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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종순목사

[스크랩] 박종순목사 설교모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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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가면서 전파하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0:5-15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이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과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복음을 전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궁극적 목적을 살펴 보면 복

음을 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성공경부 운동과 제자훈련 운동이 일

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전도하지 않는 성경공부나 제자

훈련은 의미가 없습니다.

도시마다 기독교 이름을 내건 병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본래 선교사들이

그 병원을 세울 때의 정신은 가난하고 불쌍한 병자들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병원들이 복음전도는 없애

버리고 의료 행위만 계속한다면 병원문을 닫든지,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입

니다.

주님은 부단히 열 두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전도현장으

로 파송하셨습니다.

본문은 열 두제자를 전도현장으로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는 전도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피를 물려받은 동족입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핍

박했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동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선교명령도 맨 먼저 예루살렘

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

니라"고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데서부터, 관계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전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 늘 느끼는 것입다만 내 가족이 제일 어렵고 가장 가가

운 사람이 제일 힘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

.

가령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듣는 순간부터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번,세번, 진단

을 다시 해 보고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

은 영혼이 죽어가는 문제에 대해선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박테리아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

습니다. 24시간 만에 사람의 살점을 다 파먹고 죽게 만든다는 괴박테리아의

공포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보다 더 무서운 박테리아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송두리채 파멸시키는 박테리아, 그 이름 [죄의 박테리아]입니다.

이 박테리아는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모조리 썩게 만들고 맙니다. 이 죄

의 박테리아를 퇴치하고 고치는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죄를 사함받고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것입

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 네 친척에게로 가라", "가서 그들을 건져내라". 어떤 주부

는 주걱으로 밥을 퍼서 담을 때마다 십자가를 그으며 예수 믿게 해달라고기

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느니 남편 구두를 새벽마다 싸가지고 나와 신발임자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6개월 아침 금식을 하면서 남편 구원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건성피부증 때문에 가려워 하는 남편의 등을 긁어 주면서 십

자가를 긋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

해야 합니다.

 

2. 가면서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 여러가지 입니다만 그중에 하나는 기독교는 가

면서 전파하라는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전파하는 종교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거리로 불교는 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

즈음 웬일인지 불교가 기독교보다 더 설치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면서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호흡하고 세상을

걸어가면서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6을 보면 "

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내십니다. 입산수도하는 도사처럼 찾아오는 사람

들에게만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찾아가서, 기회를 만들어서 복

음을 전해야 합니다.

찾아 갑시다. 만납시다. 기회를 만듭시다.

그리고 가면서 전파하라는 말씀의 뜻은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두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가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3. 능력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전도자에게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무슨 재주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

이르리 깨끗케 하며 귀신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당하게 될 사태들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고치

고 내쫓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둘째, 전도는 전투라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셨는데 귀신은 순순히 쫓겨가는 법이 없습니다.

귀신은 더럽고, 악하고, 나쁜 존재입니다. 귀신은 방해꾼이고, 훼방꾼입니

.귀신은 이간질에 능하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 귀신을 내쫓는 방법은

귀신보다 더 강한 능력을 받으면 되는데 그 능력은 예수 능력인 것입니다.

전도는 귀신이 점령하고 있는 영역을 빼앗는 전투이기 때문에 능력을 받아

야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지막 때 사단이 인류를 위협하는 도구로 핵무기, 에이즈

박테리아 등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고칠 것을 고치고 막을 것을 막아내고, 내 쫓을 것

은 내 쫓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주여 능력을 주옵소서.

 

4.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10절을 보면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전도 이외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전도가 과연 될까?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줄까? 그 날 나와 줄까? 그 사

람이 예수를 믿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해

야 하는가? 등등 전도 자체보다 걱정거리가 더 많게 됩니다.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마치 무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알몸으로 떠났습니

. 이유는 관광 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예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시작했고 하고 있고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 주시고 동행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아니

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여행 도중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평안을 먼저 빌라는것입

니다.

그리고 평안을 비는 행위는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도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평안이 성립됩

니다. 영혼의 참 평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둘째, 평안한 마음과 태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대장자와 말다툼을 한다든지, 입씨름을 한다든지,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양보

하고 후퇴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자를 상담요법으로 치료하는 사람은 고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환자의 심리상태를 편하고 안정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말씨와 태도가 부드럽고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태도 역시 평안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면서 한숨을 내

리쉰다든지 팔자 타령을 한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예수의 복음을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6:15에서 "

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6.지혜롭고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순결은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두가지 큰 덕목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손해만 보게 되고 순결이 없으면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전도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문서 전도라고 합니다. 입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

전도라고 합니다. 발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방문 전도라고 합니

. 온 몸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격 전도, 삶의 전도라고 합

니다.

우리가해야 할 전도는 온 몸 전도입니다. 그리고 가면서, 가서 하는 전도

라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은 매우 중요한 주간입니다.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신의 건강과 감정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다툼이나 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4) 다음 주일은 전도 대상자의 시간과 여건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5) 단 한 사람만을 대상자로 작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는 실패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6) 대상자를 계속 양육해야 합니다.

(1) 좋은 본을 보입시다.

(2) 덕을 끼칩시다.

(3)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합시다.

(4) 계속 양육합시다.

가면서 전파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도 가면서 전파하라".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605

분 류 : 설교

 

 

51

제 목 :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2:1-10

 

 

요나는 주전 790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활동상황은 요나서 이외에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지마는 다른 민족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본

서의 특징입니다.

어느날 요나는 그당시 최대 강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

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길이 멀기 대문입니다.

육로로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둘째 감정문제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가였습니다.

셋째, 선민사상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요나를 포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만을 선택했다고 믿었습

니다. 그런에 앗수르 서울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요나의 신앙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곳으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원인이 요나

에게 있음을 발견한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으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본서의 줄거리입니다.

 

1.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유를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1:3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

"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나의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 발상과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요나의

신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9편에 나타난 시인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

"라고 했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피하면 피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4을 보면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했고 1:17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

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던져 삼키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요나가 가는 길과 하려는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선지자로 부르신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기피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기피자의 불안한 삶과 사명자의 떳떳한 삶을 비교해 볼 필요

가 있습니다.

요나의 기피행각은 그 목적지로 정했던 다시스에 가기도 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사히고 요구하시는 일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본 사건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음부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명령을 거역한 사람이 들어갈 곳은 스올이라는 것입

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현한 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음부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은 스올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부의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 앗수르의 국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배

를 탄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정법을 어기고 도피한 것도 아니었습니

. 그러한 그가 스올의 고통 속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뭣니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라는 것이었

습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거역한 것이빈다.요나로서는 그 명령을 거역할 만한 충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나라,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며 침략하려는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했던 요나는 스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요나서 2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2. 요나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기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지만 신령한 눈을 들어 성

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사람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딸만 넷을 낳은 어떤 사람이 42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귀한 아들이

라며 아들을 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날마다 귀인이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

면 즐거워했습니다. 그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귀인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야 야단을 쳤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런 저

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귀인이한테 물었습니다. "얘 구인이라 넌 엄마가 좋

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라고. 귀인이 대답은 당당하고 또렷했습니다. "

엄마가 더 좋아. 아빤 싫어 보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빠하고 안 놀거야"

 

 

 

에 야단 맞은 후유증이 남은 셈입니다.

 

그러나 귀인이 아빠가 그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야단한번 맞

고 싫어졌다는 그 감정표현을 긍정적으로 보면 진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러나 자식만을 바라보는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슬픈 사건은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모가 그 아들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 기대와 꿈의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명한 교수나 의사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나갈 한약사가 되어 준느

것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휘두른 흉기에 부모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축제에 참석한 대학생이 마음이 허전해 어느 집에 들어가

이유가 없이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파생성,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수입 오렌지족들은 한달에 600만원에서 800만원을 용돈으로 쓴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병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 시대와 병든 역사와 정치와 살마

들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2)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6절 끝을 보면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지셨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해결의 방법을 올바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피곤할 때, 고통스러울 때, 괴롭고 답답할 때 무엇을, 누구를 생

각하십니까? 파도가 철석거리는 동해안의 백사장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안개꽃 펼쳐진 들녘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를 도와 주리라고 기대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십니까?

 

요나의 고백은 다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9절 끝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

나이다"라는 요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친구란 가장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며, 그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

고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친구들은 내가 꼭 필요할 때 내곁에 있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부도, 자식도 타인인 셈입니다. 어린 자식과 아내를

남겨둔채 어느 날 남편 혼자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자식이 노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노라", "

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이 고백은 오늘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인생 삶이 피곤할 때

주님을 생각한다","나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이 고백이

곧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은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의 오침을 듣고 니느웨에 살고 있던 왕과 대신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옷을 찢고 무릎쓰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근 잇달아 터지는 대형 사건들과 패륜을 지켜 보면서 니느웨의 회

갱누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612일은 요나운동과 그리고 니느웨 운동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예수가 진실로 그 역사 속에 들어가고 가정 속에 들어가고 부모 속에 자식

 

 

 

속에 들어가면 패륜이나 죄악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교회 마당을 가득 매운체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

을 볼 때면 행복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예수를 전합시다.

