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1. 6. 영역 4/바울서신
사람,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엡 4:17-24
2006년에 개봉됐던 ‘식스틴 블럭(16 Blocks)’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형사가 죄수를 16 블록을 이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주인공 잭 모슬리 형사는 경찰의 부패에 연루된 채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고, 죄수 에디 벙커는 경찰 부패 사건의 희생양으로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이송 도중 두 사람이 논쟁을 합니다. 모슬리 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날씨도 변하고 계절도 변하지만 사람은 절대 안 변해” 흑인 죄수 벙커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소매치기였던 척 베리도 결국엔 좋은 사람이 됐어요 사람은 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모슬리 형사는 결국 자기가 변해 갑니다. 지난 날 잘못을 반성하며 경찰의 부패를 고발하며 자기도 감옥에 수감됩니다. 이 영화 후반부에 모슬리 형사가 출소하고 생일에 죄수였던 벙커가 케익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케익에 이런 글을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People can change)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변에서 변한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리고 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단호하게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2-2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러니까 사람이 변해도 철저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철저하게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변해야 한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예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변하기를 바라지만 변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일까요?
변화의 동인
본문을 보면 2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가 내 속 사람 안에 들어오신 후에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 가운데 인간 변화를 철학의 주제로 다루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즉자적’(卽自的)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자적 존재란 그냥 단지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생각 없이 주어진 환경에 등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동적으로 운명에 끌려서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즉자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대자적 존재란 어떤 대상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특히 자신을 성찰할 수 있고 그래서 자신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런 대자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사르트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반성한다고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변화는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하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성하고 새롭게 변해 보려고 작심도 하고 결단도 해 보지만 얼마 못가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반성만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변화의 필요를 알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깨달음만으로도 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변화의 방향을 알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의지만으로도 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성경 안에는 이렇게 예수와의 만남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행 9장을 보면 바울이 변화되게 된 결정적인 원인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과 극적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 이후 원래 사울이었던 그가 새사람 바울로 변합니다.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예수를 전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율법에 매여 살던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바울은 고후 5:17에서 이 변화를 이렇게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재창조 수준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리모델링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런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이런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변화 이야기는 바울의 변화처럼 극적입니다. 원래 이분은 젊은 시절 모두가 두려워하는 주먹이었습니다. 16살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에 고향에 내려와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합니다. 그때부터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고,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어느 날 거리를 지나가는데 금발의 서양 여자 선교사 스왈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전도지를 주며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익두 청년은 서양 여자여서 어떻게 해코지는 하지 못하고 받은 전도지로 선교사가 보는 앞에서 코를 풀었습니다. 선교사가 서툰 한국말로 “전도지로 코 풀면 코 썩습니다.” 김익두 청년은 들은척 않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코가 간질거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여선교사가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내 코가 썩기 시작했나?”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여선교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코가 썩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선교사가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김익두 청년은 예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한국교회 부흥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끝도 없이 많습니다. 성경에도 넘쳐나고, 교회사 이야기 속에서도 넘쳐나고,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넘쳐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인격, 우리의 삶,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가 필요하십니까? 예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분을 만나십시오. 주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
그러면 예수를 만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변화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변화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과정
본문 22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변화할 때 먼저 옛사람을 벗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할 때 먼저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옛 옷을 벗어야 하는 것처럼 옛사람을 청산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옛사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찾아올 때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 다니며 죄짓는 습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옛사람은 결정적으로 사탄의 유혹에 취약한 사람이요, 사탄의 유혹에 끌려 죄 짓고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탄은 늘 우리를 유혹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으로 나타나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진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을 받았고 또 넘어졌습니다. 오늘도 옛사람들은 사탄의 유혹할 때마다 넘어지고 또 쓰러집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유념해야 할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이 점을 지적해 줍니다.
본회퍼는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세 가지를 유의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는, 감정을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여 결국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질투심을 일으키고 그래서 미워하게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원망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미혹하여 스스로 우울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다. 모두가 나를 버렸다.”라는 식의 마음을 가지게 하여 스스로 자신의 생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세 번째는 구원 신앙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너는 끝 났다. 네가 지은 죄를 생각해 봐라 너는 너무 죄가 많아서 다 틀렸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뒤 흔드는 사탄의 유혹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이 예수 믿고 거듭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김익두는 더 이상 과거의 김익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었다고 부고를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김익두가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화가 난 주막 주모가 구정물을 김익두에게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가 껄껄 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만일 그가 살았다면 당신은 지금 성치 못했을거요. 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과는 다른 새로 태어난 사람이라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변하려면 우선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삭개오가 옛사람을 청산했던 것처럼 우리도 옛사람을 철저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둘째, 새사람을 입는 과정
본문 24절을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옛 사람을 벗은 뒤에 적극적으로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은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3:10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그러니까 새사람이란 과거 옛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생태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새사람이란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아 옛사람을 벗어버렸다고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린 후 새사람을 또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옛 사람은 벗어 버렸지만 아직 새사람을 입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예수 믿고 과거를 청산했습니다. 갖가지 유혹을 뿌리치며 살아갑니다. 끊을 것을 끊고, 정리할 것을 정리했습니다. 이제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직 새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옛사람을 벗어버렸다고 끝이 아닙니다. 또 정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새사람을 입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원어를 그대로 번역해 보면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새사람을 입는 원천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 식인종이었던 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족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의 인류학자가 연구차 들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커다란 항아리 옆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원주민이 대답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습니다. “현대 문명인들은 더 이상 그 책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세요? 그 책은 그저 거짓말 꾸러미일 뿐이에요. 그 책을 읽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 식인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책이 아니었다면 선생님은 벌써 내 배 속에 소화되고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예수 만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실천할 때 새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아니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길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따를 때 새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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