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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3. 그 다음엔 누가복음17:11-19

2013.11. 3.            그 다음엔         누가복음17:11-19


I. 그 다음엔


16세기 성자로 불려지던 필립 디 네리(Philip De Neril)가 당시 명문대학 컨티넨탈대학 교정에서 한 법과대학생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학생은 왜 법과대학에 들어왔는가? 법학박사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엔? 훌륭한 변호사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엔? 돈을 많이 벌어서 예쁜 여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엔? 변호사로서 명성을 날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몇 번이 반복되지 않아서

그 다음엔? 나도 별수 없이 늙고 병들고 죽겠지요?

그 다음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 학생이 오히려 네리에게 묻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됩니까?

짤막한 대화 이후에 이 학생은 네리의 제자가 되어서 16세기의 또 다른 성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열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병이 낫고 기적을 맛본 다음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는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이 은혜입은 그 다음에 그대는 무엇을 했는가?”

은혜 받은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 다음엔”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다음에 여러분은 어찌 되었습니까?

능력의 주님을 만나 병고침 받은 다음에 여러분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신앙생활이 깊어지고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 목사님이 된 그 다음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수많은 기도의 응답을 자랑하고 계시는 여러분은 그 다음에 그 응답이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을 바꾸어 주었습니까?

예수 믿고 생활도 달라지고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So What?


병원 엠블란스 구급차를 운전하는 젊은 집사님이 계십니다. 걸핏하면 불평입니다. 위험한 운전을 감당해야 하는 일 자체가 불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위험수당이 적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어느날 둘째 얘기가 태어났습니다. 간호사가 아기 손가락을 셉니다. 손가락 열 개를 달고 나온 것이 어쩌면 그렇게 감사한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감사한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병원에 내려놓았습니다. 안쓰럽게 생각하다가 자기 자신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일상생활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교통사로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진 교통사고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안쓰럽게 생각하다가 자기가 위험한 운전을 했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이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이나 온 가족이 실려왔습니다. 또 작은 병원에서 더 이상 자신이 없다고 포기해 버린 환자를 큰 병원으로 옮겨주면서 안쓰럽게 내려놓고 우리가정에는 이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감사였는데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순간순간을 내게 주셨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평불만 원망이 많았던지 자기 자신의 가슴을 치게 되었습니다.


II. 본문


오늘 본문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어느 구석진 마을에 나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인데 평상시 같으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동병상련일까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입니다. 몰려 나왔습니다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일반사람들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저만큼 일반인들이 오면 입에 손을 대고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서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이 나환자란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멀리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한마디 말 속에 피맺힌 한이 서려 있습니다. 이 환자의 고통이 서려 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병입니다. 보고싶은 가족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저주받은 병으로 취급되어졌습니다. 내 인생은 과연 저주받은 인생인가? 영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거지 행세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치료의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희망이, 꿈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미래가, 용기가 다 부서졌습니다.


예수께서 이 고통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간혹 기적적으로 나병이 낳았을 때 그것을 확인해 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가서 보이라” 대단히 애매한 말씀이지요.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건지 고쳐주지 아니하시겠다는 건지? 썩어가는 자신의 몸을 뻔히 보면서 제사장에게 간다는 것은 특별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함부로 나병환자 10명이 예루살렘 한복판 제사장을 찾아가다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갔습니다.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놀라운 뱃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4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을 때에도 그들은 나병환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너희 몸을 예수님께 보이라 말씀하실 때에도 나병환자였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고 가보자. 걸어가는 그 순간에도 나병이 온 몸에 번져있었습니다. 가다가 한참이나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한센씨 병이 나았다는 건 그 당시엔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자리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했느냐?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결론은 말씀을 알고 진리를 알고 율법을 배웠던 유대인들 9명은 한결같이 각자 제 길로 가버렸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한명만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은혜 입은 자의 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들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데 너희들도 9명의 유대인처럼 살 수 있을 것이고 1명의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감사한 이방인 한 사람만이 기적이 구원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병고침이 천국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나병만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고침 받았습니다. 병 낫고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왔더니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신학자들과 무신론자 니이체가 “하나님 죽음의 신학”을 놓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의 입을 막아버린 니이체의 말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니 성경속에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더라.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계실 때에 예수님 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더라.

