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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일반 예화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의 무거움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의 무거움

인간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존재의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멀쩡한 목숨들이 지하철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가는 `일본풍경'이나 괴한의 기관단총 난사에 맞아 죽는 `미국 풍경'은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는 장면일까 무거움의 장면일까? 사람이 한 순간 아주 간단하게,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의 작동권에 휘말려 소멸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을 증거하는 현상 같아 보인다. 통제불능의 변수들을 `우연'이라 한다면, 인간 존재의 문법은 그 우연성의 침입 앞에서 마치 한국산 자동차처럼 아주 가볍게 망가진다. 그러나 독가스를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행위 자체도 우연한 것인가? 우연하지 않다면 그 우연하지 않은 사건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인가? 우연하지 않은 사건의 우연하지 않은 희생자가 되는 것은 존재의 무거움인가?
일본 풍경이나 미국 풍경 같은 것이 오늘날 문명세계의 어디서건 발생할 수 있고 또 발생한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도 그 풍경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현대인을 어이없게 한다. 자연을 다스리고 우연을 통제하기 위한 문명의 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숨이 여전히 가볍게 위협당할 수 있다면 문명과 사회와 질서와 제도들은 다 무엇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현대인을 미치게 하는 것은 문명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여전히 불안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반대, 곧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아니 바로 그 문명의 질 때문에, 삶은 더 많은 위협 앞에 노출된다는 이상한 역설이다. 옛날 사람들은 더러 호랑이한테 물려가는 수는 있어도 미치광이의 자동차에 치여 죽고 기관총에 맞아 죽고 독가스 마시고 죽는 수는 없었다. 이 `최신식' 죽음의 방식은 현대인에게서 자기 도취의 모든 순간들을 앗아간다. 어찌된 일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부지런히 생명보험에 드는 일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새뮤얼 베케트는 어느날 파리 노상에서 낯선 청년의 칼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간다. 입원 기간 내내 그를 궁금하게 한 것은 그 낯선 사내가 왜 자기를 찔렀을까라는 의문이었다. 정신이상자였을까? 그러나 경찰에 붙잡혀 온 그 사내는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이 멀쩡한 사내는 "왜 나를 찔렀소?"라는 베케트의 질문에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한다. "나를 미치게 한 것은 바로 그 대답이었다"라고 베케트는 나중에 술회한다. "차라리 무슨 이유를 댔더라면, 그 이유가 아무리 황당한 것이라 해도 나는 오히려 안심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최소한 `이유'를 가진 것이니까. 그런데 모르겠다니, 그 무슨 어이없는 대답인가. " 베케트의 이 경험은 존재의 `어이없음'이라는 그의 극작 주제와 기막히게 어울리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게 한 극작가의 생애에 발생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만 빼고는.
문명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믿음으로 굳게 무장한 이 시대에 어째서 어이없는 사건들이 무더기로 터져나오는가라는 문제는 현대인의 악몽임과 동시에 당대 `문화론'을 쓰는 사람이라면 맨 먼저 다루어야 할 화두이다. 문명과 문화 개념의 중첩 부분을 제외한다면 문화론의 할일은 무엇보다도 `문명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시대, 가능하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된 이 고도 기술의 자본주의 문명시대에 인간 사회가 통제불능의 혼란에 빠지고 `자유와 책임'이라는 시민사회적 윤리가 곤두박질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문화는 이 극도로 파편화한 사회를 얽어맬 어떤 통합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당대 문화론이 다루어야 할 두번째 주요 화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까운 지면을 빌려 구태여 이런 화두를 던져보는 것은 단순히 문화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반성작업이 문화 자체의 할일이고 사회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따져도 우리 사회의 문화적 반성능력은 그런 문제를 다루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인 미성숙의 단계에 있어 보인다. 이 미성숙성의 포위 속에서 우리가 `삶의 질'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존재의 존재론적 가벼움이나 무거움이 아니라 이 문명이 정의하는 삶의 질 속에서 느끼는 존재의 어이없음이다. 그러나 어이없는 사건들은 이유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발생한다. 돈지갑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게 자체는 잠자리 날개처럼 나날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이 가벼움을 견딜 수 없어 어이없는 사건들이 터지는 것은 아닌가? 견딜 수 없는 가벼움 때문에 견딜 수없는 무거움이 우리를 짓누른 것은 아닌가, 어이없게도?
이것들은 사실 수사적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해답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우리는 어이 없이 그 앎을 은폐하는 적극적 무지를 지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