웃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그것이 마지막 소망입니다.말세에는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그래서 세상이 끝나고 역사의 막이 내려지는 그날에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해처럼 빛나는 영광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마지막 추수 때가 가까오고 있는 이 시각에 당신은 이 추수 때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마지막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읍니다.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오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듯 역사의 가을이 곧 찾아올 것입니다.추수 때가 올 것입니다.이 역사의 모든 오류와 부정당함과 모든 구부러진 것들을 영원히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또 하나님께 속한 생명의 곡식을 거두어 들여서 영광 가운데 두시기 위하여 주께서 이 역사 속에 귀환하실 때가 가까와 오고 있는 이 시각, 하나님, 깨어 근신하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하시고 그 감사함을 갖고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전도의 책임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    목: 종말론/멸망의 큰 잔치. (15)

주    제: 종 말 론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5장

논    지: 우리의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설교요약

1.고고학으로 밝혀진 성경의 권위

2.위기에서 하나님을 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벨사살

3.인간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은 하나님 이시다.

4.성경 연구는 삶의 변화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5.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개역 단 5:1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4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 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8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 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9 그러므로 벨사살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10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13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14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15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16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찌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30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본문 1절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벨사살 왕> 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이 벨사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논쟁의 발단은 일반(세속) 역사 책을 뒤져 보면 바벨론 역사 가운데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도대체 벨사살 왕은 누구인가?”


다시 확증된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이 벨사살 왕이 역사 속에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다니엘서 전체를 역사적 정확성이 결여된 책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혹은 성경의 명백한 교리를 뒤집는 불경건한 신학자들의 노름이 역사 속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선언이 신학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1854년 영국의 J.G. 테일러라는 사람이 고고학자 팀을 이끌고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고고학 탐사를 하는 가운데 고대 바벨론어로 새겨진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다. 그런데 그것은 나보니도스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기도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세 명의 왕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첫번째 왕은 메로다크 왕으로서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었습니다. 메로다크는 2년 정도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의 사위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가족끼리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이후 두번째 통치자는 네글리사 왕입니다. 이 사람은 4년쯤 통치를 하다가 물러났으며 네리글리사의 아들인 라바쉬말드크가 이어서 왕위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9개월밖에는 왕위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네번째  통치자, 그러니까 곧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가 바로 나보니도스였습니다. 이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끼리 복잡하게 얽힌 것이지요. 나보니도스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은, 자기도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벨사살이 바로 나보니도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1854년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서 비로소 증명되었습니다. 비록, 왕위에 오른 일이 없는 벨사살에게 어떻게 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가 있느냐는 문제가 남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니도스의 통치 시기는 주전 556년부터 539년까지입니다. 주전 539년은 바로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해입니다. 나보니도스는 전쟁을 많이 한 왕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많이 하게 되니까 자연히 해외 원정을 많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외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도대체 누구에게 통치권을 위임했겠습니까? 아들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즉, 나보니도스 왕이 해외에 출정 가 있는 동안 실제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던 사람은 그의 아들 벨사살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북한에,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이 두 사람이 통치자로 있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통치자가 둘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된 바벨론 제국의 멸망 직전에도 나보니도스 왕은 새롭게 일어나던 메대 바사 제국과 북아랍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패전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보리시파라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이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증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메대 바사의 마지막 도전이 드디어 바벨론 제국에 임하여 왕궁에까지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니엘서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을 뒤집고 나아가 성경이 얼마나 권위 있는 책인가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우상을 찬양하는 잔치가 한창이던 순간을 기록한 5, 6절을 먼저 보십시오.“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 벌벌 떨던 왕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7절). 이 <셋째 치리자>라는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세번째 통치자를 삼겠다”왜 하필이면 세번째 치리자일까요? 그것은 나보니도스와 그의 아들인 벨사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셋째 치리자란 왕의 바로 아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16절을 보십시오.“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셋째 치리자를 삼겠다>는 말이 또 한번 나옵니다. 결국 세속 역사가가 벨사살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이미 성경이 정확하게 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증언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세속 역사에 벨사살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고 성경의 위대한 권위와 정확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539년10월, 바벨론 최후의 날에 흥겨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메대  바사의 다리오의 군대는 바벨론 궁중을 포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5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1절). 적군이 쳐들어오면 전쟁 준비를 해야지 왜 잔치를 벌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왕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벨사살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벨사살은 자기 나라를 수호하는 신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바벨론 궁중의 성벽은 굉장히 견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에게는 <설마 누가 성벽을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셋째,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제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까딱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벨사살은 그날밤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고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殿)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器皿)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하필이면 유다가 망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기구들을 잔칫상에 대령하게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3,4절). 벨사살은 바벨론의 우상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5절). 자기 나라의 최후를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신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벨사살 왕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의 분벽에 홀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벨사살 왕의 범죄


물론 1-4절에서 벨사살 왕의 범죄가 드러났긴 하지만 다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죄를 조목조목 정리하여 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22,23절). 이것이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지적해 준 범죄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의도적 범죄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18-21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 후에 즉시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알고도... ”(22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아들>에서 <그>는 느부갓네살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몇 대 위의 선조라도 전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벨사살은 조상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가 징계를 받아 왕에서 쫓겨난 후 짐승처럼 울부짖는 정신병자가 되어 7년 동안 고생했던 일을 알고도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상의 실수가, 선배의 실수가 계속하여 답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니엘서를 지배하는 가장 중심되는 사상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니엘서 2장21절을 보십시오.“그는(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며 한 민족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쇠하게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실세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5장21절에서도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똑같은 사실을 다시 선포합니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 이것이 다니엘서의 위대한 역사 철학입니다. 이 사실을 느부갓네살 왕은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면서 뼈아프게 배웠습니까? 7년간 미치광이처럼 들판을 기어다니는, 하나님의 참담한 심판과 징계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고도 범한 죄이기 때문에 심판이 더욱 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22절).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공부의 목적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 삶을 바꾸는 데 두어야 하며 단순한 지식을 위한 성경 연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식만 늘려 가는 성경공부 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알고도 행치 않는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21절). 실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문자 그대로 폐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갈릴리 근처의 고라신과 벳새다 등지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도, 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의도적인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책망의 대상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둘째/교만의 범죄 : 교만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범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많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에는 이 표현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다니엘은 하나님 홀로 진실로 높으신 분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22,23절). 자기 신격화,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자기 조상이었던 느부갓네살과 똑같은 교만을 답습한 벨사살의 범죄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우상 숭배의 범죄 :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벨사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그릇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을 모독했던 행위의 배후에는 자기 조상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우리 조상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해서 야훼에게 굴복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만은, 아무도 나의 능력과 나의 영광을 초월할 수 없다” 자기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까지도 자기를 높이려는 이 뿌리 깊은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벨사살의 모습을 보십시오.


벨사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찬양하던 바로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5절).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그분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있던 벨사살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무엇을 썼습니까? 그 내용이 2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24,25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전조(前兆)인 것 같은데 글자의 뜻을 통 알 수 없어서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다니엘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다니엘은 세월이 상당히 흘러서 80세는 족히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5장을 연구하면서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순수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던 다니엘의 모습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글자를 해석하여 달라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합니다. 우선  세번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뇌물을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이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17절). 다니엘은 황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권세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따름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일념으로 80년을 살아온 이 순수한 청년. 그는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해석을 합니다.“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메네』는 “숫자를 세다”를, 『데겔』은 “저울로 달아 본다”를  그리고 『우바르신』은 “나누다”를 뜻합니다.