예수를 말합시다.

예수를 이야기 합시다.

병든 역사,무너진 도덕, 망가진 정신이 다시 살려면 예수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 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발행일 : 940529

분 류 : 설교

 

 

52

제 목 : 저주받은 도시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1:20-24

 

 

현대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구 집중문제,

통문제, 주택문제, 대기오염, 환경파괴,범죄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 봐도 도시가 크면 클수록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도 큰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대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규모가 크면 클수록 문제도 크

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도 없

어져 버린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라든지, 폼페이 같은 도시는 없어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도시도 없어졌습니다. 그 세도시는 고라신, 벱세다,

버나움입니다. 그 세도시는 서울이나 뉴욕처럼 큰 도시느니 아닙다만 그러

나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큰 도시 구실을 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왜 없어졌는가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현대 도시의 성격 규명

과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불신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

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믿으면 회개운동이 일어납니

다만 안 믿으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도시를 사람으로 의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과정입

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가지고 있는 잘못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하거

나 핑계를 대면 안됩니다.

셋째 단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하고 믿음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낱낱이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내가 지은 죄를 숨김없이 고백해

야 합니다.

넷째 단계는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고백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단계는 사죄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고백하면 그리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고 있

습니다. 눈보다 더 희개 양털보다 더 희게 사하신다고 약속하셨고(

1:18),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고 했습니다 (44:22). 그리고 동이 서에

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가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했습니다 (103:12).

여섯째 단계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회개는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거기서 발을 빼고 손을 씻고 그 현장을

떠나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참된 회개는 방향을 바꾸

 

 

 

는 것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켰으며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데로 가면 안됩니다.

여덟번째 단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되돌이 근성이 있습니다. 회개했노라고 하지만 옛날 그때 거기

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른다면 죄길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하

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 도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

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도시들은 어떻습니까? 서울 장안에 사는 사람치고 교회를 모르는 사

람과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니 서울 시민 1200만을 생각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이웃, 내 친구들 가운데 고라신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없으면 그 다음은 멸망 밖에 없는 것입니다.

 

2.교만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

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 가겠다고 설쳤던 루시퍼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원에 모여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돌을 만들고 역청을 만들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의 높이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하나님을 낮추고 자

기네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탑은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쌓으려 했던 교만의 탑은 지금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역시 교만과 패륜과 부도덕과 불신

때문에 유황불에 녹아 없어졌습니다.

개인도, 도시도, 역사도, 왕조도 교만하면 안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바벧론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왕위에서 쫓겨갔고, 페르시아의 국무총리 하만도 교만 때문에 죽었습

니다.

 

영국의 신학자였던 테일러(Jeremy Taylor)"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

이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때 당신은 였다. 그후 여러해 동안 당신은 무

엇이었는가를 생각해봐.그것은 연약함이었다.

그 다음 당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큰 죄인이다. 당신은 이웃

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에게 빚진 자이

. 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날마다 우리는 겸손해야 된다"라고 했습니

.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대표로

조만식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청빙결정을 전하고 모시기

로 했습니다. 주기촐 목사님을 찾아온 조만식 장로님은 젊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희 교회에 부임하실 것을 허락해 주

십시오"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

를 다닐 때 조만식 장로님은 교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서는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

습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장로님은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

는 예배에 늦지 않겠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한국교회를 빛냈던 두 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다던 가버나움 도시는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버나움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가온(gaon)이라는 말이 있스빈다. 그 뜻

"베풀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체나 가진 것은 손톱만한 것인데 그것을

부풀려서 마치 세상 것을 다 알고, 다 가졌고, 다 통달한 것처럼 자기도취

에 빠져 있는 것이 교만 즉 [가온]인 것입니다. 주드(zud)라는 단어도 있습

니다. 그 뜻은 우쭐대다.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가장 적절하

게 묘사한 헬라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투포(tupho)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

"천천히 타 버리다","꺼져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

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섭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은 천천히 마

치 촛불이 꺼져가는 것처럼 천천히 타버리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교만은 언젠가는 명성도,성공도, 소유도,인기도 꺼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편 119:21을 보면 '교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주께서는 굡나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멀리 해야 합니다.

 

3.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도시들이 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까?

20절을 보면 "책망을 받았고",21절을 보면 "화가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받

았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음부에가지 낮아지리라"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땅도,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저주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

니다.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 벗은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러나 셈과 야벱은 얼굴을 돌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잠이 깬 뒤 노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됐고 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로 그 함의 자손들이 훗날 시돈, 그랄, 소돔,고모라에 흩어져 살았고 흑

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주의 반대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

가 바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

와 그리고 우리나라가 축복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복도 여러가지입니다.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명예의 복, 부부

이 복 등 그 종류가 가지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음 다 받거나 소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복을 선택해야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복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

.

 

저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제대로 먹고,입고,

쓰는 것이 한스러울 만큼 부러웠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제가 제일 가

난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은 저에게 예수 믿는 것과 공부하는 것은 그

만두어선 안된다면 논을 팔고 밭을 팔아 공부를 시켜 주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엇이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박도둑놈

이 됐을까?깡패가 됐을가?아니면 벌써 죽었을까? 생각할 수록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몸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감격으로 다가섭니다.

여러분, 불신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교만은 저주와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립시다.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저주받아 죽어가는 내 가족, 내 친척,내 이웃, 내 친구들을 건져냅

시다.

저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사랑하는 예수

내가 받은 구원을 증거합시다.

저들을 저주의 무더기 속에 방치해 둘 수가 없습니다.

건져내야 합니다.

살려내야 합니다.

함께 축복받고 영생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발행일 : 940522

분 류 : 설교

 

 

53

제 목 : 한나의 성공비결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삼상 1:21-28

한나는 엘가나의 아내였고 불임증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무엘을

낳아 유명한 선지자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32녀를 더 낳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성공을 한 것입니다.

 

1.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1:10을 보면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했고,

1:12을 보면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고 했고, 1:17을 보면

기도하여 구한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0을 보면 아들 이름을 사

무엘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나의 기도로 문제를 푼 사람입니다.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불가능을 기도로 해결한 것입니다.

돼지는 병들어 드러누웠을 때 외에는 하늘을 보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아리도, 참새도, 소도, 말도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지만 유일하게 돼지

는 땅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

람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위를 바라보

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돼지처럼 병들어 드러누워야만 하늘 바라보고 소리친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나는 기도로 문제를 해결했고 불임증을 고쳤고 자녀교육도 성공했습니

.

 

2. 은혜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1:18을 보면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한나가 당시 제사장인 엘리에게 한 말입니다만 그러나 그것

은 그녀가 평소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고 갈망했는가를 설명해 주

고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든지 갈망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없인 못한

"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기간은 잠깐입니

.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그 길이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사는 사람은 그가 누리는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

길고 영원하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했던 한나는 그의 원대로 은혜를 받았고 그 결과 자

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3. 믿었기 때문입니다.

 

1:18을 보면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17절을 보면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 제사장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한나는 집으로 돌아가 먹고 마시며 평안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에게 직접 응답하신 것도 아니고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응답

을 주셨습니다만 한나는 그 응답을 확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환상을 본 일도 없고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계시를

받은 일도 없지만 엘리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곳을 떠나 집으로 갔고 평안

을 찾게 되었습니다.

믿으면 믿는대로 됩니다.그러나 안 믿으면 안 믿는대로 안 됩니다.

한나의 성공비결은 믿음입니다.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믿음이 그녀에게

응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캐나다의 핼리팩스의 어느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긴급 출동한 소방

차들이 물을 뿌리고 투숙객들이 뛰어내릴 수 있도록 땅 위에 그물을 쳤습니

. 한 아버지가 자기 어린 아들을 창문을 열고 던졌습니다. 그 아이는 그

물 위에 떨어져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구조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를 창 밖으로 던질 때

무섭지 않더냐"고 그러자 그 아이는 "무섭긴요, 아버지가 저를 위험한 데로

던졌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겨 버리는 믿음 일단 맡겼으면

믿고 평안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고 합시다. 위험한 곳으로 던졌겠으

며 죽어 없어지라고 던졌겠습니까?

 

로마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신하들에게 로마의 신에게 절하고 숭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신하가 명령대로 로마 신에게 절을 하고 숭배

를 했지만 그중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드은 곧바로 투옥되

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기상천외의 인사를 단했습니다. 자기

명령에 복종한 신하는 다 내쫓아 버리고 자기 명령에 불복하다가 쫓겨난 신

하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요직에 앉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 왕에게도 충성을 다할 것이며 자기 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킵시다. 불구덩이에 집어 넣어도 믿고, 창 밖으로 던져도 믿고,

내쫓겨도 믿음만은 버리지 맙시다.

