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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동원목사

[스크랩] ?이동원 목사 설교 모음 (2)

이동원 목사 설교 모음 (2)

 

주옥같은 설교를 남겨주신 이동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더불어 이 좋은 자료를 모아 모든 이들에게 공유할 수 있게 하신 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료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먼저 저작자와 자료를 제공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제 목 : 마지막 추수. (14)

주 제 : 종말론

성 경 : 계14:14-20

논 지 :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억하고 자신이 믿음에 바로 서있는가 확증해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유대 민족은 전통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기초로 살아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2차 대전을 계기로 2차 대전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학살되는 것을 보고“여호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무신론자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동일한 색깔의 질문이 다른 형태를 띠고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런 질문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거나 혹은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가고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은 고통을 받고 부정직한 사람들은 더 큰소리를 치며 잘사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받고 불의한 사람들은 오히려 출세하고 권력을 잡는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축되어 가고 불신앙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氣를 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일까?”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에 대해 회의하며 혹은 기독교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이러한 회의와 포기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리려면 하나의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전제가 없다면, 기독교에 대해 회의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전제는 바로 “마지막 심판이 없다면”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마지막 심판은 없는 것일까요?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심판은 그릇된 역사를 교정하는 하나님의 손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종종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불의를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우리 동양에서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모든 것은 결국 옳은 대로 귀착된다는 뜻입니다. 동양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정당성은 인정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줍니다. 이런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들을 세워 주시는 일들이 있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세상도 여전히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심판이야말로 인간 역사의 모든 오류를 청산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공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있어야만 하고 또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마지막 심판이 마지막 추수라는 낱말로 묘사 됩니다.심판 때를 추수 때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 장(章)인 마태복음 13장에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그 비유 중의 하나가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뿌린 씨는 알곡이고 원수가 심은 것은 가라지인데, 그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하고 묻습니다. 이때 주인은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대답합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30절).본문에서 바로 그 추수 때가 온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추수하는 주인은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이 추수하는 주인은 재림하실 예수님인데, 14절에 그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구름 타고 오실 주님이 심판을 위하여 이 땅 위에 다시 임하십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세상에 오실 때는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재림하실 때는 추수하기 위해 오십니다. 그분은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계셨는데, 금 면류관은 영광스러운 왕을 나타냅니다. 옛날에는 왕이 재판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금 면류관은 재판장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십니다. 그분은 손에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계십니다.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이 마지막 추수는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알곡 추수(14-16절)와 포도송이 추수(17-20절)가 그것입니다.

 

알곡 추수

 

본문15절을 보십시오.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첫 번째 추수는 곡식이 다 익어서 그것을 거둬들이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추수입니다. 이 곡식은 택한 백성들,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천국 창고에 거둬들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추수에 관해서 어떻게 예언하셨는지 종말 장인 마태복음 24장을 보십시오.30,31절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재림하시는 주님이 마지막 추수를 위해서 천사들을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택한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다 모으십니다.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창고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들이기 위해서 주께서 천사들을 통해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시간, 이것은 좋은 추수의 때입니다.

 

여기서 모아지는 좋은 곡식은 택한 백성을 가리키는데, 택한 백성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마태복음3장의 내용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 성령 세례와 불세례가 바로 다음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12절).곳간에 모아들이는 알곡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 믿고 주님 앞에 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반 절에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움을 당하는 쭉정이는 불세례(심판의 세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의 내용을 읽어 보면, 이들 알곡과 쭉정이는 회개하고 주님 앞에 온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주님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알곡이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나아왔을 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창고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靈)이니”(6절).성령의 사역 없이는 아무도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발견하고 그분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 그들만 참 생명을 가진 알곡입니다. 그들만이 마지막 날에 천국 창고에 거두어들여질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상인 니고데모,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던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었으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까지 하던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종교적이긴 했으나 거듭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지만 참으로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 알곡 추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추수를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정말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난 사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과 중국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 스파이가 한 사람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은, 그 체포된 중국 스파이가 어찌나 미국 사람하고 똑같은지 도저히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얼굴 생김새뿐만 아니라 제스추어도 미국 사람 같았습니다. 또 영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구사하는지 도저히 중국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중국 정부에서 10억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 미국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 하나를 뽑아서 아주 철저하게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완벽한 미국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게 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미국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미국 사람 같지만 실제는 미국 사람이 아니고 중국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미국 사람으로 태어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모방만 했을 뿐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열심히 모방만 합니다. 몇 년 정도 교회에 다니면 찬송가도 부를 줄 알고 기도도 할 줄 알고 또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할 줄도 알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인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겉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다시 태어남으로써 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主)로 믿는 순간, 성령이 내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이 중생의 사실이 없는 사람은 모방에 성공한 사람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매우 슬픈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 마지막 날 추수 때에 천국 곳간에 거두어들일 알곡 중에 낄 수 없는 사람들, 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그 날, 마지막 때에 주께서는 알곡을 추수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속한 사람들을 영원한 나라로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재림에 또 다른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본문 후반부인 요한계시록 14장 17절부터 나옵니다.

 

포도송이 추수

 

본래 이 포도 송이의 상징은 구약 요엘서에서 온 것입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3:13).포도송이는 죄인 혹은 악인의 상징입니다. 요엘서 전체를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포도송이란 단순히 죄인 혹은 악인이 아니라 회개를 거절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실 자신의 삶에 죄나 악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죄와 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입니다. 성경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이 사람들을 포도송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포도송이를 거두십니다. 천국 창고에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려고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 포도송이를 거두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은 심판의 추수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날카로운)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하더라” 여기서 포도가 익었다는 말은 심판의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 내킬 때 아무 때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셨다가 하나님의 때에 심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을 보십시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貫盈)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말씀은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을 심판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관영”이란 단어가 조금 생소해서 그 뜻이 바로 들어오질 않을 텐데, 영어 성경을 보면 “full”이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찰 만큼 차게 되면 그때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이든 한 민족이든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을 심판하시기 전에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 여러 번 있었지만, 이제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악인들의 죄악을 심판할 마지막 심판의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심판하실 것인지 19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다 익은 포도를 따서 포도 짜는 틀에 집어넣고 쫙 짜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 같은 붉은 포도즙이 쫙 퍼질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악인들이 받을 처절한 심판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20절을 보십시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문자 그대로 계산하면 1,600스다디온은 32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도 상징적인 표현입니다.1,600이란 숫자는 4×4×100을 해서 나온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4라는 수는 항상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1,600스다디온은 심판이 세상에 꽉 찼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즉,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 밖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성 밖이란 언제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생애 최대의 저주입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 이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겠습니까? 그러나 이들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 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 데도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저주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마지막 알곡 추수와 포도송이 추수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정리해 봅시다.41절부터 43절까지입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불법을 행하는 자들, 회개하지 않은 자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았던 자들은 마지막 때에 이를 갈며 슬피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추수의 결과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첫째로, 나는 알곡인가 포도송이인가?

 

당신은 주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질문인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며칠 전에 어떤 분이 목사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분이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지 뭡니까? 우리 주위에 이런 불행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버리운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미 버림받은 자들에게 마지막 추수 때는 하나님의 손에 불태워지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알곡입니까? 아니면 포도송이입니까?

 

둘째로, 우리 주변의 포도송이 이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 추수 때가 오기 전에 포도송이 같은 이웃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고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소망입니다. 말세에는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그래서 세상이 끝나고 역사의 막이 내려지는 그날에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해처럼 빛나는 영광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추수 때가 가까 오고 있는 이 시각에 당신은 이 추수 때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마지막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오고 나뭇잎들이 떨어지듯 역사의 가을이 곧 찾아올 것입니다. 추수 때가 올 것입니다. 이 역사의 모든 오류와 부정당함과 모든 구부러진 것들을 영원히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또 하나님께 속한 생명의 곡식을 거두어 들여서 영광 가운데 두시기 위하여 주께서 이 역사 속에 귀환하실 때가 가까와 오고 있는 이 시각, 하나님, 깨어 근신하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하시고 그 감사함을 갖고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전도의 책임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 목: 종말론/멸망의 큰 잔치. (15)

주 제: 종 말 론

본 문: 다니엘서 5장

논 지: 우리의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설교요약

 

1.고고학으로 밝혀진 성경의 권위

2.위기에서 하나님을 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벨사살

3.인간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은 하나님이시다.

