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on(1) 잠7:6-23, 27:12, 2014.8.10.(일)
방향이 목표지를 결정합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지난 3주, 휴식을 겸하여 미국 교회들을 돌아보는 목회자 연수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몇 주 있다 보면 남의 차만 타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렌트카를 탈 수 밖에 없습니다. 자동차 회사에 전화해서 미리 예약합니다. 그리고 예약한 날, 키를 받고 운전을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렌트카를 몰고 운전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저도 조금 긴장했습니다. 아무래도 운전방법이 우리와 다르고 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스탑 사인이 나오면 무조건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회전을 비보호로 가지만, 미국은 좌회전을 비보호로 갑니다. 그래서 좌쪽에 서 있다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사인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어느날 제가 다른 도시에서 친구 목사님을 만나기로 하고 렌트카를 몰고 나섰는 데 프리웨이입니다. 프리웨이는 우리로 하면 고속도로입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우리처럼 돈을 받거나 톨게이트가 없습니다. 처음 렌트카를 몰고 프리웨이를 탓는 데 내비게이션이 비싸 딸이 옆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내비게이션을 하는 데 그 이야기를 듣다가 제가 순간 헷갈렸습니다. 나가야 할 데로 나가지 않고 계속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엉뚱한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처음엔 길이 바뀐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잘못 들어선 것을 알면서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뒤에서 차가 따라오고 어느 길로 나가야 될지도 모릅니다. 별 수 없이 아무 출구로나 나갔습니다. 그리고 차를 세운 후 친구 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조금 늦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물었습니다. “거기가 어디야?”. 그때 제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내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 참 한심합니다. 그랬더니 친구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지도를 봐”. 그래서 지도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 있는지 살폈습니다.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았습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몇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운전하다가 다른 길로 들어선 적이 있습니까? 그 날 제가 그 일을 통해 배운 것은 길은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길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 있는 것이지만 목적지는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길도 갈 수 있지만 목적지는 반드시 정해진 길로 가야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자동차 사건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이켜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 엉뚱한 곳에 이른 적이 한번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하나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달렸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엉뚱한 곳에서 하나님이 저를 건져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된 후에도 방향을 잘못 잡아 목회의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게 열심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의도가 나빴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과 좋은 의도를 가져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똑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면 열심히 달릴수록 많을수록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옛날 교인중에 사업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려운 벤춰 회사를 만들어 고군분투했습니다. 한동안은 잘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그는 열심히 사업했고 그나마 성실하게 사업했습니다. 그런데 씀씀이가 너무 컷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길을 택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손이 커서 소비가 심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자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결혼주례를 하다 보면 여러 젊은이들을 만납니다. 한번은 어떤 자매가 와서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 들은 소문은 그 자매가 사귀는 남자가 있는 데 그 자매가 그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알아보았더니 이 남자가 돈이 많습니다. 결혼하는 이유 단 하나입니다. 지금 사귀는 남자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언제 졸업하고 돈을 벌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친지의 소개로 이 남자를 만났는 데 돈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한 것입니다. 제가 불러서 결혼을 연기하고 조금 더 기도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미 결혼식 날짜를 받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했고 양가 부모와 친지도 다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보다 결혼이 더 중요하지 않으냐” 했더니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별 수 없이 결혼주례를 했는 데 5년이 지난 후 소문이 들렸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하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쪽에서 더 이상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프리웨이를 탄 것입니다. 잘못된 방향은 반드시 잘못된 목적지로 인도합니다. 처음부터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성경에 이와 비슷한 상황은 없을까요? 제가 어느날 잠언을 읽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잠7장의 말씀입니다. 잠언 7장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집 창밖으로 목격한 한 남녀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6-7절입니다. 