 

4.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1:28을 보면 이적으로 낳은 아들 사무엘을 젖을 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곧바로 성전으로 데리고가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녀 자신이 믿음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들도 하나님께 드리고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젖을 뗄 때까지만 양육을 책임졌고, 젖뗀 후엔 성전

에 맡겨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녀교육에 과단성이 있었음을 보여 줍

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과잉보호 속에서 자랐기때문에 커서도 마마보이 틀을 벗

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어른 예배와 같은 시간대에 맞춰 영아부

예배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처럼 어려

서부터 신앙과 예배를 가르치자는 것이고, 다른 하는 부모의 과잉보호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영아부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처음 엄마를 떨어질 때 몹시 울고 보채기만

한달만 훈련하면 적응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학원에 맡기고, 과외 선생한테는 맡기면서 그것도 막대한 돈다발과 함께

사정사정해서 맡기면서 거저 맡아주고 가르쳐주고 그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맡기는 것은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면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가정은 복받은

 

 

 

가정입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두변째 왕으로 4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 성군이었으

며 메시아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저이나 자녀 교육엔 실패자였습니다.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딸인 미갈과 정략적으로 결혼했습니다. 미갈은 냉소적인

여자였고 부정적인 여자였습니다. 본래 사랑없는 정략 결혼이었던 탓으로

부부사이가 편치 못했습니다.

밧세바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는데 우리아를 암살하고 힘으로 빼앗아 아

내를 삼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5:13을 보면 그는 수많은 처첩들을 권력을 빙자해

거느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첩간의 갈등, 적자 서자간의 갈등이 겹쳐 가

족관계와 가정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둘째 신앙교육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왕 다윗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란군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기

가 막힐 일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뒤쫓아 다니는 아들, 아들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하는 아버지, 그 집안 꼴이 뭣니까?

다윗은 정치,성공,출세, 전쟁 때문에 자녀 교육을 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30여년 전에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고 부부가 목회를 하는 목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3남매를 미국에서 낳아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3남매는 한국어도

잘 합니다만 부모말에 절대 순종입니다. 미국 아이들이 냉수처럼 마시는 코

카콜라도 건강에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고 했다면 코카콜라도 마시지 않을

정도입니다. 두 아이는 대학 다니고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순종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비결은 간단합니다. 매일 그 가정은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침에 못 드리면 저녁에라도 반드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예배시간이 복받는 시간이었고 가정교육의 시간이었고 가족 만남

과 교제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내일부터 가정예배를 시작합시다.

 

사도 행전 10정을 보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는 한 가정이야기

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 가정입니다. 로마 장교인 그의 가정이

그토록 모범적인 가정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가족 신앙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행전 10:2을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했습니

. 그리고 사도행전 10:24를 보면 "일가,친척,친구들을 모아 기다렸다"

했습니다.

그는 온 가족, 친구, 일가,이웃들의 영혼 구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만일 종교가 가정에 머무를

수 없다면 성전에 제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 범죄로 법정에 서는 청소년의 80

는 신앙 훈련이 없은 가정 출신의 아이들이며, 이혼부부의 90%는 가정 예배

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나 고넬료의 성공비결은 기도와 가족 신앙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

.

둘째, 성령을 충만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했

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윤활유와 같기 때문에 불편한 부부관계, 삐걱거리는 가족관

계를 부드럽게 해줍니다. 그리고 성령은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은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족이 성령을 받으면 태도가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생활이 변합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를 예수의 사람으로 만듭시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행복이 오고 내 가정에 평화가 오는 첩경인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에는 네 쌍의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빅토리아

여왕부부,시인 브라우닝 부부, 캐논 버틀러와 조세핀 버틀러,윌리엄 우드부

부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행복한 부부는 신앙생활을 잘 했던 부부였

습니다.

612일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해 오는

날입니다.

1) 대상을 정합시다.

2) 그를 위해 1,3,5 기도를 드립시다.하루 세번 5분이상.

3) 그에게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립시다.

4) 그리고 612일을 미리 알립시다.

5)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와 친절을 다합시다.

6) 계속 기도로 공격합시다.

7) 결과를 믿고 전진합시다.

오 주님, 나도 한나처럼, 고넬료처럼 가족구원과 신앙에 성공하게 하소서.

발행일 : 940515

분 류 : 설교

 

 

54

제 목 : 어떤 부자의 일생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6:19-31

초년 고생은 돈주고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년에는 고

생을 하고 살더라도 그 고생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진다면 고생을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초년은 행복했지만 중년기와 노년기를 불행하게

보내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초년은 행복했지만 그후의 삶은 처절한 불행으로 이

어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한 부자의 일생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편의상 부자의 일생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1. 죽기 전의 삶

 

19절 첫머리를 보면 "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

었는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의 이름이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짐작컨대 유산을 물려 받았는지 자수성가를 했든지 아니면 때를 잘 만나

벼락부자가 됐든지 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생전에 호의호식했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자색옷

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자색옷과 고운 베옷은 그 당시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이나 입을 수 잇는

의상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사치와 연락으로 꾸며졌고 안일과 방종으로 채

워졌습니다.

 

미국 문화를 파티문화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파티를 즐깁니다. 그러나 매

일같이 파티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여가도 즐겨야 합니다만 나마다 놀고 먹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여가를 영어로 리크레이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재창조(Recreation)라는

것입니다.

 

호의호식하고 날마다 파티열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던 어떤 부자의 이야

기는 그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절제한 삶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심찮게 재벌 2세들의 파행적 삶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신

문 가쉽은 타락한 재벌2세들을 가리켜 "먹고 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

고 꼬집었스비다. 먹고 입고 여가를 즐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

니다. 먹고 입고 여가를 즐기는 행위가 재생산을 위한 준비나 재충전을 위

한 것이라면 탓할 것도 없고 지탄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부자처럼 날마다 새옷 갈아입고 식도락을 즐기고 호화파티

를 열어 주지육림에 빠진다면 그것은 제아무리 제돈 쓰고 하는 짓이라고 하

더라도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결정적인 큰 잘못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외면한채 살았습니다.

빌립보 3:19을 보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

이 지적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두차례나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

.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

 

 

 

해낸 신이라며 숭배했습니다. 그때 주모자는 아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마리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이라고 숭배했습

니다. 그때 주모자는 여로보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부자는 황금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배

가 신입니다. 그러다가 멸망으로 그 삶을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나 재산이 많다는 것은 결코 죄나 악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

.

본문의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 가진 것 때문에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2. 죽은 후의 삶

 

22제을 보면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예외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은 후부터입니다.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저가 음부에서 고통중에"라고 했고 24절 끝을 보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치스럽고 화려했던 삶은 끝났습니다. 드디어 음부의 고통과 고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이은 음부를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올은 악인

이 들어가는 곳인데 신약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잘 믿고 잘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것이아니라 그

의 교만과 불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안믿으면 지옥갑니다. 어제까지 떵떵거리고 세도부리고 잘 살던

사람의 신세가 변해서 불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됐다면 변해도너무 많

이 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잠깐 잘 살다가 영원한 고통의 세계에서 들어가게 된 것입

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10:28을 보면 "몸과 영혼이 함께 형벌받는 곳"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불못,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 불과 유황이

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거기 들어갑니까?

마귀와 그 사자(25:41),믿지 않는자 (21:8),우상숭배자(21:8),범죄

한 천사(벧후 2:4),거짓선지자 (19:20)등이 들어갑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첫째, 모든 욕구가 거절당하는 곳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사로를 보내 손끝에 물을 적셔 혀끝을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나사로를 고향에 보내 다섯형제에게

전도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도 거절당했습니다. 내 맘대로 안되

는 곳,인간적 욕망과 욕구가 거절당하는 곳입니다.

 

둘째, 단절의 세계입니다.

26절을 보면 건너갈 수도 올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번가면 그것으로 끝

입니다. 되돌아올 수도 없고 기어서 나오는 방법도 없습니다. 편지를 주고

받을 수도 없고 친선방문을 할 수도 없습니다. 천주교 사람들처럼 돈많이

바치면 빠져나올 수 있다든지 기도를 많이하면 천당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

도 아닙니다.

죽는 순간 다시말하면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순간 지옥과 천당으로 갈라집

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그 누구도 어떤 노력으로 내왕이 불가능한 것입

니다.

 

지옥설교는 부담스러운 설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지옥가는 것

을 방치하지 않으려는 목사라면 지옥얘기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고통의 세계입니다.

