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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롬9:1-5, 12:1-2 한신교회의 세가지 사명 2014.6.1(일)

9:1-5, 12:1-2 2014.6.1()

한신교회의 세 가지 사명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생겨난지 37년 된 창립주일입니다. 1977.6.4. 64일에 첫 주에 우리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해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교회가 생겨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당시 한참 공사중이던 강남 신반포 어린이 놀이터에서 고 이중표 목사님이 몇 명의 교인들과 함께 한신교회 창립을 선포했습니다(사진). 제가 자료를 뒤적거려 교회가 시작된 첫날 이중표 목사님이 쓰신 글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마운 분들입니다.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고마운 마음을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65일 주일 오후 3시입니다. 하늘도 푸르고 자연도 푸른 생기를 느끼는 이 때 한신교회가 푸른 꿈을 가지고 이제 막 출발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우리는 1차는 강남, 2차는 한국, 3차는 세계로 나아가는 푸른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신교회는 창립 예배를 어린이 놀이터에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부터 방에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신반포 12204호가 바로 우리가 드릴 예배 처소입니다. 교회 이름을 한신교회로 지은 것은 한국민족을 신자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한신교회에 나오셔서 천국열쇠를 받으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1977, 6, 4, 오후 3, 한신교회는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는 비전과 함께 푸른 꿈을 안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다가 1998, 분당에 민족성전 한신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민족성전은 하나의 개척교회가 아니라 강남에 있던 한신교회가 너무 좁아 민족을 신자화할 수 없어 민족을 하나로 묶는 통일시대의 교회로, 그리고 한신교회 선교비전의 센터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분당에 한신교회가 세워진 한복판에 나온 신앙고백이 별세신앙입니다. 별세신앙은 죽으면 산다는 성경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으면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38년 한신교회 전통은 크게 두 가지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 그리고 별세신앙”. 이 두 가지는 이 교회 창립자이며 한국교회 훌륭한 목회자였던 고 이중표 목사님으로부터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전통을 우리가 어떻게 계승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체험되고 선포된 이 신앙고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가 받은 교회 전승과 유산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 교회마다 전통이 있고 유산이 있지만 한신교회는 분명 이 땅의 많은 교회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특별한 교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는 과거를 단절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과거에 주신 은혜를 오늘에 받아 미래로 승화시키는 교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한신교회 교인됨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가 이 땅에 있는 많은 교회중의 하나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교회요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는 교회임을 믿습니까? 제가 일생을 통해 감사한 것은 제가 한신교회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신교회 교인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이 교회에서 세례받고 이 교회에서 임직받고 이 교회에서 봉사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제 이 자부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지탄을 받는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받고 존경받고 교회와 민족의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전통을 이해하고 계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받은 두 가지 위대한 신앙 전통, “한국민족 신자화별세신앙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적용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인, 민족을 변화시키는 교회, 세계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는 생명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1977년에 시작된 한신교회 비전은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였습니다. 이 비전속에 분명히 들어있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부터 왔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모든 생명이 귀하지만 특히 우리가 속한 한국민족의 생명이 귀합니다. 여기서 한국민족이라고 한 것은우리 민족만 사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지만 우리는 협소한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합니다. 이스라엘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 사상은 하나님이 주신 사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만들어 낸 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지만 이스라엘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서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니느웨의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추적하여 고래뱃속에서 까지 끄집어 내서 그를 니느웨로 보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 백성까지도 귀하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만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합니다. 우리 민족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에게 말한대로 내 백성을 내게 주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우리의 핏줄입니다. 오늘의 바울도 그랬습니다. 1-3절을 보시겠습니까?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바울은 그치지 않은 고통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에게 그치지 않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자기 동족이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로마서를 쓸 때 바울은 이미 1, 2, 3차 전도여행을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지금의 터키 내륙지역을 지나 터키의 서쪽 해안지역인 에배소, 서머나등에 소아시아 7개 교회를 세우고, 바다건너 지금의 그리스지역으로 가서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 로마의 감옥에서 지금 순교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생각해 보니까 정말 가슴 아픈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은 다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었는 데 오로지 자기 동족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속상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나마 자기는 지금 감옥에 갇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 전도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다른 민족은 예수믿고 구원받는 데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동족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감옥에서 탄식하며 외칩니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내 민족, 내 동포에게 달려가 그들을 구원할 사람 없습니까? 나는 가고 싶지만 감옥에 갇혀 있으니 못 갑니다. 누가 나 대신 생명을 구원하러 갈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나오십시요”.

