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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12 강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1-5)

제 12 강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1-5)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절 끝 부분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렇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을 꾀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 때문에 두 번 놀랐습니다. 먼저는 갈4:13-14에 있는 말씀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육체의 약함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이 사도행전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의 한 지방이었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몰려와서는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알고 그를 성밖에 내쳤습니다.

바울은 그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극적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의 약함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을 한 동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몸에 있는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람이 병들면 그것은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예컨대 욥의 세 친구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욥의 몸에 심한 악창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욥에게 큰 재앙이 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욥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모습에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육체의 약함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처럼 여겼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곧 그리스도와 같이 그들은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최대의 존경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때는 바울이 긍정적으로 놀랐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바울은 다시 한번 갈라디아 사람들 때문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바울이 놀랐을 때는 첫 번째와는 달리 부정적인 놀람이었습니다.


갈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에서 율법으로, 믿음에서 행위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할례의 의식으로, 자유함에서 종노릇함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미 얻은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율법주의에 내어 맡김으로서 구원의 기쁨과 누리는 자유함을 상실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 거부해버린 셈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렇게나 쉽게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는 놀라고 만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 위에 굳게 설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오늘 본문 갈3:1-5에서는 그들의 신앙적 체험에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있는 6-9절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진리를 성경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갈라디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1절).

둘째, 갈라디아 교인들과 성령님과의 관계(2-4절).

셋째, 갈라디아 교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5절).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과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신앙적인 체험들을 들어서 이신득의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에 큰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갈라디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The Believer's Experience with Christ)


오늘 본문 1절입니다.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잘하였도다?” “사랑하는도다?” 아닙니다. “어리석도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어리석도다”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하면서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는 무슨 말씀으로 시작을 하실까요? “어리석도다”라는 책망의 말씀이 아니라, “잘하였도다,” 또는 “사랑하는도다”라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은 곧 이어서 자기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열정적인 설교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드라마틱하게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발 앞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나던 망치 소리를 듣는 듯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또한 못 박히신 손과 발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는 듯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고,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동 있게 전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바울은 갈라디아의 한 지방이었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행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 때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자기들의 죄를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들은 그들을 미혹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받는 등 율법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보다는 율법을 지켜 얻고자 하는 인간의 의에 강조점을 두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셈입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 앞 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주의자들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꾐에 빠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셈이요,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갈5:2-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는 율법 전체를 다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율법의 모든 요구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강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책망을 통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분명히 바라볼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갈라디아 교인들과 성령님과의 관계(The Believer's Experience with the Holy Spirit, 2-4절).   


1절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말씀이라면, 2-4절은 성령님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갈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무슨 뜻입니까? 이런 저런 사소한 것은 제쳐놓고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던지는 이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오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성령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죄 사함의 은총도 누렸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도 그들은 맛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아라.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바를 너희가 행해서 받은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냐?”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답변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당연히 듣고 믿음으로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물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까?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자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인들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성령을 받는 줄 알고, 할례도 행하고, 절기도 지키고, 음식도 가려서 먹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방언을 해야만 성령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또 산 기도나 금식 기도를 해야만 성령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건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에게 우리 자신이 복종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갈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여기에 “율법의 행위”와 “듣고 믿음”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행위라면,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들음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복음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또 복음을 들으려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10:15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 모두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1절에 이어 여기서 다시 한번 “어리석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교인들은 기가 막힌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과 “육체”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대조되고 있는 것은 “시작”과 “마침”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성령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면, 그 뒤로도 믿음을 따라서 살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의 체험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시작은 성령으로 잘 하고서는 지금 와서는 마치 육체로 마치려는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처럼 자기들의 육체에 할례도 행하고, 음식도 가려서 먹으려고 들고, 날과 절기도 지키려고 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의보다는 자기들의 인간적인 의, 결코 온전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의에 치중하려고 들었던 것입니다. 이는 소망으로 시작했다가 절망으로 마치겠다는 뜻입니다. 기쁨으로 시작했다가 두려움으로 마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에게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약2:26에 기록된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우리의 인간적 힘에 따라 된 것이라면, 또 우리가 행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간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해버리고 마십니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가 눅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고자 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들으시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세리의 기도는 기쁘게 흠향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면서 우리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올바른 신앙 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갈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믿음을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그 동안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받았던 그 많은 괴로움들은 다 허사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과연 헛되냐?” 바울은 “헛되다”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사용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너무 기가 막힌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 동안 받은 숱한 괴로움을 지금 와서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본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빌3:5-6에서 그가 기록한 대로 그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만일 그가 율법주의자로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일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일반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편안히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엄청난 괴로움을 당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꺼이 그 모든 괴로움을 감수해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래의 영광은 중합니다. 그에 비하면 현재의 고난은 경한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장래의 영광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이 땅에서 유한한 사람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올라갔던 체험이 있었습니다. 천국은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영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누릴 장래의 영광이 너무나도 크기에 바울은 그 모든 괴로움을 감수하면서 주를 위해 충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장래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토록 엄청난 괴로움도 기꺼이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지금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져서 성령에서 육체로, 믿음에서 행위로, 은혜에서 율법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견뎌온 괴로움은 다 허사로 되돌아가 버리고 마는 셈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지금 와서 도중에 곁길로 빠지지 말고, 믿음을 끝까지 지킬 것을 여기서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갈라디아 교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The Believer's Experience with the Father, 5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5절 말씀입니다.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2-4절에서는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마지막 5절에서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 체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행1:4-5입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또 눅11:13 말씀입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 이가 누구셨습니까? 사도 바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능력을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 것이 너희가 율법이 요구한 행위를 해서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냐?” 그들의 대답해야 할 마땅한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듣고 믿음에서였습니다.”

예컨대 바울이 갈라디아의 한 지방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행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행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여러분! 앉은뱅이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 그 앉은뱅이가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비록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믿음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실 때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노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아! 너희가 가졌던 신앙적 체험들을 한번 회고해보아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지 않았느냐? 또한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성령도 받지 않았느냐? 아울러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도 체험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가 어찌하여 그토록 소중한 믿음을 무시하고, 너희의 보잘것없는 육체의 행위를 신뢰하려고 드느냐?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져서 육체를 신뢰하는 어리석은 짓일랑 그만 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우리를 미혹하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맙시다. 지금도 사단의 하수인들인 이단들은 기를 쓰고서 우리를 미혹하려 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믿음을 잘 지켜왔는데, 어리석게도 이제 와서 곁길로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절로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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