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창25:27-34 야곱같은 자녀, 이삭같은 부모 2012.5.6(일)

25:27-34 2012.5.6()

야곱같은 자녀, 이삭같은 부모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자녀입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자녀는 도자기와 같고 부모는 도공과 같다”. 자녀는 부모가 빚는대로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자녀는 활과 같고 부모는 궁수와 같다”. 부모가 자녀를 붙들고 쏘는 대로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서울에 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둘이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도저히 아이를 돌 볼 형편이 안 되어 시골에 있는 할머니에게 맡겼습니다. 몇 년이 지나 부부가 좀 형편이 나아져 시골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잘 자랐나 궁금하기도 해서 엄마가 그림책을 꺼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먼저 토끼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게 뭐니?” 아이가 말했습니다. “토깽이”. 엄마가 깜짝 놀랐습니다. 토끼라고 하지 않고 토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염소를 가르키며 이건 뭐니?”하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염생이”. “아니 염생이가 아니라했더니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그것도 몰라. 염생이랑깨”. 마지막으로 까마귀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건 뭐니?” 아기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때까우여”.

 

배운대로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인 자녀를 주셔서 감사하지만 우리를 통해 잘못 배울까봐 걱정입니다. 성경에 많은 부모, 자녀 이야기가 나오지만 부모의 교육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자녀가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가 먼저 태어나고 간발의 차이로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둘은 어찌나 다른지 둘이 쌍둥이라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선 몸이 달랐습니다. 에서는 붉고 털이 많았습니다. 눈썹도 새카맣고 남자답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달랐습니다. 몸도 매끈 매끈하고 피부도 하얗습니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여자같았습니다. 몸이 다른 것처럼 성격도 달랐습니다. 에서는 우락 부락하고 남성적이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냥을 잘 했습니다. 야곱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습니다. 늘 어머니 옆에 있었고 부엌에서 살았습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요? 타고난 기질 때문입니다. 기질이 다르면 모든 것이 다릅니다. 기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됨의 선물입니다. 보통은 다혈질, 점액질, 담즙질, 우울질, 넷이 있습니다. 다혈질은 급합니다. 말이 많고 늘 happy합니다. 성경으로 하면 베드로입니다. 스타기질이 있습니다. 점액질은 조용합니다. 보기에 늘 평화롭습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입니다. 드라마로 하면 관객입니다. 담즙질은 성취욕이 많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성경으로 하면 바울입니다. 드라마로 하면 감독입니다. 우울질은 감수성이 뛰어납니다. 완벽주의에 가깝습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엘리야입니다.

 

어느 기질이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각자 좋습니다. 기질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됨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질에 성장과정의 영향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기질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성격입니다. 아마도 에서는 다혈질에 가깝고 야곱은 담즙질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제는 기질이 아니라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자랐나 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삶을 보면 둘은 타고난 기질을 극단적으로 역전시켰습니다. 야곱은 타고난 기질을 최고로 발전시켜 성공했고 에서는 타고난 기질을 속에 숨겨두고 살면서 인생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성공과 실패의 키가 부모였습니다. 부모는 에서와 야곱을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영향을 주었습니까? 각각 세 가지씩 있습니다.

 

먼저 에서를 살펴봅시다.

1) 편애

먼저 에서가 부모에게 받은 나쁜 것은 편애입니다. 28절입니다. 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에서가 잘못된 원인을 찾는다면 첫 번째가 편애입니다. , 부모가 두 아들을 각각 좋아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합니다. 이삭이 에서를 편애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28절 앞 부분에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이삭이 에서를 좋아한 이유는 사람됨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큰 아들이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에서가 그저 사냥을 잘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자주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동기입니까? 두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어머니 리브가에게 미리 알렸습니다. 25:23, “두 민족이 네 태중에 있구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만일 이삭이 에서를 편애했는 데 이런 동기로 했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를 크게 쓰고자 했기 때문에 나도 그를 더 사랑한다”. 아니면 하나님이 그를 덜 사랑했기 때문에 나라도 그를 더 사랑해야지했다면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둘 중에 에서가 사냥을 잘 한다. 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고기를 늘 나에게 가져온다. 그래서 나는 에서를 좋아한다한다면 그 편애는 저속하고 인간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에게 늘 상처를 주고 가정을 병들게 하는 것이 편애요 비교의식입니다. “형은 잘하는 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언니는 반에서 항상 일등하는 데 너는 왜 항상 꼴찌냐?” “너는 왜 야곱처럼 못하고 에서처럼 하느냐?” 이것을 야곱 컴프렉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쌍둥이도 다른 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같겠습니까? 다혈질은 좋은 대 우울질은 나쁜 것입니까? 장미보다 백합이 좋은 것입니까? 장미는 장미대로 좋고 백합은 백합대로 좋지 않습니까? 이 비교의식이 경쟁을 부르고 경쟁의식이 죽음을 부릅니다. 오늘날 한국교육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성적순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 좋다고 가르치지 않고 누구는 누구보다 못하고 누가 제일 낫고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세요. “강압으로 거룩해지지 않듯이 경쟁으로 인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 뒤의 역사를 보십시오 .야곱은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는 데 에서는 야곱만 보고 일희일비하지 않습니까? 사람앞에 상대적으로 서지 말고 하나님앞에 절대적으로 서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2) 물질주의

