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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5:17-32, 41-42 2012.4.22(일)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5:17-32, 41-42 2012.4.22()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부활절 이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한 주간동안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셨습니까? 미국의 한 부부가 성지순례 차 이스라엘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에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미국으로 가는 방법인데 고향으로 가서 좋지만 절차도 복잡하고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에 묻히는 방법인데 고향은 아니지만 대신 돈이 너무 싸다는 것입니다. 노인이 한참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돈이 들어도 미국으로 가야죠. 이스라엘 땅에 묻히면 다 좋은 데 한 가지 염려가 돼서요”. “무슨 염려요?” “혹시 예수님처럼 아내가 부활하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 이 사람은 비싼 돈을 들여 미국으로 갔습니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에 가면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한국인 두 명이 이 폭포에서 보트를 타다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 갔습니다. 때마침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이들에게 구조의 밧줄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밧줄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한 사람은 살고 다른 사람은 죽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사람을 끝까지 밧줄을 잡고 강둑으로 올라왔고 또 한 사람은 밧줄 잡다가 그 뒤에 떠내려 오던 통나무를 다시 붙잡았습니다. 결국 통나무 붙잡은 사람은 죽고 끝까지 밧줄 붙잡은 사람은 살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통나무는 사람과 연결되지 않았고 밧줄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붙잡느냐가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합니다. 부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통나무는 보기 좋아도 그냥 혼자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밧줄을 붙잡아야 합니다. 밧줄은 사람이 붙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으면 우리도 삽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다시 사신 것을 믿습니까? 또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시 살았습니까?” 예수님은 다시 살았는 데 우리는 다시 살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헷갈립니다. 부활은 예수님만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살았습니까? 성경 최고의 신비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로 흘렀습니다. 그때 우리가 거기 없었지만 그 물과 피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에게 흐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온 통로였습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예수님안에만 생명이 있을 뻔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찢고 상처를 냄으로써 우리에게도 생명이 임했습니다.

 

항상 생명을 낳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생명은 자기 죽음과 함께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어머니 여러분, 어떻게 자녀를 낳으셨습니까? 해산의 수고와 함께 자녀를 낳았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아기를 낳기 위해 신고 온 신을 다시 못 신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혹시 어머니가 죽지 않더라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서 아이를 낳습니다.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무엇이든 잃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겨울이 오면 잃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겨울만 계속되는 계절은 없습니다. 다시 봄이 옵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어머니가 자녀를 잃습니다. 그러나 얼마후에 예쁜 손자를 얻습니다. 공부를 위해 자녀를 멀리 객지로 보냅니다. 몇 년후 더 장성한 자녀를 만납니다. 잃기만 한 인생은 없습니다. 잃으면 다시 얻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있습니다. 희생입니다. 고통입니다. 자기 죽음입니다. 그것의 대가를 지불하면 거기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나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원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 이후의 교회의 역사를 다룹니다. 교회 역사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누군가 죽어 다시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사도행전은 세계선교가 이루어진 선교의 역사입니다. 세계 선교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원리가 있습니다. 누군가 죽고 희생해서 생명이 흘렀습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가 고난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그 생명을 풍성히 나누었는가를 기록합니다. 말씀을 통해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풍성한 부활의 생명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오면 생명이 강해집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교회를 적대시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를 밖에서 핍박하든지 안에서 부패케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3-4장에서는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때 모든 성도가 일심으로 기도해서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교회가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주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교회내부를 공격했습니다. 교회 핵심 멤버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하여 교회의 순결을 깨뜨렸습니다. 그 결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다.