 

이 마음이 우리 교회가 처음 출발할 때 가진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세 가지 구호를 정했습니다. “1차는 강남, 2차는 한국, 3차는 세계“,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생명에 대한 사랑과 전도를 단계별로 표시한 것입니다.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 이 속에 하나님 모르는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생명들에 대한 속상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민족은 남으로 북으로 분단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수백만이 부모, 형제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에 눌리고, 외세에 찟기고, 공산당에 학살당한 민족, 그나마 그 민족은 하나님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외친 외마다 소리가 이것입니다. “주여,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한국민족을 살려 주소서. 남이든 북이든 모두 하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입니다. 성경 창세기에서처럼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했을 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나이까?”라고 반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시대의 형제들을 구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형과 동생은 생명의 끈으로 연결된 형제들입니다. 형은 동생을 구원할 책임이 있고 동생은 형을 구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쉬나라는 유대 문헌이 말합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미쉬나, 산헤드린 4:5). 성경은 어떤 경우든지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거짓말이 허용되는 유일한 경우가 있습니다. 생명을 살릴 때입니다. 구약에 중요한 거짓말이 두 번 나옵니다. 모세 시대에 산파가 바로에게 거짓말 한 경우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남자가 태어날 때마다 숨깁니다. 뭐가 태어났냐고 물으면 남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짓말 한 산파들에게 노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하셨습니다. 1:20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왜 그렇습니까?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가치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으러 갔습니다. 삼상16장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사울이 왕으로 활동할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기름부으러 간다고 소문나면 하면 사무엘도 죽고 다윗도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너무 너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시킵니다. 삼상16:2절입니다.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하라”. 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거짓말하라고 가르친 귀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사무엘이 다윗에게 예배드리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에게 예배드리러 간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거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무엘을 살리고 다윗을 살리고자 함입니다.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짓을 조장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진실은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면 하나님은 네 가지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첫째 너는 세상에서 정직하게 일했는가?”. 둘째 너는 세상에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공부했는가?”. 셋째 너는 세상에서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가?”. 그리고 넷째 너는 세상에서 생명을 구원하기를 갈망했는가?”. 하나님의 최고 관심은 생명입니다. 주여, 생명을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 교회가 꿈꿨던 첫 번째 비전입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입니다.

두 번째 우리 교회가 가졌던 비전은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입니다.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 이 비전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화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 전도이지만 전도만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기 위해 교회는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증거하노니”.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을 가져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이며 누구와 함께 하는 고통입니까? 3절입니다.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형제와 골육 친척을 위한 고통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입니까?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정도의 고통입니다.

 

교회로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이 고통당할 때 교회도 함께 고통당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 문헌가운데 나오는 어려운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는 두 개고 몸은 하나로 태어난 아이는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몇 사람입니까? 머리가 둘이니 두 사람입니까? 몸이 하나이니 한 사람입니까? 그래서 지혜로운 왕인 솔로몬에게 가서 이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솔로몬이 이렇게 판결을 내렸답니다. “한 아이의 머리 위에 끓는 물을 붓고 다른 아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들어보라. 만일 다른 아이가 비명을 지른다면 두 아이가 아니라 한 아이다. 그러나 물을 부어도 다른 아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아이는 두 아이다”. 솔로몬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고통에 민감합니다. 가령 모로코에 사는 유대인이 무슨 일로 핍박받고 추방되었다 하면 뉴욕에 있는 유대인들이 같이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로코 유대인을 받겠다하고 미국에 오게 해서 함께 삽니다. ? 우리는 하나이니까. 너희에게 부어진 뜨거운 물이 우리도 아프게 하니까. 만일 아랍나라들이 이스라엘 땅에 집단으로 쳐들어 왔다.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네 나라가 일시에 쳐들어왔다. 실제 1967, 6일 전쟁이 그런 전쟁이었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전 세계에 사는 유대인들이 같이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서둘러 군대로 자원입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이니까. 머리는 둘이지만 몸은 하나이니까. 이것이 고통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도 마땅히 이 땅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이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였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북한 동포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평양이나 북한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금강산은 한 번 갔지만 늘 북한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것은 제 개인적인 사연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외삼촌 두 분이 6.25때 납북되었습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우리 외삼촌들은 일제시대에 동경제대를 나왔답니다. 그 어려운 공부를 하고 돌아왔는 데 해방이 되고 공산당이 들어오자 남북되어 지금까지 생사를 모릅니다. 해마다 6.25가 되면 어머니는 우시고 그것을 보고 자란 저는 북한에 사는 동포들이 다 우리 외삼촌같이만 여기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들과 북한 동포를 구분합니다. 북한 공산당은 우리 할머니, 큰 아버지,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 공산당은 미워합니다. “그러나 북한 동포가운데는 우리 외삼촌이 있다이렇게 생각하고 자랐기 때문에 북한 동포는 사랑합니다. 지금도 북한을 생각하면 눈물납니다. 성경은 눈물의 책입니다. 욥이 고통 가운데 울었습니다. 16:20, “내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에레미아가 조국의 멸망 때문에 울었습니다.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시편은 장마다 눈물로 가득합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예수님도 미국에 망할 조국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에루살렘아, 에루살렘아, 암탉 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같이 내가 제 자녀를 모르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경은 없으나 조국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민족과 조국의 고통에 참여해야 하며 함께 울어야 합니다.

