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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3:1-11 영혼의 회복 2013.8.25(일)

63:1-11 2013.8.25()

 

영혼의 회복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 들었습니다. 무더위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만 가을은 저만큼 성큼 다가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40도 가까운 온도로 근래에 드문 혹독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 전기 사정도 안 좋고 또 저 자신의 훈련을 위하여 올 여름 거의 에어컨을 켜지 않고 살았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참는 데 올 여름은 참 힘든 여름이었습니다. 여름은 날씨 때문에 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무더우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기력, 피곤함, 게으름, 짜증, 불쾌지수, 온갖 것이 다 따라 옵니다. 그러다가 좋은 시 한편이 눈에 띄였습니다, 조병화의 가을이라는 시입니다.

 

조병화, “가을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그 어리석음을알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 얼마나 세상사 인간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이제 돌아갈 뿐이다“.

 

시인은 여름을 전투의 계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았으면 여름이 전투일까? 가을은 여름의 전투를 끝내고 돌아서는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여름의 전투가 모두 나쁘지는 않았지만 한없이 전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제는 자신을 추슬러 돌아갈 때가 아니냐?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여름은 전투였습니까? 더위와 싸우는 전투, 일상과 싸우는 전투, 집에 있어도 전투, 휴가를 떠나도 전투, 전세값, 시험, 국정원 국정조사, 이래저래 올 여름은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전투가 있습니다. 영적 전투입니다. 1절 보실까요?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이 쓴 시입니다. 문제는 이 시를 어디서 썻느냐입니다. 오늘 말씀 시63편의 제목을 보십시오. “다윗의 시, 유다광야에 있을 때”. 광야에서 썻습니다. 광야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젊은 날을 보낸 곳입니다. 시편 150편중 다윗이 광야에서 쓴 시만 10편이 됩니다. 내용상 광야에서 썻다고 볼 수 있는 것까지 합치면 27편이나 됩니다. 모두 37편이 광야에서 쓴 것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광야는 물이 없고 마르고 곤핍한 곳입니다. 성경의 광야는 비가 거의 없어서 농사짓기 어려운 땅을 말합니다. 이 땅을 성경은 메마른 땅”(35:1,2), “짐승이 부르짖는 땅”(32:10), “빈들, 황무지, 간조한 땅, 건건한 땅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다윗이 광야에서 물 때문에 탄식한 것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영적 여름도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탄식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습니까? 물만 없어서 탄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서 탄식합니다. 게절의 여름은 물이 없고 영적인 여름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계절의 여름은 우리안에 에너지가 고갈되어 침체하고 영적인 여름은 우리안에 하나님이 없어 고갈됩니다. 하나님이 없어 고갈된 상태를 우리는 영적 침체라고 말합니다.

 

영적 침체가 무엇입니까? 긴 여름을 보내며 우리안에 있어야 할 영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영적 침체에 빠졌나 안 빠졌나를 다음 몇 가지를 통해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힘이 있는가? 영적 침체에 빠지면 얼굴에 핏기가 없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습니다. 둘째 화를 자주 냅니까? 영적 침체에 빠지면 자주 화를 냅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그 화가 또 오래 갑니다. 속에 있어야 할 연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람들을 잘 피합니까? 평소에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친구들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람들을 멀리하고 피하기 시작하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면 사람이 싫고 만나는 것이 겁납니다. 갑자기 말 수가 적고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넷째 두려움이 많습니까? 영적 침체에 빠지면 자신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많아집니다. 그것이 1,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한상태입니다. 긴 여름이 주는 부작용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은 인생의 긴 여름을 맞아 고갈되고 침체한 그의 영혼을 향하여 어떻게 영적 가을을 준비합니까? 세 가지입니다.

 

영혼 회복을 위한 첫 번째, 2절을 보겠습니다.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다윗은 성소에서 주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침체로부터 돌이키는 첫 번째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바라보는 것인 것을 믿습니까? 성경의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전했습니다. 이때 이들의 첫 반응은 무엇입니까? 2:15, “우리가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을 보자”. 보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듣기만 하지 않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리고의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 보러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례요한의 전도를 받은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님께 다가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 계시오니이까?”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고 살던 시므온은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계시를 받고 아기 예수를 찾아 그를 품에 안았습니다. 믿음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계신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11:6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느니라”.

