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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엡3:14-19, 6:18-20 성령님, 더 기도하게 하소서 2014.6.29(일)

3:14-19, 6:18-20 2014.6.29()

성령님, 더 기도하게 하소서

오늘은 100일 기도 대행진을 마치는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만큼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주일날,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 데 핸드폰 소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주변을 기웃거리는 데 놀랍게도 핸드폰의 주인은 목사님이었습니다. 급하게 설교하러 올라오다가 호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안 끈 것입니다. 당황한 목사님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크게 소리쳤습니다. “, 하나님이세요? 지금 설교중이거든요. 예배끝나고 연락드릴께요”. 목사님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가 필요해서 지난 100일간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있는 데 기도가 없구나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323, 주일, 출정식으로 시작하여 오늘까지 100일을 기도했습니다. 교인들이 낸 주간 보고서를 보니까 이번 100일 기도에 참여한 교인은 모두 539명입니다. 539명의장년, 청년, 교회학교 어린이가 기도한 것입니다. 새벽기도, 중보기도, 릴레이 기도, 금식기도, 청년기도, 매주 여신도 기도회에는 약 100여명의 어머니가 참여했습니다. 매월 남신도 기도회는 130명 이상의 남신도가 참여했습니다(사진). 그래서 3만도를 목표했는 데 어제까지 총 49,244도를 기록했습니다. 100일동안 우리 교인들이 기도한 시간이 5만도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전도는 220명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3배 이상 전도했습니다. 처음 실시한 기도대행진에 참여하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이제 100일 기도를 마친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0일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이고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기도의 습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100일동안 목표를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제목을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직되었습니다. 몇 년동안 안 팔리던 집이 팔렸습니다. 오랫동안 친구를 전도했는데 기도응답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남편구원을 위해 기도했는데 남편이 기도대행진 기간동안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딸의 아토피가 나았습니다. 머리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무릎 관절이 나았습니다. 믿음의 배우자를 만났습니다. 믿음이 없던 남편이 세례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업에 부쩍 매출이 올랐습니다. 이 모든 간증은 100일 전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라 목표를 정해 놓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보고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은 응답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65:24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응답하고 우리가 말을 마치기 전에 들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습관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40, 100일 기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마음먹고 새벽기도에 참여할 수 있고 어쩌다 한번 굶는 셈치고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낙수물에 바위가 패인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이 항상 기도하라입니다. 오늘 말씀 18절을 보시겠습니까?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무시로 기도하고 항상 구하라”. 기도의 지속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성경 최고의 기도는 항상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항상 기도하면 낙심치 않습니다.

 

