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하워드 헨드릭스(Howard G. Hendrix)의 ‘사람을 세우는 사람(Standing Together Impacting Your Generation)’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앙의 확신을 가진 대학생이 물리학 교수와 정면대결을 벌인 실제 이야기입니다. 수업 첫 시간에 교수가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초자연이라는 괴상한 구식관념들을 학교에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 그것을 여러분의 머리에서 끄집어 내주겠습니다.”분필을 치켜들면서 말합니다.“물리학은 내가 이 분필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깨진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떠한 신에 대한 기도로도 이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분필을 떨어뜨렸고 분필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납득이 가는 논리 같았습니다. 한 학기 내내 계속해서 교수는 분필 시범을 보였습니다. 마지막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동안 납득이 되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이 과학보다 위대하다고 하는 낡은 관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신앙을 가진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합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그럼 자네는 내가 분필을 땅에 떨어뜨릴 때 자네의 기도로 안 부러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학생은 대답하자마자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주시옵소서. 분필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 부러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는 교수의 기분을 완전히 잡쳐놓았습니다. “그 바보스런 짓을 멈추게” 그리고 화를 내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길게 그리고 신랄하게 비난하며 욕하던 도중에 갑자기 분필 들린 손이 올라갔다가 분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놓친 분필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교수의 양복바지 접어 올린 단 위에 떨어지더니 신발위로 떨어졌다가 또르르 바닥위로 굴러 내렸습니다. 분필은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강의실에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물리학 교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학생은 빙그레 웃으며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M.바운즈(Edward McKendree Bounds)의 말입니다. “구체적인 기도는 구체적인 응답을 받고, 모호한 기도는 모호하게 응답 받는다.” 명확하게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지상사역을 마감하시는 시점에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기도문입니다. 동시에 성도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그런데 제자들을 위해 빈다고만 하시지 않고, 그들의 말을 인하여 믿는 사람도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의 전도로 믿게 될 사람들까지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믿는 자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주라는 사실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마귀가 역사하며 죄가 널려져 있습니다. 인생을 파멸시키는 유혹과 재앙과 환란이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범죄와 죽음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 제자들이 살고 있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세상 속에서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비옵는 기도’의 제목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악에서 보전되기를 프랑스의 화가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초년에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거의 누드 형상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창가에서 밀레의 그림을 가지고 젊은이들이 음담패설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은 밀레는 그림의 방향을 바꿀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나체 그림이 호평을 받고 있어 생활하기에 풍족했지만 농부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굶주림을 의미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밀레의 결심을 찬성하였으며 결국 누드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농부를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굶주림만으로 생각되었던 농부의 그림이 그로 하여금 도리어 불멸의 명성을 얻게 하였습니다. 밀레는 ‘농부의 화가’로 알려졌으며 유명한 그림으로 ‘씨 뿌리는 사람’ ‘양치는 사람들’ ‘이삭 줍는 사람’ ‘죽음과 나무 자르는 사람’과 ‘만종’이 있습니다. 특히 ‘만종’은 세계 미술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밀레의 마음이 깨끗하였기에 그러한 심성에서 ‘만종’이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하여 악으로부터 신앙을 지키며 보전할 때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날 시간이 임박해지자 제자들이 당할 시련과 고난을 염려하며 보전을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악’ 은 ‘악한 자, 악마’ 로 번역됩니다. 즉 우리가 싸워야 실체인 마귀를 뜻합니다. 악의 배후에는 항상 사탄이 존재합니다. 사단은 악한 영들을 부리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악의 환경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보전해야 될 것은 믿음입니다. 죄로부터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매 순간 예수의 이름으로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악한 죄를 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진 이유는 죄악 때문입니다. 죄는 불행의 근원이며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악에서 보전되기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번영이 아니라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악으로부터 영혼을 보전하기 위한 예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우리도 믿음을 보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로 진리로 거룩하기를 중세시대에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세에 회심하였습니다. 군인으로 생활하다가 제대 후에 부잣집 관리집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1666년, 55세가 되던 해 파리의 카르멜 수도회에 평신도 수도사로 들어갔습니다. 정식 수도사들의 밥을 지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주방장이었습니다. 밥 짓는 부엌을 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수도회에 있는 동안 누구보다도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주방에서 요리하며 보내는 삶에 만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다리가 불편함에도 신발 수선의 일을 맡아서 수도회 형제들을 위해 2백 켤레가 넘는 샌들을 만들고 기웠습니다. 그의 위대한 점은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헌신적으로 섬기는 일에서 행복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주도적으로 거룩한 변화를 일으켰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수도원 원장을 뽑는데 선임 수도사들 중에서 원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평신도 수도사 로렌스가 원장에 뽑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훗날 브라더 로렌스의 고백입니다. “내 생애 가장 중요한 발견은 아무리 초라한 오두막집에 거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그곳을 지상 최고의 궁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싸움을 피 흘리기까지 전심을 다해 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거룩하기를 힘썼던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긴 거룩한 삶의 자취를 따르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게 될 것을 염려하며 거룩을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에 의하여 깨끗함을 받았지만 진리 안에서 깨끗하게 된 신분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토록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거룩이 없으면 보내신 이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거듭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룩하게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진리가 거룩하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갈 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구별된 삶을 살며 헌신된 제자가 됩니다. 거룩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기에 거룩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의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거룩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셋째로 온전히 하나 되기를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다섯 명의 수도사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모두 금식을 하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죽을 훔쳐 먹은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죽이 없어진 것을 보고 누구 짓이냐며 열을 올렸습니다. “이런 괘씸한 자가 있나! 금식기간에 죽을 먹다니!”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Assisi)는 “애들아 죽을 가져오너라. 같이 먹자!”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의아해하며 “금식중인데 죽을 먹다니요? 그래도 됩니까?” “죽 먹은 사람 정죄하다가 있던 은혜도 다 없어지겠다. 모두 함께 죽을 먹고 하나가 되자!” 얼마나 높은 영성입니까? 형제의 잘못을 모두의 잘못으로 묶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하나됨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23절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 예수는 제자들의 분열을 염려하며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평소에 제자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온전함으로 이루라’는 것은 하나가 되기까지 온전히 장성하라는 뜻입니다. 또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하나 되지 않고는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 되어야 강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형통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불화가 없습니다. 하나가 되면 주 안에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 되면 우리의 하나 됨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 주 안에 있지 않으며,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은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온전히 하나됨을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뜻은 ‘구습(舊習)을 고수하여 변통할 줄 모른다’ 인데 중국 사상가 한비자(韓非子)가 사용한 말입니다. 그 유래는 이러합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송나라에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밭을 일구고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숲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밭 한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토끼를 얻은 농부는 ‘토끼는 이렇게 죽는가 보다’ 생각하고 힘들게 농사짓는 것보다 죽은 토끼를 얻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농부는 다음 날부터 농사를 팽개치고 나무 옆에 앉아서 또 다른 토끼가 나무에 부딪쳐 죽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매일 나무에 부딪혀 죽습니까? 결국 농부는 더 이상 토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사는 농사대로 망치고 송나라에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할 것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모습은 어떠합니까? 신앙은 특별한 사건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삶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신앙적 삶을 사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하신 기도대로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악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이 보전되어야 합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대로 신앙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른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