23절을 보면 "고통 중에"라고 했고24절을 보면 "고민하나이다"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고민을 받느니라"고 했고 28절을 보면 "이 고통받는 곳에"

고 했습니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이란 편한 것, 고통

없는 것입니다. 행복찾기에 전력을 쏟는 사람들이 왜 지옥의 고통을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까?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그때마다 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그것은 부자의 다

섯형제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이 고

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부자는 한방울의 물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

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다섯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에 나사로를 보내 이 사

실을 알려주고 그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물론 그것

도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의 영원한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이라도 지

옥에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그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형제가 없습니까? 오늘 죽으면 지옥갈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이 없습니까>

내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옥간 부자만도 못하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32:32에서 모세는 범죄한 동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든지 아니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든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자신

의 생명을 내걸고 동족구원을 기도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바울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노라"고 했습니다. 내가족,

친척,내 친구, 내 이웃을 향한 영적 관심이 지옥같 부자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겔서 33:6을 보면 파수군이 자기 책임을 다 못해 성이 점령당하고 그

성 사람들이 적의 칼에 죽게된다면 "그 죄를 파수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했습니다.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는 걸 알면서도

전도하지 않은 탓으로 내 부모, 내 형제, 내 친척, 내 이웃이 지옥을 가게

된다면 그들은 불신과 교만 때문에 지옥을 가게 되겠지만 그들이 지옥가게

된 그 책임은 전도하지않은 네게 물으리라는 것이빈다. 다시 말하면 그 피

값을 네게서 찾으리라는 것입니다.

 

8년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시내 모교회를 다니는 50대 후반의 여인이 저희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등록교인이 아니기 땜분에 깊은 관심이나

돌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구역장을 통해 심방 요청이 있

어서 벼르다가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고 가

족관계도 복잡한 것같았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정신건강도 정상이 아니었습

니다. 그에게 가정의 안정과 본인의 건강을 위해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권

면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지방을 내려가는데 차중에서 갑자기 그 분 생각이 떠오르면서 궁금하고 급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떤지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는지, 가정은

 

 

 

안정이 됐는지 전화라도 당장 걸어보고픈 마음은 들었지만 고속도로였기 때

문에 지방에 그대로 내려가 저녁모임을 마친 후 교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자가 고층아파트에

서 투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그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그리고 구원의 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지옥으로 굴러떨어져가고 있는 내 가족이 있습니다.

형제가 있습니다. 내 친척이 있습니다. 내 이웃이 있습니다. 참효도가 무엇

입니까? 그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그들을 내버려둘 생각입니까?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내 친족, 내 친구, 내 이웃이 지옥불

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방관만해야 합니까?

 

대상자를 찾아 정합시다.

기도를 시작합시다. 1,3,5, 기도를 시작합시다. 금식,철야,새벽연속,모든

기도를 총동원합시다. 모세처럼, 바울처럼, 내 생명과 맞바꾸는 기도를 합

시다.

대상은 가장 가까운데서 찾읍시다. 내 가족, 내 친족, 내 이웃,내 친구 중

에서 찾읍시다.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저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맙시다. 주님께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성령께서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12, 그날은 마귀가 통곡하고 귀신이 벌벌떠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여 승리하게 하소서. 지옥 권세가 무너지게 하소서.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508

분 류 : 설교

 

 

55

제 목 : 하나님이 주신 기업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27:3-5

 

 

시편 127편은 이스라엘의 3대왕이었던 솔로몬이 읊었던 시 가운데 하나입

니다. 시의 길이는 짧지만 담고 있는 뜻이 아름답기 때문에 널리 애송되고

있습니다.

 

본편은 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2절은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 오는 불행

한 결과에 대하여 3-5절은 하나님게서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

.

 

1-2절의 요지는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켜주실 때

그 존재와 위상과 행복이 지켜진다는 것입니다.그리고 3-5절에서는 하나님

이 주시는 자녀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녀란 내가 낳은 자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낳은 것만으로 자식이 되는 것

인 아닙니다. 올바른 양육이 자식을 자식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식을 세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7:6을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

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

.

그리고 창세기 17:8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

셨습니다. 여호수아 11:23을 보면 훗날 가나안 땅을 점령한 아브라함의 후

손들이나 가나안 땅을 기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하셨고 그

들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을 주셨습니다.

신약의 경우를 보면 기업의 의미가 다분히 영적인 것으로 발전합니다.

 

마태복음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고 계시

21:7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절의 뜻은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자식을 가리켜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나 영원한 천국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것처럼 자식은 하나

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은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자손만대 물려나가야 하는 유산이며 축복입

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이 받은 기업인 가나안 땅을 오늘

가지 지키고 유지하고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의 경우도 가정과 가문을 이어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

니다.

 

말씀드린대로 기업은 지키고 전승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민족일수록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해 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재를 대하는 국민정서에도 문제가 있고 문

화재를 관리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화지 밀반출사건이라든지 도굴이 그 한 예입니다.

그리고 불교사찰이나 불상등을 문화재라는 이유로 막대한 국고지원은 물론

신개축에도 국고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하더라도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야

할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녀입니다.

제아무리 잘 지은 집도 관리가 소홀하면 금방 낡고 냄새가 납니다. 얼마전

모 교회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하룻밤 집회인도를 맡았기 때문에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원은 규모도 그려니와 시설도 최

신시설이었습니다. 건축한지 7년 정도된 건물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

룻밤을 지내며 악취와 싸워야 했습니다. 화장실 냄새가 방 안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골 여인숙 화장실 냄새와 같은 악취가 배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관리

소홀의 결과였습니다. 건축물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자식이라는 기업도 관리를 잘못하면 쓰러지고 벽에 무너지고 망가지고 냄

새나게 됩니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벽에 걸린 족자에 눈이 쏠렸습니

. 서툰 붓글씨로 쓴 족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습

니다.

"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 비난하는 것 배우며

미움받으며 자란 아이 싸움질만 하게 되고

놀림당하며 자란 아이 수줍음만 타게 된다.

관용속에 자란 아이 참을성을 알게 되며.

격려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감을 갖게 되며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 감사할 줄 알게 된다.

공정한 대접 속에 자란 아이를 올바름을 배우게 되며,

안정 속에 자란 아이 믿음을 갖게 되며

두둔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의 긍지를 느끼며

인정과 우정 속에 자란 아이 온 세상에 사랑이 충만함을 알게된다."

어떤 어머니가 교육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녀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지금 댁의 자녀는 몇살이나 됐습니까?]

[다섯살입니다.]

[서두르십시오. 5년이나 늦었습니다.]

자식은 내가 낳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믿고, 키우고,지키고, 관리해야 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회원은 1천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만든 좋은 아버지 20계명을 소개합니다.

(1) 공부하라는 말을 줄이고 먼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라.

(2) 식사시간에는 가족과 대화를 많이 하라.

(3) 자녀가 스스로 판단한 일은 존중하라.

(4)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라.

(5) 아무리 화가나도 자녀를 직접 손으로 때리지 말라. 꼭 필요할때는 벌

을 서게 하거나 회초리를 쓰라.

(6) 똑같은 일로 두번 야단치지 말라.

(7) 함께 여행하는 등 자녀와 공동의 경험을 쌓아라.

(8) 자녀가 좋아하는 책이나 어린이 프로를 같이보라.

(8) 힘든 일이라고 자녀를 참여시켜 협동심을 길러라.

(9) 자녀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말라.

(10) 똑같은 일을 두번 야단치지 말라

(11) 자녀 앞에서 신호를 어기거나,새치기,거짓말을 하지말라.

(12) 자녀와 함께 문구점과 서점에 자주가라.

(13) 가훈을 정하거나 가족놀이를 만드는 우리집만의 분위기를 만들라.

(14) 휴일은 박물관 견학,가재도구 손질,독서등으로 다양하게 보내라.

(15)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가정의 역사가 얽힌 것을 소중히 다루라.

(16) 자녀 앞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좋은 점만 이야기하라.

(17) 다 쓴 물건은 바꿔쓰고 안쓰는 물건은 재활용하는 본을 보이라.

(18) 자녀가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조리있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등 입니다.

 

요약되는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

.

어떤 사업가가 대학 총장을 찾아가 그 대학애 입학한 자기 아들에 관해 부

탁을 했습니다.

[총장님 저는 19년동안 제 아들을 키웠습니다만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

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잘못됐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부디 총장님께

서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장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19년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한 아들을 제가

4년 동안에 이해하고 바로 잡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도로 키웁시다.

씀으로 키웁시다. 믿음으로 키웁시다. 진학보다,성공보다,성적보다 더 중요

한 것은 건강입니다. 그리고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 자

녀의 믿음이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7:16을 보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하

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

이라는 것입니다.

런던에 있는 국립미술관에 들어가면 "코르넬리아와 보석"이라는 제목이 붙

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림은 두 여인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입니다. 한 여인이 코르넬리아에게 자신의 진주목걸이를 보여 주면서 당신

의 보석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코르넬리아는 자신의 품에 안고 있

는 두 아들을 바라보며 이 아이들이 나의 보석이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의 그

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상급으로 자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

급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갈무리 하지 못한다면 그 상은 때로 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벤자민 스포크박사의 [육아법]이라고

말합니다. 전세계의 어머니들과 정신과 의사들과 소아과 의사,교사,심리학

자들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스포크는 말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다루고 가르치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정신과의사,심리학자,교사,사회운동가,

소아과 의사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부모들이 물

려받은 유산은 오늘날에도 타당하며 놀라운 결과를 낳을만한 생산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금메달리니스트는 그 메달을 다른 사람의 목에 걸어주지 않습니다.

