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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기도

역전의 기도

누가복음 18:9-14
< 얄미운 사람>
얼마 전에 한창 유행했던, ‘나이대별로 본 얄미운 여자 시리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여자가 봤을 때 질투를 느끼게 하는, 약이 오르게 하는 그런 여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0대 : 얼굴도 예쁘게 생겼는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 성형 수술했는데 표도 안 나게 잘 된 여자
30대 : 학교 다닐 때 날라리였는데 믿음 좋은 남자 만나서 집사 된 여자
40대 : 동창회, 계모임, 해외여행이다 뭐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았는데
자식들이 스스로 공부 잘해서 명문대학에 척척 붙은 여자
50대 : 먹어도, 먹어도 살 안찌는 여자
60대 : 아직도 남편이 돈벌어다 주는 여자
70대 : 돈 많이 벌어놓고 남편 빨리 죽은 여자
80대 : 예수는 개떡같이 믿었는데 천당 간 여자
그렇다면 형제들은 어떤 형제들이 얄미울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청년부시절에 교회도 안나오고 매 주일 놀러만 다니고 마음 없이 이 자매, 저 자매 만나던 형제가 정말 믿음 좋은 퀸카자매 만나 결혼하는 것을 보면 얄미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형제를 보면 나같이 믿음 좋고 성격 좋은 형제를 두고 저 불한당 같은 형제가 저렇게 좋은 자매와 결혼하다니, 하고 화가 나지 않습니까?

< 역전은 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사람이 얄미운 걸까요? 왜 이런 사람을 보면 화가 날까요? 그것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형제가 열심히 최선을 다 해서 살았고 그 결과 좋은 삶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자매가 성실하고는 거리가 멀게 살아오다가 그와 비슷한 사람 만나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잘 살리라고 믿어졌던 사람이 못 살게 되었다거나 못 살 것이라고 보였던 사람이 잘 살게 되면 우리는 화가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삶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을 돌아보면 이러한 역전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비일비재합니다.
지금은 역전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직 목표라고 할 만한 삶에 도달한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역전의 비애를, 또는 역전의 쾌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역전을 믿고 인생의 역전을 위하여 몸부림을 치며 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축구팀이 다른 나라 축구팀과 시합을 합니다. 전반전에서 1:0으로 졌습니다. 그러면 관중들은 모두 실망하고 관중석을 떠나버립니까? TV에서 시청하던 사람들은 채널을 돌려버립니까? 아니지요? 후반전이 있잖아요. 역전이 있잖아요. 후반전을 기다립니다. 후반전에서 역전하여 승리할 것을 기대하면서 더 열심히 지켜봅니다. 그냥 패배한 경기라고 포기해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선의 카지노를 예를 들어보면 거기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가진 돈 다 잃고 타고 간 차까지 저당하고 심지어 입고 있는 옷, 신고 있는 신발까지 걸어놓고 왜 한판을 더 하려고 기를 씁니까? 역전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역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로또의 열풍이 부는 것도 모두 역정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만 맞아주면 한번만 대박을 터뜨리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역전할 것이라고 믿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겁니다.