26절 이하를 보십시오.“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26절).“당신이 얼마 동안 통치할 것이며 얼마 동안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와 문명의 연한(年限)을 정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27절).“저울에 달아보니 당신은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표준으로 보았을 때 당신은 도저히 더 이상 왕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이것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베레스>의 복수형이 “우바르신”입니다. 즉, 이것은 바벨론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메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동안에 벨사살 왕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최후를 보시기 바랍니다.“그 날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절). 이것이 메대 바사가 일어나고 바벨론이 넘어지던 순간입니다. 벨사살이 열었던 잔치는 문자 그대로 멸망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이 교만한 왕에게 멸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순간에 다가옵니다. 잠언서 기자의 증언처럼 “악인에게는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합니다”(잠 6:15).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은 눈깜짝할 새에 무(無)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래로 바벨론 제국의 최후는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최후의 모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바벨론 제국의 패망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1절 이하를  보십시오.“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1,2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은 진정 바벨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3절).“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 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9,10절). 한순간에 무너지는 인류의 바벨탑의 운명을 묘사한 극적인 장면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두가지


첫째로,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이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를 세우고 나를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벨사살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누가 당신의 호흡을 주장합니까? 이 순간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는 내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자꾸만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은 벨사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을 죄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호흡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 하시며 나로 인생의 작정된 길을 걷게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란, 삶의 중심에 나를 놓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놓느냐 하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부패성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어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내 삶의 초점이 되고 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전쟁터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로 호흡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자 애써야 합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고 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그들의 잔치는 멸망을 부를 잔치가 되었습니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바울은 같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멸망의 큰 잔치 이렇게 종말을 대비하라”“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29절)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합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정치도 하고 장사도 해야 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욕심을 낼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 마지막 잔치”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제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을  당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언제나 당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제    목: 종말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 (16)

주    제: 종 말 론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7장

논    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 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신다.

설교요약

1.네 제국을 상징하는 네 짐승

2.네 제국의 흥망성쇠의 예언

3.마지막 때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믿는자들을 미혹한다.

4.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신다.


다니엘서 7장과 다니엘서 2장은 표면적으로 대단히 유사합니다. 2장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계시가 담긴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7장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이상(異象)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보았던,  역사에  대한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2장과 7장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도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7장에는 2장보다 역사에 대한 계시가 좀더 보충되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의 커튼을 열어 바벨론 제국 이후에 펼쳐질 세계 역사에 대한 좀더 많은 비밀을  7장에서 드러내 보여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골격은 이미 2장에서 제시하고  7장에서 살을 붙인 셈입니다.


네 제국을 상징하는 네 짐승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2:31,3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상이 네 부분, 즉 금으로 된 머리와 은으로 된 가슴과 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종아리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중요한 제국들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는데 금으로 된 머리 부분은 바벨론을,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대 바사 제국을,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 제국을, 그리고 철로 된 종아리 부분은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왕국을  상징하는 신상은 산에서 날아 온 뜨인 돌에 맞아 부서지고  결국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느부갓네살의 꿈에 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꿈에는 신상 대신에 네 짐승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이것을 다니엘서 2장과 마찬가지로 바벨론 이후에 전개될 주요 제국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첫번째  등장하는 사자는 바벨론을, 두번째 등장하는 곰은 메대 바사를, 세번째 등장하는 표범은 헬라 제국을 그리고 네번째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짐승은 로마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는 빛나고 거대한 신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7장에서는 천박하고 잔인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관점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사람들에게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제국이나 제국의 열왕들이 두려워 굴복할 수밖에  없는 대상일 것이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을 거듭하면서 한 나라가 세워지고 또 사라지는 식의, 힘으로 상징되는 인류의 문화나 왕국은 짐승의 이미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힘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랑하는 힘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야수의 본능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현격한 차이입니다.이제 다니엘이 본 이상을 통해서 좀더 자세하게 계시된 네 제국의 운명을 살펴봅시다.


첫째 짐승/바벨론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힘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4절).“날개가 뽑혔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교만에 대한 심판으로 왕 위에서 쫓겨나 미친 사람이 되어 들짐승처럼  들을 헤맸던 사건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는“느부갓네살은 통치 말년에 좀더 인간적이었다”고 전하는 고대 문서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고생고생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회복시켜 주신 후에 그의 통치는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한 번 혼나고 나서 인간적인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가 필요한가 봅니다. 고통이나 고난이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니 말입니다. 이처럼  사자의 모습에서 느부갓네살 왕으로 대표되는 바벨론 제국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짐승/메대 바사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 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5절).“세 갈빗대가 물렸다”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보아 정확한 묘사입니다. 메대 바사 제국의 첫번째 왕은 그 유명한 고레스 왕입니다. 일반 역사책에서는 “사이러스”라고 호칭하는 고레스에 의해 일어난 메대 바사  제국은 당시에 알려진 나라 가운데서 특별히 세 개의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우선 주전 546년에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리비안 왕국을 정복했으며, 주전 539년에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가 주전 525년에 이집트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곰이 세 개의 갈빗대를 물고 있다는 표현은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를 먹으라”고 했는데 정말 그 말대로 메대 바사는 세 나라나 먹어 치웠습니다.


셋째 짐승/헬라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6절).“날개 넷”은 헬라의 영웅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이 단 한번의 원정을 통해서 당시에 알려진 전세계를 휩쓸어 버린 그 기민함을 상징하는 것이며 표범의 “머리 넷”은 알렉산더 대제 이후에 헬라가 네 명의 장군에 의해서 분열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성취된 일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대제국은 그의 사후에 안티파테르가 그리이스와 마케도니아를, 리시마쿠스가 소아시아 지역과 드레이스 지역을, 셀리큐스가 소아시아 지역을 뺀 나머지 아시아 지역을, 그리고 프톨레미가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게 됨으로써 문자 그대로 네 토막이 나고  맙니다.


넷째 짐승/로마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7절).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꿈에 보았던 철로 된 종아리로 상징된 로마입니다. 전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막강한 위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장과 비교하여 볼 때 첨가된 계시들


첫째/열 개의 뿔 :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20절). 2장에서는 열 발가락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7장에는 열 뿔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습니다.“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24절). 이 열 뿔이 개개의 세력이며 왕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2장을 공부할 때 열 발가락과 열 뿔을 연결시켜서 그것에 관한 성경학자들의 대표적인 해석 두 가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번째 해석에 따르면 열 발가락이나 열 뿔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부활할 로마의 모습이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부활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2년 후면 유럽의 모든 화폐가 하나로 통일되며 EC를 중심으로 각 국의 경제가 하나의 구조 속으로 흡수됩니다. 게다가 동유럽의 급격한 변화와 독일의 통일 등은 흡사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에 대한  두번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합니다. 아마도 역사의 마지막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변화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다른 작은 뿔 :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또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8절).“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20절). 성경학자들은 열 뿔이 열 나라의 연합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뿔”은 어떤  한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곧,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세에 왜 이 적그리스도를 허용하실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를 허용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시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단의 일평생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사건입니다. 사단도 그것을 흉내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역사의 마지막에 사단도 드디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릴 것입니다. 사단의 성육신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상징이 바로 작은 뿔입니다.


셋째/인자(人子) : “내가 또 밤 이상(異象)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13,14절).

2장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도래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구절입니다.“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24,25절).


여기에 3년 반이라는 위기의 시간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3년 반 동안 수리아(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했던 적이 있었긴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상징된 어떤 특정한 기간에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가 경험하게 될 무시무시한 환란에 대한 예언입니다.“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26절). 적그리스도가 권세를 빼앗길 때 사람들은“저가 하나님이 아니었구나”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 를 섬겨 복종하리라 하여”(27절).<그>는 13절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역사의  마지막에 세우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성경에는“인자”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 “인자” 사상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는 칭호 가운데서 가장 즐겨쓰신 것도 “인자”입니다. 이 말은  공관복음에 69회 사용되었으며 요한복음에만도  12번이나 나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는가를 요한복음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원을 강조하시면서 인자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이것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분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구세주가 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자라는 개념 속에는 예수님의 신적(神的) 기원과 그분의 구원자 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5:25-27).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서 구세주가 되셨고 나중에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이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의 왕국, 그분이 치리하시는 영원한 왕국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종말장>, 혹은<말세장>으로 불리웁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큰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 때 두 때 반 때, 즉 삼년 반을 상징적인 기간으로 생각합니다.“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마 24:22). 삼년 반이라는 기간은 하나님께서 원래 작정하신 기간을 채우지 않고 아마도 감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됩니다.“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3).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 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여기의 인자가 다니엘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작은 뿔이 어떻게 역사의 마지막을 소란케 할까요? 마지막을 향해 전개되는 역사의 마지막 시간표를 주목해 보십시오.



