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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종순목사

[스크랩] 박종순목사설교모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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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0:18-21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다니엘은 여러가지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

습니다. 그의 신앙은 물론 남다른 성공과 출세에 있어서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벧론에 끌려간 유다 포로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바

니다만 바벧론왕국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을 보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야기

가 나옵니다.그럭 저력 누구나 국무총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이나 다

니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9: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고 창세기 41:38을 보면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니엘서 10:11을 보면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했고, 19절에서도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

.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복을 받고 성공한 것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과 명예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제시하여 줍니다.

 

1.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지친 청년 다니엘에게 어느날 기회가 다가섰습니다. 그것은

유다 포로 청년 가운데 몇 사람을 선발해 특별교육을 실시한 후 바벧론왕

비서실에서 일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벧론은 세계를 제패한 최대 강국이긴 했습니다만 사회기강은 어

지럽고 도덕은 퇴폐일로를 치닫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휩쓸린 젊은이들은

가치관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쓸마한 사

람이 없었습니다.그래서 바벧론 왕은 비록 포로들이긴 하지만 쓸만한 젊은

이들을 골라서 쓰겠다는 용인술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1:8

을 보면 왕이 허락한 진미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유

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식도와 위장을 거쳐 배설돼버리는 음식을 놓고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면 거절한 다니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때 그는 자기와 싸우고

있었습닐. 타협하느냐, 거절하느냐, 개방하느냐, 절제하느냐, 바로 사느냐,

멋대로 사느냐....

절제란 자기 욕망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을 조절하고 삶의 균형

을 지키는 것이 절제입니다.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이라도 옳지 않은 것

은 금하는 것이 절제이며 극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 그런 상

황에서 왕이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을 관찰한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위험스

런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다니엘이 타협하고 수용했더라면 하나님의 은

총은 그를 떠났을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고집과 습관을 제어하고 내가 나

를 이겼을 때 하나님의 은총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2) 중단없는 기도생활입니다.

6:10을 보면 그는 하루 세번씩 기도했고 9:3을 보면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행위입

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 연구에서 세계를 지배했던 21개의 문명 가운데

19개 문명이 자멸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과 물질주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문명과 물질숭배 문명은 자멸한다는 것입니

.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대화 통로를 개설하고 기

도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능력받아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였던 조세프 파커(jOSEPH PAKER)박사는 "그 사람의 얼

굴을 보면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늘 기

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정원에 핀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했습니다.

라디어 전파는 1초에 186천마일을 간다고 합니다. 이전파의 속도는 음

속보다 1백배나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소도는 기

도의 전파입니다. 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됩니다. 그보다 더 빠른 전파

도 음속도 없습니다.

다니엘은 그 기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

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명이

길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받은 은총이나 복은 그 수명이 길고 큽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워싱

톤이 이긴다, 아니다 진다]였습니다.

위싱턴이 진다는 사람의 주장은 "워싱턴군이 열세이기 때문에 진다"는 것

이고 이긴다는 사라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겨울 찬바

람이 불던 어느날 숲속을 지나는데 숲 속에서 사람소리가들려 그 근처로 가

보았소 그랬더니 위싱턴 장군이 얼굴을 눈덮힌 땅에 댄 채 기도를 하고 있

었소. 나는 그때 위싱턴이 이긴다는 확신을 갖게 된거요"라고.

승리와 영광과 성공을 원한다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총을

기도로 구합시다.

 

2. 큰 은총을 받은 후에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강건하게 됩니다.

18절을 보면 '나로 강건케 하여"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강건하라 강건하

"고 했고 19절을 보면 "내가 곧 힘이 나서"라고 했습니다.

노벧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개렐 박사(ALEXIS GARREL)"기도할때 심신

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적, 도덕적 스테미나를 생산하는 홀몬이 분비된다"

고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 연날리기를 해 보았습니다. 실타래에 연을 달아 하늘 높이 뛰

웁니다. 바람을 탄 연은 높이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실이 끊어지면 연은 제

멋대로 둥실둥실 하늘로 날아갑니다. 얼마나 자유롭고 멋져 보입니까? 그러

나 그 연은 버림받은 연입니다. 강물에 빠지든지 어느 마을 나무가지에 걸

려 갈기갈기 찢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의 건강이나 강건한 신앙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5을 보면 "나를 떠

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소화제, 피로회복제,신경안정제, 비타민, 알로에, 로얄제리 등 몸에 좋다

는 약은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복용하는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느날 더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진달겨

과는 약 과잉복용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은 역설이며 아이러니 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은 안 먹을수록 약이되고 먹을수록 약이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받을수록 내 영혼과 정신과 몸이 건강하게 됩

니다.

요한13절을 보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내 영혼과 몸을 강건케 하십니다. 그 은

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은총받고 힘이 난 것처럼 우리도 은총을 받아야 힘이 납니다.

이 나야 일하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주여 은총을 주옵

소서.

 

2)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19절을 보면 "두려워 하지 말라 평안하라"고 했습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나 "은혜를 받은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

께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30을 보면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

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평안이 임

합니다. 이유는 은혜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체적인 증거이기 때문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왜 두렵습

니까?

본문 19절을 보면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걱정이나 두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을 향한 관심이 다른곳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바라보고 물 위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물결을 바라

보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셋째, 야단맞을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 잘못이 있으면 두렵게 됩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 죄있는 사람은 무서워 떱니다. 고속도로를 달

리느라면 요소마다 교통경찰이 서 있습니다. 교통순찰 차나 경찰만 보면 가

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교통법을 바로 지키고

지정 속도만 지키면 심장떨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경찰 차가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따

라 붙었습니다. 빨리가면 빨리 따라가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따라 갔습니

. 40분 정도 뒤따라 갔더니 창밖으로 손을 내민 경찰이 수신호로 앞서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때 저도 손을 흔들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습니

.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없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가 가지고 있는 교향악단 가운데 싼타 세칠리아 오케스트라가 있습

니다. 훌륭한 악기들과 연주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데도 빛을 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휘자 때문입니다. 그동안 세칠리아 오케스트라

는 줄곧 객원 지휘자들이 지휘를 했습니다. 객원 지휘자는 잠깐 있다가 떠

날 사람이기 때문에 구태여 야단치고 잘못을 잡아내서 귀찮게 할 필요가 없

습니다. 적당히 구슬리고 칭찬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나 상임지휘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미세한 소리나 터치 하나하나를 꼬집고 야단쳐야 합니다.

그래야 격조높은 정상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객원 지휘자는 손

님입니다. 손님은 야단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야단치고 고쳐

주고 바로잡아 줍니다. 그렇다고 부모 버리고 손님따라 나선다면 그 자식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야단맞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야단을 맞더라도

낙심하거나 빗나가면 안됩니다.

히브리서 12:5을 보면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했고, 12:8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받고 두려움을 버립시다. 그리고 평안하게 살아갑시다.