자기 목에 걸고 자기가 보관합니다.

흔히 자녀교육을 부모는 포기해 버린 채 특정한 기관에 맡기면 되는 것으

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교육의 경우도 부모가 올바로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최대한 교육시걸과 재원을 투자해야 합니다.

만일 자녀가 잘못되고 그 삶이 망가졌다면 그것은 일차적인 원인과 책임이

부모와 가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더 빛나게

해야 합니다.

 

3. 젊은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다고 했습니다.

젊은시절에 낳은 자녀는 그 부모가 노쇠했을 때 그 부모를 보호하고 그 영

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전쟁은 창이나 활이 주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전통에 화살이

떨어졌다면 그 장군은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자식을 전통에 가

득 꽂혀있는 화살로 비유했습니다. 그만큼 든든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자식

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는 언제나 두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지식 때문에 영광받게 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때문에 얼굴

을 들지 못하지도 모르는 불행한 가능성입니다.

열왕기상 15:26을 보면 나답이라는 왕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라고 했습니

.

나답 왕은 아버지처럼 못된 왕, 나쁜 왕이된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가였던 스펄젼(Spurgeon)목사는 "우리 교회에는 2700명의 교인

이 있다. 그들 중에는 때때로 제명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어려서부

터 믿음생활을 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페르시아 격언중에 "만일 당신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자

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라 이유는 그들이 행한 모든 선행의 공로는 결국 당

신에게 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영광이 되고 자랑이 되려면 부모가 그 자녀에게 신앙의 영

향과 유산을 물려 주어야 합니다. 주의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

. 내가 물려준 신앙의 유산만큼 자식은 나에게 영광이 되고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며 화살같은 자녀들을 정성과 기

도와 말씀과 믿음으로 키웁시다.

 

발행일 : 940501

분 류 : 설교

 

 

56

제 목 : 실패에서 성공으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21:1-6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 가운데 하나입

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고 그곳에 다시 사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과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다

시 성공할 수 있다는 두가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가지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실패원인

 

조건없는 실패는 없는 이유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원인없는 실

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한 이유

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1)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리잡던 어부

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주님은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셨고 3년동안 훈

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가 처형당하자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주셨

습니다. 돌아간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다른 제자

들도 따라 나섰다고 했습니다. 이미 3년전 떠났던 곳으로 그들은 되돌아간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경륜이나 연배에 있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

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점에 있어서 수장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그가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러 간다"고 나섰더라면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나서는 바람

에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서게 된 것입니다.

 

주경학자들 가운데는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다고한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기 때문에 갈릴리로 다른 제자들은

데리고 가기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

락은 허탈감과 실망감 때문에 십자가의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마을 갈

릴리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은혜를 받고 주의 종이 되

기로 결심한 후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동안 신학을 공부한 후 경

기도 시골마을의 전도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6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전도사

대우라는게 형편없었던 때였습니다.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7분의 1도 되지

않는데다가 전도사를 괴롭히는 몇 사람이 사사건건 문제를 삼고 나섰습니

. 마침 그 무렵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하다며 승진발령을 내

줄테니 다시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주저치 않고 짐을 경기도 시

골교회를 떠나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친구들이 도와줘야

먹고 사는 신사게 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죄짓고 살던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허영에 들더 살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결국 허영에 들뜨고 말 것입

니다. 불행했던 과거만을 곱씹는 사람은 행복해질 겨를이 없게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적이며 영원적이며 전진적입니다.

[앞으로 앞으로]의 종교이지 [뒤로 돌아가]의 종교가 아닙니다. 성찬식에

서 참석하고난 어떤 남자교인의 농담이 생각납니다. 예수 믿고난 후에도 상

당기간 동안 끊지 못했던 술 담배를 세례받고난 후 끊었다는 것입니다.

리고 처음 성찬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포도주 한모금을 마시는 순간 옛

날 생각이 불쑥 나더라는 것입니다.크리스탈잔에 부어마시던 포도주 생각이

나서 그 생각을 지우느라 혼이 났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초신자의 농담이긴 합니다만 성찬식 포도주를 마시면서 옛날

에 놀던 술집이나 그 술맛이 생각난다면 안될 일입니다.주님의 십자가를 생

각하고 그 피의 공로로 죄사함 받아 들어가게 될 영원한 천국을 생각해야합

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옛동네, 지난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두려

워할 필요도 없고 그리워할 필요도없습니다. 오늘이 중요하고 내일이 더 중

요하기 때문입니다.

 

2) 작당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해도 저희가 우리

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날 배타고 함

께 나선 사람들의 명단이 2절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도마,나다나엘,야고

,요한,그리고 다른 제자 둘입니다. 그러니까 11제자 중에 일곱 명이 작당

하여 고기잡으러 떠난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군중심리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군

종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여야 할 것 없이 선동정치에 능숙합니

. 그리고 저마다 국민을 내세우고 애국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당리당략을 위한 선동과 흑색선전과 모략중상으로 얼룩져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6명이 줄에 묶인 것처럼 따라 나섰다면 그 당시 그

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 누구와 작당하느냐,누구와 친하느냐,누구와 자주만나

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신앙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의 근대사 교수였던 킹슬리(kINGSLEY

1819-1875)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아름

다운 인생을 살 수가 있었으며 명문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느냐"고 그의

애답은 "나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

한 그 친구는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과 작당하기를 즐기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과 작당하기를 즐기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색잡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면 석달을 못넘기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짝을 잘 만나야 합니다.

 

3) 불신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

지라"라고 했습니다. 고기잡는데 정신팔린 사람 눈에 예수가 보였을리 없습

니다. 사람도 물고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돈에 미치면 자나깨나 돈만 생각합니다. 여자에 미치고 남자에 미치면 자

나깨나 사람만 생각할 것입니다. 도박에 미치면 도박만 생각하고 권력에 미

치면 사람을 죽이고서라도 권력찬탈에 혼신을 기울입니다.

 

불신으로 눈이 가리워진 그들에게 예수가 보일리 없습니다. 믿음이 떨어지

 

 

 

면 실패,슬픔 야속한 것, 억울한 것, 원망스러운 것, 죽은 것들만 보입니

.

 

그러나 믿음을 회복하면 갈릴리 바닷가에 웃음띤 채 서 계시는 예수가 보

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회복이 필요하고 부활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성공원인

 

6절 끝을 보면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그들이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빈손이 차고 넘치는 축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보십시다.

 

1)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

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한 장면이 나옵니다.

우린 여기서 실패자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예수님 사이의 진솔한 대

화를 보게 됩니다. "있느냐""없나이다"

제자란 부르심에 응답하고 물으심에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대답의 사람,응답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석을 부를 때 대답을 안하면 결석이 됩니다. 그리고 법정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지금도 졸업도 못합니다.

대답이 시원찮거나 회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임받기가 어렵습니다.

부르시든지 빨리 대답하고 그 앞에 대령해야합니다.

상전이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라고 부르면 대기하고 있던 집사나 하인

은 재빨리 ", 밖에 대령중이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때 자리를

비우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주일낮 주일밤 수요

일밤 금요일밤 그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2)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하셨고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 배 오른편과 왼편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던집니다. 그리고 배 앞부

분이나 뒷부분에도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잡지 못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던져라' 이 명령은 이미 수십번 되풀이해서 던졌던 실패의

경험을 다시 해보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을 때 성공

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비슷한 장면이 누가복음 5장에도 나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헛수고의 연속뿐이었습니다.

때 그곳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르리 잡으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며 순종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르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3

년전 부름받을 때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결정한 오른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결정한 오른편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에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

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한다면,

장사꾼이 돈을 못번다면,

교육자가 교육에 실패한다면,그것은 큰 문제이며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는 실패의 연속으로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허탈감에 빠졌던 갈릴리 어부들이 성공한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살아서 찾아오신 예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실패로부터 해방되고 성공의 깃발을 꼿는 비결입니다.

나를 믿고 경험을 믿고 배경을 믿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조건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깨어지는 바람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실패와 허탈과 절망의 바닷가에 찾아

오신 예수를 만나면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내 경험과 내 생각과 내 상식에 안맞더라도 즉시 지금 순종하십시

. 즉 예수 방법대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반드시 고기를 잡는 성공이 올

것입니다. 그날 아침 디베랴 바닷가가 예수님을 모신 축제의 자리가 됐던

것처럼 우리네 실패와 고통의 자리도 축제와 성공의 잔치자리가 될 것입니

. 예수님이 계시면 말입니다.

 

발행일 : 940424

분 류 : 설교

 

 

57

제 목 : 배가 되기 위하여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35:9-15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

니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돈벌고 싶고 출세하고 있고 행복하고 싶은 욕망

을 가지고 있지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었고 원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성공을

한 것입니다.

 

장자가 받는 축복을 원하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원하는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더니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더니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원대로 다 얻었습니다. 그 성공비결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은 오

늘 우리의 성공비결이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1. 그는 성공과 복을 갈망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형인 에서와 시간적인 차이는 얼마되지 않은채

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제도상 장자와 차자의 차이는 엄청

났습니다.

