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4)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은 참으로 소중하고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8장 전체의 말씀을 암송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유적으로 이러한 표현을 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의 반지에 비유한다면 로마서의 말씀은 반지 가운데 있는 보석과도 같고, 그 가운데 로마서 8장의 말씀은 보석에서 빛나는 광채와도 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만일 다 불타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로마서 8장만 남아있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로마서 8장의 말씀이 소중하고 또 은혜롭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시는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또 아무리 그 은혜와 축복이 풍성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놀라우신 축복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만큼 더욱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시골 어느 마을에 불쌍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어렵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잘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가난에 찌든 삶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마을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과부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아들을 생각하며 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과부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들에게서 잘 있다는 소식은 자주 옵니까? 돈은 부쳐오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마다 과부는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예, 그저 잘 있다는 소식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과부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습니다. 제대로 먹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그 모습을 보다가 너무 딱해서 하루는 쌀 한 말을 사들고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아들이 집을 떠난 지가 벌써 언젠데 아직도 돈을 부쳐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 소리를 듣고 과부는 고개를 푹 수그렸습니다. 목사님은 혹시나 하면서 물었습니다. "혹시 편지 속에 다른 것이 들어있지는 않던가요?" 아니나 다를까 과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편지 속에 종이 조각이 늘 하나씩 들어있기는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과부에게 종이조각을 가지고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들이 외국에서 보낸 Check(수표)였습니다. 영어로 잔뜩 쓰여있으니까 과부는 그것이 엄청난 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부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푼도 쓰지 못하고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민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등에 업고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친구가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 등에 업고 가는 아이는 누구인가?" "응. 우리 아들일세." 짓궂게도 그 친구는 이번에는 등에 업혀있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정말로 너를 등에 업고 가는 이 아저씨가 너의 아버지냐?" 그러자 아이는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글쎄요. 사실은 잘 모르겠는데요." 그 기막힌 소리에 아버지는 아들을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그쳤습니다. "이놈아, 내가 지금 너를 등에 업고 가는데 내가 너의 아버지인줄 모른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그러자 아들이 당돌하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를 등에 업고 간다고 해서 무조건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군도 나를 등에 업어주고 옆집아저씨도 내가 귀엽다고 업어주지 않습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아버지는 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너를 먹여 살리겠느냐?" 그러자 아들이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먹여준다고 해서 무조건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촌도 나를 먹여주고 다른 사람도 나를 먹여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아들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일 내 아버지라면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대 보세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지금도 풍성하신 축복을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 "아멘!"이라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놀라우신 축복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는데, 과거의 죄에 얽매여서 계속해서 움츠린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십자가의 일을 우리가 무효화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닫고, 늘 사랑 속에 감격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 이웃에게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롬8:1∼4에 있는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한 번 하나님이 선언하시면 취소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까?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정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던지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을 지나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피해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에는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 사람은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멸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리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집에 붉은 줄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합의 집에 드리워진 붉은 줄을 보고서 그 집은 멸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 여리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주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자꾸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간교합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를 정죄감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말씀이 좌우에 날선 한 검이 되어서 악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이 말씀을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리할 때 악한 마귀는 썩 물러가고 말 것입니다. 인도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담입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쥐를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쥐가 계속해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는 쥐에게 물었습니다. "얘, 쥐야. 너 뭐가 그리 무서워서 벌벌 떠느냐?" 쥐가 대답했습니다. "예. 고양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제 고양이가 나타나서 나를 물어 죽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술사는 그 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술을 부려 그 쥐를 고양이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고양이가 계속해서 떨고 있습니다. 마술사가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엇 때문에 떠느냐?" "예. 개 때문에 무서워서 떱니다. 언제 개가 나타나서 내 목덜미를 물어 나를 죽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술사는 고양이를 개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개가 계속해서 떨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엇 때문에 떠는거야?" 그랬더니 개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계속해서 호랑이가 어른거려 무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술사가 이번에는 개를 호랑이로 바꾸어주었습니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호랑이가 되어서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떨었겠습니까? 포수 때문입니다. 포수가 나타나서 총으로 쏘아 죽일까봐 그것 때문에 떤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래서 마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쩔 수 없이 구제불능이구나! 다시금 쥐가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는 다시금 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면 "아멘!"하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다. 더 이상 정죄감에 빠지지 마십시다. 과거의 죄에 얽매이지 마십시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복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두 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내용을 6:14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와 법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서 7:6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영의 새로운 것과 의문의 묵은 것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법 아래 살았습니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겼습니다. 벌을 받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마지못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100%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기쁨이 충만해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봉사하며 섬깁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가 집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는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탕자는 마음 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서 큰 죄를 저질렀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했으니까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으리오! 이제는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말씀을 드려야지."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떠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이미 아들을 다 용서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직도 상거가 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얼른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뛰어갔습니다. 목을 안고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다 용서하고서 애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잠시 뒤에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들어왔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한 것을 보고 원망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위해 지금까지 뼈빠지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탕진한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가합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얘야, 너는 나와 함께 있으니 나의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지만 너의 동생은 잃었다가 되찾지 않았느냐? 죽었다가 되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싸울 때 누가 우리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말로는 용서해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속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써먹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깨끗하게 용서하십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건망증은 perfect합니다. 완벽합니다. 다윗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습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내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간음죄 위에 살인죄까지 더 얹었으니까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두손들고 처절하게 회개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습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아니하셨습니다. 다윗은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복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서 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까? 솔로몬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누구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입니까? 다윗과 밧세바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는 죄, 미래에 짓는 죄까지라도 이미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간교해서 우리를 자꾸 정죄감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죄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마귀의 궤계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대하게 시험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셋째로, 우리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3∼4절 말씀입니다. 먼저 3절 말씀을 보십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에는 어떤 잘못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7:12의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까?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에 있는 조항들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은 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방법을 통해서 하셨습니까? 그것이 3절 하반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죄 없는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인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어서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대신에 모든 죄를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바를 다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응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 법대로 심판하십시오." 율법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 범한 저와 여러분을 율법은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범한 우리를 내어주지 아니하시고 대신 누구를 내어주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율법은 죄 범한 저와 여러분을 요구했는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으니까 율법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에 율법은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만 놀랐겠습니까?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온 세상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그 사랑에 경탄에 마지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은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 한들 나의 아들까지 죽이면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하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죄책감에 빠져서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아직도 정죄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그 엄청난 사실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왜 무효화시키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저 육신대로 즐기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도 괜찮다는 것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롬1:1부터 다시금 자세히 읽어야 할 것입니다. 6:1∼2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라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죄에서 떠나라고 우리를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산다고 어떻게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떠날 때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좀 즐겁게 육신의 향락을 취하면서 살아야지." 그러나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어떤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오, 아버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육신을 좇아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우리의 삶을 성령께 맡기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4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더 이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해주셨는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자기 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성령께 맡기면서 삽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으니까 의롭게 살 각오를 합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게 하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을 좇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며 성령을 좇아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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