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강 죄에 민감합시다(7:13-17)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소설 가운데 「돌과 두 여인」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나이든 수도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가 큰 죄인인줄 알고서 몹시도 괴로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 여인은 한때의 실수로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인은 자기는 여태껏 도덕적으로 살아왔기에 별로 거리낌없다고 생각하면서 덤덤한 마음으로 왔습니다.
나이든 수도사는 두 여인에게 참회의 고백을 시켰습니다. 첫번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여인은 달랐습니다. 자기는 여태까지 별로 큰 죄를 짓지 않고 살았기에 참회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수도사는 두 여인에게 일렀습니다. 울고 있는 여인에게는 큰 돌을 하나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여인에게는 되도록 작은 돌들을 많이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두 여인은 노수도사가 시킨 대로 한 사람은 큰 돌을 하나 가지고 왔고, 또 한 사람은 작은 돌멩이 열 개 정도를 주워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노수도사는 다시 두 여인에게 일렀습니다. 그 돌들을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갖다두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그 돌을 어디서 갖고 온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큰 돌을 본시 있던 자리에 금방 두고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도덕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하면서 작은 돌멩이들을 잔뜩 주워왔던 여인은 달랐습니다. 한두 개 정도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기억이 나는데, 그 나머지는 아무리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쩔 수없이 몇 개는 그냥 들고서 되돌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노수도사는 차분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고백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죄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 칠 수가 있습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만이 영적인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만이 은혜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에 대해서 민감할 수 있는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깨끗한 거울에 우리의 얼굴을 비추어보면, 우리의 얼굴에 무엇이 묻어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환하게 드러납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이란 앞절에 있는 대로 율법과 계명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이 우리에게 있어서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막가파 일당이 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두목은 사형, 그 외에는 무기 징역을 비롯해서 모두에게 중형이 내려졌습니다. 그 순간 저들은 욕을 하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잘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법을 어기고서 죄를 지은 사람이 잘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율법은 죄를 드러내줍니다. 죄로 심히 죄되게 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민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문제는 나와 누구를 비교하는가에 있습니다.
예컨대 물질적인 면에서는 꼭 나보다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 10억을 가진 사람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주변에 20억이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20억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부자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주변에는 30억, 100억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적인 면에서는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늘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의 면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아래를 바라보면서 비교합니다. '그래도 내가 그 사람보다는 더 낫지. 더 의롭지!' 그러면서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알고서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합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제는 비교하는 기준이 서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면에서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아래를 바라보면서 기준을 좀 낮게 잡읍시다. 그래야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저토록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저를 이렇게 까지나 축복해 주시다니요!"라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반대로 의의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도토리 키재기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안되어서입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앞쪽에서 문둥이가 한 사람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불러세우고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라도 해주고 싶은데, 왠지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그냥 지나쳤는데?"
"예!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그 문둥병자보다 나은 게 있었는 줄 아느냐? 너는 그 문둥병자보다 더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죄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그대로 받아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그 순간 성 프랜시스는 즉시 그의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그 문둥병자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서 예수님의 사랑을 그에게 전하면서 그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동굴 속에서 하루 온종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기도를 통해서 좀 배우고 싶은 기대를 가지고, 동굴 밖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성 프랜시스는 그날 온종일 단 한 가지 말만 되풀이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 집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절로 달라질 것입니다. 겸손해 집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서지도 못했으면서 선 줄로 착각하지 말고, 되지도 못했으면서 된 줄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늘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악한 마귀의 시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혹시 이 가운데 어린 아이를 잃어버려본 경험이 있으신 분도 있는 줄 압니다. 아이가 갓난 아이때는 잃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 잃어버립니까? 통계적으로 보면 5-8세 사이에 거의 다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들이 그 나이때가 되면 "나도 이제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엄마 손 안잡아도 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겁없이 혼자 마음대로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저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주께서 저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잠시라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주여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제 손 붙들어 주옵소서." 이런 사람은 죄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지도 못했으면서 선 줄로 착각하면서 잘난척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죄에 넘어갑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신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연약합니다.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의 힘으로는 신령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더러운 걸레로 책상을 문질러 보세요. 아무리 문질러도 책상은 계속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만 의지하면 결국은 실패합니다. 쓰러집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러분,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쳤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가식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실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비천한 계집종 앞에서 어이없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을 몰라."
뒤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내가 왜 이랬지?"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그렇게 약합니다.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말고 늘 조심하면서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죄악된 자리에는 아예 가까이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부패한 인간의 육신도 죄악된 자리에 가까이 가면 자기도 모르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악한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아예 흉내조차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만큼 약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돈많은 귀부인이 자기의 마차를 몰 새로운 마부를 고용하기 위해서 광고를 내었습니다. 세 명의 마부가 지원을 했습니다. 부인이 시험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내 마차를 몰다가 한 쪽이 낭떠러지인 가파른 길을 만났다고 가정합시다. 그때 당신은 마차에서 낭떠러지가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면 제 마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겠습니까?"
첫번째 지원자가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벼랑에서 한 30cm정도 여유만 있으면 저는 부인이 타신 마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습니다."
두번째 지원자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5cm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부인께서 절 믿으시고 안심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번째 마부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에는 언제나 부인이 타신 마차를 가능한 절벽 끝에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조심해서 마차를 몰겠습니다."
당연히 세번째 마부가 채용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노련해도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가서는 안될 장소에 가지 맙시다. 봐서는 안될 책은 아예 보지 맙시다. 좋지 못한 친구는 사귀지 맙시다. 친구를 사귀어도 좋은 친구, 믿음의 친구를 사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놓치지 말고 꼭 붙들기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외모보다는 우리의 속마음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우리의 내적인 성결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우리가 죄에 더욱 민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은혜를 받기 전에는 자기의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야말로 율법의 의로는 아무런 흠이 없다고 자고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비로소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도 있었습니다. 음욕도 있었습니다. 탐심도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바로 살인자요, 간음한 자요, 도적질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영적 교만과 위선죄까지 범하고 말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바로 죄인 가운데 괴수요, 가장 큰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내면,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인 중의 단순한 괴수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 괴, 괴, 괴, 괴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밤하늘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별의 반짝임은 더욱더 빛을 발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죄악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이 얼마나 선한 것인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없이 높은 수준임을 더욱더 실감나게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이제 자신의 외적인 죄악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 거하는 죄, 내적인 죄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것을 살피십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 속에 거하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근심하십시다. 바울처럼 내적인 성결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십시다. 겉으로만 거룩한 체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도록 고민하는 자가 되십시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인간의 삶의 수준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세 가지 삶의 수준을 집모양에 비유했습니다.
첫째로, 지하실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체로 지하실은 창고로 사용합니다. 그 속에는 거미줄도 있습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습니다. 이러한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겠습니까? 그저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면서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거실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손님이 오면 거실에 모십니다. 따라서 거실은 대체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잘 꾸며 놓습니다. 이러한 삶은 자연적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속보다는 겉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셋째로, 침실 수준의 삶입니다. 침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거미줄이 있고, 온갖 잡동사니가 있는 지하실과는 다릅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침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느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되는대로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줄 압니다. 아직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수준의 삶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삶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십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나 자신의 겉모양을 꾸미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죄에 민감해 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힘으로는 깨끗해질 수 없음을 알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의지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수준을 더욱 높여서 겉보다는 마음의 성결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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