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겔47:1-12 생명의 성령님 사랑합니다 2014. 6.8(일)

47:1-12 2014. 6.8()

생명의 성령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천년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며 이 땅에 교회가 생긴 것을 기념한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어머니가 가장 좋은 분이시듯이 성령님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분입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셨듯이 성령님도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명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요? 지난 월요일, 우리 교인중의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름은 김이옥권사님(사진), 정일남 협동 원로장로님의 부인이신 데, 4년전 오포로 이사를 오신 후, 우리 교회로 나오셨습니다. 제가 그때 심방을 갔었는 데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찬양을 좋아해서 매일 아침 일어나자 마자 찬송을 불러요. 하루에도 수 십곡을 불러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제 마음이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그렇게 찬양하며 살았던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가 장로님께 물었습니다. “혹시 권사님이 무슨 말씀 안하셨어요?” 그랬더니 권사님이 마지막 하신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보, 사랑해요. 감사해요”. 평생 몸이 약했던 권사님을 장로님은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늘 동행했습니다. 아플 때 손 잡아주고 힘들 때 위로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부름을 받자 권사님이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여보, 사랑해, 감사해요”. 몸이 아파 입도 못 열던 권사님이 그렇게 또박 또박 말하다니 장로님도 깜짝 놀랐답니다. 그때 제가 생각했습니다. “, 우리 부부도 그렇게 살아야 할텐데. 때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우리 남편에게, 우리 아내에게 여보,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해요그렇게 말해야 할텐데”. 그렇게 한 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생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일생이 짧은 데 그렇게 사랑하다 가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하나 하나가 귀합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만난 그 사람을 내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 날 그 날이 우리에게는 마지막입니다. 오래전 제가 시골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든 쯤 된 할머니 한 분이 비를 흠뻑 맞고 제가 서 있는 정류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없이 자라서 나이 많은 할머니들을 보면 다 정답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비가 많이 오는데 어디 가시는 거에요?”. 할머니의 손에는 무거운 보자기가 하나 들려 있었는 데 아마도 열무김치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 딸네집에 가요”. 그때 차가 왔고 할머니는 차를 탓습니다. “할머니, 잘 가세요.” 버스를 타고 가는 할머니를 보는 데 문득 제게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 저 할머니를 내가 다시 못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할머니가 얼마나 귀하든지 쫓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을 내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사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다시 못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 하나가 귀합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많고 가끔 다투고 가끔 마음에 안들지만 그를 내가 다시 볼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은 달라집니다. 그 생명이 그렇게 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최고의 일은 이 땅에 생명을 주신 일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생명은 모두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주신 거룩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8:2에서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생명의 성령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성령님은 생명을 가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뜻과 함께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성령님이 창조하고 유지하고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생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생명이란 단어가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세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비오스라는 생명입니다. 산과 들, 꽃과 나무같은 자연적 생명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프쉬케라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인간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인간이 가진 모든 생명입니다. , 마음, , 의지, 의식, 이것들이 인간이 가진 생명입니다. 마지막에 조에라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온 생명인데 이 생명은 영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생이 이 생명입니다. 우리는 결국 세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명과 인간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 이 생명중 하나라도 어느 없으면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생명은 같은 성령님에게서 나옵니다. 어머니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든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의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생명, 그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누리며 것이 성령안에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을 이 생명을 누리기 원합니까? 생명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세 가지 생명으로 평생 여러분안에 있기를 바랍니까?