제    목 : 이 세상의 최후. (17)

주    제 : 믿  음

성    경 : 계 18장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 교회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성경책에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는 것처럼,지구의 역사에도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쯤 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과학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그러나 소위 기독교적 관점에서 새롭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어쩌면 지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고 1만 년 내외에 불과한 젊은 지구일지 모른다는 가설이 등장합니다.지구의 연수가 오래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바다에 사는 생물에게 필수 영양소가 되는 인(燐)이 빗물에 씻겨서 바다로 유입해서 들어가는 양이 매년 1,400만톤이라고합니다.태초에 바다에 인이 전혀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에 현재와 같은 속도로 현재와 같은 양의 인이 바다 속에 유입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약 7000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지구의 역사가 45억년쯤 될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방사성 동위 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법입니다.그런데 창조과학자들이 같은 방사성 동위 원소(특별히 헬륨을 가지고)측정법으로 이 지구의 나이를 풀어 가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을 때, 결과는 기존의 가설과 크게 달랐습니다.방사성 동위 원소가 붕괴하면서 방출된 헬륨의 총량이 연간 30만톤 정도 되는데, 이 지구상에 있는 헬륨 총량은 35억톤이라고 합니다.그렇다면 지구의 나이는 만이천 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우리가 지구의 나이를 1만년 정도로 보는 가정을 받아들일 경우에,지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한 것이 됩니다.이와 비슷하게 지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쉽게 몰락할지도 모릅니다.대개 우리는 하루하루 이 지구를 디디고 사니까 이 땅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구도 그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끝이 있고, 그 끝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쉽게 찾아올지도 모릅니다.창조 과학자들은 열역학제 2법칙 같은 것을 예로 들어서 에너지가 질적(質的)으로 계속해서 쇠퇴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합니다.그것은 자연계에서 무질서가 계속해서 증대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이런 가설은 지구가 얼마 안 있어서 곧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경고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꼭 자연적인,물리적인 최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구는 반드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본문인 요한계시록 18장은 이 세상 최후의 날을 묘사합니다.


개역 계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女皇)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 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본문 1,2절을 보십시오.“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 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앞 과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벨론은 사람들이 만들어 왔던 지금까지의 모든 문화와 이 세상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그런데 이제 성경은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와서“큰 성 바벨론이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증언합니다.두 번 반복하는 것은 언제나 그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세상은 반드시 무너집니다.사람들이 만들었던 바벨의 문화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지구문화의 종말 원인 본문은 단순히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만을 증언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즉, 인류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지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밝힙니다.2,3절을 읽어 보면 인간의 부패함이 그 원인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부패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영적 부패 2절 말씀을 보면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진 원인이 나옵니다.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문화의 자리가 되어야 할 이 세상이 오히려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마치 우주의 쓰레기통처럼 철저히 부패해 버린 이 세상 문화에 대한 생생한 상징적 고발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음행, 즉 성령을 따라가기보다 악령들을 추종하고 있는 이 세상의 더러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영적인 부패는 그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덕적인 부패를 낳습니다.왜냐하면 사단은 악한 영일뿐만 아니라 더러운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사단의 지배 아래 들어간 문화는 더러운 문화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사람들은 이 악령을 좇아가며 더러운 일을 더욱 자행하여 이 지구를 더러운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갈것입니다.바로 이 부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지구 종말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정치적 부패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왕들은 권세자들, 정치가들을 가리킵니다.이들이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한 곳,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 세상)과 더불어 귀신의 땅, 사단의 왕국으로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합니다 성경은 정치가들이 바른 역할을 할 때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합니다 사자라는 말은 사역자(minister)라는 말입니다.로마서 13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고 있는한 권세를 잡은 자들, 정치 지도자들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4절에 보면 그는 정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부릅니다.“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을 벌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정치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정의를 행사하는 기능을 기대하십니다.그들이 정직하게 정상적으로 정치를 잘 할 때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위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대신에 마귀의 사자가 되고 있습니다.그들은 악을 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선(善)과 공의를 짓밟아서 가치관을 전도 시키는입니다.정치가들의 권력 남용과 그로 인해 이 땅을 더럽히는 일은 역사를 향해서 갈수록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셋째/경제적 부본문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땅의 상고(商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致富)하도다 하더라” 상고란 장사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본을 독점 할수록 세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그러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질수밖에 없고, 세상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바로 이 경제적인 불공평과 부패야말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초래할수 밖에 없는 이 지구의 악입니다.이것을 하나님은 보신 것입니다.이런 맥락에서 저는, 역사가 이 마지막 순간을 향해서 갈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경제적인 책임이 더욱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잘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부(富)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 역사는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져 갈것입니다.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요한복음 3장 16절 못지않게 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므로 우리가 믿고 구원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빚진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서 그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그 이상으로 나아가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이 요한일서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라면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희생적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18절을 보십시오.“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가장 구체적인 사랑은 물질을 나누며 이웃을 섬기는 사랑입니다.잘 사는 사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조금 덜 쓰면서 살려는 노력, 이것을 고대 우리 그리스도인 선배들은 청빈을 위한 수행이라고 불렀습니다.마지막 때가 될 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노력을 더 요구하실 것입니다.왜냐하면 이 세상은 점점 부패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향해서 가는 이 멸망의 문화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빛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 책임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지구 문화의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세상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기득권자들은 이세상에서 정치적인 혹은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누리던 사람들을 말합니다.본문에서는 이 기득권자들이 세 가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왕(3절)과 상고들(3절)과 선객들(17절)이 그들입니다.처음 두 부류의 사람들은 앞에서 살펴보았고, 세번째로 등장하는 선객은 당시의 그 지중해 문화권에서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무역하는 큰 부자들을 가리킵니다.이들은 모두 정치적인 힘이나 혹은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멸망할때 제일 안타까워할 사람이 바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한국에서도 빈부차이가 심해지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싹 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이 망해도 잃어버릴 것이 없으니까요.가지지 못한 사람들 속에 쌓여 가는 울분과 한(恨)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 소위 기득권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떠할까? 본문에서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바로 고난과 애통입니다“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7절).“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고통을 위하여 울며 가슴을 치며”(9절)“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10절).“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11절)“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15절)“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19절)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하고, 생의 목적도 없이 자기 힘을 축적하는 일에만 목적을 가지고 살아 왔던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내는 슬픈 반응입니다.


둘째/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20절을 보십시오.“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伸寃)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이 심판의 시간은 통곡과 고통의 시간입니다.그런데 성경은 복음을 가지고 이 역사 속에서 외쳐 왔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즐거워하라”고 합니다.이 통곡의 시간에 성경은 왜 즐거워하라고 초청합니까? 이 마지막 심판의 순간이야 말로 우리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순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 뜻대로 살아 왔던 사람들에게 이 마지막 심판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오히려 즐거워해야 할 시간입니다. 슬피 애통하는 사람들과 즐거워하는 사람들,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이 두 부류 중에 어느 쪽에 속하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보십시오“이제 주린 자는 복이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절)“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는 웃는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절)모든 것이 전복되는 마지막 순간입니다.하나님 없이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 왔던 사람들은 지금은 웃지만 마지막은 슬피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반면에 지금 고난속에 있으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즐거워할 것입니다.마지막에 웃는자가 최후의 승리자이지 않을까? 당신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이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지구 문화 종말의 성격이 세상의 최후가 어떠한 특성을 보이는지 본문에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순간성 바벨탑에서 시작되었던 인류 역사의 찬란한 문화가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말입니다.성경이 그 순간성을 증언합니다.본문 19절입니다“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있도다 화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부리는 모든 자들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일시간이란 말은 가장 짧은 시간의 척도를 의미합니다.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 인류의 찬란한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한 순간에 사라져가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말이 그마지막 때에는 얼마나 실감이 나겠습니까?


