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7. 오직 믿음으로 히브리서10:35-11:6
(종교개혁 496주년)
I. 오직
포스트 모던 시대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가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던” 사사 시대의 부활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도 합니다.
-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낭만.
- 남이 교통신호 위반하면 파렴치, 내가 하면 급한 사정 때문.
- 남이 새치기 하면 얌체, 내가 새치기 하면 운전 실력.
- 남이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얘기하면 소음, 내가 하면 유쾌한 대화.
- 며느리가 부부싸움하면 여자가 참아야 한다.
딸이 하면 아무리 남편이라도 따질 것은 따져라.
- 남이 강한 자기주장을 하면 고집불통, 내가 하면 뚜렷한 성품.
언제나 내 생각이 진리이고 내게 유익한 것이 선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다 흔들거리고 비틀거려도 인간이 구원얻는 진리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성경적 기준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진리가 상대적 가치로 전락할 때 분명한 성경적 가치와 기준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종교개혁운동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이라는 절대 진리를 외친 운동이었습니다.
금년 우리는 종교개혁 486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시 부패한 천주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과 신부들의 말을 높였고 교황이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행세하는가 하면 인간 마리아가 구세주 예수님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성당에서는 면죄부를 판매하였고 지옥에 간 가족들을 천국으로 옮겨줄 수 있다고 회중들을 속였습니다. 왜요? 교황이 천국 열쇠를 쥐고 있다고 저들은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세계 도처에서 “아니다. 천국가는 열쇠는 교황이나 신부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가는 열쇠는 믿음이다!” 라고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교회가 새로워지자는 운동입니다. 오늘도 교회가 이대로는 아니되겠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염려섞인 외침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말하는 교회부터 구원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혁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고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될 운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혁된 교회가 끊임없이 자기 개혁을 해 가야 진정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달라져야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건물이 달라지자는 얘기겠습니까? 벽돌 색깔을 다르게 칠하자는 얘기겠습니까? 바로 이 안에 있는 사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져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히브리서 10장 오늘 본문 38절, 로마서 1장 17절, 하박국 2장 4절 말씀에 근거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only, Sola,
이 “오직”이라는 단어 하나에 종교개혁자들은 생명을 걸었습니다.
II. 루터
마틴 루터가 웰매스 재판정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웰매스 재판정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황제를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루터쯤이야 아침이슬처럼 날려버릴 수 있는 그런 곳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외쳤습니다. “웰매스의 재판정을 덮고 있는 수 만장의 기와장이 악마로 변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증언해 주신 복음을 변경시킬 수가 없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이 진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흔쾌히 나아가 아침이슬처럼 죽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직”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는 원래 법과대학을 나왔습니다. 법조계의 꿈을 안고 졸업반이 되었는데 그의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습니다. 죽어가는 친구의 손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 앞에 외쳤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시면 제가 수도원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루터는 자기 죄 때문에 한없는 고민을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를 괴롭히고 있는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를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해 보았습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품었습니다. 질투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하루에도 스무번 이상씩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는 날도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신부를 괴롭히니까 그 신부가 “루터야, 죄를 모아 가지고 한번에 오면 안되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로마를 찾아가 속죄 계단을 기어올랐습니다. 이 계단은 콘스탄틴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부탁을 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피 흘리며 올라갔던 스물 여덟 계단의 돌을 뜯어다가 만든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고 무릎에 피가 나서 이 계단에 피가 묻게 되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수 없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천년동안 이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돌이 움푹움푹 패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오백여년 전에 마틴 루터는 이 계단을 기어오르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고 종일 그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무릎이 찢겨지고 터져서 스물여덟 계단에 피가 벌겋게 묻었더랍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는 평안과 믿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강력한 말씀을 받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다. 이 계단은 구원을 얻는 사닥다리가 될 수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① 인간의 착한 행위를 통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오직 은혜. Sola Gratia.
