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으로 살아가는 聖徒(마 5장13) 2010 7/25일 주일 낮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쓸데없는 소금, 버림받고 밟혀질 소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과 같은 성도들이 그 맛을 지니고 세상을 정화하고 변화시키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라틴교회에서는 세례예식 때에 사제가 세례를 받는 사람의 입에 소금을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비록 공인되지 않은 의식이었지만 세례를 받는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감 등을 그 소금의 맛으로 실감케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소금의 맛을 본 세례 교인이 세상의 소금답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 소금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가치(값어치) 있게 살아갑니다.(주님이 가장 귀하게 인정하셨다)
옛날에는 소금이 아주 값진 상품이었습니다. 소금은 오늘날의 화폐와 같이 통용되었습니다. ①사람들은 무엇을 사고자 할 때 그 값을 소금으로 치렀으며, ②품삯을 소금으로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③그들은 마치 금과 은을 보배로 여기듯이 소금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는 소금이 얼마나 귀했는지 소금 한 자루는 한 사람의 생명처럼 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은 그 신분과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별로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며 예수님을 무시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천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처럼 귀하게 보셨습니다. 소금은 소금답게 맛을 낼 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금답게 사는 성도는 가치 있게 사는 성도인 줄 믿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1813-1873)과 존 리빙스턴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형제지만 그 삶의 목적하는 바가 전혀 달랐습니다. 존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기를 꿈꾸었습니다. 반면에 데이빗은 어려서부터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두 소년은 각기 그 꿈을 달성했습니다. 존은 그가 원하던 대로 부자가 되었고 유명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데이빗은 아프리카 탐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부자는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선교사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그는 기도하는 모습이었으며, 그 옆에는 그가 죽기 직전에 기록한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일기 문에 그는 “나의 왕이시여, 나의 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나이다.”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두 형제는 나름대로 그 목적을 따라 열심히 살았습니다. 부자가 되고 유명인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맛을 잃지 않은 소금처럼 가치 있게 사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치는 사랑의 섬김에 있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되거나 유명인사가 되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들을 부자와 유명 인사를 만들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를 세상의 소금으로 쓰시려고 부르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소금답게 가치 있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소금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성결하게 살아갑니다.(깨끗하게,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라)
헬라인들은 소금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며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소금을 가장 깨끗한 해와 바다에서 왔기에 가장 순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신구약 성경도 소금을 순결과 성결의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향을 제조할 때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출30:35)
▶(레 2:13)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하였습니다.
소금의 기능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①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결을 깨끗케 하는 정화제이며 ②방부제이고, ③소독제이며 ④치료제입니다.(신생아를 소금으로 씻음)
소금은 소금답게 맛을 낼 때에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답게 사는 성도는 세속에 오염되지 않고 오히려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며 성결하게 사는 성도인 줄 믿습니다.
장로교의 모펫트 선교사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비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님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반대의사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모펫트 선교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은인이자 내 신앙의 선배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분의 동상을 세운다면 나는 도끼로 그 동상을 때려 부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우십시오. 또 다시 나는 부술 것입니다.” 선교사 모펫트 박사는 “예수천당 마귀지옥”을 외치며 전도하는 최권능 목사님의 충정을 잘 알아 그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결국 선교사의 간절한 만류로 기념비나 동상은 세우지 않고 기념관만을 짓기로 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소금답게 사는 사람들은 기념비나 동상을 전혀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순결하고 성결한 소금답게 자신을 지켜 세속에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그들은 물 속에 녹아버린 소금처럼 자기의 모습을 남기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머물었던 곳에는 오직 주님과 주님의 영광만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마23:27)책망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성결이 아니라 외식과 위선일 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성결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는’ 성결 곧 표리가 일치하는 성결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의 소금답게 성결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소금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희생하며 살아갑니다.(자신을 죽이고 겸손하라, 주님 닮아 온유하라)
로마인들은 “세상에서 해와 소금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소금의 필요성과 유익 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해가 없으면 그 무엇도 생존 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존재와 성장과 결실에 있어서 태양의 영향력은 필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소금이 끼치는 영향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소금의 영향은 결국 유익함을 주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곧 하늘나라의 맛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맛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소금이 그 맛을 잃지 않았을 때 가능합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그것은 아무 쓸데없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그 영향력을 상실한 소금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소금은 소금답게 맛을 낼 때에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금답데 사는 성도는 쓸모없는 인생이 되지 않고 유익하게 사는 성도인 줄 믿습니다.
복지시설 서울 은평 천사원 원장이신 조규환(76)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은평천사원은 1959년 3월 윤성렬(1885-1977)목사님이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관 관리부에 취직해 일하고 있던 조 장로님은 쉬는 날을 이용해 봉사하다가 아예 대사관 직장을 그만두고 은평천사원으로 들어갔습니다.(1959.5 )그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고아들을 외면 할 수 없었다.”며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쟁고아들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섬김의 삶이 벌써 50년이 넘었습니다. 은평천사원을 거쳐 간 고아들은 1200여명입니다. 그들 중에는 국내외에서 교수, 사회복지사, 공무원, 의사, 화가, 음악가, 사업가, 목사 등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조규환 장로님, 그에게는 자기 명의로 된 재산이 없습니다. 천사원에 들어오기 전에 갖고 있던 집은 다니는 은평 감리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바쳤으며, 급여와 판공비와 퇴직금도 은평천사원과 복지기관 등에 전액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시신도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했습니다. 천사원에 들어온 이후 원생들과 먹고 자며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조 장로님은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도와줬던 것 같다. 원생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그 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처음 결심을 잘 지켜오고 있음에 감사한다.”(라동철기자, 국민일보 2009.02.13)
세상의 소금 같은 성도, 그 맛은 자신이 녹아지는 희생에서 비롯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16:24)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요 2장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소금 또한 녹아져야 유익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소금답게 유익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結論: 신학자 칼바르트는 세속화를 가리켜 “소금이 맛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당연히 짓밟히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①성직자의 세속화, ②성도의 세속화, 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맛을 잃지 않은 세상의 소금과 같은 성도가 더욱 필요함을 절감케 됩니다. 아울러 세상의 소금답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속담이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맛을 안다.” 그렇습니다. 소금이 넣지 않으면 소금의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소금답게 ①그 맛을 잃지 않고 ②녹아(희생)지고, ③가치 있게, 성결하게, 그리고 유익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추천 설교 > 박재선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3가지 터를 넓히자(사 54장 1-3절) 2010. 8/ 8 주일 낮 (0) | 2018.10.17 |
---|---|
빛으로 살아야 할 聖徒(마 5장14-16) 2010.08/ 1 주일 낮 (0) | 2018.10.17 |
벨사살 王의 最後(단 5장24-31) 2010. 7/18 주일 낮 (0) | 2018.10.17 |
信仰人이 갖춰야 할 基本(시33장 1-22절) 2010. 7/11 주일 낮 (0) | 2018.10.17 |
香油를 드린 女人(요12장 1- 8) 2010. 7/4 주일 낮 (0) | 2018.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