 

조국에 대한 눈물은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눈물로 발전합니다. 1998, 8.,15은 우리 교회 역사상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2년 이상 계속된 건축이 완료되어 입당하는 날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8.15일에 입당했습니까? 8.15라는 민족의 해방절에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민족이 해방된 8.15에 다시 이 민족을 영적으로 해방시키겠다는 선교적 의지때문이었습니다. 그 첫 예배때 한 것이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3천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노동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또 지금처럼 그렇게 중요한 사회적 잇슈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온 나그네들을 환대하는 일이 교회의 일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청해서 위로하고 겨울 파카 한 벌씩을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구로동에 외국인 노동자 병원을 세웠습니다. 초대 원장에 우리 교회 이완주장로님이 수고하셨습니다. 장로님은 사재를 털어 병원을 건립하고 6년간 한푼도 받지 않고 무료로 봉사했습니다. 또 외국인노동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레위기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25: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교회는 교회의 큰 사명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남의 구제로 살아가는 빈곤자라도 남에게 자선해야 한다”. “자선은 성경의 모든 계명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다”. “만일 기도와 자선이 맞선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자선부터 하라”. 초대교회 집사 제도는 이러한 유대적 전통에서 가난한 자, 사회적 약야, 고아, 과부, 나그네를 구제하기 위해 생긴 제도입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말씀전할 때 집사들은 부지런히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습니다. 구제의 핵심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이 정신을 잘 나타난 이스라엘 격언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 그렇습니다. 우유보다 친절이요 물질보다 사랑입니다. 한신교회는 이 전통에 따라 그동안 교회안의 가난한 자를 돌보며 이웃을 섬기고 사회봉사에 힘써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선교입니다. 선교의 기본은 영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필요한 것을 주는 선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신교회는 그동안 국내외 선교에 힘써 왔습니다. 교회의 열매는 교회라고 믿고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웃의 육적, 영적 고통에 참여하는 교회적 방식입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받은 위대한 전통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별세신앙입니다. 별세신앙은 고 이중표 목사님의 고난에 찬 삶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담석증으로 3번 수술을 받은 목사님은 늘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죽었다가 나올 때 다시 사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순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느날 눅9:31절을 읽으며 별세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을 것을 예고한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별세를 통해 목사님은 성경을 보는 눈을 떳습니다. 성경은 모두 죽고 사는 원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로 다시 사는 삶은 성경적 복음의 진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아 세상을 구원한 것처럼 성도들도 작은 예수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은 입만 열면 별세를 말했습니다. “죽어야 산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장로가 죽어야 당회가 산다. 교회가 죽어야 민족이 산다”.

 

아마도 항상 죽어라. 죽어라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성도들은 따분해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돌아가신 지 10년도 못되는 이 때에 목사님의 별세가 한국교회 문제의 해답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대형교회에서 사고날 때마다 한국교회 권위와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적어도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만 알았어도 한국교회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구호를 가슴에 새기기만 했어도 이렇게 까지 한국교회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라는 바울 사도의 말을 가슴이 새기고 고민만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마다 터져나오는 문제들을 보십시오. 물질 문제, 돈 문제, 교회 재정이 개인 재정입니까? 툭하면 법정으로 가고 마음에 안든다고 따로 갈라섭니다. 같은 교회안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예배를 따로 드립니다. 도대체 누구에게 드리는 예배입니까? 논문을 부정하게 씁니다. 학위가 다 무엇입니까?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세습합니다. 교회가 기업입니까? 왜 이 모든 문제들이 생깁니까? 죽지 않아서 생깁니다.

 

고 이중표 목사님이 쓰신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돌아가신 사랑의 교회 옥한흠목사님이 썻습니다. 제목이 이렇습니다. “외로운 선지자 이중표 목사”. 그리고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중표 목사님을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보내신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별세신학을 외치는 고독한 선지자였다. 별세신학이 무엇인가? 무조건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는 곳에 사는 길이 열리고 죽는 자가 세상을 살린다는 것이다. 너나 할 것없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십자가 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목회자부터 먼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가 외로운 선지자인 이유가 무엇인가? 죽어야 산다는 설교, 그것은 현대교회에 너무 인기없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듣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는 진리라고 아무 거리낌없이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적인 메시지이고 예수님 자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제자훈련을 시킨다고 나를 평신도를 깨우는 목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중표 목사야 말로 한국교회를 깨우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고 믿는다. 한국교회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날이 곧 올 것이다“. 옥한흠 목사님이 정확하게 예언한대로 한국교회 추락과 침체의 모든 원인은 자기 죽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중표 목사님은 선지자였습니다.