 

그랬으면 사탄이 가만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탄은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잘되면 사탄의 세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또 교회를 핍박합니다. 17-18절입니다. 5: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여러분, 역사적으로 교회는 수많은 핍박을 받고 여기까지 온 것을 아십니까? 로마시대부터 공산주의까지 세상의 모든 권력은 교회를 핍박해 왔습니다. 주후 60년대, 네로시대,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울은 둔 손을 뒤로 묶인 채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작년에 로마의 지하무덤 카타콤에 갔습니다(영상). 지하 12미터 깊이에 있는 지하 무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믿음을 지키며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거기에 가니까 순교자 세바스티안의 무덤이 있었습니다(영상). 세바스티안은 3세기 디오클레티안 황제때 순교한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본래 귀족출신으로 로마군 장교였는 데 예수믿는 사람의 좋은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자신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동료들이 발각되어 용감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예수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장앞에 섰습니다. 황제가 말했습니다. “네가 다시는 예수믿지 않는다고 말해라”. 그런데도 세바스티안은 안믿는다고 하기는커녕 당당하게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분개한 황제는 세바스티안을 결박해 숨이 끊어질 때까지 화살을 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세바스티안은 수많은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화가 치민 황제는 세바스티안을 몽둥이로 때려 하수구에 버리도록 했습니다. 그가 죽자 몇몇 사람들이 하수구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 성 바울 교회 근처에 묻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로마시대 순교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귀족이고 군인출신이면서도 예수님을 심문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화살을 맞아도 죽지 않았다는 점등이 그를 당대의 대표적인 순교자가 되게 했습니다.

 

언제나 교회 역사를 보면 가장 핍박이 많을 때 가장 부흥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된 다섯 시대가 있었습니다. 첫째 대원군 시대입니다. 그때 순교한 사람이 영국의 토마스목사입니다. 둘째는 일제시대입니다. 일제 신사참배 떄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가 죽었습니까? 주기철, 박관준, 한상동 목사등이 그때 순교했습니다. 셋째는 공산당 시대입니다. 그때 공산당이 얼마나 많이 교회를 불태우고 믿는 사람를 죽이고 가두었습니까? 산정현교회 유계준, 조만식 장로등이 끝까지 북에 남아 순교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한 것이 이때입니다. 넷째가 60년대 이후 가난의 시대입니다. 6.25 이후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때 한국교회가 가난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그 교회중 하나가 여의도 순복음교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0년대 인권탄압의 시대입니다. 이때 교회는 인권을 위해 싸웠고 교회는 한국사회의 행동하는 양심이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는 고난과 함께 살아온 역사입니다. 그리고 고난받을 때 가장 생명력이 있고 가장 힘있고 가장 부흥했습니다.

 

19절 보시겠습니까?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 내어 이르되”. 여러분, 핍박의 시대에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평소에도 우리를 돕지만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더 크게 돕습니다. 7장에서 스테반이 순교할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7:55, “스테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시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스테반이 죽을 때는 벌떡 서 계십니다. 스테반이 순교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순교하는 스테반을 보다 못해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신 예수님, 고난당할 때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고난이 올 때 믿음은 강해집니다. 겨울이 지난 새 봄은 생명의 계절입니다. 항상 봄만 있다면 그 봄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겨울이 있기 때문에 봄이 아릅답습니다. 무지개를 보려거든 소낙비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생명은 더 풍성해집니다.

고난이 오면 우리가 강해질 뿐 아니라 우리안에 생명이 더 풍성해 집니다. 20절을 볼까요? 5:20-21,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핍박으로 강해진 사도들에게 주의 사자가 말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생명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전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사람이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주의 사자는 천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가 말했다면 하나님이 말한 것입니다. 핍박이 몰아쳐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로 인해 이들의 믿음이 강해지고 담대해 졌습니다. 고난은 늘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강해졌지만,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만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으로 근육을 키웁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근육을 키웁니까? 아니잖아요? 경기에 나가 이기기 위해 근육을 키우지 않습니까?