< 역전승은 패배로부터>
역전,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운동경기를 보더라도 지다가 이기게 되는 경우, 더 멋진 시합이었다고, 명승부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역전을 위해서는 패배의 경험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패배하다가 승리하는 것이 역전승입니다. 처음부터 승리해오던 경우에는 역전승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를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패배를 경험한 사람만이 역전을 논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 속에서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 하다못해 운전면허 시험에라도 떨어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역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패배라는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오늘, 혹은 내일의 승리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역전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도 아마 한번쯤은 패배의 경험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패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패배가 삶을 더 큰 승리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 패배의 경험을 가지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입니다. 그 패배의 경험을 초월할 수 없는 과거의 문제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현재의 삶에 표출시켜 역전을 이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 패배의 두 가지 반응>
John Maxwell은 패배를 하게 된 사람이 나타내는 두 가지 반응이 있는데 하나는 파멸이고 또 하나는 도전입니다. 파멸이란 한번의 실패로 역전에 대해서 꿈조차 꾸지 않고 그냥 주저앉아서 과거에 머물러 버리는 것을 말하며 John Maxwell은 이 파멸을 다시 다섯 가지 현상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 파멸의 현상 1 - 비교의식>
파멸하게 되는 첫째 현상은 비교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서로 다른 두 형제가 있는데 한 형제는 ‘나는 왜 저 형제처럼 터프하지 못한가?’, 또 그 터프한 형제는 ‘나는 왜 저 형제처럼 섬세하지 못한가?’ 라며 서로에게 스스로 위축되어서 움츠린 생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로부터 불행이 싹트게 됩니다. 그 누구도 완벽할 수도 없고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하면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패배를 뛰어넘게 해 줍니다.
여러분, 왜 비교하게 되는지 아세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상품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이것저것 여러 개를 두고 비교한 후에 선택해서 사는 거지, 사람을 놓고 비교하는 건 아니지요. 왜냐? 그것은 사람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공장에서 다량으로 찍어 낸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들어내신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명품입니다.
작품과 상품의 차이가 뭔 줄 아십니까? 작품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 유일한 것이고 상품은 얼마든지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뿐인 작품, 이미 이 사실만으로 그 작품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 작품만으로 족합니다. 작품들이 서로 다른 것, 그것은 작품의 개성입니다. 비교할 수 있는, 비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비교되는 상품이 되길 원합니까? 유일한 작품이길 원합니까? 여러분은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명품에는 모조품이 생기기도 합니다. 요즘 소위 명품이라는 고가의 제품들이 통제할 수 없이 생겨나는 모조품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명품과 모조품을 구별하는 방법이 뭔지 하나 알려드릴게요.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을 때 우산 대신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면 그건 모조품이고 혹이라도 비를 맞을까 가슴에 꼭 안으면 그건 명품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조품은 함부로 다루지만 명품은 귀하게 다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명품은 오래 쓸 수 있고 오래 써도 가치가 있지만 모조품은 함부로 쓰기 때문에 쉽게 낡아버리고 오래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을 스스로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명품인생을 사느냐, 모조품인생을 사느냐, 그것은 여러분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명품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모습이 어떻든 여러분은 비교할 수 없는 명품입니다.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 파멸의 현상 2 - 합리화>
패배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보이는 두 번째 현상은 합리화입니다. 잘못을 지적받으면 우선 핑계를 대거나 변명을 합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말합니다. 약속에 늦어놓고 차가 막혀서, 바빠서, 라고 말을 둘러 댑니다. 그러나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차가 막혀서가 아니라 내가 늦게 출발해서, 바빠서가 아니라 내가 부지런하지 못해서, 라고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왜 먹었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아담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당신이 지어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초점은 ‘당신이 지어준’ 입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합리화는 결코 패배를 극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내 탓임을 인정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한번의 실패를 맞았을지언정 두 번의 실패는 맞지 않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 파멸의 현상 3 - 고립>
패배하게 되면 스스로 가두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심리학적으로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고립이라고 합니다. 고립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접근을 피합니다. 벽을 쌓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만 커지고 곪게 됩니다.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상처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터뜨려서 고름을 짜내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왜 패배했는가, 내가 가지 문제를 드러내서 해결할 때 파멸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 파멸의 현상 4 - 후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누구나 후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회가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지 않게 해 줄 것 같지만 그건 후회라고 하지 않고 반성, 또는 회개라고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후회는 자신의 미래를 막는 후회를 말합니다. 후회로 끝나버리는 자책을 뜻하는 말입니다. 후회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여 살게 됩니다. 후회는 우리를 붙잡아 놓습니다. 우리의 도약을 방해합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 하게 되는 ‘세 가지 ~걸’이 있습니다. 하나는 좀 더 참을 걸, 또 하나는 좀 더 베풀 걸, 마지막으로 좀 더 사랑할 걸.
여러분!
우리는 더 많은 ‘~걸’을 남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후회로 하여금 우리를 과거에 매어놓고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붙잡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

