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수필가 손옥경의 “감사촌과 불평촌”이라는 글입니다.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한 마을은 감사촌이고 다른 한 마을은 불평촌이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불평불만이고,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고,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어 다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미리 걱정을 했습니다. 담배 연기가 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에게선 잠재적으로 불평과 불만, 근심의 연기가 항상 입에서 나왔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주소가 그 동네이고 또 모두가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했습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왔다가 감사촌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감사촌 사람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날만은 감사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감사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그는 다시 불평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불평촌에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괜히 실컷 감사만 하고 왔네.” 불평촌에서는 감사한 것까지 불평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촌으로 이사를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감사촌에 이사오기 위해서는 불평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그곳에 놓고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감사촌에서는 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무에서 출발한다면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옷 한 벌, 밥 한 끼가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불평촌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위치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고, 감사촌은 바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입니다. 우리 시대를 가리켜서 불만의 시대라고 합니다.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기업주에 대해서,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불평불만의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 시편에 나오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히브리어로 ‘조베아흐 토다’입니다. 감사함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조베아흐’라는 단어는 14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의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제사 즉 예배는 어떠한 예배입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제사는 희생할 동물을 죽여 끌고 오는 외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드리는 희생 제사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이며 목적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제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와 ‘행위를 옳게 하는 자’를 동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왜 감사의 제사를 드림이 중요합니까? 첫째로 기억하게 하나니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의 단편 가운데 예수께서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은 작품이 있습니다. 첫 장면에 예수께서 주정꾼을 만납니다.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그에게 “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물었더니 주정꾼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이 하나도 없었소. 그래서 나는 술만 마셨소.” 그 다음 예수께서 창녀가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다시 돌아갔소” 그러자 창녀가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생활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그 생활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이오. 고독해서 살 수 없었기에 다시 창녀 생활을 시작했다오.” 그 후 예수는 불량자가 주먹질을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불량자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그러자 불량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요.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게 하고 화나게 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화풀이하며, 마구 치고 받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 생각했소.” 예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새 삶을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를 모두 잃어버리고 다시 돌아가 변명하고 있는 사람들,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를 깨닫게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여기의 ‘하나님을 잊어 버린 자’와 23절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가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가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긴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 어찌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받은 축복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축복에 더 큰 축복을 계속 받는 것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림은 받은 은혜를 헛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감사를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결국 사십년 고생 후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감사 대신 원망하고 산다면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은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존재가 살아있으매 감사해야 합니다. 영원한 고통을 당하며 멸망 받아야 할 자에게 천국 복락을 주시매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혹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을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로 제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깨닫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화롭게 하나니 18세기 밀레 (Jean François Millet)의 명화 ‘만종’은 젊은 농부 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경건하게 마주서서 두 손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부부가 드린 감사는 노동을 마치면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 즉 하루 동안 땀 흘린 것에 대한 감사,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작은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속에 감자가 반쯤 담겨져 있습니다.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 그림의 본래 이름은 ‘알젤루스’인데 그 뜻은 ‘기도’입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가난 속에서 몹시 고생하던 때였습니다. 밀레의 역작들은 고통의 세월을 지내는 중에 그려진 것들이 많습니다. 감자 몇 개를 담은 바구니를 옆에 두고 두 손 모아 감사하는 농부의 모습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동을 보는 이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입니다. 항상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행위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감사를 표현하며 감사의 문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술로 감사하고 물질로 감사하고 몸으로 감사하고 춤과 노래로 표현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보여지게 하나니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도 국가대표 이원희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고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선수촌에서의 힘들었던 훈련과 금메달 후보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기도로 극복하였다고 말합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생긴 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새벽 5시부터 고된 훈련을 받았습니다. 기량이 향상되지 않자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감사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는 중상을 입고도 금메달 투혼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도 하나님을 의지한 감사의 결과였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경기 중 손가락이 옆으로 쑥 넘어갔는데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통제도 맞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부상으로 허벅다리 걸기에 필요한 기술을 사용할 수 없어 업어치기를 시도했는데 그게 먹혀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23절입니다.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에 합당한 행위로 구원을 받도록 함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특권입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인 동시에 구원의 조건이 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십니다. 문제마다 해결해 주시고 보호하시고 그리고 응답해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가난한 농부가 알라 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돈이 필요하니 200파운드만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집배원은 수신자가 알라신이므로 우체국 계장에게 보냈습니다. 계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우체국장에게, 국장은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장관은 알라에게 보낸 편지를 버릴 수가 없어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낫세르 대통령은 농부의 딱한 사정을 보고 100파운드를 그에게 우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반응은 감사가 아니라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알라신은 분명히 자기가 요구한 200파운드를 보내셨는데 대통령이 중간에 100파운드를 떼어먹고 100파운드만 보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에 익숙하며 만족하기보다 불만하기에 빠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지방 여선교회 찬양제에서 우리 교회 여선교회 합창단이 부른 ‘감사송’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 그냥감사, 그리하실지라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래도저래도 감사, 매일 매일 감사,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모름지기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깊이 생각해보면 감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을 헤아려볼 때마다 감사가 저절로 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감사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드릴 때마다 놀라우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