둘째/철저성과 완전성 21절 말씀입니다.“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맷돌을 바다에 던지면 다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큰 바벨론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인류 문화의 마지막이 이렇게 철저하고도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셋째/허무성 나팔 소리가 이 우주 속에는 다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시와 음악이 없을 것입니다.맷돌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빛이 없을 것입니다.결혼하는 신랑,신부의 즐거운 웃음 소리도 없어질 것입니다.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이 우주는 절대의 허무와 공허속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모든 것이 다 없어져버리는 이 마지막 멸망을 당할 때, 사람들은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이에 대한 답을 베드로후서에서 찾아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첫머리에서 베드로는“왜  예수님의 재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성도들이 그렇게 재림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다려 왔는데도 웬일인가 아직도 막을 내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3,4절을 보십시요.“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譏弄)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이 와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4절).창조 때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무슨 말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을 언급하면서 대답합니다.“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전하여 두신것이라”(6절).예전에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이제는 불을  통해서 심판 하신다고 말합니다.8절 이하를 보십시오.“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일이 드러나리로다”(8-10절).성경은 이 마지막을 증언하면서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이 모든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11절).그것이 역사의 궁극이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라면,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는 것입니다.“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1-13절).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건너편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그 세계에 거하기를 기대한다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날을 대비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최후의 모습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본문 4절이 18장 전체 메시지의 요약이라고 생각합니다.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늘에서 멸망을 선언하는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이 나옵니다.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죄에 참여하지 말고 또 심판과 재앙에 참여하지 말고 나오라고 부르십니다.하나님은 언제나 이 세상 신이 지배하고 있는 이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내셨습니다.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을 불러 내셨습니다.또 교회의 의미도 불러냄을 받은 백성들 아닙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당신은 세상을 바꾸는 자입니까? 세상을 향해서 심판을 외치는 자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닮아 가고 있는 자입니까?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생각해 보십시오.바닷물은 짜지만, 그 물을 먹고 사는 고기는 짜지 않습니다.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향해서 선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똑같다면 세상에 기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우리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세상 사람들을 깨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렇지 않고 우리가 세속에 물들어 간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주께서는 이 멸망해 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백성아, 세상이 받을 재앙에 참여하지 말라.거기서 나오라” 이 음성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당신은 이 음성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멸망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함께 멸망하기 위해서 세상을 좇아가는 자입니까? 저는 이 세상이 언제 멸망할지 잘 모릅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진 오늘의 시간 속에서,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깨워 주시며 우리의 변화를 촉구하십니다.말세의 준비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가서 밤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 하심으로써 그 죄가 가져올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와 심판을 피하게 하시고 이 죄에서 떠나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가장 아름답게 준비하는 자들을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금년으로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거룩하게 설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썩어가는 이 시대를 향해서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시옵소서.세상이 받을 재앙에 참여하지 말고 거기서 나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켜야할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경종을 울려 주셔서,  하루 하루가 주님 앞에 설 그때를 준비하는 날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주    제: 종말론/이스라엘의 구원. (18)

제    목: 다니엘의 칠십 이레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9장 24~27절

논    지: 이 예언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이스라엘의 구원을 나타낸다.

설교요약: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중요한 예언들이 나옵니다만 그 중에서도 본문의 예언은 특히 중요합니다. 두 개의 기둥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을 가리켜서 “이것은 성경 예언의 등뼈가 된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과 종말에 관한 증언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언인 것입니다. 본문의 예언들은 중요한 예언이면서도 난제를 안고 있는 어려운 예언입니다. 우선 이 어려움은 본문에 나타난 칠십 이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칠십 이레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24절).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성은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입니다. 그 백성과 그 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펼치실 특별한 기간을 가리켜 본문은 칠십 이레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칠십 이레는 칠십 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사실상 칠십 주간이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칠십이 일곱 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레가 "주간"이 아니라 "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490년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펼쳐지는데 필요한 기간이라고 합니다.


490년, 즉 칠십 이레는 다시 크게 세 단계로 나뉘어집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25절). 처음 일곱 이레가 지나간 다음에는 육십이 이레가 계속되고 그 다음에 한 이레가 더 있으리라는 것입니다."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27절). 세 단계로 나뉘어진 기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섭리와 경륜을 성취해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칠십 이레 동안에는 여섯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24절).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을"것입니다."거룩한 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그리스도』는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섯 가지 사건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할 수 있다면  26절의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사건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합니다. 본문의 예언이 이스라엘은 물론 전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강림과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칠십 이레 동안 일어날 일들과 해석학적 문제들


본문에 접근할 때 부딪히게 되는 해석상의 난제는,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문자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학적인 이론들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칠십 이레의 기간을, 문자 그대로 490년이라는 특정한 기간으로 보기보다는 세 단계로 나누어 그 기간  동안에 세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합니다. 그들은 최초의 일곱 이레가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는 기간에 대한 상징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25절을 제시합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도심부)와 해자(도시 변두리)가 이룰 것이며"(25절).


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한 이레를 예루살렘 성의 멸망 사건으로 취급합니다."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절). 여기에서 "한 왕의 백성"이란 로마를 상징합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침략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했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들 가운데 무려 110만 명이나 죽임을 당했고 9만7천 명의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예루살렘 성은 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졌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상징적 접근은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의 성경학자들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접근합니다.


저도 본문의 경우 문자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좀더 성경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24절). 여기에서 "기한을 정했다"는 그 자체가 문자적으로 특별한 햇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때 상징적 접근보다는 문자적 접근이 본문 해석에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지 6,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 끝에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기간이 70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490년간의 섭리 기간을 정하셨다는 계시까지도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은 포로 기간이 언제까지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후에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징계와 또 그것과 관련된 메시야의 오심과 죽으심과 역사의 종말에 관한 놀라운 사실까지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본문 해석에서 대두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난제는 "그 예언이 실현되는 시발점이 어디인가"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25절).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예언의 출발점입니다. 이때부터 일곱 이레가 지나고 육십이 이레가 지나고 한 이레가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의견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어도 좋다고 공포한 주전 538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질 때 성전 재건의 명령은 있었지만 성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전 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즉 도시의 중건에 관한 것입니다.


둘째, 아닥사스다 왕 제 7년인 주전 457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에스라서 7장12절을 보면 그 배경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주신 일은  없었습니다.


셋째,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때가 주전 445년 혹은 444년3월말부터 4월초 사이의 어느 기간입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그때의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간을 정하고 내가 또 왕에게 이르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營門)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느 2:5-8). 느헤미야가 기회를 정확하게 잡아 기도하고 접근했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가 그의 조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리게 합니다. 이때부터 일곱 이레, 즉 약 49년 내지 50년이 지나 느헤미야의 영도 아래 예루살렘 성이 대충 중건된 해가 주전 396년입니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이 다시 복구되어 완성된 이 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 일곱 이레 후 육십이 이레, 즉 434년이 지난다고 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시작해서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를 계산해 보면 주후 37년 내지는 38년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해와 약 4,5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왜 이렇게 격차가 생기는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의 달력은 그 당시만 해도 1년을 360일로 계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달력대로 계산한다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시작해서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즉 483년이 지나면 173,880일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365일로 계산한다면 주후 32년이나 33년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보통 A.D. 33년에 있었던 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약학자 가운데 헤롤드 훼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육십이 이레가 지난 해가 주후 33년3월30일로 나왔습니다. 또한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입니다. 그날부터 닷새째 되던 금요일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25절). 훼너는 예수님의 탄생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종려 주일에 초점을 맞추어 그 기간을 그 시간과 일치시켜 주후 33년3월30일이라고 한 것입니다."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26절).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놀라운 예언입니다.


마지막 한 이레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것을 앞의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바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후 33년에 7을 더하면 주후 40년이 되는데 그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 한 이레를 주후 33년으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때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괄호(parenthesis)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 괄호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다루신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섭리하셨다고 생각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오시고 하나님의 율법이 계시된 땅의 사람들인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채 상당 기간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대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기억에서 망각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만큼 전한 후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흥의 기간을 주시고 그 백성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마지막 한 이레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한 이레는 칠년입니다. 그 칠 년 동안 유대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고 또 들을 둘러싼 놀라운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절).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한 왕> 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적그리스도는 부활한 로마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그런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경제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유럽 각국들이 어느 날 정치적인 목적으로 결속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로마 제국의 영화를 다시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어느 날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강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27절).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마지막 7년 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능력이 많은 한 인물에게 메시야의 소망을 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고 그를 통해서 자기들의 꿈을 성취해 보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3년 반 만에 그가 결정적으로 변심하면서 그들의 제사의 권리를 빼앗을 때 비로소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가 그들의 메시야가 아니라 2천년 전에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리스도가 그들의 진정한 메시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스라엘 민족이 중요한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질 그 시침을 향해 가고 있는 놀라운 시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는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    목 : 종말론적 삶의 태도. (19)

주    제 : 종말론

성    경 : 계14:6-13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세상과 짝하지 말고 부지런히 복음 전해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자.

