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19:33-34 2013.8.11(일)
나그네를 영접하라
이 세상에 가장 슬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녀와 헤어지는 부모일 것입니다. 오래 전에 구 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무려 5만 5천명이나 사망했는 데 그때 한 도시에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한 어머니와 딸이 건물에 눌려 생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하루, 이틀,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너무 힘들어 비명을 질렀습니다. “엄마, 목말라. 목말라”. 겨우 숨만 쉬면서 목숨을 지탱하고 있던 어머니는 딸을 도와 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의 머리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광경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었을 때 자기 몸을 찢어 피를 먹이는 광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어두운 땅을 더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깨어진 유리 조각을 찾고는 지체없이 자기의 팔뚝을 찢어 피를 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어린 딸의 입술에 댑니다. 드디어 구조대가 도착하고 그들에게 후래쉬가 비춰졌을 때 어머니의 품에서 새끈 새끈 자고 있는 어린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피를 흘리고 죽었고 딸은 살아 있었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아낌없이 피를 쏟은 어머니 때문에 딸은 살았습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딸을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공부를 위해 보냈지만 헤어질 때 쉽지 않았습니다. 27년간 교회 수양회외에는 단 하루도 부모의 품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딸이었습니다. 그런 딸과 공항에서 헤어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영영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만날 수 있고 다른 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공부때문에 헤어지는 데도 막상 헤어질 때가 되자 세 사람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아빠, 잘있어”하고 손을 흔들 때 제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영종도를 짙게 덮은 안개는 마치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우리 교인중 가끔 자녀를 외국에 데려다 주고 오는 부모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부때문에 자녀를 외국에 떠나보내고 그리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참 위대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참으며 공부하는 자녀들의 마음도 참 대단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것은 공부때문만이 아닙니다. 일 때문에 결혼 때문에 먼 나라로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TV에서 “러브인 아시아”라는 프로그램을 봅니다. 내용은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몽골등지에서 일이나 결혼을 위해 부모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꿈에도 그렸던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만나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눈물납니다. 어쩌다 가난하게 태어나 한국에 가면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고향, 그들이 남편과 자녀와 함께 어렵게 다시 고향을 찾는 순간, 그들 눈에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늙으신 부모님과 얼싸안는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뻐하는 모습은 “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같이 살아야 하는구나”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눈물로 떠나온 고향을, 그렇게도 가슴에서 그리워 하는 부모를 행복한 얼굴로 만날 수 없다면, 한국에 와서 오히려 사는 것이 힘들고, 가정은 행복하지 못하고, 돈도 제대로 못벌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면, 먼 땅에서 그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부모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 되겠습니까? 헤어진 것도 서로운 데 자신들의 아들이, 딸이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얼마나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입니까? 문제는 그런 일이 이 땅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 게임때부터 잘 사는 나라로 알려져 우리 나라에 들어온 외국인은 현재 120만, 전체 인구의 2%를 넘습니다. 이 수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곧 500만 외국인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다문화 가정의 수는 전체 가정의 13.6%, 열 쌍 중 한 쌍의 결혼은 외국인과의 결혼이며, 농촌 총각 10명 가운데 4명은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단일민족이리고 부를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땅에 찾이온 외국인들과 함께 공존하며 행복한 동행을 꿈꿀 수 있는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 말씀입니다. 레19:33-34,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막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반드시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사랑하라. 왜냐하면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마디로 요약됩니다. 첫째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둘째 나그네를 사랑하라. 셋째 너희도 나그네다.
