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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도 목회 칼럼

목/회/서/신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서 있습니까?

 

 

한때는 불교와 마호메트교에 심취했다가 43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한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요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코트 펙(M. Scott Peck)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사물의 세계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투철한 자세 때문입니다. 여러 심리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인격 성숙의 단계 또는 영적 단계를 이야기했지만 특히 그가 말한 영적 성장의 4단계는 의미심장한 시사를 주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1단계는 혼돈과 비상식적, 반사회적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 이기적 삶을 추구합니다. 모든 것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며 혼돈 속에서 욕심을 따라 사는 단계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이 여기에 속하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영적 성장의 2단계는 형식적, 제도적 단계입니다. 어떤 형식이나 제도,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속한 직장 또는 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만족하는 소위 모범적 직장인들, 시민들 그리고 종교의 형식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이들은 예배형태나 찬송가 등이 바꾸어지는 일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라고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얼핏보면 정돈되고 바른 것 같지만 그러나 제도와 형식 속에 갇혀 진정한 본질을 알지 못하고 자유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 성장의 3단계는 회의적, 개인적 단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사회의 제도, 교회의 형식에 의심을 갖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이 있으며 이 단계의 사람들 중에는 책임 있는 부모, 상식적 삶, 사회정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형식적, 제도적 신앙에 대하여 회의하고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교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한 발짝 떨어져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의 세계는 오히려 2단계의 신앙인들보다 깊은 고민과 신앙을 가진 성숙한 신앙인들입니다. 단지 불신앙처럼 보이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오해받고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영적 성장의 4단계는 신비적, 공동체적 단계입니다. 이 단계의 신앙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인생과 세계가 깊은 신비와 모순이 있음을 알고 인간의 만남과 교제를 중요시하고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고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균형 잡힌 인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코트 펙이 말한 영적 성장의 4 단계론은 인간의 정신적, 영적 성숙의 공식일 수는 없지만 우리 신앙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합니다. 오랜 교회생활이 높은 신앙의 성숙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신앙의 번지수도 알지 못하고 무조건 믿습니다 라고 하는 열심만이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또한 직분을 갖고 종교의식을 잘 행하는 것이 좋은 신앙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회의하며 정직하게 의심하는 신앙이 귀한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이기주의, 신앙이라는 이름의 형식에 만족하는 신앙, 신앙이라는 이름의 불신앙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의심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 앙보다 나은 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의심을 극 복하는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모순과 역설, 신비를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자유를 누리며 확신을 가지고 삶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성숙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서 있습니까?

주님께서 존귀히 여기는 자에게 드리는 글 “칼과 마음을 씻는 곳, 세검정”

 

 

‘세검정’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그저 그런 한 부분이 되어버렸지만, 원래 이곳은 독특한 기능을 하는 지역이었다. ‘세검’ 문자 그대로 칼을 씻는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외적과 맞서서 싸움을 한 병사들이 싸움을 마치고 전쟁터에서 한양으로 귀환할 때, 한양성 안으로 들어가 임금님을 뵙기에 앞서서 세검정에 모여서 칼을 씻으며 몇 개월간 머무는 곳이었다고 한다. 

 

무슨 칼을 몇 개월씩이나 씻는가? 아마도 칼보다는 마음을 씻으라는 배려일 것이다. 병사들 모두 원래 선량한 양민이었고, 남의 집 귀한 자제들이었겠지만, 전쟁터에서 몇 달 혹은 몇 년씩 전투를 계속하면서 동무들의 머리와 팔다리가 적의 칼에 맞아 날아가고 피가 튀기는 것을 숱하게 보았을 것이다. 또 그 자신이 적의 머리와 팔다리를 숱하게 베고 자르면서 어느새 사람 죽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 이들이다. 이들이 세검정의 흐르는 물을 보면서, 칼을 씻고 마음까지 씻어내어 원래의 그들의 선량한 모습으로 착하고 평온한 마음을 회복하여 한양성을 개선해달라는 배려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기근을 피해,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땅으로 들어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로부터 400년이 좀 더 지나서야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다. 400년이 더 지난 긴 세월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적인 신앙적 인식마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여러 대에 걸쳐 애굽에서 생활을 하면서 신앙은 희미해졌고, 애굽의 이방 종교 문화로 인해 적지 않은 종교적, 영적, 정신적 오염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너기 전, 혹은 모세가 언약의 돌판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 장기간 그 자리를 비웠을 때 등등 여러 차례 보여준 불순종과 불평, 또 가나안 땅으로 보낸 정탐꾼들의 나약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보고 내용 등에서 여실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이다.

 

광야의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기간이었다. 400년간 몸에 밴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은 사고방식과 문화의 흔적을 떨쳐내고 온전한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데 필요한 세검정의 기간이다. 과거의 흔적을 떨어내는 곳인 동시에 새로운 땅을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장소가 바로 광야였던 것이다. 즉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세검정이라 할 수 있겠다.

 

성도는 누구나 세검정의 기간을 거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한 사람의 불신자가 스스로 결단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명실상부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인격과 문화적 인식과 사고방식, 습관, 생활이 여전히 그의 삶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떨쳐 내고,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문화적 인식과 사고방식과 습관과 생활로 바꾸어가는 데는 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완전한 변화와 성화는 죽을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니 일단 불가능하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느 수준 이상의 과거청산과 어느 수준 이상의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일률적으로 몇 년이다, 혹은 몇 개월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과거의 삶을 통해서 얻어진 상처와 흔적이 지나치게 분명하고 심각하다면 그만큼 그 기간도 길어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 고난 속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과거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들은 과거와 철저하고 완전하게 단절하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는 특별하고 길고 긴 세검정의 기간, 광야의 기간을 가져야 한다. 몇 달 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몇 십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처절하게 자신 을 돌아보며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고 새롭게 태어 나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고통스럽고 지루한 작업을 우리는 해야 한다.

 

이러한 세검정의 과정을 돕기 위해서 나는 목사로 서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님께 드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

 

 

“21세기 현대의 교회들은 여성주도의 평신도 운동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제자단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빼면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화제를 만든 사건도 거의 마리아 중심으로 엮어져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상경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의 향방을 몰라 당황하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겨우 아들을 찾은 어머니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눅2:49)” 라고 자신의 자리를 밝힌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일들이 그의 어머니를 둘러싸고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은덕을 제일 먼저 입은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아니,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열병에 시달리던 베드로의 장모는 뜻밖에 예수님의 치유 덕택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복음서는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와 함께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이야기를 동시에 보고했습니다(눅4:31-40).

 

신약성서 속에 있는 유명한 여인의 이야기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이야기(요4장),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바르고 머리칼로 그 발을 닦은 여인의 이야기(막14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나다나엘(요1장)과 우물가의 여인(요4장)이 첫 번째였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4:29)”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던 남매들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 그리고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나사로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비통한 심정으로 무덤 앞으로 가 “나사로야 나오너라(요11:43)”하고 큰 소리로 외치자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를 최초로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26).”라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아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메시지를 최초로 들은 사람(막8:31-33)이고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들은 부활메시지는 믿는 사람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예수 부활의 첫 번 목격자들도 여인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막16:9,10). 그녀는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가슴을 치며 슬퍼하던 여인들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제일먼저 만난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있어 여인들의 실체를 외면하고 교회 일을 남성들의 고유의 권한처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평신도운동도 남성주도에서 여성주도로 전환될 때 예수님이 고난에 참예하는 평신도운동, 예수부활의 증인으로서의 평신도운동이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예수님의 12제자단에 여인이 한사람도 끼여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자 남성 제자들이 다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며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그들의 배후에 이런 용기 있는 신앙의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발전사도 한국의 여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 분의 교회들에 가 보면 남성보다도 여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 비율 도 거의 70%가 여 성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의 초대교회 때도 수많은 개척교회를 세웠던 바울도 많은 여성 들이 도우며 동역한 내용이 수없이 많습니다. 현대교회는 여성의 평 신도 지도자 운동을 기대하듯이 현재 우리 주변의 교회들도 절실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현대의 교회들은 여성주도의 평신도 운동을 기대하고 있습 니다”

목/회/칼/럼 산을 옮기는 믿음

 

 

미국의 어느 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 교회 목사님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참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청년이 한 사람 출석하고 있었는데 그날 목사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꼭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이 살고 있는 집 뒤에는 큰 산이 하나 있는데 겨울철만 되면 눈이 쌓여서 늘 눈사태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도중에 감동을 받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지만 내가 한번 믿음을 키워 보아야겠다. 그래서 우리 집 뒤에 있는 산을 명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 이런 맘을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청년은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불철주야 기도합니다. 집회에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 청년이 하도 열심을 내니까 하루는 교회 목사님이 청년을 불렀습니다. “형제여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습니까? 한번 터놓고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청년이 자기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목사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예.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믿음을 키워서 우리 집 뒤에 있는 산을 명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목사님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철없는 청년이 설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산을 옮기겠다고 설치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과 청년이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청년은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목사님은 어떻게 하든지 청년이 하루 속히 마음을 고쳐먹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청년이 갑자기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드디어 올 때가 왔구나, 저 청년을 어떻게 설득해야 낙심하지 않고 위로를 받게 할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면서 청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의자에 앉으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목사님, 기뻐해 주십시오. 드디어 저의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이 청년이 요새 밤낮없이 매달리더니 정신이 좀 어떻게 되지 않았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목사님, 오늘은 제가 작정하고 기도한지 꼭 4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찍 시에서 직원 몇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앞으로 우리 동네 앞으로 큰 고속도로가 생기게 되는데 우리 집 뒤에 있는 산을 헐어서 거기에서 나오는 돌과 흙을 고속도로의 기반으로 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이나마이트도 터트리고 또 밤낮 할 것 없이 트럭들이 왔다갔다 할 텐데 시끄럽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시에서 충분한 보상금을 준비해 놓았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의 소원대로, 믿음대로 산이 옮겨져서 기쁘고, 또 생각지도 않았던 보상금도 받게 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할렐루야! 과연 청년의 믿음대로 그 산은 머지않아 형체도 없이 완 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 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언제나 함께 하길 원하며 99의 함정과 어느 장로님

 

 

옛날 어떤 나라에 왕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늘 행복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그에게 신기한 듯이 물었습니다. “자네가 늘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발사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예, 저는 늘 제 삶에 대해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그 이발사가 어떻게 자기의 삶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아마도 그 이발사는 99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 금화 99냥을 하사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도 달라질 것입니다.”

 

왕은 그 신하의 말을 듣고서 그 이발사를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금화 99냥을 담은 주머니를 하사했습니다. 이발사는 집으로 돌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주머니 속에 든 금화를 책상 위에 쏟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고 또 세어도 99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00냥에서 한 냥이 모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냥을 더해서 100냥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사에 욕심이 생기고 인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줄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에게서 행복한 마음이 사라지지 시작했습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도 수척해졌습니다. 어깨도 축 처져서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은 그도 99의 함정에 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을 사는 자들이 이 땅에서 많은 것을 가지려고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있는 것으로 늘 족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 행복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이 독실한 어떤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생토록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은퇴를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라고는 자신이 당시에 살던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와 자신의 퇴직금을 넣어 둔 은행 통장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큰아들이 장가갈 때 50평짜리에서 35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차액으로 아들 부부에게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몇 년 후 그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다시금 20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는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과 내가 가지고 있는 은행 통장을 상속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죽는 날, 이 집은 내가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리고 통장에 있는 돈도 내가 천국에 갈 때 노잣돈으로 다 써야겠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아라.”

 

얼마 후에 그 장로님이 섬기던 교회가 새롭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장로님은 자기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물론 자녀들도 장로님의 뜻에 기꺼이 따랐습니다. 장로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물질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의 뜻에 잘 따라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서 영원을 향한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99의 함정”이란 이야기와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 속에서의 우리는 영적인 교훈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설 교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마6:20)”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주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의 강

 

브라질에 있는 아마존 강은 세계 최대의 하구를 가졌습니다. 안데스 산중에서 발원하여 대서양으로 흐르는 아마존 강은 하구의 폭이 약 240km나 되며, 미시시피 강의 10배에 해당하는 유수를 바다로 흘러내려 보냅니다. 이처럼 아마존 강의 하구가 너무나도 넓기 때문에, 양쪽 언덕이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 그곳에 가는 사람은 자신이 강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바다 한 복판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대서양에서 폭풍 때문에 오래 표류한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그 배는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천시만고 끝에 겨우 이 하구에 도착했습니다. 해도 상으로는 분명히 아마존 하구에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육지의 언덕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마침 다른 배 한 척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배의 한 사람이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식수를 구하고 있는데 아마존 강은 어느 쪽이오?” 그러자 저쪽에서 고함 소리가 돌아왔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맑은 물 한 복판에 있소. 그러니 물통을 내려 뜨기만 하시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은혜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구원이라고 하는 맑은 물 한 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통을 내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미 넘치도록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물통을 내리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를 많은 자들이 잘 알지 못하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지성이라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그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얼마나 깊이 명상을 하는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주변에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공원을 청소하던 사람이 그를 보고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기에 아직도 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소?”