4.성경 연구는 삶의 변화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5.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개역 단 5:1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4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7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 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8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 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9 그러므로 벨사살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 라니라 10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 이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른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 이다 13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14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15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16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 자를 삼으리라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 이다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 자를 삼으니라. 30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 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 였더라.

 

본문 1절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 <벨사살 왕> 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이 벨사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논쟁의 발단은 일반(세속) 역사책을 뒤져 보면 바벨론 역사 가운데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벨사살 왕은 누구인가?”

 

다시 확증된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이 벨사살 왕이 역사 속에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다니엘서 전체를 역사적 정확성이 결여된 책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혹은 성경의 명백한 교리를 뒤집는 불경건한 신학자들의 노름이 역사 속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선언이 신학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1854년 영국의 J.G. 테일러라는 사람이 고고학자 팀을 이끌고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고고학 탐사를 하는 가운데 고대 바벨론어로 새겨진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보니도스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기도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세 명의 왕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첫 번째 왕은 메로다크 왕으로서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었습니다. 메로다크는 2년 정도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의 사위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가족끼리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이후 두 번째 통치자는 네글리사 왕입니다. 이 사람은 4년쯤 통치를 하다가 물러났으며 네리글리사의 아들인 라바쉬말드크가 이어서 왕위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9개월밖에는 왕위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네 번째 통치자, 그러니까 곧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가 바로 나보니도스였습니다. 이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끼리 복잡하게 얽힌 것이지요. 나보니도스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은, 자기도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벨사살이 바로 나보니도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1854년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서 비로소 증명되었습니다. 비록, 왕위에 오른 일이 없는 벨사살에게 어떻게 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가 있느냐는 문제가 남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니도스의 통치 시기는 주전 556년부터 539년까지입니다. 주전 539년은 바로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해입니다. 나보니도스는 전쟁을 많이 한 왕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많이 하게 되니까 자연히 해외 원정을 많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외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도대체 누구에게 통치권을 위임했겠습니까? 아들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즉, 나보니도스 왕이 해외에 출정 가 있는 동안 실제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던 사람은 그의 아들 벨사살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북한에,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이 두 사람이 통치자로 있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통치자가 둘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된 바벨론 제국의 멸망 직전에도 나보니도스 왕은 새롭게 일어나던 메대 바사 제국과 북아랍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패전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보리시파라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증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메대 바사의 마지막 도전이 드디어 바벨론 제국에 임하여 왕궁에까지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니엘서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을 뒤집고 나아가 성경이 얼마나 권위 있는 책인가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우상을 찬양하는 잔치가 한창이던 순간을 기록한 5, 6절을 먼저 보십시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 벌벌 떨던 왕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7절). 이 <셋째 치리자>라는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세 번째 통치자를 삼겠다.” 왜 하필이면 세 번째 치리자일까요? 그것은 나보니도스와 그의 아들인 벨사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셋째 치리자란 왕의 바로 아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셋째 치리자를 삼겠다.>는 말이 또 한 번 나옵니다. 결국 세속 역사가가 벨사살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이미 성경이 정확하게 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증언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세속 역사에 벨사살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고 성경의 위대한 권위와 정확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539년10월, 바벨론 최후의 날에 흥겨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메대 바사의 다리오의 군대는 바벨론 궁중을 포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5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1절). 적군이 쳐들어오면 전쟁 준비를 해야지 왜 잔치를 벌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왕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벨사살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벨사살은 자기 나라를 수호하는 신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바벨론 궁중의 성벽은 굉장히 견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에게는 <설마 누가 성벽을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셋째,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제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까딱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벨사살은 그날 밤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고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殿)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器皿)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하필이면 유다가 망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기구들을 잔칫상에 대령하게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3,4절). 벨 사살은 바벨론의 우상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5절). 자기 나라의 최후를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신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벨사살 왕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의 분벽에 홀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벨사살 왕의 범죄

 

물론 1-4절에서 벨사살 왕의 범죄가 드러났긴 하지만 다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죄를 조목조목 정리하여 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22,23절). 이것이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지적해 준범죄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의도적 범죄 :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18-21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 후에 즉시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알고도... ”(22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아들>에서 <그>는 느부갓네살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몇 대 위의 선조라도 전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벨사살은 조상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가 징계를 받아 왕에서 쫓겨난 후 짐승처럼 울부짖는 정신병자가 되어 7년 동안 고생했던 일을 알고도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상의 실수가, 선배의 실수가 계속하여 답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니엘서를 지배하는 가장 중심 되는 사상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니엘서 2장21절을 보십시오. “그는(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 자에게 총명을 주시는 도다.”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며 한 민족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쇠하게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실세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5장21절에서도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똑같은 사실을 다시 선포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 이것이 다니엘서의 위대한 역사 철학입니다. 이 사실을 느부갓네살 왕은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면서 뼈아프게 배웠습니까? 7년간 미치광이처럼 들판을 기어 다니는, 하나님의 참담한 심판과 징계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고도 범한 죄이기 때문에 심판이 더욱 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22절).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공부의 목적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 삶을 바꾸는 데 두어야 하며 단순한 지식을 위한 성경 연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식만 늘려 가는 성경공부 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알고도 행치 않는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21절). 실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문자 그대로 폐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갈릴리 근처의 고라신과 벳새다 등지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도, 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의도적인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책망의 대상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둘째/교만의 범죄 : 교만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범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많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에는 이 표현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다니엘은 하나님 홀로 진실로 높으신 분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22,23절). 자기 신격화,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자기 조상이었던 느부갓네살과 똑같은 교만을 답습한 벨사살의 범죄 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우상 숭배의 범죄 : 23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벨사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그릇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을 모독했던 행위의 배후에는 자기 조상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조상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해서 야훼에게 굴복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만은, 아무도 나의 능력과 나의 영광을 초월할 수 없다” 자기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까지도 자기를 높이려는 이 뿌리 깊은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벨사살의 모습을 보십시오.

벨사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찬양하던 바로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5절).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그분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있던 벨사살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무엇을 썼습니까? 그 내용이 2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24,25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전조(前兆)인 것 같은데 글자의 뜻을 통 알 수 없어서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다니엘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다니엘은 세월이 상당히 흘러서 80세는 족히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5장을 연구하면서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순수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던 다니엘의 모습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글자를 해석하여 달라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합니다. 우선 세 번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뇌물을 주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 자를 삼으리라”이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17절). 다니엘은 황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권세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따름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일념으로 80년을 살아온 이 순수한 청년. 그는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해석을 합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메네』는 “숫자를 세다”를, 『데겔』은 “저울로 달아 본다”를 그리고 『우바르신』은 “나누다”를 뜻합니다.

 

26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26절). “당신이 얼마 동안 통치할 것이며 얼마 동안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와 문명의 연한(年限)을 정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27절). “저울에 달아보니 당신은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표준으로 보았을 때 당신은 도저히 더 이상 왕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이것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 이다.”<베레스>의 복수형이 “우바르신”입니다. 즉, 이것은 바벨론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메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동안에 벨사살 왕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최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절). 이것이 메대 바사가 일어나고 바벨론이 넘어지던 순간입니다. 벨사살이 열었던 잔치는 문자 그대로 멸망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이 교만한 왕에게 멸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순간에 다가옵니다. 잠언서 기자의 증언처럼 “악인에게는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합니다.”(잠 6:15).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은 눈 깜짝할 새에 무(無)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래로 바벨론 제국의 최후는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최후의 모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바벨론 제국의 패망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1,2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은 진정 바벨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3절).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9,10절). 한순간에 무너지는 인류의 바벨탑의 운명을 묘사한 극적인 장면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두 가지

 

첫째로,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이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를 세우고 나를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벨사살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누가 당신의 호흡을 주장합니까? 이 순간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는 내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자꾸만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은 벨사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을 죄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호흡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 하시며 나로 인생의 작정된 길을 걷게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란, 삶의 중심에 나를 놓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놓느냐 하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부패성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어 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내 삶의 초점이 되고 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전쟁터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로 호흡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자 애써야 합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고 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그들의 잔치는 멸망을 부를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바울은 같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멸망의 큰 잔치 이렇게 종말을 대비하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29절)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합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정치도 하고 장사도 해야 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욕심을 낼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 “마지막 잔치”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 “제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을 당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언제나 당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제 목: 종말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 (16)

주 제: 종 말 론

본 문: 다니엘서 7장

논 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 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신다.