 

다윗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되 성소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성소는 성전입니다. 다윗이 말한 성소는 에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분명 어떤 특정 건물이나 공간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정 공간없이는 거룩도 없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공간은 왜 중요합니까? “사람이 건물을 짓고 건물이 사람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건물은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건물을 지으면 사람은 그 건물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사는 곳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세트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성지순례는 이래서 생겨납니다. 성지순례가 가능한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자신의 믿음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전제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300만의 무슬림들이 메카를 향해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메카가 다른 곳마다 거룩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천만의 카톨릭교인이 로마를 찾고, 해마다 2천만의 힌두교인들이 힌두교 성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1억명의 유대인, 크리스쳔,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성묘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기독교 최고의 성지입니다. 거기 가면 지하에 3세기 순례자들이 그린 배 그림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유럽에서 온갖 고생과 사투 끝에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썼습니다, “도미네 이비무스”, “주여, 우리가 왔습니다”, 이들이 이 글을 거기 쓸 때 아마 모두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현장에 왔다는 감격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소를 향한 신앙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사모합니까? 성전 건물 자체가 다른 건물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에 성전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성전이 중요합니다. 영적 침체로부터 회복하는 길은 성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사모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중국에 갔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를 갔는 데 주일날 약 천여명 모인답니다. 보통 40, 50리 된 거리에서 자전거로 걸어서 온답니다. 심지어 12시간, 14시간 걸려 온 사람도 있답니다. 이들은 교회에 도착하여 주여하고 부르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눈물로 드리는 예배가 있어야 영적인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배는 눈에 보이는 건물인 성전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우리 심령에 모시는 임재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예배를 잘 드리면 영적으로 충만합니다. 기도는 우리 내면에 하나님 모시는 것입니다. 옛날 성전에서는 24시간 올리브 기름으로 등을 밝혔습니다. 재사장이 24시간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살폈습니다. 이 불을 등대라 불렀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등불이 우리 심령에 타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에는 첩경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하느냐라는 질문에 존 채프만이란 영성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도를 배우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쏟아붓는 정성만큼 가고 투자한 시간만큼 갑니다.

 

그래도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기도해야 우리 심령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올리브 기름이 등대에 타듯이 우리 심령에 기도의 불이 타야 고갈된 우리 심령이 회복됩니다. 또 하나는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자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이어서 기도마저도 자기가 주도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기도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라고 사회자가 말하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도 기도합니다. ”잃어버린 세상을 위헤 기도합시다하면 평소에는 그런 제목으로 기도하지 않았아도 기도합니다. 예배는 개인의 생각, 선호, 감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입장에서 공동체의 소원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자기 생각, 자기 입장, 자기 감정은 사라지고 하나님앞에서 겸손해집니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3절에 입술로 찬양합니다“. 4, ”주를 송축하며 나의 손을 듭니다“. 그래서 5, 내 영혼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듯이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예배의 축복입니다. 고갈된 영혼이 회복됩니다. 침체에 빠진 영혼이 새 힘을 얻습니다. 예배를 통해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 가을, 여러분의 영혼도 회복되기를 원합니까? 5, 내 영혼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듯이 만족하고 내 영혼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를 바라보십시오. 성소에서 예배와 기도를 통해 바라보십시오.

 

영혼의 회복을 위한 두 번째, 6절입니다.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예배가 우리의 영혼을 회복하는 첫 번째 방법이라면 말씀 묵상은 영혼 회복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여기에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했습니다. 여기에 읊조린다는 말은 옛날 성경은 묵상한다고 번역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묵상을 성경을 읽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성경없이 묵상없지만 묵상은 다만 성경읽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에 대한 가장 좋은 성경적 표현은 먹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읽는 것이 우리의 지성과 관련된다면 먹는 것은 삶과 관련됩니다. 10:9-10이 대표적입니다. “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밧모섬에서 기도하던 사도 요한에게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먹어라. 이 말씀을 갖다 먹어라. 말씀을 먹으면 배에는 쓰지만 입에는 달다”, 이 달고 쓴 맛이 함께 있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답니다. 우리 입술에 답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배에는 씁니다, 써야 약이 됩니다. 배에 쓰기 때문에 우리가 치료됩니다, 구약의 예레미아나 에스겔도 말씀을 먹었습니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먹고 삽니다. 음식이 우리 몸에 영양분을 주듯이 성경은 우리 영혼에 영적 자양분을 줍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고 말씀을 흡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성경을 사용하는 사람이요 흡수하는 사람은 성경을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사용하지 말고 수용해야 합니다. 말씀을 먹기 위해 네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 읽기. 여러번 읽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번 읽는 것입니다. 둘째 묵상. 말씀을 내 삶의 한복판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기도가 나와야 진짜 말씀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말쑴은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넷째 삶. 그 말씀이 내 삶이 되도록 삶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프랭크 로바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1884년 미국에서 태어나 문맹자의 선교사가 되어 그들에게 성경을 이해하도록 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이 45세되던 해 1월에 문득 이런 결심을 합니다. “나는 일평생 하나님과 내적 대화를 쉬지 않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반응하며 살리라”. 그가 그렇게 결심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믿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그가 깊히 반성한 것입니다. 어떻게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하나님과 평생 깊은 교제를 하며 살 수 있을까? 깨어 있는 동안 그렇게 살다 잠들 때 그분 품 안에 그렇게 잠들 수 없을까? 항상 내 삶이 그 분의 뜻을 행할 수 없을까? 항상 내 마음이 그분의 생각으로 가득찰 수 없을까?“ 그때부터 그가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1930126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세상을 뜰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그는 일기를 쓰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계속했습니다. 이것을 요즘 사람들이 영성일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성일기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변함없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퇴보하고 때로 낙심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두고 싶은 유혹도 받습니다. 그러나 가도든 영성일기든 우리가 그만 두지 않으면 언제나 발전합니다.