 

3)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본문 20-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벧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그 페르시아가 다시 헬

라에게 망하고 그리고 다시 그 헬라가 망하게 될 역사의 파노라마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함부로 계시를 주시거나 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은총

을 크게 받은 사람에게만 당신의 뜻을 밝혀 주십니다.

은혜를 크게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주를 기쁘히게 해 드릴 수 있습

니다.

은혜를 받아야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평안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은총을 크게 받고 살아 나갑시다.

 

 

발행일 : 940320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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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차고 넘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16-17

바벧론 포로에서 70년만에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과업은 무너진 성

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거나 이끈 선지자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에스라,느헤미야,학개,스가랴 등이었습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예언활동을 폈습니다.

스가랴서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8장은 스가갸가 본 환상에 대하여,9-14장은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16-17절은 70년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벧론에서 예룻라렘으로 돌아

오게 된 이유와 예루살렘 성읍들이 받게 될 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

.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은즉"이라고 했습

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벧론의 침략으로 함락되면서 유다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0년동안 바벧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겠습니다.

다 포로들의 소망은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

.그러나 자기들의 힘으로 해방되거나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바벧론은 세계 최대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흥국가로

부상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주전 538년 바벧론을 멸망시키면서 유대

인들에게 해방을 주었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

했습니다.

이 사건을 스가랴 1:16"내가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해 주었을 때와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도와

주었을 때의 고마움이나 감동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해방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 그들을 긍휼히 보셨던 것입니다.

유다 민족이 바벧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싸워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바벧론 왕이 특혜를 베풀어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일으켜 바벧론을 멸망시키시고 유다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는 비단 유다민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받았고, 여러분

도 받았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일들,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했

던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셨습니다.

죄에서 건져 주셨고, 위기에서 보호해 주셨고, 시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그것을 성공이나 축복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택복권 10장을 매번 샀습니다. 그리고 당첨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105조는 하나님께 드리고 5조는 자기가

쓰겠다며 기도를 했지만 500장의 복권을 샀어도 당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도 소용없고 쓸데없다"며 기도 무용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옳은 기도입니까?

이태리의 경우 정초에 파는 복권을 30억 리라 짜리도 있습니다. 우리 돈으

로는 15억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30억 리라의 복권에 당첨된 40명을 추적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단 한명도 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명에 죽었거나 감옥

에 들어 갔거나 파산을 했습니다.

많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40명의 이태리 복권 당첨자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불행해 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그들이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

운데 건축 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는

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먹줄을 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이 보다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집짓고 돈벌고 자

식낳고 70년 동안 억눌려 살았던 욕망을 터트리며 향락을 일삼기 위해 돌아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망각입니다.

지난 날의 불행했던 기억과 불쾌했던 감정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행복한 망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망각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것은 잊어선 안될 것들

을 잊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날 받았던 은혜라든지, 하나님

과의 약속이라든지, 가난하고 불행했을 때의 겸손한 자세라든지... 이런 것

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런 것들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오늘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살아 있으며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

아야 합니다.

돈벌고 잘 살고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면 예

수를 모르는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70년 동안 유다 민족이 그토록 애타게 열망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전 건축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이유나 생존

이유도 보다 더 높고 신령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과 능력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한국 여행객이 로마 시내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덩치 큰 사내

들이 앞뒤로 막더니 마치 수사관인양 패스포트를 보자고 했습니다. 순간 깡

패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상황이 험했기 때문에 지갑을 꺼내주었습니다.

갑 속엔 5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500불을 꺼내더니 마치 위조지폐

라고 가려내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면 요즘 위조화폐가 많다는등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객 왼손목의 금빛 나는 로렉스 시계를 보더니 슬며시 500

을 지갑에 넣어주며 위조지폐는 아닌것 같다면 손목의 시계를 보자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순순히 풀어주었더니 이리저리 뜯어 보고 흔들어 보고 만져 본 후 이런 고

급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면 위험하니 주머니에 넣어주겠다며 여행객 주

머니에 시계를 넣어 준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시계를 꺼내보니 로렉스 시계는 가져가고 그 사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넣고 갔더라는 것입니다.

 

총총히 사라져가는 그들 뒤에 대고 한국 여행객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중

얼거린 말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구". 그 로렉스 시계는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

3만원 짜리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엔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참동

안 생각했습니다.

남의 것을 뻔뻔하게 탐닉하는 로마 사람, 위기를 모면하고 익살을 떠는 한

국 남자, 3만원 짜리 로렉스시계를 만들어 진짜처럼 국제 무대에 내놓는 한

국의 장인기술, 속고 속는 우리시대... 실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왜 삽니까? 왜 여행을 합니까? 왜 일합니까? 왜 공부를 합니까? 왜 자식을

낳습니까? 왜 사업을 합니까?

 

그것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있는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뜻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

. 그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

니다.

 

3. 넘치도록 다시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다시 차고 넘치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하고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고 넘치는

회복과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인 가운데 정 명훈씨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빠리 바스띠유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구라파 음악계의 거장으

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음악인이 순

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그가 사랑하는 음악이 돈과 명예와 인기

와 행복 등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인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 그 음악이 가져다 줄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 인기, 따위 등을 사랑

하게 되면 음악은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음악인은 음악 자체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성공과 명예와

인기와 돈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이 주시는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인기,행복 따위등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나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성공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면 하나님도 그 부산물도 나를 언젠가는 떠날 것입

니다.

 

본문을 주목합시다.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예루

살렘과 유다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의미합니

.

어떻게 해야 푸부하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맨 끝 순서에 놓고 틈나면 생각하고 여력생기면 감당

한다면 하나님도 나의 문제를 맨 끝 순서에 두실 것입니다.

이번 주간부터 새벽부흥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흥사경회가 시작됩니

. 이번 사경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시간시간 참석합시다.

은혜를 갈망합시다.

가족이 함께 참석합시다.

시간을 지키고 늦지 맙시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은혜는 준비한 만큼 받는 법입니다.

축복은 자기 그릇대로 받는 법입니다.

주님께 나오는 일과 은혜받는 일을 우선순위 1번에 둡시다. 은혜 못받고

은혜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업도, 장사도, 회사도 가정도 은혜 받아야 신장하고 평안하고 융성합니

. 은혜 받기 위해 마련한 잔치에 빠지게 맙시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읍시다.

 

발행일 : 940313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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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0:16-23

예나 지금이나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

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그들을 파송하신 기사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가 전도해야 될 세상

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

야를 쏘다니며 먹이를 사냥하고 상대를 만나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맹수인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의 대표적인 맹수는 뱀,독수리,전갈,이리 등입니다.

그 가운데 이리는 사납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맹수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맹수라도 사람보다 사납고 공격적인 것은 없습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개는 훈련시키는대로 한다고 합

니다. 훈련받은 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단 미친

개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외국 서커스단에서 쇼를 하는 호랑이나 코끼리 그리고 사자 같은 맹

수들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누구에게나 대들고 배신을 일삼

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지만

20년을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이 고작 하는 일이 사기,횡령,협잡,

, 폭력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것

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1. 지혜롭게 순결하라.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당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거칠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이리로 비기는가하면 뱀과

비둘기를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뱀은 하등동물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고등동물인 인간을 넘어 뜨렸습

니다. 뱀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다니던 길로만 다닙니다.