먼저 성령님은 비오스’, 자연적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생명은 비오스’, 자연적 생명입니다. 1절을 보실까요? 47:1, "성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끝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오늘 말씀은 에스겔 시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성령의 생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가 성전 문지방에서 나왔습니다. 1,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문지방은 곧 성전 지성소입니다. 성전 지성소에서 생수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님이 곧 생수의 근원입니다. 17:13입니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크게 흙에 기록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성령님이 곧 생수의 근원입니다. 이 생수가 흘러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생명이 자연적 생명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기 시작한 생수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갯벌이 되다가 각정 나무와 열매들을 만들어 냅니다. 12절입니다.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여기에 나온 강, 바다, 물고기, 각종 과실 나무, , 그리고 열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성경은 비오스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영어 바이오, 바이올로지”, “생명, 생물학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사는 모든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선물임을 믿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1:1-2절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니라”, 그리고 2절입니다.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신이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독수리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공중에 떠서 새끼를 살피는 형상을 말합니다. 자연을 짓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독수리처럼 떠서 세상을 지키시는 성령님, 그것이 운행입니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자연을 하나님의 불꽃이라고 불렀습니다. 14세기 신비가 에카르트의 말입니다. 모든 자연속에 성령님의 불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성경이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고 새를 잡지 말라고 한지 아십니까? 자연은 하나님의 생명이 깃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0:19입니다. “너희가 어느 성읍을 오래동안 에워싸고 쳐서 취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곳의 나무를 작벌하지 말라. 나무를 찍지 말라.” 22:6입니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아마 여러분중에는 살아가면서 한번쯤 나무를 베거나 새집에 손을 넣어 새끼를 끄집어 내 본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오늘 회개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금하고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있습니다. 22:1-4절에 보면 길을 지나가가 소나 양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단순히 동물을 보호 차원이 아닙니다. 동물속에 하나님의 불꽃, 성령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냥이나 도살은 어떨까요? 안됩니다. 성경은 사냥한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경우는 그 동물이 사람을 공격해서 사람의 생명이 위태롭게 할 때입니다. 동물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는 데 총이나 활을 쏘아 동물을 죽이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동물을 도살할 수는 있으나 도살할 때도 반드시 동물의 생명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도살할 때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거나 오랜 시간을 들여 죽여서는 안됩니다. 동물을 도살할 때는 반드시 급소를 가격하여 한번에 죽이든지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고 신속한 방법으로 도살해야 합니다. 모든 자연을 다스릴 권한이 우리에게 있으나 모든 자연을 돌볼 책임도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210절은 힘에 차이가 있는 두 동물,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센 동물과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갈면 힘없는 동물이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동물학대는 아예 안되는 일입니다. 낚시도 사실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에 수많은 물고기가 있지만 낚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수의 허가받은 어부들만 그물로 고기를 잡습니다. 왜냐하면 낚시하면 물고기의 아가미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먹는 것이지만 그 동안에도 물고기의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게 잡기 위해 그물로만 잡습니다. 어떻습니까? 모피를 착용해도 될까요? 안됩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다른 방법도 많습니다. 40인치짜리 모피 코트 한 벌을 만들려면 얼마나 동물을 잡아야 할까요? 밍크는 60마리, 여우는 42마리, 너구리는 40마리를 죽여야 합니다. 자기 한 몸을 덮기 위해 이렇게 많은 동물을 죽이는 것은 생명의 성령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47: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강이 생명입니다. 나무가 생명입니다. 12절 마지막을 보세요.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모든 자연안에 치료효과가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첫 번째 성령의 생명입니다.

 

