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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겔37:1-6, 엡4:1-6 성령님, 우리는 하나입니다 2014. 6.23(일)

37:1-6, 4:1-6 2014. 6.23()

성령님, 우리는 하나입니다

 

지난 3,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교회 예배가 참 특이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모든 교인이 다 일어나 다니면서 서로 인사를 나눴습니다. “Peace be with you”.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 5분 다니며 인사하다가 자리에 앉아 옆에 있는 분에게 또 묻습니다. "한 주간동안 무슨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면서 또 한 2분을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얼굴들도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는 약간 낯설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5:24,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 좌우에 있는 사람과 서로 인사할까요? “Peace be with you”. “평화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물읍시다. “한 주간동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가장 좋은 일은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동안 사랑하며 사셨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 박용재가 쓴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라는 시입니다.

 

사람은/저 향기로운 꽃들을/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랑한 만큼이/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6.25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 수많은 동족이 죽고 다치고 마침내 남북분단이 고착된 날, 우리는 이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날이 있었나? 왜 우리에게는 전쟁과 다툼과 분열과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평화를 이루는 근본적인 해법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한 주간동안 두 군데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는 구약 겔37장이고 또 하나는 신약 엡4장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저는 평화를 우리는 성경의 해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먼저 저에게 관계의 중요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관계안에 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세상도 가정도 다 관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요? 어릴 때 저는 하나님이 저 하늘위에 혼자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구름타고 다니다가 가끔 세상에 혼낼 일이 있으면 벼락을 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경을 보니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생긴 이후로 한번도 혼자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2:8절을 보실까요?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아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짓고 거기 거닐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짓고 거기 계시고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하고 싶어 사람을 지으셨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지만 예수님 역시 혼자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사람을 찾아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얼마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든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딱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교리와 신조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영어로 믿음believe 라고 합니다. 이 말은 be, 존재하다와 live 살다 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be, 존재하는 그 분과 live,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서울 어느 파출소에 초등학생 하나가 교회 건물에 돌을 던지다가 붙잡혔습니다. 파출소에서 조사해보니 뜻밖에 그는 그가 돌을 던진 교회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가 자꾸만 우리 아빠를 빼앗아 가서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그 교회 목회자에게는 설교가 가장 중요했겠으나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설교보다 아버지 자신이 필요했습니다. 건물은 크고 우람했지만 그와 아버지 사의를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건물이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떼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돌을 던졌다고 말합니다.

 

캘커타의 테레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테레사가 켈커타의 거리에서 버려진 아기들, 고아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데 영국의 BBC 기자가 테레사를 따라오면서 촬영을 합니다. 촬영이 끝나자 숙소까지 따라와서 테레사의 일상,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습니다. 그때 테레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만 묻고 나를 고용하신 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묻지 않습니까?”. 기자는 당연히 테레사가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테레사의 진정한 관심은 그 일을 시킨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킨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시키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 일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테레사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죄는 무엇일까요? 죄는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명령도 규칙도 세상의 법도 다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왜 눅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을 탕자라 부릅니까? 밖에 나가 허랑방탕한 잘못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은 잘못 때문입니다. 돈이란 있다고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관계를 끊고 세상으로 나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맏아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그는 늘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에게 고분 고분하게 대했지만 아버지와 진정한 아들의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와 아버지와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면 큰 아들은 아버지와 잘못된 관계를 가졌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의 단절, 잘못된 관계,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무엇입니까? 교회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잃어버린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연과 사람, 모두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집트의 사하라 사막에 모래 바람이 불면 그 구름이 결국 필리핀에 비가 되어 내리는 것을 아십니까? 남극과 북극이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지구대기의 열을 식혀준다는 것도 아십니까? 히말라야의 만년설과 남미의 열대정글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서 지구에 무한한 산소를 공급한다는 것도 아십니까?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소위 초끈이론이라고 한답니다. “모든 물질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동하는 작은 끈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자연이 이렇다면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보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이 오래 살고 요양원에 있는 노인보다 가족과 함께 사는 노인이 오래삽니다. 배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의 비극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수백명의 목숨을 버리고 자기 혼자 살면 살아집니까? 아닙니다. 자기도 결국 죽습니다. 세월호의 교훈은 관계를 파괴하고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다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나 관계의 파괴는 언제나 죽음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능력의 원천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그 일을 합니다. 오늘 말씀 엡4: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같이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왜 성령님이 우리 모든 관계의 능력의 원천일까요? 성령님은 어머니의 영입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일은 자녀들을 하나되게 하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녀들이 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의 DNA를 받았습니다. 큰 아들에게 있는 DNA나 둘째 아들, 큰 딸 안에 있는 DNA가 모두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이정우 권사님이 금강산에서 북한에 있는 오빠를 만나고 왔습니다권사님의 오빠는 6.25때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끌려 갔습니다. 65년이 지나서 남쪽에서는 오빠가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을 끝내 못보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빠에게서 뜻밖에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은 지금은 북한에 살아 있는 데 남쪽에 누가 살아 있는지 알고 싶다고. 그래서 이번에 만났습니다. 오빠는 이미 북에서 결혼해서 6남매를 낳았고 손자까지 합치면 23명의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65년만에 만났고 헤어질 때 오빠는 17, 권사님은 13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85세 오빠과 80세 여동생은 서로 한 눈에 알아 보았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DNA가 오빠와 동생에게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형제입니다.