둘째 한번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셋째, 서두르지 않습니다. 신중합니다.

넷째, 통채로 삼켜 버립니다.

다섯째, 냉혈동물입니다.

여섯째,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뱀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하등동물이지만 그 지혜는 고등동물이 따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뱀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동물입니다.

 

비둘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지향적입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물을 복합시켜 보지 않고 한 가지만을 주시합니

.

둘째, 평화적입니다.

다른 상대를 공격하거나 패거리를 지어 쪼아대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순결과 평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상징으로 묫

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순결의 조화를 생각해야 합니

. 뱀같은 지혜만 강조하다 도면 순수성이 결여되기 쉽고, 비둘기같

은 순결만 강조되다 보면 지혜가 모자라게 됩니다.

지혜와 순결을 마치 자동차와 두 바퀴처럼 한 축을 중심으로 함께 움

직이고 굴러가야 합니다. 지혜만 있으면 매끄럽고 순결만 있으면 속아

넘아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고 순결한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리

때 같은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

17절을 보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

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필요한 존재이면서 고통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독수리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떤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

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누이였던 미리암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그를 괴

롭히고 반역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세를 괴롭혔습니다.바울

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9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

습니다. 그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였습니다. 금속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

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 "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의 목회 일

생동안 크나큰 가시였습니다.

40여년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

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밝힌 조심해야 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잡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

이상에서 열거한 열가지 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런지 의문입

니다.

사람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 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손해보고 길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목사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

니다.

첫째는 노노 하는 사람입니다. (NO NO PEOPLE)

항상 안된다. 못한다고 머리 흔들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입니

.

둘째는 요요하는 사람 (YO YO PEOPLE) 입니다.

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이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는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입니다 (BLOW BLOW PEOPLE):바람이

날리는 사람들.

생각도 크고 소리도 커서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일을 해야할 때는 움

추려들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고고 하는 사람입니다 (GO GO PLOPLE)

생각도 말도 크고 동시에 소신껏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노노하는 사람,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 요요하는 사람들은 삼가해

야 할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좋다고 아무나 사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처녀가 결혼이 급하다고 아무나 배우자로 정할 수는 업지 않습니까?

 

[만남]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선택과 결정은 신

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재치 (TACT)와 만남(CONTACT)이라는 두 친구가 똑같이 사랑(LOVE)

라는 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은 달랐습니다.

재치(MR.TACT)군은 현관에서 소녀의 부모를 만나 열심히 자기를 소개

하고 집안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남(MR CONTACT)은 뒷문에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구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결혼에 성공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공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 만나고 조건 만나고 타

협하고 로비하고 있을 때 은밀한 곳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빈

. 천번 만번 만나도 유익될 것이 없는 사람, 예수 믿고 경건생활하

는데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사람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3.염려하지 말라.

19절을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또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1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복음 14:1이하를 보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말하는 것, 영원한 세계의 문제등 염

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단어는 오케이(OK)

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

?

미국 하버드대학 안에 있는 비지니스 스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

국 사람이 콕(COKE)이라고 부르는 코카콜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195

국에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UN회원국 184개국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코카콜라를 가리켜 [미국 문화의 첨병] [자본주의의

우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1초에 4만병,1시간이면 144백만병, 하루면 30억병

가량이 소비됩니다.

코카콜라가 세계를 점령하게된 비결은 제조비법,독특한 광고전략,

업경영 철학, 그리고 전쟁과 권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네가지라고 합니

.

 

그러나 물만큼 그 소비량이 많은 것은 아니빈다. 코카콜라는 떨어져

도 살지만 물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세계도처

에 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산 속에도, 바다 속에도 땅 속에서도 물

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는 헛소리

가 아닌 것입니다.

 

염려는 의심과 불신이 만들어 냅니다. 의심과 불신을 내쫓으면 염려

걱정도 함께 쫓겨난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을 찾겠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

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아픔도 크고 외로움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내가 요청됩니다.

주님이 고통과 십자가의 아픔을 참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아멘.

 

발행일 : 940227

분 류 : 설교

 

 

64

제 목 :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3:10-18

창세기 13장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해 줍니다. 아브라함

과 조카인 롯은 점점 소유가 많아지면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종들과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이 잦아지게 되자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주거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13:9을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

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

게 되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처신이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합

니다.

 

1. 롯의 선택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선뜩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 되었는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산적입니다.

체를 다 보진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

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은 색깔, 생김, 크기는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은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6: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

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눈으로 보아서 이쁜 여자들

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

인이 되었고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6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기서도 []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

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클라라 스카(MRS.CLARA SCOTT)여사가 1985년에 만든 찬송의 1절 가사

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게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영원한 세계를

봅시다. 그리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2)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으로 보고 선택한 곳의 조건이 열거되어 있습니

. 그 조건이란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동

 

 

 

산처럼 아름답고 애굽땅 처럼 비옥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

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곳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재벌의 총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생수를 공수해다가 마셨고,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재배로 먹었고, 생선은 남태평양에서 잡은 것을 먹고, 그리고

보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100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 건강, 행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

. 물론 썩은 물보다는 생수를 마시고, 중금속 오염된 쌀을 먹는 것

보다는 무공해 쌀을 먹는 것이 건강과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나 건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기로 친다면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웨덴, 덴마크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

.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한가, 만족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그리고 후진국보다 자살자 수가 몇 십배 더

많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

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사람들과, 환경문제만 해

결되면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사람들이게 크나큰 경종을 울

려줍니다.

 

가난한 시골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했습

니다.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

고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3년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한 자기네 집안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만은 명문집안으로 가

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떵떵거리고 세도부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돈많은 회장의 손녀 딸이며, 그 재벌 계열회

사의 사장의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류대학은 아니지만 대학을 나왔고, 나이는 남자보다 다섯살

위인 노처녀였습니다. 얼굴은 살짝 곰보였고 고등학교 때 입은 교통사

고로 턱 밑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왼쪽 팔이 약간 굽어

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은 내개의 열쇠와 은행 통장을 준다는 것이었습

니다.

 

50평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별장 열쇠, 금고열쇠 그리고 예금통

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젊은이에게 더없는 조건과 환경이었습니다. 신부감은 맘에 들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건을 선택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습니

.

그가 그녀와 지금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인가 불행해졌을 것인

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

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이었지만 거기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죽었고 재산도 불타버렸습니다.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

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

면 바쳤습니다.

창세기 12:1-4을 보면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14:20을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

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순종했습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3천여 명이 모

이는 교회였습니다. 부임 첫 주일예배가 끝나고 나자 할머니 한분이

찾아와 인사를 하더니 "목사님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수천명 교인들

의 마음을 다 맞추시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

니다.

