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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0821]무엇을 하든지 주님처럼

무엇을 하든지 주님처럼

2:1-4(2016821일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로마의 황제 가이사의 판결을 기다리면서 기록한 성경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크게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는 바울을 위하여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둘째는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내서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랑에 감사하며 빌립보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우들에게 여러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본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어떤 생활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주제로 풀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문장을 시작합니다. 2:1 이후의 내용이 1장의 어떤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1:27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이냐입니다. 둘째, ‘어떻게 해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느냐입니다.

어떻게 해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느냐에 대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설교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1. 한 마음으로 함께 하기

2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라’, ‘같은 사랑을 가지라’, ‘뜻을 합하라’, ‘한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4가지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다 같은 말입니다. 같은 말을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마게도냐 인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그환상에 이끌려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갔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 강가에 나와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루디아는 바울 사도를 자기 집에 모시고 빌립보교회를 개척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업가였던 루디아의 집을 선교 본부로 사용하며 빌립보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라는 여성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성 주도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여성적인 돌봄을 바울에게 베풀었습니다. 여성적인 사랑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바울을 돌보는 것이 빌립보교회의 장점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여성적인 사랑과 돌봄이 장점이었다면 여성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다툼이 빌립보 교회의 약점이었습니다. 4:1에 보면 바울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 사이의 시기와 분열과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권면한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나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창조도 구원도 그리고 모든 섭리도 한 마음으로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각자의 인격을 가지고 있으나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한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 133:1에 보니 형제가 연합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현대에 생긴 신종어 중에 고독사(孤獨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 없이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뜻합니다.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서는 흔한 얘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해 연간 450명 정도가 가족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고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70년대 여자 배구선수로 이름을 날린 60살 장00씨가 30년 가까이 홀로 살다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장 씨가 혼자 살던 자택의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습니다. 시신의 상태로 미뤄 장 씨가 발견되기 20일 전쯤 숨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독사입니다.

저는 신앙생활도 고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선물을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외롭게 혼자 신앙생활을 하거나 교회 공동체 생활을 모르고 나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서 결국은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고독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공동체 속에 함께 계십니다. 18:20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우리 모두가 비전교회 공동체 안에 주님이 계심을 확신한다면 비전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중세에 어느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도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만 다툼이 일어나 한사람씩 떠나게 되었습니다. 최후로 다섯 명이 남게 되었습니다. 수도원 원장과 나머지 네 사람인데 그들은 마지막까지 가장 극렬하게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수도원 원장이 견딜 수 없어서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선지자는 묘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비밀스럽게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누가 찾아와 원장님은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겁니다. “남아 있는 형제 중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코방귀를 뀌던 형제들이 조금씩 생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누가 예수님인지 찾으면서 다른 형제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원장이 예수님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또 다른 형제는 자기와 같은 방을 쓰는 형제가 예수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형제가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도원에 남아 있는 형제들은 서로 예수님처럼 대하기 시작하자, 수도원의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한 여행객이 지나가다가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여행객이 보니까 분명히 다섯 명이 있는데 꼭 여섯 명이 있는 것처럼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원장은 나머지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행객은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고 그 후 수도원은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교회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심을 확신하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2. 다툼이나 허영이 없이 하기

저는 이런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한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내리면서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다툼의 장소로 인식될 만큼 많이 다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교회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투는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파벌이 있었습니다. 바울파가 있었고, 게바파가 있었고,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도 다툼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3절에 보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허영은 헛된 자부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헛된 자부심은 경쟁심을 유발하며 다툼을 일으킵니다. 허영심은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치는 주된 요소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려면 모두가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허영심은 승부욕을 갖게 만들고 승부욕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심리학]이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승부욕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사신 이유가 남을 이겨보겠다고 열심히 사신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나아지겠다고 열심히 사신 것이 아닙니다.

남을 이기기 위하여 사는 것, 남보다 나아지겠다고 사는 것은 아주 위험한 삶이고 피곤한 삶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험 점수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부모들도 자기 자녀를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고 자녀의 경쟁심을 자극해서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심으로 사는 것은 피곤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괴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열심히 사셨지만 경쟁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기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부로라도 저주는 것입니다.

 

3. 겸손한 마음 지키기

3절에 보니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11:29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한 태도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잘 났고, 내가 높아져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면 절대 겸손할 수 없습니다.