 

그 소리를 듣고서 쇼펜하우어는 정신이 든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바로 내 문제입니다. 나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요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덧입고 있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 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곳은 믿음으로 가는 곳 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고, 믿음을 따라서 삶을 마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의 바다에 와 있습니다. 그 생수를 퍼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자 심지어는 예수님의 지 상사역 중에 함께 했던 많은 제자들도 이해를 잘 하지 못 했습니다.

 

이해는 믿음에서 시작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언제나 기쁨이 넘치길 바라라며 어린양과 왕의 이름표

 

 

노르웨이의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는 종탑의 모양이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보통 교회의 종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인데 그 교회의 종탑에는 어린양의 조각이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건축을 할 때였습니다. 시골 교회라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건축할 때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시간을 내어서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건물을 지어갔습니다. 교회의 건축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갔습니다. 이제 건축이 거의 마무리될 때였습니다. 높은 종탑을 세우기 위해서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건물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실수로 그의 발이 미끄러져서 그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곳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전혀 몸을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그 시간 그 밑으로 한 무리의 양떼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 양떼 위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린 양 한 마리가 깔려서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교회는 종탑에 어린양의 조각을 세워놓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서 하신 사역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고초를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나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 피로 우리가 사망의 그늘을 넘어갔던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은 또한 “왕의 이름표”가 됩니다.

 

또 이러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에 있는 한 동네에 낯선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헤맸던지 그 강아지는 굶주림에 지쳐 있었고 몸도 너무 더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 목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름표에는 "밥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밑에는 이러한 말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다.”

 

알고 보니 이 강아지는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왕의 부처가 에딘버러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 강아지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곧 왕궁에 보고되었습니다. 강아지는 왕에게 그 즉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강아지는 왕궁으로 돌아가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교훈이 무엇인가?” 이름표의 역할입니다. 강아지가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름표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왕이 무엇 때문에 그 더러운 강아지를 받아들였겠습니까? “강아지가 왕에게 좋은 일을 해서인가? 강아지가 왕의 뒤를 잘 따라 다녀서인가?” 왕이 강아지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한가지뿐입니다. 그 강아지가 자기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름표가 중요합 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 온 우주의 왕이신 그리 스도에게 속했다는 이름표만 확실하게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아버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 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 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언제나 승리하시길 바라며 John Wanamaker와 Andrew Carnegie

 

 

미국의 존 와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는 백화점 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이 돈독했습니다. 그는 사업에 크게 성공한 후에는 YMCA 운동가로서 크게 활약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 곳곳에 YMCA 건물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종로2가에 있는 YMCA건물도 그가 지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번은 미국의 제23대 대통령이었던 벤자민 해리슨이 그에게 체신부 장관직을 좀 맡아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대통령은 그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와너메이커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주일학교 선생을 해왔습니다. 주일이 되면 지금도 교회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장관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에게 매주일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칠 것을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장관직을 맡겼습니다. 그는 장관으로 일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본업은 주일학교 교사이고, 장관직은 부업일 뿐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는 나의 종신직이고, 체신부 장관직은 임시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장관직을 소홀히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주일이 되면 반드시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 가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나라에서 자기에게 맡긴 일보다도 교회가 맡긴 일을 더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이 맡긴 장관직보다도 하나님이 맡기신 주일학교 교사직을 더 귀중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나그네의 특징은 떠나는 것입니다. 한 자리에 영원토록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살다 갈 이 땅에 너무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가 남겼던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로 죽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돈을 벌기만 하고 남겨놓고 죽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자기의 말대로 그가 벌어 놓았던 많은 돈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기 때문인가? 그들이 돈을 많이 번 대재벌이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자선사업가들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고 값있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돈 벌레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은 빈손 으로 가야할 인생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 에 쌓아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안에 있는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본향을 사 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주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2 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케테」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곤 거부할 수 없는 잔인한 가난과 두 달 전 가출해 버린 전화 교환수인 남편 그리고 가난에 중독되어 창백한 세 아이와 나이 38세인 그녀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케테는 이미 6년 동안이나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후랑케」 부인의 부엌에 세들어 살고 있습니다.

 

후랑케 부인은 교회 안에서 대단한 힘을 지닌 활동가입니다. 이 60대 여자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라고는 웃음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부인은 때묻은 지폐를 셀 때와 지하실에 보관해 둔 3백개의 과일 쨈 병을 셀 때에는 웃었습니다.

 

가난한 케테의 자녀들의 노랫소리에도 집 주인 후랑케 부인이 화를 벌끈벌끈 냅니다. 그 가련한 자식들에게서 노래마저 기뻐할 수 없는 그런 괴로운 나날을 속에서 견디지 못한 케테의 남편 후레드는 집을 나가버립니다. 가엾은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거리의 더러운 여인숙에서 만납니다.

 

케테는 더러운 여인숙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난과 생의 괴로움으로 훨씬 늙어버린 남편을 향해 반문합니다. “당신은 왜 기도를 하지 않는거죠? 기도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걸 당신은 왜 모른 척하는 거예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어.” “주님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아요. 기도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해요. 자꾸 다시 시작해요.” “기도속에 우리는 강해 질 수 있어요.”

 

이 처절하리만치 슬픔을 주는 작품은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독일의 하인리히 뵐《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입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한 그리스도인의 이기심을 고발하며 내면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가난을 견디며 살아가는 인고의 신앙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크리스천 부인의 맹목적인 탐욕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주위가 온통 폐허가 되었고 이웃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는 그때인데 몰지각한 그 부인은 비싼 과일 쨈 병이 하나씩 더 늘어나는 데서 유일한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 그 밑바닥같이 더러운 지하실에 잠들어 있는 3백개의 과일쨈 병, 그 부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많은 소유의 통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절망적 질병이어야만 하겠습니까!

두번째로, 우리는 그러한 더럽고 가증한 손으로 교회의 성구를 만지며, 봉사한다고 휘젓고 다니는 휘랑케 부인은 병든 나사로가 기숙하던 집의 부자보다는 선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심은 실상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기 위한 사욕일 뿐이지 진실로 그들의 가난과 고통에는 관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응답이 아니고 자만과 허기였습니다. 부자의 풍요한 부엌에 세들어 살면서 그 부엌에서 배고픔에 울어야 하는 인생의 역경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진정한 크리스천은 내 것 가지고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그래도 기도를 잃지 않고 있는 케테라는 크리스천이 있습 니다. 그녀는 불평등의 원리 같은 것을 따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고 그녀가 배고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가 훈련 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는 기도를 축복의 봇물을 터뜨리는 요술방망이로만 아는 우리에게 기도의 의미를 음미 하게합니다. 그녀는 기도란 다시 시작 하는 것이며, 이것은 기도의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기도 속에서 강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도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기도하면 됩니다.

 

힘드신 분들은 기도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더 강 하게 합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사랑 그 역동적인 힘

 

 

미국 동해안에 살고 있던 맥카리스터 박사메릴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의사이면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내를 잃게 되는 그는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이 더욱 심화되어 결국 중풍병과 같은 증세로 발전, 몸마저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먹는 것도 마다하면서 자기 파멸의 망상에 몰두되어 기회만 있으면 자살을 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세 명의 간호원이 교대로 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맥카리스터는 그 점이 더욱 못마땅하여 그럴수록 더욱 기회를 찾아 자살을 하고자 애썼습니다.

 

그의 형세는 휠체어에서 지내고 들어서 침대에 누이고 음식마저 억지로 먹어야 했습니다. 이 지경에서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세 간호원들 이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 그는 여유 있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해변에 가보고 싶다. 저 높은 벼랑 위에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고 싶다.”고 하면서 간호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일부러 평온을 되찾은 체 하면서 간호원에게 가서 수영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간호원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를 휠체어에 앉혀 놓고 물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사실 맥카리스터는 간호원의 눈길이 멀어지기만 하면 벼랑에서 뛰어내릴 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간호원 한 사람이 물 속에서 다리에 쥐가 나서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맥카리스터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구조원이 시원스럽게 헤엄쳐 들어가 아가씨를 구조하는구나 하고 구경했겠지요. 순식간에 그는 간호원을 구조해 냈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맥카리스터의 우울증과 중풍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그토록 미워하던 간호원을 위기에서 살려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자기 삶의 의욕마저 되찾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의사의 직업적인 본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여 맥카리스터는 간호원을 살렸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살렸던 것입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첫째로, 누구에게나 불행이란 마수가 뻗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의사, 부요한 환경,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보장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무지개 빛 미래, 그 가정에도 졸지에 비극은 몰아 닥쳐왔던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누구에게나 소생의 기회는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이 인류에게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재앙이라면 희망과 소생도 그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처방이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분석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희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사랑의 길이라는 점입니다. 자기애에 빠진 자는 마침내 죽고, 주를 위해, 타인을 위해 죽고자하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맥카리스터의 가슴속에 의사로서의 휴머니즘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자기 처지를 잊게 하고 바다 속 으로 뛰어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애릭 프롬은 말 합니다. “사랑은 역동적인 힘이다” 사랑, 크게는 인류애, 희생적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이러 한 사랑, 그 역동적인 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안에 있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주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성도님께 사랑과 기도의 기적

 

 

지금부터 30여년전 미국 어느 도시 시립병원 정문 앞에 생후 6개월 된 아기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아기는 날 때부터 소경인데다가 뇌성마비에 걸린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병원 당국은 당황하여 마침 은퇴한 간호원 메이 렘케에게 이 사연을 말했습니다. 당시 52세로 신앙이 깊었던 그녀는 “내가 죽는 날까지 그 아기를 돌보아 주겠습니다.” 하면서 버려진 아이를 데려 왔습니다.

 

그러나 메이는 아기를 보는 순간 너무도 비참한 인간 생명의 무기력함에 울어야 했습니다. 우유를 대주어도 빨아먹을 반사본능마저 없는 이 생명, 메이는 그때부터 아기의 뺨에 얼굴을 대고 정성스럽게 안마를 했으며 팔과 다리, 손가락을 어루만져 주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야기와 자장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몇 년이 흘러도 이 식물인간 ‘레슬리’는 단 한 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말 한 마디는 물론 웃음이나 눈물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메이는 이때부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스스로 레슬리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아기를 키우도록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주여, 그 이유를 언제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기도라기보다 항변에 가까운 호소를 하면서 걸음마를 시켜 보고 특수요법으로 치료를 계속했으나 레슬리는 그 어떤 변화도, 살아 있다는 신호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레슬리가 18살이 되었을 때 메이의 남편과 친척 친구들은 모두 이 아이를 포기하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항상 이러하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성경의 기적을 믿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기적을 허락하소서. 정신적 감옥을 깨드리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기적을 주시옵소서.”

 

이것은 메이 부인으로서도 마지막 호소이자 기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는 레슬리가 엄지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실로 18년 만에 처음으로 보여 준 이 기적 앞에서 순간 메이는 “음악이다. 음악이야.”하고 외쳤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메이는 그 남편과 레슬리의 방에 피아노, 전축, 라디오, 텔레비전을 틀어놓아 온통 음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레슬리의 손가락을 집어 피아노 건반을 눌러주며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레슬리는 한 번의 기적으로 만족하라는 듯 변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71년 어느 겨울 새벽,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곤한 잠에 빠진 가족들은 누군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치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순간 메이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레슬리의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레슬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레슬리를 잊지 않으셨군요.”

 

순간 레슬리의 눈에도 실로 21년 만에 진주 같은 이슬이 맺혔습니다.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너무 성량이 풍부했습니다. 그는 뉴욕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더듬대며 “음악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스컴은 이 실화를 메이 부인의 “사랑과 기도의 기적”이라고 보도 했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이 벽에 부딪힐 때 성도 는 동적인 기도를 통하여 운명적인 좌절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기 도만 가지고도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사랑 없는 기도는 아브라 함처럼 중도에 간구를 포기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 이 부인의 승리를 두고 “사랑과 기도의 기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드리는 글 복음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영국에는 세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문학인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돌려서 러시아의 대 문호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받던 사람, 톨스토이를 주목해 봅시다. 슬라브민족(러시아 및 동구권) 뿐만 아니라 모든 서방 사람들에게도 칭송받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인생을 다 보내고 말년에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깨닫고 “오직 복음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 영원한 진리이다” 강조하면서 부패한 정부를 무자비할 정도로 비판하면서 농민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농민의 옷을 입고 봉사하며 생애를 살다가 생을 마칩니다.

 

“복음 없는 성공은 무익하다”고 말한 톨스토이의 일생과 문학세계는 빛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1828년 귀족의 가문에서 백작의 상속자로 태어나서 90여권의 명작들을 남겼으며, 그 중에서도 1865년부터 1869년까지 5여년 걸려 쓴 ‘전쟁과 평화’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금자탑이었습니다. 또한 1876년에 출판된 ‘안나카레니나’를 읽은 도스토옙스키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거리를 뛰어 다니면서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외쳤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톨스토이는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매우 방황을 하였습니다. “안나카레니나”를 발표한 후에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로 고뇌하다가 복음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삶의 방법이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젠 나의 생을 농민들과 생활하겠다고 결심하고 원시기독교 신앙에 복귀하였습니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 후 ‘참회’ ‘부활’ 등을 저술하며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의 도덕적 희생을 묘사했습니다.

