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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0828]요즘 교회들은 사데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사데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3:1-6(2016년 8월 28일 설교 설교자: 비전교회 마경훈 목사)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소아시아 7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입니다. 둘째는 지구 종말에 되어 질 일들입니다. 셋째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소아시아 7교회 중 5번째 교회인 사데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칭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한국에는 약 5~6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에 존재했던 교회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선호하는 이름이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그리고 빌라델비아교회와 서마나교회입니다. 절대로 안 짓는 이름은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저는 사데나 라오디게아교회를 본적이 없습니다. 아마 전 세계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교회는 주님에게 칭찬은 하나도 받지 못했고 책망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데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절에 보니 주님은 하나님의 7영과 7별을 가지신 분입니다. 1:4, 20에 보면 7영은 성령님을 말하고 7별은 7교회의 사자 곧 교회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교회의 지도자 역시 주님이 붙들어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고 목회자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교회를 주님에게 맡길 수 있고 주의 종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일본에서 선교하시는 김안신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김목사님은 선교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이분이 전주 동부교회에서 10년 동안 목회를 잘 하시다가 일본 선교사로 가시게 되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궁금하여 김목사님께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큰 교회 담임으로 목회하시다가 선교사로 가시게 되었습니까?” 선교사님의 말씀은 기도하던 가운데 선교에 대한 메시지가 오는데 자꾸 거절만 하다가 한번은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일본을 가겠느냐? 아니면 나에게로 오겠느냐?’라고 물으셔서 일본으로 가겠습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개인에게도 말씀하시고 교회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영적인 귀가 있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데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지상의 모든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1절에 보면 주님이 사데교회의 사자 즉 사데교회의 목회자에게 편지를 쓰셨으나 6절에 보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에게라고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며 진리입니다.

사데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누겠습니다.

 

1. 무사안일주의에서 벗어나라

무사안일주의가 뭡니까? 아무런 일 없이 편안함만을 누리려는 태도나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 지방을 지나는 중에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고 있는 인부들 곁으로 가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인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보고 먹이를 던져 줍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여러 가지 맛있는 것들을 받아먹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음식들이 갈매기의 몸에는 해로운 음식들입니다. 갈매기들이 날마다 과자나 사탕 같은 것들을 받아먹다 보면, 일반 먹이에 대해 식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관광 시즌이 지나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먹이가 바다 속에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갈매기들이 이렇게 굶어 죽습니다.” 풍성함과 편안함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풍성함과 편안함에 빠져 살면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병을 고치지 못하면 영적으로 사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진단하셨습니다. “너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들이다.” 사데교회는 교회라는 모양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현자들의 거짓말]이라는 책에 실린 글입니다. 런던의 어느 달동네에 두 사람의 재단사가 서로 마주 보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늘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일해 왔습니다. 어느 날 한 재단사가 다른 재단사에게 물었습니다. “금년에 휴가 갈 건가?”, “아니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재단사가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1964년에 휴가를 갔었지.” 첫 번째 재단사는 무척 놀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가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가득차서 그때 그 휴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난 그 때 벵갈로 호랑이 사냥을 갔었지. 빛나는 금빛 총을 두 개나 들고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말 엄청나게 큰 호랑이를 만났지. 내가 총을 쏘았어. 그러나 그 놈은 내 총알을 피하고 나를 덮쳤지. 내 머리가 그 놈 이빨에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리고 나를 먹기 시작했어. 마침내 그 놈이 내 마지막 살 한 점까지 다 먹어 버렸어.” 깜짝 놀라서 첫 번째 재단사가 소리쳤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호랑이는 자네를 삼키지 않았어. 자넨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러자 두 번째 재단사가 슬프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이걸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먹고 살기에만 바쁘고 직업의 의미나 보람을 잃어버린 직장인의 모습을 풍자한 글입니다. 살아 있기는 하나 죽은 것과 같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교회도 이런 교회가 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있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이런 교인들이 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 죽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사데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은 경제적인 풍성함과 육체적인 편안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무사안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사데는 기원전 1,200 년경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고대 리디아왕국의 수도로 부유한 도시였고 내륙의 여러 도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데는 금을 얻기 쉬운 도시였습니다. 사데를 가로지르던 팍톨루스 강은 금이 섞인 침전물들이 떠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사데는 금과 관련한 여러 제조업 특히 금화 세공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터키 지역에서 가장 큰 양모 시장이 형성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데는 로마 시대 당시 사치와 부요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데 도시는 돈이 많아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군사적으로 안정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데 사람들은 대단히 안일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데 교회도 그 도시의 일반인들처럼 세상의 안일함에 빠져서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한국 교회를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도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처럼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들을 합니다. 바닷물의 평균 소금 농도는 3.5%에 불과 합니다. 3.5%라는 소량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바닷물로 비유하면 많게는 20%의 적게 잡아도 10%의 염도는 됩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짠 맛을 잃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은 아닌가 두렵습니다.