 

설교요약

 

1.네 제국을 상징하는 네 짐승

2.네 제국의 흥망성쇠의 예언

3.마지막 때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믿는 자들을 미혹한다.

4.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신다.

 

다니엘서 7장과 다니엘서 2장은 표면적으로 대단히 유사합니다. 2장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계시가 담긴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7장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이상(異象)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보았던, 역사에 대한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2장과 7장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도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7장에는 2장보다 역사에 대한 계시가 좀 더 보충되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의 커튼을 열어 바벨론 제국 이후에 펼쳐질 세계 역사에 대한 좀 더 많은 비밀을 7장에서 드러내 보여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골격은 이미 2장에서 제시하고 7장에서 살을 붙인 셈입니다.

 

네 제국을 상징하는 네 짐승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2:31,3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상이 네 부분, 즉 금으로 된 머리와 은으로 된 가슴과 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종아리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중요한 제국들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는데 금으로 된 머리 부분은 바벨론을,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대 바사 제국을,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 제국을, 그리고 철로 된 종아리 부분은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왕국을 상징하는 신상은 산에서 날아 온 뜨인 돌에 맞아 부서지고 결국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느부갓네살의 꿈에 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꿈에는 신상 대신에 네 짐승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이것을 다니엘서 2장과 마찬가지로 바벨론 이후에 전개될 주요 제국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첫 번째 등장하는 사자는 바벨론을, 두 번째 등장하는 곰은 메대 바사를, 세 번째 등장하는 표범은 헬라 제국을 그리고 네 번째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짐승은 로마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는 빛나고 거대한 신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7장에서는 천박하고 잔인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관점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제국이나 제국의 열 왕들이 두려워 굴복할 수밖에 없는 대상일 것이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을 거듭하면서 한 나라가 세워지고 또 사라지는 식의, 힘으로 상징되는 인류의 문화나 왕국은 짐승의 이미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랑하는 힘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야수의 본능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현격한 차이입니다. 이제 다니엘이 본 이상을 통해서 좀 더 자세하게 계시된 네 제국의 운명을 살펴봅시다.

 

첫째 짐승/바벨론 :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힘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4절). “날개가 뽑혔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교만에 대한 심판으로 왕 위에서 쫓겨나 미친 사람이 되어 들짐승처럼 들을 헤맸던 사건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는“느부갓네살은 통치 말년에 좀 더 인간적이었다.”고 전하는 고대 문서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고생 고생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회복시켜 주신 후에 그의 통치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한 번 혼나고 나서 인간적인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가 필요한가. 봅니다. 고통이나 고난이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니 말입니다. 이처럼 사자의 모습에서 느부갓네살 왕으로 대표되는 바벨론 제국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짐승/메대 바사 :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 편을 들었고 그 입의 이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5절). “세 갈빗대가 물렸다”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보아 정확한 묘사입니다. 메대 바사 제국의 첫 번째 왕은 그 유명한 고레스 왕입니다. 일반 역사책에서는 “사이러스”라고 호칭하는 고레스에 의해 일어난 메대 바사 제국은 당시에 알려진 나라 가운데서 특별히 세 개의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우선 주전 546년에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리비안 왕국을 정복했으며, 주전 539년에는 바벨론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가 주전 525년에 이집트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곰이 세 개의 갈빗대를 물고 있다는 표현은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를 먹으라.”고 했는데 정말 그 말대로 메대 바사는 세 나라나 먹어 치웠습니다.

 

째 짐승/헬라 :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6절). “날개 넷”은 헬라의 영웅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이 단 한 번의 원정을 통해서 당시에 알려진 전 세계를 휩쓸어 버린 그 기민함을 상징하는 것이며 표범의 “머리 넷”은 알렉산더 대제 이후에 헬라가 네 명의 장군에 의해서 분열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성취된 일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대제국은 그의 사후에 안티파테르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리시마쿠스가 소아시아 지역과 드레이스 지역을, 셀리큐스가 소아시아 지역을 뺀 나머지 아시아 지역을, 그리고 프톨레미가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게 됨으로써 문자 그대로 네 토막이 나고 맙니다.

 

넷째 짐승/로마 :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7절).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꿈에 보았던 철로 된 종아리로 상징된 로마입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막강한 위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장과 비교하여 볼 때 첨가된 계시들

 

첫째/열 개의 뿔 :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20절). 2장에서는 열 발가락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7장에는 열 뿔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24절). 이 열 뿔이 개개의 세력이며 왕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2장을 공부할 때 열 발가락과 열 뿔을 연결시켜서 그것에 관한 성경학자들의 대표적인 해석 두 가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열 발가락이나 열 뿔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부활할 로마의 모습이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부활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2년 후면 유럽의 모든 화폐가 하나로 통일되며 EC를 중심으로 각 국의 경제가 하나의 구조 속으로 흡수됩니다. 게다가 동유럽의 급격한 변화와 독일의 통일 등은 흡사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합니다. 아마도 역사의 마지막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변화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다른 작은 뿔 :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또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8절).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20절). 성경학자들은 열 뿔이 열 나라의 연합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뿔”은 어떤 한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곧,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세에 왜 이 적그리스도를 허용하실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를 허용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시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단의 일평생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사건입니다. 사단도 그것을 흉내 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역사의 마지막에 사단도 드디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릴 것입니다. 사단의 성육신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상징이 바로 작은 뿔입니다.

 

셋째/인자(人子) : “내가 또 밤 이상(異象)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13,14절).

 

2장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도래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구절입니다.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24,25절).

 

여기에 3년 반이라는 위기의 시간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3년 반 동안 수리아(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했던 적이 있었긴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상징된 어떤 특정한 기간에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가 경험하게 될 무시무시한 환란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26절). 적그리스도가 권세를 빼앗길 때 사람들은“저가 하나님이 아니었구나.”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하여”(27절).<그>는 13절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역사의 마지막에 세우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성경에는“인자”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 “인자” 사상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는 칭호 가운데서 가장 즐겨 쓰신 것도 “인자”입니다. 이 말은 공관복음에 69회 사용되었으며 요한복음에만도 12번이나 나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는가를 요한복음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원을 강조하시면서 인자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이것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분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구세주가 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자라는 개념 속에는 예수님의 신적(神的) 기원과 그분의 구원자 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5:25-27).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서 구세주가 되셨고 나중에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이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의 왕국, 그분이 치리하시는 영원한 왕국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종말 장>, 혹은<말세 장>으로 불립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큰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 때 두 때 반 때, 즉 삼년 반을 상징적인 기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마 24:22). 삼년 반이라는 기간은 하나님께서 원래 작정하신 기간을 채우지 않고 아마도 감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됩니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3).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 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여기의 인자가 다니엘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작은 뿔이 어떻게 역사의 마지막을 소란케 할까요? 마지막을 향해 전개되는 역사의 마지막 시간표를 주목해 보십시오.

 

 

 

제 목 : 이 세상의 최후. (17)

주 제 : 믿음

성 경 : 계 18장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책에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는 것처럼, 지구의 역사에도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쯤 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과학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적 관점에서 새롭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어쩌면 지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고 1만 년 내외에 불과한 젊은 지구일지 모른다는 가설이 등장합니다. 지구의 연수가 오래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생물에게 필수 영양소가 되는 인(燐)이 빗물에 씻겨서 바다로 유입해서 들어가는 양이 매년 1,400만 톤이라고 합니다. 태초에 바다에 인이 전혀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에 현재와 같은 속도로 현재와 같은 양의 인이 바다 속에 유입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약 7000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가 45억 년쯤 될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방사성 동위 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법입니다.그런데 창조과학자들이 같은 방사성 동위 원소(특별히 헬륨을 가지고)측정법으로 이 지구의 나이를 풀어 가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을 때, 결과는 기존의 가설과 크게 달랐습니다. 방사성 동위 원소가 붕괴하면서 방출된 헬륨의 총량이 연간 30만 톤 정도 되는데, 이 지구상에 있는 헬륨 총량은 35억 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나이는 만이천 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우리가 지구의 나이를 1만년 정도로 보는 가정을 받아들일 경우에, 지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한 것이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지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쉽게 몰락할지도 모릅니다. 대개 우리는 하루하루 이 지구를 디디고 사니까 이 땅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구도 그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끝이 있고, 그 끝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쉽게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창조 과학자들은 열역학제 2법칙 같은 것을 예로 들어서 에너지가 질적(質的)으로 계속해서 쇠퇴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자연계에서 무질서가 계속해서 증대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런 가설은 지구가 얼마 안 있어서 곧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경고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꼭 자연적인, 물리적인 최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구는 반드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본문인 요한계시록 18장은 이 세상 최후의 날을 묘사합니다.

