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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롬 1:13-16)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롬 1:13-16)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은혜를 아는데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하면 동물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또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의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은혜를 모르면 그 사람의 관계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몇 가지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첫째는 마음속에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을 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둘째는 내가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셋째는 내 자신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감사로 고백하고 감격으로 고백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아! 나는 하나님께 빚진 자야 나는 부모님께 빚진 자야'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할/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고 보니까 빚진 자가 되어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는데 이 은혜를 받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는 심정에서 자기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을 했습니다. /할/
  '내가 빚을 갚아야지 내가 빚을 갚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 마치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아니하면 종으로 팔려간다든지, 감옥에 들어가기 때문에 채무 감을 가지고 빚을 꼭 갚으려고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채무 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그는 소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복음을 들고 다녔으며 마지막 그의 생명도 복음을 전하는데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슈바이처 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부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오버를 입었고, 구두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눈이 내리는 날 내 친구들은 나막신을 신고 가느라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부요를 만끽했다. 나는 매주일 고깃국을 먹고 몸이 튼튼했지만 내 친구들은 연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학교에 갔다 오다가 친구들과 뭉치기를 하면서 친구를 위에서 누를 때 밑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소고기 국을 먹는다면 네까짓 것은 문제가 안 돼' 나는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잘 먹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지' 어린 마음에 그 생각이 딱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건강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는 의무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21살이 되던 여름 성령강림절 날 이런 감동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아, 나도 30세까지는 예수님처럼 나를 위해서 학문과 예술을 닦고, 30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지' 그래서 그는 30세까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음악, 철학,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0이 넘어서 그는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36세에 아프리카 콩고지방 랑바레네로 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 많은 명예와, 영광을 두고 왜 죽으러 가는가' 그때 그는 '나는 빚진 자다. 우리 조상들이 흑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괴롭힌 그 죄과를 내가 대신 지러 간다.'> 그는 드디어 아프리카에 건너가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저들을 위해 살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그는 20세기 참으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성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성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진 자다' 이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할/


  ▶우리나라는 복음에 빚진 나라입니다. 지금부터 120여 년 전에 이 복음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 땅에 들어와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음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전에 1799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천주교의 대부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해는 이미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40년 전인 1846년입니다. 그는 중국에 건너가서 복음을 접하고 영세를 받고 신부가 된 사람입니다. 중국의 기독교 역사는 이렇게 깊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중국 선교도 실패했습니다.
  일본에도 복음은 일찍이 들어갔습니다. 1874년에 들어갔으니까 우리나라보다도 10년이나 먼저 들어간 셈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즈음인 1885년경에 이미 일본은 '내촌감삼'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교도 실패했습니다. 지금 일본은 가는 곳마다 신사나 절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십자가를 찾아보기는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기울어져 가는 구한말기로서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독살 위협을 받고 한일합방 조짐이 강하게 일어날 때였습니다.
  대원군은 일찍이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를 굉장히 괴롭혔습니다. 박해도 많이 했고 학살도 많이 했고 그래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고종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민비가 살해된 후로 고종은 독살 위협이 두려워서 누가 주는 음식도 마음놓고 먹지를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가 언제 독살할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고종은 선교사들이 주는 음식만큼은 마음놓고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했고, 그 아들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참 어두운 실정이었습니다. 쇄국정책으로 우리나라는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서 밖의 소식이나 외국의 문물이나 문화는 전혀 접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일본은 일찍이 명치유신이라 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신문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여서 현대화를 위해서 진력할 때 우리나라는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정치를 했으니 나라가 제대로 되어갔겠습니까? 오늘의 북한 사회와 똑같은 형편이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그런 엄청난 개혁을 이루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 민족은 개화되지 못하여 술과 노름으로 사회가 병들어 갔고 분에 넘치는 제사 제도 때문에 패가한 가정이 많이 생겼고, 거기다 일본의 수탈과 압박은 더해 갔고 나라를 합방시키려는 음모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였습니다. 민중들은 문맹으로 우매했고 거기다 무속 신앙으로 속박되어 백성들은 모두 운명적인 신앙으로 자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되어갔겠습니까? 먹을 것이 있습니까, 입을 것이 있습니까, 땔 것이 있습니까, 거기 어디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까?
  거기다 유교의 고답적인 권위주의로 여자들은 수난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남자들이 몇 명씩 첩을 얻어도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살아갈 때였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가 얼마나 무력하고 우매하고 어두웠겠습니까? 그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엄청난 축복입니다. 축복도 이만저만한 축복이 아닙니다. 그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가 개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문맹 퇴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몸부림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야학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먼저 한글을 가르쳐서 글을 깨우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비로소 인간으로서 눈을 뜨고 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습니다.