한국교회는 왜 짠 맛을 잃어버렸을까요? 물질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풍성하니 교인들도 육신적으로 풍성하고 편안합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과 편안함이 영적인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철야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밤에 한 두 시간 기도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온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는 늘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면 눈물을 흘리며 통곡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울다울다 지나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기도가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했습니다. 그런 간절함이 가족구원과 민족구원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경제적인 축복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언제부터인가 축복에 파묻혀서 영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데교회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소금의 짠맛을 잃어가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2. 외식하지 말라

이필재 목사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말은 일반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죽으면 죽은 자이고 살았으면 살아있는 자이지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사데 사람들은 이 말이 금방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데에는 형벌 문화가 특이하게 있었습니다. 사형시켜야 되는 흉악범을 잡으면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시체와 같이 묶어 버립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있는데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을 같이 묶어놔 버리니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된 것을 보고 같이 묶여 있으니까 사람들이 저게 산 사람이냐, 죽은 사람이냐?”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말이 생긴 겁니다. 살았으나 죽은 신앙은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은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플레레오라는 단어로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가득 채워지지 못하여 비어있는 상태, 부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피부에 와 닿게 말하면 너희는 껍데기만 있고 속이 비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외식하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찬송가 작가인 보너 호로티우스 목사님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천사가 보너목사님에게 저울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분석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열심을 달아보니 총 100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기심을 가지고 봉사하며 나타났던 이기심 열심이 14근이었고, 자기 그룹을 만들려고 했던 이유로 봉사를 했던 파당적인 열심이 15근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고 봉사를 했던 열심이 22근이었고, 그저 사람이 좋아서 봉사를 했던 열심이 23근이었습니다. 반면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했던 열심은 겨우 26근 뿐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보너목사는 자기의 열심이 정말 인간적이었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새롭게 변화된 삶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세인들은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23장에 보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7번이나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외형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중심이 더 중요합니다.

 

3. 깨어나라

2절에 보면 너는 일깨어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는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일깨어라는 말의 뜻은 정신 차리고 졸지 말라입니다.

사데 지방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압니다.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데 지방은 헤르무스라는 강과 팍톨루스라는 강을 끼고 있고 성의 동쪽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성의 동쪽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동쪽만 굳게 하라, 동쪽만 굳게 하라.” 이것이 사데 지방의 안보 교육이었습니다. 주전 300년경에 알렉산더가 이 사데를 공격했으나 얕잡아 보고 들어갔다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망신만 당했습니다.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전을 꾸미기 위해서 달밤에 헤르무스 강과 팍톨루스 강에 몰래 배를 띄웠습니다. 동쪽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강쪽을 노린 것입니다. 병사들이 살살 조각배를 타고 틈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변 위에서 보초 하나가 꾸벅꾸벅 졸다가 모자 하나가 덜렁 떨어져서 떼굴떼굴 강가에까지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병사가 살살 내려와서 모자를 집어가지고 쓰고 올라간단 말입니다. ‘! 여기 요새가 있었구나. 됐다.’ 알렉산더가 한밤중에 바로 그 자리에 조각배를 집결시켰습니다. “이리로 올라가라.” 올라가서 위에 있는 보초 한두 명을 죽여 버리고 하룻밤 만에 사데성을 완전 함락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사람들은 동쪽은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어디로 들어왔느냐? 졸다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로 알렉산더 군대가 침입했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데성은 안보 철학은 바뀌었습니다. “동쪽만 굳게 하라, 동쪽만 굳게 하라에서 깨어 졸지 마라. 깨어 졸지 마라.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 것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거의 매일 학교 수업시간에 잠을 잔다.’는 학생이 초등학생은 0.3%, 중학생은 8% 수준이지만 고등학생은 24%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등학교 교실의 1/4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업 시간에 전혀 자지 않는다.’는 고등학생은 7%에 불과했습니다.