온 우주를 보니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니 하나님이 죽은 것이 분명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니 하나님을 지팡이 정도로 생각하더라는 겁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겪고 병들고 상처입고 쓰러지고 넘어져 예수를 지팡이처럼 의지하다가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응답 받은 다음에는 절대자가 필요하지 않으면 지팡이를 버리듯이 믿음을, 진리를, 예수를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사람들, 큰 복을 받았다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교해 보니 다른 바가 별로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니 하나님이 계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죽은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이것이 한 무신론자의 말입니다.


III. 9명은 어디로?


병만 고침 받고 도망간 9명의 유대인들도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②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낫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분에게 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하더라.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실 때에 제사장을 찾아갈 용기도 뱃장도 믿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먼저 달려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 나은 이후에 한 사람 이방인처럼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기 전에 이 사마리아인이 9명 유대인에게 권면하지 않았을까요?

이보시오. 우리 몸이 나았어요. 우리 나병이 우리 몸을 떠났어요. 우리 몸이 깨끗해 졌어요. 우리를 고쳐주신 그분께 가서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보시오 그리 가면 어떻게 해요. 이리오시오. 나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갑시다. 감사드립시다. 권면하지 않았겠어요.


병이 나은 다음 9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다음에 그들이 뭘 했을까요?

동일한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다른 본문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 9명이 돌아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그만큼 감사를 잃어버리고 각자 제 길로 가서 살았던 삶,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는 성경의 증언이지요.


그런데 짓궂은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왜 안왔을까? 뭘 하느라 감사를 잊어버렸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① 정말 나았는지 며칠 기다려 보자. 재발이 안 되어야 나은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확인한 다음에 찾아가 감사를 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생각하다가 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감사는 즉시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먼저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곱씹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② 이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 갈 수 없지 않느냐.

집에 가서 목욕하고 새 옷 입고, 계란 줄이라도 사 들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자. 생각했을 것입니다.


③ 그분이 말씀 한 마디 했다고 깨끗이 나았겠어? 그런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부지런했잖아. 아침일찍 일어나서 언덕에 올라가서 운동도 했지, 쑥도 제일 많이 캐 먹었지. 민간요법이란 요법은 다 해봤지. 이게 다 효험이 거기에 있어서 그랬을 거야. 모든 찬양을 민간요법과 자기의 노력에 돌리고 맙니다.


④ 예수가 한게 뭐 있나?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그거 누가 못해. 감사까지 할게 뭐 있겠어. 그 자리를 떠난 겁니다.


⑤ 제사장에게 가 보이라 말씀하신 얘기는 신분의 보장을 받으라는 얘기인데 출세한 다음에 가야지. 성공한 다음에 명함도 근사하게 찍어서 어깨에 힘 좀 주고 가야되지 않겠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깨에 힘주고 하는 헌신, 감사,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⑥ 나병환자로 있을 때 상처 받은게 많습니다. 무시하는 사람, 돌 던지는 아이들, 배신한 친구, 그놈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수하다가 예수님께 가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⑦ 보니 온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펄쩍 펄쩍 뛰면서 야호! 야호! 소리를 지릅니다. 너무너무 기분 좋아서 동리에 들어갔더니 옛날친구들이 반겨 맞아 줍니다. 그 친구들 손잡고 술집에 가서 똑! 한잔. 병철이 만나 똑! 한잔 하느라고 1차 2차 3차 이 노래방 저 노래방 뛰어다니다가 감사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⑧ 보고 싶은 사람 찾아다닙니다. 집에 갔다가 처갓집에 갔다가 외갓집에 갔다가 고모네 집에 갔다가 이모네 집에 갔다가. 오늘은 초등학교 동창생, 내일은 중학교 동창생, 고등학교 동창생, 친구들 여기저기 만나고 다니다가 예수님 만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⑨ 집에 들어갔더니 왠지 집에 찬바람이 쌩~ 납니다. 마누라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습니다. 도망간 마누라 찾아서 이동리 저동리 찾아다니다가 예수님께 갈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성경에 없는 얘기이지요. 저혼자 그렇게 상상 해 본 것입니다.