  또 선교사들은 이 땅에 들어와서 학교를 세웠고 병원을 세웠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했습니다. 이때부터 미션스쿨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오늘의 연세대학, 이화대학, 숭실대학, 배제학교가 그때 생겼습니다. 그리고 고아원들이 설립되어서 구호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변화된 사회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백성들의 의식이 점점 깨어나기 시작하여 이것이 마침내 민족 의식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항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전국적인 연락망이라든가 조직망을 가진 단체는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에 점을 찍고 교회가 있는 지역에 점을 찍어서 서로 겹쳐 보면 두 점이 아주 일치할 정도로 기독교의 항일 정신이 왕성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신문화, 즉 서양문화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갓을 쓰고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양복으로 바꿔 입고 다녔습니다. 또 상투머리가 단발머리와 상고머리로 바뀌었고 짚신과 나막신이 구두로 바뀌었고 상놈과 백정들이 양반과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고 현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겨우 100여 년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세계의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모두 이렇게 개화되고 근대화를 이루고 선진국가로 변모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을 보면 거의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면 국민의식을 개조해 놓습니다.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를 일신시켜 놓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구태의연한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선진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독교가 금지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나 봉건국가들을 보면 모두 우리나라의 3.40년대와 같이 구태의연한 때를 벗지 못하고 정신개혁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가 그렇고 멀리는 그만두고 저 북한 땅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디 변화가 있으며 변화의 조짐인들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도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그렇게 살았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는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진 나라입니다. 바울은 '사랑에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너무나 많이 진 나라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빚진 자의 심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본문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①바울은 빚진 자의 심령으로 로마에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서도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밝힌 그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다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는 결혼도 아니 하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때로는 해로를 통해서, 때로는 육로를 통해서 마게도냐,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잠시도 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복음의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15;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여 세워주셨습니다. 왜? 열매를 맺게 하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바울은 개인적으로 여러 번 로마에 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막혔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여러 번 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바울을 로마에 보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소원하는 바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디 살아 계시냐? 하나님이 날 버렸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며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
  가령 어린아이에게 위험한 것을 맡기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축복을 주어도 잘 관리하고 잘 섬길 수 있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열매는 신앙인들이 맺어야 하는 많은 열매 중에서도 전도의 열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로마에 가서 다른 이방인에게 전도하여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보면 바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 로마서를 써 보낸 후 3,4년 후에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때가 주후 62년 초 정도가 됩니다. 그 후 로마에 3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감옥에서 지내기도 하고 풀려나기도 하면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바울 혼자서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가 거두게 된 전도의 열매입니다. 네로 황제의 칼날에 바울이 순교를 하던 64년 초, 그러니까 로마에 간 지 3,4년이 지나서 로마는 온통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할/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네로 황제의 핍박을 시작해서 바울은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당시 로마 시에는 유대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2만 명이 넘었고, 본지 인들을 합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거대한 군중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 다고 경기장에 끌려나간 성도들은 미친개의 밥이 되었고, 사자 밥이 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고, 짐승의 가죽에 돌돌 말아 톱으로 갈아 죽였고, 심지어 네로는 성전 뜰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끌어다 소나무 막대기에 못을 박아 세워 놓고 거기에 기름을 잔뜩 부어 횃불로 사용했답니다.
  그러면서 네로는 술에 취해 마차를 끌고 다니면서 '내가 만든 예술 작품을 보라'며 발광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교인들이 숨어살던 카타콤은 너무 넓어 그곳에 숨을 수 있는 사람 수가 백만이 넘는다는 주장을 한 학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순교자의 숫자가 얼마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오직 뜨거운 마음으로 복음에만 관심이 있는 사도였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권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높이고 전하면서 전도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본 받아야 할 사명의 소리입니다. /믿/
 
  ②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야 합니까? 답변은 간단합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헬라 사람이나, 또 어리석다고 야만인 취급을 받는 사람에게나 구분 없이 복음은 다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저들 모두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없이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말할 것도 없이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나같이 못난 사람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지만 나보다 잘난 사람, 더 똑똑한 사람, 더 부유한 사람, 더 건강한 사람에게도 복음은 똑같이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빚진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우리가 다 복음에 빚진 자'라는 이 고백은 기독교인들 모두가 가져야 할 심정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에 빚진 자요, 용서에 빚진 자요, 은혜에 빚진 자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값없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빚졌다는 말은 채무자란 말입니다. 빚진 죄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빚은 무섭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이자가 불어납니다. 저희도 죄인입니다. 빚은 꼭 갚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유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빚을 지면 매인 자가 됩니다. 빚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⑴돈을 빌려 쓰는 경제적인 빚 ⑵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사랑의 빚 ⑶주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복음의 빚입니다.