[괴짜 심리학]이란 책에 재미있는 설문조사의 결과가 나와 있답니다. 미국인들에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약 52%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상당히 관대한 것 같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하여 물었더니 60%로 클린턴 보다 조금 높았습니다. 설문조사에서 2위를 차지한 사람은 인도의 캘커타에서 구제활동을 했던 테레사 수녀로 79%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천국을 행위와 연결시켜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설문 조사에서 놀라운 점은 87%의 지지를 받고 1등이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설문 대상자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이 설문조사가 보여주는 결과는 사람들은 자신을 대단히 과대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3.1운동을 준비하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민족대표들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33명 중 누구를 제일 먼저 쓰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마 기독교와 천도교 간에 주도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남강 이승훈선생이 소리쳤습니다. 이분이 기독교 장로님이셨습니다. 이분이 소리치기를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라고 함으로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순서가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3.1운동을 준비하던 분들도 높은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면 상대의 가치를 알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이걸 뜯어고쳐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생김새, 그 사람의 학벌, 직업, 재산, 배경 등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았습니다. 고후 5:1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바울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영혼의 가치로 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가진 조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영혼의 가치로 봤던 것입니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계속해서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계속해서 존경할 수 없습니다. 외모로 판단하면 이웃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서 존경할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외모적으로 부족해도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귀한 영혼이기 때문에 존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함은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슈베르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산책하던 중에 카페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쉬는 동안 그 집 선반에 있던 세익스피어 전집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속에 있는 한편의 시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악상을 종이에 옮겼습니다. 그것이 들어라 종달새라는 노래로 발표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비상한 음악가적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이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곡이 연주되고 난 뒤 청중들의 열렬한 칭송하면 으레 것 저 가곡은 내가 쓴 곡보다 괘테의 시가 훌륭했기 때문이오라든가. “저 가수가 잘 불렀기 때문이요라면서 언제나 시를 쓴 사람과 노래를 부른 가수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또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를 안다면 절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겸손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이 뒤따릅니다. 본문 9-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겸손하신 예수님을 높여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들로 하여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장 높여주신 것입니다.

강원도에 예수원을 세운 대천덕 원장님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치고 겸손한 사람이 없고, 또 겸손한 사람 가운데는 지식인다운 면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다고 도전했습니다. 여러분 실력 있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력 있고 겸손하면 좋겠지만 실력 있고 교만한 것보다는 실력 없이 겸손한 것이 더 낫습니다. 벧전 5:5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18:12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멸망하고 싶으면 교만하면 됩니다. 존귀해지고 싶으면 겸손해지면 됩니다.

 

4.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살기

어느 집사님의 Q.T 간증입니다. 개인 묵상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간증이긴 한데 재밌습니다. 이 집사님이 어느 날 Q.T 시간을 가졌습니다. 말씀은 마 16:2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집사님은 평소에 이 말씀을 보면서 그냥 지나쳤지만 그 날은 달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집사까지 되었는데 한 일이 없지 않은가!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수모와 고초를 당하셨는데,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다시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자신의 십자가가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부인이란 말이 뇌리를 때렸습니다. ‘부인! 아내! 와이프! 그렇다. 나의 십자가는 다른 게 아니라 아내구나라고 생각하고 평생 자신의 아내를 짊어지고 살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정신이 무엇입니까? 남을 돌아보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우리 주님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류를 긍휼이 여기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멸망하는 우리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 일을 철저히 잘해야 하며 남의 일도 돌아보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일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자기 일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일을 돌아보는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그리고 교회생활 등을 할 때 주변에 자기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를 대신해서 그의 일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자기의 맡은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지 말고 그의 짐을 대신 져주어야 합니다.

봉사나 전도나 선교는 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봉사는 내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내가 짊어지는 것입니다. 전도나 선교는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로서 가장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가끔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오지랖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일을 하기에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는 오지랖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오지랖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 목사님의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가족 찬양대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찬송 경연대회에서 어느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습니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자리에 돌아와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어 담임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들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714,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일제히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쳐다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그 일기를 읽고 장로들은 한 바탕 울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한 집사님을 돌아보는 목사님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 어떤 삶인지 4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한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이 없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겸손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자기 일을 돌아보고 또 남의 일도 돌아보는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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