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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곧은 사람들 신 9:6-13

목이 곧은 사람들

 

신 9:6-13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 그들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신 7:6 이하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민 즉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민이 된 근본 원인을 설명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내세울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작은 민족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구원해 내셨기에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파트너로 세워주셨기에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또 다른 모습을 강조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명기가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저들이 하나님의 성민이지만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정직한 자기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성민입니다. 그 근본 원인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셨고,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민인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감추고 싶은 약점입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

   그러면 ‘목이 곧은 백성’이란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목이 곧다고 할 때 ‘곧은’이라는 말을 ‘케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케쉐라는 말은 ‘뻣뻣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멍에를 지지 않으려고 거부하고 버티는 황소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목이 곧은 백성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버티는 불순종을 나타내는 은유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미국 서부의 전통적인 놀이 가운데 ‘로데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길들이지 않은 소를 카우보이들이 타고 버티는 경기입니다.

  카우보이들이 소등에 올라타면 소들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날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카우보이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카우보이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카우보이를 등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서 카우보이들은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팁니다. 그러나 대부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소에서 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버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본성상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본성상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구체적인 증거를 이야기합니다.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 받고 출애굽할 때부터 이곳 모압 평지에 올 때까지 지난 40년간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40년 광야생활 내내 목은 곧은 기질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거역해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은혜 받고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며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명하실 때 거역할 때가 있지 않았나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면서도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있지 않았나요?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코 이스라엘 백성보다 적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손가락질 할 형편이 아닌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목이 곧은 기질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기질이 실제로 드러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던 때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무겁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목이 곧은 백성의 가장 큰 특징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옛 성경에는 강퍅하다고 했던 것을 개역개정판에서 완악하다라고 고쳤습니다.

   이 완악하다는 말은 의학적인 의미로 풀어보면 ‘경화’ 곧 ‘굳어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서운 간질환 가운데 간경화가 있습니다. 간이 딱딱하게 굳어가면서 점점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러니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은 그 마음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습니다.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며 결혼을 했습니다. 서로를 향해 마음이 뜨겁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마음이 솜처럼 부드럽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일상에 쫓기고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사는 것에 바쁘다 보니 서로에 대한 마음이 식어갑니다. 때로 서로에게 실망하고 원망 불평이 커갑니다. 점점 서로를 향한 마음이 굳어져 갑니다. 심할 경우는 서로를 향한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서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입에서 이혼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뜨겁던 그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완악한 마음 때문에 저들이 하나님께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그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으로 출애굽을 하면서 그 마음이 뜨거운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로 나와서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어지니까 감격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구체적은 증거를 매일매일 확인하면서 앞으로의 자기들의 여정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 앞에 펼쳐진 여정은 견디기 힘든 광야생활 뿐이었습니다. 기대가 무너지면서 원망과 불평이 늘어갔고 결국 그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기도 응답의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감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길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도처에 놓여있습니다. 때로는 박해도 있습니다. 때로는 시련도 있습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습니다. 그것들과 씨름하면서 감격도 잃어버리고 기쁨도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때로는 기대했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좀처럼 형편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점점 악화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점점 마음이 굳어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점점 완악해 져 가는 마음이 우리를 점점 목이 곧은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차례나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민이라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실망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안타까움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유명한 ‘중 2’학생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 우스개 소리가 있지요. 북한 김정은이 섣불리 남침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남한의 중2 청소년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2는 부모가 감당하기 힘이 드는 시기입니다.

   중 2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고집불통 반항아’ 모드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외치는 말이 바로 “난 나야! 내가 알아서한다고!” 부모의 뜻은 안중에 없습니다. 부모가 무슨 말을 하면 대들고 엇나갑니다. 그러면서 부모와 대화를 하면 늘 달고 사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 짜증나”

   이런 아이들의 부모는 속이 시커멓게 탑니다. 더 엇나갈까봐 때릴 수도 없습니다. 정말 가출할까봐 나가라고 내쫓을 수도 없습니다. 자식이라 모를 척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중2 부모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목이 부드러운 백성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는 하나님께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책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신 10:16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목이 곧은 백성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란 무엇일까요? 사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할례를 하라고 한 것일까요?

   먼저 할례를 살펴보겠습니다. 할례란 창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온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포피를 베어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나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 그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징표로 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한 자들을 하나님의 성민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겠다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겉사람이 받은 할례는 소중히 여기면서도 속사람이 지켜야 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겉사람이 할례 받은 사람임을 내세우면서도 속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받은 사람이면서도 그 마음이 완악해 졌고, 결국 목이 곧은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만 가지고는 부족하니 마음마저도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마음의 할례란 무엇일까요? 사실 모세는 구체적인 마음의 할례를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육체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할례의 정신을 잊지 말고 마음가짐을 할례 받은 사람답게 살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오면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사도가 롬 2:28-29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러니까 사도 바울 역시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마음의 할례는 바로 성령세례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그 속사람에 임하셔서 내주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속사람에 임하시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히 그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우선 그 마음에 들을 귀가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다음으로 그 마음에 순종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령이 그 속사람에 임하여서 그 심령에 변화가 일어난 상태를 마음의 할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마음속의 완악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마음이 순종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부드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우리의 마음에 완악함이 사라지고 우리가 목이 곧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시대정신 가운데 하나가 저항입니다. 기존 권위에 대한 저항,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 전통과 관행에 대한 저항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시대정신은 현대인들에게 목을 곧게 세우고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시대 풍조에 영향을 받아서 순종을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주일을 꼭 지켜야 하는가? 예배를 꼭 교회에 가서 드려야 하는가? 십일조 헌금을 꼭 해야 하는가? 라는 식의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행여라도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행여라도 목이 곧게 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민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민에게 베푸시는 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다음 찬송의 가사처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