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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22-32 2014.7.6(일) 얍복강의 행복

32:22-32 2014.7.6() 얍복강의 행복

7월 둘째 주일, 계절은 한 여름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선교를 위해 몽골에 갔었는 데 좋았던 것은 날씨였습니다. 우리 나라 10월을 연상케 하는 날씨였습니다. 하늘엔 구름 한 점없고 날씨는 서늘했습니다. 마침 비가 온 뒤여서 춥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아침부터 밤까지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땀 한 방울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 마자 날씨가 후덕지근 합니다.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더운 계절에 저는 여러분을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 얍복강입니다. 얍복강은 지금운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요르단에 있습니다. 작은 강이지만 이 강은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야곱에게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설정하게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행복하기 원합니까? 행복이 무엇입니까? 사전에 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행복은 기분 좋은 만족감이다”. 행복을 만족감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만족감이냐입니다. “꾸뻬씨의 행복여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책입니다. 그는 많은 정신과 환자들을 만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행복에 대한 중요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물질의 부요와 환경의 개선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결과물로 여기고 그것을 얻기 위해 목숨걸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사이에 조금 얻고 많은 것을 잃습니다. 건강을 잃거나 마음의 평안을 잃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습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행복을 얻었다 해도 그가 희생한 수고와 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곧 실망하고 후회합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목표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어떤 것을 기대하는 목표가 아니라 어떤 것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과적으로 얻는 것보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 순간이 행복의 더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결과와 관계없이 언제나 행복한 마음을 갖는다면 누구도 어디서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의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목표를 성공에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행복은 성공이었고 성공은 그의 삶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성공을위하여 그는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남들보다 높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목숨걸고 일하게 됩니다. 얼마나 성공을 위하여 야곱이 열심히 일했는지 창31:40에 잘 나타납니다. “내가 이와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릎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이 말씀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한 내용입니다. 야곱이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무더운 날씨에 열심히 일합니까? 열심히 일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야 하며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일해야 하며 그렇게 일해서 행복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공을 목표삼고 사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또 하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주 깨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오로지 성공하는 것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경쟁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와 경쟁합니다. 형이 장자로 있는 한 자기에게 돌아올 축복이 없다고 판단한 야곱은 매우 야비한 방법으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챕니다. 자기 성공을 위해서 눈 어둔 아버지를 속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0년 후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부모는 죽고 없었습니다. 20년동안 부모 얼굴 한번 못보고 일만 하는 것이 과연 성공입니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지고 몇 가지 축복을 받았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입니까?

 

야곱은 이런 질문을 할 겨를도 없이 눈코 뜰새 없이 일만 했습니다. 그 결과 20년이 지나 많은 재산과 가족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얻었는지 창32:14-15절을 볼까요?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대단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은 그가 형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선물이 이 정도니 그가 가진 것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행복했습니까?” 그의 많은 성공이 그에게 진정한 만족감을 주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우리는 우리가 우리 읽은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곱이 얍복강에서 발견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고향을 떠난 이후, 한번도 하나님 이야기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후 야곱은 밤에 도망을 쳤습니다. 야곱은 그래서 지금의 터키 남쪽에 있는 하란으로 도망을 합니다. 그때 그가 벧엘을 지나게 되었는 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사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야곱은 이 말씀을 듣고 하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하나님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창29, 30, 31, 네 장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쓰여진 성경에서 4장이나 하나님의 이름이 안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 사이, 야곱은 무엇을 했을까? 아마 일만 했을 것입니다. 아마 성공하기 위해 일하느라 하나님도 잊었을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을 위하여 14, 양떼를 위하여 6, 도합 20년동안 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 데 그때 얍복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얍복강에 이르자 밤이 되었고 어둠 때문에 야곱은 더 이상 진행할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야곱은 강건너에 에서가 군대와 함께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서는 억울하게 빼앗긴 장자권을 되찾으려고 20년이나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24절 첫마디를 볼까요?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참으로 오랜만에 홀로 있게 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일생 홀로 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와 함께 있었고 젊을 때는 일과 함께 있었고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식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얍복강에서 처음으로 홀로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얍복"이란 말이 재미있습니다. “얍복강"할 때 얍복은 히브리어 "야뽀크"에서 나왔는 데 이 말은 동사 "바카크"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비우다. 쏟다"라는 뜻입니다. 얍복강은 곧 비우는 강입니다. 왜 야곱에게 얍복강이 중요할까요? 야곱은 일생 한번도 자기를 비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채우기만 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면 성공이라고 믿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야곱을 얍복강앞에서 멈추게 하셨고 한번도 외로워 본적이 없는 야곱을 홀로 있게 하셨습니다.