먼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오늘 말씀 첫 번째 구절을 보시겠습니까? 레19:33,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우리가 나그네에 대하여 할 첫 번째는 학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암6: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성경에 “정의”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스파트”라는 말이 200번 더 나옵니다. 빈도수로 볼 때 “”헤세드“, ”은혜“ 다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들을 잘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에 맞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피부색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서 있는 위치, 형편, 지위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그 형상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정의는 그 사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잘되게 하기 위해 긍휼을 비는 것이라면 정의는 잘못되지 않도록 올바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정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한마디로 정의는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특히 약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정의는 특히 세 가지 대상을 향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는 자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자요, 나그네는 주인이 없는 자입니다. 신10:18절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남편이며 나그네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면 하나님이 진노합니다. 신27:19절입니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이 이 땅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나그네들이 못살겠다고 소리치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2012년 10월부터 3개월간 노동부가 조사했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30.2%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보다 좋아졌고 기숙사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악한 상태에서 삽니다. 많은 사람이 공장에 딸린 작은 방이나 인근 주택에서 세를 얻어 살지만 방은 1-2평, 원룸인 경우가 많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사람도 4.1%, 식당에서 먹고 자는 사람도 3%가량 됩니다. 기숙사에 살아도 주방, 화장실, 샤워장을 함께 쓰는 경우가 28%나 됩니다. 이렇게 열악하게 살다보니 쉽게 화재, 범죄, 성범죄에 노출됩니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10명 중 1명꼴인 10.7%가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중 12.9%는 성매매 요구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폭력 가한 가해자의 88.9%가 회사의 사장입니다. 이러니 말도 못하고 신고도 못합니다. 신고하면 해고되거나 모독을 당합니다. 그래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56.4%가 신고조차 안합니다.
이러니 사방에서 원성이 자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필리핀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한 사장이 필리핀을 방문하기 위해 자기가 일하는 필리핀 청년들과 함께 마닐라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때 그와 함께 온 청년들이 사장을 둘러싸고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장은 급히 공항경찰대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은 청년들을 연행했습니다. 경찰들은 왜 한국인에게 폭행을 가했느냐고 묻자 필리핀 청년들은 자기들이 한국에서 취업하는 동안 그가 자기들에게 너무 많은 학대와 모욕을 당해서 우리 나라 가면 보자 하고 벼루고 있다가 공항에 내리자 마자 폭행했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장은 이 사건을 한국대사관에 신고하여 문제를 제기했으나 결국 그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많은 나쁜 일을 한 것이 드러나 강제 출국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중국을 여행하던 한국인이 취업 후 돌아간 교포 청년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돈을 빼앗겼다는 소식은 부지기수로 들립니다. 또 조선족 동포에 의해 한국인이 피살되었다는 소식도 네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목사님이 한국에 취업도중 산업재해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보상금을 전달하고자 동남아 몇 나라를 방문했답니다. 네팔에 갔는 데 청년 두 명이 힐끗 힐끗 살피더니 영어로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물어 왔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대뜸 우리도 한국말 좀 하는데 들어 보겠느냐 하더랍니다. 그래서 해보라고 했더니 “이놈아, 너 죽어 볼래” 하더랍니다. 다행히 목사 일행인 것을 알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그 말을 배웠느냐 했더니 한국에서 일할 때 기업주가 자기들에게 가장 많이 하던 말이랍니다. “이 놈아, 너 죽어볼래”.
그동안 중국동포들은 꿈을 안고 기회의 땅이자 고국인 한국에 와서 평생 벌 수 없는 돈 500만원에서 천만 원까지 비용을 부담하고 한국에 왔는 데 개중에는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하고서 빚을 갚지 못해 몰매를 맞거나 가정이 파탄되고 야반도주하는 아픔을 얼마나 겪었습니까? 그나마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적 약점으로 이용해 얼마나 많은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우리가 기피하는 3D업종에 내 던져졌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중국동포 김 아무개씨가 부천 공장에서 분신자살을 했는 데 그가 공장 복도벽에 스프레이로 회사 사장을 향하여 “나쁜 놈 김 아무개, 천벌을 받아라”라고 쓰고 “한국이 슬프다. 金 아무개” 이름을 썻습니다. 무슨 한이 그렇게 많은지 죽어가면서도 저주를 퍼붓고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입니까? 왜 이렇게 합니까? 우리도 가난한 시절이 있었고 우리도 독일로 사우디로 간호사, 광부로 가지 않았었습니까? 지금도 미국에서는 많은 한인들이 그들이 안하는 3d업종에 종사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눈코 뜰새 없이 일하지 않습니까? 아예 우리는 나라가 없었던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에 가보면 우리 나라보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땅이 넓습니까? 자원이 더 많습니까? 아니면 영어를 더 잘합니까? 지지리도 못살다가 한 30-40년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이렇게 외국인을 학대하니 도대체 이 나라가 정신이 있는 나라입니까? 없는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은 웬만하면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한 사람을 저주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다시 기억합시다. 33절, “너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아멘.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나아갑니다. 33절. 레19:33,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다같이 “사랑하라”.