로마서입니다. 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4:2의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번 100일 기도의 최고의 축복은 기도 응답이 아니라 기도의 습관화입니다. 응답은 지금 못 받으면 다음에 받으면 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이 합니다. 아직 응답이 없다면 하나님이 다음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기도의 습관화입니다. 100일동안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체질로 바뀌게 했습니다. 빠른 기도 응답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체질화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큰 나무가 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 살이는 하루만에 자라고 들꽃은 1년만에 자라고 소나무는 6년만에 자라고 참나무는 60년만에 자랍니다. 이승엽같은 야구선수가 되려면 하루에 5천번 이상 배팅 연습을 해야 하고 최경주같은 골프선수가 되려면 하루에 10시간 이상 골프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의사 한 분은 그 분야의 최고의 의사인데 같은 수술을 1300번이상 했답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도의 이상중 최고의 이상이 살후5:17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겠습니까? 쉬지 않고 기도하면 밥은 언제 먹고 일은 언제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기도의 선배들은 이 셩경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썻습니다. 주후 4세기에 시리아를 중심으로 메살리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교회사에서는 이들을 메살리아파라고 부릅니다. 그 뜻도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받아 24시간 기도하는 일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24시간 기도하다 보니 일을 못합니다. 그래서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기도하면서 일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렇게 일해서 돈을 벌면 그 중 얼마를 문간 밖에 둡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받고 이들이 자는 동안 대신 기도합니다. 낮에는 기도하면서 일하고 잘 때는 다른 사람이 대신 기도하고,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살후5:17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5세기 이태리의 베네딕트에 이르러 정기적인 기도로 일상화되었습니다. 하루를 삼등분해서 8시간 일하고, 8시간 기도하고, 8시간 쉬고, 기도 시간도 하루에 7번씩 정형화되었습니다. 아침부터 그 다음 새벽까지 7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루에 8시간 기도하며 어떻게 하루에 7번 기도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아예 세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도는 영웅적인 기도가 아니라 생활화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과거 수도원 운동처럼 영웅적으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활속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가정에서 본 인상적으로 것이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유대인 가정에 있는 안식일 바구니입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모든 가족이 식탁에 앉습니다. 예배하고 식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구니에 그들의 모든 소지품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휴대전화, 지갑, 자동차 열쇠, 동전등입니다. 바구니에 그들이 내려놓은 것은 사실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동을 통해 고백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도하기 위해 일상속에서 무엇을 내려 놓습니까? “인터넷에는인터(inter:상호)’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얼마나 많이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습니까? 버스 정류소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세요.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보세요. 모두 핸드폰만 바라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배드릴 때도 나도 모르게 우리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기도를 위해서 내려 놓아야 합니다. 컴퓨터, 스마트폰 등 전자 제품 사용을 할 수 있으면 금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빼앗는 이메일, T.V 시청을 줄이고 컴퓨터 게임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주 혼자 있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에레미아애가 3:28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홀로 있는 것은 외로운 것도 소외받는 것도 아닙니다. 짐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기도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자주 홀로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침에 기도하는 것은 새벽기도하는 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참에 일어나 조용히 눈을 감으면 새벽기도입니다. 직장에서 잠시 쉴 때 생명의 양식을 보면 큐티하고 쉬는 시간에 잠시 옥상에 올라가 눈을 감으면 훌륭한 기도입니다.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성경을 펴고 큐티하거나 성경을 쓸 수 있습니다. 바쁘게 운전하다가 잠시 차를 멈추고 하늘거리는 가로수를 바라보면 아름다운 자연기도입니다. 공부하는 분들, 잠시 책을 덮어 넣고 책속에 니오는 주인공을 묵상하면 훌륭한 독서기도입니다. 매주 토요일, 가벼운 복장으로 집 근처를 산책하며 기도하면 산책기도가 됩니다. 좋은 공원은 설악산에 가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화랑공원 벤취에만 앉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평일에도 늦게 까지 밖에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하는 것이 기도를 위한 좋은 습관입니다. 평일날 저녁 10시 이전에 자고 특히 토요일 저녁에 주일을 위해 일찍 자는 것이 좋은 기도생활의 준비입니다. 기도의 시간과 공간에 제한이 없습니다.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침상은 침대입니다. 침대에서 기도못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이 계십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것이 생활기도입니다.

 

기도가 더 깊고 넓어져야 합니다.

100일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함을 배우게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로서의 기도와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문제를 우리는 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국교인들이 많이 하는 기도를 통성 기도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한자로 쓰면 通聲기도“. 이 말은 소리를 내서 하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는 다만 소리를 내는 기도가 아닙니다. 통성기도는 또한 痛聲기도입니다. 아플 , ”아파서 소리지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소리지르는 기도를 좋아합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위하여 사막에서 기도하고, 한나가 사무엘을 위하여 울면서 기도하고, 세리가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드린 기도가 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의 마지막 말처럼 우리는 모두 거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기복적인 기도는 하지 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단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그 기도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기도든 하나님을 수단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삼는 좋은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 엡314절 이하입니다. 3:14-17,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바울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님이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안에 예수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잠시 방문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슬쩍 엿보고 가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계십니다. 현재형이면서 진행형입니다. 지금 우리안에 계십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실까요? 우리와 교제하려고 계십니다. 미국의 한 총각이 한국 아가씨를 소개받았습니다. 둘은 첫 눈에 반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습니. ”당신은 누구입니까?“.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때 여자가 말했습니다. ”I am You". 남자가 뿅 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데 내가 당신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알고보니 여자의 성이 유씨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자기 이름이 유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사랑의 고백으로 받았습니다. “내가 당신이요할 때 , 이 여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구나“. 그래서 둘은 결혼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안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할 때 이런 의미로 말했습니다. “I am you". ”내가 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 내가 너고 내가 나도. 나와 너는 하나다“.