 

다음 주일 그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수천명이 넘는

여러분의 비위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이 아닙니

.

만일 저더러 3천여 명의 비위를 낱낱이 맞추라한다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 말을 순종하고 따른다면

저는 생명 다해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나를 맞춰가며 삽시다.

롯은 세상조건에 자신을 맞추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

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조건들을 선택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

고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

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젊은이의 결혼 뒷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애정

없는 결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처가집 가운이

기울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6개월만에 아

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선택과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왜 많고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선택했습니까?

왜 수만개의 교회 가운데 충신교회를 선택했습니까?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니면 직업을 주고 직장

을 주고 회사를 일으켜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선택한 것입니다.

최고 최상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그 신앙이라야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볼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

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혈육인 롯과 환경과 조건이 아브람을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

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

게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복을 주셨습니다.

15-17절을 보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네 자손을 땅

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에게는 땅을 주신다

는 약속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롯의 후손에게는 그 번영을 보장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췄던 아브라함은 땅도 받았고,

건강도 받았고, 아들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도 받아서 예

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

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조건만 따르다가 예수 버리지 맙시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봅시다.

 

발행일 : 940220

분 류 : 설교

 

 

65

제 목 : 전진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0:35-39

 

 

불교는 산속의 종교,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

의 경우 입산,수도,득도,성불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경우

에는 현실,역사,삶 구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명상과 사색을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

독교는 변화와 중생과 전진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본문은 당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생

활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특히 뒤로

물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

같은 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더라도 그런 것들 때문

에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의 교

훈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담대해야 상을 받습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

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5절과 11:6을 연결시키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

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나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

기면 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두가지 특징을 갖

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예와 상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

이 주시는 상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받기를 소마하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벧상입니다.

노벧(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였습니

.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폭약을 제조하기 시작했습

니다.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생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갑부가 되었

, 그의 유언을 따라 1901년 노벧상 제도를 만들어 시상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189511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유산 3100만 크

로나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 기부했습니다.

 

상은 물리,화학,생리,과학,문학 ,의학 및 경제, 평화 부분에 걸쳐 시

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 사람도 수상자가 없습

니다. 시상식은 매년 1210일 스웨덴 국왕이 임석한 가운데 진행되

며 수상자에게는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그러나 용기와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상은 하나

님이 주십니다. 노벧상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군천사가 부

르는 승리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저는 몇년 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노벧상 시상식장에 들어가 보

았습니다. 텅빈 방에서 상을 받는 흉내를 내면서 장차 받을 상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상입니다.

노벧상이나 올림픽상은 지상에서만 그 가치와 영예가 인정되는 상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영광과 가치

가 영원히 인정되고 평가받는 상입니다.

영원한 상이란 없어지지 않는 상, 녹슬지 않는 상, 그 가치가 영원히

존속되는 상인 것입니다.

 

2. 인내해야 약속을 이룹니다.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소중한 품성입니다. 나아가 인간

이 지녀야 할 품성이기도 합니다.

짐승도 단번에 성을 내거나 단번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터 니꼴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도중 바이

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

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

.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세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는 잠시 연

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

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습니

.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줄이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았더라도 그 한줄 믿음으로 성공을 연주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암놈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숫놈 펭귄이 날개로 덮고 따뜻하게 하여 새

끼가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두달동안 먹지도 않고 영하 40도의 한냉과 싸우며 시속 40km

의 강풍을 견뎌 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내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합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

니다. 조그만 괴로워도 짜증내고,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신경질을 내는

가 하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크리미어 전쟁 당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

. 나이팅게일이 그 병사에게 "최대한 용기를 갖고 아픔을 참아야 된

"고 말하자 그 병사는 막대리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막대기의 끝부분을 입으로 깨물면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단

한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막대기를 보니

끝 부분이 거의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깊은 교훈을 줍니다.

고통이나 좌절로 아픔을 겪을 때 실패나 절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

.

이유는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사건도, 십자가보다 더 쓰라린 아픔도,

십자가보다 더 골깊은 상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때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와 소망과 승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전진해야 기뻐하십니다.

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말의 뜻은 "철회하다","뒤로 끌다"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

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않고 남도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굼벴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

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부산 목포는 20

시간, 대전은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앞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명절을 지킬 수 있었

습니다.뒤로 가는 것은 30분도 지겹고 힘이 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보면 애굽을 떠나 40년만에 가나안 땅에 도

착했습니다. 참으로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던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고 대들었고 소리쳤습니다.

출애굽기 14:12을 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소리치며 저항했던 사건이 기록

되어있고, 출애굽기 16:3을 보면 신광야에 이른 그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다가 하나님의 손에

편히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원망하는 장명이 기록되어 있스빈다.

그들은 전진에는 관심이 없고 되돌아가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지난 날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과거에","소시적에","나 어렸을 때"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둘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과거가 필요없듯이 미래

도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한탕주의와 단발적인 삶에 만족하고

현싫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는 언론사에서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꿈이 뭣니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꿈이요?"

"왜 꿈을 꿔요?"

"오늘 저녁 디스코텍에 가는 것예요"

"그런거 몰라요"

"여기 있잖아요 (엄지손가락을 보이며)"라는 것들이었다고 합

니다.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득되는게 뭐냐,유익한게 뭐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셋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

엘을 애굽에서 나아오게 하신 것은 그들로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

복지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걸핏하

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8"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부산을 가기로 했으면 24시간이 걸려도 한발짝씩, 그리고 시속 10

로의 속도라도 부산을 향해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힘들고 느리고 괴롭더라도 뒤돌아

서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죄자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

기가 죄지은 현장을 남몰래 둘러보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신앙인은 전진해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불미했던 지난날 상처

였던 그 사건, 죄짓고 살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되돌아가면 목적지에 못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습

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노래불렀던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못갔고 가나안

땅에도 못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됩니다.

주님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곁을 보고 사람보다 사건보고 경치보면 전

진못합니다.

주님이 최종 목표이며 영원한 세계가 최종 목적지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계속 전진합시다.

 

발행일 : 940213

분 류 : 설교

 

 

66

제 목 : 빛이 있으라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1:1-5

 

*** 빛이 있으라! ***

 

충신교회:박종순목사

 

성경본문:1:1-5.