②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이 천국가는 열쇠, 사닥다리가 될 수 있다.
오직 믿음. Sola Filde.
③ 교황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그리고 로마 천주교의 틀린점 95개 조항을 공개 질의서로 만들어 비텐베르그 성당에 내 겁니다. 여기서 교회는 성경의 교회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 개혁된 기독교회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복음적인 교회-초대교회가 있었고,
그것이 천주교회로 중세까지 이어오다가 그것이 두 개로 갈라져서
하나는 구교가 되고 하나는 개신교가 되었다」고.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웠던 최초의 교회, 복음적인 교회-초대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모습을 잃어버린 한 교회가 천주교회로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에 바른 복음, 바른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세웠던 최초의 교회, 복음적인 교회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교회의 맥을 이어가는 기독교회를 만들어 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기독교를 개신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교회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가 아니고 초대교회로부터 예수님이 세웠던 그 교회로부터 복음을 이어가는 교회가 기독교회요 한소망교회라고 믿는 것입니다.
III. 믿음
오직 믿음으로! 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는 다는 겁니까? 믿음의 대상이 문제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믿음이라는 말이 232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에서 25번이나 반복적으로 믿음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믿음 장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이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선행이나 자신의 자격이나 자신의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얻는 길은 이것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태양이 발하는 에너지를 1초동안만 정확하게 축적할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 있는 70억 인구가 100년을 쓰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다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 한방울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만인간을 구원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한방울이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다른 처방이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까? 그래서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좋은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얼마나 간사합니까? 구원 얻는 길이 너무 쉬우니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다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간다”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뭔가를 보태는 겁니다. 선행도 조금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믿음생활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뭔가를 보태고 싶은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50%는 믿음으로 되지만 50%는 선행이 따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그렇듯 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99%는 하나님의 은혜요 1%는 내 선행이 아닙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99%는 믿어야 되고 1%는 내 선행이 보태져야 하는게 아닙니다. 100%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인간은 자신이 뭔가를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가증스러운 현대인들에게 비위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그 현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들의 논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구원 얻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늘 문입니다. 여기엔 제한이 없습니다. 국경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의 자리에서 내가 내려앉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의 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그 분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분이 당신을 만나 주셨음을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 수 있을 때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얻은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은혜입니다.
100% 은혜입니다. 100% 믿음 외에 다른 길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몇날 며칠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너무도 배가 고팠습니다. 저만큼 원두막이 보였습니다. 원두막에 갔더니 마침 주인이 없습니다. 원두막에 궁둥이를 걸치고 주인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 주인 오면 돈 주면 되지 생각하고 토마토를 하나 뚝 따서 슥슥 문질러 먹었습니다. 그리고 참외 하나, 수박 퍽 쪼개서 퍼먹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주인이 나타나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내려왔지요. 본의 아니게 도둑놈이 된 겁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교회에서 은혜스럽게 설교를 했겠죠. 그리고 교인들을 다 보내고 묵상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네 눈이 범죄하거든 눈알을 빼 버려라” “하나님 제 이놈의 눈이 토마토 보니 주인은 없는데 그만 먹고 싶어서 먹었습니다. 수박도 쪼개서 먹었습니다. 이 눈을 빼야 할 까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종아 눈알만 뺄 일이 아니다. 네 손이 수박 깼으니까 손도 잘라라” “하나님 손 자르면 어떡합니까?” “아니다. 네 발이 뚜벅 뚜벅 남의 수박 밭에 들어갔으니까 발도 잘라야 할게다” “하나님 발 자르면 어떡합니까?” “아니다. 그 수박이 네 목을 타고 내려갔으니까 목도 잘라라. 아니다. 네가 먹은 수박이 온 핏속에 지금 흐르고 있으니 피를 다 뽑아라” “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이군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금식기도하고 은혜받은 것이 아니고
남의 수박 따먹고 은혜 받았습니다.