모든 권한과 재산권은 장자의 몫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이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습니

. 물론 그의 거짓말과 행동은 그 어떤 경에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습

니다.

그러나 복을 원하고 바라는 그 태도와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형을 피해 하란으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아내감을 만

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 그는 14년 동안을 참고 기다리

며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라면 참고 바라고 힘쓰는 사람이었

습니다.

대부분 성공한 위인들이 지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목적지향적이라는

것과 부지런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정한 목적을 향해 부단히 도전하고 전진하는가 하면 모두가 부지런합

니다.

성경은 게으른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개미에게 배우라고 했고 일하기 싫으

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

라고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면 부지런하고 열심을 기울여야 합니

. 하물며 영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열심과 노력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제단신앙 때문입니다.

 

창세기 2818절을 보면 형을 피해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벧엘에서 하룻밤

을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습

니다.

 

31:54을 보면 야곱이 산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고 35:14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부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28장이나 31장 그리고 35장의 경우는 야곱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떠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이나 환경이 안정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때를

따라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

.

영국의 한 신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인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거기에 뽑힌 것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있는 어린이

둘째는 아기를 목욕시키는 엄마

셋째는 대수술에 성공한 외과의사 순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답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은혜받고 성전계단을 내

려가는 그리스도인의 그 표정,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없는 행복한 표정이며 마음이며 순간인 것입니다.

은혜받고 감격하는 여인의 모습은 모나리자에 비할 수 없고 그 얼굴은 미

스코리아에 비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우리가 성

공하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늘 만나야 합니다.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

니다.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방법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취급하면 안됩니다.

 

바른 예배를 위해 몇가지 안내를 드립니다.

첫째, 정한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새벽,,,정한 날, 정한

시간에 열심으로 나와야 합니다.

둘째, 정한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거리관계나 교통수단의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시간으리 지켜야 합니다.

셋째,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 마음 태도 복장 헌금 등 미리 미리 준비해

야 합니다.

넷째, 모든 모임보다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가령 따로 둘러앉아서 회의를 하는 것 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가 우

선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며 예배가 교회의 최우선기능이며 과업인 것

입니다.

다섯째 예배는 생활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의상 그리고 형편상 예배의 시작과 마침을 정하고 예배를 드립니

. 그러나 예배는 끝이 있으면 안됩니다. 주일 낮예배가 끝나면 바로이어

삶의 현장으로 나가 생활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 그리고 목

숨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3. 기도생활 때문입니다.

창세기 32:25을 보면 얍복강변에서 벌어졌던 야곱의 영적 전투장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가솔들은 데리고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청천벽력같은 급보

가 전해졌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겼던 형 에서가 400명 장정을 이끌고 야곱을 처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습니다.

그는 이런 저럭 궁리끝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의 기도를 천사와의 씨름이라고 표현했

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천하장사 이만기와 국민학교 4학년 김복동이가 모래판에

서 씨름을 한다면 그 씨름판이 어울릴 것 같습니까? 하물며 천사와 야곱의

씨름, 이것은 하나마나한 씨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천사를 이겨야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절박한 믿음 때문에 밤이 새도록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씨름을 계속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판정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기도로 이겼고 기도로 자신의 문

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그날 밤 얍복강 나루터

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야곱의 생애는 형님이 휘두른 몽둥이로 막을 내렸을

것이빈다.

우린 여기서 참으로 성공하고 문제를 푸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됩

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즉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놀라고 당황합니다.

둘째, 걱정하고 절망합니다.

셋째, 방법을 찾습니다.

넷째, 방법을 동원해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다합니다.

다섯째, 해결이 안되면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신앙적 접근입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방법이 있

습니다. 야곱이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방법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야곱은 뛰어난 기지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임기웅변력도 뛰어났

습니다.

그러나 생사 흥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만이 해결의 길이며 하나님과의 대면만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

니다. 진실로 해결을 원한다면 축복을 원한다면 지금 기도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아야될 축복을 받았습니

. 그런가하면 아버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축복

했습니다. (28:3).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창세기 3142를 보면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

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외삼촌께서 나를 공수

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

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자신이 복을 받고 부자가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창세기 359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

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야곱의 성공과 복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

게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미국 뉴욕 맨하탄 75번가에 [해피 유치원]이라는 심판을 내건 유치원이 성

업중에 있습니다. 이 유치원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개를 맡아 돌보아 주

는 개 유치원입니다. 그런데 사람 유치원보다 개 유치원이 훨씬 더 사치스

럽고 시절이 좋습니다.

 

뉴욕의 언론은 이곳 [탁견소]를 개 사교클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운동기구를 설치해 개 헬스클럽도 만들어 놓고 개들에게 입힐 옷을 맞추주

는 고급 부티크 [파큐 애비뉴]도 성업중입니다. 그리고 전속 훈련사가 훈련

을 시키고 수의사가 건강을 체크해 줍니다. 돈만 더 내면 개인교수제도를

적용해 일대일로 교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교습비는 단체받은 주 6250

러이고 개인교습비는 시간당 150달러입니다.

 

문제는 개들은 그러한 특별배려에 대해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 사는 집에서 딩굴고 뛰노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가관인것은 개들이 노는 꼴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위하고 만족감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입니다.한쪽에서는 개 유치원, 개 사교클럽이 성업중인

가하면 한쪽에서는 사철탕집이 성업중입니다.

지금 우리는 개 사교클럽같은 세상 것들 묻힌 채 그것들이 행복이고 가치

있는 것들인 양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내 영혼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

입니다.

 

1925년도에 노벧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영국의 극작가이며 비평가였던 버

나드 쇼(Grorge Bermard Shaw) '비참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를 놓고 빈둥거리며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한가해지면 불행이나 행복을 따지게 됩니다. 그러

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기도하고 주님 섬기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생

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라며 노래부르는 마이클 잭슨은 코

를 포함해 두번이나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부터 피부에 흰반

점이 생기는 백반증으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가 무대에 설 때나 외출

할 때 얼굴에 회떡칠에 가까운 짙은 화장을 하는 것으니 얼굴에 번지고 있

는 백반증세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명예,인기를 다 얻은 그 사람이지

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시사주간지 뉴스워크지는 최근호에서 '미국 10대들 꿈을 잃고 산다"라는

특집기사를 썼습니다. ,마약,이혼,범죄등으로 뒤범벅된 미국사회 속에서

10대들은 꿈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면 그곳이 미국이든 구라파든 동부이촌동이든 압구정이든 불행

해집니다. 내가 행복하고 복을 받고 배가되려면 하나님의 은총의 우산아래

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품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손안에 잡혀야 합니

.

 

발행일 : 940417

분 류 : 설교

 

 

58

제 목 : 사는 길로 인도 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33:10-11

 

먹으면 사는 약이 있는가 하면 죽는 약이 있습니다. 극약이나 독약은

먹으면 죽습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이 있는가 하면 섭취량이 많을수록

병의 원인이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걷는 길도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라고 했고 []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 가을 요한복음을 읽던 중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는 주님의 말씀을 명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라는 말씀

이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해 성탄절 저는 교인들에게 []이라는

붓글씨를 써서 카드 대신 보냈습니다.

얼마후 모 일간지가 교계 지도자들의 칼럼을 연재하면서 칼럼 제목을

[]이라고 정하고 제가 쓴 []題字로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야할 길은 두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사는 길과

죽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길과 영멸의 길,천국길과 지옥길

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먹으면 죽는 음식인줄 알면서 일부러 먹는 것은 자살행

위입니다.

얼마전 텔레비젼 교양프로에서 실험관 속에 실험용 새끼 쥐를 넣고

그 속에 담배 연기를 불어 넣었더니 그 자리에서 쥐가 죽는 것을 보았

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외로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는 길은 제

쳐두고 죽는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담배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있는 방에 문

을 닫은 채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고 그 연기로 방안을 채웠을 때 신

생아에게는 치명적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산모와

신생아가 있는 방안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살의가 있는 사림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죽는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눈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331-9절은 파숫군이 자기 할 일을 다하지 않았을 때 오는

불행과 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은 높은 망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야 합니다. 만일 적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만일 파숫군이 졸

거나 딴짓을 하느라 나팔을 미쳐 불지 못해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면 그는 그 책임 때문에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파숫군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숫군을 삼았

"고 했고 7절을 보면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높은 성루에 올라가 파수를 서는 사람은 특별히 뽑혔거나 지정된 사

람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뽑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만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영광입니다만 영광보다 더 무거

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수만명의 축구선수 가운데서 국가대표팀으

로 뽑히는 것은 축구인의 최고 영광입니다. 그런가하면 대표선수는 한

국의 영예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습

니다. 그러기에 운동장에 나서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선택된 사람이라고 말씀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고 그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해 주

셨습니다. 그만큼 선택된 사람들은 책임이 큰 것입니다.