인간이 제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게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사역에 대한 기록

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특히 3-5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

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는 말슴 속에서 찾아야 할 몇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1.첫째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의 형편을 2졸이 다음가 같이 설명합

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슴의 의미는 이미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셨으나, 아직 그 땅에

는 생물이 살 수 있다든지, 조직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라고 주경가 스콜필드는 말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이빛

이었습니다. 빛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혼돈고, 공허도 흑암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마음

의 빛이 꺼진 사람들이 겪는 불행은 더욱 심각합니다. 마음의 빛,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의미있

, 가치있으려면 빛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의 빛과 양심의 빛과 생명의 빛이 꺼지면 온 세상이 어두워질 것

입니다. 온통 세상이 어두워지면 세상은 무질서가 판을 치고, 혼돈과죄

악이 날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빛 없이는 못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주고,

드러나게 하고 볼 수 있는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2.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슴으로 빛을 창조하셧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창세기 1장에만 9번이나 반복되고 있으

, 성경전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것은 한마디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이 있으라"는 한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그 한마디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나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고, 무엇을 명령해도 그

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

 

 

 

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였습니다. 거기에는 지체됨도 없었고, 고려됨도

없이 말씀과 동시에 실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잔잔하라, 고요하라." 는 말씀 한마디로 성난 파도를 잔

잔케 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주

님께서 무덤 속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말씀 한마디에 나사로가 수족을 동이고, 천으로 얼굴을 감싼채 무

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

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슴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다스리며,

인간의 모든 행사를 지배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위로와용

기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인격이시며,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

는 것입니다.

 

3.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빛 때문에 밝음과 어두움, 낮고 밤이 나누어졌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것은 주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

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 밤은 사단이 지배하게 되었

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시편 24:16을 보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낮이건 밤이건 하나님이 지으셨

으므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날과 시간과 물질을 인

간들이 제멋대로 죄짓고 악을 행하는 데 쓰고 있는 점입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밤만 계속되는 것도, 낮만 계속되는 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인생도 비슷한 이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낮을 기쁘고 성공으로 채워

진 시간이라 하고, 밤을 어둡고 ,힘들고,괴로운 일들로 채워진 시간이라

고 해보십시다. 어떻게 인생이 밝고 기븐 낮시간만 계속 될 수 있겠습니

? 어둡고, 괴롭고, 침울한 고통과 절망의 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러나 그것은 한정된 시간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법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을 주목하십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는 말씀의 뜻은 밤이 지나

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는 뜻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고,12

월이 가면 새해가 오는 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우리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살기만 한

다면 어떤 고난과 고통의 밤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새아침의 광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어둡고, 침울하고,고민으로 굳게 닫혀 있는 내 마음 속에 빛을 받아 들

입시다. 답답하고 복잡한 내 집 창문을 열고, 주님의 빛을 받아 들입시

.

뭔가 뜻대로 되지 않고, 속상하고 그래서 산다는게 재미가 없는 내 인

생 속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합시다.

그리고 91년 한해를 빛을 따라서 살아나갑시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67

제 목 : 실패한 관리자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세기 1:26-31

인구문제를 연구한다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고 했기 때문에 인구폭바가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원의 고갈이나 인구의 폭발 책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망상일뿐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장을 보면 "여호

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여섯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

.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가 유익합니다.

하루살이 곤충도 유익하고 심지어는 사람 몸에 잔털까지도 유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번성하고 충만해도 쓰기에 넉넉한 자원을 만드셨고

살아가기에 아무 불편없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 이후부터 입니다.

 

3:17하반절을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고 18절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은 인간이 살기위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으리 관리하라고 맡겨 주셨습바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땅을 관리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잘못 만난 농장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자란 곳은 농촌이었습니다.

저는 늘 가까이서 두 사람이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농사를 마치 예술품을 만들듯이 짓곤했습니다. 논에 짓느

니 농사나 밭에 짓는 농사 모두가 얼마나 정성을 다 하는지 잡초가 자

랄 겨를이 없습니다.

 

못자리를 만들어도 미장할 때 쓰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다듬고 매끈

하게 만든 후에 거기에 종자를 뿌립니다. 그는 매년 모범농군으로 표

창을 받곤했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한사람으니 잡초로 우거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날이면 날마다 술이 취해 얼굴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농사가 될

턱이 없습니다.

 

그는 농사가 귀찮다면서 몽땅 팔아 도시로 나가 술장사를 시작한다고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

니다.

 

지구의 점하나만도 못한 작고작은 논이나 밭도 주인을 잘 만나야 기

름지고 소출이 많은 법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지구관리에 실패

했습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파괴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양심을 파고했고 하나

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양심을 파괴했고 하나님의

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에덴동산을 파괴했고 환경마

저 파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네 가정을 파괴하고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행복한 삶도 사단이

파괴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입니다.

 

1972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국연합 인간환경회의가 열렸었습

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환경 선언문을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20

후인 19926월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

가 열리기까지 사람들은 계속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계

속 지구를 파괴해 나왔습니다.

 

지구환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일 인류가 10년내에 지

구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끝장이 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바니다.

 

지금 지구 도처에서는 매1분마다 6개의 축구장 크기만한 열대림이 파

괴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30년 안에 지구상

에 있는 열대림 3분의 2가 소실될 것이라고 합니다.

 

[조나단 포리트]"우리가 지구를 살려내는데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10년정도 뿐이며 이것은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

.

 

오존층의 파괴로 이상 기온 현상이 일어나면서 지구는 사막화되어 가

고 있는가 하면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 수면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땅넓이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열대림이 소실됨에 따라 1년에 5만종, 하루에 140여종의 무척추동물

이 멸종해 가고 있으며 결국 다른 생물이 그런 식으로 죽는다면 인간

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잦은 한발과 홍수의 교차현상을 일으키고 태

풍까지 잦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지구가 죽어갑니까?

 

마구 버린 중금속, 마구 뿌려대는 D.D.T , 살충제,농약, 공장폐수,

쓰레기, 프레온가스, 자동차 매연, 합성세제 등 결국 우리가 버리는

몹쓸 것들 때문에 지구가 병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0:19을 보면 어느 성을 점령하더라도 그 성에 있는 나무는

도끼로 작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

에 그것들을 공격하거나 작벌해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땅과 나무가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

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인간들이 지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성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

문입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 당시 애굽은 중동지역의 곡창이었습

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나라가 비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집트는 한발고 흉년이 반복되는 사막입니다. 식량

도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백향목으로 울창했던 레바논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풀 한포기도 나무 한그루도 물주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 황무지

기 되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썩으면 자연도 썩고

그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그곳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

.

 

환경학자들은 [환경난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환경난민

이란 그곳에 살 수 없는 환경위기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그가 쓴 [지구를 구하자]란 책 속에서 우리는 지구

를 단기간 빌려쓰는데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지구는 저저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리고 인간을 만드신 후 거기 살면서 지구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얼마동

안 맡겨주신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몇억만년이라고 추측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이 지

구 위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공부하고 장가들고 자식 낳고 그리고 일하

면서 살다가 얼마 후엔 땅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잠시 빌려쓰는 인간이라면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내 잘못 때문에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땅이 중금속으로 죽

어가면 안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몇가지 실천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새사람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편 104:30을 보면 "주의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면 땅도 새로와 진다는 것입니

.

 

지구회의 환경회의 구호나 표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해서 새사람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가치관이 되살아나면 더불어 환경도 땅

도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이 제디로 살아있다면 어떻게 공장폐수를 강으로 내보낼 수가

있으며 쓰레기를 몰래 버릴 수가 있으며 공해물질을 버릴 수가 있겠습

니까?