잠7:6-7,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 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지혜없는 자가 누구일까? 젊은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8-9절입니다. 잠7:8-9,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이 남자가 가는 방향은 기생의 집이었습니다.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 하나가 길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남자가 오자 달려가 껴안습니다. 13-15절로 갈까요? 잠7:13-15,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 남자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어둘 때, 황혼이 짙게 깔린 깊은 밤에 기생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한 여자가 그를 맞이했는 데 환영이 대단했습니다. 13절,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내가 너를 찾다가 너를 만났노라”. 오늘날 말로 바꿔 볼까요? “아이구, 사장님, 어서 오세요. 제가 얼마나 사장님을 기다렸는지 알아? 내 마음 알랑가 몰라”. 정말 죽입니다. 이쯤 하면 남자는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음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은 교인들을 위해 읽겠습니다. 16절부터 18절, 잠7:16, 18, “내 침상에서 요와 애굽의 무늬있는 이불을 폈고”. 잘 나갑니다. 18절,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드디어 일을 끝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상상이 가십니까?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아마 솔로몬의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솔로몬도 왕년에 쾌락을 좇는 데 한가닥 했던 사람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모르는 경험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훗날 정신을 차린 후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고백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14절에서 여인이 “화목제” 이야기를 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 여인이 과거 어 순간에 하나님을 잘 믿은 여인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지금은 하나님과 멀리 있지만 남자나 여자나 한때 성전에서 예배도 잘 드리고 기도도 잘드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남자와 여자는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다른 모습이고 곧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남자나 여자, 가는 길이 잘못되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어떻게 됩니까? 잘못된 목적지로 갑니다. 22절부터 볼까요? 잠7:22,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메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도수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도수장이 이 남자의 마지막 종착역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젊은이가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까요? 예상했을 수도 있고 예상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상했든 안했든 그가 그 길로 들어서자 그가 도착한 곳은 도수장이었습니다, 혹시 이 사람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변명할지모릅니다. “나는 대기업의 잘나가는 중진인데 평소에는 열심히 일하고 휴가 며칠 받아 몸 좀 쉬러 남자들만 가는 휴게텔에 잠시 간 것이 무슨 죄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전날 직원들 하고 회식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안마시술소로 갔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출발한 길의 마지막 도착지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이 같으면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긴 변명이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은 성경에서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출발했으면 잘못된 목적지에 도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한번 잘못 방향을 잡으면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까?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습니다. 그것이 잠27:12절입니다. 같이 읽을까요?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길을 걷습니다. 똑같이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재앙”을 만납니다. 여기서 “재앙”이란 잘못된 방향에 따른 잘못된 결과입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인생 길에 놓인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똑같이 재앙을 만났는 데 반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어떻게 합니까? 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피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떻게 합니까? 다시 12절,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계속 나갑니다. 피하지 않습니다. 재앙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재앙에 대한 반응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지혜로운 자에게 재앙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다가올 재앙을 예측하지 못했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재앙을 처음부터 예측했으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똑같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못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성경이 누구나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그나마 희망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인해 나타난 “재앙”은 누구에게도 오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입니다.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그 결과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선택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재앙을 피합니다. 그래서 삽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재앙을 보고도 그냥 지나칩니다. 