왜? 첨단 사회인 21세기를 살아가는데 19세기 과거의 톨스토이를 이야기하느냐고 의아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 본연의 자세는 또한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합니다. 도덕적인 희생과 모범 속에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지금의 시대의 사람들은 중세의 이태리 정치학자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군주론’에 나오는 것처럼 국가나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에 젖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종교적 계율도, 도덕적 기준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잘못된 사상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이라크 사태를 봅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인되고 있는 약탈과 살인과 인간 청소를 보면서 우리는 분노해야 합니다.

 

왜 분노하는가? 그것은 국가보다 더 큰, 더 높은 가치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가치와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과연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채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내던져진’ 존재인가? 우리 인간은 과연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창조하고 쌓아가야 하는 미아와 같이 버려진 존재인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가? 문명인들은 왜 이렇게 더욱 잔악해지고 있는가? 이 많은 질문에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신 근본이 되는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을 찾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해답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니라(마22:3-40)”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사랑으로 주신 복음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복음의 주체인 그리스도만이 결론입니다. 이 복음 속에 우리는 지금 감 격해 하고 있습니까? 확신이 옵니까? 아니면 기쁨이 없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 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드리는 글 씨앗과 황금

 

 

어떤 여객선이 항해 중에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여객선은 항로를 잃고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헤매다 어느 무인도에서 난파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승객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그 무인도를 빠져 나와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들의 난파선 주위에는 걱정 없이 몇 달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짜가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의논했습니다. 몇 달 간 먹을 식량은 확보되어 있지만 얼마를 더 기다려야 구원을 받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얻은 결론은 땅을 파고 씨앗을 심어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땅을 파고 씨앗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그 땅에는 황금덩이가 여기 저기 묻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몰랐으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 황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씨앗을 뿌리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땅을 파 뒤지기만 하면 여기서 저기서 황금덩어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씨앗 뿌리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금은 점점 많아져 황금더미를 이루었습니다.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몇 달이 흘렀습니다. 아! 그런데 양식이 그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씨앗이 싹이 트려면 몇 달이 걸려야 하는데 그 때까지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미 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흩어져 있는 많은 황금덩이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였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황금을 찾아 이리 저리 날뛰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습니다. 더 이상 귀한 세월을 황금으로 눈멀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우리 손에 황금덩이를 둘 것인가 아니면 씨앗을 뿌릴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는 또 한번의 선택이 주어집니다. 우리들 앞에는 당장에 우리를 만족하게 해 줄 황금덩어리들이 많이 보일 것입니다. 부귀영화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만 인생은 그런 것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그 말씀을 통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져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고 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은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느니라(갈 6:8)”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에 목숨 걸고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복음을 받아들여 야 합니다.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할 것은 한 가지 “오직 예수 그리스 도” 뿐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행4:12)고 말하 고 있습니다.

 

황금도, 찬란한 세상의 영화도 잠깐입니다. “영원한 것을 심기 위해 힘쓰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할 것을 먼저 하 고 나중에 할 것을 나중에 해야 합니다. 귀하에게 질문한가지를 드립 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놓여있습니까?

목/회/칼/럼 부 활 신 앙

 

미국 보스톤 교외에 고든 콘웰(Gordon Conwell)이라는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이 학교는 1884년 럿셀 콘웰(Russel Conwell)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그는 원래 철저한 회의론자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런 학교를 세우게 된 데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군의 지휘관 이었습니다. 한번은 전쟁에서 급하게 후퇴하다가 지휘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지휘도를 놓고 오는 실수를 범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밑에 있는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찾아오도록 했습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 속에 들어가 칼을 찾아 왔지만, 돌아오는 길에 총에 맞아 피 흘리는 몸으로 콘웰의 천막에 들어와 칼을 바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콘웰은 자기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한 그 소년을 살려 보려고 가진 노력을 다 해 보았습니다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그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링,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는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더냐?󰡓

 

그랬을 때 그 소년이 말했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그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까지 철저한 무신론자요 회의론자였던 콘웰은 그 소년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찾은 예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결단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세운 것이 바로 콘웰 신학교였습니다. 처음에는 필라델피아에 있었는데 그 후에 고든(Gordon)이라는 목사님과 힘을 합쳐서 보스톤 근교로 옮겨 지금의 고든 콘웰 신학대학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 템플 대학도 세워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습니다. 결국 한 소년의 부활신앙이 그를 변화시켰고 그의 변화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이 배출 되었으며 그들로 말미암아 이 땅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남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신앙이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어떤 장애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주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했습니다.

 

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 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3-39)”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 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 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부활신앙을 가지면, 환난 많고 어려움 많은 이 세상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사는 것, 부활은 복음의 본질이자 하나님이 주 시는 능력입니다.

목/회/칼/럼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키소, 코소, 카아소"라고 부릅니다.

 

첫째 기준은 "키소"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그의 주머니"라는 뜻입니다. 돈 주머니, 곧 전대를 의미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온통 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어린 시절 무척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옷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살았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장가도 느지막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안에서 늘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 신조는 이러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는 어려운 교회들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모든 교회가 최상의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교회에 전자오르간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가 기증한 전자오르간의 수는 7천대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의 전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 다오."

 

둘째 기준은 "코소"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그의 잔"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물됨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잔에 술을 부어서,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육신의 향락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그런 데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 두면서 살아갑니까?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을 보면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Men's chief a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셋째 기준은 "카아소"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의 노여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 사람의 감정 조절 능력과 인내력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또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습니다. 왜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그 지렁이가 아직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렁이가 완전히 죽으면 밟아도 꿈틀거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육신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일에도 화를 벌컥벌컥 냅니다. 온갖 성깔을 다 부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 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완전히 장사 지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면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면서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 나니 그런즉 이제는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 것이라 (갈2:20)”. 여러분! 이 세가지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한번 평가해 보 십시다. 우리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 두면서 살아갑니까?

목/회/칼/럼 가가와 도요히꼬

 

 

이웃나라 일본의 성자요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우는 가가와 도요히꼬는 빈민 운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시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부모님 두 분을 일찍 여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15살이 되었을 때 그의 고향 고베를 떠나서 동경으로 무작정 올라왔습니다. 그는 어느 인쇄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20대 초반에 폐병에 걸렸습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의사로부터 전연 희망이 없다며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성도들이 찾아와서 마지막 예배까지 드려 주었습니다. 성도들이 돌아가고 난 그날 그는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 더 남자답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모든 희망이 사라져서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 만일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도 자살을 생각하셨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은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섬길자를 찾아가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는 자신의 자살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날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리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빈민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자살을 계획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제 나는 사선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선을 넘어서." 이것은 훗날 그의 유명한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폐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곳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그는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술주정뱅이는 그에게 돈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으면서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는 그 길로 술을 사 마셨습니다. 그러더니 돌아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저런 몹쓸 인간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를 돕는 것이 아니라오. 도리어 그를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된다오."

 

그때 가가와 도요히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사람들에게서 속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비로소 작은 사랑의 씨앗이 싹트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 은 그가 폐병으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 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학도 했습니다. 돌아오고 난 뒤에도 그는 일생토록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 소 실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 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에도 작은 사랑의 씨앗들은 무수히 싹트 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칼/럼 내 평생에 가는 길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가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이 찬송은 찬송가의 욥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찬송시를 쓴 스패포드 교수는 시카고 대학에서 법리학을 가르쳤던 분입니다. 변호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시카고 무디 교회에서 회계 집사로 헌신을 했던 분이었습니다.

 

1871년 시카고 대 화재 때, 그의 집도 몽땅 타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충격으로 몸져누웠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가족들과의 여행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구라파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아내와 네 딸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화재에 대한 뒤처리 문제로 그 다음 배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사랑하는 네 딸을 태우고 가던 배가 대서양 한가운데서 다른 배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그 사고로 사랑하는 네 딸은 다 죽고, 그의 아내만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에게 영국의 웨일즈에 도착한 아내로부터 짤막하게 전문이 왔습니다. "혼자만 구조되었음."

 

그는 그 전문을 받고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즉시 배에 올라탔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잃고서 혼자 정신없이 헤매고 있을 그의 아내가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가 선실에 있는데 선장실에서 차나 한잔 하자는 전갈이 왔습니다. 선장은 함께 차를 마시면서 그에게 이제 잠시 뒤면 네 딸을 앗아간 바다 위를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다시금 선실로 내려왔습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입니까? 새벽 세시쯤 되었을 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평안이 그의 마음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It is well with my soul, 내 영혼 평안해." 그는 배 안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찬송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렇게 해서 찬송가 470장이 탄생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네 딸을 앗아간 바다 위를 지나가면서, 이런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에 그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그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존 칼빈 선생의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지만,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광야가 우리의 삶이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광야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것 같습니까? 광야는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크게,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광야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고난 속에 서도 평안할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목/회/칼/럼 “믿음을 유산으로”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어떤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돈은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신앙생활을 전연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뜨거운 불구덩이 가운데서 한창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바로 자기 옆에 떨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두 부자가 지옥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가 막힌 듯이 아들에게 나무랐습니다. 이놈아! 나는 너 하나 잘되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 보았다. 그래서 너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었다. 그 정도의 돈 같으면 네가 못된 짓을 하지 않고서도 세상에서 편하게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너 마저 이렇게 지옥으로 왔단 말이냐?"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왜 지옥에 왔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내가 지옥에 온 것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입니다. 왜 내게 많은 돈을 물려주셨습니까? 차라리 돈을 물려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열심히 일하느라고 차라리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게 그 많은 돈을 물려주셔서 그것을 허랑방탕하게 쓰느라고 온갖 죄를 짓다가 이렇게 지옥으로 끌려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지옥에 왔고,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지옥에 왔다고 하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가 서로를 원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자녀에게 물질, 지위, 권세 등 세상적인 것을 물려주기 위해 안달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온 가족이 지옥에서 다시금 상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가족이 다시금 반갑게 상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족장, 요셉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한 몸에 다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무엇이라고 유언을 했습니까?

 

"얘들아, 내가 이 땅에서 이루어 놓은 부귀, 영화, 권세를 너희들은 잃지 말고 힘을 다해서 잘 지키도록 해라. 너희가 힘을 합치면 너희는 얼마든지 애굽 사람들을 몰아내고 이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은 그렇게 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히11:22에 보면,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자기의 후손들에게 신앙적인 유언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의 후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요셉뿐만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믿음을 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히11:20∼21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아브라함은 믿음을 자신의 아들 이삭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또한 이삭은 믿음을 자기의 아들 야곱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 다. 야곱은 믿음을 그의 아들 요셉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요 셉도 임종할 때 역시 믿음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것 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는 날 동안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 을 받는 그 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을 유산 으로 남기십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 야 할찌니라(히11:6)

함께 하길 원하면서 드리는 글 천/국/열/쇠

 

 

미국의 어느 대학촌 주변에 30층짜리 고층APT가 있었습니다. 그 맨 꼭대기 층에 가난한 세 사람의 대학생이 함께 어울려서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맨 꼭대기층이 값이 제일 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법학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철학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슈퍼마켙에 들러서 간단하게 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정전이 되어서 엘리베이터가 가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리실에 물어보니까 몇 시간 뒤에라야 전기가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서,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서 아파트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10층씩 나누어서 자기가 전공하는 과목을 다른 두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먼저 법학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사회에 있어서 질서는 필수적이다. 이 세상에 질서가 없다고 상상해 보아라. 얼마나 혼란스럽겠느냐? 그러니 질서를 잡아주는 법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러면서 그는 법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을 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철학도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만 계속해서 쏟아놓았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철학도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질문들, 자신도 시원하게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학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신학의 우월성에 대해서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다. 그 이유는 신학은 절대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어느덧 꼭대기 30층까지 다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도가 정신이 번쩍 난 듯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사람들 다 보겠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라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아파트 문을 여는 열쇠라네."

 

그들은 관리실에 아파트 열쇠를 맡겨놓고서 그냥 빈손으로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시금 걸어서 밑에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본향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천국의 열쇠가 없으면 우리의 인생길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천국의 열쇠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 구에게든지 천국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요3:16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 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자에게만 천국열쇠는 주어집 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목회칼럼 함/께/하/는/삶

 

 

옛날 어느 마을에 두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장애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고, 한 사람은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없이 걸식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움막에 기거하면서 서로 협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서 앉은뱅이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소경의 등에 업혀서 소경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거지가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매우 동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걸하러 올 때마다 자신들의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거지였고, 또 장애자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살림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조금씩 자기의 밥그릇에 슬쩍 슬쩍 옮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앉은뱅이는 배불리 얻어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두 거지는 구걸을 하기 위해서 움막을 나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매우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앉은뱅이는 그동안 잘 얻어먹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해서 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일순간 소경은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소경의 등에 업혀져 있던 앉은뱅이의 몸도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눈 위에 꽁꽁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협력하면서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서, 꾀를 부리면서 그 행복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너'의 소중함을 무시했던 '나'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두 사람 모두의 죽음이라는 공멸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일찌기 고대의 어떤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너' 없는 '나'가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는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웃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불어서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첫째로, 우리가 핍박을 당했을 경우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를 핍박을 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이웃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경우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축하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축하해 주어야 하고, 우리의 이웃이 슬픈 일을 당하면 우리의 마음을 다해서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했을 경우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높은 데 두지 말고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좋은 이웃 이 되어주기를 기대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들이 언제, 어떤 사람 에게라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화목할 수 있습니다.