두 번째 성령의 생명은 프쉬케“, 인간의 생명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생수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기 전에 거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입니다. 처음에는 3. 발목을 적셨습니다. 두 번째는 4, 무릎을 적시고, 세 번째는 4, 허리 그리고 온 몸을 적셨습니다. 생수는 갈수록 많아졌고 생수가 많아질수록 사람의 몸은 생수에 잠겼습니다. 나중에는 생수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안에 생수가 있었습니다. 사람과 생수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옛날에 제가 어릴 때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기도할 때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주간동안 웬수같은 세상에서 썩어질 육신을 위해 살다가 손들고 왔사오니, 주여 불쌍히 주옵소서”.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몸이 썩어질 육신입니까? 여러분이 사는 세상이 웬수같은 세상입니까?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웬수같은 육신때문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이 그렇게 잘못되고 저주스러운 일입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그 성령의 생명으로 우리 몸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서 생기는 하나님의 신 곧 성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을 붛어 넣으셔서 우리가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프쉬케입니다. “프쉬케는 생명인 데 우리가 가진 몸의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만 흙으로 된 존재가 아닙니다. 원재료가 흙인 것은 맞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쉬케”, “하나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다만 썩어 없어질 육신이 아닙니다. 죄나 짓게 만드는 웬수같은 몸덩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깃든 집입니다. 겉은 흙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안은 성령이 계십니다. 질그룻에 보화를 가졌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프쉬케에서 사이크, 사이콜라지”, “마음, 심리학이 나왔습니다. 고전3:16의 위대한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집입니다. 우리 집이 흙으로 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집의 가치는 집을 지은 재료가 아니라 그 집속에 무엇이 있느냐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을 불러 넣으시니 프쉬케, 생령 곧 하나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 아닙니다. 평생 밥이나 먹고 살다 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집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 몸을 죄악시하고 학대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 몸을 지으셨으니 하나님의 창조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몸안에 있으니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귀하게 창조하시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성령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4세기의 교부 아다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들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의 몸은 마치 다리와 같습니다. 우리 외부의 세계를 내면의 세계로 연결하는 다리요, 인간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다리요 나를 나로 부터 남에게로 인도하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그 다리가 끊기면 우리 내면으로 못 들어가고, 하나님께로 못 올라가고, 세상으로 못 나아갑니다. 들어가고 올라가고 나아가게 하는 다리, 그 다리가 우리 몸입니다. 몸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하는 최고의 비결이 기도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 몸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 “깃털이 같은 새가 같이 모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우리가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건강의 관계는 요즘 크리스쳔 의학자들이 중요하게 연구하고 있는 주제중 하나입니다. 샌프란치스코의 한 의료팀이 그런 연구를 했습니다. 그 지역 병원에 입원한 393명의 심장 발작 환자를 임의로 선정하여 절반은 기도를 받게 하고 절반은 기도를 받지 않게 했습니다. 누가 기도를 받는지 누가 기도하는지 환자 자신도 모르고 의사 자신들도 모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를 받은 사람중 사망자가 눈에 띄게 줄고 약물을 사용해도 회복이 빠르고 생명 유지 장치를 달아야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기도를 받지 않은 사람중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연구도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질병에 대한 면역력과 사망률을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의 면역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약 25% 정도 높았고 사망률도 훨씬 낮았습니다. 듀크 대학의 종교, 영성과 건강 연구 센터를 이끌고 있는 심리학자 헤럴드 쾨니히 박사는 자신의 저서기도의 치유력The Healing Power of Prayer에서 이런 사례들을 수없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오래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도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부부 관계와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더 쉽게 이겨낸다. 기도하는 사람은 우울증을 쉽게 예방하며 그런 증상을 있다 하더라도 더 신속하게 회복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 기도하는 사람은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막아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의료 서비스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왜 이럴까?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우리와 교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입니다. 그 분이 우리 속에서 다스리면 우리는 건강합니다. 행복합니다. 평안합니다. 그래서 병도 안 생깁니다. 생겨도 쉽게 낫습니다. 우리 몸이 성령의 생명입니다.

 