에서가 잘못된 두 번째 이유가 물질주의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 컷습니다. 다시 28절을 볼까요? 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좋아한 이유는 에서가 사냥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큰 아들이었기 때문에, 에서가 착하고, 인물이 좋고, 잘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딱 한 가지, 사냥을 잘하고, 아버지에게 고기를 많이 가져다 드리고, 그래서 에서를 사랑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삭은 에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고기를 더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에서는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기쁘게 하겠습니까? 사냥만 잘하면 됩니다. 부지런히 고기를 아버지께 갖다 드리면 됩니다. “, 역시 고기가 최고구나. 아버지는 고기만 드리면 끝나는구나”. 이렇게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물질적인 사람이 됩니다.

 

팟죽 사건도 그렇습니다. 에서가 어느날 들에서 돌아와 보니 야곱이 팟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출출하던 차에 음식 냄새를 맡으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팟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핏죽은 평생먹는 것이 아닙니다. 한끼먹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금방 먹고 배고플 팟죽 한 그릇과 평생동안 바꿀 수 없는 장자권과 바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려서부터 물질만 알도록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냥해서 고기먹고, 배고플 때 팟죽먹으면 끝납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에서란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이 말이 털복숭이라는 뜻입니다. 에서가 태어날 때 몸이 털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좋은 말이 아닙니다. 털이 많다는 것은 속되고 욕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털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났고 자라면서 점점 물질만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가 이것을 어떻게 말합니까?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말합니다. 에서가 무슨 망령된 일을 했습니까? 부지런히 사냥해서 아버지 대접했습니다. 배고파서 팟죽 한 그릇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에서의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면 망합니다.

 

3) 목적없슴

에서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인생의 목적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요. 25:32,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팟습니다. 누구나 배고플 수 있습니다. 배고프면 장발장처럼 빵을 훔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장자의 명분입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장자됨의 권리입니다. 지금도 비슷합니다만,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장자가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부모가 살았을 때 장자는 부모의 대리자가 됩니다. 부모가 죽은 뒤에 장자는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받습니다. 아들이 둘이면 장자가 2/3, 둘째가 1/2입니다. 두 배입니다. 아들이 많으면 아들이 몇 명이든 장자가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를 가지고 형제들이 나눕니다. 요즘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과거 이스라엘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큰 소리 칠 수 없습니다. 34절을 보시겠습니까? 25:34, “야곱이 떡과 팟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보십시오. 여기에 나타난 에서의 행동이 얼마나 개념이 없는지. 도무지 인생의 목적이 있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얼마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지.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다른 생각은 일체 안 합니다. 미래도 없습니다. 오늘 뿐입니다. “왜 사는지 묻거든 그냥 웃지요”. 아무 개념이 없습니다.

 

여러분, 왜 장자가 그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재산때문만이 아닙니다. 1장을 보십시오. 거기에 예수님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을 걸쳐 예수님에게 이르는 이스라엘 장자들의 계보입니다. 거기 나오는 모든 사람이 둘중의 하나의 장자입니다. 혈통상 장자는 무조건 이름이 올라가고 혈통이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해서 장자가 됩니다. 장자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장자는 팟죽먹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낳는 계보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당장 먹기는 꽂감이 좋지만 영워한 하나님의 나라의 족보에는 장자만 들어갑니다. 에서는 이 목표가 없습니다. 좀더 멀리 보는 인생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즉흥적이고 찰라적으로 삽니다. 오늘의 작은 즐거움에 탐닉하여 사는 이유는 내일의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부모가 에서에게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팟죽 한 그릇에 팔았다는 말을 듣고도 부모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부모가 가르쳐주지 않고 자기도 노력도 안했으니 에서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곱을 살펴봅시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했습니까? 에서의 약점의 대부분은 야곱의 강점이었습니다.