이렇게 썻습니다. 1930. 1.26, “매 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싶다.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에게 그런 순간이 왔으면”. 193031.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손을 잡아 이끄시고 도 다른 손이 앞에서 내 길을 예비하신다는 의식이 내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고 있다”. 1930418. “하나님과의 교제의 참맛을 느끼자 그분께 합당치 않은 모든 일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오늘 오후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강하게 붙들리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1930514. “매 순간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내 생각의 주제 삼고 내 대화의 짝 삼는 것, 이것이야말로 평생 접해 보지 못한 가장 놀라운 일이다. 점점 된다. 물론 아직은 한나절도 못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루 종일 그렇게 될 날이 있을 줄 믿는다. 사고에 새로운 습관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1930524.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음은 갈수록 강해지는 반면 다른 모든 것은 더 이상 내게 집요한 힘을 잃어버렸다. 사고가 더 명료해졌고 망각하는 일도 많이 줄었다. 전에는 힘들게 하던 일이 지금은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잘 된다. 요즘은 걱정이 전혀 없고 잠도 잘잔다. 거의 온종일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 193061. “, 하나님은 더 이상 낯선 분이 아니다. 온 우주에서 주님은 단 한 부분도 낯선 데가 없는 유일한 분이다. 주님은 온전히 내 안에 계신다. A만일 한 시간만 내가 주님을 놓친다면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어떻습니까? 점점 발전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 회복은 시간이 걸리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침상에서 읽고 새벽에 읽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영혼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침상은 공간의 한 예고 새벽은 시간의 한 예입니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나와 같은 말입니다. 가끔 어쩌다 새벽에 나와 한 30분 기도하고 왜 응답이 없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30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게시는 24시간이다. 우리는 30분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24시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30분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24시간 나를 찾으신 것이 기도다”. 그래서 기도의 문제는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하나님이 찾으실 때 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부재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깨고 영혼이 깨어 있으면 24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은 소리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태도로 드리는 삶입니다.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주목하면 언제나 기도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묵상기도입니다.

 

마지막 영적 회복을 위한 세 번째, 7절입니다.

63: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우리는 첫째 예배, 둘째 묵상을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예배드라고 말씀을 묵상했다고 곧 바로 영적 회복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시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여기에 도움이란 말과 그늘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늘은 나무 밑입니다. 그늘은 일을 그치고 쉬는 곳이요 다음 일을 위해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늘이 의미하는 것은 영혼의 어두움이요 고립입니다. 9절에서 11절을 보면 시63:9-11,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했습니다. 여기에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칼의 세력인 데 곳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영혼이 예배나 묵상을 통해 회복하려고 할 때 많는 방해와 유혹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묵상과 함께 우리 영혼이 회복될 때 필요한 세 번째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면 여러분은 아멘을 잘 안하시겠지만 오늘 말씀의 내용상 어쩔 수 없습니다. 오스 힐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책을 쓴 분입니다. 이 분이 최근에 쓴 <하나님의 통로>라는 책을 썻는 데 이 책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 반드시 6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단계. 하나님의 부르심. 모든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모든 사람을 부르십니다. 둘째 단계. 인격의 형성.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 다음에 하시는 일은 그의 사람을 다듬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사람을 훈련시키고 다듬습니다.