 

이중표목사님은 별세를 외칠 뿐 아니라 별세적 삶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교인중 가장 많이 헌금했고 목회자중 가장 많이 일했고 자신의 몸을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갔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때 자신의 모든 옷을 한 벌만 남기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신 겨울,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 목회자에게 소포가 배달되었습니다. 주소가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로 쓰인 소포였습니다. 학생이 열어보았더니 편지와 함께 목사님이 입으신 스웨터와 점퍼가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하는 누구 누구에게,

늘 미안한 마음뿐이지.

에딘버러의 겨울은 무척 추울거야.

 

잠시 들렀을 때 체감이 겨울은 춥겠구나 했지.

내게 있는 겨울 잠바를 보내니 입어서 따뜻한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는 건강회복을 위하여 양수리에 입산하여 요양하고 있어.

참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어.

그러나 곧 좋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하고 있어.

좋은 겨울이 되기를 바래요.

주 안에서 평화를 빌며. 이중표

 

그리고 얼마후에 목사님은 할렐루야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자랑스런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입니다. 그냥 많이 모여서 예배하고 흩어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 죽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회, 내가 죽고 예수님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교회, 내 한 교회 부흥되면 되지 하고 안주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지런히 한국교회를 깨우는 교회, 저는 이 자랑스러운 유산을 예수영성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예수님의 방식대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예수영성대학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엇을 하든 원리는 같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살아 세상을 생명으로 살려내는 교회, 12:1절의 말씀대로 자기를 죽여 산 제물로 주의 제단에 드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교회, 거룩한 예수님 제자교회, 우리는 모두 거룩한 예수님 제자가 되고, 교회는 민족을 살리는 예수 제자교회가 되는 것, 이 자랑스러운 성경적 꿈을 꾸는 교회, 이 교회는 창립38년을 맞은 한신교회의 좌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9:1-5, 12:1-2 2014.6.1()

한신교회의 세 가지 사명

한신교회 창립(사진).

 

"여러분은 고마운 분들입니다.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고마운 마음을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65일 주일 오후 3시입니다. 하늘도 푸르고 자연도 푸른 생기를 느끼는 이 때 한신교회가 푸른 꿈을 가지고 이제 막 출발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우리는 1차는 강남, 2차는 한국, 3차는 세계로 나아가는 푸른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신교회는 창립 예배를 어린이 놀이터에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부터 방에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신반포 12204호가 바로 우리가 드릴 예배 처소입니다. 교회 이름을 한신교회로 지은 것은 한국민족을 신자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한신교회에 나오셔서 천국열쇠를 받으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는 생명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

 

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삼상16:2,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하라”.

 

천국에 가면 듣는 네 가지 질문

(1) “너는 세상에서 정직하게 일했는가?”.

(2) “너는 세상에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공부했는가?”.

(3) “너는 세상에서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가?”.

(4) 그리고 너는 세상에서 생명을 구원하기를 갈망했는가?”.

 

둘째로 우리 교회는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입니다.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증거하노니”.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16:20, “내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8.15일에 입당예배(사진)

 

25: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

 

남의 구제로 살아가는 빈곤자라도 남에게 자선해야 한다”.

자선은 성경의 모든 계명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다”.

만일 기도와 자선이 맞선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자선부터 하라”.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

 

옥한흠목사, “외로운 선지자 이중표 목사”.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중표 목사님을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보내신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별세신학을 외치는 고독한 선지자였다. 별세신학이 무엇인가? 무조건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는 곳에 사는 길이 열리고 죽는 자가 세상을 살린다는 것이다. 너나 할 것없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십자가 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목회자부터 먼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표 목사가 외로운 선지자인 이유가 무엇인가? 죽어야 산다는 설교, 그것은 현대교회에 너무 인기없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듣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는 진리라고 아무 거리낌없이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적인 메시지이고 예수님 자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제자훈련을 시킨다고 나를 평신도를 깨우는 목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중표 목사야 말로 한국교회를 깨우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고 믿는다. 한국교회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날이 곧 올 것이다“.

 

사람하는 누구 누구에게,

늘 미안한 마음뿐이지.

에딘버러의 겨울은 무척 추울거야.

 

잠시 들렀을 때 체감이 겨울은 춥겠구나 했지.

내게 있는 겨울 잠바를 보내니 입어서 따뜻한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는 건강회복을 위하여 양수리에 입산하여 요양하고 있어.

참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어.

그러나 곧 좋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하고 있어.

좋은 겨울이 되기를 바래요.

주 안에서 평화를 빌며.

이중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