그래서 망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누구나 잘못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잘못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혼여행 갔다 왔습니다. 나이 80까지 같은 마음으로 살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한신교회 등록했습니다. 나의 남은 생을 끝까지 한신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겠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장로로, 권사로 목자로 임직받았습니다. 하나님앞에 서는 날까지 충성스러운 종으로 거기 서 있겠습니까? 혹시 길을 잘못 들어 나중에라도 그것을 알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진리는 이것입니다. “방향이 목적지를 결정한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상황을 따르지 말고 원리를 따르라.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상황을 따르지 말고 원리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방향은 곧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즈의 마법사>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도로시란 여자가 글린다라는 마녀를 만납니다. 도로시는 잃어버린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때 글린다는 도로시에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법사 오즈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줍니다. 그런데 마법사 오즈를 만나려면 에메랄드 도시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도로시가 글린다에게 묻습니다. “에메랄드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때 글린다가 말합니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 그냥 따라가면 돼.“ 도로시가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자 에메랄드가 나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있을까요? ”노란 벽돌길을 따라 가. 그 길로 가면 하나님 만나“. 이런 길이 있을까요? 이것을 ”원리“라고 말합니다. 좋은 방향의 길은 항상 원리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다 보면 집이 나오듯이 믿음의 길도, 하나님께 이르는 길도 ”원리“가 있습니다. 환경을 따르는 길은 많습니다. 감정을 따르는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원리를 따라야 끝까지 좋은 목적지에 이릅니다. 미국의 격언에 ”돌아오지 않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내 뱉은 말, 둘째 쏜 화살, 셋째, 지나간 시간, 넷째, 무시해 버린 기회. 그리고 또 하나가 있을지 모릅니다. 잘못 들어선 고속도로. 한번 잘못 들어서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원리를 떠나면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어느 젊은이가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한 사람에게 물었답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바른 결정이지요”. “어떻게 바른 결정을 배우셨지요?” “경험을 통해서지요”. “어떻게 경험을 통해 배우셨습니까?” “잘못된 결정을 통해서요”. 그가 성공한 것은 잘못된 결정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배웁니다. 영국 속담처럼 길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잃어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을 잃다보면 길도 찾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그러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짧은 인생길에 조금 더 목적지에 빨리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원리”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원리는 길을 예측하게 합니다. 그 길로 안 가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처음부터 막아 줍니다.
아르키메데스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력의 원리가 작용하면 물체가 물 위에 뜬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는 물체는 물에 가라앉기도 하고 뜨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 원리의 발견으로 배가 발명되었습니다. 물위에 뜨는 원리는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그 원리를 적용하여 사람들이 배를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물위에 있으면 가라 앉지만 구명조끼를 입으면 뜹니다. 그래서 배에 부표가 필요하고 배의 평형수가 필요합니다. 죽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려면 원리를 알아야 압니다. 아르키메데스 원리를 다 몰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뜨는 원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명조끼를 입습니다. 만유인력의 원리는 뉴우톤이 발견했습니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땅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이 원리를 아는 사람은 사나 죽나 보려고 63층에서 뛰어내리지 않습니다. 뛰어내리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면 모를까. 그래서 비행기가 나온 것입니다.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예외를 따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폐암으로 죽습니다. 제 가 아는 한 분도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10대 때부터 줄곧 흡연을 했습니다. 담배피우지 말라고 부모가 말렸어도 끝까지 담대피웠습니다. 그러다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희 큰 할아버지는 일생 담배를 피웠지만 90세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원리와 예외가 함께 있습니다. “담배 많이 피우면 폐가 나빠진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90세 넘도록 건강했다. 이것은 예외입니다. 그렇다고 예외를 따르겠습니까? 아닙니다.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근검 절약하면 복받는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가끔 대충 사는 사람들중에 줄을 잘 서서 출세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외입니다. 그렇다고 대충 살겠습니까? 원리가 가끔 우리를 배반해도 우리는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 때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가끔 가정을 깨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외입니다. 그렇다고 가정을 깨고 살겠습니까? 원리가 항상 맞지 않지만 그러나 예측가능합니다. 예외는 가끔 있지만 예측 불가능합니다. 올바른 방향을 따르는 사람은 원리를 따릅니다. 예외를 따르지 않습니다.
