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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그대에게로 가는 길

그대에게로 가는 길
창 45:1-8
(2000/8/6)

칠월 칠석

오늘은 칠월 칠석이고 내일은 입추입니다. 말복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미 가을은 우리 한복판에 우뚝 서있습니다. 음력 7월이면 아직 노염(老炎)은 남아 있지만 여름의 기가 꺾여 갈 때입니다. 북두칠성은 한쪽으로 기울고 비단결 같은 은하수는 쏟아질 듯 화려합니다. 그 동쪽에는 수줍은 듯 희미하게 비치는 직녀성(織女星)이 있고, 서쪽에는 남성적인 눈이 강렬하게 빛나는 견우성(牽牛星)이 있어 서로 마주보며 정겨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늘에서 베를 짜던 옥황상제의 딸 직녀는 소치는 목동 견우를 보자 첫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옥황상제를 졸라 결혼에 성공했어요. 둘은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한 순간도 떨어져있기 싫어했어요. 그러자 문제가 생겼어요. 직녀가 옷감을 짜지 않자 하늘나라에서는 옷감이 부족하게 되었고, 견우가 소와 양을 돌보지 않자 짐승들은 바짝 마르고, 지상에서도 역시 소와 양이 마르고 땅은 황폐하게 되었어요. 화가 난 옥황상제는 급기야 그들을 동서로 갈라놓고 일년에 한번씩만 만나도록 했어요. 그게 칠월 칠석이에요. 그리움 속에 그날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날이 왔지만 그들은 만날 수 없었어요. 그들 사이에 은하수가 길게 놓여 있었던 거지요. 사정을 딱하게 여긴 까마귀와 까치들이 몸을 이어 긴 다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 다리가 바로 오작교(烏鵲橋)예요. 오작교 중간 쯤에서 만난 그 부부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그들이 흘린 눈물은 비가 되어 땅에 내린대요. 칠석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옛 사람들의 신화적 상상력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다가 일년에 한번씩 만나는 직녀와 견우의 사랑은 참 눈물겹습니다.

꿈은 이루어지게 마련

홍세화라는 분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사시는 분인데 이분은 지난 79년에 도망치듯 파리로 간 후에 낯선 땅의 이방인으로 살다가 최근에야 이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그분이 쓰신 책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가슴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아직은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유목민처럼 떠돌던 어느 날, 그는 파리 북역에 있었습니다. 모스크바행 열차 시각표를 넋놓고 바라보다가, 그는 문득 모스크바에선 틀림없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철길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있었는데도 무슨 대단하고 새로운 사실이나 발견한 양 그는 감동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내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달리다가 중국와 러시아의 국경인 아무르 강 북쪽을 돌아 연해주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고, 거기에 북한 땅 나진 선봉을 거쳐 반도의 끝 부산까지 이르는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렸습니다. 그것은 또한 몽고의 수도 울란바토르와 중국의 북경을 지나 만주벌을 타고 달려 마침내 신의주에 이르고 신의주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이르는 꿈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대륙에 이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했습니다. 저도 홍세화님처럼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을 기차를 타고 달리는 꿈을 꾸면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나 만주 철도를 타고 달리던 저의 상상력은 언제나 두만강과 압록강에서 멈추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꿈이 실현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홍세화 님이 가슴 속에 품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소중한 역사적 상상력이 가시화되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경의선 철길을 잇기로 했다는 소식은 너무나 반가운 사건입니다. 경의선이 복구되면 우리가 얻게 될 경제적 이익이 많다고 합니다. 물류 비용이 절감되고, 시간도 절약된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의 경제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의선 철도가 복원되리라는 소식을 듣고 제가 설렜던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저는 혼잣소리로 말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게 마련이구나.”

