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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10. 고통 때문에 더 잘된 사람 대상4:9-10

2013.11. 10.    고통 때문에 더 잘된 사람    대상4:9-10



I. 고통 때문에 더 잘되었다


초등학교 어느 여자 선생님이 국어시간에 비유법을 가르쳤습니다.

시험 문제 예시를 그렇게 냈습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수지처럼 예쁘다”

이것을 무슨 법이라고 하느냐? 정답은 비유법이지요.

아무도 비유법이라고 쓴 학생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모든 학생들이 “과장법”이라고 썼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을 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문제를 과장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문제와 고통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고통 때문에 더 잘된 사람」입니다.

 

윤항기 목사님과 윤복희 권사님이 세계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찬송같은 가요 가요같은 찬송으로 느껴지는 묘한 곡입니다.


<네가 만약>이란 곡입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면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나의 고통의 시간 가까이 다가와 계신 예수님을 느끼게 하는 노래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받은 가장 큰 복은 역설적이지만 북한 공산정권을 머리에 이고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도 방심하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분단이라는 고통 때문에 더 잘된 나라입니다.


우리교회는 가난하고 약하게 시작하여 가난한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성전 건축을 탐방하기 위해 어느 교회를 가 봐도 폼나게 크게 헌신한 사람들이 있더구만 우리교회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것이 복이었습니다. 5번 6번 7번 예배 처소를 옮겨 다니며 그때마다 모든 성도들이 예외없이 힘껏 헌신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약점 때문에 더 잘된 교회가 우리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구경꾼, 방관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인 교회가 우리교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제 인생을 아무리 뒤돌아 보아도 내 인생은 고통 때문에 잘된 인생입니다. 의지할데가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기도할 수밖에요. 8살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었으니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제가 제 인생 되돌아보니까 고통 때문에 가난 때문에 잘된 인생이었습니다.


II. 야베스: 고통 중 태어나다


오늘 본문 역대상을 펼쳐보면 1장부터 9장까지 무려 600명에 달하는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이름들이 나열됩니다.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지고는 읽어 갈 수가 없습니다. 아담부터 시작된 역사가 이스라엘 수천년 역사를 흘러 포로로 끌려가고 귀환하기까지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오늘 본문 4장에서도 44명의 서투른 이름들이 열거되다가 갑자기 우리를 주목시키는 두 구절이 등장합니다.


역대상 4:9-10을 개역판으로 읽어 봅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고통 중에 태어난 아들 “야베스”라는 인물에 관한 얘기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이름으로 김고통, 박고난, 최아픔 이런 뜻입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고통의 아들”이라고 짓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많았을 터인데 왜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을까요?


1. 우선 이 아들이 자신이 짊어지고 태어난 고통의 환경의 속에 갇혀 살지 말고 그 고통을 뛰어 넘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어미의 기도가 이 이름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2. 그 외에도 “고통의 아들”이라고 지을 수밖에 없었던 그 환경을 주경가들은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 아이를 낳으며 어미가 죽을 고비를 넘긴 듯 합니다.

아이를 낳자니 어머니가 죽게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뱃속 애기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음을 각오하고 애기를 낳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야베스,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3. 어쩌면 어머니가 낳고 싶지 않은 아이가 이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가령 조선시대 서자같은 아이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한 환경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 아들을 낳고 어머니는 야베스-고통의 아들이란 이름을 짓습니다. 제발 그 불행한 환경속에 갇혀 살지 말아라.


4. 가장 근거있는 주장입니다. 이 아들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별세한 것 같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 사람은 아버지이지요. 그런데 이 아들은 어미가 이름을 지었다고 성경에 기록합니다. 전쟁에 끌려가 전사를 하는지, 질병으로 죽은지 알길이 없으나 이 아이가 태어나 어려운 사회 환경속에서 아비 없이 살아야 되는 이 아이의 인생을 안타까워하며 야베스 고통이라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5.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는 야베스가 태어나던 그 시기가 바로 고통의 시기였습니다.


본문 배경이 사사시대였습니다.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관심합니다. 현실문제에만 모든 백성이 매달려 살던 때였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백성들이 전쟁을 거부합니다. 피흘리기, 희생하기를 거부합니다.

충분히 피 흘렸다. 충분히 헌신했다. 왜 또 하나님 우리를 전쟁터로 몰아간단 말인가? 그래서 온전하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영적인 전쟁을 거부하다가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에 고난을 겪게 됩니다.


바로 이런 세속주의 시대, 불신앙의 시대, 백성들의 신앙이 마냥 알량해져만 갈때에 어미는 이 아들이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그 시대를 살아주기를 기대하며 고통 - 야베스라 이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내 어머니가 왜 내 이름을 야베스라 지었을까?

도대체 어머니는 내게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어머니의 기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며 과연 야베스는 축복의 아들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라고 본문은 설명합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야베스는 일가 가운데 가장 세력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시대를 살린 인물, 몰락해 가는 가문을 살린 인물,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 바로 야베스 -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나중에 기록된 성경의 증언은 야베스가 살던 땅을 야베스라 불렀습니다.

