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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4:15-24 하나님의 속 마음 2013.8.18(일)

14:15-24 2013.8.18()

하나님의 속 마음

 

여러분의 서로의 마음을 잘 아십니까? 사람이 가장 답답한 것은 서로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생을 살아도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탈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친한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낍니까? 그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서로의 마음을 잘 몰라서 나옵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알랑가몰라입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말합시다. “내 마음 알랑가몰라”.

 

그중에서도 제일 모르는 것이 시어머니, 며느리의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거짓말 베스트를 말했습니다. 먼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best 5. 1: 어머, 어머니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있다 가세요. 2: 어머니, 용돈 적게 드려 죄송해요. 3: 어머니가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4: 어머니, 전화 드렸는데 안계시더라고요. 5: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 될래요. 다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 best 5. 1: 아가야, 난 너를 딸 처럼 생각한단다. 2: 생일상은 뭘, 대충 먹자꾸나. 3: 아이구, 내가 얼른 죽어야지. 4: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5: 들어가 일찍 자라. 아침은 내가 할테니. 이런 것이 거짓말이면 무엇이 진심입니까? 말말고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할 때 그 말속에 담긴 진심이 이마에 쓰여진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알면 좋은 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속마음은 그가 하시는 말씀과 어떻게 다를까? 만일 하나님의 속마음을 안다면 우리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저는 오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속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쉽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번 읽고 묵상하고,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보고, 또 기도하고, 그러다가 어느날 하나님의 보석같은 속마음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뻣는지. 그 기쁨은 세상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오늘 그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이 말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16절입니다.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가 왜 잔치를 베풀었는지 그 잔치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아마 이스라엘 농촌인 것 같고 주인은 매우 부자인 데다 지역 유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아마 가장 좋은 일은 결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결혼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만일 결혼잔치가 아니었으면 무슨 잔치였을까? 우리 나라처럼 7순잔치, 8순 잔치였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잔치는 큰 잔치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할 만큼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의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초청한 사람 가운데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 밭을 산 사람입니다. 둘째 소를 산 사람입니다. 셋째 장가간 사람입니다. 이들 외에도 주인이 초청한 사람은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만 성경에 기록한 것은 그들이 주인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주인을 호의를 대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종에게 소리쳤습니다. “빨리 거리에 나가 가난한 자, 맹인,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그리고 내 집을 채우라. 한번 청했으나 안 온 사람은 더 이상 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

 

이 비유를 우리는 잔치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읽으며 우리는 주인의 두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아무나 오라고 부르는 마음씨 좋은 모습이요 또 하나는 정반대인데 오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모습입니다. 하나는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폭군 네로같은 모습입니다. 이 두 사람이 충돌하면서 말씀의 뜻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만일 초청해서 안왔다면 한번 더 초청해 볼 수는 없었는가? 그래서 오지 못했다고 해서 굳이 거지들, 불구자들로 그 좋은 자리를 채워야 하나? 만일 이 세 사람이 잔치에 왔다면 자기 일을 포기했어야 하는 데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관심이 없는가? 그리고 한번 안 왔다고 해서 다시는 잔치에 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 그래서 이 말씀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결국은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는가를 보여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주인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먼저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을 살펴 봅시다, 주인이 초청했으나 응하지 않은 사람은 셋이었습니다. 밭을 산 사람, 소를 산 사람, 장가간 사람, 이 사람들을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밭은 우리의 일터입니다. 우리의 직장이요 물질세계입니다. 그래서 밭을 산 사람은 우리의 물질문제요 돈 문제를 다룹니다. 소는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입니다. 직장일이요 회사일이요 학업이요 가정일입니다. 장가는 가정입니다. 우리의 남편이요 아내, 아들, , 그들과의 관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셋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밭은 물질, 소는 일, 장가는 가정, 물질, , 가정,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세 가지입니다.

 