목/회/칼/럼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

 

 

어떤 남자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삶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글을 쓰는 의욕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친구는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뒤에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난 뒤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지냈다네. 그래서 나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 듣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 했었다네."

 

친구는 알았다는 듯이 잠시 뒤에 그에게 몇 장의 처방전을 써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보게, 이 처방전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라네. 시간을 정해 놓고 약을 먹듯이 이 처방전들도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차례대로 펼쳐보아야 할 것이네. 그리고 이 처방전들은 자네가 어린 시절 에 자랐던 고향 바닷가에 가서 열어보게나."

 

그는 친구가 일러주는 대로 고향 바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첫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이 처방전을 열어볼 때면 자네는 이미 바닷가에 가 있을 것일세. 그곳에 조용히 앉아서 자네가 좋아하는 파도소리, 갈매기소리를 한 두 시간 정도 들어보게나."

 

그는 조용히 앉아서 친구가 일러주는 대로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린 시절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차츰 그의 마음속에 안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자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머리에 떠 올려보게나."

 

비록 지금의 그의 삶은 깊은 절망감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에게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더불어서 바닷가를 뛰어다니면서 장난치던 일, 저녁이 되면 어머니가 찾아와서 자기를 데려다가 깨끗하게 몸을 씻겨주시고 맛있는 밥상을 차려 주셨던 일 등등, 행복했던 순간들을 머리에 떠올리는 가운데 그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이제는 자네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게나. 자네가 지금까지 무슨 동기로 일하고 살아왔는지 곰곰이 되씹어보게나." 그는 눈을 감고서 자기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 중심에 계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그의 마음 가장자리에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없이 우는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처방전을 열어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여보게, 이제는 자네의 죄를 자백할 때가 되었네. 모래 사장위에 자네가 자백해야 할 죄들을 낱낱이 기록해 보게나."

 

그는 울면서 모래 사장위에 자신의 죄들을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충했던 것, 사랑했던 가족들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 이웃에게 잘못 행한 것 등등, 낱낱이 생각나는 대로 빠짐없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처방전에서 일러준 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 났습니다. 그 는 무릎을 꿇고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 한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한참 뒤에 기도를 다 끝내고 눈 을 떠보았습니다. 그는 다시금 깜짝 놀랐습니다.

 

모래 사장위에 적어 놓았던 무수한 죄들이 파도와 함께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 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희에 찬 모습으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 시금 용기를 얻고서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의 내용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님께 드립니다 몰로카이섬의 성 따미엔

 

 

미국 하와이의 정부 청사 앞에는 특이한 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동상의 얼굴이 흉칙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어서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입니다. 어떻게 공공장소에 그런 끔찍한 모습의 동상이 서 있을까? 이러한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동상 밑에 적혀 있는 글귀를 읽어보면 이해가 갑니다.

 

'성 따미엔.(1840∼1889).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 우리의 좋은 친구였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귀한 친구가 있을까?'

 

문둥이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 따미엔은 본시 벨기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대단한 갑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의호식하면서 얼마든지 일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물려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혈혈단신으로 하와이 군도의 한 섬인 몰로카이로 건너갔습니다.

 

그 당시의 몰로카이섬은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문둥이들만 그 안에 모여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따미엔은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곳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몹시 순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들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줄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은 자나 깨나 그러한 생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문둥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이러했습니다.

 

"흥, 자기야 몸이 성하니까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지. 자기도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려서 날마다 몸이 썩어 들어가 봐! 어디에서 소망을 찾고,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따미엔은 몹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움막에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저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문둥병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저를 위하여 그 귀하신 몸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물며 이 미천한 종이오리까! 그러니 저에게도 문둥병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마음의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는 문둥이의 고름 섞인 피를 자신의 몸에 수혈을 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의 몸도 감각이 무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썹이 빠져나갔습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더니 그 마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의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문둥병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에게 문둥병을 허락해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에 걸린 우리들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곳 에 있는 모든 문둥이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따 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던 몰로카이가 소망과 생명이 넘치는 섬으로 바뀌어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류의 조상인 아담, 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아담을 하나님께서 주셨 으니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이 임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늘의 최 고 상급입니다.

목/회/칼/럼 정 찬 유 장 로

 

 

옛날 황해도 재령에 있는 동부 교회에 정찬유라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받는 훌륭한 장로님이셨습니다. 본시 그는 학교 앞에서 작은 문방구점을 경영하면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다 보니까 그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떼먹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래도 배가 고프고, 저래도 배가 고프다면 차라리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배가 고픈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아예 굶을 각오를 하고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차츰 그의 형편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물질의 복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정도 자금이 모였을 때, 그동안 하던 문방구점을 문을 닫고서 그 대신 건축자재 상회를 열었습니다.

 

때마침 건축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서 자기가 살던 집을 신식으로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떼돈을 벌었습니다. 건축자재가 없어서 못 팔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황해도에서 몇째 가는 큰 갑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사는 허름한 집도 현대식으로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 마당에 건축자재들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는 흐뭇한 심정으로 건축자재를 바라보던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던가?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허름한 채로 내버려두고서 내가 내 집만 새롭게 고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짓기 전에는 자기의 집을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동안에 모아놓았던 모든 돈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3만 환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0억에 이르는 많은 돈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돈으로 새로운 교회부지 3만평을 산기슭에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현대식 건물로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교인들은 그의 귀한 뜻을 기르기 위해서 예배당의 머릿돌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정 장로님의 모습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는 그 교회에 다니지 않고,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과 교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랴부랴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장로님, 왜 본 교회를 두시고 일부러 다른 교회에 출석하십니까? 무슨 섭섭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동부 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바뀌어서 정찬유 장로가 지은 정찬유 개인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있는 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돌아가 주십시오."

 

그제서야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예배당의 머릿돌에 있는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는 글씨를 깨끗이 지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예전처럼 본 교회 출석을 하면서 더욱 충성을 다했습니다.

 

분명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는 자기의 인간적인 의를 자랑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 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화목케 하는 자들 다 되시길 바라며 텔/레/마/쿠/스

 

 

주후 4세기에 텔레마쿠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시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은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그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갔습니다. 때마침 로마에서는 어떤 장군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축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도 사람들 틈바구니에 싸여서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려 퍼졌습니다. 두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먼저 황제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의 일종인 줄 알고서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경기장 측에서 늙은 수도사의 복장하고서 어떤 어릿광대를 집어넣어 경기를 흥겹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두 검투사의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았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그 순간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습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텔레마쿠스의 외침과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그 잔인한 경기를 영원토록 종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를 십자가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후5:18에 기록된 대로 화목하게 하는 거룩한 직분이 주 어졌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화목해야 할 것 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화목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8)

믿음의 일꾼들 다 되시길 바라며 어느 술집 이야기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뜻밖에도 교회 바로 앞에 큰 술집이 생겨났습니다. 그로 인해 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술집을 쳐다보아야 하니까 마음이 결코 편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 있는 여전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서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어찌하든지 저 어두움의 권세를 속히 이곳에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여전도회에서 시작된 기도 운동은 교회 전체에 확산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40일을 작정하고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40일 동안의 작정기도가 끝나고 난 뒤 얼마 안 되어서 술집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적자 운영으로 큰 빚을 지고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이 교회를 걸어서 소송을 제기해 온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술집이 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교회가 그렇게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책임을 지고 자기에게 일백만 달러를 물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양 측 모두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돈 일백만 달러 때문에 서로가 마음에도 없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술집 주인은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기도 때문에 자기 술집이 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반대로 교인들은 분명히 40일 동안 작정하고 기도해 놓고, 기도가 응답이 되니까 일백만 불이 무서워서 “무슨 소리냐? 안 망할 집이 기도한다고 망할 수가 있느냐? 어디 와서 생떼를 쓰느냐? 그것은 억지다!”라면서 기도의 능력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술집 주인은 기도 때문에 자기가 망했다고 하고, 교인들은 기도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판사는 양쪽의 주장을 다 듣고 난 뒤에 명 판결을 내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일백만 달러를 직접 받으시오.”

 

술집 주인의 생각에 교인들이 기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술집을 망하게 하신 것이라고 보니까, 하나님께 가서 일백만 달러를 보상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판사는 뼈있는 말을 한 마디 남겼습니다. “내 생각에는 술집 주인이 교인들보다는 훨씬 더 믿음이 좋아 보이는군요.”

 

술집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인정하는 주장을 자꾸 하고, 반대로 교인들은 기도의 능력을 부정하는 듯한 주장을 하니까 판사가 보기에는 술집 주인이 교인들보다도 더 믿음이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때로는 확신 없이 반신반의 하는듯한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막11: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의 믿음이 굳세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때로 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 께 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 님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같이 가야 합니다”

목/회/칼/럼 마지막 황제

 

 

대대로 중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 임금을 황제 또는 천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중국 최후의 천자는 청나라의 부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겨우 4살 때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상에 앉아서 성대하고도 화려하게 천자 즉위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4년도 채 못 되어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했습니다. 그때부터 천자는 12년 동안 북경의 자금성 안에 연금된 삶을 살았습니다. 한 발자국도 궁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천자는 자금성 안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진에서 6년 동안 유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은 천자를 자기들의 꼭두각시 황제로 즉위시켰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잠시 동안이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어 천자는 소련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뒤에 공산당에게 인계되어 감옥에서 15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을 마치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옛날에 천자였다는 사실에조차 아무런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천자는 다른 사람의 집정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하루하루 삶을 연명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였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서 옛날에 자기가 살았던 궁궐, 북경의 자금성을 찾아왔습니다. 이미 그때는 하나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천자는 그곳 관장을 찾아가서 마지막 소원을 애걸하게 부탁했습니다. 옛날에 자기가 앉았던 용상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앉아보게 해달라는 애절한 부탁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그 모습이 애절해서 관장이 들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금성에 일하고 있는 사람 200명을 동원해서 천자의 즉위식 때처럼 도열까지 해주었습니다.

 

천자는 고맙다고 허리를 구부려서 관장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흐르는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한 채 자기 처소로 돌아와서 다음날 쓸쓸하게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화장에 처해졌습니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천자의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시작은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너무나도 비참하게 결말을 맺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궁궐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집에서조차 탄생하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이 있을 곳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쫏겨남을 당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마굿간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어리신 예수 누울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말씀 그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냄새나는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일생 동안 비천한 삶을 사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으로 온 세상 인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만백성의 이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해서 모든 만민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최후의 황제가 아니라 영원의 황제가 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가면 그 위에 구유 교회라고 하는 이름의 유명한 예배당이 있습니다. 주후 4세 기에 지었습니다. 크게 잘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입구는 하나밖 에 없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씩 겨우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오는 자는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세를 가지고서는 아 기 예수를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상에 앉은 천자에게 허 리를 굽히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라는 뜻입니다.

목/회/칼/럼 “The Bible Says”

 

 

얼마 전 미국의 뉴욕 타임즈지에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시대 미국의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인가?" 1위는 대통령도 아니었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도 아니었습니다. 1위를 차지한 인물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즈지는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역대의 어느 대통령보다도 아니 몇 사람의 대통령을 합해 놓은 것보다도 더 지대한 영향을 미국 국민들에게 주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정이 파탄에서 회복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탈선 현장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 그러니 그의 영향력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수많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청년 시절 시카고의 휘튼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학 교수들 가운데, 자기들의 지성만 믿고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저하지 않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 밑에서 교육을 받다보니,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예전처럼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어떤 결론이라도 내려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성경을 들고서 휘튼대학 구내의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러 교수님들 밑에서 여러 학문을 접하다 보니까,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읽어도 예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그는 조용한 달빛 아래서,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는 성경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라."