그 부족의 이름을 아예 야베스라 불렀습니다.

마을과 도로 이름에 위인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충무로, 세종로, 을지로, 드골 공항, 카네기 공항... 등이 있습니다.


III. 야베스의 위대함


야베스는 고통 때문에 망한 인생이 아니라 그 고통의 시대를 풍요로운 시대로 바꾼 인물입니다. 그가 가슴에 끌어안고 태어난 그 모진 환경을 오히려 뒤집어서 복된 환경으로 바꾼 인물입니다. 그 시대를 영광스런 인물로 바꾸었던 공동체를 살려낸 인물이 야베스입니다.


이 세상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고통은 있습니다. 고난과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에 갇혀 살게 되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뛰어넘어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그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의 차이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즉 3년 6개월동안 하늘문이 닫혀졌고 그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문이 열려져 3년 6개월만이 비가 쏟아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우리의 차이는 기도의 차이였습니다.

야베스와 우리의 차이는 바로 믿음의 차이, 기도의 차이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고통의 환경에 갇혀 있다는 것은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권세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분량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이 필요하고 태산준령을 넘을 때 지팡이가 필요하듯이 고통의 환경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야베스는 기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원래 야곱의 이름이었지요.

야곱은 참으로 얄궂은 사나이, 간사한 사나이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의 장자권을 빼앗아 도망갑니다.

이제는 나 혼자 외로운 나그네 길이 되었구나.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을 떠나서 나 홀로 고독한 삶을 살아야 되겠구나. 그날밤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모진 씨름 끝에 그의 이름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일평생 자신이 끌어안고 태어났던 불행한 환경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평생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끌어안고 태어났던 이 모진 환경을 거두어 주십시오.

지금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이 고통의 짐을 대신 맡아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복을, 내게도 주셔서 나로 말미암아 내 가문을 살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10절을 보십시다. 개혁판으로 읽어 봅시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복에 복을 더하여 달라는 이 말이 단순히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복이 내 가문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몰락해 가는 가문을, 시대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우리 성도는 고난에 짖눌려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 영화에 도취되어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믿음의 능력과 비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씨앗의 배젓은 50만배의 무게를 뚫고 올라오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50만배의 바위를 밀어내고 용솟음치는 힘이 조그마한 씨앗, 배젖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인생의 고통의 짐이 아무리 크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기도의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으면,

50만배의 무게를 내 인생을 짖누르고 있는 환경을 밀어내는 뚫어내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할렐루야.


고통이 클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큰 믿음입니다.

담대한 기도입니다.


세계적인 리더십 전문가 죤 맥스웰 목사님의 글 가운데 그런 말이 나옵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물 수 백명을 연구해 보았더니 공통점이 있더랍니다.


① 인생의 고통을 뚫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어린 시절 고난을 당할수록 위대한 능력이 그들에게 있더라.

② 의미있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자기를 바친 사람이 바로 세계를 변화시키더라.

③ 고난 가운데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④ 인생을 비관하거나 불평, 절망하는 대신 감사하고 기뻐했던 사람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물들이었습니다.


IV. 감사하는 기적을 낳는다.


오늘 본문을 텍스트로 삼고 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Mr. 지미라는 분이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이곳 저곳 구경하게 되었는데 베드로가 안내를 해 줍니다. 이 마을 저 마을 좋은 것이 많았는데 빛나는 보석창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안내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여기는 무엇이 있습니까?” 물었더니 “여기는 안보는게 좋겠다구.”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아니 한번 들어가자고.” “후회 하실텐데.”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들어가 보자구.”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Mr. 지미” 자기 이름이 써 있습니다. 방과 방이 하늘을 찌르는 많은 보물들이 기도의 응답들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갖고 싶었던 어마어마한 축복들이 가득가득 쌓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방은 기도의 방이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건 당신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많은 문제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만들어놓은 복인데 응답의 창고인데 당신이 기도하지 않아서, 때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망만 하고 있어서 그대로 복이 쌓여져 있는 것이라고, 응답의 보화들이 그대로 쌓여져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두 번째 더 큰 창고가 있었습니다.

“이건 뭡니까?” 감사의 창고였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할 때마다 더 큰 은혜를  주기 위해서 쌓아놓은 보물인데 당신이 감사하지 않아서 그대로 쌓여져 있는 보화”라고 얘기했습니다.


세 번째는 헌신, 충성의 창고였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쌓아놓은 복인데 당신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지 않았기에, 당신의 연약한 지체들, 이웃들을 섬기지 않아서 그대로 쌓여져 있는 복”이라고 하더랍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십시다.

우리는 기도의 창고를 얼마나 자주 열고 있습니까?

하늘 보화창고를 여는 능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았습니까?

기도의 권세를 얼마나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누리는 어마 어마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십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이 얼마나 많이 쌓여지고 있는 것입니까?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것을 바꿉니다.