 

호렙산을 아십니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호렙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물기가 없는”, “적막한”, “쓸쓸한”, “황량한이란 말입니다. 왕궁에서 풍부하게 살던 모세가 황량한 호렙산에서 자기 자신을 노출시켰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호렙산은 모세를 노출시켜 무장해제시킨 산이었습니다. 성경의 호렙산은 시내산에 있는 산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자기를 드러낸 자의 산입니다. 누구나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하나님앞에 홀로 서지 않으면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강이 얍복강이요, 지기를 드러내는 산이 호렙산입니다. 그릿 시냇가를 아십니까?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을 때 그릿 시냇가에 숨었습니다. “그릿이란 끊다. 단절시키다의 뜻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켜 하나님안에 쉄었던 시내가 그릿 시내였습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자주 자신을 고립시켰습니다. 고립에는 지리적인 고립이 있고 영적인 고립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고립시켰습니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셨고 자주 광야에서 빈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야곱이 가진 행복은 이런 행복이었습니다. 남보다 많이 소유하고 남보다 높아지는 것, 그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행복은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되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만나야 행복입니다. 세상은 많이 있어야 사랑받습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세상이 사랑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내가 아니라 내 소유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얍복강, 자신을 비워야 행복입니다. 호렙산, 신발 벗어야 행복입니다. 그릿, 세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행복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멈추고 비워서 하나님을 만날 때 시작됩니다.

 

이번 여름에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떠나 하나님께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한 격리가 필요합니다. 지리적인 격리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격리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불변의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우면 세상도 가까워 집니다. 세상과 멀어지면 하나님은 가까워 집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행복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나를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야곱의 행복은 얍복강에서 뜻밖에 자신이 누군지 알았을 때 커졌습니다. 밤이 어두워지자 갑자기 한 사람이 씨름을 걸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았는 데 알고보니 천사였습니다. 그가 씨름을 걸어오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야곱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32:28,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라. 이는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슴이라".

 

야곱은 한번도 자신이 누군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공을 위하여 부지런히 달려왔을 뿐입니다. 야곱은 한번도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이 누구냐고만 물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항상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사람들에 대하여 늘 불평하고 그들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그의 일생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늘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둘째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자라서는 자기보다 먼저 태어난 형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이 장자권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하란에 가서는 장인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일만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러분, 나의 행복과 불행이 남에게 달려 있습니까? 남의 잘못 캐내면 내가 행복합니까? 남에게 내 불행의 원인을 돌리면 내 불행이 사라집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때 야곱은 처음으로 자기가 누군가 생각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묻자 그는 갑자기 자기 이름이 야곱인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무슨 뜻입니까? “야곱은 히브리어 "야카브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입니다.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었습니다. ”발꿈치를 잡다는 이름대로 야곱은 남의 발꿈치만 잡고 다녔습니다. 이 말이 발전해서 "사깃군, 도둑놈"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속이는 자, 거짓말하는 자, 위선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처음으로 자기 이름앞에 섰습니다. 그 이름이 곧 자기 삶이었습니다. 평생 남의 이야기나 하고 남을 괴롭히고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가로채고 살아온 인생, 그것이 자기 인생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누가 여러분을 괴롭힌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보는 내가 나를 정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는 내가 정확합니다. 언제나 자기를 괴롭힌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꿈에서까지 따라왔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자기 앞을 지나 갑니다. 달려가서 그의 어깨를 툭 쳤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가 돌아섰는 데 그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썻습니다. “나를 평생 괴롭히던 적을 만나 보니 그는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렇습니다. 남에게 행복과 불행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안에서 내가 누군가를 알아야 행복합니다. 자기를 알아야 하는 시간에 남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신경쓰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만 신경쓰세요. 행복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데 우연히 이런 시가 제 앞에 다가왔습니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 하던 내일입니다.

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다우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부족한 사람에게는 부족함을/넘치는 사람에게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 신뢰하는 사람만이/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그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우리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지탱합니다.

 

평생 내가 누군가? 나는 하나님안에서 누군가? 이것이 신앙인이 질문할 질문입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한 일만 영원히 갑니다.

 