 

그 순간 불현듯이 그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어찌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 머리로 성경 말씀을 의심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 내 경험, 내 논리, 내 판단까지도 성경 말씀에 의해서 의심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겠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성경 말씀에만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설교할 때마다 늘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The Bible Says” "성경은 말씀하시기를"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이성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 기를 입니다. 그는 성경 말씀에만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던 것입니 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바 르게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성경의 절대성과 영원성에 모든 것을 부 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며 우리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도 담대하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The Bible Says”

부활절/목회칼럼 "I am the resurrection"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우리의 부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시라는 사실을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예컨대 요2:19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금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살아나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 기적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물론 이런 부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금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죽어도 얼마든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아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꺼이 주를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여기에 야간열차가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승객들이 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신분도 다릅니다. 한 가지 공통된 점은 누구든지 간에 각자를 위해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을 때, 정해진 정거장에서 모두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은 어둡습니다. 자기 스스로 한 번도 내려본 경험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리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정해진 정거장에서 어쩔 수 없이 다 내려야 합니다.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첫번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열차 안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었습니다. 돈 보따리가 커졌습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나만큼은 내리지 않고 영원히 이 열차 안에서 살아갈 거야!"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처럼 그저 돈을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돈 보따리가 커졌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느 날 그를 위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는 발버둥을 쳐봅니다. "내가 가진 돈 보따리를 다 줄 테니까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꼭 내려야 한다면 돈 보따리를 가지고 내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도 빈 몸으로 쓸쓸하게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작가였습니다. 그가 내리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번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열차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러다 과로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자신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가 내리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쉬워했습니다. 때가 되면 그를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삶을 본받아서 그가 한 일을 계속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의 승객과 같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승객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네번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 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때를 따라 힘써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종소리가 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절망하 지 마십시다. 그것은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가 아닙니다. 영원이라는 열차 에 올라타라는 신호입니다. 새롭게 출발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희망을 가 지십시다. 용기를 가지십시다."

 

확신에 찬 그의 음성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 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십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죽 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도 네번째 승객처럼 내 삶 속에서 예수님 이 우리의 부활이시라는 사실을 힘써 증거 합시다. 그리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절/목회칼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어떤 마을에 꽃을 파시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의 생활은 가난하셨습니다. 그래서 입고 계신 옷도 늘 허름했습니다. 또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손마디도 굵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만큼은 늘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보고서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행복한 할머니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 그렇게 많으시기에 늘 싱글벙글하십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 이 나이에 어찌 늘 좋은 일만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행복을 지키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답니다.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만에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인답니다.'사흘만 기다리자! 믿음으로 삼일만 참고 견디자!' 그러면 내 마음이 한결 평안해 진답니다."

 

중세 때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어느 마을에 로잘린이라는 젊은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에 의해서 성지 예루살렘이 빼앗겼다는 사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십자군 전쟁에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로잘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로잘린의 부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틈을 타서 하인이 못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재산을 모두 빼앗고는 로잘린 부인을 그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로잘린 부인은 자기의 시녀를 데리고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곳저곳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한 작은 마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친절했습니다. 그들은 로잘린 부인과 그의 시녀가 그들의 마을에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로잘린 부인에게는 닭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동양의 새인 닭은 유럽에서는 아주 귀할 때였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닭을 정성껏 키웠습니다. 매일매일 낳는 달걀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친절에 작은 것이지만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아놓은 달걀을 삶았습니다. 그리고는 달걀을 예쁘게 색칠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로잘린 가문의 오래된 가훈을 적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자!" 로잘린 부인은 동네 어린 아이들을 모아서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 날 오후였습니다. 한 초췌한 모습의 소년이 그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향집으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그 아이의 손에도 삶은 달걀을 쥐어주면서 병든 어머니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삶은 달걀을 가지고 병든 어머니를 찾아가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허기진 모습으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십자군 병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병든 어머니에게 주려고 가지고 가던 달걀을 십자군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허기진 병사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 쥐고서 먹으려고 껍질을 까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집 가훈이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자!" 그는 바로 젊은 귀족 로잘린 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와서 보니까 아 내는 어디론가 떠나간 뒤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 이리저리 헤 매다가 기진맥진해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달걀이 계기가 되어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잘린 부부는 그 때부터 부활절이 되면, 달걀을 삶고 예 쁘게 색칠한 뒤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절 달 걀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 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주님의 존귀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미국에 어떤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미식축구를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어서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몸집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축구선수로 뛰기에는 사실 부적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축구감독에게 사정을 해서 간신히 축구부에 들어가기는 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합이 있을 때는 언제나 벤치에 앉아서 다른 선수들이 뛰는 것을 쳐다만 보아야 하는 후보 선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단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시합을 할 때는 언제나 경기장에 와서 아들의 팀을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비록 아들이 주전선수로 뛰지 못하고 늘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선수에 불과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시합을 거르지 않고 늘 경기장에 와서 아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역시 축구부에서 열심히 훈련을 쌓았지만 그는 여전히 후보 선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또 다시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아들보다도 더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시합하는 모든 게임의 전 시즌의 티켓을 미리 다 살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서 4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합 때가 되면 뛰어난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시합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습니다. 감독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한 장의 전보를 건넸습니다. 그는 전보를 열어보고 난 뒤에 감독에게 머뭇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독님,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입니다. 오늘은 제가 연습을 좀 걸러도 되겠습니까?" 감독은 그를 위로하면서 토요일에 있을 시합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토요일이 되어서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소속된 대학팀이 열세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거의 패색이 짙어갈 때였습니다. 뜻밖에도 선수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감독에게 다가와서는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감독님, 제발 저를 이 시합에 출전시켜 주십시오. 오늘은 제가 꼭 뛰어야만 할 이유가 있습니다." 감독은 조금 난처했지만 너무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출전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그는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는 경기장 안을 종횡무진 뛰면서 전의를 상실했던 그의 팀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의 팀은 그가 들어오고 난 뒤부터 득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가서 동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더니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겨놓고 그가 상대방의 공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터치다운을 성공시켰습니다. 경기는 역전승이 되었습니다. 경기장 안은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끝났습니다.

 

감독은 뛰어가서 그를 얼싸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오늘 너무 멋있었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뜻밖에도 이러한 대답을 했습니다. "감독님, 며칠 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이 앞을 전혀 못 보시는 맹인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지요? 우리 아버님은 지금까지 제가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셨기 때문에 아버님은 제가 오늘 뛰는 것을 처음으로 보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아버님에게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맹 인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장래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시합이 있으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언제나 찾아와서 격려하고서 돌아가고는 했던 것 입니다.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의 자 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목/회/칼/럼 신령한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라

 

 

유대인들의 속담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리면 돈은 우리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섬기려고 하면 돈은 곧 우리의 무서운 폭군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려야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섬기도록 해야지, 우리가 돈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는 사탄이 어떤 청년에게 다가왔습니다. 사탄은 청년에게 병 10개를 보여주면서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이 10개의 병들 가운데 9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고, 단 하나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다. 네가 만약 꿀물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서 마시면 내가 너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 한 번 해 보겠느냐?"

 

물론 청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돈이 필요했지만 자기의 목숨과 돈을 맞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몹시도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탄은 또 다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똑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10개의 병들 가운데 9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으니까, 확률적으로 승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딱 한 번만 사탄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병 한 개를 골라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대로 사탄에게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번 돈은 언제나 쉽게 쓰기 마련입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이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또 다시 사탄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사탄은 그에게 이번에는 지난 번 돈의 2배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청년에게 9개의 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마시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먼저 번보다 좀 더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쉽게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색잡기에 놀아났습니다. 급기야 그는 마약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결국 그는 마약에 중독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급속히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청년 편에서 사탄을 불러들이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그의 눈앞에는 단 2개의 병만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돈벼락을 맞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독약을 먹고 죽을 것인가? 청년은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병 2개 중에 하나를 택해서는 꿀꺽 삼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그러니 어서 내게 약속한 돈을 내놔!"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탄은 마지막 남은 한 병을 자기의 손에 쥐더니 꿀꺽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그를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봤지? 애당초부터 독약은 들어있지 않았어!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독에 중독이 되어서 서서히 죽고 있었던 거야. 너는 돈의 노예가 되어서 청춘도 잃어버리고, 영원까지 상실한 것이야. 너는 이제 곧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내가 너에게 그동안 지불한 모든 돈에 대한 대가를 하나도 남김없이 고통과 더불어서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으려고 하지 맙시다. 그 것은 우리의 목에 맨 연자맷돌과 같습니다. 땅에 쌓은 보물은 우리 를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자가 되 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은 천사의 날개와 같습니다. 우리를 위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도 두 보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과 땅에 쌓은 보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면서 신령한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목/회/칼/럼 하늘에 쌓은 보물의 축복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예수님께서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과는 달리 하늘은 안전합니다. 그곳은 좀이나 동록도 또 도적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가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의 욕심에 따라 이기적인 목적으로 쌓아둔다든지, 또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보물을 땅에 쌓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뿐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 재능, 건강, 노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컨대 산상수훈이라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제할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과시한다면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면 그것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곧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슬픈 기색을 내면서 또 얼굴을 흉하게 하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은, 아무리 귀한 금식을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보물을 땅에 쌓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서 또 얼굴을 씻으면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은행에 저축을 하면 이율이 얼마나 됩니까? 한 4-5%나 됩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원금조차도 보장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또 이율이 어느 정도 된다 하더라도 물가상승률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경우는 이율은 백배라고 했습니다. 10,000%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수지맞는 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하늘나라 은행은 안전합니다. 결코 부도가 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될 경우에 만기가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세에는 백배나 받고, 내세에는 영생까지 겸해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확실한 투자입니까?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영락 교회를 설립하신 故 한경직 목사님이 영락 교회를 건축할 당시에 교인들의 수가 대략 150명가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서 이제 성전기공예배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은 그 당시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의 물질을 바쳐야 합니다. 십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서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 기공예배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뒤에 기공예배를 드리는 날 150명의 교인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십일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 뒤 30년이 흘렀습니다. 교회설립 30주년이 되었을 때 목사님이 한 번 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십일 먹을 양식만 남기 고 다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십일 동안 먹 고 난 뒤 그 뒤에는 다 굶어죽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53명이 하나같이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 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 키십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 리고 금세에는 100배, 내세에는 영생까지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 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늘 하늘에 쌓아두기를 힘써야 합니다.

축복의 자녀되기를 바라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보물이라고 하면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진 보석이나, 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골동품을 머리 속에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보물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세가지가 보물로 간주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 당시에는 옷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요새는 옷이 흔하니까 아무런 보물이 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옷이 매우 귀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옷이 보물처럼 진귀하게 간주되었던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45:22에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형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서 요셉에게 왔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고 난 뒤 요셉은 자기의 신분을 형들에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요셉은 형들을 가나안 땅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오도록 수레를 딸려 보냈습니다.

 

길을 가면서 먹을 수 있는 양식도 주었습니다. 아울러 요셉은 형들 각자에게 옷을 한 벌씩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친동생 베냐민에게는 옷을 다섯 벌이나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옷이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수7:2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입니다. 그때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서 전리품을 감추었습니다. 그가 감춘 전리품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이 거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옷이 귀한 보물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삿14:12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청년들 30명이 잔치 집에 모였습니다. 그때 삼손은 블레셋 청년 30명에게 수수께끼를 내면서 만일 그들이 잔치하는 7일 동안 수수께끼를 알아맞히면 그들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수수께끼를 알아맞히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이 삼손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도록 약속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옷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왕하5:22에 보면 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에게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깨끗하게 고쳐주었습니다. 나아만은 너무나도 감사해서 선물을 주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엘리사의 사환이었던 게하시가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나아만을 몰래 따라가서 엘리사 대신에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선물 가운데 하나가 역시 옷 두 벌이었습니다. 그만큼 옷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양털로 만든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금실까지 달아서, 자기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그 당시에는 곡식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얼마나 먹고살기가 힘든 때였겠습니까? 그래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곡물은 부의 상징으로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밭에 곡식의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는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리라." 먹고살기가 어려운 때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부의 상징이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 그 당시에는 금과 같은 보화가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성 도님, 그 당시 사람들이 보화를 주로 어디에 감추었습니까? 마13:44에 보 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 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낮에 나가서 밭의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 가서 밭을 깊이 파고 그 속에 보화 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땅에 쌓은 보물에 문제점이 있습 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마6:19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 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 질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안전한 곳은 은행의 비밀금고도 아니요 오직 하늘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목/회/칼/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스티븐슨(Robert Stevenson, 1850~1894)이 쓴 소설 가운데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킬 박사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의학박사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지킬 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이드였습니다. 하이드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야비하고 포악했습니다.