♪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 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257장)
IV.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을 기록하며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문장의 주어 동사는 “의인은 살리라” 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하는 것은 수식어죠. 이것을 형용사 형으로 볼 것인가? 부사형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부사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살리라를 꾸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 먹고 산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식어를 형용사형으로 보면 의인을 꾸미는 단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이렇게 번역됩니다.
신구약 사상으로 보아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경가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즉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죽는다는 겁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 자기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격과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종교, 죽는다.
사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이 말은 예수를 믿으면 당장 의로워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아직까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배짱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평생 사람만 살리는 인간 구조사가 있다고 하십시다. 평생 100명의 죽어가는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러다가 홧김에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살인자입니다. 평생 자선사업만 하고 살아가던 사람이 한번 탈세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범법자인 것입니다. 거대한 바위도 물에 가라앉습니다. 조그마한 모래알도 물에 가라앉습니다. 평생 죄를 지은 사람도 지옥 갑니다. 평생 선을 행하다가 한번 죄를 범해도 그는 지옥 가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면 그 자리에서 끝장이 나는 겁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 앞에 들춰내서 보면 율법의 눈으로 나를 바라다 보면 나는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발라서 예수님의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보면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이미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이 복음은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히브리 사람들에겐 꺼리끼는 것이요 로마인들에겐 멸시함 받는 것이지만 믿는 자에겐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서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결코 예수 믿는 당신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유사이레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온 단 한 사람도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당신의 영혼이 비록 지옥에 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건져낼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 보실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실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신 분들 가운데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을 줄로 알아요.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어주셨다는 그 죽음이 이천년 전의 그분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성경도 천국도 지옥도 믿어지지 않는 분이 혹시 있습니까?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말했습니다. “축복이 무엇이냐? 믿어지는 것이 축복이다. 저주가 무엇이냐?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게 저주다.”
V. 은사로서의 믿음
여러분,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예수를 믿고 나면 은사로서의 믿음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이제 믿음을 가진 여러분은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놀라운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말 때문에 생각 때문에 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버려진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녀들에겐 구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이천년 전에 기록된 어떤 말씀들이 아니고 바로 성경의 기적이 모두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기적의 시대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기적을 보지 못한다고 하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독수리와 닭” 이야기는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어느날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이 양계장을 하는 아버지의 암닭 품속에 산에서 주워온 독수리 알을 한 개 집어 넣었더랍니다. 시간이 지나자 병아리도 깨어나게 되었고 독수리도 깨어났습니다. 암닭의 뒤를 쫓아 다니며 병아리도 독수리 새끼도 땅을 후벼팝니다. 그리고 먹이를 쪼아 먹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병아리도 암닭 장닭이 되었고 독수리도 거대한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병아리도 독수리도 똑같이 마당을 후벼파고 모이를 쪼아먹고 그런단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푸른 창공에 독수리 한 마리가 좍~ 날개를 펴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가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저것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다른 독수리를 발견한 독수리가 꺄악~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땅을 후벼파던 독수리도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를 한번 질러 보는 것이지요. 꺄악~ 소리가 나는 것 아닙니까? 그 큰 날개를 좍~ 한번 펼쳤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허우적거려 퍼덕거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푸른 창공을 향하여 땅이나 후벼파던 그 독수리가 좍~ 솟아 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썩을 것들이나 후벼파던 썩을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 푸른 창공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하늘 백성들입니다.
저 지옥의 권세에 얽매인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의 권능,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면 내 몸에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죽어 주셔야 할만큼 여러분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안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내일을 꿈꾸는 우리의 비젼이 달라졌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바른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간직하고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저들의 뒤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를 우리는 개혁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갱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속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달라지기 이전에 우리 교회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고, 우리 교회가 달라지기 이전에 오늘 나 자신이 새로운 복음으로 새로운 믿음으로 달라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기대하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주님 전에 찾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공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믿음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믿음없이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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