 

개역 계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女皇)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항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분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 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앞 과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벨론은 사람들이 만들어 왔던 지금까지의 모든 문화와 이 세상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은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와서“큰 성 바벨론이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증언합니다.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언제나 그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만들었던 바벨의 문화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지구문화의 종말 원인 본문은 단순히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만을 증언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즉, 인류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지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밝힙니다.2,3절을 읽어 보면 인간의 부패함이 그 원인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부패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영적 부패 2절 말씀을 보면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진 원인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문화의 자리가 되어야 할 이 세상이 오히려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마치 우주의 쓰레기통처럼 철저히 부패해 버린 이 세상 문화에 대한 생생한 상징적 고발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음행, 즉 성령을 따라가기보다 악령들을 추종하고 있는 이 세상의 더러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패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덕적인 부패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악한 영일뿐만 아니라 더러운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들어간 문화는 더러운 문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악령을 좇아가며 더러운 일을 더욱 자행하여 이 지구를 더러운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바로 이 부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지구 종말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정치적 부패 3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왕들은 권세 자들, 정치가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한 곳,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 세상)과 더불어 귀신의 땅, 사단의 왕국으로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합니다. 성경은 정치가들이 바른 역할을 할 때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합니다. 사자라는 말은 사역자(minister)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3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고 있는 한 권세를 잡은 자들, 정치 지도자들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4절에 보면 그는 정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을 벌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정치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정의를 행사하는 기능을 기대하십니다. 그들이 정직하게 정상적으로 정치를 잘 할 때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위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대신에 마귀의 사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선(善)과 공의를 짓밟아서 가치관을 전도 시키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의 권력 남용과 그로 인해 이 땅을 더럽히는 일은 역사를 향해서 갈수록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셋째/경제적 부본문 3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땅의 상고(商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致富)하도다하더라.” 상고란 장사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본을 독점 할수록 세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고, 세상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경제적인 불공평과 부패야말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이 지구의 악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보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역사가 이 마지막 순간을 향해서 갈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경제적인 책임이 더욱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잘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부(富)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 역사는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요한복음 3장 16절 못지않게 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므로 우리가 믿고 구원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서 그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이 요한일서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라면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희생적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18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가장 구체적인 사랑은 물질을 나누며 이웃을 섬기는 사랑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조금 덜 쓰면서 살려는 노력, 이것을 고대 우리 그리스도인 선배들은 청빈을 위한 수행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 때가 될 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노력을 더 요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점점 부패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향해서 가는 이 멸망의 문화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빛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 책임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지구 문화의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세상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기득권자들은 이 세상에서 정치적인 혹은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누리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이 기득권자들이 세 가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왕(3절)과 상고들(3절)과 선객들(17절)이 그들입니다. 처음 두 부류의 사람들은 앞에서 살펴보았고,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선객은 당시의 그 지중해 문화권에서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무역하는 큰 부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인 힘이나 혹은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제일 안타까워할 사람이 바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도 빈부차이가 심해지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싹 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이 망해도 잃어버릴 것이 없으니까요. 가지지 못한 사람들 속에 쌓여 가는 울분과 한(恨)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 소위 기득권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떠할까? 본문에서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고난과 애통입니다“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7절).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고통을 위하여 울며 가슴을 치며”(9절)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10절).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11절)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15절)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19절)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하고, 생의 목적도 없이 자기 힘을 축적하는 일에만 목적을 가지고 살아 왔던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내는 슬픈 반응입니다.

 

둘째/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20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伸寃)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이 심판의 시간은 통곡과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을 가지고 이 역사 속에서 외쳐 왔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 통곡의 시간에 성경은 왜 즐거워하라고 초청합니까? 이 마지막 심판의 순간이야 말로 우리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순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 뜻대로 살아 왔던 사람들에게 이 마지막 심판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오히려 즐거워해야 할 시간입니다. 슬피 애통하는 사람들과 즐거워하는 사람들,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이 두 부류 중에 어느 쪽에 속하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절) “화 있을 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는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절)모든 것이 전복되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 왔던 사람들은 지금은 웃지만 마지막은 슬피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고난 속에 있으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이지 않을까? 당신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이 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지구 문화 종말의 성격이 세상의 최후가 어떠한 특성을 보이는지 본문에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순간적 바벨탑에서 시작되었던 인류 역사의 찬란한 문화가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그 순간 성을 증언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일시간이란 말은 가장 짧은 시간의 척도를 의미합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 인류의 찬란한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한 순간에 사라져가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말이 그 마지막 때에는 얼마나 실감이 나겠습니까?

 

둘째/철저성과 완전성 21절 말씀입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근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맷돌을 바다에 던지면 다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큰 바벨론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 문화의 마지막이 이렇게 철저하고도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셋째/허무성 나팔 소리가 이 우주 속에는 다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와 음악이 없을 것입니다. 맷돌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빛이 없을 것입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즐거운 웃음소리도 없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이 우주는 절대의 허무와 공허 속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없어져버리는 이 마지막 멸망을 당할 때, 사람들은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베드로후서에서 찾아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첫머리에서 베드로는“왜 예수님의 재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재림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다려 왔는데도 웬일인가 아직도 막을 내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譏弄)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이 와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4절).창조 때와 같이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무슨 말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을 언급하면서 대답합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전하여 두신 것이라.”(6절).예전에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이제는 불을 통해서 심판 하신다고 말합니다.8절 이하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8-10절).성경은 이 마지막을 증언하면서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11절).그것이 역사의 궁극이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라면,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1-13절).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건너편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그 세계에 거하기를 기대한다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날을 대비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최후의 모습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본문 4절이 18장 전체 메시지의 요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늘에서 멸망을 선언하는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죄에 참여하지 말고 또 심판과 재앙에 참여하지 말고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세상 신이 지배하고 있는 이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을 불러 내셨습니다. 또 교회의 의미도 불러냄을 받은 백성들 아닙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 자입니까? 세상을 향해서 심판을 외치는 자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닮아 가고 있는 자입니까?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생각해 보십시오.바닷물은 짜지만, 그 물을 먹고 사는 고기는 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향해서 선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똑같다면 세상에 기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을 깨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세속에 물들어 간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멸망해 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세상이 받을 재앙에 참여하지 말라. 거기서 나오라” 이 음성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음성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멸망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함께 멸망하기 위해서 세상을 좇아가는 자입니까? 저는 이 세상이 언제 멸망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진 오늘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깨워 주시며 우리의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말세의 준비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가서 밤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써 그 죄가 가져올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와 심판을 피하게 하시고 이 죄에서 떠나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가장 아름답게 준비하는 자들을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금년으로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거룩하게 설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썩어가는 이 시대를 향해서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시옵소서.세상이 받을 재앙에 참여하지 말고 거기서 나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 세상을 변화시켜야할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경종을 울려 주셔서, 하루하루가 주님 앞에 설 그때를 준비하는 날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주 제: 종말론/이스라엘의 구원. (18)

제 목: 다니엘의 칠십 이레

본 문: 다니엘서 9장 24~27절

논 지: 이 예언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이스라엘의 구원을 나타낸다.

 

설교요약 :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중요한 예언들이 나옵니다만 그 중에서도 본문의 예언은 특히 중요합니다. 두 개의 기둥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을 가리켜서 “이것은 성경 예언의 등뼈가 된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과 종말에 관한 증언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언인 것입니다. 본문의 예언들은 중요한 예언이면서도 난제를 안고 있는 어려운 예언입니다. 우선 이 어려움은 본문에 나타난 칠십 이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칠십 이레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24절).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성은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입니다. 그 백성과 그 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펼치실 특별한 기간을 가리켜 본문은 칠십 이레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칠십 이레는 칠십 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사실상 칠십 주간이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칠십이 일곱 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레가 "주간"이 아니라 "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490년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펼쳐지는데 필요한 기간이라고 합니다.