  바울은 롬13:8절에서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라고 합니다. 빚이란 그것이 어떤 성격의 빚이든 간에 갚아야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2000년 전 로마시대는 정치는 로마정치였지만, 문화는 헬라 문화권에 살았기에 헬라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요, 헬라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야만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모든 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빚진 자입니다. 누구에게 빚진 자입니까?
  ⑴하나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연 속에 살게 하시고 시시때때로 맑은 공기를 호흡하게 하시며, 밝은 태양 빛을 받아 살게 하십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빚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날마다 넘어지고 쓰러지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과 불 신앙 속에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심판의 날을 연기하시고 깨닫고, 회개하고, 바로 서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⑵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입니다. 주님은 아무 흠도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주님께서 대신 죽어주신 것, 즉 내 죄 값 때문에 예수께서 나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믿!/
  ⑶부모에게 빚을 졌고, 이웃에게 빚을 진자입니다. 우리가 그저 태어나서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희생, 이웃의 사랑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모릅니다. 그러나 장가가고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키우면서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에게는 내가 죽을 때까지 못 갚는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⑷우리는 스승에게도 빚을 졌습니다. 이웃에게도 사랑의 따듯한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빚들을 갚을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지만 그 전에는 기독교를 박해했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때려죽이고, 또 다메섹에 있는 예수쟁이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가지고 내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은 예수를 전하지만, 얼마나 핍박했는가?' 그 빚을 갚아야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빚진 자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저 받은 생명, 그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 모든 이방인들에게 다 전해야 되는데 아직 다 못 전했으니 다 전할 때까지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서 빚을 갚아야 될 줄 믿습니다.
  ▶14절의 말씀을 받고 크게 감동을 받아 복음 전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리빙스톤'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을 치면서 '내가 참으로 많은 빚을 진자로구나' 탄식했답니다. 리빙스톤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목사고시 시험을 치렀는데 설교시험에서 낙방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신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설교를 시원치 않아서 목사생활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리빙스톤이 좌절하고 있을 때, 성령의 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설교를 잘 못하니까 지식인들에게 전할게 아니라 미개인(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구나! 결심을 하고 그는 아프리카로 떠나게 됩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에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선교사들을 아무리 모으려 해도 모이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때 리빙스톤은 선교부에 찾아가 내가 목사고시에 떨어졌는데 선교사로 가고 싶습니다. 지원을 했습니다. 지원자가 없는 처지에 그 용기가 대단하다며 허락을 했는데 그 조건이 의사가 되어 의술선교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국말로 유창하게 설교를 못하는데 아프리카 말은 더욱 못합니다. 아프리카는 동네만 지나도 언어가 다른 곳입니다. 선교하기도 무척 어려운 곳입니다. 리빙스톤은 주님 앞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봉사하고 헌신했더니 토인들은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해도 리빙스톤의 헌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많은 토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리빙스톤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자, '스텐리'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을 곳곳마다 리빙스톤이 지나간 자리에 예수의 흔적과 자취가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그곳에 수없이 많은 백인 선교사가 들어왔지만 리빙스톤처럼 존경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백인들은 선교사로 가장하여 토인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먹었지만, 리빙스톤은 그들의 병든 곳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입으로 빨고 하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자신의 몸은 사자에게 뜯기면서까지 빚진 자로서의 심정으로 예수의 사랑의 실천을 몸으로 보답했습니다. 후에 영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훌륭한 인물은 아프리카에 묻을 수 없다며 웨스트민트 사원에 묻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마음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복음을 전할지라도 뭐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까?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뿐이지요. 빚진 사람은 당연히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하나님께서 그 빚을 탕감해주었어. 저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밖에 안 돼.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진 자의 심정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합니다. 그래서 칼로 무 자르듯이 남을 잘라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빚진 자의 심정은 어떠한 것입니까?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책임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빚을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 화가 미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역시 화가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을 우리도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지금 받아 누리고 있고, 바울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우리도 역시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 자의 심령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③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할 수 있는 대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여!'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열을 가진 사람이 다섯을 내 놓는 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100kg을 들 수 있는 사람이 50kg만 든다면 그것도 힘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지식, 물질, 건강까지도 그래서 그는 말년에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나의 달려갈 길은 다 달렸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남은 길은 의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부인을 구원하기 원하십니까? 힘을 다하십시오. 친구나 형제나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신다면 최선을 다하십시오. 힘을 다해 기도하고 전도한다면 반드시 그 영혼은 주께로 인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아멘/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생애 동안에 야심을 가진 도시가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아테네요, 하나는 로마입니다.