< 파멸의 현상 5 - 마음의 상처>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상처라는 것에 매여 있게 되면 오늘을 위한, 미래를 위한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상처라는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조금 언짢은 말을 듣거나 섭섭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되면 서슴없이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청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상처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기분 나빠요’ 라고 말해야 되는 겁니다. 상처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 받아서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묻힌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상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치유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회복해 주신 상처를 안고 스스로 상처가 있다고 자처하며 파멸의 길에 동행해야 하겠습니까?
상처를 던져 버리세요. 그건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뛰어넘으세요. 거기에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 본문내용>
파멸의 길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패배를 극복할 있습니다. John Maxwell이 말한, 패배한 사람이 보이는 두 가지 반응에서 파멸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 예를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성전으로 함께 기도하러 가는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당당합니다. 세리는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성전에서 나온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위축되어 있고 세리는 의인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나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여러 청년들이 나왔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아있습니다. 그러난 이 자리에서 나갈 때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해져서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신앙을 역전시켰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역전시켜야 할까요? 그 비밀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로 신앙을 역전시켰습니다. 기도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가 바로 우리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역전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역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승리로 이끄는 역전, 패배로 이끄는 역전. 다시 말해서 역전승과 역전패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 모두 역전을 했습니다. 한사람은 역전승을, 또 한사람은 역전패를. 왜 그랬을까요? 똑같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서 한사람을 역전패를 했고 한사람을 역전승을 하게 되었을까요? 한사람은 역전패의 기도를 한 것이고 또 한사람은 역전승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 역전패의 기도>
당당하게 성전으로 들어갔던 바리새인이 한 기도는 역전패의 기도였습니다. 역전패의 기도란 첫째 잘 난척하는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다른 사람과 구별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비교의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이 세리와 다르다, 세리보다 더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비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비교대상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비교하면서 그분을 닮아가려 하는 것,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을 상대로 비교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더 뛰어나 보이도록 하는 것, 아주 야비한 짓입니다.
성적이 안 좋다고 아이를 야단쳐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보다 더 못한 아이를 대면서 그 애보다 잘했다고 비교합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과 비교해야지요. 그런데 우리보다 더 나으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셋째로 그는 교만한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의 잘됨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자랑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패배의 지름길입니다.

< 역전승의 기도>
위축되어 들어갔던 세리가 역전승할 수 있게 한 역전승의 기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패배자였습니다. 많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고 스스로 열등감에 싸여있는 상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세리가 한 기도는 첫째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겸손한 기도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Catherine Marshall은 ⌜기도에의 모험⌟에서 첫째 하나님께 솔직하라, 둘째 당신 마음의 소망을 하나님께 가져가라, 셋째 이제 문이 열릴 것을 기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Gordon Mcdonald도 자신의 내면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쌓여있는 추악한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습을 다 드러내고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세리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겁니다. 제가 떼돈 벌려는 것 아닙니다. 제가 비록 세리지만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시지요?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짓입니다. 제 본심을 알아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직했습니다. 한 꺼풀 뒤집어쓰고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다 드러내는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세리의 기도는 통회의 기도였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했던 기도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통회의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우는 기도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는 것, 주님으로 채우기를 소망하는 것, 그것이 통회의 기도입니다.
역전승에는 터닝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죽여야, 비워야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자신이 죽는 것을 배우고 난 후에야 하나님이 불러 주셨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고 나서야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죽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비우는 그 순간, 역전승은 시작됩니다.
세 번째로 세리는 긍휼을 기다렸습니다. 은혜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비워두는 것, 그리고 그 비운 것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모함이 있고 간절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통회를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역전승은 가능합니다.
< 이제 돌파해서 역전하라>
이렇게 역전승을 기도를 할 때 우리의 패배는 터닝 포인트를 맞아 승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패배가 오히려 멋진 승리를 위한 거름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역전승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를 역전승으로 이끄는 비결은 기도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주저앉지 말고 돌파해야 합니다. 역전승을 위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과거와 작별하고 현재와 만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머물러서는 인생을 역전시킬 수 없습니다. 상처, 패배, 오해 이런 것들은 다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히브리서 6장 1절과 2절에 “그리스도의 초보를 벗어버리고...완전한데로 나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도 과거를 버리고 예수님을 만났고 오늘의 세리도 과거를 버리고 의인이 되어 성전을 나왔습니다. 과거와 작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를 만나야 합니다.
다음으로 인생 역전을 위해서는 만나야 합니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를 가지고 현재에 만나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그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다 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인생 역전의 첫 번째 과제이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냥 주저앉지 않고 역전승을 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영적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처음에 기도는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가 죽어지고 내 안에 하나님이 잡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역전승의 기도입니다.

< 소망청년의 역전승의 기도>
2004년도에는 우리 소망 청년부 한사람 한사람이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예배에 나오는 것, 그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도회가 많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역전승의 삶을 향하고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새벽기도에서 시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그리고 새벽기도가 끝난 후에 청년들이 함께 하는 중보기도에 참여해보세요. 수요예배 후에도 기도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령별, 팀별 기도 모임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기도의 자리에 동참해 보세요. 그것이 바로 역전승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젊은 청년들의 기도의 힘이 커다란 기독교 기업을 일구어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소망 청년들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비전과 꿈과 역전승의 기도를 가지고 도전한다면 이루어 낼 수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먼 훗날, 10년 후가 되었든, 20년 후가 되었든, 여러분의 기도의 힘으로 위대한 기독교 기업이 탄생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하는 힘을 가진 장년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 모두가 역전승의 기도를 시작한다면.

오늘 본문 말씀 중 1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