왜 주인은 이 셋을 초청했을까요?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밭을 사서 소유를 늘리는 사람, 소를 사서 일을 하는 사람, 결혼해서 새 가정을 이룬 사람, 무엇인가 일이 있고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뒤에 부른 사람들은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21절에 나오는 명단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들, 저는 자”.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할까요? 일하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노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일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부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집안에서 타작하던 기드온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고 있던 사울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저녁 늦게까지 빈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열두 겨리 소를 붙잡고 밭을 갈던 엘리사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던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일하고 있던 세리 마태를 불렀습니다. 무엇인가 일하고 있는 사람, 오늘 나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사람을 부르고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주인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그 다음 소를 산 사람은 소를 시험하러 가고 장가 간 사람은 아내에게 갔습니다. 다 핑계를 대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우리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부르면 베드로처럼 배와 그물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어렵게 합격한 공무원은 공무원 사표쓰고, 힘들게 들어간 삼성, 현대 다 그만 두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실제 하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나는 교회 장로고 권사고 안수집사다. 여신도, 남신도 회장이고 임원이고 목자다. 그러면 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교회에만 나와야 할까? 지금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은 데 직분을 받았다고 교회에 나오야 할까? ”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실제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세상 일을 다 그만두고 교회에만 살아야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살든지 나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 마음입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곤랂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속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에만 가둬 놓는 분이 아닙니다. 밭이든 소든 가정이든 다 팽개치고 교회에만 오라는 하나님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29: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5:19절의 공동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 우리의 일, 우리의 생계, 우리의 현실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모든 직업과 생계를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우선순위는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에 대한 우선순위가 있습니까? 교회 일꾼으로 부름받은 분들, 생업을 포기하고 교회에만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먼저인지 세상이 먼지인지 몰라야 되는 것은 아니 잖습니까? 어느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도무지 무엇을 먼저 할지를 모릅니다. 그냥 하루 하루 바쁘게만 살면서 예배나 기도생활에 게으릅니다. 교수가 학생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항아리 두 개와 큰 돌, 자갈, 모래를 올려 놓았습니다. 교수가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다 항아리에 담을 수 있지 생각해 봐라”. 학생은 생각하다가 항아리에 모래부터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항아리가 모래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돌이나 자갈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교수 차례였습니다. 교수는 항아리에 먼저 큰 돌부터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자갈을 넣고, 그 다음에 모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래가 빈틈으로 스며 들었습니다. 그날 교수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였습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큰 것부터 넣어야 합니다. 큰 것부터 하면 작은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여러분에게 큰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겠습니까? 제가 어떤 세미나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강사가 우선순위를 이렇게 훈련시킵니다. 먼저 하루에 할 일을 쭉 써보게 합니다. 그 다음 중요성에 따라 번호를 매깁니다. 1,2,3,4. 세 번째는 그 중에서 중요하지 않는 뒷 번호부터 하나씩 지워갑니다. 4번 지우고, 3번 지우고, 그러면 꼭 해야 할 일만 납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합니다. 이것을 그는 가지치기라고 불렀습니다. 인터넷용어로 말하면 디리트”, “삭제입니다. 생산적인 삶을 위해서는 지우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정경화는 세계적인 바이얼리스트입니다. “어떻게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트가 되었습니까?”묻자 대답했습니다. “안했죠”. “뭘 안해요?” “하고 싶은 것 안했죠”. “그럼 무엇만 했는데요?” “바이올린만 했어요”. 이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중요한 한 두 가지를 위해 이것 저것 안하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다 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영성일기를 씁니다. 재작년 안식월때부터 생긴 습관입니다. 매일은 못 쓰고 한 주일에 한 두번 씁니다. 그때마다 자신을 돌아봅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너무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썻다는 것입니다. 영양가 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의미있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제가 지금 보다 더 좋은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제가 소모적인 시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공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직장에 다니고 사업하고 가정생활하며 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다른 허접한 것에 너무 시간을 뺏기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 하루 평균 3-4시간 T.V봅니다. 젊은이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인터넷, 핸드폰, 카카오톡, 훼이스북합니다. 온갖 친구 다 만납니다. 온갖 모임 다 나갑니다. 하고 싶은 일 다 합니다. 가지쳐야 합니다. delete 해야 합니다. 한 가지 없애야 한 가지 생깁니다. 제가 보니까 쓸데없는 시간만 잘 관리하면 얼마든지 공예배 나올 수 있고 성경공부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잘못 써서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은 무엇일까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교회만 나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되 우선순위에 따라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을 우선순위에 따라 잔치에 나오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14:16-17,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주인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나마 작은 잔치가 아닙니다.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은 주인이 부른대로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잔치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먹고 즐기는 것입니다.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17절에 그랬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손님들은 주인이 모든 것을 준비한 잔치에 참여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나갔고 한때는 제가 생각해도 잘 믿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교회 공예배, 주일 예배, 밤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를 빠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고2때부터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후 25살 때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까지 거의 교회를 떠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묻습니다. 왜 그렇게 믿음 좋던 내가 회를 떠났을까? 교회가 싫어서도 떠난 것 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 믿어지지 않은 교리가 있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떠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런 문제였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았습니다. 