세 번째 성령의 생명은 조에“, 영적인 생명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번째 생명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이 생명을 조에라고 하는 데 신약성경에만 135번 나옵니다. 그 중 35회가 요한복음에, 13회가 요한1서에 나옵니다. 요한이 쓴 성경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조에”, 영적 생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비오스”, 자연적 생명은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프쉬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프쉬케, 생명은 우리의 관리 여부에 따라 약화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프쉬케는 죄를 지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죄와 프쉬케는 상극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온전히 프쉬케 생명이 유지된 때는 에덴동산때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자 떠나기 시작하다가 노아시대 사람들이 죄를 짓자 아예 떠났습니다. 6:3, “여호아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면 이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보낸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일5:11-12절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안에 생명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프쉬케가 혼적 생명이라면 조에는 영적 생명입니다. 프쉬케가 우리가 태어날 때 받은 생명이라면 조에는 우리가 예수믿을 때 받는 생명입니다. 프쉬케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게 하는 현세적 생명이라면 조에는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살게 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말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소생입니다. 8, 47:8,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9, 47:9,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1, 47: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소성이란 다시 살린다는 말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살리는 성령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 프쉬케생명을 받으나 예수님 믿으면 조에”, 하늘의 생명을 받습니다. 요일5:13절이 그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조에”, 하나님의 생명은 믿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어야 옵니다. 믿으면 그 즉시로 우리안에 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하나님없는 나는 생명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손들고 하나님께 나아와 겸손히 하나님을 모시어 들였습니까? 그렇다면 5:24 말씀대로 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믿으면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 어떤 축복을 받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가지신 생명을 나눠 받게 됩니다. 그것이 조에입니다. 영적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적어도 세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요일5:14-20절입니다. 먼저 기도가 시작되고 기도가 응답받습니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자녀가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엄마, 아빠를 찾는 것입니다. 무엇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찾습니다. 우리안에 성령의 생명, 조에가 들어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입니다. 자녀는 당연히 엄마, 아빠를 찾듯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당연히 기도하고, 엄마, 아빠가 당연히 자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줍니다.

 

우리안에 성령의 생명이 임하면 우리는 죄를 이기게 됩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오랫동안 이 말씀 오해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믿기만 하면 일체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죄를 범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는다입니다. “못한다않는다는 다릅니다. “못하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말이고 안하는 것은 의지에 대한 말입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의지적으로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도록 우리안에 있는 하니님의 생명이 지켜줍니다.

 

우리안에 성령의 생명이 임하면 우리가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남이요 영생이시라”. 우리안에 성령의 생명이 임하면 죄는 멀어지고 하나님은 가까워지게 됩니다. 당연합니다. 유유상종입니다.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가 이런 시를 썻습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는 뜻은(마더 테레사)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는 뜻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돕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주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스물네 시간 그분께 매일 도달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낮추신 그 분 곁으로

매일 다가서는 것입니다.

 

47:8,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리라”. 생명의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이름다운 자연을 지으시고 그 자연을 살리는 영입니다. 우리 몸과 혼을 지으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영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믿어 우리 영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영입니다.

 

 

 

 

 

 

 

 

 

 

 

47:1-12 2014. 6.8()

생명의 성령님, 사랑합니다

김이옥권사님(사진),

 

여보, 사랑해요. 감사해요”.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세 가지 생명

(1) “비오스”(자연적 생명)

(2) “프쉬케”(인간적 생명)

(3) “조에” (영적인 생명)

 

성령님은 비오스’, 자연적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7:1, "성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끝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17:13,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크게 흙에 기록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자연은 하나님의 불꽃”(에카르트)

 

20:19, “너희가 어느 성읍을 오래동안 에워싸고 쳐서 취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곳의 나무를 작벌하지 말라. 나무를 찍지 말라.”

22:6,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47: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두 번째 성령의 생명은 프쉬케“, 인간의 생명입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아다나시우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들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기도의 치유력 (헤럴드 쾨니히 박사)

기도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부부 관계와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더 쉽게 이겨낸다. 기도하는 사람은 우울증을 쉽게 예방하며 그런 증상을 있다 하더라도 더 신속하게 회복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 기도하는 사람은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막아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의료 서비스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세 번째 성령의 생명은 조에“, 영적인 생명입니다.

6:3, “여호아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47:8,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47:9,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47: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안에 영적 생명이 있다면 (요일5:14-20)

(1) 기도가 시작된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2) 죄를 이긴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3)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남이요 영생이시라”.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는 뜻은(마더 테레사)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는 뜻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돕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주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스물네 시간 그분에게 매일 도달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낮추신 그 분 곁으로

매일 다가서는 것입니다.

 

47:8,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