나의 좋은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라
우리에게 좋은 것은 우리에게도 가끔 좋은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착한 양심도 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고 정의로운 생각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이기적이요, 자기 중심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주로 현실적이고 나를 위한 것이고 지금 보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주로 미래적이고 잘 보이지 않고 가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오래전 저는 미국에서 한국에 나가야 하나 미국에 남아야 하나를 놓고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여러모로 제가 미국에 남는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공부를 마치자마자 어느 작은 교회에서 목회해보겠느냐 질문이 들어 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6년씩이나 외국에서 살아 이제 언어도 익숙한 데 굳이 지금 한국에 다시 나가야 되겠느냐 하는 질문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미국에 남는 것은 누가 봐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한국으로 나가라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 본격적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한국으로 나가라. 너를 부르는 첫 번째 교회로 가라”. 그래서 순종해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작은 교회부터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막 사춘기에 들어간 자녀들을 달래면서 힘든 40대, 50대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서 옛날 저와 똑같은 고민을 하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도 저와 똑같은 상황에 있었는 데 그는 남고 저는 떠났습니다. 그때는 그의 결단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보니 그 결단을 그가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미국물을 먹어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목회도 어려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회는 제자리 걸음이었습니다. 그가 후회한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교회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때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지 못한 후회였습니다. 그때는 누가 봐도 미국에 남는 것은 좋아 보였지만 그 좋은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좋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면 그 생각은 반드시 하나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와 연결시킨다. 그때는 그 그림이 안 보이지만 5년, 10년, 20년이 지나면 반드시 그 그림이 보인다. 지금 하나님의 생각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미래에 동참하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퍼즐 조각이 보인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했구나“. 그때 드디어 큰 그림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생각을 따라 사업할 것인가? 우리의 좋은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면 우리의 사업은 하나님의 큰 계획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가르칩니다. 열심히 공부하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누구의 생각을 따라 살도록 할 것인가? 내 좋은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머지 않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 생각은 내가 이루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이 이룹니다. 내 생각은 지금 볼 때 좋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좋습니다. 내 생각은 왔다 갔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방향이 목표지를 결정합니다. 올바른 방향이 올바른 목표지로 안내합니다. 올바른 방향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한 원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방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나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방향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원리라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복종입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의 끝은 하나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걷고 달려 목표지에 도착하면 그 길 끝에 하나님이 서 계실 것입니다. 길의 끝에 서신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아십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것도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를 알고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어떻게 걸었습니까? 민9:18 한 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아의 명령에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아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여호아의 명령을 따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길은 길의 주인이 인도합니다, 길은 길을 아는 분이 안내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호아의 명령을 따라 진치고”, “여호아의 명령을 따라 머물고”, “따라 가고”, “따라 오고”, 모든 것이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백성을 위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예바하시는 일이요 백성들이 할 일은 아침 저녁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언은 솔로몬이 썻습니다. 오랜 세월,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하여 솔로몬은 잠언의 결론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에 “지도하시리라”가 가장 먼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도”는 가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 보다 먼저 나온 말은 “신뢰”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신뢰”한다는 말은 “몸을 기댄다”는 뜻입니다. 다음이 “의지”입니다. “의지”는 지팡이를 잡거나 보조기를 끼고 걷는 것입니다.
다음이 명철입니다. 명철은 우리의 지적 능력을 말합니다. 그것은 의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또 다시 “인정”이란 말이 나옵니다. “인정”이란 범사에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범사”에 했으니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마지막에 주어지는 약속이 “내가 네 길을 지도하리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방향이 목표를 결정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혹시 그렇지 않을 때 지혜로운 자처럼 지금이라도 프리웨이에서 내려 올바른 길로 바꾸겠습니까? 환경이나 감정을 따라 가지 않고 원리를 따라 가겠습니까? 자기의 생각이 좋아 보여도 늘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겠습니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여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길을 따라 가겠습니까? 방향이 목표지를 결정합니다. 8월이후, 우리의 삶이 더 하나님을 목표하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8월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붙잡기 바랍니다. 방향이 목표를 결정합니다. 우리 인생은 ㅈ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방향대로 될 것입니다.
Re-vison(1) 잠7:6-23, 27:12, 2014.8.10.(일)
방향이 목표에 도달하게 합니다
잠7:6-7,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 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잠7:8-9,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잠7:13-15,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짐7:13,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내가 너를 찾다가 너를 만났노라”.
잠7:16, 18, “내 침상에서 요와 애굽의 무늬있는 이불을 폈고”.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잠7:22,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메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잠27:12“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상황을 따르지 말고 원리를 따르라.
<오즈의 마법사>
나의 좋은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라
"우리가 우리의 좋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면 그 생각은 반드시 하나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민9: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아의 명령에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아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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