 

양심이 되살고 윤리가 되살고 도덕성이 되살려면 성령님의 능력이 역

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환경보존에 앞장서야 합니다.

 

찬송소리만 크고 기도소리만 크다고 훌륭한 믿음은 아닙니다. 훌륭한

믿음은 생활 솟에서 드러납니다.

 

철야기도 다녀와서 남몰래 연탄재나 오물을 길거리에 버린다면 그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령받고 은혜 받았다면서 산업폐수를 강으로 흘려보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조금 불펴하고 귀찮더라도 환경을 보존하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면

따르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 물자를 절약해야 합니다.

* 버리는 것은 함부로 아무렇게나 버려선 안됩니다.

* 태울 수 있는 것과 태울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은 써야 합니다.

* 화장실의 정화조같은 경우 자주 청소를 해서 그것들이 생활용수로

스며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 제아무리 펑펑 쏟아지는 수도물이라고 하더라도 아껴 써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부터 기독교인은 실천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3이하를 보면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을 먹을 수 있도록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모세가 물에 던

졌을 때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땅을 고치고 물을 치료하고 인간성을 고치는 방법은 매튜헨리가 말한

대로 십자가를 통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19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 지방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

해 밭에 씨를 뿌리지만 토질이 나빠서 곡식이 자라지도 못하고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새그릇

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그 때문

에 물이 치료되었고 그후로 농사가 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소금을 물에 뿌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13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였습니

. 기독교인이 곧 소금입니다.

 

우리는 맛이 잃은 소금입니까, 맛있는 소금입니까? 우리는 쓴물을 단

물로, 죽어가는 땅을 생명이 기식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 책임이 있습

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천만 기독교인들이 마음만 하나로 묶

고 생각만 합친다면 우리가 사는 환경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잠시동안 빌려 쓴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쓰거나 포

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

.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참 아름다운 세계로 만듭시다.

 

발행일 : 921007

분 류 : 설교

 

 

68

제 목 : 하나님의 대사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에스겔 33:7-11

본문의 요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3:1-6을 보면 파숫군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이란 높은 성루에 올라가 적군의 침략이나 기습여부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만일 적의 기습을 발견하게 되면 급히 나팔을 부어 긴급

사태를 전체 성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때,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된다면 파숫

군의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적의 기습을 알아차리고도 나

팔을 불지 않음으로 그 성이 점령당한다면 그 파숫군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을 보면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파숫군이며 하나님이 주신 말

씀과 경고를 마치 파숫군이 나팔을 불 듯 외치라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 주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를 대표하는 외교관을 대사

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보내신 대사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은 나의 대사가 되라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과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복음의 대사가 되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시다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나는 그 복음 때문에 구원받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존재

하는 것입니다. 세계도처에 선교사들이 흩어져 전하는 복음도 바로 예

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미국의 원주민이 인디언인 것처럼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마우이 족입

니다. 그들은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합니다. 그리고 얼굴이 검고 투박

합니다.

 

그들의 반가운 인사법은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교하는 한국선교사가 어느날 선교하러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반갑다

고 저마다 코를 부벼대는데 어느 한사람의 코가 몹시 헐어 있더랍니

.

 

보나마나 그 사람의 코를 맞대로 부벼 댔다가는 틀림없이 세균이 옮

아 코가 헐게될 것 같더랍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코만 외면해 버린다

 

 

 

면 얼마나 상처가 클까 싶어 "에라 모르겠다", "믿습니다" 두 마음으

로 코를 부벼 댔다는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자기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마우이

족들이 저마다 선교사 부인한테 다가와 코를 맞대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몸도 다 내주셨는데 선교를 위해서라면 별로 잘 나지도 못

한 코, 못 부벼 댈 것도 없다면서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대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하면

안되는 것이 복음의 대사입니다. 만일 위가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는

다면 이민족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피값을 책임져야 합

니다.

 

본문 33:6을 보면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

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함으로 그 중 한사람이라도 제함을 당하면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나팔을 불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으

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지방 국도를 차를 타고 달리는데 마주오던 승용차가 대낮인

데도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탔던 사람

에게 저 차가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신호

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운전자끼리는 서로 그런 신호를 해 준다는 것

입니다.

 

그런 신호는 바람직한 신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고 외쳐야 할 신호는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정도의 소식이 아닙니다.

 

그 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전방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며, 지옥이 입벌리고 있다는

뉴우스입니다. 믿으면 살고 안믿으면 죽는다는, 그래서 지금 당장 믿

으라는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대사가 됩시다.

 

2. 기도의 대사입니다.

 

바울사도들은 바알신에게, 몰렉신도들은 몰렉신에게, 불교도들은 부

처에게, 회교도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

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틀이 지켜져야

합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응답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꾸밈없이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용도,고백도, 음성까지도 꾸미면 안됩니다.

넷째,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개인기도는 길어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대표기도는 그것이 새

벽이건 주일 낮이건 주일 밤이건 수요일이건 부흥회때건, 사람이 많든

적든 짧게 해야 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 주일 낮 예배후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

. 땀을 흘리며 열심으로 연습하는 성가대원을 격려하기 위해 성가대

대장 장로님이 아스케익을 사들고 와서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지휘자가 장로님에게 잠깐 축복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

데 그 기도가 창세기로 시작하더니 그칠 줄 모르고 길어졌습니다.

제는 아이스케익이 녹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에서 쭉죽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아이스케익은 온데간데없고 꼬챙이만 남았더라

는 조크가 있습니다. 대표로 하는 기도는 길면 안됩니다.

 

여섯째, 쉽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장이나 문법의 구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 할 사명을 받은 파숫군들입니다.

기도는 쉬면 안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숨소리이기 때문에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줄어든다는 것

은 영혼의 숨이 가물거린다는 것이 됩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영혼의 기관이 정지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영이 병

들게 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기도를 멀리하거나,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 영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네 가정과 자녀

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나팔소리가 시들해지면 안됩니다.

 

지난 67-11일까지 인천제일교회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1990년도에 사경회를 인도했던 교회인데 두번째 초청이 있어서 인도

를 하게 됐습니다.

 

집회가 끝나는 목요일 저녁설교 후에 헌금순서가 있었습니다. 목요일

저녁설교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환경과 건겅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

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능력이 오늘밤 역사하신다는 내용이었

습니다.

 

헌금이 끝난 후 저더러 축복기도를 해달라면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쪽지 하나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피 토하는 병으로 위기를 겪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쪽지내용은 간단하지만 환자자신은 집회참석을 못하고 그 부인만 참

석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헌금 감사 기도시간에 기도를 했습바니다.

피가 멎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라고.....

 

그 다음 주간 인천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 내

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기적이 일

어났다는 것입니다.