 

2. 파숫군은 경고의 책임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

"라고 했고 7절을 보면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

들에게 경고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고의 책임에 대한 원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대로 경고해야 합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경고하라"고 했습니다. 개 발자국 소리를듣

고 너는 나팔을 불어댄다면 큰 일입니다. 바람에 나무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적군의 기습으로 알고 나팔을 불어도 큰일납니다. 제대로 들어

야 합니다.

921028일 휴거 소동은 귀신이 속삭거리는 소리를 하나님의 소

리로 잘못 듣고 나팔 불어댔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파숫군에게 시시때때로 이상한 환청,환음,환상을 들려

주거나 보여 주면서 교란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계시인양 위장하기도 하고, 진리인양 포장을 해서 파숫군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파숫군은 "내 입의 말을 듣고"라야 합니

.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경 외에 다

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파숫군이 되려면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정신차리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미하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에 귀 기울이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들립니다. 시끄럽고 복잡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

지 않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7절 셋째 줄을 보면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라고 했

습니다. 하나님은 파숫군을 통하여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파숫군

에게 미리 알려서 경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마이크로폰은 성능이 아주 좋은 것입니

.

제 육성만으로는 이 넓은 방안을 울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확성장치

를통해 저 먼 구석까지 제 설교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줄이

끊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면 고성능 마이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인격이 고매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인물이 출중해도 소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파숫군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

신하여 경고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파숫군은 들은대로 받은대로 본

대로 전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클린턴을 만나러 간다면 그 친서

를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대통령을 대신해 옐친을 만나러 간다면 그 책임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가을 대신하여 파숫군의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어떻게

소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1892년에 내한한 스왈른 여선교사가 황해도 안악 장날 장터를 돌며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안악골에는 김익두라는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장보러 나오는 장사꾼들은 성황당에 들러 제발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돌맹이 한 개 집어서 던진후 장터에 나오곤 했습

니다.

그런데 스왈른 부인이 장터에서그 김익두를 만났습니다. 전도지를내

맬며 예수를 믿으라고 하자 김 익두는 전도지를 받더니 콜르 풀어 버

리는 것입니다. 화가 난 스왈른 부인은 김익두에게 "당신 오늘밤에 썩

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밤 김익두는 내내 코가 썩을까봐 걱정하다

가 다음날 스왈른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내 코가 썩지 않겠느냐고 물

었습니다. 그러자 스왈른은 "예수 믿으면 코 안 썩습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김 익두가 예수를 믿고 한국 초대교회 거장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코가만 썩는 것은 아닙니다. 심장도, 신장도, 혼도,

영도 다 썩어 죽고 맙니다.

파숫군은 그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날 스펄젼(Spurgeon)목사가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가 반

색을 하며 인사를 청했습니다.

"조님 오랫만입니다. 전에 한번 뫼신적이 있습니다."

"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그러실 것입니다. 14년 전이니까요 그때 손님께서 이 성경책을 주시

면서 전도를 하셨는데 그때 저는 이 책을 읽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

니다."그의 손에는 낡고 빛바랜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파숫군은 입을

다물면 안됩니다.

 

3. 파숫군의 책임은 무겁고 큽니다.

 

8절을 보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파숫군의 책임을 다 못하면 둘다 죽게 됩니다. 성 안에사는

백성도 죽고 파숫군도 죽게 됩니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아도 그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맙니다. 본문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 책임을 철저하게 묻겠

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며 워털루전쟁 영웅이었던 웰링턴(Arthrur

Sellington)장군에게 "총사령관이 행군 명령을내리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라고 묻자 그는 '진군하여 싸우는 것이다. 성공의 책임은 사령관

에게 있다. 만일 출발하지 않는다면 총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습니다.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음으로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고 자식

이 죽고 부모가 죽는다면 그 파숫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 천국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식이 지

옥을 가게 된다면 그 파숫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4. 사는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떠나서사는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

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했습

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앙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런

데 그 길을 떠나 죽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사는 길로 인도하

는 것이 교회가 할일 입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신부가 결혼을 앞두고 혼수감 준비하며 장농,반지,시계,,드리

,아파트,자동차,전자렌지,냉장고,숟가락,젓가락 사러 다니다가 지쳐

쓰러져 결혼식날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그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이 중요하지 혼수감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구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회의하고,세미나하고,결의하

,조직하느라 정력과 시간낭비하고 정작 전도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

면 죽은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87세 되던 해 알렉산더 메더(Alesander Mather)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죄가 아니고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그런 전도

자를 100명만 보내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야 지옥문을 부술 수 있

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본문 20절을 주목합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대로 심판하리라."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척, 내 친구, 내 동포를 사는 길로 인도합시

.

죽도록 내버려두지 맙시다.

 

발행일 : 940410

분 류 : 설교

 

 

59

제 목 : 확실한 증거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1-5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온갖 이단들이 기독교의 진리와 유일성을

음해하고 파괴공작을 계속했습니다만 그러나 기독교만이 지니는 유일

성 때문에 전세계 인구이 3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기독론 중심의 이단들입니다.

를들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다든지, 아니면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도 있고,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가 하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에수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불교나 유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도 존재할 수가 없고, 신앙도 성

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

는 증거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9:15을 보면 어떤 사건의 사실 여부와 진실 여부를 증언하려

2-3명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실 증명은 2-3명의

증인이면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와 증인이 부지기수입니다.

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가 너무나 많고 확실합니다. 몇가지 증

거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도행전이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1을 보면 사도행전을 받은 사람이 [데오빌로]라고 했습니

. 데오빌로는 그 당시 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누가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데오빌로에게 보냈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생애를 사실대로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

.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데오빌로는 로마의 고관으로 예수님

을 영접했고 그 나애 도미틸라(Domitilla)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AD 96년 도미시안 황제 때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당시 로마의 고관이었던 [데오빌로]에게 보낸 공식 문서

이며 기독교 변증문입니다. 공식문서와 변증문에 어떻게 거짓증거를

써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때 누가가 보낸 사도행전이 거짓말 투성이었다면 데오빌로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끔씩 역사 기술의 오류나 왜곡시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잘못된 역사기록이나 왜곡된 부분들이 만천하에 드러나

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사도행전의 경우 만일 위증이나 오류가 있었다면 그 당시는 물론 훗

날 수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과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

.

그러나 기독교 2천년 동안 사도행전의 정경성과 정당성을 흔들리지

않은 채 초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친히 나타나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5:4-8을 보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

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9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후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니라"고 했습니다.

주경기 카알(Carr)에 의하면 다시 사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

나 자신을 보여 주신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에게 (28:9)

(2) 베드로에게 (24:34,고전15:5).

(3) 글로바와 다른 제자에게 (24:13-35).

(4) 도마가 없을때 제자들에게 (16:14,24:36,20:19).

(5) 도마가 함께 열한 제자에게 (자됴20:26).

(6)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에게 (21:1-24).

(7) 갈릴리 산위에서 열한 제자에게 (28:16).

(8) 500여 형제들에게 (고전 15:6).

(9)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고전 15:7).

(10) 예루살렘 부근에서 열한 제자에게..(16:19,24:50,

1:3-12,고전 15:7).

횟수로는 열번 이상,사람 수로는 600여명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구약이 경우 사실 증거는 증인 2-3명이면 됩니

.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많은 제

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

요하겠습니까?

본문 3절을 보면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동

안 저희에게 보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40일 간을 세상에서 계시면서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 주

셨습니다. 너무나 명확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순교자들의 피가 증거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의 역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Auguste Comte)와 영국 시인 칼라일 (Thomas

Carlyle)이 어느날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철학자 콩트가 의

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새로운 종교는 기독교

가 내세우는 유치한 신비적인 이야기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에 완벽

하고 분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듣고 있던 칼라일이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니 좋은 일

입니다.그러나 그 전에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수처럼 당

신도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만

들고자 하는 종교가 생명있는 종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독교는 부활과 생명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 힘 때문에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영국의 로지경 (Oliver J.Lodge)은 영국의 물리학자였고, 버밍엄대학

의 창설자입니다. 그의 아들이 1차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했

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전사하기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버님 제가 죽더라도 제 무덤엔 오지 마세요. 전 거기에 없을테니

까요."

어거스틴(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도 어느날 아들에게 '내가 죽거

든 장지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아무데나 묻어주기 바란다.나는 바로

하나님께로 가게 될테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떳떳하고 편안합니다. 이유는 죽음

을 넘어선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300년동안 기독교를 박해했습니

. 그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습니

.

 

 

 

나병이 만연된 골짜기에 몰아넣기도 했고 사자굴에 던지기도 했습니

. 그런가하면 불속에 던졌고, 칼로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게임은

기독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예수가 로마를 이긴 것입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예수의 부활생명은 오늘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증거이며 웅변입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빈 무덤과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성경과 수

많은 증인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증인은 증

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유 역시 예수가 누구시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다

시 사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활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감사할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다시 사신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죽은 신, 대답 못하는 잡신,우상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 무덤이 없는 예수를 믿고 있

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 건전한 교단,건전한 교회에 소속돼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교히에 소속된 목사나 교인은 불행합니다.