 

요즘 세간에 종말론 논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말세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논쟁하는 것도 말세의 증거 중에 하나라고 생각 됩니다.그런데 말세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는가 하는 그 시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예를들면 1992년 10월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대해 논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나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과연 재림을 준비하는 태도보다 재림의 시각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공항에 가면 비행기의 이륙과 착륙을 통제하는 관제탑이 있습니다.그 관제탑에서  일하는 기사는 비행기의 착륙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그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비행장 저 바깥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이 신부는 자기 신랑이 도착하는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 곧 신랑이 도착하리라는 기대만으로도 큰 흥분과 감격을 안고 화장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얼굴을 매만지고 신랑 맞을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비행기의 정확한 착륙 시간을 알고 있는 관제탑 기사와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신랑이 곧 오리라는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신부의 삶의 자세는 너무 많이 다릅니다.주님을 기다리는것 자체도 의미 있지만, 주님을 어떤 자세로 기다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본문에는 이 역사의 최후의 위기를 앞두고 세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각각의 천사들이 종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데,그 속에서 우리는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각각의 메시지를 분석해 봅시다.“심판의 때가 임박했다” 이것이 첫 번째 천사가 선포한 메시지입니다.7절을  보십시오.“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지금까지 역사에는 많은 위기가 있어 왔습니다.그러나 본문이 취급하고 있는 때는 그 많은 위기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결정적 위기, 역사의 마지막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것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심판과는 다른 마지막 심판입니다.천사는 이 위기가 임박했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암시해 줍니다.6절을 보십시오.“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천사가 공중을 날면서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영원한 복음을 가진 그런 이미지로 나타난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성경에 보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 사례는 없습니다.어떤 주경학자의 말처럼, 이 천사는 그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그것을 전달할 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미지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해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여러 나라, 족속, 방언, 백성에게 전할….”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나라와 족속은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사실 지금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복음이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러나 모든 족속에게 다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한 나라 안에도 여러 개의 족속이 있습니다.미국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또 중국이나 소련의 경우도 여러 족속들이 섞여 있습니다.성경학자들은 이런 족속들을“people group”이라고 일컫습니다.이들 중에 아직도 자기들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족속들이 수천 족속입니다.그들에게까지 다 복음이 전해져야만 예수님이 오십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방언(language), 모든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천사.어떤 주석을 읽어보면, 여기의 영원한 복음을 특별히 말세에 전할 또 다른 복음처럼 설명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성경 전체의 계시와 부합되지 않습니다.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다른 복음은 없습니다.그런데 왜 여기서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했을까요? 복음 자체의 효력이 시공(時空)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복음은 과거에도 복음이고 지금도 복음이고 앞으로도 복음이고 말세에도 역시 같은 복음입니다.그것은 영원한 복음입니다.그리고 복음의 능력은 진실로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꿉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세에 이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절에 그 목적이 계시되어 있습니다.“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지구촌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모든 백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인간이 다른 모든 종류의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성이 있는데,그것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을 닮아 영으로 피조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중요한 특성을 갖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아직도 예배를 배우지 못한 사람, 나를 지으신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입니다.말세는 그들에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그들을 향한 심판의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시간이 없습니다.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그들을 창조하신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 말세에 등장한 이 첫번째 천사는 그 심판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그것이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 두번째 천사가 등장해서 8절에서 그 메시지를 전합니다.“또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성경에서 바벨론은 항상 하나님을 거역한 세속성의 상징입니다.문자 그대로의 바빌로니아 왕국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세속성을 대표하는 바벨론의 원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바벨이란 이름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0장입니다.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바벨의 시조입니다.이어지는 11장에는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니므롯의 선동 때문에 바벨탑이 쌓아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이 바벨탑 사건이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실 것에 대비해서 다시는 흩어지지 말고 똘똘 뭉쳐서 이제부터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하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주장,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 중심의 문화, 인본주의 문화를 나타냅니다.하나님을 거스리는 이러한 모든 사고 방식과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말세가 가까울수록 이 바벨의 원리가 점점 더 이 땅에 횡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번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무너졌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쓴 것은 그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강조하시려 할때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그 표현은 “아멘  아멘”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두 번 반복한 것입니다.복음서를 읽다가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이 나오면 눈을 번쩍 뜨고 읽으십시오.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까요.여하튼 바벨론이 분명히 무너졌습니다.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과거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그 가능성이 너무도 확실할 때 「결과 동사」 혹은 「예언적 과거」라고 하는 과거 동사를 씁니다.여기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속성이 기어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과거 시제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음행 때문입니다.하나님을 섬겨야 할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음행입니다.우리의 애정, 우리의 경배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 있어야 합니다.그 하나님에게서 다른 데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음행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바빌로니아 왕국은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이것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 강조되는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그들이 모든 나라를 통해서 또 수많은 종류의 삶의 영역들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 하겠지만 결국 그들은 무너지고야 맙니다.


예레미야서 51장 찾아보십시오.바벨론에 대한 예언입니다.6절에 보면“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報讐)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고 했습니다.이 말씀은 바벨론적인 삶의 원리를 따라 살던 사람들은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면 거기서 빨리 뛰쳐나와야 한다는 경고입니다.반(反)바벨론적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의 원리입니다.


그 다음 절인 7절을 보십시오.“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 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은 바빌로니아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게 바벨론의 독주를 마시고 미치게 합니다.전세계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나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그러나 8절의 예언을 보십시오.“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創傷)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바벨론은 무너지지 않을 것같이 그 강성함을 자랑할 것이지만,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파멸 속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이것이 심판의 때입니다.두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을 선포하였습니다.우리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진정한 애정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그것이 말세를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세번째 천사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의 약속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았던 사람들,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그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입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오.“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세상을 따라서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편하게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결국은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생각해 보십시오.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일 하면서도 희망이 있는것은 조금 있다가 집에가서 쉴 수 있다는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고통이 복음을 거절하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형벌입니다.이들과는 반대로 복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그 축복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12,13절입니다.“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때문에 죽은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이들이 받는 복의 내용이 13절  하반절에 나타납니다.“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여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축복과 형벌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습니까?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쉼이 없으나 신앙을 지킨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보상으로 쉼이 주어집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 마지막에 유쾌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하루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쉬면 제대로 쉴 수 없습니다.또 마치긴 마쳤는데 부당한 방법으로 마쳤을 때도 편안히 쉴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고 잘 보낸 일생이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 준다”고 말했습니다.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주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 윤리적 성실성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성실성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사람들, 그들만이 주 안에서 죽을 수가 있습니다.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정한 안식입니다.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램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했습니다.누구나 다 진정한 쉼,참된 쉼을 누리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희랍 사람들은 월요일날 쉬었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화요일날 쉬었습니다.수요일에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목요일에는 이집트 사람들이,금요일에는 터키 사람들이 쉬었습니다.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쉬었습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쉬는것은 주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이처럼 안식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있지만, 결국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옛날 저 미국 남부에서 백인들에게 학대받고 시달리던 흑인 노예들이 부르던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고 합니다.“그 어느 날, 내일이 일요일이 되리라”“그 어느 날, 날마다 일요일이 되리라”주일에는 쉴 수 있으니까 그 쉼에 대한 열망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열망, 그러나 그 영원한 안식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주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예배당만 왔다갔다 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성실하게 산다는 말입니다.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이제 세 천사의 메시지를 정리해 봅시다.