 

490년, 즉 칠십 이레는 다시 크게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25절). 처음 일곱이레가 지나간 다음에는 육십이 이레가 계속되고 그 다음에 한 이레가 더 있으리라는 것입니다."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27절). 세 단계로 나뉜 기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섭리와 경륜을 성취해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칠십 이레 동안에는 여섯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24절).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을"것입니다."거룩한 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그리스도』는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섯 가지 사건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할 수 있다면 26절의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사건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합니다. 본문의 예언이 이스라엘은 물론 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강림과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칠십 이레 동안 일어날 일들과 해석학적 문제들

 

본문에 접근할 때 부딪히게 되는 해석상의 난제는,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문자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학적인 이론들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칠십 이레의 기간을, 문자 그대로 490년이라는 특정한 기간으로 보기보다는 세 단계로 나누어 그 기간 동안에 세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합니다. 그들은 최초의 일곱이레가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는 기간에 대한 상징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25절을 제시합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도심부)와 해자(도시 변두리)가 이룰 것이며"(25절).

 

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한 이레를 예루살렘 성의 멸망 사건으로 취급합니다."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절). 여기에서 "한 왕의 백성"이란 로마를 상징합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침략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했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들 가운데 무려 110만 명이나 죽임을 당했고 9만7천 명의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예루살렘 성은 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졌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상징적 접근은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의 성경학자들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접근합니다.

 

저도 본문의 경우 문자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좀 더 성경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24절). 여기에서 "기한을 정했다"는 그 자체가 문자적으로 특별한 햇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때 상징적 접근보다는 문자적 접근이 본문 해석에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지 6,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 끝에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기간이 70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490년간의 섭리 기간을 정하셨다는 계시까지도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은 포로 기간이 언제까지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후에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징계와 또 그것과 관련된 메시야의 오심과 죽으심과 역사의 종말에 관한 놀라운 사실까지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본문 해석에서 대두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난제는 "그 예언이 실현되는 시발점이 어디인가"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25절).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예언의 출발점입니다. 이때부터 일곱이레가 지나고 육십이 이레가 지나고 한 이레가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의견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어도 좋다고 공포한 주전 538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질 때 성전 재건의 명령은 있었지만 성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전 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즉 도시의 중건에 관한 것입니다.

 

둘째, 아닥사스다 왕 제 7년인 주전 457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에스라서 7장12절을 보면 그 배경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주신 일은 없었습니다.

 

셋째,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때가 주전 445년 혹은 444년3월말부터 4월초 사이의 어느 기간입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그때의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간을 정하고 내가 또 왕에게 이르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營門)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느 2:5-8). 느헤미야가 기회를 정확하게 잡아 기도하고 접근했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가 그의 조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리게 합니다. 이때부터 일곱이레, 즉 약 49년 내지 50년이 지나 느헤미야의 영도 아래 예루살렘 성이 대충 중건된 해가 주전 396년입니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이 다시 복구되어 완성된 이 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 일곱이레 후 육십이 이레, 즉 434년이 지난다고 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시작해서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를 계산해 보면 주후 37년 내지는 38년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해와 약 4,5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왜 이렇게 격차가 생기는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의 달력은 그 당시만 해도 1년을 360일로 계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달력대로 계산한다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시작해서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 즉 483년이 지나면 173,880일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365일로 계산한다면 주후 32년이나 33년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보통 A. D. 33년에 있었던 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약학자 가운데 헤롤드 훼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육십이 이레가 지난해가 주후 33년3월30일로 나왔습니다. 또한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입니다. 그날부터 닷새째 되던 금요일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25절). 훼너는 예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종려 주일에 초점을 맞추어 그 기간을 그 시간과 일치시켜 주후 33년3월30일이라고 한 것입니다."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26절).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놀라운 예언입니다.

 

마지막 한 이레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것을 앞의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바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후 33년에 7을 더하면 주후 40년이 되는데 그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 한 이레를 주후 33년으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때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괄호(parenthesis)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 괄호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다루신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섭리하셨다고 생각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오시고 하나님의 율법이 계시된 땅의 사람들인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채 상당 기간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대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기억에서 망각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만큼 전한 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흥의 기간을 주시고 그 백성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마지막 한 이레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한 이레는 칠년입니다. 그 칠 년 동안 유대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고 또 들을 둘러싼 놀라운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절).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한 왕> 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적그리스도는 부활한 로마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그런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경제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유럽 각국들이 어느 날 정치적인 목적으로 결속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로마 제국의 영화를 다시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어느 날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강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27절).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마지막 7년 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능력이 많은 한 인물에게 메시야의 소망을 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고 그를 통해서 자기들의 꿈을 성취해 보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3년 반 만에 그가 결정적으로 변심하면서 그들의 제사의 권리를 빼앗을 때 비로소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가 그들의 메시야가 아니라 2천 년 전에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리스도가 그들의 진정한 메시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스라엘 민족이 중요한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질 그 시침을 향해 가고 있는 놀라운 시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는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 목 : 종말론적 삶의 태도. (19)

주 제 : 종말론

성 경 : 계14:6-13

논 지 :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세상과 짝하지 말고 부지런히 복음 전해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자.

 

요즘 세간에 종말론 논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세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논쟁하는 것도 말세의 증거 중에 하나라고 생각 됩니다.그런데 말세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는가 하는 그 시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1992년 10월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대해 논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나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과연 재림을 준비하는 태도보다 재림의 시각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공항에 가면 비행기의 이륙과 착륙을 통제하는 관제탑이 있습니다. 그 관제탑에서 일하는 기사는 비행기의 착륙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행장 저 바깥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이 신부는 자기 신랑이 도착하는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 곧 신랑이 도착하리라는 기대만으로도 큰 흥분과 감격을 안고 화장실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얼굴을 매만지고 신랑 맞을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비행기의 정확한 착륙 시간을 알고 있는 관제탑 기사와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신랑이 곧 오리라는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신부의 삶의 자세는 너무 많이 다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자체도 의미 있지만, 주님을 어떤 자세로 기다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문에는 이 역사의 최후의 위기를 앞두고 세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각각의 천사들이 종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각각의 메시지를 분석해 봅시다. “심판의 때가 임박했다” 이것이 첫 번째 천사가 선포한 메시지입니다.7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지금까지 역사에는 많은 위기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취급하고 있는 때는 그 많은 위기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결정적 위기, 역사의 마지막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심판과는 다른 마지막 심판입니다. 천사는 이 위기가 임박했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암시해 줍니다.6절을 보십시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천사가 공중을 날면서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영원한 복음을 가진 그런 이미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성경에 보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 사례는 없습니다. 어떤 주경학자의 말처럼, 이 천사는 그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그것을 전달할 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미지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해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 나라, 족속, 방언, 백성에게 전할….”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라와 족속은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사실 지금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복음이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족속에게 다 복음이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한 나라 안에도 여러 개의 족속이 있습니다. 미국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또 중국이나 소련의 경우도 여러 족속들이 섞여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런 족속들을“people group”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들 중에 아직도 자기들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족속들이 수천 족속입니다. 그들에게까지 다 복음이 전해져야만 예수님이 오십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방언(language), 모든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천사. 어떤 주석을 읽어보면, 여기의 영원한 복음을 특별히 말세에 전할 또 다른 복음처럼 설명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성경 전체의 계시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했을까요? 복음 자체의 효력이 시공(時空)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과거에도 복음이고 지금도 복음이고 앞으로도 복음이고 말세에도 역시 같은 복음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은 진실로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꿉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세에 이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절에 그 목적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지구촌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모든 백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인간이 다른 모든 종류의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을 닮아 영으로 파조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중요한 특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예배를 배우지 못한 사람, 나를 지으신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말세는 그들에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의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그들을 창조하신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 말세에 등장한 이 첫 번째 천사는 그 심판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 두 번째 천사가 등장해서 8절에서 그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성경에서 바벨론은 항상 하나님을 거역한 세속성의 상징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바빌로니아 왕국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세속 성을 대표하는 바벨론의 원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바벨이란 이름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0장입니다.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바벨의 시조입니다. 이어지는 11장에는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니므롯의 선동 때문에 바벨탑이 쌓아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바벨탑 사건이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실 것에 대비해서 다시는 흩어지지 말고 똘똘 뭉쳐서 이제부터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하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주장,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 중심의 문화, 인본주의 문화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거슬리는 이러한 모든 사고방식과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이 바벨의 원리가 점점 더 이 땅에 횡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무너졌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쓴 것은 그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강조하시려 한때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 표현은 “아멘 아멘”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두 번 반복한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다가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이 나오면 눈을 번쩍 뜨고 읽으십시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까요. 여하튼 바벨론이 분명히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과거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그 가능성이 너무도 확실할 때 「결과 동사」 혹은 「예언적 과거」라고 하는 과거 동사를 씁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속성이 기어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과거 시제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음행입니다. 우리의 애정, 우리의 경배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에게서 다른 데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음행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바빌로니아 왕국은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 강조되는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들이 모든 나라를 통해서 또 수많은 종류의 삶의 영역들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 하겠지만 결국 그들은 무너지고야 맙니다.