 

제가 요즘 읽고 은혜받고 있는 교회사의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잔느 귀용이라는 여성입니다(사진). 이 사람은 1648,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다 받았습니다. 제가 그의 일생을 추적하며 무슨 고난을 받았는지 가짓수를 세어보았습니다. 그는 우선 태어날 때부터 7개월 조산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몸이 아프고 약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어머니는 늘 그에게 무관심했습니다. 나이 16세에 부모의 강제로 22살이나 연상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모진 시집살이를 시작합니다. 시어머니는 마치 그를 힘들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았습니다. 그 변덕스러운 시어머니의 비위를 일생 맞추고 삽니다. 그의 동생이, 오빠가 그를 핍박합니다. 남편이 죽고 아들, 딸이 병으로 죽습니다. 재산도 다 빼앗깁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단으로 몰리면서 루이 14세에 의해 악명높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힙니다. 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오자 마자 다시 붙잡혀 프랑스 중부 블루아 근방에서 아들과 함께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합니다. 그의 고난은 1717, 그의 나의 70세가 되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쯤 했으면 잔느 귀용은 하나님을 버렸어야 합니다. 그가 당한 고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제가 생각해 봐도 우리 중에 이 사람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 했다. 감옥은 안 갔잖아요? 7개월만에 조산해서 평생 아프며 살았다. 아들, 딸이 다 죽지는 않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오해받았다. 재산을 다 빼앗기는 않았잖아요? 우리같으면 진즉 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잔느 귀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난중에서 더 주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안에서 더 큰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 비밀을 담은 책이 <예수그리스도를 깊히 체험하기>입니다. 이 책이 그의 대표작입니다(사진). 이 책을 권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인생의 고난이 많다고 느끼시는 분, 그 중에서도 여성들,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잔느 귀용은 그 고난에 찬 인생에서 평생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끊임없이 고난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했습니다. 그가 많은 고난속에 배운 (1) 첫 번째는 자기포기였습니다. 그가 겪은 많은 고난이 그로 하여금 자기 포기를 배우게 했습니다. 자기포기는 그에 의하면 주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거룩의 열쇠였습니다. 누구나 자기를 포기해야만 주님이 그 심령이 머뭅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늘 세 가지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첫째 과거의 나는 하나님앞에서 잊어버리고, 둘째 미래의 나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셋째 현재의 나는 하나님께 바쳐 버리라”. 자기 포기는 그리스도인에게 행복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자기 포기를 그르칩니다. 여러분도 자기를 포기하고 삽니까? (2)그가 배운 두 번째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누구나 낙심합니다. 잔느 귀용도 많이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낙심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왜 낙심하는가 하고 물엇을 때 그것은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을 알았습니다. 낙심은 근본적으로 교만에서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교만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잘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두는 가치관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기가 우리 삶과 생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이 나를 성취하지 못하니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성취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입니까? 내 뜻과 내 게획이 완전합니까? 아니 잖아요. 그래서 낙심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때부터 잔느 귀용은 낙심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3) 세 번째 자느 귀용이 배운 것은 유혹이 올 때 유혹과 맞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이유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보고 따지고 싶고 정죄하고 싶고 자기를 변호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이유없이 감옥보내 7년씩이나 썩힌 사람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유혹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었습니다. 자기에게 유혹이 몰려 올 수 있지만 그 유혹을 자신이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미운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 누구 누구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 누구 누구를 맡아 주세요”. 그래서 그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이가 무서운 것을 볼 때 직접 싸우지 않고 엄마 품으로 달려가는 어린아이처럼 유혹이 올 때 하나님의 품으로 가라”.

 

