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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숨어계시는 하나님(사45장9-15)

숨어계시는 하나님(사45장9-15)


  

출 처이동원목사

우린 모두 어린 시절 숨박꼭질의 추억을 간직합니다.

생각나십니까?

술래가 되어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소리치면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친구들을 찾아다니던 추억 말입니다.

때로 친구들의 은둔 술이 완벽하여 찾고 또 찾아도 찾지 못하고 지쳐버리면 우리는 국민가수 조용필처럼 노래라도 하고 싶어지지 않으셨습니까?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언제나 술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나간 20여일의 아프간 사태를 경험하면서 느낀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까? 피납 가족들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성도들의 안타까운 중보 기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고 숨어 계신 하나님말입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그분은 왜 당신의 임재를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주지 않고 꼭꼭 숨어만 계셔야 했단 말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때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역상16:11에 보면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고 했고, 역하7:14에서는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이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을 때 성경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31:17에서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리라, 27:9에서는 시편기자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 15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우상 숭배의 범죄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의 조국은 무너지게 될 것이고 마침내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과연, 그의 예언처럼 그의 나라는 여기서 저기서 신음소리를 내며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뜻있는 주의 경건한 백성들은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반전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이스라엘 땅은 더 깊은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살아 계시다면 그는 숨기라도 하신 것일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이런 역사적 정황처럼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으로 느껴지는 답답한 삶의 정황에서 인생들이 묻는 대표적 질문들과 하나님의 대답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A. 인생의 질문

우리가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허용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과연 사랑이십니까? 당신은 과연 전능자이신가요? 그리고 역사의 지난날 그렇게 기적으로 역사하시던 주님, 도대체 오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런 질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진실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도대체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악한 일들이 인생의 장에 허용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때 우리의 사고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단계적 수순을 지나갑니다.

1)우리는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나쁜 것을 주지 않는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나쁜 일들을 경험한다.

3)따라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선언의 진정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확실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이 악한 일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악한 일들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닌 악한 자 곧 마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나쁜 일들이 정말 나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나쁜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선한 결론을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은 경우들을 너무나 자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경험한 청년 시절의 모든 나쁜 일들 때문에 요셉은 마침내 축복의 근원된 삶을 살아 갈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아직은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시라고 결론을 서두르지 마십시오.

 

2.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이 질문을 묻는 우리는 또다시 다음과 같은 사고의 논리적인 수순의 단계를 지나갑니다.

1)하나님은 전능하셔서 해결 못할 일이 없으시다.

2)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기도하는 일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3)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결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결을 바라는 문제가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되기를 원하지 않는 문제일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그분은 그분 자신의 품성이나 뜻을 거스려 행동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가 있을까요?

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속성이 참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그분의 뜻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일들 중 응답되지 않는 일중에는 꼭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이 달라서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온전하신 뜻을 헤아려 알기 까지 결론을 서두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시다고 말입니다.

 

3. 하나님은 불변하신가?

이 세 번째 질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나간 역사의 날들에 행하신 많은 기적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딜레마는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상황에서는 그 하나님이 왜 동일하게 기적을 행하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는 말이 진실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불변이십니까? ” 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옛날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과거의 하나님은 믿지만 오늘의 하나님, 현존의 하나님은 믿지 못하겠다고 결론을 서두르는 성도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과거에 하나님이 이렇게 기적을 행하셨으니 오늘도 이렇게 기적을 행하셔야 한다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개입의 방식을 결정하고 배우로서의 하나님을 출연을 기다리는 우리의 사고가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하실 의무가 있는 분이신가요?

그분의 불변은 방식의 불변이 아닌, 존재의 불변이요 품성의 불변임을 기억하신다면 그분이 불변하지 않다는 우리의 결론은 너무 피상적이고 조급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대답을 들어 보실까요?

 

B. 하나님의 대답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대답은 인생에게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시고 사랑이시고 불변하시다는 것을 입증하시고자 하심으로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하는 우리 인간이 차라리 누구인가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에 하나님은 두 가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9절은 질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비유이고, 10절은 자식을 낳는 부모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환난의 날 하나님의 사랑을 회의하고 하나님의 전능성을 질문하는 인생에게 두 가지 레슨을 말씀하십니다.

 

1. 교만을 버리라.

그는 이런 질문을 하는 인생의 사고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일하심을 통제하고 다스리려는 인간의 교만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질그릇된 인생이 토기장이에게 무엇을 만드느냐, 왜 이렇게 만드느냐고 묻는 것이 합당하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무엇을 낳고자 했소 라고 묻는 것이 합당한 일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의 본질은 피조물성의 망각입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영어로 ‘humility'라고 하는데 본래 라틴어 ’humus'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뜻은 본래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피조된 존재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교만을 먼저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 어쩔수 없는 고난의 상황을 만나면서 비로소 우리가 신이 아닌 한계를 지닌 피조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2. 주를 신뢰하고 주의 방법에 맡기라.

우리가 우리의 피조물성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명령하려는 태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명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1-12절의 말씀이십니다.(내게 명령하려느냐--내가 명령하였노라)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우리의 기도는 바로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스위스의 개혁자인 즈빙글리(Zwingli)가 전염병에 들렸을 때 그가 무릎을 꿇고 드린 기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사실 본문에서 기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방법은 전혀 이스라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선민이 아닌 이방 페르샤의 지도자 고레스를 일으켜 그 민족을 회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이스라엘 백성의 뜻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13절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내가 공의로 그를(고레스-45:1)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마침내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도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C.S.루이스 교수의 나르니아 연대기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숲속에서 눈을 뜬 (Jill)이라는 소녀는 목이 말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시내가로 달려가려고 하다 보니까 시내 가에 위엄에 가득 찬 사자가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몸을 쉬고 있었습니다. (나르니아 스토리에서 이 사자 아슬란은 언제나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사자를 보고 겁에 질려 주저하며 시내가로 내려오지 못하는 어린 소녀 에게 사자가 먼저 말을 건넵니다.

목이 마르지 않느냐?”

, 목이 말라 죽겠습니다.”

그러면 어서 와서 마시도록 해라

 

그러나 소녀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마시는 동안 당신은 잠시 이곳을 떠나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답 대신 사자가 포효를 하자 그 소리는 마치 건너편 산 전체를 움직일 듯 거대한 울림이었습니다.

사자님, 저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요. 당신은 저 같은 소녀도 삼키시나요?” “나는 소녀와 소년은 물론 어른 남자도 여자도 왕도 황제도 도시도 나라도 삼키느니라

그러면 저는 무서워서 도저히 당신 곁으로 갈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목이 타서 죽느니라

 

그러자 소녀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다른 시내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때 사자는 긍휼에 가득 찬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시내 물은 없느니라

 

루이스 교수가 이 이야기로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사실은 이사야 45장 전체의 핵심적 선언인 것을 아십니까?

45:5입니다.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6절에도, 14절에도, 18절에도, 21절에도, 22절에도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우리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환난의 허용 그리고 이런 답답한 상황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해결도 없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가 낯설고 두렵게 느껴져서 그분을 향한 접근이 조심스러워도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없는 긍휼로 가득 찬 그의 속삭임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희망, 다른 방법은 없느니라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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