IV. 믿음이 아닐 수 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가운데 믿음 아닌 가짜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 예수 만나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 불가능이 없다고 하더라. 예수님에 관한 많은 지식이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성경적인 지식도 얼마든지 지식에 끝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달려나와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통곡하고 애원했습니다.

자기 한 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 진정한 은혜로 나아가는 통로가 될수 있을지언정 눈물 자체가 믿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설교를 했더니 할머니 한분이 앞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훌쩍훌쩍 흘립니다. 선교사님이 서툰말로 설교를 했는데 은혜를 받으니까 너무 좋아서 내려가자마자 할머니 손을 덥석잡고 “할머니 오늘 은혜 받았어요. 제 설교 어디에 은혜가 되셨어요?”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 “선교사님의 눈이 새파란게 며칠전에 죽은 우리 고양이 눈깔하고 똑같아서 죽은 고양이 생각에 내가 눈물을 흘렸노라고.”


여러분 교회 와서 울 때 자기 한이 서러움에 울고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통로를 주셨는데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비적인 능력을 간구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 얼마든지 귀한 일이나 그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아이들 수능고사를 앞두고 100일 특별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를 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어떤 결단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끝난 다음에 그 결과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이 기도한 것이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감사하던가요? 아니면 예기치 않은 다른 결과가 왔을때 기도한 것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묻는 것이지요.


병이 나았습니다. 닫혔던 사업의 문이 열렸습니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공한 다음에 그 다음엔?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저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잘나지도 못했는데 하나님만 내 빽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오늘도 내 안에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성경책을 한권 사서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 병고침, 귀신을 쫓아냄, 이적을 행하신 것, 줄을 치면서 전부다 이적 성경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될 것 같아서 제가 한달동안 휴가를 얻어서 국내에 나와있는 치유에 관한 능력에 관한 책 50권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50권을 다 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령을 제가 환영합니다. 인정합니다. 성령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든지 간에 제가 성령님을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셨던지 이 기도를 기뻐하셨던지 제게 믿음의 은사와 신유의 은사와 능력행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바깥에 세미나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병고침의 능력과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신비하니까 한국교회에서 저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적인 사역자로 생각했는데 신비주의자처럼 살게 되니까. 사실은 신비했던게 사실입니다. 제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첫 번째는 한국교회 조언을 - 우리교회만 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교회라고 한다면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겸손한 신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섬기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였습니다.


두 번째는 교인들이 예수님께로 복음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점점 더 신비한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을 호두알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 잘못될 수 있겠구나. 균형을 잡아야 되는데 복음과 신비 사역 가운데 균형이 잡혀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그 많은 은혜를 입었던 병고침의 은사를 경험했던 능력 행함의 은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많은 능력행함의 경험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단 한명도 제게 찾아와 호떡 하나라도 사들고 와서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게 제가 이런 기적을 경험하다니 목사님 감사합니다.” 호떡 하나를 사온 사람이 없었고 지나가다가도 문득 제 손을 잡고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로 표현한 사람도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능력으로 고침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큰 선물 사온다 해도 제가 받지 않지요. 그러나 나아만이 나병이 나은 다음에 엘리사 선지자에게 수레로 잔뜩 보석을 실고 가서 내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선지자님 감사합니다. 보석을 풀어 놓으려고 할 때 엘리사 선지자가 아니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가져 가시오. 이래야 재미 있는 것 아닙니까? 뭘 가지고 와서 내가 한 것 아니고 그래야 되는데 그런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아 이게 기적이 반드시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니구나. 기적이 생활을, 사람을,인간을 바꾸는 것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는 기적, 복음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험 –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하나님 앞에 가서 제가 매를 맞을 지도 몰라요. 그러나 저는 내려놓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해서 매를 맞을 각오를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제가 죽거들랑 제게는 수의를 입히지 마시고 두꺼운 가죽 옷을 입혀 주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가서 제가 매를 맞을 준비를 하고 천국에 가야 되기 때문에. 특별히 궁뎅이 부분에 두꺼운 것을 깔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병 낫는 기적을 넘어 구원얻는 기적까지 가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기적을 넘어 감사하는 기적까지 가야 합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들어야 한다면 비극이지요. 몸이 낫는 기적을 넘어 삶이 치유되고 삶이 변하는 기적까지 가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설교 내용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이적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청년 한 사람이 목사님께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오늘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없는데 왜 그런 설교를 하십니까?