  그러나 행17절에 보면 아테네 선교가 실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철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철학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테네에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려 했다가 크게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크게 깨달은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십자가 외에 자랑치 않겠노라'고 작정하였고, 그대로 실천하여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이 그 당시 왜 로마에 야심을 가졌습니까? 로마는 정치의 중심부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인구는 100만을 육박했습니다. 그런데 자유인은 10만 정도였고, 90만은 노예였습니다.
  포로로 잡아와서 모든 일을 시키고 로마인들은 편안히 앉아서 돈을 모았습니다. 편안하게 돈을 모으니 그들은 자연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가정이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타락하여 사랑과 공의가 매 말랐고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부패한 도성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다짐하기를 부패한 로마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믿고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④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16).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당연히 전해야 하는데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은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너희에게 자랑하노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자랑하면서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한 어조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고백합니다.
  바울이 거듭나기 이전 율법주의자로서 그리스도인을 심하게 박해할 때는 복음이 한없이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거듭나고 복음을 깨닫고 나서는 오직 예수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대 땅에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그러니까 결국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비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예수를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부끄럽고 안 부끄러운 것은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밥 먹다가 손님이 오면 얼른 상을 치웁니다. 상에 된장과 김치 밖에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일이란 아무 가치 없는 일을 함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허송세월 보낸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⑴복음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모하트'는 '나는 복음을 자랑하느니'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오면서 성경책 들고 가기가 부끄럽다고 신문지에 싸 가지고 갑니다.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워 식사 기도도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예전에 술을 참 좋아했습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술은 근방 끊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술집에서 술 앞에 놓고 기도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자랑하십시오. 나는 예수 믿는 다고 선포하십시오. 그래야 주일날 모임에서 빼 줍니다.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불확실하니까 마귀가 그저 밥으로 알고 매일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 고백입니다. 주님은 마10:33절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또 딤후2:12절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자신이 헬라인인 것을,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인 인 것을, 유대인들은 유대인인 것을 자랑하며 긍지를 가지고 삽니다.
  미국 어느 대학 기숙사에 세계 각국 유학생들이 모여 기숙하고 있는데 주말이면 자신의 부모들에게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어로 전화를 하는 학생은 한국 학생뿐이랍니다. 조국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더 나가서 우리는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예수를 자랑하며 삽시다. /아멘/
  ⑵복음에 대한 확신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확신이 넘쳐야 합니다. 최 권능 목사는 예수 천당만 전하고 다니다 졸업시험에 낙제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실력은 없지만 기도하고 가방 들고 다니면서 예수 천당만 전했는데 길다던 사람이 깜짝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하루는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가는데 '예수 천당!' 외쳤더니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그만 그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부하 헌병이 총을 들이대며 쏘려고 하니 대장이 말렸습니다. 최 목사님은 헌병대장 다친 허리를 잡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벌떡 일어났답니다. 최 목사는 계속 '예수 천당!'을 외치며 다니다가 헌병대에 끌려와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한대 때리면 '예수' 또 때리면 '천당' 심문하는 헌병이 왜 자꾸 그 소리만 내느냐고 물었더니 '여보시오 물이 꽉 찬 바케스는 가만히 두면 그대로 있지만 건드리면 넘치는 것과 같이 내 속에 예수 천당으로 꽉 차 있으니 건드리면 그 소리만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헌병은 별 미친놈 다 본다며 발길로 차면서 나가라고 했을 때도 '예수 천당'하고 외쳤답니다. 최 권능 목사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구원의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하루는 시집가는 새색시 가마를 열고 시집만 가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했더니 그 새색시 귀에서 계속 그 소리만 맴돌아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교회를 8개나 세우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한국 교회사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당시 로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세계의 길은 로마로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그 당시 로마 제국과 로마의 권위와 국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는 정치, 군사, 문화, 경제, 예술, 산업, 종교 등등 모든 영역에서 세계 최고의 황금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폭탄이 세계 대 도시인 로마에 터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십자가를 자랑삼아 복음을 가지고 선전포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토록 막강한 로마 제국도 복음 앞에 굴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로 변모해갔습니다. 복음은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힘이요, 생명의 위력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십시다. /아멘! 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구원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바로 구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촛불 앞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누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한 태양 아래 서 있는 것과 같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촛불 앞에 서 있어 보세요. 촛불이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내 노력으로, 내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 같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 뒤에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한 태양 아래 서 있을 때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양 빛은 꺼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때. 우리 마음속에 불안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에게 구원의 선물을 허락해주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고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자에게'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적어도 신구약 성경을 한번 이상 읽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16절에 보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했습니다. 믿어야 한다는 조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능력이고, 믿음이 생명이고, 믿음이 축복입니다.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0년 8월 1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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