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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멍에가 무거울 때

멍에가 무거울 때
애3:25-33
(2000/7/30)

묵자와 공수반
춘추전국 시대의 현인 묵자를 아시지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도 '사랑'과 '이타주의'를 설파하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의 일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때는 초나라와 월나라가 장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입니다. 강의 상류에 있었던 초나라는 물길을 따라 내려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기세가 대단했겠지요. 하지만 퇴각할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들고 어려웠던 겁니다. 그에 비해 월나라는 전쟁을 벌일 때는 고생을 했지만 퇴각할 때는 재빨리 도망칠 수 있어서 초나라에 비해 우세했습니다. 초나라는 묘안이 없을까 하다가 아주 유명한 기술자인 공수반이라는 사람을 청합니다.

그는 초나라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도구를 두 개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잡아당기는 갈고리 '鉤'였고, 다른 하나는 밀어내는 기구인 '拒'였습니다. 적이 탄 병선이 후퇴하려고 하면 갈고리를 사용해 가지 못하게 잡아당기고, 적의 병선이 전진해 오려고 하면 밀어내는 기구를 이용해 앞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나라는 '구'와 '거' 덕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공수반은 자신의 발명품들에 대해서 무척 흐뭇해했습니다. 그때 마침 일이 있어서 묵자가 초나라에 왔는데, 동향인인 공수반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삼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묵자는 자기가 만든 '구'와 '거'는 공수반이 만든 것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말했어요.

"형님,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만든 '鉤拒'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만든 '鉤'이고 공손함으로 만든 '拒'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의 갈고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 친해질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공손함으로 만들어진 '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친해질 수가 없고, 마침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되려면 서로 공손하게 대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Yuan Ke,『중국신화전설 2』, p. 174-175)

묵자의 '구거'는 상생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갈고리 '구'와 밀어내는 기구 '거'를 가지고 삽니다. 어떤 이들은 갈고리를 사용해 남을 해치거나, '거'를 가지고 남을 배척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갈고리를 사용해 사랑의 관계를 만들거나,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거'를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그 두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 혹은 우리의 말투, 표정, 몸가짐을 통해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밀어내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합니다. 잡아당기든 밀어내든 그 동기가 사랑이라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해를 입히기 위한 것이라면 불행입니다.

곤고한 인생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갈고리를 가지고 잡아당기기도 하시지만, 밀어내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애가를 지었습니다. 애가는 참 눈물겹습니다. 5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기억하는 분들은 애가를 읽으면서 그 날의 참혹함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겪은 이들의 삶은 황폐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 삶의 든든한 보장이셨던 하나님조차도 그들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사건건 개입하셔서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도움을 구하나 기도를 물리치심
·다듬은 돌로 길을 막으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심
·과녁으로 삼아 살을 쏘심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심
마음 속에 원망의 태풍이 일어나 쉽게 잠잠해지질 않습니다. 하나님도 이제는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드릴 힘도 없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진이 다 빠져 더 이상 원망할 힘조차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이 한 마디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3:18)

기억의 회복
지쳐 원망조차 할 수 없을 때,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아 잠잠해졌을 때, 바로 그 때 예언자는 마음 속 한 켠에 떠오르는 빛을 봅니다. 인생의 어둔 밤을 밝히는 빛처럼, 절망속에 스며든 희망처럼 나타나 확고하게 그를 두르는 빛, 그것은 자비하신 하나님, 긍휼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지금까지 신실함을 지켜오신 하나님, 그분이 살아계셨던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 구하는 자와 찾는 자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시는 주님을 떠올리면서 그는 입을 다뭅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 속에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하시는 일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홍해 바다를 앞에 두고 두려워 떠는 백성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

악인이 행복을 누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의 시인은 다짐하듯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7-8)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선택하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기다림입니다. 이제 예언자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희망을 회복했습니다. 항거하고, 원망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던 자아가 잠잠해지자, 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제 기다립니다. 구하고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온전히 엎드립니다.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더는 어찌할 수 없기에 될대로 되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radical optimism).

시련, 하나님께 이르는 우회로
마음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바로 서게 되자, 그는 오히려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겪는 시련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우회로인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가 영생에 이르는 우회로였던 것처럼 시련은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리도록 우리를 이끌어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교훈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찌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3:27-29)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 살 맛을 잃었다고, 희망을 잃었다고 말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의 삶 속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회색빛 고난은 돌연 총천연색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홀로 지고 가기 힘겨운 멍에를 메고 있습니까? 가정 문제, 직장 문제, 경제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장래 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의 작은 어깨로 메고 가기 어려운 짐들이 우리에게 얹혀져 있습니다.


멍에를 메고 길을 가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런 짐을 메워주신 분이 주님이시라구요. 정말일까요? 주님이, 자비하신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그 짐을 메워주셨다구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짊어지워진 짐을 벗어버리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울면서라도, 비틀거리면서라도 그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벗어버리고 가면 시원할 것 같지만, 그것이 주님이 메워주신 짐이라면 메고 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짐이라면 감당할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내게 짐스러운 일들, 혹은 사람을 인하여 원망하지 마십시오. 입을 티끌에 대십시오.

주님이 주신 짐을 지고 가다가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아도 잠잠하십시오. 하나님은 모욕과 고통을 통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를 벌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바벨론을 몽둥이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면 달게 받아야지요. 우리가 우리의 죄와 참상을 깨닫고 잠잠할 때 주님이 우리의 변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주님이 우리를 안고 가십니다. 이 대목에서 예언자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말을 들려줍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3).

아멘! 주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우리의 고생이 아닙니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고생을 모른 척 외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에게 근심과 고생을 허락하시는 까닭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인생의 짐이 무거워 허덕이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고 있는 멍에가 목을 짓눌러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에 이른 분들이 계십니까? 알아 두십시오. 고생과 고통,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다 잊어도 이 한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拒')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 사랑의 갈고리('鉤')로 우리를 당신에게 붙들어매고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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