 

계속 피를 토해 혈소판이 5만 이하로 내려가면 죽게되는데 5만까지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그 기도시간 이후부터 혈소

판이 계속 올라가 27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담당의사들이 이것은 기적이라면서 퇴원해서 잘 먹고 요양하면 된다

는 결론을 내려 퇴원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날 밤 기도의 대사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

.

 

기도하면 될 것을 기도 안해서 안된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도무지 안될 일이 기도해서 됐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굴러 떨어져가는 신앙의 혈소판이 올라가게

합시다.

 

3. 신앙의 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려고 하신

목적을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하라는 것입니

.

 

우리 모두는 믿음의 대사들입니다. 나의 믿음은 나만의 믿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은 다음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첫째, 부부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단정하고

정결한 행위를 보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런가 하면 남편의 신앙과 인격때문에 아내가 예수를 믿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남편의 불신과 부덕때문에 아내까지 지옥가는 사람이 있

는가하면, 여자 잘못 만나서 신앙과 인생도 망가진 사람이 있는 것입

니다.

 

둘째,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언행과 신앙을 보고 배웁니다. 돌연변이가 있

기 합니다만.대부분 부모의 신앙과 삶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

. 훌륭한 신앙의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양육됩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벱의 영향을 받고 자라 훗날 민족 지도자가 되었

고 사무엘 역시 어머니 한나의 영향을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된 것입

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끼리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웃이란 나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

. 친구, 이웃집, 동창, 동네사람 등이 거기 포함됩니다.

내가 어떤 믿음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손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

고 유익과 덕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믿음의 대사입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선거 열기로 정치가 뜨거워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억만장자라고 소문난 무소속 페로의 화제가 전 매스컴에 오

르내리고 있습니다.

 

19914월 대통령 후보로서가 아니라 기업인으로 페로가 일본을 방

문했습니다.

 

일본과의 합작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축하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관례대로 술을 따라 건배를 하는 순서가 됐습니다. 그때 페로씨가 물

었습니다.

 

"잔 속에 들어있는것이 술인가?"라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물잔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형식으로 건배만 하자고

하자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 마시는 척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

이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부터 페로씨가 좋아졌습니다. 그야말

로 신선한 바람을 쏘인 기분입니다.

 

교회가면 예수님 은혜를 들먹거리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천주교에 가서는 주님을 찾고 천주교인 행세를 하고, 절에 가선 부처

님 은공을 찾고, 회교사원에 가선 알라신을 숭배한다는 정치가나 지도

자를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페로씨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믿음의 대사들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

니다.

 

신앙이란 역사나 정황을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올바로 지키고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곳마다 예수님이 드러나고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가 됩시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69

제 목 : 칭송하며 선포하며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시편 145:1-10

 

 

시편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입니다.

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고백을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께 대한 자신의 고백과 결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다윗의 신관을 살펴봅시다.

 

본문에 드러난 다윗이 하나님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145편의 서두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명왕이었고 현군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몇가지 실책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비밀과

흑막에 쌓인 근대정치의 암울한 정황에 비긴다면 다윗의 실수나 잘못

은 문제시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역대 왕들 가운데 다윗만큼 선정을 베풀고 백성

의 신임과 존경을 받은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을 마치 국부처럼 높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1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존경

받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이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대 정치구조 안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대통령과 백성이라는 관계

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왕의 손에 달려 있었고,

소유의 여탈도 왕의 재량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능과 재량권을 송두리채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지혜와 신앙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이 모처럼 획득한 왕권과 통치능력을 포기해 버리

고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른다면, 손익득실 면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결

단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고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왕

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받고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습니까. 그것은 내가 책임진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공적인 책임을 맡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보호아래

살지 않으시렵니까?

 

2)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하

나님을 광대하시다라고 노래한 것은 다음의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스스로 광대하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나 어떤 힘에 의해서 광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광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존개 자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

의 능력이나 크심도 스스로 있는 것이지 타력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영원히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정권이 길다든지 나라가 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했던 초대강국이었던 로마도 지금은 별 볼일 없

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지는 날이 없다던 영국도 지금은 껍질만 남았습니다. 즉 이 지상에

영원히 광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말씀의 은사라는 것도 이 세상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서 누구를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병고

치는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당에는 병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땅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면 모두가 다 신령한 언

어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크신 팔에 나를 맡기지 않으

시렵니까?

 

셋째, 끝없이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소련이 제아무리 넓고 커도 끝이 있습니다. 바다가 제아무

리 깊고 넓어도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끝이 없

습니다. 광대하심 뿐만 아니라 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3:19에서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했습니다.

 

넓고 길고 크고 높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한마디로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광대하시고 사랑도 자비도 용서도 광대

하십니다. 그 광대하심 때문에 오늘 내가 사랑받고 용서받고 축복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

. 내가 믿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내 마음은 왜 그리 협소합니

?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왜 내 사랑은 국한적이고 편협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인데 나의 용서는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 때 일부만 용서하신다

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하나님이 산소를 주실 때 충분한 양을 주시지

않고 일부분만 주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배웁시다.

 

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다윗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은

혜를 받는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으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비하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다윗은 제일 큰 자입니다. 제일 높고, 제일 강하고 제일

큰 왕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자신

을 낮춘 것입니다. 그는 은혜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야고보 4:6 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

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자들

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내용들을 8절이하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며 선대하시며 긍휼

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 을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했습

니다. 나를 높이지 말고 은혜를 구합시다.

나의 능력이나 소유를 과대포장하지 말고 은혜를 받읍시다. 그것이 평

안하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결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은 왕으로 광대하신 분으로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분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이 어데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나의 주로 높이겠다고 합니다.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높인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높이라고 권하지 않고 내가 높이

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면 주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내가 주를 낮추면 주

는 나를 지옥에 멸하십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조이스] 는 자신이 최근에 저술한 [

신과 의사처럼 생각하라 (Think Like a Shrink)]라는 책에서 정신역학

요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자기 방어를 포기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방어를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세가기 유형

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력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가 수동적이며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은 감정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이용합니다.

사한테 야단 맞고난 후 분노의 감정을 피하기 위해 운다는 것입니다.

 

셋은 지성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핑계를 만들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해 지능적인 합리화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조이스에 의하면 환자가 일체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그 치료가 단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을 영적 삶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일체의 자기 과시

나 방어를 유보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영혼의 고통

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약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꺼번에 심장약,위장약, 간약, 췌장약, 변비

, 설사약, 신경통약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내가 한꺼번에 많

은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높이고 그를 경배하

기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2)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1-10절 사이에서 시인은 주님을 송축, 칭송, 찬양, 노래

한다는 말을 무려 일곱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영원히 계속 하겠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사람보다 한국사람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노

래방, 노래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노래방이 뭔가 궁금해서 어느 분에게 물었더니 30분이나 한시간 동안

악보를 받아서 칸막이 된 방에 들어가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돈도 안내고 오르간과

피아노 그리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영원히 송축합시다.

성가대에게 권합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영원히 송축하는 신앙으로 찬

양하기 바랍니다. 찬양과 송축은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해야할 당연할

의무입니다.