 

지킬 박사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 때문에 자기 속에 숨어있는 본능을 억제하고 착실한 생활만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연구를 계속 한 끝에 자신의 마음속에 같이 존재하는 선과 악을 떼어내는 약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그 약물을 먹고서 하이드라는 악의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하이드가 되어 마음대로 나쁜 짓을 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부딪힌 소녀를 짓밟고 넘어가기도 하고, 길에서 처음 만난 노신사를 지팡이로 후려쳐 숨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이드가 경찰에 쫓기게 되자 겁이 난 지킬 박사는 본래의 자신으로만 남아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숨은 인간 하이드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지킬 박사는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있어서 끊임없는 갈등이 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우리 속에는 하이드가 있습니다. 이 하이드는 우리 속에 악하고, 음란하고, 야비하며, 추한 생각을 계속 심어줍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러한 양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 때 이방선교의 선두에 섰던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민을 합니다. 로마서 7장18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는 거듭해서 우리인간들의 속성을 로마서 7장 21절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결국 그는 24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맙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자신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선교지가 되는 로마에 편지를 씁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아직 대면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아직도 로마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로마 교인들은 바울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높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참모습을 그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더욱 위대한 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바울이 지킬 박사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지킬 박사는 자기의 고민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저 오호라의 탄식 속에서 몸부림치며, 그 속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로마서 7장25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지킬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았고, 바울은 예수 그리 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한가지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 다주었습니다. 지킬 박사는 절망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 고, 반대로 사도 바울은 절망을 극복하고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탄식하고, 애통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 려면 결국은 지킬 박사처럼 파멸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바울처 럼 재빨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들이 되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의 탄식은 기쁨으로, 절망은 감사로 바뀌게 될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하며 “오직 믿음으로” Soli Deo Fide

 

주후 386년 가을의 어느 날 이었습니다.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교회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어떤 교수 한 사람이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조용히 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럴까?󰡓자신의 방탕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깊은 고뇌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지나가면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우연히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 가운데 그의 귓가에 강하게 울리는 가사가 한 구절 있었습니다. 라틴말로 󰡒톨레 레게! 톨레 레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책을 펴서 읽어라! 책을 펴서 읽어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신비스런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있던 책을 한 권 집어 들었습니다. 그 책은 로마서를 베낀 사본이었습니다. 책을 펼쳤습니다.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롬 13:13~14의 말씀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방탕한 삶을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서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의 삶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 약 천 년이 흘렀습니다. 어거스틴 파의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가 주로 가르친 과목이 로마서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교황청에 볼일이 있어서 로마로 건너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로마에 가면 모두가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하는 높은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자기가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되어 당할 고통을 미리 맛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그 관례대로 무릎을 꿇고 기어서 힘들게 그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 아주 강하게 솟구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롬1:17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에게 들렸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길로 독일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입니다.

 

하나님은 마틴 루터로 하여금 로마서를 통해서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기독교를 건져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서에 의해서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칼빈도 감화를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감화를 받았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에 독일 교회가 깊은 침체의 수렁에 빠졌을 때 독일교회에 새로운 강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바로 이 로마서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로마서가 발견되고, 해석되고, 로마서에 있는 말씀 이 선포될 때마다 그 시대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 습니다. 로마서는 장로교회의 근간이 되는 “오직 믿음으로”라 는 교리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저희 교회에 나오십시오. 그때의 감동이 그대 로 재현되고 있는 강단의 말씀 선포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영국의 대 철학자였고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고, 또 두 사람이 함께 여러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본시 교육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대대로 믿어오던 기독교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젊은 시절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그만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대대로 이어받았던 신앙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와도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노파 한 사람이 눈구덩이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뜨였습니다.

 

노교수는 다가가서 그 노파를 부추겨 눈구덩이 속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노파는 노교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게 이와 같이 큰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보니까, 댁도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까?” 아마 주일날 한 번 찾아가서 뵙고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노교수 화이트헤드는 겸연쩍은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또 제게는 신앙심도 없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의외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 구덩이 속에서 죽는 줄 알고 계속해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구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노교수는 절로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노파로 하여금 저토록 확신 있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일까? 내가 지금 탐구하고 있는 철학과 수학, 아니 전 영국의 모든 학문을 통틀어서라도 저 노파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기가 탐구해 왔던 학문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젊어서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추구해 왔던 학문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급기야 그는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시금 출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매우 기뻤습니다. 화이트헤드와 같은 세계적인 대 석학이 자기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 목사님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심혈을 기울여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열심히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의 내용들이 대충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철학과 신앙의 대화”, “수학과 신앙의 만남” 대 석학을 앞에 놓고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자기 나름대로 그것이 좋을 줄 알고 그렇게 설교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교수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자기가 오랫동안 담쌓고 지냈던 교회를 다시금 찾았는지, 그 동기를 말씀 드리면서 정중하게 목사님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아무래도 목사님께서 요즘 설교하시는 내용은 제가 목사 님보다는 전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설교 마시고, 그 날 눈구덩이 속에서 그 노파가 가졌던 진리에 대한 확신, 예수 그리 스도에 대한 뜨거운 신앙을 제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정말 고맙겠습니다”.

 

이 일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땅 히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 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마땅히 소유해 야 할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성도님에게 묻습니다. 복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목/회/칼/럼 사르트르와 본회퍼(Sartre,Bonhoeffer)

 

 

불란서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불란서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한때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상 받기를 거부해 버렸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 봄에 그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폐암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이미 살만큼 살았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조용히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병원에 있는 한 달 동안, 죽음을 앞두고서 평소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감정을 전연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발광을 하면서 온갖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가 죽고 난 뒤 언론들은 떠들었습니다. “어떻게 자유를 그토록 부르짖었던 사르트르가 그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에 이런 글을 투고했습니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의 찬사는 받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불란서가 사르트르가 자랑했다면, 독일이 자랑했던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였습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나치에 항거를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죽은 뒤인 1951년에 출판된 ‘옥중서간’은 그의 신념이 담긴 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그는 직감적으로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감방 문을 나서면서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에게 평안한 모습으로 이렇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제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임을 알기에 내 마음은 지극히 평온합니다. 나 먼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로 다시 만나십시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회퍼는 39세라는 비교적 짧은 일기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감옥 속에서 모진 고문을 겪으면서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영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의 관문을 거뜬히 뛰어넘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믿음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했던 것입니다.

 

사르트르와 본 회퍼,

 

과연, 우리는 어느 누구와 같습니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믿음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마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목/회/칼/럼 볼테르와 파스칼(Voltaire,Pascal)

 

 

18세기 불란서에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외쳐댔습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성경을 읽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어리석은 짓들 하지 마십시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떠들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봐라!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저주해도 나는 멀쩡하지 않느냐?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모습은 전연 달랐습니다. 그가 나이 들어 죽을 날이 다가오자, 그는 다급한 마음에 의사를 붙들고 이렇게 사정했습니다. “부디 내가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때 의사는 딱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을 준비해야겠습니다. 6개월이 아니라 6시간도 채 안 남은 것 같습니다.”

 

그때 볼테르는 마지막으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지금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구나.”

 

그가 죽고 난 뒤에 그가 살던 집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쇄하는 곳으로 바뀌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을 볼테르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불란서의 천재적인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종교 철학자 였습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이 아니라 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배후에는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불란서의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불란서의 모든 여성들이 그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파티에서 밤늦게 놀다가 술에 만취한 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그가 타고 가던 마차가 그만 세느강 다리에 부딪혔습니다. 그 사고로 파스칼은 밖으로 튕겨 나와 그의 몸이 마차에 깔려 버렸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세느강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도대체 죽음 앞에서 무엇인가? 내가 천재로서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한 질문에 그는 명쾌한 답변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너무나도 초라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 이였습니다. 그때 다행스럽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는 죽음 바로 직전에 구출되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술에 취한 채 허랑 방탕하게 지내던 삶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차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몸이 수척해 지면서 고민 속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때 수도원에 있었던 그의 누나가 멀리서 동생의 소식을 듣고 달 려와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예 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믿음을 따라서 성 결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많은 쪽 지를 남겼습니다. 그가 죽고 그의 제자들이 유품을 정리하여서 남 긴 책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고 있는 사랑받는 책「팡세」라는 작품입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두 천재, 볼테르와 파스칼,

 

우리는 어느 선상에 서 있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 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목/회/칼/럼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님

 

 

옛날 어떤 마을에 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다 귀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그 가운데서도 첫번째 친구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가까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두번째 친구도 첫번째 친구만큼은 못하지만 역시 소중하게 생각하고서는 그도 역시 가까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친구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기에게 부담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그의 잘못을 지적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는 등의 간섭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귀하기는 하지만 일부러 가까이 하려고는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왕궁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재판정에 출두하라는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틀림없이 자기가 무엇인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왕이 불러서 벌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겁이 나서 도저히 혼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첫번째 친구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가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번째 친구는 일언지하에 그의 부탁을 거절해버렸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탄식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두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가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두번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내가 함께 가 주지! 그러나 나는 왕궁문 앞까지만 갈 수 있네. 그러나 그 이상은 내가 같이 갈 수가 없음을 이해해 주기바라네!” 행여나 하고 기대를 했습니다만 역시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세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평소에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친구이기 때문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친구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내가 따라 가주고말고. 자네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게. 내가 자네의 사정이야 환하게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임금님 앞에 가서 자네의 결백을 변호해주겠네!” 그러면서 그는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이 사나이는 세 친구 가운데서 누가 자기의 진정한 친구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왕의 재판정은 이 다음에 우리가 서야할 하나님의 심판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친구는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다. 재물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은 소중합니다. 모두가 어떻게 하든지 가깝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 다음에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재물이 절대로 우리와 함께 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3장5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재물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도, 영원한 친구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해줍니까? 우리의 가족들, 우리 이웃에 있는 친지들입니다. 왕이 우리를 부를 때 그들은 우리를 왕궁문 까지,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무덤까지는 슬퍼하면서 따라와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원해도 함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번째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를 질것을 요구합니 다. 예수님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으로 우리에 진정한 친구가 되십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히13:5에 끝 부분을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가 셔서 까지 우리를 감싸주시고 변호해주시는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 이 되실 수 있습니다.

목/회/칼/럼 어리석은 거래

 

 

1859년부터 제정 러시아는 국토가 너무 커 관리가 힘들자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려고 8년간이나 교섭했습니다. 이처럼 비밀리에 흥정을 계속하던 중 1867년 3월 마지막 주말 워싱턴주재 러시아 공사가 당시 슈워드 국무장관에게 짜르 황제로부터 720만 달러에 팔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고 달려왔습니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슈워드 국무장관은 주말인데도 전국무성 직원을 불러 작업을 하고 서명했습니다.

미국 국회에서는 슈워드를 역적이라고 몰아붙이며 쓸모없는 얼음 땅을 720만 달러나 주고 사다니 말도 안 된다고 공박했습니다. 이때 미국 언론이 슈워드의 용단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라고 부추겨 국회의 반발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한화로 80억, 명동 땅 65평 값밖에 안 되는 돈으로 우리나라 7배나 되는 알래스카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알래스카는 3금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제 1의 금은 검은 금, 석유이고, 제 2의 금은 푸른 금, 무성한 삼림이며, 제 3의 금은 누런 황금입니다. 석유가 1천억 배럴이나 매장되어 있고 무진장한 석탄, 연어 등 엄청난 어로자원, 처녀지로 있는 방대한 삼림 등 알래스카는 무진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노다지 땅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뉴욕 맨해턴이라는 섬 위에 세워진 현대문명의 상징적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섬은 원래 인디언들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한 네덜란드 사람이 단돈 불과 4달러에 샀다고 하는데 그것도 현금이 아니고 4달러에 해당하는 양주 한 병을 주고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인디언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오늘의 뉴욕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정부 당국, 격에도 맞지 않는 양주나 벌컥벌컥 들이마시던 인디언, 그들이야말로 우매한 인간이었고, 어리석은 거래를 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어리석은 거래”를 보면서 우리는 영적인 견지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현실에만 급급한 나머지 미래에 눈이 먼 거래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같이 어리석은 거래를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에서가 그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의 축복권과 거룩한 명분을 한 그릇의 팥죽과 바꿔치기 했던 것입니다. 우선 현실이 답답하고 배가 고프니까. 믿음으로 살기가 당장 힘겹게 생각되니까. 이것이 어리석은 에서의 변명입니다.

 

베링해협 건너에 있는 알래스카, 그곳은 관리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눈 덮인 벌판입니다. 러시아에선 “그런 땅이라면 시베리아에도 얼마든지 널려 있지 않는가? 그따위 땅은 가지고 있으면 뭘 해. 80억이나 받아쓰면 되겠지.” 인디언들은 뉴욕 땅을 팔면서, “땅이라면 아메리카에 얼마든지 널려 있지 않는가? 우선 당신들이 마시고 있는 그 양주 맛이나 보자고요.”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들입니까?

 

둘째로, 그들은 나타난 현상계만 보았지 감추인 보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바다건너 눈 덮인 불모지를 팔아치웠으니 다행이야”라고 좋아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만년설 밑에는 석유가 1천억 배럴이며, 무진장한 석탄도 매장되어 있고, 차갑지만 바다 밑에는 맛있는 연어가 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런 보화를 8년 동안이나 안달하며 팔려고 애를 쓰고 결국은 팔아버리다니.