집단이 잘못되면 교인도 낯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 사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다시

말하면 죽은 예수를 다시 살아났다고 위증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

럽겠습니까?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를 전하며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다시 사신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난 318일 새벽 6시 천호동 제일교회 김인식 목사님이 새벽 기도

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가 쓰레기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압축작업 직전의 청소차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분명

신음소리, 울음소리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레기 봉지 안에서 들

리는 소리였습니다.

미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비닐 쓰레기 봉지를 개봉하자 그

안에 새파랗게 질린 피투성이 신생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한시간 정도

지난 신상아였습니다.

추위와 세균 감염 때문에 생명이 위급했습니다. 교회로 안고 와서 난

로를 피우고 물을 끓여 사모님과 함께 씻기고 응급조치를 취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누구가가 무책임하게 버린 생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금봉지)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쓰레기 봉지에서 죽었어야 할 핏덩이가 금봉지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핏덩이를 내다

버린 비정이나 타락한 윤리 이야기는 제쳐 두기로 합시다.

만일 그때 그 핏덩이가 본능적인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신음소리를

내내지 않았더라면 그 생명은 죽음의 봉지 안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소리, 그 울음, 그 신음 소리가 살게 해 준 것입니다. 성경은 소리

내어 부르짖고, 찬양하고,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목사님에게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은 보통 일이 아

닙니다. 그 생명은 자기를 버린 생모에게 양육받고 자라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쓰레기 봉지가 금봉지가 된 것입

니다.

저는 곰곰히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

말로 나에게는 금봉지를 주신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 쓰레기에 묻힌 채 죽어야 할 조인, 죄의 비닐

봉지에 싸여 숨막힌채 질식해 죽어가던 나를 주님은 거기서 건져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금종지는 김 목사님의 호적에 입양이 됐지만 나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양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뉴스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시렵니까?

어떤 날 인도의 스테판 닐 주교가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서

류를 내밀고 도움으로 요청했습니다. 대주교는 한참 동안 서류를 들여

다 보다가 옆으로 밀어 넣으며 이렇게 물었싸브니다."당신은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까"라고 .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부탁을 드리는 우리네

열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나를 전했느냐"라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교회의 절대 과제입니다.

을 엽시다. "다시 사셨습니다."

"믿어야 다시 삽니다"라고.

아멘.

 

발행일 : 940403

분 류 : 설교

 

 

60

제 목 : 나의 객실이 있느냐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4:12-16

 

 

유대인이 지키는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 해

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첫째, 집안에 있는 누룩을 샅샅이 찾아 없앴습니다.

본래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이 되면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게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 누룩을 찾아 없앴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은 맛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

이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누룩을 찾아 제거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하고 성결한 삶

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이 맛도 있고, 모양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패된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마치 누룩없는 빵처

럼 맛이 없고 재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부패하면 안됩니다.

썩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음식도 썩으면 먹을 수가 없고, 물도 썩으면 마

실 수가 없습니다. 정치도 썩으면 끝나고 왕조도 썩으면 그막을 내립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누룩을 제거합시다. 말씀의 불을 켜고 샅샅이 누룩을 찾

아 없애 버립시다.

 

둘째, 쓴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쓴 나물을 먹은 것은 애굽의 학정 밑에 살면서 겪었던 고난을 생

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쓴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쓴 약일수록

당의정을 입히거나 캡술 속에 집어넣어 만듭니다.

그러나 쓰다고 무조건 멀리하고 외면한다면 쓴 약이 주는 효과는 기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저스는 "향료는 으깨질수록 짙은 향기를 발한다"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고급스런 향료라고 했도 10년이나 20년 계속해서 향기를 발할 수는 없습니

. 시간이 지나면 향이 날아가기 때문에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향기는 2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향기롭고 신선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에서 으깨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미 한그루 사다가 앞뜰에 심고 가꾸었습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미가 피지 않자 꽃집을 찾아가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꽃집 주인은 "잘못 아셨군요 그 품종은 척박한

땅에 심어야 꽃이 피는 것입니다. 기름진 땅보다는 모래밭이 좋고 비료를

주면 꽃이 피지 않습니다. 모래 자갈 밭에 옮겨 심으시고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 주세요 그러면 반드시 향기나는 꽃이 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

.

우린 지난날 쓴 나물 먹고 살던 때를 잊어선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쓴

나물 먹으며 살고있는 이웃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난의 삶을 쓴 나물로 기념했던 것처럼 우리

도 지난 날 죄에 묻혀 살았던 삶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슨나물을 씹으면서 자신들을 낮추었고 교만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어린 양 재물을 준비했습니다.

역사연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매년 유월절이 되면 예룻라렘

에는 100만 명으 인파가 몰려 들었고 25만 마리의 어린양이 유월절 제

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학대받고 살던 유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가

지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렸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장자가 주는 재

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천사가 넘어가 재

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

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드렸습니다. 어랜양의 피 때문에 재앙을 면했

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중요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예

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유대인은 짐승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우리는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문설주에 피를 바

르고 재앙을 면했습니다만 우리는 십자가에 흘린 피로 사망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까?짐승 땜누에 재앙을 피한 사람의 감격

이 커야 합니까? 아니면 에수님때문에 재앙을 면한 사람들의 감격이

커야 하겠습니까?

수난주일 아침 어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목사님

의 설교는 에수님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에 목사님은 에수님이 수난 기사를 봉독했습니다. 유다

의 배신, 예수님의 체포,헤롯과 대제사장에게 끌려 다니며 조롱당하시

고 채찍에 맞으신 일 그리고 마침내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따로운 프로렌스라는 일곱살난 소녀가 훌쩍거리며 울

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자 어머니는 죄송하는 표정으

로 눈인사를 보낸후 낮은 목소리로 프로렌스를 꾸짖었습니다.

"너 왜 이러니, 조용히 하려므로 " 그러나 프로렌스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더 크게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데리

고 나가라는듯 어머니와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엄마가 다그치

며 울음을 그치라고 하자 프로렌스는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이 한마디에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 소녀는 그날 위대한 설교를

한 것입니다. 훗날 그 소녀는 여류문학가 프로렌스 바클레이

(Florence Barclay)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감증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감격과 감사가

우리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도 감동이 없습니

.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감격이 없습니다. 누룩없는 떡과 쓴 나물

과 어린양의 피를 잊지 맙시다.

본문은 에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함께할 집을 준비하라

고 당부신 기사입니다. 제자들을 동네로 보내시면서 물 한동이를 가지

고 가는 사람을 만날텐데 그에게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가 너희를 인도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전에 제자들

과 함께 할 유월절 만찬 장소를 정해 놓으신 후 그들을 보내신 것입

.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나의 객실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은 나귀새끼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말씀과 이맥 상통합니다. 나귀새끼 주인에게 제자

들이 말했싸브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다"라고.

그러자 주인은 아무말 없이 나귀새끼를 내주었고 주님은 그 나귀 새

끼를 타시고 벱바게 마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은 갑옷에 긴 칼을 뽑아 든 채 백마를 타고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입성은 십자가를 지시려는 죽음의 입성입

니다.

그러기에 백마 대신 비틀거리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강림하

실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새끼 나귀를 생각해 보곤합니다. 청년 예수를 채운채

휘청거리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나귀, 그날 그 사건 때문에 나귀는

 

 

 

주님 오실 때까지 교훈과 설교의 테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때 두말없이 내놓았떤 나귀 주이;다의 헌신과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다락방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왕궁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의대 저택도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락방은 호화주택도 아니었고, 공공건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만찬은 호화판 파티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조촐한 다락방, 별로 꾸밈도 없는 다락방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있습니다만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셨을 때 주인은 두말없이

그 다락방에 내놓았습니다.

우리 여기서 [나의 객실]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주

인의 다락방이지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사건이후 그 다락방은 세계 기독교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치고 만찬상을 베풀었던 다락방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없는 나귀도 주님 태우고 유명해졌고, 값싼 다락방도 예수님께 빌

려 드리고 세계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사용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 혼자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나만 기쁘고 유익하고 만족합니다.

둘째는 남과 함께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함께 쓰는 사람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도둑맞거나 빼앗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넷째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나도 다른 사람도 그리고 주님도 기분이 좋고 기쁨이 넘칩

니다. 그것은 나귀 주인이나 다락방 주인의 기쁨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결론을 내립시다.

내 소유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 내놓을 어린 나귀는 있습니까?

우리집 공간에 주님께 드릴 객실은 있습니까?

"나의 객실이 이느냐""내가 탈 나귀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

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내가 나귀입니다.

제 몸뚱이가 주의 어린 나귀입니다.

제 심령이 주의 객실입니다.

오셔서 좌정하옵소서

내 마음이 구유이며 객실입니다.

아멘.

 

발행일 : 940327

분 류 : 설교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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