 

예레미야서 51장 찾아보십시오. 바벨론에 대한 예언입니다.6절에 보면“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報讐)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적인 삶의 원리를 따라 살던 사람들은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면 거기서 빨리 뛰쳐나와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반(反)바벨론적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의 원리입니다.

 

그 다음 절인 7절을 보십시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은 바빌로니아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게 바벨론의 독주를 마시고 미치게 합니다. 전 세계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나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8절의 예언을 보십시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創傷)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바벨론은 무너지지 않을 것같이 그 강성함을 자랑할 것이지만,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파멸 속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때입니다. 두 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진정한 애정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말세를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세 번째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의 약속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았던 사람들,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입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세상을 따라서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편하게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결국은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일 하면서도 희망이 있는 것은 조금 있다가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고통이 복음을 거절하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형벌입니다. 이들과는 반대로 복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축복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12,13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때문에 죽은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들이 받는 복의 내용이 13절 하반 절에 나타납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여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축복과 형벌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습니까?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쉼이 없으나 신앙을 지킨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보상으로 쉼이 주어집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 마지막에 유쾌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하루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쉬면 제대로 쉴 수 없습니다. 또 마치긴 마쳤는데 부당한 방법으로 마쳤을 때도 편안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고 잘 보낸 일생이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준다.”고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주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 윤리적 성실성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성실성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사람들, 그들만이 주 안에서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정한 안식입니다.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했습니다. 누구나 다 진정한 쉼, 참된 쉼을 누리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월요일 날 쉬었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화요일 날 쉬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목요일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금요일에는 터키 사람들이 쉬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쉬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쉬는 것은 주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있지만, 결국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옛날 저 미국 남부에서 백인들에게 학대받고 시달리던 흑인 노예들이 부르던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 어느 날, 내일이 일요일이 되리라” “그 어느 날, 날마다 일요일이 되리라”주일에는 쉴 수 있으니까 그 쉼에 대한 열망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열망, 그러나 그 영원한 안식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예배당만 왔다 갔다 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성실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이제 세 천사의 메시지를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천사는 심판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두 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은 정해진 사실이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세 번째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의 약속을 전하면서 주 앞에 축복받는 자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종말론적 삶의 태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 인생에 너무도 필요한 안식, 그러나 참된 안식을 사모한다면 오늘은 주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땀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최선을 다하며 살 때, 주께서 날 부르실 때 “주님, 이제 제가 쉬려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때 주님은 “내가 너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마지막 날의 그 멋진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말세라고 하는 이때에 더욱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 아멘!

 

 

 

제 목 : 최후 심판의 드라마. (20)

주 제 : 종 말 론

성 경 : 계20:7-15

 

요한계시록 20장7절-15절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천 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든 상징적으로 이해하든 간에 천년왕국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모든 학자들이 일치를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천년왕국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죽으면 천당에 갈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의 그 천국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가장 가까운 형태이기는 하지만 천년왕국 자체가 영원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정한 기간입니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서곡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다시 풀어 주시는 이유

 

요한계시록 20장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장 당황케 하는 구절은 7절 말씀입니다. “천 년이 차 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성경의 순서를 따르자면 사단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혼란이 있고 그 다음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나라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왜 천년 후에 하나님은 사단을 다시 풀어 주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 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계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로,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뿌리 깊은 것인지 그 죄악의 철저한 절망 성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죄악의 철저한 절망성에 대해 다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우선 사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천년의 결박 끝에 풀려 나온 사단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8절).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미혹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천년 동안 혼나고도 아직도 달라진 게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리고 열국을 미혹케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그 죄악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볼 수 있습니다.달라지지 않은 사단의 사단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 편에서 좀 생각해 봅시다.사단이 열방들과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을 당한 것은 역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미혹을 당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예수 이름으로 귀신(악령)들을 꾸짖고 추방하는 운동들이 일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이고 또한 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을 자주 대하다 보면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이고 정신 이상도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이니까 사단만 쫓아내면, 귀신들만 쫓아내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들이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포로로 삼으려고 할 때, 악령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할 때, 거기에 호응을 한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1차적 책임에서 결코 면제되지 않습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고치는 결단 없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나중에 가서 인격이 파괴되고 맙니다. 귀신 쫓아내는 운동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을 보면 나중에는 도덕성을 잃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개하려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결단이 없어집니다. 물론 만국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미혹을 당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책임입니다. 회개가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책망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이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다시 미혹을 받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천 연간의 놀라운 주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나서도 여전히 부화뇌동하여 마귀를 따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그 철저한 부패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죄악의 절망성.”이라고 부릅니다. 죄라는 것이 이토록 철저하게 절망적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에 사단이 잠깐 놓인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 안에 뿌리박힌 죄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서운 것인지, 죄악의 그 절망성, 죄악의 심연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심판의 당위성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죄악의 절망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심판의 당위성은 바로 죄악의 절망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이 마지막 심판은 징계가 아닙니다. 징계라는 것은 고쳐질 가능성을 믿고서 행하는 것이며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징계는 회복을 겨냥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사건은 문자 그대로 심판(judgement)입니다. 회개가 불가능한 사단에게 얽매여 사단을 추종하며 회개를 끝까지 거부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그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최후 심판의 광경

 

심판자 : 아마도 심판자는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이고 심판을 진행하시는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11절).주께서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앉으신 심판의 보좌를 흰 보좌라고 했을까요? 흰색을 보면 깨끗함과 순결을 연상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인간의 철저한 조성을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장면에 등장한 주님의 보좌가 흰 보좌라는 사실은 아마 이 검은 죄악을 심판하실 주님의 거룩함에 대한 상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흰 보좌 위에 앉으신 그리스도야말로 인류를 심판하기에 홀로 자격 있는 분이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인류 속에서 그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오직한 분, 참으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홀로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심판의 대상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12절).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마지막으로 심판의 보좌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나누며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가장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이 심판의 보좌 앞에 반드시 서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심판의 원리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또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절).심판의 기준은 언제나 행위입니다. 행위대로라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지만 심판은 행위대로입니다.13절에서 한 번 더 강조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각 사람은 행한 낱낱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 :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 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14절).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불 못에 던지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불 못에 먼저 던지움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10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 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먼저 마귀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받은 거짓 선지자와 짐승도 던지움을 받으며 그 다음에는 행위를 따라 심판받은 모든 자들이 던지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서 사단을 추종했던 자들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를 위해 마련된 곳입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지옥은 본래 사람을 위하여 마련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마귀를 따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10년 전쯤에 매우 인상적인 전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전도지 겉장에는 “당신은 지옥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만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뒷장을 넘기니까 “아무 할 일이 없다”라는 재미있는 대답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나 저절로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인가 중대한 결단 없이는, 방향의 전환 없이는 누구나 다 파멸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죗값을 치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어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물론 이것은 하나의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망과 음부도 마지막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을 우리는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 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더라.” 이 둘째 사망에 대한 표현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의 형벌이 바로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아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형벌의 장소인 불 못이 죽음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망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망 다음에는 불 못이 있습니다. 음부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물론 이 음부라는 단어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음부라는 단어를 연구할 때 꼭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음부란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음부는 질적인 면에서 지옥과 같은 장소이지만 여전히 기다림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불 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심판의 결국은 불 못입니다. 사실 전 인류 가운데 이 불 못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죗값은 사망이고, 사망 다음에는 죗값을 따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불 못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희망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은 아주 좁은 문의 희망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지막 희망

 