(4) 네 번째 배운 것은 영적 메마름입니다. 하도 많은 시간에 모진 고난을 당하니까 영적으로 매말라 졌습니다. 영적 메마름은 영적 침체를 말합니다. 우리도 가끔 영적 메마름을 경험합니다. 가끔 기도가 안 나오고 예배드려도 감격이 없고 찬송 불러도 신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하던 일을 내려놓고 싶고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가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겁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듭니다. 영적 메마름의 증상입니다. 잔느 귀용도 이 영적 메마름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영적 메마름이 오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도 가끔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깨우기 위해 우리앞 숨으시는구나”.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적 메마름은 하나님이 잠시 숨으신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 :아가, 엄마 찾아봐하고 장롱뒤로 숨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엄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안 보인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안 보이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메마름의 때에 우리가 할 일은 깨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깨달은 것은 고난이 오면 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배가 고프면 스스로 엄마 품에 들어가 젖은 먹습니다. 그런데 젖을 먹는 원리가 있습니다. 일단 엄마 품에 안겨야 하고 먹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ᅟᅡᆮ. 그리고 입을 벌려 빨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입을 벌여 젖을 빨면 그때부터 젖이 스스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공급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갈급한 마음으로 나아가 입을 벌려 사모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공급합니다. 그러나 입을 벌리지 않으면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6) 고난을 통해 그가 깨달은 마지막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인간의 의지, 감정, 육신의 생각은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루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고난을 통해 잔느 귀용은 이러한 중요한 영적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날로 풍성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교회사를 풍성하게 했습니다. 그 뒤 조지 폭스, 진젤도르프, 요한 웨슬리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학자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평범한 여자가 그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했다면 우리도 고난당할 때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면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더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전도는 생명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은 안에 고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밖으로 흘러갑니다. 다시 20절을 보실까요?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고난을 통해 얻은 예수님의 생명의 최종적인 유익은 생명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말하라”. 생명은 말하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팔당댐에 비가 와서 물이 차면 물은 밖으로 방류되어야 합니다. 물이 많으면 누가 흐르지 말라고 해도 흐릅니다. 이 풍성한 생명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관련하여 크게 세 가지를 경험하며 삽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생명안에 사는 것, 이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영성은 예수님의 생명안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셋째 이 생명이 밖으로 나가는 것, 이것이 사역입니다. 봉사요 섬김입니다. 사랑이요 전도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 교회 부흥을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생명의 넘쳐남입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와 풍성히 누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41절과 42절을 보십시오 행5:41-42,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전도는 이런 것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앞에 와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랬더니 향유냄새가 온방에 가득했습니다. 향유를 담은 그릇을 깨뜨렸더니 그 속에 있던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없으면 나올 것도 없습니다. 반드시 속에 있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깨뜨려야 합니다. 고후4:7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품은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보화같은 하나님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옵니까? 깨어져야 합니다. 껍질이 깨어져야 알맹이가 나옵니다. 옥합이 깨어져야 향유가 나옵니다. 질그릇이 깨어져야 보화가 나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생명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 가든지 이 생명이 자연스럽게 흘러갔습니다. 성전에 가면 성전에서, 집에 가면 집에서,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여행가면 여행지에서, 자기도 모르게 속에 있는 생명이 흘러갔습니다. 초대교회는 특별한 전도훈련도 없었습니다. 전도폭발, 전도대학 없었습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늘 충만했기 때문에 입만 열면 속에 있는 것이 나왔습니다.

 

미국의 무디가 그랬습니다. 구둣방 점원이었던 무디가 예수님 믿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구두방에 앉아 있는 데 주일학교 교사 킴볼이 전도했습니다. 전도받고 교회 나간지 얼마 안되어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에 거리로 나가 단번에 18명의 아이들을 전도했습니다. 그 후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결심을 합니다. “하루에 한번 이상 전도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말자”. 어느 날 밤, 무디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려고 하는 데 그날 따라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 전도안했구나”. 그리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니 누가 있겠나?” 과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 전도해야 겠고, 조금 기다렸더니 한 사람이 우산을 쓰고 지나갔습니다. 재빨리 달려 우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이 우산 좀 같이 써도 될까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면 우리는 우산으로 피합니다. 인생의 폭우가 쏟아질 때 선생님은 어디로 피하나요?” 결국 그 사람은 구원받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 생명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 무디는 일생 100만명을 전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흘리신 물과 피가 여러분에게 생명으로 흘러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생에 고난이 와도 우리가 담대할 것은 고난이 오면 우리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고난이 올 때 고난과 싸우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고난이 올 때 예수님 바라보면 우리안에 있는 생명을 더 풍성해 집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흘러갑니다.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여,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 생명이 고여 있지 말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긍휼로, 성실로, 지혜로, 학업으로, 사업으로, 능력으로 흐르게 하옵소서. 특히 전도로 흐르게 하옵소서.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학교에 있든지, 부요하든지, 가난하든지,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 생명이 흐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