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강 누가 나를 건져내랴(7:18-25)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스티븐슨(Robert Stevenson, 1850∼1894)이 쓴 소설 가운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킬박사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의학박사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지킬박사의 마음 속에는 숨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이드였습니다. 하이드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야비하고 포악했습니다.
지킬박사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 때문에 자기 속에 숨어있는 본능을 억제하고 착실한 생활만을 해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연구를 계속 한 끝에 자신의 마음 속에 같이 존재하는 선과 악을 떼어내는 약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그 약물을 먹고서 하이드라는 악의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하이드가 되어 마음대로 나쁜 짓을 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부딪힌 소녀를 짓밟고 넘어가기도 하고, 길에서 처음 만난 노신사를 지팡이로 후려쳐 숨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이드가 경찰에 쫓기게 되자 겁이 난 지킬박사는 본래의 자신으로만 남아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숨은 인간 하이드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지킬박사는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 속에도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있어서 끊임없는 갈등이 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우리 속에는 하이드가 있습니다. 이 하이드는 우리 속에 악하고, 음란하고, 야비하며, 추한 생각을 계속 심어줍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러한 양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18∼23절에서 똑같은 고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몇 절만 인용해 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또 2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결국 그는 24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맙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자신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바울과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아직 대면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아직도 로마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로마교인들은 바울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높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참모습을 그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더욱 위대한 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바울이 지킬박사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지킬박사는 자기의 고민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저 오호라의 탄식 속에서 몸부림치며, 그 속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지킬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았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한 가지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지킬박사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고, 반대로 사도 바울은 절망을 극복하고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탄식하고, 애통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면 결국은 지킬박사처럼 파멸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바울처럼 재빨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탄식은 기쁨으로, 절망은 감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오호라의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밝히고, 그것을 입증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에 대한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바울은 자기 속에 하이드라는 또 다른 숨은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혔습니다. 곧 이어 바울은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18절 하반부에서 1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바울의 삶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20절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부패한 육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원인입니다. 그 다음 21∼23에서는 같은 내용을 같은 방식으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자신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자신의 상태를 입증하는 말씀이 22∼23절 상반부에 나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마지막으로 이런 현상의 원인이 23절 하반부에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런 끊임없는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바울은 24절과 같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도 바울이 이러한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치고 이러한 탄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이런 고민과 몸부림은 다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때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성에 살고 있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마음이 고통스러웠으면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눈물만 펑펑 쏟고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이 여인처럼 죄짐을 지지 않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공자도, 석가도, 베드로도, 바울도 다 죄인이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보다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부패한 육신 덩어리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부패한 육체의 소욕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깊은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아주 무서운 형벌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죄인을 살아있는 채로 죽은 시체와 함께 꽁꽁 묶어 버리는 형벌이었습니다. 코와 코를 맞대고 입과 입을 맞대고 무릎과 무릎을 맞대어서 묶어 버립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구역질이 납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굶고 나면 혀로 시체를 핥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시체에서 나오는 독이 스며들어 그 시체와 함께 썩어서 죽도록 만드는 아주 무서운 형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부패한 육신 덩어리에서, 이 썩어 냄새나는 시체에서 누가 나를 풀어주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오호라의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성도라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범했을 때는 오호라의 탄식이 반드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갈등과 가책과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오호라의 탄식이 없는 신앙 생활은 오히려 비정상일 것입니다. 사람은 발이 땅에 닿아야 제대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물 속에서 발이 땅에 닿기 전에는 그저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기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오호라의 탄식이 있어야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오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구나!" 이러한 안타까운 마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이 시간 불일 듯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고 "오호라!" 하면서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탄식의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바울이 오호라의 자리에만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날마다 그저 울다가 끝나는 신앙 생활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죄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하다가도 즉시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1850년 1월 6일 주일이었습니다.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의 교통이 마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도시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15살 짜리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주일이었지만 심한 눈보라에 교통이 마비되었기에, 소년은 자기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교회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보니 그 교회 목사님도 눈보라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어느 평신도가 강단에서 말씀을 봉독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되지 않는 성도들이었지만 강단에 선 성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45:22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평신도였기에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설교를 해본 경험도 많지 않기에 떠듬떠듬했습니다. 그는 그저 본문 말씀만 자꾸 반복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름 없는 성도의 반복적인 외침에 그 소년은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가?"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설교자는 그 소년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당신은 몹시도 피곤해 보입니다. 젊은이여, 처절하게 살다가 처절하게 죽지 않기를 바랍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그때 그 한 마디의 외침은 그 소년의 잠자던 속사람을 완전히 깨워주었습니다. 그는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일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이었습니다.
스펄젼은 뒤에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때의 그 말이 계기가 되어 나의 속사람은 비로소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를 덮고 있던 모든 구름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를 뒤덮고 있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며 나는 내 생애에 처음으로 의의 태양을 보았다."
스펄젼은 이날 비로소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거듭나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에게 터져 나오는 감격스러운 외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오호라의 탄식이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를 한 번 지은 사람도 용서받고, 죄를 백 번 지은 사람도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다가 집까지 사기를 당해서 잃어버렸습니다. 목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심방을 가셔서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그 권사님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남편을 잃고도 사는데 그까짓 집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내 아들,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준 이 판국에 인간의 죄를 따져서 무엇을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죄 많은 인간일지라도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으시고 다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고 그저 오호라의 탄식 속에 머물며 죄책감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비록 죄인 중의 괴수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의 자리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은 죄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면 우리는 황송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자녀노릇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는 탄식 가운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그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머슴의 하나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여봐라. 어서 살진 소를 잡아라. 비단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라."
이때 아들은 어떻게 해야될 것 같습니까?
"아버지,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몹쓸 놈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밭에서 일이나 하는 머슴으로 살겠습니다."
계속해서 사양하며 사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얄팍한 자존심입니다. 거짓된 겸손입니다. 교만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에 관계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비록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아들 노릇을 정말 잘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참된 겸손이요,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죄책감에 떨며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과 감격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2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늘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도 절로 오호라의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감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정죄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다시금 우리의 삶을 새롭게 결단하는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 입각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오호라의 탄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러함으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의 자리로 즉시 나가야 합니다. 오늘 이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것에만 얽매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 뒤에 담대하게 서서 복음을 선포함으로 3천명을 회개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에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다가 혼이 난 적 있었습니다. 만일 요나가 두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할 때 전에 실패한 것만 생각하고 용기를 잃었다면 그가 어떻게 니느웨성을 회개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롬8:1을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하심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에 짓는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로부터도 우리는 이미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롬6:14의 말씀처럼 이제는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아울러 고후6:1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까?
우리가 짓는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굵은 못을 하나 더 박아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깊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기를 바랍니다. 지나간 날 동안 세상과 벗하여 지내던 과거의 모든 잘못을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고 이제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겠다는 거룩한 결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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