 

65년을 지나도 변치 않은 얼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보는 비결은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DNA,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그럴까요? 우리가 서로 얼굴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교파가 다르고 믿음의 색깔, 정치관, 사는 형편, 태어난 곳이 달라도 우리는 서로 하나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님의 DNA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영이신 성령님이 모든 믿는 우리 속에 동일한 생명의 DNA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해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입니다. 3절 다시 보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했습니다. 완료형입니다. 이미 하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 동일한 성령님이 우리안에 들어 오셨습니다. 딤후1:14,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 다른 성도안에 계신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이 여러분안에 계신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신교회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이 영락교회, 충현교회, 지구촌교회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장로교인안에 계신 성령님이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이 유럽, 미국, 아프리카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 5세기 성 어거스틴, 11세기, 성 버나드, 16세기, 마틴 루터, 19세기, 무디, 20세기, 주기철, 손양원목사안에 있던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남한교회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이 숨어서 목숨걸고 믿는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안에 계신 성령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안에 동일한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이 중요합니다. 다시 3절로 갑니다. 4: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미 성령으로 하나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힘써 지키라”. 하나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미 하나된 우리는 하나된 상태가 계속 유지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할 때는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풋내기 목회자였습니다. 그때 교회학교를 맡았었는 데 교회학교를 맡아 오신 부장 집사님이 제가 하는 일마다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불편해지고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의견이 너무 달라 툭하면 얼굴 붉히고 나중에는 얼굴 보기도 싫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불편한 사람일수록 자주 만난다는 것입니다.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꼭 외나무다리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분이 보이면 아예 멀리 돌아갑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만나면 무슨 일이 있는 척하며 급하게 계단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막히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 내가 앞으로 목회를 해야 하는데, 이런 일들을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나? 내가 먼저 찾아가자”. 그리고 어느날 지나가길레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그때 제가 한 것이 힘써 지키라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하나된 성도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손내밀면 이상하게 더 친해집니다. 문제는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못 다가간 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존심은 양쪽에 다 있습니다. 한쪽이 풀면 다른 쪽도 풀립니다.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 후로 그 부장집사님과 저는 더 친해졌습니다. 한번 멀어졌다가 다시 친해지면 더 친해집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한번은 제가 설교하는 데 어떤 교인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좁니다. 점점 심해지더니 아예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좁니다. 설교하는 데 보통 신경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졸려면 뒷 자리로 가든지. 아예 집에서 자고 오든지 하지 하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졸지?” 그런데 한 주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주를 그렇게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분의 아내되는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때 집사님이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얼마전 우리 남편이 병원에 갔더니 무슨 병이 생겼대요. 죽을 병은 아닌데 약을 먹어야 한다면서 약을 주었는 데 그 약만 먹으면 졸린대요. 주일날이 문제인데 제가 항상 뒷 자리에 앉자고 말하죠. 그때마다 남편은 졸더라도 앞 자리에 앉아야 한다면서 앞자리로 가네요. 정말 죄송해요. 예배에 방해를 줘서”. 그때 제가 너무 미안했습니다. 사정도 모르면서 정죄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 인간관계는 서로의 깊은 곳을 모르고 얼마나 오해하고 사는가? 조금만 눈을 떠서 서로의 상황을 보면, 조금만 귀를 열어 서로의 마음을 들어주면 해결될텐데 서로 이야기 안하고 서호 듣지 않아서 오해가 정죄로, 정죄가 미움으로 발전하는구나”. 다시 따라 할까요? “힘써 지키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은 개인적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같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의 남부 중심도시에 위치한 고린도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좋았던 것은 성령의 은사가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 방언, 예언, 병고침, 축귀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유명한 사랑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이 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이 유명한 사랑의 설교는 고린도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은사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전3장에 보면 네 파로 분열됩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님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망하고 성령의 은사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12:4,11,13,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다같이 한 성령”. 우리는 한 성령을 믿습니다. 어머니가 하나이듯 성령님도 하나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령의 은사로 놀랍게도 발전했습니다. 선교 100년만에 천만 신자에, 해외 선교사 2만명 파송, 세계 10대 교회가 한국에 있고, 수많은 기도원, 신학교들을 거느린 공룡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있었으나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안에서 의미있는 분열은 1953년 기장, 예장의 분열입니다. 그때 이유는 신학적인 것이었습니다. 기장은 진보적인 성경해석, 세계교회와의 형제애적 교류, 복음적 사회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예장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예장은 분열을 거듭하여 예장 간판을 단 교단만 200개가 넘습니다. 다 비슷 비슷한데 왜 분열합니까?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기득권 때문입니다. 성령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마음에 교파의식의 자도 없어야 합니다. 기장이니 예장이니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교회일치에 힘써야 합니다. 지역교회끼리 경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그리고 교회를 하나되게 합니다.