아니 있다고. 아니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아무개 집사님 집에 가 보라고.

궁금증을 안고 젊은이가 집사님 집에 갔습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포도주가 변하여 물이 된 것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자기를 가리키며 여기 있지 않냐고.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가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를 만나서 술 한잔 할 수 없는 자기자신이 술독에 빠져서 알콜 중독자가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게 물이 변하여 술로 바뀌어진 것 아니냐 그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전도자를 만나서 거기서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이 고침 받아서 나왔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알콜중독자가 술 한잔을 먹지 않았으니 이게 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가 변하여 물이 된 것 아니냐. 그 얘기입니다.


여러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주님 안에서 기적을 경험했으면 변화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V.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를 잊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가족 중 권사님만 나와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네 남편 어디갔니? 네 자녀 어디갔니? 네 가족 어디갔니? 그 아홉은 어디갔느냐?


병 나은 것만 감사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지 않았느냐.

죽음의 자리에서 네 생명이 연장되지 않았느냐.

소중한 가족을 주셨고 귀여운 자녀들을 허락하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이것은 감사하고 저것은 불평할 때에,

오늘은 감사하고 내일은 원망할 때에,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한다 하면서 부모님의 은혜는 망각하고

친구 배신하고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은혜 받은 그 다음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받은 은혜 감사할 때 그 은혜는 완성되는 법이며 감사는 축복의 완성이며

감사는 받은 축복의 매듭입니다. 감사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한 이방인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할 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육신의 병도 고치고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천국까지 복으로 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바꿀 수 없는 것 얻어야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 말고 영원한 가치 얻어야 이것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얻은 복입니다.

세상 다 얻고 예수님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세상 다 잃고 예수님 얻었으면 다 얻은 것입니다.

영원한 복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아십니까?

베드로 보세요.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는데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의 밤이었습니다. 그 실패를 통로 삼아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고 예수님 만나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그 다음에 잡은 고기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또 만납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수님을 모른다 또 부인합니다. 무서운 배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게 은혜 입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실패 때문에도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 인생 살다가 어떤 실패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 실패를 가슴에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실패 안고 세상으로 가면 망합니다. 기껏 가는게 포장마차 아니었습니까. 거기에 응답이 없습니다. 실패를 안고 주님께 오시기 바랍니다.


그 성공 안고 세상으로 가면 안 됩니다.

제 잘난 멋에 살면 안 됩니다.

어떤 성공을 하셨든지 간에 성공을 가슴에 부둥켜 안고, 승리의 감격을 가슴에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이 진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죄를 짓고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무서운 배신을 하고도 예수님을 얻으면 그게 성공입니다.

그게 신앙인의 모습이요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 아홉을 찾는 것일까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환자들의 감사보따리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명마저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깨닫지도 듣지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했던 더 큰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은 감사 깊이 만큼 성숙한 사람이요 감사의 크기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죤 밀러의 말입니다.


한 시인의 <감사>란 짤막한 시가 있습니다.


감사 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감사 만이 보석입니다.

슬프고 힘들 때도 감사 할 수 있으면 삶은 어느 순간

보석으로 빛납니다.


감사 만이 기도입니다.

기도 한 마디 드리지 못해도 그저 고맙다 고맙다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날 삶 자체가 기도의 강으로 흘러

가만히 눈물 흘리는 자신을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