거룩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 이제 야곱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이 야곱이라고 고백하자 천사가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결국 야곱은 싸움에게 이겼고 이 싸움으로 그의 운명은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도대체 누구와 싸운 것입니까? 야곱은 한 마디로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성공의 목표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굼치를 잡고 싸웠습니다. 자라서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거짓이 탄로나서 하란으로 도망갔지만 하란에서는 외삼촌과 싸웁니다. 한마디로 야곱은 성공에 목매이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와 싸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과 싸워본 적은 더욱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금 얍복강에서 희안한 싸움을 싸우고 있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만 줄기차게 싸우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야곱이 먼저 싸움을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 싸움이 어떤 싸움입니까? 거룩을 위한 싸움입니다. 성공이 나를 위해 세상과 싸우는 싸움이라면 거룩은 하나님의 싸우는 싸움입니다. 관점이 너무 다릅니다. 야곱은 성공을 원했고 하나님은 성화를 원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꿈을 이루는 성공을 원했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을 원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성공에 대한 불굴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에 대한 분명한 목표와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성공은 했는 데 하나님과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성공하려며느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싸워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싸울 때 변화되었습니다. 28절입니다. 32:28,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요”.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이름을 바꿔주셨다는 것은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싸울 때 바라보는 대상을 바꿔주셨습니다. 30절입니다.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여기에 "브니엘"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이름은 야곱이 하나님 만났던 얍복강 주변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이 말은 얼굴이란 뜻의 "파님"이란 말과 하나님이란 뜻의 ""이란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야곱이 자신을 고백한 후에 브니엘”, face of God,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건인지 아십니까?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을 바라 보지 않고 사람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가끔 하나님을 바라보았는 데 그것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얼굴과 손은 다릅니다. 얼굴은 사람의 존재요 손은 삭람의 소유입니다. 얼굴은 하나님 자신이고 손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존재의 목표요 손은 삶의 수단입니다. 어른은 얼굴을 보고 아이들은 손을 봅니다.

 

얍복강의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하나님의 손마느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닮도록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닮습니다. 얍복강 사건은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더 이상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야곱이 홀로 하나님앞에 서서 자기가 야곱인 것을 드러내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다음 단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의 시작도 끝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이번에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몽골은 여러분이 아시다 싶이 징기스칸의 나라입니다. “징기스란 말은 바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 세계를 바다처럼 정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부터 800년 전에 전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나라였던 몽골이 지금은 세계에서 이름도 없는 작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3-40만원이라고 합니다. 세계를 정복한 나라가 지금은 인구 280만의 작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토는 우리 나라 16배라고 하지만 쓸모있는 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선교의 역사를 보면 몽골이 아주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징기스칸과 함깨 아주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베네치아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였습니다. 그가 1271년 고향을 떠나 동양으로 여행을 하다가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당시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여 원나라를 이룰 때였는데 그가 징기스칸의 후계자 쿠빌라이 밑에서 17년간 자문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쿠빌라이는 보니까 마르코 폴로가 참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고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을 나도 갖고 싶으니 고향을 돌아가거든 반드시 선교사들을 보내주세요”. 마르코 폴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떠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그가 그 약속을 잊었습니다. 몇 년 후에 그가 그것을 기억하고 부랴 부랴 선교사 두 명을 소수문했는 데 한명은 너무 멀어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몽골의 왕을 만났는 데 그 사이 원나라는 쿠빌라이는 죽고 그 아들이 왕위를 이었받았는 데 그가 아버지가 한 약속을 기억하지도 못했고 또 불교를 좋아했습니다. 그때부터 몽골은 티벳불교를 나라의 공식종교로 택했습니다. 만일 그때 몽골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면 중국과 함께 지금쯤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가까운 우리 나라의 역사도 변했을 것입니다.

 

몽골 사람들을 볼 때 마음도 순하고 얼굴도 우리 하고 닮아 정이 가는 데 그들이 이 아름다운 선교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그 땅에서 이번에 우리 선교팀 59명이 최선을 다해 선교했습니다. 특히 목회자 세미나는 생각하지 않은 은혜가 임했습니다(영상). 모두 열심히 말씀을 들었고 온 힘을 다해 찬양했고 기도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찬양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몽골 교인들이 많이 부른 찬양중에 이 찬양이 있었습니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 주시니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1-3).

 

이 찬양을 부르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은혜가 제 속에서 다시 꿈틀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그 이름이 가장 귀한 이름입니다”. “예수님, 그가 언제나 내 기도를 들으시고 처음과 나중 되시고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몽골교인들처럼 예수, 그 이름이 가장 귀하다고 고백합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는 사람입니까? 얍복강에서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거룩의 사람입니까? 성공입니까? 성화입니까? 행복입니까? 거룩입니까?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닮아는 가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긴 밤이 지나고 아침해가 돋자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난 야곱, 그에게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리는 절지만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요? 얍복강의 행복이 이번 여름의 행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2:22-32 2014.7.6() 얍복강의 행복

꾸뻬씨의 행복여행

 

행복에 대한 오해,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면 행복하리라

 

31:40, “내가 이와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릎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32:14-15,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얍복=야뽀크(바카크)=비우다. 쏟다

호렙=물기가 없는, 적막한, 쓸쓸한, 황량한

그릿=끊다. 단절시키다

 

하나님안에서 나를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32:28,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라. 이는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슴이라".

 

야곱=야카브=발꿈치를 잡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워 하던 내일입니다.

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다우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부족한 사람에게는 부족함을/넘치는 사람에게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 신뢰하는 사람만이/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그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우리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지탱합니다.

 

거룩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은 성공을 원했고 하나님은 성화를 원했다.

 

32:28,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요”.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브니엘=하나님의 얼굴(face of God)

 

찬양(영상).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1-3절 가사, 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