 

성령님은 민족을 하나되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은 개인이나 교회뿐이 아닙니다. 민족을 하나되게 합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역사에서 비슷한 것 하나가 있다면 두 민족이 다같이 분단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왕이 죽고 난 후 주전 922년부터 남북으로 분단되어 약 350년 만에 하나되었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하나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하나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 의해 오래 짓밟힌 이스라엘이 그 노역의 생활을 마쳐갈 무렵, 바벨론에 살았던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환상가운데 눈을 얼었더니 골짜기에 죽은 뼈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했더니 하나님이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들을 살립니까?” 했더니 6절에서 말씀합니다. 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살리는 방법은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생기였습니다. “생기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입김, 루아후, 하나님의 기운입니다. 이것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나라도 1945년부터 70년 가까이 분단되었지 않습니까? 지역적으로는 남과 북입니다. 그러나 더 큰 것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입니다. 이 사상이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을 분열시킨 것은 남과 북도 아니고 우리 민족 자체도 아닙니다. 사상이 우리를 분열시켰습니다. 한승헌 변호사가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한국사 입문>이라는 책한 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비에 젖어 책이 많이 바랬습니다. 출판사 사장이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창고에 비가 들어와 책이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깨끗한 책을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이때 한 변호사가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국 역사는 얼룩진 역사이니까요.” 비로 얼룩졌으면 차라리 나은데 사상에 얼룩져서 문제입니다. 북은 공산주의, 남은 자본주의, 이것들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온 것이 우리안에 들어와 우리를 분열시켰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의 뿌리를 따져 올라가면 성경과 만납니다. 자본주의는 살후3:10,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에서 나왔고, 공산주의는 행전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성경 전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면서 반대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또한 반대합니다. 성경은 어느 편도 아닙니다. 성경은 오로지 하나님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양자를 냉철하게 판단합니다. 성경은 공산주의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압제하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성경은 또한 자본주의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불쌍히 여깁니다. 분단시대의 사고는 대립적이며 양자택일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고는 통합적이며 화합적입니다. 그 통합의 한 복판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세 가지를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입니다. 자본주의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공산주의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평등입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아직도 실험안된 이념이 있습니다. 박애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성령님이 주관합니다. 성령님은 사랑입니다. 성령님은 두 막대기를 하나로 만듭니다. 남과 북의 두 막대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막대기, 자유와 평등의 막대기를 하나되게 만듭니다. “내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

 

지금 독일의 총리가 메르켈 총리입니다(사진). 이 분이 훌륭한 것은 알지만 이 분이 동독 목사의 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메르켈 독일 총리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1954년 그의 고향 서독 함부르크를 떠나 동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가 그곳으로 들어간 것은 자기 민족 독일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동독 공산당의 박해로 약 300만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할 때입니다. 카스너 목사는 이때 고향 함부르크에서 평안하게 목회할 것이냐 고난받은 동독 동포들와 함께 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과감하게 고향을 떠나 동독으로 갑니다. 남들이 다 자유를 찾아 동독을 탈출하는 데 카스너는 죽음을 찾아 동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80km 떨어진 템플린에서 목회를 시작합니다. 이때 메르켈 총리는 태어난지 6주밖에 되지 않는 핏덩이였습니다. 그 핏덩어리 딸을 안고 남들이 나 나오는 동독으로 들어간 카스너 목사, 그는 거기서 민족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동독 공산정권을 비판하면서 통일과 화해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공산정권의 요주의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고난과 수고에 힘입어 결국 독일을 통일되었고 그의 딸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며칠전에도 신문을 보니까 이 메르켈총리가 다시 한번 나찌 시대의 독일의 잘못을 고백하고 프랑스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화해는 용기를 수반한다”.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는 용기, 원수를 끌어안는 용기, 모든 용기가 성령의 능력에서 나옵니다. 메르켈 총리의 화해는 일생 공산당 치하에서 화해를 위해 산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아버지의 화해는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독일이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안에서 하나입니다. 교회안에서 교인과 교인은 성령안에서 하나입니다. 남과 북은 성령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한 우리는 하나입니다.

37:1-6, 4:1-6 2014. 6.23()

성령님, 우리는 하나입니다

5:24,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저 향기로운 꽃들을/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랑한 만큼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관계안에 삽니다.

2: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아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믿음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것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전도는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정우 권사님(사진)

 

딤후1:14,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4: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한국교회는 하나되어야 한다.

 

고전12:4,11,13,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은 민족을 하나되게 합니다.

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자본주의는 데살로니가후서 3:10,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에서 나왔고, 공산주의는 사도행전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에서 나왔다

 

메르켈 총리(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