최후의 심판 가운데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구원의 마지막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15절).이 구절 자체는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한 종류의 사람들은 심판에서 예외적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곧,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정경 앞에서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엄숙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실 두 종류의 책이 구별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12절).여기에는 두 종류의 책들이 나옵니다. “책들이 펴 있고”이것은 복수입니다. “또 다른 책”이것은 단수입니다. 이 “다른 책”이 바로 생명책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에 나오는 책들에 이름을 붙인다면 죽음의 책들, 심판의 책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복수로 된 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강퍅하여 좁은 문보다는 넓은 길을 훨씬 더 많이 찾음으로써 멸망하는 자들이 구원받는 자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종류의 책, 곧 생명책과 죽음의 책에 대한 증언이 창세기부터 계속 나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는 족보를 죽 읽다 보면 그들이 참으로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든지 간에 아주 간단한 단어로 그들 생애의 마지막이 정리됩니다. “죽었더라.”그러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40년을 살든 70년을 살든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몇 년을 살든 뭘 했든 마지막에 가서는 “죽었더라.”는 이 한 줄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족보 책과 대단히 대조적인 또 하나의 족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의 특성은 “낳고”라는 단어가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창세기 5장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극복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을 사망의 족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1장은 생명의 족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그 죽음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시작 되었습니다.그러나 마태복음에 나타난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날카롭게 대조시켜서 사망과 생명의 증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여기에서 “한사람”이란 아담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은 이 아담과 대조적인 또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절).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어 그 지배를 벗어날 자가 없지만 또 다른 한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약속하신 그분.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아담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왔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분은 죽음 저 건너편에 부활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영적인 생명을 보유하고 살 수 있도록 보증해 주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책, 생명의 책 모두에 끊임없이 이름이 쓰이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죽음에 매인 자로 태어나 죄 짓고 살다가 죽음으로 돌아가고 심판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끊임없이 그들의 이름이 사망의 책에 기록됩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의 책에도 끊임없이 이름이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보십시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당신의 이름은 사망의 책에 있든가 생명의 책에 있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본래 사망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망에 매인 자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사망의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에 갑자기 빨간 줄이 그어지고 다른 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책에 내 이름이 새롭게 녹명되는 그 기적을 한번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 기적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복음에 의해서 됩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신뢰하는 그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영생의 감격에 둔해집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재확인시켜 주셨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셨습니다. 전도하다가 부딪히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능력을 주어서 말입니다. 병자 만나서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을 향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으면 그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실 그런 일들을 보고 사람들은 참 신기해합니다. 제자들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20절).

 

우리들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기적, 그보다 더 위대한 영광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습니다.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때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겠습니까? 여러 이적들이 복음 전파에 따르겠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복음의 균형을 상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합니까? 주께서도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셨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 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바울은 자신의 이름은 물론 자기 동역 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함께 나눌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의 이름과 남편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없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 일어나야 할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입니다. 다가오는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우리 모두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아는 행복을 선사하십시오. 최후 심판의 무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일어날 사건, 곧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 못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외치던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목: 종말론/하나님의 사람 다니엘. (21)

주 제: 종 말 론

본 문: 다니엘서 6장

논 지: 다니엘은 끝까지 순결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설교요약

 

1.다리오 왕도 교만하게 자기 권세를 의지했다.

2.새 정권에서 관리가 되었으나 음모를 받는 다니엘

3.다니엘의 총명과 지혜는 성령에 의해서였다.

4.다니엘은 충성되고 순결한 사람이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이 어떠한 유형의 신앙인이었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다니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입니다. 1장에서부터 저는������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다니엘서의 주제를 계속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역사도 변하고 정치 지도자도 변하고 체제도 변하고 권력은 한 제국에서 또 다른 제국으로, 한 왕에게서 또 다른 왕으로 계속 옮겨 가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역사의 주인이 되십니다. 역사 위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선명하게 증명하는 것이 바로 다니엘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6장에 들어가기 전에 5장의 마지막 부분인 30절 이하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절). 한 제국이 몰락하고 또 다른 제국이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는 모습과 함께 6장이 펼쳐집니다. 6장은 다리오의 통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분의 나라를 지상의 역사 속에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어느 시대 어느 역사 속에서나 자신의 사람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다니엘서 6장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도 쓰셔서 자신의 일을 계속 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다니엘서 6장처럼 널리 알려진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우리에게 퍽 익숙했던 이야기가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다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다니엘서 6장은 성경에서 가장 연구가 덜 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것은 으레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으로 묵상을 게을리 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입니다.

다리오의 정체

 

다니엘서 6장은 1절에서부터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1절).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대제국의 첫 번째 통치자는 다리오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사살처럼 다리오 역시 세속 역사 속에 전혀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려 드는 사람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다니엘서의 역사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등장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자를 고레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본문에는 고레스가 등장해야 하는데 대신 다리오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견해 두 가지를 우선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견해/다리오는 고레스와 동일한 인물이다.

 

이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대 왕들은 여러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왕에 대해서도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왕을 부르는 관습이 고대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와 고레스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 때 가장 문제시 되는 구절은 6장28절입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첫 번째 견해를 따른다고 하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겠습니까? 그런데도 첫 번째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즉,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에서 접속사 “와”를 “그리고”로 해석하지 말고 히브리 문법에 따라 동격을 나타내는 콤마(,)로 보게 되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 곧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첫 번째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성경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둘째 견해/다리오는 고레스 왕의 휘하에 있던 장군 중에 하나였다.

 

최근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은 이 견해를 상당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의견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단 5:31)라는 구절은 영어 성경의 경우“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는데”로 번역된 판이 많습니다. “다리오가 나라를 받았다”즉, 다리오라는 인물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자기 나라를 새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바벨론을 무너뜨린 고레스 왕에 의해서 바벨론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임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1절을 보십시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1,2절). 여기서도 다리오를 메대 바사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제왕이라고 하지 않고 방금 무너진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의 통치자로 임명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라는 사람은“다리오”라고 불렸는데, 성경학자들은“다리오”라는 이름도 어쩌면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당시 통치자에게 붙여진 독특한 명칭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다리오의 본명은 나보니도스에 관한 역사적인 문서에 의해 우그바르(혹은 구바르)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구티움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던 통치자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도지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주전 539년에 벨사살의 연회 잔치를 기습하여 바벨론을 함락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함락된 바벨론을 둘러보고 떠나면서 고레스 왕이 그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우그바르를 임명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도 이 견해가 좀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바벨론은 굉장히 광대한 제국이기 때문에 많은 도지사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그 위에 다시 총리를 두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바벨론 제국 황혼기에 다니엘은 이미 그 제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통치자가 한 지역에 들어와서 그곳을 부분적으로 다스릴 또 다른 인물을 임명할 때는 그 지역을 아주 모르는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참신한 인물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다니엘이 선택될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또다시 다니엘은 바벨론 지역을 통치하는 정부 고위관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다니엘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즉, 번영과 출세가 보장되며 생이 순조롭게 풀려 갈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번영과 위기는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다니엘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이 행운의 시간 속에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그릇된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핍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엄격히 말해 핍박이 아닙니다. 순교도 아닙니다. 순교 콤플렉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핍박받는 것을 순교로 간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순교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정당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나의 정당한 행동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의(義)를 위해서 받는 핍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유형의 핍박을 그의 생애의 황혼기에 한 번 더 맞이하게 됩니다.

 

다니엘에게 찾아온 위기 (다니엘에게는 두 가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의 개인적인 삶을 조사해서 흠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은 다니엘을 마치 천적처럼 생각했던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다니엘이 새로운 나라에서도 또다시 출세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 주변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소거리를 찾으려고 그의 삶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둘째로,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법률 개정이 착수되었습니다. 첫 번째 계교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니엘의 적들은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법률 개정에 착수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 이다.”이것은 일상적으로 다니엘이 참되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기도하는 시간을 구별하여 갖고 있음을 안적들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 추진한 교묘한 함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은 어떠했습니까?