 

이것을 다른 말로 사귐의 기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남녀가 사귈 때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지속성입니다. 조금 만나다 말 생각으로 사귀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귄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상호성입니다. 둘이 사귈 때 서로 오고 가는 것입니다. 일방적이 아닙니다. 기쁨도 슬픔도, 책임도 의무도 함께 집니다. 목적성입니다. 사귄다고 하면 적어도 결혼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전제하지 않고 사귀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사귀면 기쁨이 생기고 사랑이 자라고 결과적으로 결혼이라는 열매가 생깁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과 끊임없이 사귐의 기도를 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15:11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이 생깁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기쁨은 오면 사랑이 자랍니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기쁨이 행복의 뿌리라면 사랑은 행복의 줄기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어떻습니까?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도가 깊어지기 원합니까? 깊은 기도가 큰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는 깊어지고 넓어져야 합니다. 넓은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과의 기도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기도는 넓어집니다. 지금까지 자기만 위해 기도하다가 남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다시 엡6장으로 가 볼까요? 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바울은 여기서 성령으로 기도하되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여러 성도, 특히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그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처녀가 매일같이 교회 나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남자가 필요합니다.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게 해 주세요”. 매일 같은 기도를 드리는 처녀를 보고 목사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이웃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세요”. 그러자 그날부터 처녀의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위한 기도는 이제 그치겠습니다. 다만 저희 엄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저희 엄마에게 좋은 사위를 주시옵소서”.

 

목회자의 일은 곧 교인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평생 중보기도를 해오면서 왜 우리에게 중보기도가 필요한지 어느날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우리의 생명과 그들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이라는 영성가가 말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불멸한 힘에 의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다. 그리하여 땅에서 한송이의 꽃이 꺾일 때 하늘의 어떤 별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우주가 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그의 삶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누나가 의식 불명의 동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서 동생을 살려낸 분이 있습니다. 누나의 중보기도를 통해 누나와 동생의 생명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기도하지 않았어도 누나의 기도로 동생이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교인중 안 믿는 시어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서 어머니를 교회로 모시고 나온 분이 계십니다. 믿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가 불교믿는 집으로 시집을 와 시어머니를 위해 안타깝게 몇 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아가, 교회가자하더랍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며느리의 생명이 어머니의 생명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기도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기도한 것처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신비입니다. 왜 한나가 기도할 때 사무엘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왜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십자가에서 강도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중보기도했습니까? 어머니의 생명이 아들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의 생명이 세상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100일 기도를 마친 후, 이웃과 다른 사람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겠습니까? 여러분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가족과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속으로 더 깊어지고 밖으로 더 넓어져야 합니다.