나그네를 사랑하라
나그네는 학대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그네를 학대할 때 저주를 받는다면 나그네를 사랑할 때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그네를 사랑해서 축복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보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며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창18:2절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여러분, 여러분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 데 달려가 몸을 땅에 굽혀 절할 수 있습니까? “누구요? 더운 여름에” 하고 짜증내지 않겠습니까?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름에는 심방도 많이 안갑니다. 날씨는 더운데 손님이 온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달려가 엎드렸습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이렇게 까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달려가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사자들인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 히13:2에서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알았다면 “부지중에”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도 영접하지 않는 데 아브라함은 몰랐어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라가 축복을 받아 이삭이 태어납니다. “내년 이맘때에 네게 반드시 아들이 있으리라”. 천사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나그네는 천사였습니다. 그때 이미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여성으로서 기능이 상실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나그네를 환영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손님을 대접해서 축복받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입니다. 본래 가난하게 태어나 라합이 여리고에서 기생으로 일하고 있던 어느날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와 전쟁하기 위해 정탐꾼으로 라합의 집에 잠입한 것입니다. 이때 라합은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들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느냐 이들을 영접하여 대접하느냐. 만일 잘못되어 걸리면 라합은 스파이 은닉죄로 중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라합은 위험을 무릎쓰고 그들을 대접하고 숨겨줄 뿐 아니라 무사히 도피하게 했습니다. 성경 히11:31절은 이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이 한 것은 나그네를 숨겨준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마1장에 보면 살룸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 보아스를 낳습니다. 아마도 살룸은 그가 숨겨진 이스라엘 정탐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가 맞이한 나그네가 그의 장차 남편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 라합이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도 못하고 아들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들입니다. 훗날 그의 아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지주가 되고 유대인중 유력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땅에 나그네로 들어온 사람이 모압 사람 룻입니다. 룻은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 객지인 베드레헴에 와서 시어머니와 하루 하루 보리 이삭을 줍고 있던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그에게 보리를 주울 수 있도록 하인들을 시켜 더 많은 이삭을 남겨 놓기도 하고 나쁜 남자들이 그를 괴롭히지 않도록 적극 돌보아 줍니다. 결국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나은 아들이 오벳인데 그는 다윗왕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결국 이 집안은 나그네를 영접하다가 복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영접해서 그와 결혼했고 아들 보아스는 룻을 영접해서 그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윗 임금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왕의 혈통속에는 이방인 나그네의 혈통이 있었습니다.