첫번째 천사는 심판의 때가 가까왔으므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두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은 정해진 사실이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세번째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의 약속을 전하면서 주 앞에 축복받는 자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종말론적 삶의 태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 인생에 너무도 필요한 안식, 그러나 참된 안식을 사모한다면 오늘은 주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땀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주님의 말씀을 따라 최선을 다하며 살 때, 주께서 날 부르실 때 “주님, 이제 제가 쉬려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때 주님은 “내가 너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 마지막 날의 그 멋진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말세라고 하는 이때에 더욱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제    목 : 최후 심판의 드라마. (20)

주    제 : 종 말 론

성    경 : 계20:7-15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 교회

                   

요한계시록 20장7절-15절입니다.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그러나“천 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든 상징적으로 이해하든 간에 천년왕국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모든 학자들이 일치를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천년왕국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죽으면 천당에 갈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의 그 천국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천년왕국은 천국의 가장 가까운 형태이기는 하지만 천년왕국 자체가 영원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그것은 일정한 기간입니다.천년왕국은 천국의 서곡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다시 풀어 주시는 이유


요한계시록 20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장 당황케 하는 구절은 7절 말씀입니다.“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성경의 순서를 따르자면 사단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혼란이 있고 그 다음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나라가 전개됩니다.그런데 왜 천년후에 하나님은 사단을 다시 풀어 주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이 두 가지 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계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로,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뿌리 깊은 것인지 그 죄악의 철저한 절망성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일것입니다.죄악의 철저한 절망성에 대해 다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우선 사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천년의 결박  끝에 풀려 나온 사단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8절).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미혹하다>입니다.그러니까 사단은 천년 동안 혼나고도 아직도 달라진게 없는 것입니다.사람들을 그리고 열국을 미혹케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여기에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그 죄악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볼 수 있습니다.달라지지 않은 사단의 사단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 편에서 좀 생각해 봅시다.사단이 열방들과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을 당한 것은 역시 사람들입니다.그리고 미혹을 당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요즈음  예수 이름으로 귀신(악령)들을 꾸짖고 추방하는 운동들이 일고 있습니다.그 자체로는 아무런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그것은 성경적이고 또한 타당한 것입니다.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을 자주 대하다 보면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육체적인 질병도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이고 정신 이상도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이니까 사단만 쫓아내면, 귀신들만  쫓아내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들이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포로로 삼으려고 할 때, 악령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할 때, 거기에 호응을 한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우리는 그 1차적 책임에서 결코  면제되지 않습니다.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고치는 결단 없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나중에 가서 인격이 파괴되고 맙니다.귀신 쫓아내는 운동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을 보면 나중에는 도덕성을 잃습니다.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개하려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결단이 없어집니다.물론 만국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미혹을 당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책임입니다.회개가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그리고 그 후에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책망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다시 미혹을 받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천  년간의 놀라운 주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나서도 여전히 부화뇌동하여 마귀를 따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그 철저한 부패성을 깨닫게 됩니다.이것을 저는“죄악의 절망성”이라고 부릅니다.죄라는 것이 이토록 철저하게 절망적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바로 마지막에 사단이 잠깐 놓인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 안에 뿌리 박힌 죄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서운것인지, 죄악의 그 절망성, 죄악의 심연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심판의 당위성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죄악의 절망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합니다.심판의 당위성은 바로 죄악의 절망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이 마지막 심판은 징계가 아닙니다.징계라는 것은 고쳐질  가능성을 믿고서 행하는 것이며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징계는 회복을 겨냥합니다.그러나 이 마지막 사건은 문자 그대로 심판(judgement)입니다. 회개가 불가능한 사단에게 얽매여 사단을 추종하며 회개를 끝까지 거부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그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최후 심판의 광경


심판자 : 아마도 심판자는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이고 심판을 진행하시는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11절).주께서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런데 왜 그분이 앉으신 심판의 보좌를 흰 보좌라고 했을까요? 흰색을 보면 깨끗함과 순결을 연상하게 됩니다.바야흐로 인간의 철저한 죄성을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장면에 등장한 주님의 보좌가 흰 보좌라는 사실은 아마 이 검은 죄악을 심판하실 주님의 거룩함에 대한 상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이 흰 보좌 위에 앉으신 그리스도야말로 인류를 심판하기에 홀로  자격 있는 분이십니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인류 속에서 그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오직한 분, 참으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홀로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심판의 대상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12절).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마지막으로 심판의 보좌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죽은 자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입니다.우리는 끊임없이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나누며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갑니다.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가장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역사속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이 심판의 보좌 앞에 반드시 서야 합니다.“한 번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심판의 원리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이 펴졌으니 또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12절).심판의 기준은 언제나 행위입니다.행위대로라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지만 심판은 행위대로입니다.13절에서 한 번 더 강조됩니다.“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각 사람은 행한 낱낱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14절).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불못에 던지움을 받을 것입니다.이것이 심판의 마지막 결과입니다.그런데 이 불못에 먼저 던지움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10절을  보십시오.“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먼저 마귀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그리고 그 심판받은 거짓 선지자와 짐승도 던지움을 받으며 그 다음에는 행위를 따라 심판받은 모든  자들이 던지움을 받습니다.그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서 사단을 추종했던 자들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를 위해 예비된 곳입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지옥은 본래 사람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 아닙니다.하나님은 한 사람도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마귀를 따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10년 전쯤에 매우 인상적인 전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그 전도지 겉장에는 “당신은 지옥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만 씌어 있었습니다.그래서 뒷장을 넘기니까 “아무 할 일이 없다”라는  재미있는 대답이 적혀 있었습니다.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나 저절로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무엇인가 중대한 결단 없이는, 방향의 전환 없이는 누구나 다 파멸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죄값을 치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어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물론 이것은 하나의 시적인 표현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망과 음부도 마지막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합니다.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그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을 우리는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그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더라”이 둘째 사망에 대한 표현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도 나옵니다.“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의 형벌이 바로 둘째 사망입니다.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아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형벌의 장소인 불못이 죽음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사망이 마지막이 아닙니다.사망 다음에는 불못이 있습니다. 음부도 마지막이 아닙니다.물론 이 음부라는 단어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음부라는 단어를 연구할 때 꼭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 있습니다.그것은 음부란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음부는 질적인 면에서 지옥과 같은 장소이지만 여전히 기다림의 장소입니다.그곳에서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불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심판의  결국은 불못입니다.사실 전인류 가운데 이 불못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죄값은 사망이고, 사망 다음에는 죄값을 따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불못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면 희망은 없을까요? 아닙니다.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은 아주 좁은 문의 희망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지막 희망


최후의 심판 가운데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구원의 마지막 희망이 있습니다.“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15절).이 구절 자체는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그러나 이 구절은 한 종류의 사람들은 심판에서 예외적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곧,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최후의 심판의 정경 앞에서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엄숙한 질문이 있습니다.그것은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라는 사실입니다.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실 두 종류의 책이 구별되고 있습니다.“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12절).여기에는 두 종류의 책들이 나옵니다.“책들이 펴 있고”이것은 복수입니다.“또 다른 책”이것은 단수입니다.이 “다른 책”이 바로 생명책입니다.그러면 반대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에 나오는 책들에 이름을 붙인다면 죽음의 책들, 심판의 책들일 것입니다.그것이 복수로 된 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강퍅하여 좁은 문보다는 넓은 길을 훨씬 더 많이 찾음으로써 멸망하는 자들이 구원받는 자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종류의 책, 곧 생명책죽음의 책에 대한 증언이  창세기부터 계속 나옵니다.예를 들어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는 족보를 죽 읽다 보면 그들이 참으로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든지 간에 아주 간단한 단어로 그들 생애의 마지막이 정리됩니다.“죽었더라”그러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40년을 살든 70년을 살든 말입니다.생각해 보면 사람이 몇 년을  살든 뭘 했든 마지막에 가서는 “죽었더라”는 이 한 줄로 정리되는 것입니다.그런데 아담의 족보책과 대단히 대조적인 또 하나의 족보가 있습니다.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이 족보의 특성은  “낳고”라는 단어가 강조된다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이 이삭을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창세기 5장과 아주 대조적입니다.이 사람들도 죽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극복했던 것입니다.창세기 5장을 사망의  족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1장은 생명의 족보라 할 수 있습니다.창세기 5장의  그 죽음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시작 되었습니다.그러나 마태복음에 나타난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날카롭게 대조시켜서 사망과 생명의 증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마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여기에서 “한사람”이란 아담입니다.그러나 로마서 5장은 이 아담과 대조적인 또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절).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어 그 지배를 벗어날 자가 없지만 또다른 한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약속하신 그분.“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아담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왔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왔습니다.그분은  죽음 저 건너편에 부활을 약속해 주셨습니다.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영적인 생명을 보유하고 살 수 있도록 보증해 주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사망의 책, 생명의  책 모두에 끊임없이 이름이 씌어지고 있습니다.아담의 후손들은 죽음에 매인 자로  태어나 죄 짓고 살다가 죽음으로 돌아가고 심판을 향해서 걸어갑니다.끊임없이  그들의 이름이 사망의 책에 기록됩니다.그런가 하면 생명의 책에도 끊임없이 이름이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보십시오.“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당신의 이름은 사망의 책에 있든가 생명의 책에 있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본래 사망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망에 매인 자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피할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오늘날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사망의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에 갑자기 빨간 줄이 그어지고 다른 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책에 내 이름이 새롭게 녹명되는 그 기적을 한번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그 기적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복음에 의해서 됩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신뢰하는 그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 영생의 감격에 둔해집니다.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재확인시켜 주셨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셨습니다.전도하다가 부딪히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능력을 주어서 말입니다.병자 만나서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을 향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으면 그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사실 그런 일들을 보고 사람들은 참 신기해 합니다.제자들도  그랬던 모양입니다.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20절).