 

기도는 사역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100일 기도를 통해 받은 마지막 은혜는 기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흘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에배소서에서 바울은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해라”. “네 안에 주님이 계신다. 그 분과 사귀면서 계신 기도해라”.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되 특히 나를 위해 기도하라”. ? 19절입니다.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도는 먼저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나의 변화가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나의 변화를 통해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복을 비는 기도라는 시를 썻습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가까이 계셔/당신을 지켜 주시기를

당신 안에 계셔/당신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당신 둘레에 계셔/당신을 보호해주시기를

당신 앞에 계셔/당신을 인도해주시기를

당신 뒤에 계셔/당신을 변호해주시기를

당신 위에 계셔/당신을 축복해주시기를

 

그렇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인도해주고 축복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교와 사명이요 사역입니다. 그래서 저는 웨스 테일러가 쓴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통하여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속에서/그분의 생각을 펼치실 수 있도록

그대의 두 손을 통하여/그분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그대의 행동을 통하여/그분의 일을 계속하실 수 있도록

그대 가슴을 통하여/치유와 해방을 가져오실 수 있도록

그대의 돌봄을 통하여/그분의 사랑과 온유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그대의 기도를 통하여/그 분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그래서 이.. 바운즈는 그의 <기도의 능력>에서 기도는 우리를 통하여 흘러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이번에 몽골선교가 그것입니다. 선교는 기도와 상관없는 또 하나의 교회 일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수가 흐르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번에 우리가 갈 몽골은 어떤 나라입니까? 지금부터 800년 전, 몽골은 엄청난 내전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다섯 부족으로 나뉜 몽골은 언제 끝날지 모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목초지와 가축을 차지하려는 끊임없는 유목민족간의 투쟁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징기스칸이었습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내전을 종식 시킨 후 생각했습니다. “좀더 항구적인 평화의 길은 없는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다가 그가 깨달았습니다. “가난과 전쟁의 공포로부터 몽골인 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몽골 밖으로 나가는 수 밖에 없다. 안에서 아귀다툼할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때부터 징기스칸은 몽골인들을 데리고 하루 몇백 킬로씩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징기스칸의 땅을 밟으려면 최소한 징기스칸의 정신은 알아야 합니다. “밖으로 나가야 산다”. 선교는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징기스칸은 비슷합니다. 징기스칸도 밖으로 나갔고 선교도 밖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징기스칸은 망했고 예수님은 승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밖으로 나간 것은 비슷했는 데 징기스칸은 정복을 통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나갔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였느냐? 자기를 죽였느냐의 차이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이지만 자기를 죽은 사람은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살립니다. 일생 남을 다른 나라를 정복한 징기스칸의 나라로 일생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예수님의 제자들이 떠납니다. 무자비한 정복으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땅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죄없이 피흘린 예수님의 제자로 선교를 떠납니다. 기도는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예수님의 제자의 능력이요 무기입니다. 기도없이 밖으로 나가기만 하는 것은 징기스칸의 정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로 나아갑니다. 무릎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흘리는 통로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관문입니다.

 

 

 

 

 

 

 

 

 

 

 

 

 

 

3:14-19, 6:18-20 2014.6.29()

성령님, 더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회(사진).

 

먼저 기도의 습관화가 필요합니다.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4:2,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안식일 바구니

 

애가3:28,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기도가 더 깊고 넓어져야 합니다.

通聲기도=痛聲기도

3:14-17,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사귐의 기도의 특징

지속성

상호성

목적성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프랜시스 톰슨,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불멸한 힘에 의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다. 그리하여 땅에서 한송이의 꽃이 꺾일 때 하늘의 어떤 별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기도는 사역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가까이 계셔/당신을 지켜 주시기를

당신 안에 계셔/당신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당신 둘레에 계셔/당신을 보호해주시기를

당신 앞에 계셔/당신을 인도해주시기를

당신 뒤에 계셔/당신을 변호해주시기를

당신 위에 계셔/당신을 축복해주시기를

웨스 테일러,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속에서/그분의 생각을 펼치실 수 있도록

그대의 두 손을 통하여/그분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그대의 행동을 통하여/그분의 일을 계속하실 수 있도록

그대 가슴을 통하여/치유와 해방을 가져오실 수 있도록

그대의 돌봄을 통하여/그분의 사랑과 온유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그대의 기도를 통하여/그 분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 바운즈, “기도는 우리를 통하여 흘러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