 

시편 150:6을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고 했습니다.

 

3) 주의 능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신관도 중요하고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찬송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선포의 신약적 의미는 선교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는 주

의 복음을 만방에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직장이, 그리고 다양한 일터와 만남이 선포의 현장

이 되어야 합니다.

 

에디슨은 "주님을 아낌없이 찬양하기에는 영원도 너무다 짧으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70-80년 세월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

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입을 열어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

. 그리고 나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칭송합시다.

그리고 선포합시다.

복음선포는 우리에게 해야할 종말적 사명입니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70

제 목 :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고린도후서 12:1-9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을 셋으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날

짐승이 날아다니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달과 별 그리고 해가 떠 있

는 하늘이고 세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한 하늘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첫째, 하늘보다는 둘째 하늘이 높고 둘째 하늘보다는 세째 하늘이 높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에녹이나 엘리야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 세째 하늘에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분은 그가 세째 하늘에 올라간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의 바울의 세째 하늘 경험이 주는 간증과 교훈을 발

견하게 됩니다.

 

1.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영적체험은 환상과 계시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 그는 신령

한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직접 날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뵉고 그 음성을 듣는다면 얼

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무익한 자랑이라고 못박고 있

습니다.

 

바울이 가장 자랑했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

.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랑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계시자랑, 환상자랑, 병고치는 자랑은 결국 자기를 과사히게 되기 때

문에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능력받았다는 사람들과 병고치는 사람들과 기

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병자를 고치고 능력을 행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예수의 복음자랑은 퇴색하고 자기 자랑쪽으로 세월이 지날수

록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병자를 수없이 고쳤다는 어느 권사

님은 천당 갔더니 자기 집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는 세상에서 예수 이름으로 병고치고 능력행하면

서 영광은 다 받고 잘 살았기 때문에 받을 상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경고를 주는 이야기임엔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본인이 간직하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해야지 그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어떤 능력을 받았든지 우리는 다음의

기본틀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나 가진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그 영광을 받거나 그 영광을 가로채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주셨지만 영광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활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능력을 받고 은사가 충만하다고 해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셋째, 교회에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은사받은 사람들일

수록 성령 충만한 사람들일수록 교회 덕을 세우고 교회의 지도자에 순

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그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경우 성

령을 충만히 주신 것은 복음 전하라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다양한 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그 은사도 역시 복음

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고 함부로 은사를 남용하거나 남발하면 하나

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는 본문의 말씀은 어쩔수 없어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2절 중간을 보면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두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가]라는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신비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세째 하늘에 올라갔다면 그것은 최고의 하늘인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2절 끝을 보면 그가 몸안에 있었는

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입신상태

를 의미합니다.

 

4절을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고 했습니다.

이쯤되면 자기 이름과 그 사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랑하고도 남은

이있습니다.

 

요즘 은혜받았다는 사람들은 바늘만한 신비를 체험하고도 황소만큼

부풀려 떠벌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천당 갔다왔다는 사람도 있고 죽었

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화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실만 있

으면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고도 자기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자꾸

드러나면 안됩니다.

 

둘은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2절 셋째 줄에서도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고 4절에서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자기가 세째

하늘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삶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시며 그 인도를 절대 순종하고

살아나온 바울의 삶을 한마디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이끌림을 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

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결과를 따라 주시는 선물이며 은혜

입니다.

 

귀신의 영이나 사단의 능력은 내가 노력하고 힘씀으로 접신이나 강신

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내가 노력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낙원을 구경했고 그곳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계시를 받았습

니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바울

의 위대한 점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3.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런 것들은 자랑할 수는 있으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

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들 속에서 위대한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가 쓴 서신들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

,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13권에 달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이 행한 기적이나 능력을 언급하거

나 쓴일이 없습니다. 바울도 기적을 많이 행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17 을 보면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성령충만을 체험했습

니다.

 

사도행전 14:8 이하를 보면 루스드라지방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한마디로 그를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16:25이하를 보면 빌립보옥 중에 갇혀있을 때 기도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8:1이하를 보면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않고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과 능력들은 바울 자신은 그가 쓴 편지들 속에서

단 하가지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을 수행했던 의사인 누

가가 쓴 사도행전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입이 없어 말을 안한 것도 아니고 문자를 몰라서 그것을 남기

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자랑하면 자기 인기나 위신이 급상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약한 것들만을 자랑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어나 걸으라는 한

마디로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을 꿰뚫고 그들

이 돈 감춘 사건을 들춰내는 능력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9:32 이하를 보면 룻다지방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 고

생하던 애니라는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그의 설교만 들어도 방언을 하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어 그 시

체를 다락에 뉘어 놓았는데 기도하고 살려낸 기적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5:15-16을 보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만 환자위에

덮이면 병자들이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

역시 베드로가 쓴 베드로 전후서에서는 없습니다. 누가가 쓴 사도행전

에만 언급이 되어 있을뿐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의 능력과 기적을 대하는 자세 속에서 실로 많

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주님만 자랑하는 것은 성령충만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사단의 유홀입니다. 주님만 자랑합시다.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한번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는 자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 덕을 세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환청, 환상, 계시, 병고치는 능력, 영서,속삭임 등 이런 것들을 이미

주신 성경말씀보다 더 높이고 남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다섯째, 함부로 기도해 준다로 머리에 손을 얹거나 아무나 찾아 다

니면서 안수받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기도 전문가처럼 기도해 준다든지 전문가를 골라

기도를 받으러 돌아 다니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안수기도는 그 사람이 받은 은사나 능력을 전수한다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귀신의 영을 전수한다는 부정적

요소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안수를 하거나 받으면 안됩니다.

 

여섯째,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병고치는 은사 받았다고 왕진의사처럼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예언은

은사를 받았다고 점쟁이로처럼 안됩니다.

 

능력의 은사 받았다고 전능자처럼 굴면 안됩니다.

신령한 섹례를 듣고 보았다고 해서 함부로 입을 열고 말을 옮겨선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 신비한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마귀의 역사가 나를 강

하게 공격하고 틈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깨어라 근신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신 그 말씀의 대상은 불신자나 초

신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조심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면 냉냉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신비한 세계를 사모하고 신령한 생활을 힘쓰다 보면 고무풍선처럼 붕

붕 뜨는 단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충신교회의 신앙생활)은 지적이면서 영적이고 영적

이면서 지적인 조화와 균형에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로 충만한가하면

그 은사를 조절할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말씀을 실천하는가 하면 깊이 있는 기도와 영

적은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받았다고 고무풍선처럼 들뜨는

것보다는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대로 살고 열심으로 전도하고 교

회에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세째하늘에 올라갔던 바울이 그 사실을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

은 이유는 장차 우리가 다 들어가서 직접 보고 경험할 세계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고 능력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신령한 힘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리고 그 체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합시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그 능력을 쏟읍시다. 할렐루야

 

발행일 : 9201006

분 류 : 설교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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