위기 가운데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

 

저와 당신은 80세쯤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까요? 저는 다니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다음의 시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 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2-15).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노년의 다니엘의 인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의인 다니엘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80세가 되어서도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아마 할 일이 없다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순간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청청한 빛을 발하는 견고한 나무인 다니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영광을 선포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의 인품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3절).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를 우리 말 번역대로만 읽으면, “다니엘은 굉장히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며”라고 이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이 “아주 놀라우신 영을 소유하였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우신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아주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었으므로”다니엘의 지혜와 탁월한 판단력은 다니엘 자신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총명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했기에 주(主)의 영이 그 속에 역사하여 이루어 낸 놀라운 결과였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도 성령 충만했고 늙어서는 더더욱 성령 충만했습니다. 젊어서도 그의 지혜의 근원은 성령이었습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그가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니엘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여 그의 개인적인 삶을 조사했던 사람들은“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14절). 유명한 전도자인 D. L. 무디가 한창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을 때에 “저 사람 말만 잘할 뿐 자기 삶은 형편없을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집요하게 무디의 사생활을 파헤쳤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디의 삶에서 그 어떠한 결정적인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자, 도리어 무디의 그러한 삶에 감동받아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과 저의 삶을 조사한다고 해 봅시다.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를 무너뜨릴 만한 결정적인 흠은 없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할 만한 결정적인 흠이 그의 삶 속에는 없었습니다. 순결함이야말로 어쩌면 다니엘이 늙어서까지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4절을 보십시오. “...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다니엘은 임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그는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매사에 충성스러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과제로 알고 주께 하듯 성실하게 감당했던 다니엘. 그는 진실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충성스러움이야말로 하나님이 다니엘을 쓰신 비밀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나라가 바뀌어도 정치 체제가 바뀌어도 충성스런 다니엘은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다니엘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이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절). 간교하고 음흉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새로운 법률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왕 외에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기도하면 사자굴 속에 넣겠다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10절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실은 다니엘이 그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기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사자굴 속에 던져져서 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집에 돌아가 전에 행하던 대로 주께 기도하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 한번 이름이나 남기고 죽자는 식의 소위 순교적 명예심 때문에 나온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소 습관이 그랬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 앞에서도 이 경건의 습관만큼은 결코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진실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은 타협을 거절하는 경건이었습니다. 사실은 쉽게 타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경우처럼 우상 숭배를 하라는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기도를 공개적으로만 안 하면 그만인 상황이었습니다. “30일간이니까 그 동안에는 마음속으로만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이렇게 합리화하고 적당히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단 하루라도 경건의 습관이 허물어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늘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누군가가 생명을 위협해도 다니엘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삶의 보배는“내 주님과의 교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창을 열고 교제하며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만큼 다니엘의 일상적인 일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다니엘이 하나님을 주일에만 예배 시간에만, 혹은 일이 잘 풀릴 때에만 섬긴 것이 아님을 불신자인 왕조차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세월이나 상황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 경건한 다니엘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다섯째로, 다니엘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23절). 흔히들 다니엘서를 대할 때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사자의 이빨이 다니엘을 물지 못한 극적인 사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니엘의 사람됨입니다. 다니엘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 있는 굴속에서도, 즉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다니엘은 쓰러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신뢰합니다. 비록 상황은 이래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이런 다니엘을 어찌 하나님이 지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결국 그의 사람됨이 기적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내 사업과 인간관계가 번창하기만을 하나님께 요구할 뿐, 자신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별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다니엘 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만 한 사람됨을 사모하십니까? 이제 고개를 돌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위기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람의 이 놀라운 인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아버지, 날이 갈수록 해가 더할수록 더욱 주님을 닮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젊은 시절보다 내 인생의 황혼의 때에 더욱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기력이 쇠잔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생애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풍성한 기적은 주를 신뢰하는 이 믿음을 주께서 친히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삶이 우리에게 던진 도전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참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그의 생애, 원수조차도 그에게서 아무 틈도, 아무 허물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순결했던 다니엘. 오주여 또 하나의 다니엘이 되어 남은 생애를 주의 거룩한 성령으로 불붙임 받아 이악한 세대를 믿음과 충성과 순결로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제 목 : 하늘의 할렐루야. (22)

주 제 : 종 말

성 경 : 계19:1-10

 

개역 계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본문에는“할렐루야”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사실 신약성경에서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이 요한계시록 19장에만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시편에 23회 나옵니다. 원래 『할렐』이라는 말은“찬양하라”를,『『루』는 사실 『유(르)』로서 “너희들의”를 그리고『야』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할렐루야』는 “너희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6-18장에서는 마지막 때에 있을, 이 세상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19장에서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지나가면서 장면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옮겨갑니다. 그리하여 하늘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할렐루야 음악회가 전개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 음악회에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많은 천사들이 출연하여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할렐루야의 의미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에서 울려 퍼질 이 할렐루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네 번 나오는 할렐루야의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네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구원의 할렐루야 :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때가 가까워 온다는데 대한 찬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는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죄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적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죄악의 형벌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었지만 죄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죄악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번번이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 이것을 성화(聖化)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이루어 나가고 있는「현재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이 죄라는 존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 영화로운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죄 지을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미래적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형벌에 관한 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우리가 죄악과 상관없는 존재로서 인격이 완성되는 것은 마지막 때, 곧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마지막 때”를 꼭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니 이 어찌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완성될 그 시간이 가까웠기에 우리가 “할렐루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도다.������(1절).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영광“과 “능력”이 “구원”과 동시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세 단어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구원의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장 놀랍게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최대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 구원받은 사실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은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기적은 영적인 기적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듣고도 별 감동을 못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집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면 기적이라며 대단하게 여깁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십니다.그러나 그런 것을 구원이라는 엄청난 기적보다도 더 강조하는 집회가 있다면 이단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구원의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아주 감동적입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8-20).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능력으로 하나님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었던”이란 영적으로 죽었던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과의 생동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구원의 능력보다 위대한 능력도 없고 구원의 선물보다 더 위대한 선물도 없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선물로 받고 그 구원이 완성될 순간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지막 날을 바라보면서 해야 할 일은 위대한 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둘째/심판의 할렐루야 :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2,3절).17,18장에서 이 세상의 정치, 종교, 문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심판이 다 끝나자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습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악인들이 잘되고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저에게는 이런 괴로움을 주시나요?”그러나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태양처럼 밝게 나타나는 순간, 모든 불의와 불공평과 모순이 사라지고 지상의 모든 악이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할 일은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셋째/완성(성취)의 할렐루야 :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4절).여기에서 “아멘”의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아멘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 가운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진실로������라는 말이 바로 “아멘”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멘”이 기도문에서 쓰이게 되면 그때는 “진실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끝마칠 때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한 내용이 그대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뜻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멘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개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와 사회를 내다보면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러한 열망과 소원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몹시도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고 구원이 완성되면 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개인을 향한 모든 기도를 이루시고 역사를 향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그 하나님께 우리는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할렐루야를 외칠 것입니다.

 

넷째/섭리(통치)의 할렐루야 :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를 다스리셨다는데 대한 찬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인 어린양 혼인 잔치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7절).어린양 예수님의 마련된 신부는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예비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의 중요성을 종종 과소평가 합니다.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여러 교파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 속한 모든 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십니다. 교회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1,22).맨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교회가 있고 그 아래에 만물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섭리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한다는 말은 곧 성도들을 통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을 쓰시기도 하지만 교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여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님은 가장 가슴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준비시키십니다.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통해서, 교회에 속한 개개인인 우리 성도들을 끊임없이 정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점점 더 쓰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다가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그 손길을 통해서 주님 앞에 온전한 자로 마련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 신랑 되신 주님은 우리 개개인의 혹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내적인 아름다움, 곧 인격적인 거룩함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7,8절).마지막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바로 의(義)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벌었고 우리가 얼마나 명예를 얻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의로움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정결해졌을 때 비로소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거행되게 됩니다.

 

옛날 유대의 결혼에는 세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우선 정혼식이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정혼식이 결혼식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일치감치 배필감을 정해 버립니다. 그렇게 정해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정혼식은 결혼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혼할 때 반드시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지참금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때를 거친 뒤에 때가 다 차면 일단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다시 신랑 집으로 옵니다. 그때 신랑 집에서 잔치가 열리는데 본문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단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우리에게도 적용해 봅시다. 언제 우리가 주님과 정혼을 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주님의 영원한 신부로 삼을 계획을 창세 이전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혼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흘리신 피가 바로 지참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이 기다림의 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때에 신부는 신랑의 기대에 합당하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약혼 후에 신랑 신부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결혼 때까지 상대방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앞에 점점 더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 살펴봅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결혼식장에서 “신부 예쁘다”는 말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당사자인 신부가 아니라 신랑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도 교회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신부로 설 수 있도록 손수 화장품을 제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도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여 점점 성화(聖化)되어 그 성화가 완성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기다려집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주님 곁에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 몹시도 기다려지겠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삶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9절)고 했습니다.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마지막을 의미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순간이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할 일은 “할렐루야”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살롬!

 

그동안 올려주신 설교말씀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결코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말씀의 전달 능력과 군더더기가 붙지 않고 온전히 성경말씀을 전하시면서 듣는 자와 함께 생각을 몰이하는 감명 깊은 설고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신 어휘에 더욱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수준 높은 말씀을 소개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출처 : 김원춘블로그
글쓴이 : Daum K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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