우리들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기적, 그보다  더 위대한 영광은 없습니다.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습니다.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하늘 나라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때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겠습니까? 여러  이적들이 복음 전파에 따르겠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복음의 균형을 상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자신의 이름이 하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합니까? 주께서도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셨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바울은 자신의 이름은 물론 자기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의 기업을 함께 나눌 사람들입니다.자신의 이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의 이름과 남편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없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 일어나야 할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입니다.다가오는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우리 모두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아는 행복을 선사하십시오.최후 심판의 무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일어날 사건, 곧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외치던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목: 종말론/하나님의 사람 다니엘. (21)

주    제: 종 말 론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6장

논    지: 다니엘은 끝까지 순결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설교요약

1.다리오 왕도 교만하게 자기 권세를 의지했다.

2.새 정권에서 관리가 되었으나 음모를 받는 다니엘

3.다니엘의 총명과 지혜는 성령에 의해서 였다.

4.다니엘은 충성되고 순결한 사람이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이 어떠한 유형의 신앙인이었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다니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입니다. 1장에서부터 저는������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다니엘서의 주제를 계속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역사도 변하고 정치 지도자도 변하고 체제도  변하고 권력은 한 제국에서 또다른 제국으로, 한 왕에게서 또다른 왕으로 계속 옮겨 가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역사의 주인이 되십니다. 역사 위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선명하게 증거하는 것이 바로 다니엘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6장에 들어가기 전에 5장의 마지막 부분인 30절 이하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그날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절). 한 제국이 몰락하고 또다른 제국이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는 모습과 함께 6장이 펼쳐집니다. 6장은 다리오의 통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분의 나라를 지상의 역사 속에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어느 시대 어느 역사 속에서나 자신의 사람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다니엘서 6장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도 쓰셔서 자신의 일을 계속 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다니엘서 6장처럼 널리 알려진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우리에게 퍽 익숙했던 이야기가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다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다니엘서 6장은 성경에서 가장 연구가 덜 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것은 으례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으로 묵상을 게을리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입니다.


다리오의 정체


다니엘서 6장은 1절에서부터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다리오가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1절).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대제국의 첫번째 통치자는 다리오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처럼 다리오 역시 세속 역사 속에 전혀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려 드는 사람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다니엘서의 역사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등장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자를 고레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본문에는 고레스가 등장해야 하는데 대신 다리오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견해 두 가지를 우선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견해/다리오는 고레스와 동일한 인물이다.


이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대 왕들은 여러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왕에 대해서도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왕을 부르는 관습이 고대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와 고레스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 때 가장 문제시 되는 구절은 6장28절입니다.“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첫번째 견해를 따른다고 하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겠습니까? 그런데도 첫번째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즉,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에서 접속사 “와”를 “그리고”로 해석하지 말고 히브리 문법에 따라 동격을 나타내는 콤마(,)로 보게 되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 곧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첫번째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둘째 견해/다리오는 고레스 왕의 휘하에 있던 장군 중에 하나였다.


최근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은 이 견해를 상당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의견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단 5:31)라는 구절은 영어 성경의 경우“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는데”로 번역된 판이 많습니다.“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다”즉, 다리오라는 인물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자기 나라를 새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바벨론을 무너뜨린 고레스 왕에 의해서 바벨론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임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1절을 보십시오.“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1,2절). 여기서도 다리오를 메대 바사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제왕이라고 하지 않고 방금 무너진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의 통치자로 임명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라는 사람은“다리오”라고 불리워졌는데, 성경학자들은“다리오”라는 이름도 어쩌면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당시 통치자에게 붙여진 독특한 명칭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다리오의 본명은 나보니도스에 관한 역사적인 문서에 의해 우그바르(혹은 구바르)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구티움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던 통치자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도지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주전 539년에 벨사살의 연회 잔치를 기습하여 바벨론을 함락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함락된 바벨론을 둘러보고 떠나면서 고레스 왕이 그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우그바르를 임명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도 이 견해가 좀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바벨론은 굉장히 광대한 제국이기 때문에 많은 도지사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그 위에 다시 총리를 두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바벨론 제국 황혼기에 다니엘은 이미 그 제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통치자가 한 지역에  들어와서 그곳을 부분적으로 다스릴 또다른 인물을 임명할 때는 그 지역을 아주 모르는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참신한 인물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다니엘이 선택될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또다시 다니엘은 바벨론 지역을 통치하는 정부 고위 관리의 자리에서게 됩니다. 이것은 다니엘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즉, 번영과 출세가 보장되며 생이 순조롭게 풀려 갈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번영과 위기는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다니엘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이 행운의 시간 속에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그릇된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핍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엄격히 말해 핍박이 아닙니다. 순교도 아닙니다. 순교 컴플렉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핍박받는 것을 순교로 간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순교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정당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나의 정당한 행동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의(義)를 위해서 받는 핍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유형의 핍박을 그의 생애의  황혼기에 한번 더 맞이하게 됩니다.


다니엘에게 찾아온 위기 (다니엘에게는 두 가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의 개인적인 삶을 조사해서 흠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은 다니엘을 마치 천적처럼 생각했던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다니엘이 새로운 나라에서도 또다시 출세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 주변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그의 삶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둘째로,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법률 개정이 착수되었습니다. 첫번째 계교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니엘의 적들은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법률 개정에 착수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이것은 일상적으로 다니엘이 참되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기도하는 시간을 구별하여 갖고 있음을 안 적들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 추진한 교묘한 함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은 어떠했습니까?


위기 가운데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


저와 당신은 80세쯤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까요? 저는 다니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다음의 시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2-15).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노년의 다니엘의 인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의인 다니엘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80세가 되어서도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아마 할 일이 없다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순간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청청한 빛을 발하는 견고한 나무인 다니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영광을 선포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의 인품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3절).“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를 우리 말 번역대로만 읽으면,“다니엘은 굉장히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며”라고 이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이 “아주 놀라우신 영을 소유하였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우신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아주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었으므로”다니엘의 지혜와 탁월한 판단력은 다니엘 자신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총명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했기에 주(主)의 영이 그 속에 역사하여 이루어 낸 놀라운 결과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도 성령 충만했고 늙어서는 더더욱 성령 충만했습니다. 젊어서도 그의 지혜의 근원은 성령이었습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그가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니엘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여 그의 개인적인 삶을 조사했던 사람들은“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14절). 유명한 전도자인 D.L. 무디가 한창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을  때에 “저 사람 말만 잘할 뿐 자기 삶은 형편없을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집요하게 무디의 사생활을 파헤쳤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디의 삶에서 그 어떠한 결정적인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자, 도리어 무디의 그러한 삶에 감동받아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과 저의 삶을 조사한다고 해 봅시다.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를 무너뜨릴 만한 결정적인 흠은 없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할 만한 결정적인 흠이 그의 삶 속에는 없었습니다. 순결함이야말로 어쩌면 다니엘이 늙어서까지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4절을 보십시오.“...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다니엘은 임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그는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매사에 충성스러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과제로 알고 주께 하듯 성실하게 감당했던 다니엘. 그는 진실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충성스러움이야말로 하나님이 다니엘을 쓰신 비밀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나라가 바뀌어도 정치 체제가 바뀌어도 충성스런 다니엘은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다니엘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다니엘이이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절). 간교하고 음흉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새로운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왕 외에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기도하면 사자굴 속에 넣겠다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10절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실은 다니엘이 그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기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사자굴 속에 던져져서 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집에 돌아가 전에 행하던 대로 주께 기도하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 한번 이름이나 남기고 죽자는 식의 소위 순교적 명예심 때문에 나온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소 습관이 그랬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 앞에서도 이 경건의 습관만큼은 결코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진실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은 타협을 거절하는 경건이었습니다. 사실은 쉽게 타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경우처럼 우상 숭배를 하라는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기도를 공개적으로만 안 하면 그만인 상황이었습니다.“30일간이니까 그 동안에는 마음 속으로만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이렇게 합리화하고 적당히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단 하루라도 경건의 습관이 허물어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늘상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누군가가 생명을 위협해도 다니엘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삶의 보배는“내 주님과의 교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창을 열고 교제하며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만큼 다니엘의 일상적인 일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 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다니엘이 하나님을 주일에만 예배 시간에만, 혹은 일이 잘 풀릴  때에만 섬긴 것이 아님을 불신자인 왕조차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세월이나 상황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 경건한 다니엘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다섯째로, 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23절). 흔히들 다니엘서를 대할 때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사자의 이빨이 다니엘을 물지 못한 극적인 사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니엘의 사람됨입니다. 다니엘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 있는 굴 속에서도, 즉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다니엘은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하나님, 당신을  신뢰합니다. 비록 상황은 이래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이런 다니엘을 어찌 하나님이 지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결국 그의 사람됨이 기적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내 사업과 인간 관계가 번창하기만을 하나님께 요구할 뿐, 자신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별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다니엘 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만한 사람됨을 사모하십니까? 이제 고개를 돌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위기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람의 이 놀라운 인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아버지, 날이 갈수록 해가 더할 수록 더욱 주님을 닮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젊은 시절보다 내 인생의 황혼의 때에 더욱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기력이 쇠잔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생애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풍성한 기적은 주를 신뢰하는 이 믿음을 주께서 친히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삶이 우리에게 던진 도전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참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그의 생애, 원수조차도 그에게서 아무 틈도, 아무 허물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순결했던 다니엘. 오 주여 또 하나의 다니엘이 되어 남은 생애를 주의 거룩한 성령으로 불붙임 받아 이 악한 세대를 믿음과 충성과 순결로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제    목 : 하늘의 할렐루야. (22)

