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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희망 만들기

희망 만들기
약1:2-4
(2000/7/23)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
교우 몇 분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리 현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한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 공동의 선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어렵게 합의에 이르러도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깃장을 놓거나, 위반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온 질문입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우리의 민족성을 들먹입니다. 그러면서 외국의 예를 듭니다. 미국을 가보니 어떻고, 구라파를 가보니 어떻고, 일본을 가보니 어떻더라.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이렇게 납니다. "우린 안 돼." 참 자존심 상하는 결론입니다. 정말 우리는 안 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 '이거 참 큰일이야' 하고 말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다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답도 있을 겁니다. 교우 한 분이 제게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 있다면 어디에 있지요?" 하고 물은 것은 해보나마나인 질문인 줄 알면서 그저 물은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그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다고요.

하나는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 왕이나, 맹자가 말한 왕도정치를 실현할 현자가 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존경하고, 흠모할만한 사람, 힘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그를 바라보면서 시민들 모두의 마음이 순후(醇厚)해지는 그런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단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현실은 그런 이들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우리들이잖아요?

두 번째는 더뎌 보이지만 꾸준히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서, 그 희망이 조금씩 커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결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어떤 결과를 보고 싶어해요. 현대 문화의 특색은 '기다림'의 요소를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것은 돈만 있으면 거의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패스트 푸드'로 점심을 해결하고, 고속도로를 타고 질주하고, 컴퓨터 통신망과 휴대폰을 통해 세상을 헤집고 다닙니다. 이것이 진보인가요? 나는 사람의 성장이 동반되지 않은 문명의 진보는 진보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삶이 불안정해 보이는 까닭은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뜸 들이고, 숙성시키는 과정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속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역사의 걸음은 느립니다. 물론 때가 이르면 그보다 빠른 것이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싶은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닦아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의 크기를 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작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옳게 시작한다면 그 일의 결과에 우리가 연연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못 다 이루어도 하나님이 완성하실 테니까요.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 말라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글귀를 읽었습니다. 사티쉬 쿠마르라는 평화 운동가가 한 말입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까? 벽돌 한 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한 장을 놓았던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도보여행을 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인생을 살아가거나 모든 긴 여정들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면 '굉장하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만,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번 붓질을 하고 그 다음에 또 한번의 붓질을 한 겁니다. 매번 여기에는 어떤 색을 넣을 것인지, 어떤 질감을 나타낼 것인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일들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일을 통해 시작됩니다. 갈릴리 변방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이 전 세계를 움직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거리에서 최일도 목사님이 불쌍한 행려병자를 위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오늘의 다일공동체로 성장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하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선각자라 합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길은 무엇입니까? 본래 길이 없던 곳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감으로 생겨난 것입니다(魯迅). 초대 교회 사람들이 '그 길의 사람'이라고 불리운 것은 참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 예수님이 온 몸을 바쳐 열어놓으신 그 길을 걷고 계십니까? 너무 안이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선생은 아주 힘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말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대로 살려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불의한 세상의 관행에 따라 처신하기를 거부할 때 여러분은 고지식한 사람, 혹은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따돌림' 받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법보다는 세상의 법을 추종합니다. 믿음의 시험에 빠질 일도 별로 없습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데 무슨 시험이 있겠습니까? 당연하게도 그런 이들의 믿음은 자랄 수 없습니다. 생명의 길이란 삼각형의 꼭지점을 향해 가듯 항상 올라가야 하는 길인데, 쉽고 편한 길로 가다보니 영혼의 내리막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험, 기쁨에 이르는 기초
야고보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시험 당하는 것을 오히려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기초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인가요? 생명의 근원과의 일치에서 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거나,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옵니다. 나 같은 미물이 우주의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느끼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을 받고 놓여났을 때 기뻐했습니다. 사지에서 풀려났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의회에서 물러 나왔다."(행5:41)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보고 기독교적 메조히즘이라고 말해요. 고통받고, 모욕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몰라요. 그 기쁨을요.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겪거든 실망하지 마세요. 속상해 하지 마세요. 오히려 기뻐하세요. 그것을 기뻐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겁니다.

시련, 인내의 훈련장
믿음의 길을 걷다가 시련을 겪는 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익이 있어요. 시련은 우리를 인내로 이끌어 갑니다. 인내란 이를 악물고 참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참 대단해요. 사우나에 들어가서 오래 견디는 사람도 대단해요. 고통을 견디는 환자들의 인내도 대단해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야고보가 말하는 인내란 근원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는 힘이에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힘을 가리키는 거예요. 시련은 나약한 이들에게는 절망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내의 훈련장이에요.

선한 일을 하다가 쉽게 낙심하는 이들을 볼 때가 많아요. 결실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선을 행하려면 '지속에의 열정'이 있어야 해요. 한 두 번 해보고 그만 두면 무슨 소용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한 두 번 선을 행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 지속하기는 매우 어려워요. 간혹 설거지를 해보면 재미있더군요. 하지만 저보고 날마다 하라고 하면 문제는 심각해져요. 저는 아기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아기만 보면 안고 돌아다녀요. 하지만 잠깐뿐이에요. 종일 아기를 보라고 하면 저는 아마 도망갈 거예요. 지속에의 열정이 없는 것은 거품이에요. 여러분, 시련을 많이 겪으면 이런 '지속에의 열정'이 생겨요. 대장간에 가보셨지요? 쇠를 풀무불에 달구고는 그것을 모루 위에 놓고 해머로 치지요. 그리고는 물 속에 푹 담궈요. 쇠는 물과 불 사이를 오가면서 단단한 쇠로 변해갑니다. 아, 매 맺는 과정도 있네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어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

야고보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

시련을 통해 인내의 사람이 되면, 그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인내는 결국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내가 체질이 된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여유롭습니다. 웬만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꿈을 가로막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꾸기를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주님은 포기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라고 부르셨습니다. 큰 일을 할 수 없다면, 아주 작은 일부터라도 시작하십시오. 교통질서를 지키는 일, 공공 장소에서 남을 배려하는 일, 부드러운 말과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일, 골목길을 쓰는 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일, 잘못된 일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참 많습니다. 작지만 소중한 이 일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희망 만들기입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폭포를 이루듯이,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만든 작은 희망들이 모일 때 세상의 어둠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희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희망을 만드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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