 

세 번째 단계가 고립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더 들어 쓰려면 더 어려운 과정을 거칩니다. 그것이 고립입니다. 하나님은 보통 사람을 불러 특별하게 다루십니다. 고립은 자신을 상대화시켜 하나님앞에 철저히 복종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고립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36개월동안 그릿시냇가에, 모세를 40년 호랩산에, 다윗을 20여년간 동굴에 고립시켰습니다. 바울을 아라비아 사막에 3년 고립시켰고, 심지어 예수님도 40일간 광야에 고립시켰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만 아닙니다. 존 번연을 12년 감옥에 고립시켜 <천로역정>을 쓰게 하시고 중국 선교사 웟치만 니를 결핵으로 고립시켜 뛰어난 복음적 사상가로 만드시고, 만넬라를 27년 감옥에 고립시켜 노벨상을 받게 했습니다. 31:20의 말씀과 같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그래서 오는 네 번째 단계가 깨어짐입니다. 고립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각각 자아를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도록 사람들을 깨뜨립니다. 깨어지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스펄젼은 하나님이 사람을 깨뜨릴 때 대개 네 가지를 깨뜨리신다고 합니다. 영어로 시작하는 네 단어입니다. silver, , 돈입니다. sloth, 게으름, 나태입니다. sex, , 인간의 정욕입니다. 마지막 self, 자아. 인간의 자기중심적 교만입니다. 이것들을 꺽은 다음 다섯 번째 단계가 사용하시고 여섯 번째 단계가 보호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한 손에 붙잡혀 고립되고 꺠어지는 과정을 잘 견뎌 정금같이 되면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고 사용할 뿐 아니라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 7절에서 11절까지는 그 과정을 간단히 압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새 힘을 얻지 못하게 못하게 하는 여러 종류의 시련을 잘 이겨내면 7,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늘에 보호하시고, 8, 주의 오른 손으로 붙잡아 주신다. 8절에서 우리가 주의 오른손을 붙잡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한 유명한 서커스 스타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가 한번 T.V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서커스 스타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서커스의 진짜 스타는 서커스 뒤에 숨어서 내가 그네를 탈 때마다 내 손을 붙잡아 주는 죠라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힘차게 그네를 타고 건너편으로 갈 때 정확한 때, 정확한 장소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내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손을 붙잡아 준다. 20년 이상 이 일을 한 내가 서커스에서 하는 일은 다만 두 손을 활짝 펴고 믿음으로 건너편에서 외수없이 나를 향해 달려올 죠의 손에 꼭 붙잡히는 것이다. 이것이 내 서커스의 비밀이다. 따라서 서커스 스타는 내가 아니라 죠다”, 제가 이 말을 들을 때 마치 설교를 듣는 것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서커스 스타라고 불리운 사람이요 뒤에 숨어 우리 손을 붙잡아 주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손을 붙잡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그네를 타고 힘차게 건너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은 항상 변함없이 거기 기다려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오른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8,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븥드시거니와”.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의 손을 붙드십니다. 긴 여름으로 피곤해진 여러분의 영혼이 회복되기 위해 예배를 통해 손잡아 주시고, 말쑴 묵상을 통해 손잡아 주시고, 가끔 고립과 자기 깨어짐으로 고난을 겪을 때에도 변함없이 손잡아 주시는 그 분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이번 가을은 여려분에게 영혼의 충만한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63:1-11 2013.8.25()

 

영혼의 회복

 

조병화, “가을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그 어리석음을알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 얼마나 세상사 인간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이제 돌아갈 뿐이다“.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영적 침체의 특징(질문)

- 힘이 있는가?

- 화를 자주 내는가?

- 사람들을 잘 피하는가? 합니까?

- 두려워지는가?

 

첫 번째, 2절을 보겠습니다.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2:15, “우리가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을 보자”.

11:6, “하나님은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느니라”.

 

존 채프만

기도를 배우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분명하다

- 기도해야 우리 심령이 회복된다

-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자리는 예배다.

 

두 번째, 6절입니다.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10:9-10,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말씀을 먹는 네 가지 과정

- 읽기

- 묵상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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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바크(사진)

 

하나님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부재가 문제다.

 

마지막, 7절입니다.

63: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63:9-11,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오스 힐먼, <하나님의 통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6단계

(1) 하나님의 부르심.

(2) 인격의 형성.

(3) 고립

31:20,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4) 깨어짐

스펄젼, silver(), sloth(게으름), sex(), self(자아)

(5) 사용

(6) 보호

63:8,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븥드시거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