주    제 : 종  말

성    경 : 계19:1-10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비    고 : 지구촌 교회


개역 계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본문에는“할렐루야”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사실 신약성경에서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이 요한계시록 19장에만 나옵니다.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시편에  23회 나옵니다.원래 『할렐』이라는 말은“찬양하라”를,『『루』는 사실 『유(르)』로서 “너희들의”를 그리고『야』는 하나님을 뜻합니다.그렇다면 『할렐루야』는 “너희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6-18장에서는 마지막 때에 있을, 이 세상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19장에서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지나가면서 장면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옮겨갑니다.그리하여 하늘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할렐루야 음악회가 전개되고 있는 광경입니다.이 음악회에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천천 만만의 많은 천사들이 출연하여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할렐루야의 의미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에서 울려 퍼질 이 할렐루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네 번 나오는 할렐루야의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네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구원의 할렐루야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때가 가까워 온다는데 대한 찬양입니다.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는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합니다.“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 13:11).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죄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이것은 「과거적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죄악의 형벌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었지만 죄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우리는 아직도 죄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죄악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번번이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이것을 성화(聖化)의 과정이라고 합니다.이것은 현재 우리가 이루어 나가고 있는「현재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면 우리는 언제 이 죄라는 존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 영화로운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죄 지을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미래적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형벌에 관한 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아직도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우리가 죄악과 상관없는 존재로서 인격이 완성되는 것은 마지막 때, 곧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마지막 때”를 꼭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주님이 오실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니 이 어찌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완성될 그 시간이  가까왔기에 우리가 “할렐루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도다������(1절).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여기에서 ”영광“과 “능력”이 “구원”과 동시에 강조되어 있습니다.저는 이 세 단어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구원의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장 놀랍게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최대의 사건입니다.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구원받은 사실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그러나 이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은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기적입니다.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그런데 구원이라는 기적은 영적인 기적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듣고도 별 감동을 못 받는 수가 있습니다.그러나 어떤 집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면 기적이라며 대단하게 여깁니다.물론 하나님은 신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십니다.그러나 그런 것을 구원이라는 엄청난 기적보다도 더 강조하는 집회가 있다면 이단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구원의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아주 감동적입니다.“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8-20).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능력으로 하나님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여기에서 “죽었던”이란 영적으로 죽었던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과의 생동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구원의 능력보다 위대한 능력도 없고 구원의 선물보다 더 위대한 선물도 없습니다.이러한 구원을 선물로 받고 그 구원이  완성될 순간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지막 날을 바라보면서 해야 할 일은 위대한 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둘째/심판의 할렐루야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2,3절).17,18장에서 이 세상의 정치, 종교, 문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었습니다.이제 그 심판이 다 끝나자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나옵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지막  심판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것입니다.우리는 부조리한 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습니까?“하나님, 어찌하여 악인들이 잘되고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저에게는 이런 괴로움을 주시나요?”그러나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태양처럼 밝게 나타나는 순간, 모든 불의와  불공평과 모순이 사라지고 지상의 모든 악이 심판받을 것입니다.그 순간 우리가  할 일은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셋째/완성(성취)의 할렐루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없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4절).여기에서 “아멘”의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아멘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 가운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진실로������라는  말이 바로 “아멘”인 것입니다.그런데 “아멘”이 기도문에서 쓰이게 되면 그때는 “진실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뜻이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끝마칠 때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한 내용이 그대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뜻인 것입니다.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멘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개인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우리가 역사와 사회를 내다보면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러한 열망과 소원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몹시도 절망적입니다.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고 구원이 완성되면 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그리하여 각 개인을 향한 모든 기도를 이루시고 역사를 향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그 하나님께 우리는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할렐루야를 외칠 것입니다.


넷째/섭리(통치)의 할렐루야 :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를 다스리셨다는데 대한 찬양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인 어린양 혼인 잔치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7절).어린양 예수님의 예비된 신부는 바로  교회입니다.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예비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우리는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의 중요성을 종종 과소평가 합니다.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성도들이 여러 교파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 속한 모든 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십니다.교회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1,22).맨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교회가 있고 그 아래에 만물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즉,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섭리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교회를 통한다는 말은 곧 성도들을 통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입니다.하나님은 개개인을 쓰시기도 하지만 교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여기십니다.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님은 가장 가슴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준비시키십니다.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통해서, 교회에  속한 개개인인 우리 성도들을 끊임없이 정화시키십니다.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깨끗해지게 됩니다.그리하여 하나님께 점점 더 쓰임받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다가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그 손길을 통해서 주님 앞에 온전한 자로 예비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 신랑 되신 주님은 우리 개개인의 혹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내적인  아름다움, 곧 인격적인 거룩함을 보고 싶어하십니다.“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7,8절).마지막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바로 의(義)입니다.우리가 얼마를 벌었고 우리가 얼마나 명예를 얻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의로움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그렇게 정결해졌을 때  비로소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거행되게 됩니다.


옛날 유대의 결혼에는 세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우선 정혼식이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정혼식이 결혼식보다 더 중요했습니다.그들은 어렸을 때 일치감치 배필감을 정해 버립니다.그렇게 정해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정혼식은 결혼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정혼할 때 반드시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지참금을 주어야 했습니다.그리고 기다림의 때를 거친 뒤에 때가 다 차면 일단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다시 신랑 집으로 옵니다.그때 신랑 집에서 잔치가 열리는데 본문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단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우리에게도 적용해 봅시다.언제 우리가 주님과 정혼을 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주님의 영원한 신부로 삼을 계획을  창세 이전부터 갖고 계셨습니다.그것이 우리의 정혼식입니다.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그 흘리신 피가 바로 지참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그 다음에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이 기다림의 때에 해당합니다.그런데 기다림의  때에 신부는 신랑의 기대에 합당하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약혼 후에 신랑 신부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결혼 때까지 상대방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이처럼 우리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앞에 점점 더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 살펴봅시다.“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결혼식장에서 “신부 예쁘다”는 말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당사자인 신부가 아니라 신랑입니다.신부는 신랑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신랑 되신 예수께서도 교회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신부로 설 수 있도록 손수  화장품을 제공하십니다.그것이 바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도구는 말씀입니다.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여 점점 성화(聖化)되어 그 성화가 완성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기다려집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주님 곁에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 몹시도 기다려지겠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삶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9절)고 했습니다.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마지막을 의미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순간이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할 일은 “할렐루야”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살롬!

그동안 올려주신 설교말씀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결코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어렵지않은 말씀의 전달 능력과 군더더기가 붙지 않고 온전히 성경말씀을 전하시면서 듣는 자와 함께 생각을 몰이하는 감명깊은 설고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신 어휘에 더욱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수준 높은 말씀을 소개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