 

1) 자기한계를 뛰어넘음

먼저 야곱은 자기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야곱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둘째라는 태생적 한계입니다. 누구나 첫 번째로 태어나야 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둘째로 태어났으니 결코 장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장자가 되었으니 야곱은 결국 자기 한계를 뛰어 넘은 것입니다. 장자가 되면 좋다는 것을 우리보다 야곱이 훨씬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았다고 둘째가 첫째가 됩니까? 아닙니다. 도전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불가능에 도전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밥이나 먹고 살면 됐지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불쌍하게 예수믿는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죄나 짓지 않고 천국이나 가면 됐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해 야곱은 누구입니까? 하루 하루 팟죽이나 먹고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고 앉아 죽기보다 차라리 시도해보고 죽는 쪽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남이상 되기 위해 남이상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에디슨이 말한대로 사람의 모든 꿈은 다 이루어집니다. 단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고. 그 경우는 꿈꾸지 않는 경우입니다. “꿈꾸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꿈은 이루어진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이번에 SBS에서 실시한 k-pop대회에 우리 교회 박아연이 나가 3위를 했습니다(영상). 제가 top-10부터 보았는 데 top-3에 든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주가 어떻게 지났는지 아연이 때문에 우리 모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연이를 응원한 것은 다른 이유때문입니다. 아연이는 1993년에 태어났으니 지금 20살입니다. 어릴 때는 건강했고 머리도 총명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때, 웬일입니까? 악성 림프종에 걸렸습니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더니 엄마 나 얼굴 부었어해서 보니까 오른쪽 뺨이 주먹만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악성 림프종이었습니다. 큰 병원에서 수술받고 2년동안 항암치료했습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2학년이면 9살 아닙니까? 9살먹은 어린이가 암에 걸려 2년을 병원에 있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연이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에 전념하여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고 호원대학교 실용음악부 보컬과에 560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k-pop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기라성같은 사람들중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비록 1위를 하지 못했지만 제 눈에는 아연이가 1위였습니다. 거기 9살 때 암에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과 암환자가 붙어 3위를 한 것입니다. 아연이 3위는 다른 사람의 3위와 전혀 다른 3위입니다. 자기 한계에 도전한 위대한 3위입니다. 어린 나이에 2년 이상의 처절한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난 용기있는 3위입니다. 아연이가 1위 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도 그의 인생에 도전할 일이 더 남았기 때문입니다. 인생 도전이 이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1, 2위는 남겨둔 것입니다. 아연이도 장하고 그 부모도 장하고 무엇보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장합니다. 야곱처럼 살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야곱처럼 우리 모두는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신체적 한계, 지적 한계, 물질적 한계, 외모의 한계, 인종의 한계, 지역의 한계, 나라의 한계, 그러나 우리가 살아보면 우리를 진정으로 한계지우는 것은 우리가 타고난 한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한계는 도전하지 않는 한계입니다. 꿈이 없는 한계입니다. 안일주의, 편의주의, 안정주의의 한계입니다. 한계를 한계로 의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역사를 변화시킨 위대한 사람들, 프랭클린 루즈벨트, 헬렌 켈러, 윈스턴 처칠, 알버트 슈바이쳐, 마하타마 간디, 알버트 아인쉬타인 등 세계적인 인물 300명중 4분의 1이 시각 장애인이거나 청각 장애인, 아니면 소아마비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분의 3은 가난했거나 깨어진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불행한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한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꿈이, 도전이, 믿음이, 한계보다 컸기 때문에 한계를 뛰어 넘은 것입니다. 한계가 없었으면 하고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계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도전하면 됩니다. 도전한 사람에게 한계는 언젠가 무너집니다.

 