저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모님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아주 믿음이 좋았습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도 교회에는 바쳤습니다. 그러나 어린 제 눈에 부모님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거의 매일 교회에 살았지만 기쁨은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때로 의무감에 지친 봉사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잔치 때문에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노동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그때가 사춘기였기 때문에 제가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얼마나 교회에 오래 있느냐로 신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하느냐로 신앙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듣는 데서 교회 험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로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말하지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집사가 어떻고, 권사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하면 시원할 수 있지만 그 말을 듣는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다시 16절로 갑니다.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주인이 우리를 부른 것은 우리를 일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우리와 함께 먹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같이 먹고 마시자고 부른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의 경건주의 신앙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그의 가정신앙도 그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고 하나님까지 떠났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했을까? 그가 쓴 <짜라투스트라>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춤출줄 아는 신만 믿는다”. 여기서 "은 기쁨입니다. 잔치입니다. 행복입니다. 니체의 가정에는 하나님에 대한 논리정연한 신학도 있고 품위있는 예배도 있고 주님을 의한 헌신과 봉사가 있었지만 즐거움은 없었습니다. 니체는 행복하지 않은 부모의 신앙을 통하여 노예종교를 보았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신앙은 의무입니까? 행복입니까? 교회 일꾼으로 부름받은 여러분, 여러분에게 일은 의무입니까? 행복입니까? 여러분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노동입니까? 잔치입니까?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도 소년시절에 수도원에 기도하는 소년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신학교 중퇴자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몰라 독재자가 되고 폭군이 된 것이 아닙니다. 잔치의 하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열심은 있고 충성은 있지만 행복하지는 않는 부모와 신앙 선배들 때문에 하나님이 무서운 독재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쳔 정신과 의사는 히틀러, 스탈린이 만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 중노동 시키는 하나님, 독재자 하나님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생각한 하나님처럼 독재자가 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믿지만 안 믿는 사람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 믿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우리가 별 말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오면 얼굴 펴야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즐거운 사람만 있고 지옥에 가면 심각한 사람만 있다”. 그래서 이제 조금 이해가 되시나요? 지금 한참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잔치에 부른 것은 일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믿는 것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일만 하지 말고 제발 행복해라.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지지 않습니까? 주인의 분노는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주인은 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분노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분노를 도더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속 마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속 마음이 드라마같이 펼쳐진 것이 21-24절입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밭을 산 사람, 소를 산 사람, 장가간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21절입니다. 14:21,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종들이 순종해서 사람들을 대려 왔는 데도 아직도 자리가 빕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또 무엇이라고 합니까? 23,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 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왜 주인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집착할까요? 초청한 사람들이 안 오면 그만 아닙니까? 안 오면 말지 왜 이렇게 데려 오라, 데려 오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전도구호가 여기서 나옵니다. “내 자리를 채우라”. 그러나 전도가 다만 자리채우는 수단입니까? 만일 자리만 채워야 한다면 예비군 훈련을 교회에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일년에 몇 차례씩 우리 교회가 입시학원 청솔에 입시준비하라고 교회를 빌려 줍니다. 1,000, 1,500, 입추의 여지없이 옵니다. 그들이 우리 교인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다만 교회 자리 채우는 것이 전도라면 어떻게든 자리는 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리 스트로벨목사님은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에 오랫동안 불신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오랜 불신자 경험에서 불신자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했습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첫째, “교회나오는 것은 싫어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둘째, “자신은 도덕적으로 잘못 살면서 누군가 붙잡아 주기를 바란다.” 셋째 자신은 교회 나가지 않으면서 자녀들은 도덕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 넷째 겉으로는 하나님을 거절해도 속으로는 누군가 자신을 교회로 데리고 나갔으면 하고 바란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없이는 못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 나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 더운 여름에 힘들게 잔치를 준비하여 다 오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불렀는 데 안 오자 너무 너무 속상해서 화를 내지 않았습니까? 속상하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속상하고 말면 되는 데 또 사람을 보내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병든 사람, 아픈 사람, 맹인, 저는 사람, 그들이 잔치와 와서 축의금을 내겠습니까? 잔치집을 깨끗하게 하겠습니까? 안 오면 말지 굳이 오라, 오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속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매일 일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 얼마나 피곤하고 수고하냐? 나에게로 오라. 와서 일을 그치고 발쭉 뻣고 쉬어라. 내가 네게 새 힘을 주리라. 하루 하루 먹고 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나에게로 오라. 돈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내가 너를 회복시키리라. 언젠가 부터 웃음을 잃고 누어 사는 사람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니 내가 너희를 치료하리라. 마음이 무겁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네 상한 심령을 고치리라. 일 때문에 속상해 하고 일 이 안돼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 나에게로 오라. 와서 일을 그치고 나와 함께 잔치하자. 나와 함께 먹고 마시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486장을 부르며 은혜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도다.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아멘.

 

14:15-24 2013.8.18()

하나님의 속 마음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먼저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을 살펴 봅시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5:1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또 하나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을 우선순위에 따라 잔치에 나오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14:16-17,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하나님의 속 마음이 드라마같이 펼쳐진 것이 21-24절입니다.

14:21,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 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4861,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도다.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