사데교회 교인들 모두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아주 소수이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수업시간에 전혀 자지 않는 7%의 학생들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데 교회에 몇 안 되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4. 굳건하게 하라

굳건하게 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리조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지지하다. 고정 시키다.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않게 굳게 잡으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굳게 잡지 못해서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 중에 에서가 형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장자의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장자의 복을 굳게 잡지 못하고 소홀히 생각하다가 야곱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에서의 이름이 빠지고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그 다음부터 소멸되어 없어져버리고 빼앗긴 것입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열두 조상의 첫 번째 축복인데 그 자리를 아버지에게 잘못해서 유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구원 족보에게 르우벤이 빠지고 유다 혈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데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교만을 부리다가 비참하게 망하고 그 자리를 다윗에게 빼앗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는데 주님을 배반하고 맛디아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유대인들은 택한 백성의 자리를 이방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일제시대에 일제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사참배를 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복을 빼앗겼습니다. 단지 1%의 사람들만이 신앙을 지켰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회는 촛대입니다. 주님은 교회 사이에 거니시며 하나님의 종들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계 2:5에 보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촛대를 옮기시면 에베소교회는 받은 은혜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듯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거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5의 촛대를 옮기신다는 경고를 하실 때 주님은 그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2:4-5 전체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우리가 받은 은혜를 굳게 잡으려면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첫 사랑을 할 때의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5.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약해집니다. 젊을 때는 어른들이 깜빡깜빡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좀 이해가 됩니다. 어느 분은 나이가 드니 자신의 손자 손녀 이름도 헷갈린다고 합니다. 결혼기념일도 심지어 자신의 나이도 잊어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백화점 쇼핑을 갔다가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사실을 깜박 잊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분도 있습니다. 딸의 결혼식 날 드라이만 하려고 미장원에 들렀는데 파마할 거냐고 묻는 미용사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해달라고 말했다가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분도 있습니다. 계단에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는데 내가 계단을 올라가던 중이었는지 내려가던 중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내려오셨다는 분도 있습니다. 건망증과 관련해서는 별의 별 에피소드들이 다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약해져도 자신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기억은 생생합니다. 그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십니다.

 

6. 남은 자가 돼라

4절에 보니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데 교회의 남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남은 자 즉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영적 순결함을 지키는 사람들은 절대 많지 않습니다. 12:32을 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입니다.

5절에 보니 남은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4-5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닌 것입니다. 계시록 7장에 보면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천상의 예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그들은 온갖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구원받은 이긴 자들입니다.

5절에 보니 주님은 남은 자들, 이긴 자들, 흰옷을 입은 자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십니다. 그 당시에 호적은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 이름이 지워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호적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천국호적에서 이기는 자의 이름은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제가 총신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총신대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면 제 이름이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검색을 해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합니다. 가끔 똑똑한 교인들이 지나치게 똑똑해서 총신대학원 홈페이지에서 자기 목사님의 이름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졸업생 명단에 내 이름이 있어야 그 학교 졸업생입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이름이 없으면 자기가 그 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다 무효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천국호적에 자기 이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확인해보니 없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천국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지옥행입니다.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남은 자가 되십시오.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이기는 자가 되십시오. 그날에 천국에서 보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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