제가 2년전에 안식월을 가졌습니다. 그때 영국을 방문했는 데 누가 소개해서 런던 브랜드우드 트리니티 교회 게스트룸에 묶었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 옆에 방 하나를 꾸며 손님들을 모시는 게스트룸으로 활용하고 있었는 데 얼마나 친절한지. 할머니 몇 분이 매일 아침 와서 “good morning”. 인사하고 음식 넣어주고 신문 주고 우리가 밖으로 나가면 이부자리 봐주고, 냉장고에 음식 넣어주고, 너무 정성을 다해 저희 부부를 섬겼습니다. 끝나고 한국으로 오는데 선물과 탱큐 카드까지 준비했습니다. 그때 제가 너무 은혜를 받아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해야 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지하 1층 사찰집사의 방을 선교용 게스트룸으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손님을 받기 시작했는 데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다녀갔습니다. 그때 마침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했는 데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설교자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안에서 훈련받는 목회자 훈련을 위해 한 분 목회자를 받아달라고 해서 머리가 대머리인 앤드류를 받아 두 달동안 머물게 하고 한국교회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는 저에게 며칠 게스트룸 불려 주고 완전히 땡잡은 것입니다. 담임목사 초청해서 설교하지, 신학생 앤드류 두 달동안 머물면서 한국교회 배우게 했지 완전히 본전 뺀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삼 5절,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나그네를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나그네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레19:34절,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우리가 이 땅에 오는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도 나그네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나그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먹을 음식입니까? 친구입니까? 집입니까?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주인이 없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나그네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인생에 주인이 필요합니다. 주인이 누구입니까? 오늘 필리핀에서 중국에서 오신 외국인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은 왜 한국에 오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나라에 여러번 가보았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고 풍성했습니다. 필리핀은 3천개의 섬이 있고 해변마다 아름다웠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80배가 크고 세계 대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은 한국에 오셨습니까? “한국에 가면 돈번다”. 그래서 오셨습니까? 어떻습니까? 생각대로 돈은 잘 벌고 있는가요? 저는 여러분이 한국에 와서 돈도 많이 벌고 여러분의 꿈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꿈을 이루어도 그것으로 모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에 와서 돈만 번다면 너무 허무합니다. 여러분을 한국으로 오게 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나라보다 작은 한국에 굳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주인을 만나라고 보내셨습니다. 다른 것 다 있어도 인생의 주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려고 여기 보내셨습니다. 한국에 있는 것은 일자리, 직장, 돈벌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미신, 우상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한국에 보냈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돈만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와 법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한국에 한때 대단한 기개를 가진 강골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미아리의 김강자 총경입니다. 그가 서장직을 걸고 창녀촌을 없애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창녀촌은 없어지지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더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왜 안됩니까? 돈이 없고 힘이 없어서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안됩니다. 죄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타락시킵니다. 1930년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세 가지 자유를 말했습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 가지로부터 다 자유를 얻었다 해도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한국도 하나님믿기 전에는 가난했습니다. 한국도 하나님 믿기 전에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이만큼 사는 것은 하나님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여러분이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돈으로 한정하지 마십시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따라 오지만 돈을 믿으면 돈도 잃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분당에 한신교회 생긴지 15년이 되었습니다. 15년이면 이제 많이 자랐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사람을 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민족이든 세계민족이든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1998년 8월 16일, 이 교회가 처음 입당하는 날, 당시만 해도 아직 초창기였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초청하여 입추의 여지가 없이 예배드렸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교회 짓고 처음 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를 초청하여 대접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처음부터 우리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남북의 소외된 영혼뿐 아니라 이 땅에 찾아온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교회였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회당에 공부하러 가는 것보다 낫고 나그네를 구제하는 것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낫다”. 예배가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나그네라면 교회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여관집입니다. 프랑스 떼제 공동체의 규칙에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손님은 곧 그리스도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손님이 천사였던 것처럼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천사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온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 하나를 영접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 하나를 영접한 것입니다. 나그네는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되 이 땅에 연연하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c.s.루이스가 말했습니다. “2천년 교회사에 및나는 사람들은 천국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로 삼으면 땅의 것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의 것만 목표로 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나그네입니다. 하늘 나그네, 하늘을 목표 삼아 길을 가는 사람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축복 있기를 바랍니다.
레19:33-34 2013.8.11(일)
나그네를 영접하라
레19:33-34,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먼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레19:33,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암6: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신10:18,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레19:33,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나그네를 사랑하라
창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히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요삼: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너희는 나그네다
레19:34,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탈무드,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회당에 공부하러 가는 것보다 낫고 나그네를 구제하는 것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낫다”.
떼제 공동체의 규칙, “우리가 맞이하는 손님은 곧 그리스도다.”
C.S 루이스, “2천년 교회사에 및나는 사람들은 천국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로 삼으면 땅의 것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의 것만 목표로 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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