하나님 복 주세요 감사할께요.

은혜 주세요 감사할께요.

응답 주세요 감사할께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감사하면 은혜는 주어진다.

감사하면 복은 하나님이 반드시 주신다.


사오정이 살던 시대에 그 마을에 못생긴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고,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 없다고 자신을 늘 자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오정이 이 아가씨를 사랑했습니다.

이 아가씨는 사오정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손오공이 조언을 했습니다. “그 아가씨를 찾아가서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야.” 격려를 하라는 겁니다.

그 말을 새겨듣고 외우면서 이 아가씨 집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야.’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야.’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야. ....

대문 앞에서 딩동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대문이 열리는데 그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얼른 그 말을 찾아서 “너 사람의 얼굴이 아니야.” 말하고 뛰어왔습니다.


말 한마디를 바꾸고 나면 순서 하나만 바꿔도 이런 우스꽝스런 말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면 은혜는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감사특밤 시간시간 모든 강사들에게 우리는 흘러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감사특밤이 끝나고 났지만 내 귓전에 내 눈에 아른거리는 한 사람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김희아 씨의 간증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얼굴반쪽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여 태어난 아이, 오죽 보기가 흉했으면 평생 달고 다니는 별명이 사과 반쪽, 괴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아이는 고아원 문앞에 버려집니다. 20대 중반, ‘나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가정이란 걸 가질 수 있을까?’ 꿈을 꿀때 그나마 멀쩡한 한쪽 얼굴에 상악동암이란 병을 얻게 됩니다. 수차례 뼈를 깎아내고 또 깎고 깎아 냅니다. 내 몸에서 살을 찢고 뜯어다 얼굴에 갖다 붙입니다. 수술하고 통증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수술 또 수술... 무서운 통증에 시달리며 몇 개월의 시간을 병원생활에서 보냈습니다. 옆에 엄마가 있으면 엄마에게 떼를 쓰고 싶었습니다. 아프다고. 옆에 아버지가 있으면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엉엉 울고 싶은데 아버지 어머니가 없는 겁니다.

왜 자신을 버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없었을까요? 모진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학이 왜 없었을까요?


그런 자신을 버리지 않고 받아주는 분이 있어서 결혼을 합니다. 감사하게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며 그 아이가 너무 예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나같은 몸에서 이렇게 예쁜 아이가 태어났다니, 너무나 감사해서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흘리다가 이상한 영상 하나가 오버랩 됩니다.

젖을 먹이는 자기 자신이 자기의 어머니로 바뀌어 지고, 너무나 예쁘게 젖을 빨고 있는 그 아이가 사과 반쪽으로 태어난 자신의 얼굴로 오버랩 되어집니다. 나는 이렇게 예쁜데, 나는 미치도록 이 아이가 좋은데, 우리 엄마 끔찍하게 생긴 내 얼굴 젖먹이며 얼마나 놀랐을까? 우리 어머니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나를 버렸을 거야. 어머니를 문득 용서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지금이라도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엄마 괜찮다고, 나 잘살았다고 엄마 용서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엄마마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입만 벌리면 감사, 감사 또 감사...

마치 상처받을 줄 모르는 무통성 인간처럼 자신의 고통을 무한히 긍정하는 절대 긍정의 신앙의 삶의 자세가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저 얼굴을 하고, 저 환경 속에서, 저 모든 인생을 견디어 내며 감사 감사 감사 또 감사인데 우리가 무엇을 감사하지 못하랴. 우리는 뭐가 그렇게 불만스럽고 무엇이 그렇게 불평스럽단 말인가? 김희아와 우리의 차이를 우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는 이유는 저 무한한 감사 때문이구나.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삶의 환경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 저 인생을 바꾸어 냈구나. 우리는 김희아 씨를 통해서 지워지지 않는 떠나지 않는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된 것입니다.


V. 고통 때문에 더 잘된 사람들


성경에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고통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더 잘된 사람들의 얘기가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려야 하는 고통을 믿음으로 감수하고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런 어려움속에 갇혀 살아야 하느냐구요.

나는 왜 이런 고난의 시간들이 끝이 나지 않느냐구요.

아브라함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 보셨습니까?

도무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는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쳐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모세는 살인자의 오명을 쓰고 도망다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거룩한 혈기 한번이라도 부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 사자굴속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국무총리가 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어떤 고난을 당해 보셨습니까?

어떤 손해를 겪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통은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삶에 환경이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반드시 지나갑니다. 고통 속에 빠져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고통은 변하여 축복으로 바뀌어 집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더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실패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 실패를 가슴에 부둥켜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실패는 더 좋은 성공으로 여러분 앞에 보답되어질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려움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아픈 고통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절망하고 좌절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믿음의 그릇을 키우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라고 하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크게 기도하십시오. 고통이 클수록 크게 기도하십시오.

위대한 사람이란 기도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크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크게 결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크게 여러분 인생에 간섭하여 주실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더 잘된 인생, 고통 때문에 더 잘된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러분 한분 한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