 

셋째로,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미. 러의 전쟁을 가상해 볼 때 러시아는 미국까지 상 당한 거리를 두고 달려가 싸워야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바로 뒤 에서 결정타를 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보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나라 이 영원한 노다지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무엇과 어떻게 바꾸겠 습니까?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장자의 명 분을 야곱에게 판지라(창25:32,33)”

 

우리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목/회/칼/럼 백/치/아/다/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아다다는 새벽 닭울음소리에 살그머니 이불 속을 빠져 나왔습니다. 남편 수룡이가 깰까봐 아다다는 조심스레 지전 뭉치를 꺼내 가지고 바닷가로 달렸습니다. ‘나의 행복을 빼앗고 두 번째 사랑마저 파괴해 버린 이 원수 같은 돈, 이것을 아무도 몰래 바다에 던져버리자. 이 돈이 바닷물에 말려가 버리면 내 행복도 되돌아오겠지’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해안 언덕 위에 선 아다다는 허리춤에서 꺼낸 지전 뭉치를 들어 마치 재앙덩어리를 떨쳐버리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철썩거리는 물결 위에 휙 내어 뿌렸습니다. 세찬 바닷바람에 말린 지전은 공중으로 떠올라 팔랑거리다가 산산이 흩어져 멀리 그리고 가깝게 넘노는 물결 위에 떨어졌습니다.

 

도도한 썰물은 아다다의 한을 삼키듯 지전들은 서서히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다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가슴이 상쾌하고 해녀처럼 춤이라도 출 듯이 기꺼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단숨에 달려온 수룡이가 썰물에 실려 밀려가는 자기 돈을 발견합니다. 그는 미친 듯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흘러가는 지전들을 낚아채려 했습니다. 그러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그는 가슴까지 물이 차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눈이 뒤집힌 채 허우적거리며 나왔습니다. 지전들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며 그를 비웃는 듯 멀리멀리 밀려가 버렸습니다.

 

무심한 바다를 막연히 바라보던 수룡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쏜살같이 언덕으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벌벌 떨며 서 있는 아다다의 궁둥이를 사정없이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아다다는 허물어지는 인형 마냥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바닷물 속에 잠겼습니다.

 

「아다 아다다」그 소리도 한 마디 못한 채 아다다의 허우적거리던 두 손이 영원한 물결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주먹을 움켜쥔 채 미륵같이 서서 굽실거리는 물결만 뚫어져라 쏘아보고 서있는 수룡이, 그는 지금 불쌍했던 백치 아내 아다다를 못 잊어 함인가? 아니면 흘러가버린 그 돈이 차마 아까워서일까요?

이것은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란 이야기입니다.

 

아다다는 제법 먹을 만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백치였고 거기다 벙어리였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언어라기보다는 다만 「아다 아다다」라고 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다다는 논밭을 묶어 돈까지 얹어주는 조건으로 시집을 보냅니다. 이러한 아다다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불어나자 시집에서는 아다다를 쫓아냅니다.

 

쫓겨난 아다다는 노총각 뱃사공인 수룡이를 찾아갑니다. 그의 품에서 아다다는 행복에 겨워합니다. 그러나 돈이 불어나자 수룡이도 읍내 기방을 출입하면서 아다다를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순박한 아다다는 “돈이 곧 원수이며 행복의 파괴자다.”라는 심중을 굳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돈을 바다에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아다다의 생각처럼 돈이 원수입니까? 돈이 행복의 파괴자입니까?

 

성경은「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은 결 코 인격체가 아닌데,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탐닉하고 그것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넋을 빼앗기기 때문에 거기에서 악이 돋아난 다고 했습니다. 돈 자체는 결코 악한 것일 수 없습니다. 돈은 중 성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돈을 다루는 인간성입니다. 아다다를 대하는 남성들은 언 제나 돈을 먼저 떠올리고 다음에 아다다라는 여성을 생각했기에 아기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사내들이 었다면 불행한 아다다를 먼저, 그리고 돈을 다음 이라고 생각했 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말세의 신자들을 향하여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골3:5,6)”

목/회/칼/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1943년부터 지중해의 몰타 섬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짜기 위해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1944년 6월 6일로 결전의 날이 정해졌습니다. 그 날을 며칠 앞두고 아이젠하워 장군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라 작전을 준비 중이던 연합군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있던 지휘관들도 덩달아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기도 후 그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과 우리가 훈련받은 모든 것을 동원할 시간이 다가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으니 이제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자.󰡓

 

그러나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이 험한 절벽인 데다 그 전날 밤에 심한 폭우와 안개까지 겹쳐 작전수행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악천후 때문에 다들 반대하는 작전 이였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물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은 작전 성공을 위해 장장 17시간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연합군은 그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악천후를 믿고 경계를 소홀히 하다가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당했습니다.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그것을 발판으로 연합군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치명타를 입은 독일의 히틀러는 1945년4월30일 자살로 패배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2004년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그 날을 기리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물론 독일의 수뇌부까지 노르망디 일대로 총집결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사상최고의 작전이었고 6월 6일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분기점의 시작은 무엇 이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이젠하워 장군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 이것이 승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어릴 때부터 심하게 노동해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크림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지만 신앙이 돈독했습니다. 그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청년 때에는 다리에 심한 병이 들었는데 의사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했습니다. 혹시 자신이 잠든 사이에 의사가 마취시키고 수술할까 봐 형제에게 문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기도하여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고 다리를 절단했더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해 47세가 되도록 소령에 머물렀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 큰 공을 세움으로써 3년 만에 중령에서 5성 장군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34대 미국 대통령이 됐지만 세계 최정상들을 만날 때도 주일예배를 드리고 사사로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옛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가 그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는 주일을 비워 두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드렸던 기도는 히틀러의 팔 아래서 역류하던 세계사의 흐름을 뒤집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기도는 개인사를 바꿀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바꿉니다. 기도에 개인의 미래가 들어 있고 세계의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기도만 한다고 해서 뭐가 될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난제일수록 수동적인 기도가 적극적인 활동보다 낫습니다. 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기 때 문입니다. 기도는 안 되는 것을 되게하고 못하는 것을 하게합니다.

 

기도는 개인사를 바꾸고 세계사를 바꿉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 해 보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목/회/칼/럼 꿈은 이루어진다(I have a dream)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의 명문대 교수들이 한국의 대학생들을 코멘트한 것이 어느 기고문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수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독재타도를 외치고, 민주화운동을 하고, 통일운동을 하면서 감옥에도 가고 온갖 고난을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일본인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부럽습니다. 국가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면서 투쟁을 하고 고난의 길을 가는 그 젊은이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있기에 한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꿈이 없습니다. 꿈이라야 오직 돈 많이 벌어 재미나게 엔죠이 하며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을 볼 때 일본의 미래가 암담합니다.󰡓그때 그의 말은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지 10년 후 똑같은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왔습니다. 소위 신세대문화와 함께 향락문화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꿈이 있다면 과연 무엇인가?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오직 돈 많이 벌어 인생을 엔죠이 할 꿈만 꾸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행복하게, 재미나게 살 것인가? 그런 꿈이 대부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뜻있게 살 것인가? 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그런 건강한 꿈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와 세계무대를 바라보면서 웅지를 품고, 뜻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건강한 꿈이 아쉽습니다. 미래학자들은 비젼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말합니다.

 

칼 힐티가 쓴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젊은이가 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시한 일은 하기 싫었습니다.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일만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직장이든 돈만 많이 준다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돈 많은 사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사장에게 자기의 꿈을 말했더니, 그 사장이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회사에 와서 내가 시키는 일을 하게. 그러면 자네가 청구하는 만큼의 돈을 주겠네.󰡓

 

그 청년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그 사장의 회사로 출근합니다. 사장이 그에게 할 일을 알려줬습니다. 󰡒자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이네. 이 종이 한 장을 책상에 올려놨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다시 주어서 책상에 놓고 또 떨어뜨리고 하는 일만 반복하면 되네. 하다가 허리가 아프면 쉬어도 좋고,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해도 되네. 앞으로 매일 출근해서 오직 그 일만 하면 되네.󰡓

 

그 청년이 생각하니까 이렇게 쉬운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 일을 하겠다고 선뜻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가 떨어뜨렸다가 또 올려놓고 또 떨어뜨리고. 힘들지도 않고 아주 단순한 일이거든요. 󰡒이 단순한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니 나는 참 행운아로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한지 불과 두 시간도 못되어 희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젊은 나이에 이 종이 한 장 올려놨다 내려놨다 하는 이 짓을 내가 지금 왜 하고 있는 거지? 이 짓이 도대체 나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밖에 나가 노동일을 하는 게 낫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이 짓을 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이 짓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힘들게 공부했단 말인가?󰡓

 

그렇게 회의와 갈등을 겪으면서 한 나절을 겨우 버틴 후 사장을 찾 아갔습니다.󰡒사장님,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이런 의미 없는 일은 못 하겠습니다”하고 사표를 내고 나와서, 그때부터는 궂은일 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I have a dream”이라는 한 편의 설교 를 통해 미국사회를 바꿔 놓았습니다. 천대받는 흑인과 백인이 함 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꿈! 백인의 자녀들과 흑인의 자녀들 이 한 교실에서 차별 없이 공부하며 더불어 노는 꿈! 그 꿈이 있었 기에 그는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미국사회를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젼과 도전입니다. 많은 성서의 인물들이 이 속에서 세워졌습니다. “I have a dream!" 꿈은 이루 어집니다.

목/회/칼/럼 문제를 푸는 법

 

 

지금부터 수십 년 전에 미국의 디트로이트 시(Detroit City)에 포드(Ford) 자동차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공장에는 공장 전체의 동력을 책임지는 큰 발전기가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기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발전기가 갑자기 운행을 중단했습니다.

 

직공들은 할 일이 없어서 전부 쉬고 있습니다. 공장 전체에 많은 손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포드는 공장 안의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서 고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당대에 제일가는 기술자를 멀리서 초빙해 왔습니다. 기술자는 고장 난 발전기를 가만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조그만 가방에서 작은 망치를 하나 꺼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발전기의 앞쪽 어느 지점을 두 번 톡톡 쳤습니다. 또 옆에 가서 발전기를 보더니 적당한 곳을 두 번 톡톡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발전기 뒤쪽으로 돌아가서는 어느 지점을 골라 그곳도 두 번 톡톡 쳤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도 고치지 못했던 발전기가 󰡒윙!󰡓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몇일 뒤에 포드에게 청구서가 날아 왔습니다. 일만 달러였습니다. 수십 년 전에 일만 달러는 지금으로 환산하면 십만 달러가 넘는 것입니다. 우리 돈으로 따지면 일억이 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포드는 그것을 보고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작은 망치를 가지고 몇 번 두드리고 나서 일만 달러를 요구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청구서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아니, 여보시오!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작은 망치를 가지고 몇 번 두드렸다고 해서 일만 달러를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소?󰡓이렇게 이유를 달아서 반송했습니다.

 

몇 일 뒤에 다시금 포드에게 편지가 날아 왔습니다. 발전기의 수리비 내역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단 세 줄입니다.

 

1. 작은 망치를 가지고 발전기를 두드리면서 일한 노임: 10달러

2. 어디를 두드려야 할 지 알아낸 기술 값: 9,990달러

3. 합 계: 10,000달러

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기술자에게 일만 달러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실화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많이 두드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세게 두드렸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내가 두드려야 할 그 자리를 바로 두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을 때 이웃의 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권력의 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물질의 문을 두드립니다. 또 경험의 문을 두드립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하늘 문을 향하여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며, 우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121편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목/회/칼/럼 “능력의 통로는 기도이다”

 

 

독일의 최대도시인 뮌헨에서 약 1시간 정도 가면, 다카우라는 수용소가 있습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나찌는 이 수용소에서 유대인과 기독교 성직자 23만명을 죽였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목사님께서 이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선배님의 일행을 안내한 사람은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나치시대에 수용소에서 죽을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리거라는 이름의 목사라고 소개했습니다. 리거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아 수용소를 방문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증언하고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독일 고백교회에 소속되어 히틀러를 반대하는 운동에 동참했다가 잡혀 4년간 이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은 죄는 단 하나였습니다. 히틀러를 반대하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그는 잡혀 수용소 심문 실에서 매일 모진 심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부인하고 히틀러를 인정하면 당장이라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힘든 고문 때문에 마음과 몸이 점점 지쳐갔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그 백성에 대하여 그렇게 침묵하고 계시는가?” 그는 점점 의심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달에 한번 밖에 배달되지 않는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검열에 걸려 조각조각 오려진 편지는 밖에 있는 부인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편지 내용을 연결해 보았더니 행4:26-29절 말씀이었습니다. 내용은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를 위해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리거는 그것이 성경 말씀인 것을 알고 얼른 품안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실로 또 끌려갔습니다. 이제 그의 운명은 경각간에 달렸습니다. 순교하느냐? 마느냐? 그의 믿음은 순교할 수 없는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심문실로 들어가자마자 한 다른 목사가 피골이 상접한 채로 끌려 나왔습니다. 아마 그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리거가 그 옆을 지나가자 그 사람이 뭔가 리거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뒤져보니 죽음으로 끌여가던 그 낯선 목사의 쪽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쪽지는 놀랍기도 행4:26-29절이었습니다.“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리거는 깜짝 놀랐습니다.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아내와 목사, 그 두 사람이 똑같은 말씀으로 리거를 격려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목사를 몰랐고 그 목사는 아내를 몰랐는데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가 그때 쪽지를 만지적거리며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고통은 하나님의 일이다. 내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다” 그때부터 그가 담대해졌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비록 내가 고난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런 어느 날 드디어 독일군이 항복하고 수용소에서 석방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삼킬 듯한 나찌도 망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강한 나찌는 망하고 약한 교회는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 리거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고 통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고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 스도를 대적해도 결국 하나님이 승리합니다. 그 능력의 비결은 믿 음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통로는 기도입니다”.