2) 고난의 대가를 지불함

야곱이 성공한 것은 자기 한계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마땅한 고난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야곱이 이때 약삭빠르게 팟죽 한 그릇에 형을 속이고 장자권 빼앗아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잘 먹고 잘 산 것은 에서였고 야곱은 그뒤로 고생의 길로 갑니다. 우선 그는 부모를 떠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잘 모릅니다. 혹 부모를 떠나 유학간 요즘의 자녀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전혀 다릅니다. 유학간 자녀는 우선 돈을 대줍니다. 유학생은 먹고 잘 곳이 있습니다.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하루에 열 시간이라도 부모와 통화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학생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부모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습니다. 장자가 되었다고 해서 상속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모와 연락할 길도 없었습니다. 결국 20년 후 그가 돌아왔을 때는 부모가 죽고 없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20년 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인색한 장인 라반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꿨습니다. 나중에는 처자식도 못 데리고 가도록 막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계에 도전하지만 동시에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의 사람들을 볼까요?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10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물이 없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적대자들이 방해할 때 7번이나 참았습니다. 지금 그곳이 이스라엘의 르호봇입니다. 작년에도 갔는 데 수많은 과일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죄없이 감옥에 오래 기다렸고, 엘리야는 이세벨의 현상수배로, 요나는 물고기뱃속에서, 욥은 파산해서, 나오미는 가난해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숙성 기간이란 것을 아십니까? 알을 깨어나 병아리가 되려면 21일이 필요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데는 열달이 걸리고, 코끼리는 2년 걸립니다. 이것이 숙성기간입니다. 무엇인가 되려면 숙성기간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낳는 데 25, 야곱은 하란에서 20, 요셉은 흉년 7년만에 풍년들었고,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름받는 데 40, 이스라엘은 바빌론에서 해방되는 데 70,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데 33년 걸렸습니다. 다 그 일에 필요한 숙성기간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잘 안 풀려서 염려됩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거스틴도 32살에 돌아왔습니다. 반드시 돌아오지만 때가 되어야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기도하다가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쯤하면 사업이 궤도에 올라야 하는 데 답답합니까? 조금 더 기다리세요. 하루 이틀에 생겼다 없어지는 벤춰기업이 아니라 삼성, 현대, 애플같은 기업이 되면 수십년, 2, 3대가 가야 합니다. 야곱이 언제 고생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자권 받기 전에 고생한 것이 아니라 장자권 받은 후에 고생했습니다. 장자가 되는 것은 팟죽 한 그릇만 팔아도 되지만 장자권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란에서 20년이나 고난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고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붙잡음

야곱이 성공한 하나의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에 도착했습니다. 그날밤 천사가 나타나 야곶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때 야곱은 자기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이름이 야곱이었지만 자기가 누군지 한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자 갑자기 자기 이름이 떠 올랐습니다. “야곱”. 야곱이란 이름은 "야카브“,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발전해서 야곱은 "사깃군이요 도둑놈"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것은 마치 남이 잘못해서 생긴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야곱입니다. 내가 바로 문제아입니다. 내가 바로 사기꾼이요 내가 바로 거짓말쟁입니다. 나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면서 나의 가장 큰 원수덩이입니다. 주여, 나를 도와 주옵소서. 내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래서 그날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만나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KBS가 취재해서 만든 책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자녀에게 선물하면 좋은 책입니다. <유대인의 공부>입니다. 이 책을 위하여 KBS는 미국 하버드 대학과 에일대학에 있는 유대인학생들을 취재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버드대학엔 유대인 학생이 7천명이 있었습니다. 전체 2만명중 33%입니다. 하버드 대학생 세 명중 한 명이 유대인이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 다 합쳐서 천명, 전체의 4%입니다. 그런데 이 세 나라 합쳐 인구를 합치면 이스라엘의 300배입니다. 인구는 300배가 많은 데 하버드에는 4%밖에 없습니다. 에일대학생은 25%가 유대인입니다. 왜 이렇게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유대인 학생이 많은가? 재작년 말 통계로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가 179명입니다. 30%가까이 됩니다. 경제학, 의학, 화학같은 것은 노벨상의 40%이상을 유대인이 휩쓸었습니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유대인은 탁월할까?

 

KBS 기자가 하버드, 에일에 있는 유대인 학생들을 인터뷰 해보고 세 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해 냈습니다. 첫째 유대인은 암기해서 공부하지 않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공부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학교를 가면 둘씩 바라보게 앉아 있습니다. 선생님이 한 가지 가르치면 그때부터 둘씩 토론합니다. 둘째 부모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녀에게 묻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입니다. 공부의 목적을 하나님께 둡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예배하고 안식일만 되면 부모와 함께 회당에 가서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힘의 비결입니다. 그 옛날 그 조상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은 것처럼, 야곱이 자기 한계에 도전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낸 것처럼, 그들도 자기 한계에 도전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섬기다 보니까 하버드, 예일을 휩쓸고, 노벨상을 휩쓸고, 전 세계적인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어린이 주일에,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를 에서처럼 키웁니까? 야곱처럼 키웁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에서처럼 자랍니까? 야곱처럼 자랍니까? 우리의 자녀를 야곱처럼 키웁시다. 목적없는 아이를 하나님을 목적삼도록, 인터넷, 게임, 재미, 경쟁, 물질주의에 정신을 팔린 아이들을 자기 한계에 도전하는 아이들로, 고난속에서 강한 자녀들로 키워 냅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유대인같은 위대한 민족, 위대한 자녀, 위대한 미래를 창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