문익환 목사님의 시 가운데 「꿈을 비는 마음」의 첫 연을 들어보십시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 마는
조개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문익환 목사님의 꿈은 통일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달라고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 때문에 그는 미치광이, 반역자, 소영웅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몇 해 전 그가 꾸었던 통일의 꿈은 조금씩 성취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내일은 항상 꿈꾸는 이들의 상처와 희생을 통해 열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막혀있던 것이 열리는 것, 나뉘었던 것이 하나 되는 것, 그것은 언제나 꿈꾸는 이들을 통해 열립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는 것이라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견우와 직녀를 위해 오작교를 만들었던 까마귀와 까치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나뉘어 있는 것들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다리가 되셨습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처럼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상처, 삶을 견디게 하는 힘
세상에 나뉘었던 것이 하나 되는 것보다 더 기쁜 게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요셉과 그의 형들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사 애굽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온갖 고생 끝에 마침내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성경은 그 동안 요셉이 겪었던 신산스런 세월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겪은 고생을 말입니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세월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였을 겁니다. 요셉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기를 추스려가면서 악착스럽게 살았던 것은 자기를 없애려던 형들의 계획이 성취되게 할 수는 없다는 오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은 과연 성공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음 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한이 풀렸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왔을 때, 형들을 알아본 그가 한 행동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모르는체 하면서 아주 엄한 목소리로 그들을 몰아 세웁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정탐꾼이 아니냐?”

사실 가족관계만큼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가 어디 있겠어요?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미워하는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요셉은 아직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가족인가 봅니다. 요셉은 전전긍긍 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형제들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껴요. 그리고 그들이 요셉을 팔아먹었던 일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릴 때 요셉은 혼자 울어요. 세월이 많이 간 거예요. 미움과 질투의 날을 세우고 있었던 형들도 많이 늙었어요. 그리고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 분명해요. 요셉 자신도 형들을 향해 품고 있던 복수의 감정이 점점 흐려져가는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요셉은 확인하고 싶었어요. 형들이 정말 옛날의 그 사람들이 아닌지, 형들이 자기를 판 일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지, 늙으신 어버지와 어린 동생 베냐민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진정인지를 말이에요.

생은 문제가 아니라 신비
그 모든 과정을 다 거치는 동안 요셉의 마음은 치유되었어요. 더 이상 시험도 필요없었고, 짐짓 그들을 닦아세울 필요도 없었어요. 요셉은 형제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자기가 요셉이라고 밝혀요. 그리고 울음을 터뜨려요. 성경은 요셉이 방성대곡했다고 합니다. 그냥 우는 거예요.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었던 거지요. 생각해 보세요. 수십 년 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것이 한꺼번에 눈물로 변해 터져나오니, 누군들 견딜 수 있겠어요? 형들은 잠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요. 그렇지만 곧 사태를 깨닫고는 두려움을 느끼지요. 자기들이 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가까이 오게 해서 자기를 보게 해요. 그러고는 말하지요.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요셉이 먼저 형제들을 향해 마음을 열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 풀리지 않던 생의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리는 것을 알았어요.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판 것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살다보면 부조리한 일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왜 그런 일이 하필이면 내게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분노합니다. 때로는 절망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나중에 가봐야 비로소 그 일이 우리 생 속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풀어야 할 과제라기보다는,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야 할 신비”인 것입니다. 요셉의 가슴 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을 때, 그는 비로소 모든 부조리함을 넘어서있는 고난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생의 기근: 은총의 계기
저는 요셉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용서의 마음, 화해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애굽과 가나안 땅에 나뉘어 살았던 형제들이 만나 다시 가족이 되도록 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기근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기근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드러내는 계기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편안한 일상에 길들여졌을 때 하나님의 음성에 둔감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의 기근을 만나 방황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 속에 은총의 샘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기근이 없었다면 요셉은 마음 속에 한을 품고 살았을 것이고, 형제들은 동생을 판 죄책을 가슴에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근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큰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아름답게 귀결되는 생을 그들은 함께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다 우리 뜻대로 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힘겹고, 눈물겹고, 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유익을 주실는지 기대하십시오. 모든 일이 다 나의 유익을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풍성해질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 좌절과 눈물을 가지고도 뭔가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나가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혹시 마음 속의 응어리 때문에 누군가와 등지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꾸만 하나 되는 꿈을 꾸십시오. 화해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자꾸만 지우십시오. 우리는 도저히 이어질 것 같지 않은 경원선이 이어질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접했습니다. 역사는 꿈꾸는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것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의 꿈을 여러분의 꿈으로 삼기 위해 마음을 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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