 

그는 승리자로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도 이와 같이 믿고 있습니까? “고난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고 그 능력의 통로는 기도임을 믿습니까?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짤/막/한/목/회/단/상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어느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총각시절에는 시골에서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서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앞에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디디면서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신발도 다 젖고, 바지도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젖은 몸으로는 학교에 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때마침 서울에서 잠시 내려오신 어머니께서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젖은 몸을 보고서 딱하다는 듯이 물어보셨습니다. "얘야, 어쩌다가 그렇게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느냐?"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예, 어머니. 제가 징검다리를 디디고 시냇물을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아서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얼른 되물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 아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른 옷 갈아입을 생각만 했지, 미처 돌을 바로 놓아야 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이놈아, 너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나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그는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백 번 고쳐 생각해도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그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모든 사람들도 그 사람을 바르게 보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또 다른 사람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중에 갈라디아서 6장1절 말씀이 이러함을 지적해 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그 옛날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범죄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못해서 실족해 버렸습니다. 죄악의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대할 때 성도들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할 것인지, 여기 6장1절 하반부에서 바울은 세 가지로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온유한 심령으로"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남을 심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사람들을 도와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만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셋째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입 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남들이 빠진 시험에 나 라고 해서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무 엇인가 잘못을 했을 때, 비방하고 따지고 심판하려고 들지 말고 그것을 거울삼아서 나도 그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 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2절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짤막한 목회칼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됩시다

 

사람이 기르는 가축들 가운데서 가장 지저분한 짐승은 돼지일 것입니다. 돼지는 그저 꿀꿀거리면서 더러운 것도 다 먹어치웁니다. 여러분, 돼지가 왜 그렇게 지저분한 짐승이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돼지는 왜 입만 열면 "꿀꿀"거리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이렇게 재미있게 해석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모든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앞으로 사람과 가까이 지낼 가축들을 다 모아 놓으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차 너희들이 무엇을 먹고 살지 스스로 결정을 하라!"

 

그러자 제일 먼저 덩치가 가장 큰 소가 나서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풀이라도 좋으니까 그저 한평생 동안 실컷 먹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소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 다음 개가 나서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사람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어도 좋으니까 그저 사람들과 늘 가까이서만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개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개는 지금도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돼지가 나설 차례였습니다. 돼지가 가만히 지켜보니까 하나님이 소의 간청도 들어주시고, 또 개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소원도 하나님께서 흔쾌히 들어주실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을 담대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달콤한 꿀을 평생토록 먹고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돼지가 그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돼지는 딱 한 번 아무도 모르게 꿀을 훔쳐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꿀맛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돼지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은 돼지를 괘씸하게 생각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놈! 감히 짐승의 주제에 사람도 제대로 먹기 힘든 꿀만 먹고살겠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냐? 너는 이제부터 일평생 동안 지저분한 것만 먹고살아라!"

 

그래서 돼지는 그 뒤로 더러운 것만 먹고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돼지는 한 번 훔쳐 먹었던 꿀맛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입만 벌리면 "꿀꿀!"거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누군가가 꾸며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의 주제를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제넘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낭패를 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이하의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과 다윗입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똑같이 사십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이 주제넘은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울의 집도 쇠하여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 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한없이 축복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다 윗의 집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 점점 강성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를 쓰십니까?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나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합하여 최선을 다해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리를 이탈한 사울처럼 되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 음에 합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집도 다윗의 집처럼 하나님의 축복 속에 점점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짤막한 목회칼럼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합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밤낮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쉴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그 순간까지 구속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에게도 어두운 밤, 쉴 때가옵니다. 그 때는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낮 기간 동안에는 아버지의 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 이후 세계 최대의 물리학자로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의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입니다. 그는 빅뱅(Big Bang)이론, 이른바 "대폭발 이론"과 "블랙홀의 대한 연구"로서 전 세계 학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캠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1학년 때 아주 희귀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몸의 근육이 자꾸만 수축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그를 진단해 보고서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뭇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꿈 많은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남은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나의 삶이 시한부의 인생이면 어떠냐? 어차피 모든 인생은 시한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 비록 내게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자. 그 기간만큼이라도 최대한 값있게 활용하자! 어쩌면 내게 남아있는 3년의 기간은 내게 필요한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 뒤 그는 연구에만 매진했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근육이 수축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됩니다. 그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휠체어에 있는 키보드를 움직여 자기의 의사를 표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전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어느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일의 이 땅에 주인공이 될 젊은이들에게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그 때 호킹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내게 남아있는 기간이 3년이 아니라, 3개월, 아니 3일이 남았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누구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까? 수많은 천사들 가운데 하나를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천사장을 보내주셨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지시고 죽게까지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대충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 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 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반 토막의 헌신으로 만족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도 최선을 다해서 예배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게 주신 건강, 시 간, 물질, 심지어는 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다 바쳐서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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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 막 한 목 회 칼 럼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라”

 

옛날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만히 보니까 아들에게 친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친구가 많은 것은 좋은데, 늘 친구들하고 함께 어울려 다니느라고 아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서 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너에게 친구가 정말 많은 것 같구나." "예, 아버지. 저에게는 친구가 참 많습니다." "그래. 그 많은 친구들 가운데 진정한 친구는 몇 명쯤 된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그래." 자신만만한 아들의 대답을 듣고서 아버지와 아들은 한 번 시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돼지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를 큰 자루 속에 담아 지게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 아들은 지게를 울러 메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절친한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오늘 낮에 내가 그만 잘못해서 어린 아이 한 명을 죽였다네. 내가 지금 그 아이의 시체를 지게 위에 얹고서 가지고 왔는데 이 시체를 파묻기 위해서는 자네의 도움이 좀 필요하다네. 내가 들어가서 자세히 설명을 해줄 테니까 일단 좀 들어갈 수 있겠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갑게 맞아주었던 아들의 친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박절하게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은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일반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이 친구 저 친구를 찾아갔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만큼 많지는 않지만, 내게도 친구는 있으니까, 내 친구의 집으로 한 번 가보자."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 지게를 매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친구를 깨웠습니다.

 

친구가 문밖으로 나왔을 때 아버지는 찾아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여보게, 오늘 낮에 그만 잘못해서 어린 아이 한 명을 죽였다네. 이 시체를 파묻기 위해서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는데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겠나? 밤새도록 다니다보니 새벽녘이 되어서 지금은 파묻기가 어려우니까, 밤이 될 때까지 낮 동안에 나를 좀 숨겨줄 수가 있겠나?"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밤새도록 돌아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들고 지쳤겠나?" 그러면서 그들을 사랑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군불을 지폈습니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했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자기 친구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사실은 내 아들에게 진정한 친구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 일을 꾸몄다네. 저기 지게 위에 있는 것은 어린 아이의 시체가 아니라 돼지를 잡은 것이라네. 자네가 내 아들에게 친구의 아름다운 본을 보여주어서 정말로 고맙네!" 그리고는 잡은 돼지를 가지고 잔치를 베풀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친구가 무엇입니까? 너를 위해서 내가 희생당하고, 너를 돕기 위해서 내가 손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친구의 모습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14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뒤면 예수님을 부인할 제 자들이었습니다.

잠시 뒤면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 달아날 형편없는 제자들이었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서슴없이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 다. 형편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 고 이 시간 선언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감격스러 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친구 사이입니다.

목회칼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

 

 

19세기초 미국에 벤쟈민 웨스트(Benjamin West)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하고 난 사이에 그가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벤쟈민은 심심한 나머지 그림 물감을 다 풀어서 자기의 누이동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지저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보니까 방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 벤쟈민에게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벤쟈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야! 우리 벤쟈민이 그림을 엄청 잘 그렸네. 딱 보니까 누이동생인걸 알겠네!" 그러면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벤쟈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격려의 입맞춤까지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벤쟈민은 그때 일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부모님의 격려와 입맞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의 자녀들이 부족하다고 자꾸 구박주고 나무라지 말고, 잘 하는 점을 칭찬해 주면서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잘 활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본명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말하자면 "반석아, 반석아"하시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삶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가 반석처럼 듬직했습니까? 믿음직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성질이 얼마나 급했던지 생각 없이 불쑥불쑥 말도 하고, 행동도 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니까, 자기도 물위로 한 번 걸어보겠다고 바다위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서 빠져버렸습니다.

 

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피땀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해서 죽게 되었으니 깨어서 기도해라." 예수님이 그렇게 일러주셨건만 베드로는 쿨쿨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깨어서 보니까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오는 것입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기의 칼을 빼내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나는 죽어도 주와 함께 죽고 결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가 결국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한 번은 어린 계집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실수투성이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를 향해서 반석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베드로가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지만, 언젠가는 반석처럼 정말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예수님에게 있으셨던 것입니다.

 

과연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 그대로 주를 위해서 살다가 끝내 십자 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합니 다. 부족해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축복해주면 그대로 된다는 것 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많은 사랑을 쏟아주십시다.

 

아이들은 어른의 사랑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목회칼럼 “Think and thank”

 

고난 속 에서 위기 속 에서 감사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과연 하박국 선지자가 과연 어떠한 때에, 어떠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하박국3:16절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고 있을 때는 결코 평안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환난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곧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러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범죄한 유다를 치시기 위해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무섭고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표범보다도 더 빠르고 이리보다도 더 사납습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땅에 있는 먹이를 발견하고서 쏜살같이 움켜쥐기 위해서 내려오듯이, 바벨론의 기병들이 곧 유다를 침몰하기 위해서 올 것이라는 것을 하박국 선지자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는 바벨론과 맞붙어 싸울만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하박국 선지자가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입술이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 안에 있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했습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줄 압니다.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나 한 사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라에 위기가 찾아와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라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박국 선지자처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환난을 눈앞에 두고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걱정, 근심, 두려움을 거룩하게 승화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주석가 가운데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하루는 골목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실컷 얻어맞았습니다. 그 뒤 인사불성이 된 채 길바닥에 내팽겨졌습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온 몸이 쑤시듯이 아팠습니다. 겨우 기어가듯이 움직여 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는 잠시 가족들을 진정시키고 난 뒤에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는 강도를 당했음에도 기도의 첫 마디를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다섯 가지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째로 비록 제게 있던 것을 다 빼앗겼지만, 귀한 생명만큼은 지켜주셔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 제가 지금껏 한 번도 강도당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서나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세 번째로 아울러 이번 일을 통해서, 제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면서 살 수 있도록 저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번째로 만약에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저도 강도와 같은 범죄자가 되었을는지도 모를텐데 저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 고 목사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세 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저로 하여금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가 운데서도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서 이렇게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유명한 말로 오 늘의 글을 맺습니다. “Think and thank”

 

짤막한 목회칼럼 “Never, Never give up!”

 

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습니다. 다리가 너무 가늘었습니다. 그래서 뛰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습니다. 시력도 나빴습니다. 천식이 있어서 앞에 놓여 있는 촛불을 불어서 끌 기력도 없는 쇠약한 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로 인해서 괴로워하지 말아라. 네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래서 너는 너의 장애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주목하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아들의 나약함을 놓고 그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들은 아버지의 축복 속에 자랐습니다. 그는 열심히 운동을 해서 체력을 단련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보다도 더 왕성한 활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주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여러 요직을 거쳐서 부통령이 되었고, 43세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입니다.

 

그는 대통령 시절에 파나마 운하 건설을 추진했으며, 1906년에는 러․일 전쟁을 종식시킨 공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를 축복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훌륭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시대에 영국의 위대한 정객이 연설을 하기 위해서 연단에 서 있습니다. 그 이름은 윈스턴 처칠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정계에서 은퇴를 한 후에 모교 졸업식에 연사로 초대를 받았었습니다. 영국의 수상이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자이며, 또한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인물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나올지 사람들은 잔뜩 기대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청중들의 기대 속에 연단에 선 처칠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연설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Never give up! Never giver up! Never never never give up!”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처칠은 이렇게만 말하고는 연단을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중들은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시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을 할 때마다 힘이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도 그런 장애로 인해서 낙제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줄기차게 노력을 했습니다.

 

그 뒤에 자신의 뚝심을 살려 정치계에 몸을 담았습니다. 연설을 많이 해야 하는 정치가에게 언어 장애가 있었다면,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졸업생들에게 이러한 도전의식을 준 것 이였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언어 장애가 있었지만, 나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루즈벨트와 윈스턴 처칠, 이들은 현대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 들 이였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 고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나 장애가 있습니까? 우리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 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합시다.

“Never, Never give up!” 언제나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드림


출처 : 가고싶은교회 성은교회
글쓴이 : 피터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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